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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5 [벨져루이] 어쩌다 만난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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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7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4
- 2016.06.17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L3
- 2016.06.16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L2
글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생일 챙기는 것도 벌써 6년째 루이스 올해도 생일 축하해ㅠ0ㅠ)S2
* 이글->루이 요소 있음
* * *
1월 중순, 애인과 불타는 한 때를 보내고 돌아온 루이스는 업무로 복귀했다. 한 해의 첫 달답게 각 세력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검수하고 일 년의 계획을 짜는 것부터 새로 들어온 신입을 배치하는 것까지 할 일이 산더미였다. 연합에 능력자가 가장 많은 건 사실이지만 업무를 맡길 정도로 유능한데다 믿을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에 이때만 되면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선배. 여기 커피요.”
“고마워. 거기 두고 가.”
“아침에 드린 것도 안 드시구요?”
“아.... 미안. 바빠서 생각을 못 했네.”
“좀 적당히 하세요.”
루이스는 후배의 걱정스런 잔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답게 사람을 살뜰히 챙기는 토마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제 뒤꽁무니만 따라다니기 바빴는데, 이제는 한숨과 잔소리다.
“조금 서운한걸.”
“네?”
“아냐. 같이 나가자. 가는 길에 나 좀 도와줄래?”
아침부터 정리해서 쌓아둔 서류가 꽤 됐다. 반절을 덜어 토마스의 손에 들려주고 앤지의 사무실로 가는 내내 토마스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불규칙한 수면과 영양 부족, 과로, 피로 누적 같은 걱정엔 딱히 할 말도 없었기에 루이스는 알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차피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건 토마스도 알고, 앤지도 알고, 연합의 식구들도 다 안다.
그나마 공성 스케줄이 잡혀 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토마스의 푸념을 듣던 루이스는 앤지의 사무실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서류를 넘겨달란 눈짓에 토마스가 루이스가 든 서류 위로 그가 든 서류들을 쌓고 문을 열어주었다. 짧게 감사 인사를 한 루이스는 저와 별 다를 바 없이 서류에 둘러싸인 연합의 수장에게 다가갔다.
“여기. 신입들 서류. 제일 위에 있는 게 인력 배치 검수안이고, 카모라에선 아직도 소식이 없네.”
“고마워. 놓고 가.”
“앤지.”
루이스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상관이자 친구를 불렀다. 그제야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해 안쓰러웠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냥 넘어갈 순 없어. 그렇게 말하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앤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다들 한숨이 느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쟁 중이고, 거기에 안타리우스까지 더해 더 큰 위협이 되고 있으니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다른 마음을 먹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점조직 형태의 연합은 더더욱 내부 세력을 조율하고 관리하기 힘든데, 가장 큰 세력인 카모라 마피아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다른 조직이라고 협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될 게 뻔했다.
“토니는 북아일랜드에 가있어서 무리고, 다른 사람들은 감당 못해. 거기서 하자는 대로 하자고 하고 돌아올 걸.”
물 흐르듯 흐르는 프랑스어 대신 영어로 한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지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는 없다. 배치가 끝나고 발령을 받으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일은 그 전에 마무리해야 했다. 루이스의 태연한 태도에 앤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로서도 방관할 수 없는 문제다. 무슨 묘수가 떨어지길 바라는 듯한 눈빛에 루이스는 앤지의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갈 사람 하나 있잖아.”
“뭐?”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게, 그리 못할 말이라도 했나 싶었지만 이보다 나은 대안이 없었다. 루이스가 직접 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모를 리 없건만 앤지의 표정은 의문을 지우질 못했다.
“이번 생일은 조용하게 보내고 싶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허락을 안 할 눈치라 루이스는 솔직히 답했다. 속이거나 얼버무릴 생각이 없기도 했고, 앤지를 걱정시키는 건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 동갑이긴 하지만 첫만남이 그래서인지 늘 지켜야 하는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랑?”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루이스는 애매하게 웃었다. 앤지는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불만을 표시했지만 루이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없기도 하고, 기왕 굳은 일을 떠맡아야 한다면 보상이라도 확실한 게 좋다. 더구나 그 때쯤이면 상황도 정리될 테고, 그럼 한숨 돌릴 수 있으니 그리 무리한 요구도 아니었다.
“매번 가기 싫다고 울상이더니,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
내가 그랬나. 루이스는 지친 얼굴로 묻는 친구를 보다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된단 뜻이었는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앤지가 한숨과 함께 펜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럴 땐 또 영락없는 윗사람이다. 루이스는 앤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앤지는 어딘가 아련하고 애틋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마주 봤다. 손을 내밀자 맞잡아오는 손이 조금 차갑고 작았다.
“추운데 몸 좀 녹이고 오지 뭐.”
“조심해. 무슨 일 없어도 아침저녁으로 꼭 연락하고.”
“그럴게.”
걱정하는 그녀를 위해 루이스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 앤지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가라는 말로 루이스를 장난스레 쫓아냈고, 다음날 루이스는 나폴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대는 어둠 속에서 뼈가 굵은 조직의 보스였고, 나폴리는 카모라의 본거지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일주일이 될 터였다.
* * *
연합에서 공성이 끝난 뒤풀이로 술자리가 벌어지는 건 예사다. 워낙 술고래인 세 사람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글은 그런 연합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에 공성에 참여하지 않을 때도 뒤풀이엔 빠짐없이 참석했다. 호탕한 형씨들이랑 공금으로 공짜 술을 마시는데 그 술자리를 누가 마다하겠냐마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벌어진 술자리에서 마실 만큼 마시고, 주정뱅이 뒤처리는 나 몰라라 하고 내뺀 이글은 연합의 휴게실로 향했다. 가깝기도 하고, 집에 들어가 봤자 싸늘하게 식은 방이 기다리는데다 자칫 잘못했다간 검을 벼르고 있는 큰형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기껏 기분 좋게 마시고 흥을 깨는 건 사양이다. 푹 꺼진 소파가 조금 불편하긴 해도 따뜻한데다 건드리는 사람도 없으니 훨씬 편하다.
이글은 불이 꺼진 휴게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밀어 젖히려는 순간 안에서 당기는 힘에 몸이 끌려갔다. 그래도 명색이 홀든의 쾌검이다. 평생 몇 번 없는 일에 이글은 당황했고, 술이 들어간 몸이 기우뚱 넘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어둠속에서 이글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아씨, 깜짝이야! 여기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칙칙한 후드에 핏기가 없이 질린 얼굴이 어둠 속에서 나오는데 꼭 어릴 적 유모를 졸라 듣던 괴담의 사신 같아 이글은 되레 목청을 높였다. 루이스의 팔을 뿌리치고 제 발로 서자 얄밉도록 침착한 그가 휴게실의 전등 스위치를 켰다. 밝은 전등 아래서도 허여멀건 얼굴이나 얼음같이 차가운 무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막상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일이나 돌아오는 거 아니었어?”
“출장 다녀온 건 난데 왜 네가 시차적응을 못 해. 이미 날 지났어.”
“거 참, 되게 깐깐하네!”
“일주일이나 비웠으니까 그만큼 일도 쌓였을 것 같아서 바로 왔어. 갈 거니까 얼른 자. 주정부리지 말고.”
“주정은 누가 주정을 부렸다 그래?”
루이스는 그걸 모르냐는 눈빛으로 이글을 쳐다봤다. 자기야말로 당장 자야 될 것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서류 파일을 들고 있는 걸 보니 기가 찼다. 하여간 여기고 저기고 다 일 중독자들뿐이다. 이글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루이스가 의자에 걸려있던 담요를 던졌다.
“얌전히 잠이나 자. 간다.”
“야! 적당히 해!”
매정하게 돌아선 등에 대고 소리쳤지만 루이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복도에 들릴 듯 말 듯한 발소리가 멀어져가고, 이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쪽도 꼭 누구처럼 산통을 깨는데 일가견이 있긴 마찬가지였다.
* * *
부산을 떨어대는 소리에 일어난 이글은 소리의 근원을 찾고는 도로 누웠다. 토마스가 루이스의 생일이니 깜짝 파티를 해주자고 벼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아주. 제 작은 형이 누구인가. 분명 기회도 안 주고 보란 듯이 데려가서 주말이 다 가도록 독차지하고 안 내보낼 게 뻔하다. 토마스의 열의와 동경도 가상하지만 세상엔 그보다 더 큰 애정과 집착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이글은 괜히 기운 빼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했다가 쿠션과 담요를 빼앗기고 나서야 일어나 앉았다. 이 가여운 영혼에게 구구절절 설명을 해서 좌절하고 낙담하는 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보복이겠지만 남 좋은 일, 그것도 제 작은 형에게 좋은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이글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는 퍽 기특한 행동이었지만 맞장구 쳐주는 사이 루이스가 휴게실에 들어온 건 이글도 어쩔 수 없었다.
토마스는 계획이 틀어져 울상을 지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위로할 선배는 너무 지친 나머지 후배님까지 챙길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글은 루이스 대신 토마스의 뺨을 거칠게 토닥여 위로하고 하품을 하며 소파에 앉았다. 어제 마신 싸구려 위스키 때문인지 아니면 간밤에 추위가 몸을 덮쳐서인지 몸이 찌뿌듯했다.
“가서 맛있는 건 많이 먹었어?”
“거기서 셰프 코스 세 시간 먹느니 햄버거 세 개 먹는다.”
“크크크큭, 이래야 내 영웅님이지. 그래도 거기 가면 맛있는 거 먹고 극진히 대접 받잖아?”
“그게 바로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지.”
이글은 요기 라즈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떠올리고 킬킬거렸다. 이번에 루이스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카모라의 능력자 얘기가 파다했고, 덕분에 영웅님의 유일한 후배께서 바짝 날이 선 상태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발끈한 토마스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왜 이글 형이 뿌듯해하는 건데요?”
“어엉?”
“됐어. 토마스. 미안한데 파티는 너희끼리 해야겠다.”
어래, 그래도 아직 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 아닌가 보다. 이글은 어젯밤보다 더 헬쓱해진 얼굴로 토마스를 챙기는 루이스를 보며 그가 밤을 꼴딱 샜다는 것을 짐작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뜨지도 않았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서두를 이유는 또 무엇인가. 사실 답이야 뻔하다. 루이스의 대답이 제 신경을 거스를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이글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다. 원래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랬다.
“근데 왜 이렇게 서둘러?”
백 프로다. 이글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애정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과 어색하게 올라가는 입매를 보고 한 발 앞서 질색했다.
“빨리 하고 기다리는 사람한테 가야지.”
“네?”
“누구처럼 기다림에 보답할 자신이 없거든.”
토마스는 영 감을 못 잡고 루이스와 이글을 번갈아보며 설명해달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글은 팍 김이 샌 나머지, 루이스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하느라 답을 해주지 못했다. 이러니 좋아 죽지. 이글은 루이스가 없는 사이 내내 신경질을 부리던 제 작은 형을 떠올렸다가 이마를 짚었다. 숙취 때문인지, 이 답 없는 인간들 때문인지 몰라도 골이 때렸다.
“지독한 새끼....”
“뭐?”
“아무것도 아니야. 좋아하겠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 그럼 주말에라도...!”
“미안, 토마스. 나 일요일까지 휴가야. 이거 마친다고 어제 새벽에 도착해서 밤샜어. 약속도 있긴 하지만.... 이 김에 좀 쉬려고.”
그 인간이 퍽이나 쉬게 두겠다. 이글이 속으로 빈정거렸다. 아까는 실수로 모국어로 욕해버리고 말았지만 이번엔 다행히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글이 소파에 드러누워 다리를 꼬고 팔로 머리를 받친 사이 루이스가 풀이 죽은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번 달 내내 루이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 토마스는 더 매달리지 않았다. 저 착하고 가여운 녀석 같으니. 시무룩한 얼굴로 루이스의 서류 배달을 자청한 토마스가 휴게실에서 나가자 찬 물을 한 컵 쭉 들이켠 루이스가 이글의 옆에 앉아 하품을 했다.
“그 상태로 만날 수는 있겠어?”
“야우젠지 뭔지, 벨져가 예약을 잡아놨어. 시간 안에 안 가면 죽일지도 몰라.”
“어, 응.... 그래....”
너희가 세네시쯤 차 마시는 거랑 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간 벨져가 용돈을 끊을 것 같은 예감에 이글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몇 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 인간 속내 하나 모를까. 딱히 단 것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분명 이런저런 케이크를 잔뜩 늘어놓고 골라 먹게 해주고 싶은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받아야 할 축하도 받지 못하고 살았으니까. 이글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반쯤 졸고 있는 루이스를 보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래도 뭐,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승질 좀 부리다 말겠지.”
“하아. 그게 문제란 말이야.”
“...별일 없을걸? 작은 형도 좋아할 거고, 너도 뭐....”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에 왠지 양심이 찔려 말을 얹자 루이스가 등을 푹 수그리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사실 지금 걱정해야 되는 건 약속 시간에 늦는 것보다 그거 몇 분 안 늦겠다고 무리해서 초췌해진 얼굴과 말이 아닌 몸 상태 쪽이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그 격한 운동을 했다간 사람 하나 잡을 게 뻔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누군가. 일주일동안 벼르고 벼른 벨져 홀든이다. 딱히 친형제의 잠자리 사정에 관심을 가지고 싶지도 않고, 남의 연애에 끼는 것도 달갑진 않지만 걱정이 되는 나머지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나왔다.
“야, 사람이 때론.... 아니라고도 말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연합의 영웅이 남자 애인이랑 게이섹스하다가 복상사로 죽었단 기사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서.”
진지하게, 진심으로 걱정돼서 한 말이었는데, 루이스는 이글을 멀뚱히 보다가 픽 웃어버렸다. 같잖은 소리 말라는 반응에 이글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새겨들어! 진짜 훅간다니까??!!? 너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니까 괜찮아.”
“네가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나본데....”
“이글.”
답답한 나머지 일어난 이글을 올려다보는 루이스는 어느새 침착한 결정사의 얼굴과 목소리를 하곤 이글을 타일렀다.
“너도 알아보는데, 벨져가 지금 내 상태를 모를 것 같아?”
입을 다물자 도로 소파에 등을 기댄 루이스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하곤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피곤해 나른해진 눈매며 분위기가 어른스러워 제가 아는 루이스 같지가 않았다.
“괜찮아.”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할리 없다는 강한 믿음이 눈부시다. 이글은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너무도 쉽게 가져가버리는 형제를 떠올리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루이스는 눈을 얇게 휘며 웃고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토마스에게 했던 것처럼 이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럴 때만 연상인 티낸다?”
“네가 연상 대접을 안 하는 거겠지.”
“내가 그런 거 할 사람이야?”
괜히 심통이 나 투덜거려도 루이스는 웃을 뿐이었다. 누구는 좋겠네. 애인이 이렇게 믿어주고. 자존심상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이라 입만 삐죽이고 말았지만 영 속이 쓰렸다.
때마침 들어온 나이오비가 루이스를 찾고, 이글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주인 없는 생일상에서 술이나 퍼마셔야겠다고 벼르며 그를 보냈다. 야우제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고, 이글은 제 숙면을 방해하고 아침부터 염장을 지른 몹쓸 인간을 응징할 권리가 있었다.
전화기 앞에서 목을 가다듬은 이글은 다이얼을 돌렸다. 비록 선물이 아니라 생일빵일지라도 기쁘게 받아 주리라 믿으며, 사랑을 담아.
* * *
“그래서, 에프터눈 티랑 다를 게 뭐야?”
“단 거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네 거다. 전부.”
루이스는 예쁜 탁자 위에 끊임없이 나오는 케이크며 과자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메이드처럼 풍성한 프릴을 단 앞치마와 헤어 캡을 쓴 종업원들이 순식간에 테이블을 채우고 나니 그야말로 단내가 풀풀 풍겼다. 삼단 트레이에는 흔히들 곁들이는 샌드위치나 스콘 대신 단단해 보이는 케이크과 돔 형태의 무스케이크가 올라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했다.
“이걸 다 나 혼자서 먹으라고?”
“뭘 좋아할지 몰라서. 뭐, 한 입씩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게 무슨 소리야. 신종 괴롭힘이야? 난 불태울 로마가 없다고.”
“괴롭히는 것 같나? 아니면 찔리는 거라도 있는 건가? 듣자하니 그 쪽 애송이가 널 졸졸 따라다녔다는데.”
이번 출장 내내 카모라의 능력자 하나가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닌 건 맞다. 소문이 언제 벨져의 귀까지 들어갔는지 몰라도, 루이스는 그에 관해서라면 결백했다. 어디 결백하다 뿐이랴.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건 한 사람으로 충분하고, 자신을 동경하며 따라다니는 것도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열 살이나 어린놈한테 추파 받으니 좋았나? 오늘도 안 나타났으면 내가 직접...!”
어쩐지 오랜만에 봤는데도 반가운 얼굴이 아니더라니. 루이스는 삐진 애인을 어떻게 달래야하나 생각하다 퍼뜩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벨져가 하는 말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대체 평소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저렇게 쉽게 말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 뿌리는 분명 제가 잘 아는 바로 그것이다.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내가... 아니지, 새파랗게 어린놈이 날 따라다녀서?”
“질투는 누가...!”
“나 너랑 보내려고 연합에서 떠들썩하게 해주는 생일파티도 마다하고 어제 밤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밤새 일하다 왔어. 약속시간 맞추려고. 기특하지 않아?”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자 벨져가 시선을 피했다. 이해는 할지언정 마음이 영 내키지 않는 것쯤은 충분히 안다. 루이스는 손을 뻗어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는 벨져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 손 안에서 흠칫 떨렸다가 이내 엄지로 손등을 쓸어오는 벨져의 손을 꽉 잡고 눈을 마주했다.
“기분 풀어. 벨져 홀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겨우 기분이 풀렸는지 벨져가 의기양양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려 씩 웃고는 커피잔을 들었다. 따로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제 앞엔 티팟과 빈 찻잔이 놓여있었기에 루이스는 잔에 차를 따랐다. 벨져가 오늘의 다과회를 아주 단단히 벼르고 준비했다는 건 세 살 꼬마라도 알 것이다. 진하고 묵직한 찻잎의 향이 달디 단 케이크와는 잘 어울리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많다.
선물에 값어치를 따지는 것도 아니고, 벨져의 주머니 사정 상 이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입 밖에 내는 순간 분위기는 얼어붙고 또 싸우게 될 게 분명해서 참고 있지만, 테이블을 꽉 채운 케이크의 산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러니까 꼭 그거 같네.”
운을 떼자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던 벨져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속눈썹이 떨리며 올라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 루이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몸이 피곤하니 말이 헛나가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했다.
“왜 있잖아. 과자와 초콜릿으로 만든 집으로 유혹해서 잡아먹는 동화.”
“하, 그래도 사탕 하나로는 왔던 길을 다 표시할 수 없지 않나?”
“윽.”
찔리는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다. 전에 회사의 아이들이 찾아왔던 그 날. 어느새 거기까지 퍼진 건지.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의 반응이 즐거운지 미소를 머금고는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냈다.
“선물이다.”
“너한테 받는 건 안 내키는데.”
“앞으론 이걸로 용돈을 주도록.”
“아무리 그래도 내 형편에 안 맞거든?”
이것도 미리 준비했는지 빳빳한 100달러 지폐 열 장이 루이스 앞에 놓였다. 하여간 질긴 놈. 안 받으면 또 안 받는다고 짜증을 낼 것 같아 카드처럼 늘어선 지폐를 챙겼다.
“고맙다. 용돈 줘서.”
“천만에.”
정작 생일인 사람은 즐겁지가 않은데, 벨져는 지금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드는지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애인이 즐거워하는 걸 보는 건 좋지만, 어째 그게 저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자. 이것부터 먹어봐라.”
루이스가 착잡한 심경으로 가만히 차를 홀짝거리자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던 벨져가 포크를 집어 케이크의 끄트머리를 잘라 내밀었다. 루이스는 몸을 숙여 다가가 포크 끝의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입 안에 번지는 상큼한 민트와 레몬 향이 좋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는데 벨져의 표정이 이상했다.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제 행동을 되새기던 루이스는 주변의 시선에 한 번, 그리고 얼어붙은 벨져의 얼굴에 또 한 번 죽고 싶어졌다.
“...미안.”
화끈 달아오른 뺨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 손을 뺨에 대고 시선을 피했다. 뚫어져라 보는 시선 뒤에는 분명 테이블 매너를 지적할 것이다. 그만 무심코 해버린 일이라 따져도 할 말이 없었다.
“너.”
“.......”
“이리로.”
옆에 놓고 패려고 그러나. 망설이던 루이스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자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벨져가 턱을 살짝 치켜들곤 그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물론 옆에 앉을 수야 있지만 그 다음에 뭘 하려는 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루이스는 살짝 상기된 뺨에 뿌듯하고 흡족해 마지 않다는 시선을 보내는 벨져가 부담스러웠다. 갔다간 여기서 나가기 전까지 제 손으로 케이크 하나 못 먹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어서.”
어떻게든 안 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다정하게 재촉하는 벨져의 목소리와 그 눈빛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벨져 홀든이 벨져 홀든인 이상, 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사람인 이상 벗어날 수 없다. 루이스는 제가 판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크게 한숨을 쉬고 의자에서 일어나 벨져 옆에 앉았다.
* * *
두 시간에 걸친 티타임 끝에 벨져는 루이스를 옆자리에 태우고 직접 차를 몰았다. 기어이 모든 케이크를 한 입씩 떠먹인 뒤라 레몬수로 입을 헹궜음에도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기엔 시간이 이르고, 영화를 보기엔 사람이 많을 시간인데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하니 졸음이 밀려왔다.
잠깐 조는 사이 도착한 호텔 로비에서 루이스는 하품을 했다. 체크인을 마친 벨져가 손을 잡아 이끄는 것도 스위트룸으로 가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맞잡은 손이 따뜻해 놓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어떤 방해도 없이 단 둘이 주말을 보내게 될 것이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해가 지기도 전에 뻗을 정도는 아니다.
루이스는 제 상태를 가늠하며 문을 여는 벨져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키스하고, 자연스럽게 섹스로 이어질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벨져는 꽤 담백하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코트를 벗었다. 잡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는 허전함과, 예상외의 행동에 루이스는 벨져를 빤히 바라봤다.
“안 해?”
“졸려 죽으려는 주제에. 아까 먹은 케이크 종류가 몇 개인지는 기억나나?”
물론 기억할 리가 없다. 그런 걸 일일이 세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은데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고, 무엇보다 바로 옆에 즐거워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웃고 있는 벨져가 있는데 그깟 케이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시원하게 대답을 못하는 루이스를 향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벨져가 목에 맨 스카프를 풀었다. 섹스어필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과 행동에 루이스는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게 어려우면 호텔로 오는 길은.”
“음....”
“흥. 정신없이 졸았으니 기억날 리가 없지. 씻고 잠이나 자라.”
“그럼 너는?”
오랜만에, 그것도 특별한 날에 만난 애인이 이렇게까지 담백하게 나오는데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조심스럽게 묻자 재킷을 벗고 셔츠의 커프스까지 푼 벨져가 다가와 뺨을 잡고는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루이스를 담았다.
“옆에 있겠다.”
“화 안 내?”
“자고 일어나면 낼 거다.”
이제야 겨우, 제가 아는 벨져가 돌아온 것 같아 루이스는 슬며시 웃으며 뺨을 감싼 벨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차라리 싸우고 시비를 거는 게 낫지,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대하는 게 오히려 더 조바심이 난다. 따뜻하고, 배가 부른데다 안심이 되니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씻기 귀찮은데....”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벨져를 올려다봤다. 이상하게 벨져랑 있으면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지금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말도 그랬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부릴 리 없는 어리광.
“그럼 조금 기다려라. 욕조에 물부터 받을 테니.”
“씻겨준다고? 네가? 나를?”
“이미 여러 번 해봤다만.”
“뭐?”
“먼저 뻗어버린 널 누가 씻기고 입혀서 재웠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다른 사람한테 널 맡기기라도 할 것 같나?”
예쁜 입술을 타고 귀를 감아드는 목소리가 하는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벨져가 불쾌하단 티를 팍팍 내지만 않았어도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꿈이었음 좋겠다.
당황한 루이스가 황급히 기억을 더듬는 사이 푹 한숨을 내쉰 벨져가 소매를 걷었다. 욕실로 가려는 걸 직감한 루이스는 벨져의 손목을 잡았다. 이전에야 기절해서 그랬다 치더라도 의식이 있는데 몸을 맡기는 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 그냥 내가 씻을게.”
“...양치 꼭 하고.”
어째 애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지만 루이스는 내려다보는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지만 그래도 부끄럽다. 한 평생 하인을 부리며 누군가가 시중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산 사람이라서 더더욱.
루이스는 욕실에 들어가 문에 등을 기대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뺨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울렁였다. 그러니까, 아마. 이건 감동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 저를 씻긴 것도 모자라 친히 옷까지 입혀 재웠다니,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래도 좋다. 부끄럽고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바닥을 구르며 이불이라도 차고 싶지만 그럴 순 없기에 찬 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세면대 앞에 놓인 거울에 비친 얼굴이 붉어져서 원래대로 돌아올 줄 몰랐다. 참 꼴이 말이 아니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토하고 연거푸 찬물을 끼얹었다.
정신을 차리는 데는 냉수만한 게 없다. 얼굴에 이어 손, 발까지 피부가 얼얼할 정도로 씻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힌 루이스는 앞머리가 젖어있는 거울 속 자신을 보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넋이 나간 표정에 진하게 드리운 다크써클까지 더해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깨끗하게 씻고 나니 벽에 걸린 시계가 다섯 시를 가리켰다.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벨져가 고개를 들고는 턱 끝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연한 아이보리 색 파자마는 연한 광택이 흐르는 걸로 봐선 어째 실크 같다. 과연 준비성도 남다르지. 루이스는 군말 없이 옷을 갈아입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게 선물이야?”
“그럴 리가. 말만 해라.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
“믿음직스럽네.”
벨져는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빛나고 한껏 치장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사교회 파티장에나 어울릴 법한 인사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루이스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 위에 배를 깔고 누워 깃털을 가득 채운 베개를 끌어안고 있자니 다시 몽롱해졌다.
이쯤 되니 벨져가 옳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은 무슨, 눕자마자 이렇게 몸이 늘어진다. 하긴 출장 기간 내내 긴장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돌아와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으니 몸이 못 버티는 것도 당연하다. 노곤하게 밀려오는 잠에 취해 의식이 무겁게 가라앉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루이스는 입을 열었다.
“벨져....”
“뭐냐.”
“나, 너한테 진짜 받고 싶은 거 있는데....”
대답 대신 신문이 접히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발소리가 침대를 향했다.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는 손길에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올린 루이스는 옆에 앉은 벨져를 발견하고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안마 받고 싶어. 마사지 받으면서 자면 최고일 거야.”
“그런 거라면 살롱에 연락해서....”
루이스는 벨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바로 앉아 벨져의 손을 잡아끌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침대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에 벨져는 잠시 망설이다가 구두를 벗고 들어와 루이스의 눈가에 키스했다. 반쯤 뜬 루이스의 눈과 또렷한 벨져의 눈이 마주하고, 루이스의 눈매가 사르르 휘었다.
“너한테.”
“...이젠 하다하다 날 하인처럼 부리는군.”
“넌 나한테 맨날 그러잖아.”
“돌아누워라.”
어이가 없다는 듯 굴면서도 결국 져준다. 루이스는 웃으며 벨져의 목을 감싸 안고 입을 맞췄다. 입술로 입술을 물고, 비비다 떨어지는 가벼운 장난 같은 키스에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등허리를 받쳐 안았다. 짧은 뽀뽀를 끝으로 루이스를 눕힌 벨져가 루이스의 허리 위에 걸터앉아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냥 앉아도 상관없는데 체중이 느껴지지 않게 무릎으로 서있는 배려가 고맙고, 뭉친 근육을 풀며 주무르는 손끝에선 묻어나는 애정이 감격스럽다. 기분 좋게 몸을 만지는 손길에 정신이 점점 더 몽롱하고 흐릿해진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지 않았다. 몸을 겹치고 쾌감과 열락을 나누는 사이 제 몸의 성감을 파악하고, 어쩌면 주인인 자신보다 더 제 몸을 잘 알 수도 있는 벨져다. 마음만 먹으면 마사지가 애무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지만 벨져의 손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그 주인을 닮아 뼈대는 물론 손톱까지 예쁜 손은 섹스할 때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루이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경고하듯 말했다.
“딴 맘 먹지 마.”
“하,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군.”
피식피식, 멈출 줄 모르는 웃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자 벨져가 우뚝 척추를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 꿀꺽,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나고 벨져가 몸을 숙여 다가왔다. 그 푸른 눈에 담긴 열망과, 참아야 한다는 갈등이 보여 루이스는 먼저 손을 뻗었다. 벨져의 어깨를 잡고 살짝 몸을 일으켜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입을 맞췄다. 입술이 열리고, 혀가 넘나들며 숨과 타액이 섞이다 떨어졌다.
“대신.... 나 자고 일어나서 잔뜩 하자.”
“...기억 안 난다고 하지나 마라.”
“응. 근데 나, 오늘 안에 못 깰지도 모르니까.... 너 기다리기 지루하면....”
“쓸데없는 감상은 그만두고 눈을 감도록. 내가 지켜주겠다.”
미안함에 길어지려는 말을 자른 벨져가 머리와 귀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토닥였다. 다시 한 번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고, 루이스는 도로 누워 눈을 감았다. 걱정할 거리도 긴장할 것도 없이 잠드는 게 얼마만인가. 견갑골을 문지르고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 따뜻하고,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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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겨울만 되면 이런 게 보고 싶어지더라...
따뜻한 날씨. 내리쬐는 햇살. 먹구름도 자욱한 안개도 드리우지 않는 맑은 하늘.
평생 몇 번 보지 못한 하늘이 이곳에선 너무나 당연하게 펼쳐진다. 그 풍경이 마치 제 모습 같아 루이스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일상. 이런 환경에서 큰일이라고 해봤자 고양이가 잼단지를 깨트린 것 정도다.
지루하고 심심한, 평화롭기 그지없는 나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평화에 익숙해져도 되는 걸까.
“아직 날이 차다고 했을 텐데.”
“따뜻하니까 괜찮아.”
타박하듯 말하지만 어깨 위에 담요를 덮는 남자의 손은 더없이 다정하다. 보석보다 아름답고 바다보다 푸른 눈은 그의 손보다 더 다정한 걱정을 담고 있어 루이스는 사양하는 대신 담요를 끌어당겨 덮었다. 맞은편에 앉아 차를 따른 벨져가 혀를 찼다.
그새 식어버린 차는 정원의 흙 위에 가차 없이 버려졌다. 비싼 차지만 루이스는 아깝다는 말도 그만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벨져 홀든이고, 이 집의 주인이며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권리다. 그저 몸을 위탁한 신세니 그가 그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자격이라기 보단 염치가 없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겠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태연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으면 저 역시 벨져의 소유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인, 부서지고, 깨진 인형.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섬세한 손길로 고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저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루이스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벨져를 시야에서 밀어냈다. 숨을 쉬듯 생각이 맴돌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안 그런 척 상냥하고 섬세한 도련님은 모질고 무딘 말에 상처받을 것이 뻔했다.
“너 오기 전에 너 닮은 고양이랑 놀고 있었는데.”
“기를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라.”
“털도 부드럽고, 애교도 많아서 귀엽더라.”
벨져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을 하자 그 잘생긴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만 더하면 토라질 눈치라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벨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네가 더 예뻐.”
“당연하지.”
가늘게 뜬 눈은 그대로지만 앙 다문 입술은 만족스럽게 휘어진다. 턱을 살짝 치켜올리고 우쭐해하는 표정이야말로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뒀다. 찬바람에 몸이 차가워진 나머지 으슬으슬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일주일 전, 감기에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기침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루이스는 손으로 팔을 쓸었다. 바로 벨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일어나. 들어가지.”
“그래야겠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몸이 굳어서인지 일어나려는데 눈앞이 아찔하게 흐려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도 이젠 일상인데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머리를 감싸고 중심을 잃은 몸을 붙잡은 벨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
“어디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군.”
“내 발로 걸을 수 있으니까 안아들 생각 마.”
짐짓 엄한 척 목소리를 깔았지만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오만한 남자가 저를 업신여기며 재수 없게 굴 때면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루이스는 매번 벨져를 밀어냈다. 이 안온한 환경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된다. 익숙해지는 것은 잠깐이지만, 그랬다간 돌아갈 수 없게 될 터였다.
벨져가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일 테고. 루이스는 숨을 몰아쉬며 벨져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연합의 영웅이 있어야 할 곳은 전장이다. 자신의 가치를,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건 그 곳이고, 끝내는 것 역시 그곳이어야 한다. 아직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거운 걸음을 떼며 벨져에게서 떨어졌으나 벨져의 시선은 루이스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한 걸음 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가 있다. 벨져가 지켜보는 한 루이스는 무리를 해서라도 괜찮은 척 해야 했다.
“다리, 후들거리는 건 알고 있나?”
“괜찮아. 다리를 다친 건 아니거든.”
“그래. 대신 몸이 만신창이가 됐지.”
“부정하지 않을게. 그래도 괜찮아.”
“하, 퍽이나.”
짧은 조소를 끝으로, 벨져는 루이스의 몸을 안아들었다. 몸을 받쳐든 손과 팔은 조심스럽고,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부축한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거야?”
“그러다 또 한나절 걸려 들어가려고. 됐다. 사양하지. 네 몸이 못 버틸 거다.”
루이스는 더 말하는 대신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원치 않게 들려가는 신세에 기사의 품에 안긴 공주처럼 목에 팔을 감을 생각은 없다. 벨져는 숨 한 번 흐트러지는 일 없이 테라스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가장 볕이 잘 드는 따뜻한 방 침대 위에 루이스를 내려놓고 스물 네 시간 불을 꺼트리지 않는 벽난로에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벨져.”
부름에 망설임도 없이 돌아본다. 그를 올려다보며, 루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왜 그를 불러 세운 것인지 자신조차 모른다. 그저, 돌아서는 등이 눈에 밟혔다.
“아니야.”
“하아. 또 미련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만 두도록.”
“아니. 크루통 넣은 치킨 수프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준비시키겠다.”
딱히 뭘 먹고 싶은 건 아니지만 벨져의 관심을 돌리는데 이만한 게 없다. 자기가 먹는 것보다 제게 무언가를 먹이는 걸 더 좋아하는 벨져를 돌려보내려 한 말이 먹혀들어 벨져가 걸음을 옮겼다. 고작 몇 걸음, 문이 닫히기까지 몇 초인데 그만 벨져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 코가 간질거리며 재채기가 나왔다. 벨져가 돌아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앞으론 밖에 혼자 나가지 마라.”
“그냥 재채기가 나온 것뿐이야.”
성큼 다가온 벨져가 손을 들어 루이스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피부를 쓰다듬으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엄지로 훔쳐낸 벨져는 코를 훌쩍거리는 루이스를 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감기가 떨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아니라니까.”
“지켜보면 알겠지.”
루이스의 얼굴에서 손을 뗀 벨져는 혀를 차고 눈살을 찌푸린 채 방을 나갔다. 아마 돌아올 땐 따뜻한 수프와 생강과 레몬을 넣고 끓인 차를 가져올 것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누웠다. 몸이 차가워진 것은 사실이다. 고작 바람을 쐰 정도로 감기에 걸릴 정도로 몸이 약해진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와 살로 만든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벨져가 오려면 적어도 삼십 분은 걸릴 것이다. 딱히 무언갈 먹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벨져와 실랑이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여력도 없었기에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이라면 모를까 정말 잠들어버리면 벨져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꿈속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책을 읽고 움직였을 뿐인데도 피곤했다. 낮은 숨을 쉬고 있으면 천천히 몸이 무거워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을 일으키긴 커녕 눈꺼풀도 밀어 올릴 수 없다.
“루이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벨져의 작은 목소리 뒤에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한 번 나고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덮고 있는 이불이 목까지 끌어올려지고 따스한 손이 머리를 덮었다. 그의 손이 닿아서야 머리카락이 차갑다는 걸 깨닫고 만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의식이 점점 더 멀어지고, 고드름처럼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녹아 잠잠해졌다.
그새 잠든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벨져는 한숨과 함께 손을 멈췄다. 기침이 멎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몸이 약해지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라지만 마음 한 켠에선 그 명제를 부정하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거나 무술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결정 능력 하나 있다고 전방에 설 수 있을 리 없는데도. 특별히 생각할 것도 없다. 앤트워프에서 마주친 그 때부터 루이스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내였으니.
억지로 그 자신을 갉아먹으며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그 때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빠져나간다. 그 아련하고 서늘한 감촉에 벨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멈췄다.
참아보려 해도 한숨이 새어나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약해진 남자를 볼 때면 걷잡을 수 없이 의식하기도 전에 나오는 한숨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다. 루이스는 녹아내리기 시작한 빙산처럼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었고, 자신은 그를 돌보는 동안 그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견고한 마음에 금이 간다.
루이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가만히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다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 남자는 자신이 부서지며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끝내 참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 와서야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고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모든 것을 놓고 스러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이렇게 돌보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 두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것뿐이다. 벨져는 루이스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계속해서 불을 뗀 탓에 공기가 건조했고, 건조한 공기는 환자에게 좋지 않다. 기껏 나은 감기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벨져는 창문을 조금 열고 수건을 적셔 방 안 곳곳에 걸었다. 루이스가 이 방의 주인이 된 그 날부터 죽 벨져가 해온 일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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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Night and Day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그렇지요~
하루 종일, 카모라의 중역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방으로 돌아온 루이스는 제일 먼저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지만 아직 하루 일과가 끝나지 않아 잠들 수 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털썩 침대에 앉은 루이스는 서랍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선이 팽팽해지도록 당겼다.
호텔방에 들어오자마자 전화기가 있는지부터 확인한 건 다 이 시간을 위해서였다. 아슬아슬하게 침대까지 선이 닿는 전화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가고, 교환원이 연결해주기를 기다리길 얼마. 수화기 건너편에서 달칵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벨져 홀든이다.”
“나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은 잘 끝났고?”
“하루 해서 될 거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아직 한참이야. 너는? 잘 돼가?”
“뭐. 당장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피차 마찬가지네.”
루이스는 푹신한 베개 위에 등을 기대고 눕다시피 앉아 웃었다. 피곤하고 졸려서 목소리가 다 늘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오늘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기분전환이 될 만한 거 해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뭐, 행복한 거.”
“당장 떠오르는 건……. 글쎄 안 되겠군.”
“왜?”
“네가 없으니까.”
바로 나오는 대답에, 설레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 예쁜 자식. 평소에도 좀 이렇게 살가우면 얼마나 좋아.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수화기 선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다가 아플 정도로 당기는 볼을 꾹꾹 눌러 내렸다. 목을 가다듬고, 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 감동스럽긴 한데 유감이네. 다른 건? 차라던가, 음악이라던가.”
“그러는 넌?”
“나?”
“뭔가 하는 거라도 있나?”
“음……. 웃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알려주지.”
“약속하마.”
you have my words. 모든 것에 완벽한 벨져 홀든 경이지만 연애는, 그 중에서도 밀고 당기는 그 아슬아슬한 장난질에는 서툴다는 게 이럴 땐 티가 팍팍 난다. 루이스는 솔직한 답변에 작게 웃고 말을 이었다.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느릿하고 나긋했다.
“즉답이네. 좋아. 일단 물을 끓여. 주전자로 하나 정도? 그리고 대야에 부어서 온도를 맞춘 다음 발을 담그는 거야. 비누 거품으로 발장난도 좀 치고.”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나오는 대답은 하찮기 그지없다. 벨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침대 아래 나뒹구는 두 사람의 신발을 떠올리다가, 제 구두보다 한두 치수는 작은 운동화와 루이스의 맨발을 떠올리고 미소를 머금었다.
“소박하군.”
“그렇지, 뭐.”
“참고하겠다.”
“하하. 왠지 네가 그러는 건 상상이 안 가는데. 우아하게 와인 곁들여서 목욕이면 몰라도.”
“뭐, 그것도 피로를 푸는데 유용한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하지만?”
정말 졸린 지 목소리가 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늘어진다. 이러다 잠든 게 몇 번인지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졸린데 잊지 않고 꼬박꼬박 자기 전에 전화를 하는 애인이 귀여워, 벨져는 그리움을 담아 솔직하게 대답했다. 같이 있으면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속마음이었다.
“역시, 네가 있는 쪽이 훨씬 좋다.”
“그거 좀 쑥스럽네.”
말하지 않아도 목소리에 감정이 다 묻어난다. 벨져는 루이스의 붉어진 얼굴을 어렵지 않게 그리다, 그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꾹 눌러 내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분명 그러고 있을 것이다. 루이스는 부끄러울 때면 눈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입을 열곤 했다.
사귀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전부, 눈에 선하다. 어지간히 감동했는지 더 말을 잇지 못하는 루이스 대신 벨져가 선수를 쳤다.
“금방 마치고 갈 테니 쓸데없는 일 벌리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일을 다 비워. 언제 오는데.”
“최대한 빨리 마치겠다.”
“당장 내일이라도 날아올 기세네. 알았어.”
“그래. 얼른 자라.”
보고 싶어. 사랑해. 그런 말을 하는 걸 꺼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면 정말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달려가고 싶어질 것 같아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 해봐야 느는 법이라 했던가. 오래도록 연애를 해본 사람답게 루이스는 그런 말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벨져는 주로 망설이다가 루이스의 간지러운 말과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선수를 뺏기고 그래. 하고 답을 돌려주기 일쑤였다.
“응. 너도. 끊는다. 참, 벨져.”
“또 뭐냐.”
“그냥, 보고 싶어서. 기다릴게. 잘 자.”
그래. 바로 이렇게. 예상을 하고 있어도 막상 이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 벨져는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에 목을 가다듬으며 다리를 꼬았다.
“잘 자라.”
“응. 나 또 횡설수설 하다가 잠들 것 같으니까, 그냥 먼저 끊어.”
귀엽기는. 이미 횡설수설하고 있으면서, 목소리에 잔뜩 묻어나는 졸음에 벨져는 피식 웃으며 모국어로 밤인사를 했다. 어설픈 독일어로 답을 돌려주는 그가 졸린 눈을 비비고 있을 것만 같아, 내내 골머리를 앓으며 힘을 주고 있던 몸에 긴장이 풀어졌다.
이래서 연애를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얼른 끝내고 그에게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아쉬움에 쉽사리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으니 쪽, 하고 건너편에서 루이스가 키스를 보내왔다. 소리뿐이지만 그 하나에 없던 의욕이 생기고 만다. 벨져는 잠시 망설이다 똑같이 수화기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사랑한다.”
“으웩. 작은 형, 닭살!”
나도. 라는 달콤한 대답이 돌아와야 하는데,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둥실거리던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 벨져는 애인의 목소리 대신 찾아온 불청객의 목소리에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인상을 팍 썼다.
“왜 네가 받는 거냐, 이글.”
“그야 당연히, 같은 방을 쓰니까 그렇지. 으으, 닭살. 우리 영웅님은 주무십니다. 저는 막 씻구 나왔구요, 내일도 오전부터 회의해야 하니까 끊는다.”
“잠깐. 같은 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엉? 아, 진짜.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침대 두 개! 일하러 온 거야, 일!”
억울한 듯 목청을 키우는 녀석 때문에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떨어트려 놓았던 벨져는 미간을 찌푸리며 방금 잠든 사람 옆에서 큰소리를 내는 동생을 타박했다.
“목소리를 낮춰라. 이글.”
“와, 대박. 형 지금 질투해? 왜, 내가 막 영웅님 침대에 들어갈까봐?”
“이글.”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으어. 졸려. 우리 배 타고 기차 타고 왔어. 한 판 뜨래도 피곤해서 못 해. 나폴리까지 얼마나 걸렸는 줄 알아? 끊어.”
피곤하지만 않으면 언제든 침대로 파고들어 '한 판 뜨겠다'는 걸로 들리는 말에 벨져는 짜증을 억눌렀다. 루이스가 뻔히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여지를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글은 저를 놀리겠다는 그 하나만으로 얼마든지 못된 짓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었고,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지길 바랐다.
“어이구, 무서워라. 걱정 마. 안 해. 내일 아침에 냉동사체로 발견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신경 끄셔! 흐아암. 아, 누가 추근덕거리면 그건 알려주지. 동생 좋다는 게 뭐야~.”
“이글.”
“고마우면 용돈 좀 찔러줘. 작은형 애인 깨기 전에 끊는다. 뿅~.”
유치한 인사를 끝으로 달칵 전화가 끊겼다. 좋았던 기분에 찬 물을 쫙 끼얹은 녀석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을.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색색 곤히 자는 얼굴이 떠올라 입가를 매만지다가, 졸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간질거리는 말을 하던 그를 떠올렸다.
기다린다고 했으니 한 시라도 빨리 마쳐야 한다. 루이스의 일은 사나흘은 족히 걸릴 테고, 그럼 영국으로 가는 길에 이탈리아에 못 들를 것도 없다. 이글 녀석을 빨리 쫓아내고 나폴리의 해변을 걸으며 지중해의 여유와 풍경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데이트 할 계획을 세운 벨져는 다시 펜을 들었다. 해변이 보이는 호텔이나 별장에서 애인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려면 뭐가 됐든 빨리 끝내야 했다.
* * *
애인이 바쁘다. 일찍 오래서 일찍 와서, 하루 종일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해가 뜨고 나서야 집에 들어온 애인은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쓰러지듯이 고꾸라지는 애인을 받아 안자 눈밑에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서 입술에도 핏기가 없다. 예정대로라면 어제 저녁에 나폴리에서 돌아왔어야 하는 사람이 이 지경이 된 이유야 뻔하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벨져.... 나 진짜, 지금 안 자면 죽어....”
아무렴 연합에 무능하고 한심한 머저리들만 모여 있다고 해도 그렇지, 출장을 다녀온 사람을 또 부려먹을 정도로 손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굳이 나서서 일을 도맡을 이유가 있는가. 벨져는 멍청하고 미련한 애인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이마를 짚고 끓어오르는 화를 삭혔다.
자신보다 일을, 그 잘난 연합을 우선시하는 사람에게 화가 났다. 이럴 거면 일찍 오라고 조르지를 말던가. 누구는 일 분 일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잠도 안 자고 기다렸는데 그동안 이 사내는 안 해도 될 일까지 하고, 이 꼴이 되어 돌아왔다.
벨져는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졸고 있는 루이스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루이스가 대번에 짜증을 내며 인상을 쓰는데, 밤새 기다린 것도 억울한 데다 저만 그를 기다린 것 같아 자존심이 확 상했다.
“손 치워.”
“하, 내가 네 애인인데! 일주일만에 만나서 엉덩이도 못 만지나?”
무심결에 큰 소리가 나왔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성질을 못 이기고 결국 화를 내고 만 벨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붉은 눈으로부터 시선을 피해버렸다. 망할 애인은 연합의 영웅님이셔서 할 일이 다망하고, 연애도 오래 해서 늘 저만 연연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차라리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목소리를 듣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사려 깊은 그가 정작 애인인 자신을 뒷전에 두는 게 벨져는 퍽 서운했다. 저만 신경을 쓰는 것 같아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죽죽 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푸른 루이스가 마른세수를 하고 푹 한숨을 쉬었다. 지금 한숨을 쉬어야 할 게 누군데.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도로 벨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안겨들었다.
“벨져....”
짜증을 안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벨져 홀든은 어딘가에 얽매일 사람도 아니고, 눈치를 볼 사람도 아니니 언제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맡은 일을 허투루 할 사람은 아니다. 보고 싶다고, 기다리겠다고 하는 말에 최선을 다해 일을 마무리짓고 돌아온 사람은 한참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짜증을 내는 건 당연했다.
다 알고 있다. 다만 지금은 벨져의 기분을 풀어주고, 그를 헤아릴 정신과 체력이 없었다.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게 당연한데 내가 피곤하니 미안한 마음 전에 짜증이 먼저 날 정도다. 지금은 다투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루이스는 튀어나오려는 욕을 꾹 눌러 참고, 뺨을 그의 어깨에 부비면서 애원하듯 매달렸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잘못한 건 자신이었다.
“나 진짜 졸려.... 제발, 응? 자고, 나 좀 자고 일어나서 하자. 일어나면 놀아줄게 응?”
“.......”
“한 번만 봐주라. 사랑해. 응? 나 진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벨져어....”
“.....하아.”
죽이니 살리니 해도, 벨져는 제게 약하다. 보석같이 예쁜 눈이 흔들리는 거 캐치한 루이스는 벨져의 뺨과 입술에 쪽쪽 뽀뽀하면서 강수를 뒀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않는 걸 봐선 슬슬 화가 풀리긴 하는데, 그래도 억울하고 서운한 건 여전해서 삐져있는 게 분명했다. 이 기분 아주 잘 알지.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벨져의 윗입술을 입술로 물었다 놓았다가 눈을 뜨며 속삭였다.
“대신 일어나면, 네가 해달라는 거 해줄게. 응?”
“...그 말, 꼭 지켜라.”
“약속.”
“...하아.”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자 벨져의 팔이 등을 안았다.
“나 좀 데려가줘...”
아직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이, 벨져는 루이스를 안아드는 대신 질질 끌고 가서 침대 위에 눕혔다. 그래도 막상 얼굴을 보니 측은해서 이불을 덮어주고, 이불 위로 가슴을 토닥였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배시시 웃는 루이스가 얄미워져 철썩 때렸지만 그래도 좋다고 웃는 사람에게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제정신일 때도 이렇게 애교가 흘러 넘치면 적어도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벨져는 잠시 평소에도 허허실실 웃는 루이스를 상상했다가 냉큼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렇게 웃으며 안겨들고 애교를 부리는 건 제 앞이면 충분하다.
절대,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질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냉기를 풀풀 풍기는 싸늘한 영웅이어도, 제 앞에선 이렇게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벨져에겐 한참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조금 더, 확신을 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모든 선택지 앞에서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었으면 했다.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불편해 작게 한숨을 쉬자 루이스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실눈을 뜬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지간히 졸린지 초점이 흐린 눈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는 게 애틋해, 벨져는 가슴을 토닥이던 손을 멈췄다.
“벨져....”
“또 뭐냐”
“같이 자자.”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겨우겨우 밀어 올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벨져가 잠시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오는 그 역시 어젯밤 내내 뜬 눈으로 지새웠는지 눈에 졸음과 피로가 가득했다.
“...하아. 이거 원, 애인이 아니라 보모라도 된 기분이군.”
“사랑해....”
조각같은 몸을 꼭 끌어안고,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벨져의 손이 뒤통수를 감싸고 머리 위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도 아랑곳않고 눈을 감은 루이스는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벨져의 몸에서 나는 샤워 코롱 냄새와 햇살보다 더 따뜻한 온기와 단단히 저를 끌어안은 팔에 안심하고 만다.
“벨져어....”
“잠꼬대 하지 말고 자라.”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는 비식비식 웃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씨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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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잘님께서 자라고 던져주신 연성의 벨루가 넘 조아서...
루이스 파자마에 벨져 샤워가운 최고최고ㅠㅅㅠ)S2
일을 하다보면, 가끔은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는 법이다. 회사가 헌터의 폭로로 어수선한 사이 연합은 안타리우스를 쫓아 능력자와 불안한 세계 정세의 수호자가 되려 했고, 벨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조력자가 필요했다.
다이무스가, 가문이 알면 기겁할만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 세상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다. 인형실 끊기 작전 당시 연합이 입수한 안타리우스의 내부 자료와 벨져가 독자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교환하기로 하고, 은밀히 만날 약속을 잡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날 기대를 안 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 건은 연합으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고, 그러니 당연히 이 거래를 하러 오는 건 상황 판단이 빠르고, 어느 정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에 유리하도록 거래를 이끌어 갈 인물이어야 했다.
아무리 연합 소속의 능력자가 많은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많겠는가. 그러니 회담장에 나타나는 건 연합의 수장 앤지 헌트, 수뇌부의 토니 리켓, 마지막으로 영웅 루이스 이 셋 중 하나가 될 게 뻔했다.
회담장에 도착한 루이스를 보고, 벨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뒤에 줄줄이 따라온 것만 아니었다면, 진즉 소모적인 신경전을 건너뛰고 데이트를 했을 텐데. 딸려온 잔챙이들이 너무 많았다. 보는 눈이 많아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쫓기듯 자리를 피했는데 루이스는 여즉 감감 무소식이다.
저녁 식사 시간을 훨씬 지나,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벨져는 저도 모르게 엄지를 물었다.
“아, 정신 사납게 진짜!”
“닥쳐라. 이글.”
“그렇게 보고 싶으면 전화라도 해! 대체 그 좋은 머리는 뒀다 어디다 써?”
소파에 길게 누워 속 편하게 노닥거리던 이글을 쏘아보다 시선을 돌렸지만 녀석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원래 성질 같았으면 이미 목덜미를 잡아다 침대 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만, 서로 일은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게 벨져의 발을 잡고 있었다.
따로 만날 땐 가급적이면 일 얘기는 꺼내지 않고, 서로를 우선하기로 했지만 이렇게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됐을 때는 아무래도 저를 우선해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또 싸우기라도 하면 그 때는 다음에 시간이 맞아 만나도 서먹하게 감정 소모만 하게 될 게 뻔했다.
“이글.”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나가라.”
“허, 그래. 간다, 가.”
늘어져있던 이글이 몸을 일으켰다. 연합 쪽에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출장을 보내면서 투 베드 룸을 예약한 것인지.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자 숙소까지 찾아왔는데 벨져를 맞은 건 술냄새를 풍기는 동생 녀석이었다.
처음엔 잘못 찾아왔나 싶어 얼굴을 보고 바로 문을 닫아버렸는데, 다시 열린 문틈으로 이글이 얄밉게 웃으며 방을 같이 쓴다고 할 때의 그 기분이란. 기껏 좋은 잠자리를 두고 이글과 방을 바꿨는데도 루이스는 그 빌어먹을 보고때문에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이래서야 방을 바꾸기 위해 용돈을 두둑하게 쥐어준 것도 다 쓸모없는 짓이 아니었나 싶어 머리를 짚는데 방을 나가던 이글이 문 앞에서 홱 돌아섰다.
“작은 형.”
“또 뭐냐.”
“메에롱.”
유치하고, 짜증나게 혀를 내민 이글이 잽싸게 문틈으로 사라지고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던 벨져는 주먹을 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막내 녀석은 도무지 철이 들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싹수가 글른 놈이긴 했지만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만났는데 기왕이면 같이 있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나. 저만 애를 태우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자괴감도 들었지만 벨져는 전화기를 드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방 안을 서성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수화기를 들었다.
“벨져?”
단조로운 기계음을 듣고 있는데 뒤에서 수화기를 거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얼떨떨한 듯 눈을 깜빡이며 서있는 사람은 벨져가 내내 기다린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네가 왜 여기 있어?”
“이글 녀석을 내쫓았다.”
양손에 짐을 들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뺨에 입술을 맞추자 루이스가 멋쩍게 웃었다.
“나 아직 일 해야 할 거 남았는데....”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미안해하며 입을 맞춰왔다. 스킨십을 꺼리는 편도, 아끼는 편도 아니지만 루이스가 이렇게 달라붙을 땐 미안하거나 저 내킬 때뿐이었기에 벨져는 좁힌 미간을 풀지 않았다.
“피곤할 텐데 먼저 자. 오래 걸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팔 가득 들고 있던 송수신기와 장비를 내보였다.
“이글을 그렇게 믿나?”
“어차피 코드는 나밖에 모르는데 뭐.”
괜한 투정에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입술을 맞췄다. 뺨을 살짝 어루만지다 아쉬움만 잔뜩 남긴 채 떨어져 옆방으로 가버렸다. 일하는 중에는 터치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 말인즉슨 옆방에서 밤새도록 전보를 보내도 건드릴 수가 없다는 뜻이었고,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은 내내 독수공방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따로 방이 있는 객실에 침대가 둘인가 했더니 이런 용도였나 싶어 푹,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방을 바꾸자고 하지 않았어도 이글은 두 명이 쓸 공간을 혼자 썼을 것이다. 다 알고 시치미를 뗐다 이거지. 벨져는 한 마디 벙긋 하지 않고 낼름 용돈을 받아먹은 막내를 향한 짜증에 이를 물었다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이렇게 된 이상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일념 하에 벨져는 팔짱을 끼고 굳게 닫힌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인내심뿐이었다.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문을 연 루이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곤 한숨과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자라니까.”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야 없지.”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잖아. 그냥 우연이라고.”
“우연이 곧 인연이고 운명이라는 말 못 들어봤나?”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니지 않아?”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쓰라는 거지?”
벨져는 수척해진 얼굴로 미안해하는 루이스에게 와인을 따라 건넸다. 잔을 들고 사양하는 법 없이 마시는 걸 봐선 그 역시 아쉽긴 한 모양이라 기다리는 동안 절절 끓던 짜증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미안. 그냥 먼저 자. 이거 끝나면 휴가 낼 테니까, 응?”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가 거슬리긴 하지만 제게 절절매는 루이스를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일단 씻고 나오지 그래. 새벽에라도 침대에 들어올 거라면.”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한숨을 폭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섹스는 못 하니까 이런 거라도 들어준다는, 그 속내야 안 봐도 뻔했다. 뻔하고, 미련하고, 사랑스럽다. 결국 이렇게 하나하나 넘어오게 되는 것이다. 벨져는 제 뜻대로 고분고분하게 욕실로 들어가는 루이스를 흡족하게 바라보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도로 소파에 앉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여전히 고양이 세수라도 하듯 후다닥 씻고 나온 루이스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벨져가 미리 준비해둔 파자마를 입은 루이스의 몸에선 따끈따끈한 김이 오르고, 흰 피부는 촉촉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물기를 머금은 그의 눈이 제게 향했을 때, 벨져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지금의 루이스에겐 '좋다'는 말밖에 못 할 거라 확신했다. 이런 몸을, 이런 눈을 하고 일이나 하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벨져는 바로 제 연인에게 다가가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추려 했다.
“미안. 다음에.”
손으로 입을 막은 루이스는 난처한 듯 웃으며 눈을 깜빡이다 냉큼 일하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망갈 곳을 주지 말고, 팔에 가뒀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이미 야속한 님은 도로 일을 하러 가버려서, 벨져는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문을 잠근 것도 아니니 그냥 들어가면, 들어가서 따뜻하고 촉촉한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출 수 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울컥 치밀어 이마를 짚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누군 지금 가운 차림으로 기다리는데, 그냥 한 번쯤 모른 척 넘어오면 어디가 덧나나. 야속함에 화까지 났다. 기껏 준비한 와인이며 촛불은 다 무용지물이 됐다.
서로의 영역은 존중해주기로 하는 게 아니었다. 루이스는 결코 좋은 연인이 아니다. 질투에, 기다림에 방치해 두고는 그 자신은 혼자 태연한 게, 자신을 우선해주지 않는 게 짜증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짜증나는 건 고작 그런 것에 연연하는 자신이다.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질투를 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고, 어설픈데다가 가끔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니 그 틈을 파고들어보려는 잔챙이가 꼬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런 잔챙이가 아니라 루이스 그 자신이다.
지금처럼, 저를 내버려두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네가 날 신경써주지 않는 게 짜증난다고 말하긴 자존심이 상한다. 왜 항상 자신만 아쉬운 상황이 되고, 져줘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인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벨져는 창문을 활짝 열고 와인을 따랐다. 마음 같아선 그냥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잔뜩 풀이 죽어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른거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자 나오진 못하고 문틈 사이에 선 루이스가 죄인이라도 된 것 처럼 벨져의 눈치를 살폈다.
“벨져.... 피곤하니까 일찍 자는 게 어때.”
“하, 피곤할 일이 뭐가 있지?”
“역시 오지랖일까... 그렇지만 늦게 자면 안 좋으니까.”
시무룩해진 얼굴이 귀여워서 그만, 잠시 흔들렸던 벨져는 괜히 헛기침하며 다가가 뺨을 맞췄다. 문을 잡은 손을 잡아 끌어당기자 순순히 끌려온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보던 루이스의 턱을 잡아 슬며시 들어 올리자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떨리며 살포시 감기는 눈이 예뻐 그 눈꺼풀 위에 짧게 키스한 벨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루이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금은 서늘해진 몸에서 나는 비누 냄새와 마주 안아오는 팔. 허여멀건 얼굴이 미안해 죽겠다는 듯 울상을 지으니 화를 내기도, 억지를 부리기도 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참아준다.
“한 시간 주지. 그 때까지 침대 안으로 안 들어오면 한동안은 볼 생각하지 마라.”
벨져는 축 늘어진 채 올려다보던 루이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졸리면 그냥 먼저 자.”
“얼른 마치기나 해.”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루이스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뽀뽀하고는 도로 문을 닫았다. 베개를 정리하고 침대를 붙여 놓은 벨져는 와인잔을 기울이며 애꿎은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려댔다. 누굴 기다리고, 얽매이고 이런 건 천성에 맞지 않는다.
그 무엇 하나 맞지 않는데, 자꾸만 벨져 홀든 답지 않은 일을 하게 되는데, 왜 이렇게 애가 타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미련하고 바보같은 짓을 할 리가 없다.
사랑. 그래,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조차 길을 잃을 것 같이 짙은 어둠이 내린 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연인은 돌아올 줄을 모르고 시간이 갈수록 제 속만 새까맣게 타들어갈 뿐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기다려놓고 그냥 자버리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내 영영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열리고 루이스가 그 방의 전등을 껐다.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에 일어나자 루이스가 먼저 벨져의 품에 안겨들었다. 꽉 끌어안은 채 벨져의 어깨에 이마를 부비다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지는 그의 등에 손을 얹자 루이스의 숨이 벨져의 목덜미에 닿았다.
“원래는 내가 오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 무리했거든. 우리 만난 지 오래 됐으니까.... 그래서 하고 있던 일까지 같이 하느라 그래. 미안.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랬어.”
입술이 천 위에서 움직이는 감촉과 함께 조근조근,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자상하고, 그 목소리가 내뱉는 말은 더 듣기 좋았다. 그냥 바로 이렇게 말했으면 속을 썩이며 원망할 일도 없었을 텐데. 여전히 야속하고 서운하긴 했지만 벨져의 입가엔 그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렇게 쉽게 풀릴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풀어져버려서 김이 샜다. 벨져는 내심 끌어안은 채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루이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바로 제 뺨과 뺨을 부비다, 그것도 모자라 연거푸 입술을 맞추는 그의 살가운 스킨십에 벨져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해명이 너무 늦었단 생각은 안 드나?”
“사랑해.”
“흥. 말로만.”
“미안하다니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허리를 쓸어내리자 루이스가 얼굴을 붉히며 벨져의 팔을 잡았다. 한결 깊어진,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눈빛을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뭐야. 이러려고 기다린 거야?”
“당연하지.”
파자마는 입기도 쉽지만 벗기기도 쉬운 옷이다. 툭, 툭 단추를 풀며 쇄골에 입술을 묻자 루이스가 움찔 몸을 떨며 벨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읏, 잠깐. 나, 나 내일도 흣.... 하아....”
“원래 옷 선물은 벗기려고 하는 거라고, 그런 소리 못 들어봤나?”
“하으, 으응. 잠, 힛...!”
벨져는 잘 빠진 허리를 쓸어내리며 금세 오똑 선 가슴을 입에 담았다. 워낙에도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이지만, 약한 곳쯤은 이미 훤했다. 골반에서부터 손끝을 미끄러트리며 바지 안으로 손을 넣자 눈을 감은 루이스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고 졸리면 둔해진다던데.”
짓궂게 웃으며 그의 중심을 잡고 주물거리자 루이스가 눈을 흘겼다.
“하고 나면 더 잘 잘 수 있을 거다.”
“안 해도 잘 잘 수 있거든?”
씨도 안 먹히는 허세에 벨져는 코웃음을 치고 루이스를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시선이 마주치고, 피식 웃음을 터트린 루이스가 손을 뻗어 벨져의 목에 그의 팔을 두르며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열린다. 마침내 달디 단 인내의 결실이 맺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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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모 아이돌학원au
데샴님과 공성중에 풀던 썰이 너무 찰져서... 앙☆ au
기인 벨져 보고싶읍니다 시름시름
입학한 이래, 벨져는 곧 "기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차갑고 오만한 왕자님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벨져의 태도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벨져 홀든을 경외시하게 만들었다. 벨져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격'이자 '품위'라고 표현했다. 난다긴다하는 외모와 재능을 가진 학생들 중에서도 벨져의 상대는 없었다.
입학하기 전부터 화제를 모은 터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벨져의 첫 무대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관객들로 채워졌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다. 아무리 노력한들 타고나는 재능과, 그 태생은 바꿀 수 없는 법. 벨져는 자신을 둘러싼 작은 세상이, 다시 지루해지고 있었다.
한 명쯤은 기업의 이미지와 홍보를 위해 연예계에 있어도 나쁘지 않은 법이라며 흔쾌히 허락한 아버지는 금방 질릴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벨져에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쉬웠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후계자 숭업도, 아이돌로서의 가창력, 춤, 퍼포먼스도 전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다른 이들을 뛰어넘는 경지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육체적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균형 잡힌 몸과 타고난 지능, 두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벨져에겐 못할 것이 없었다.
슬슬 그만둘까. 시간 낭비라 생각하고 등교를 거부하던 중에 유닛을 통해 소문이 들려왔다. 편입이 없는 아이돌 육성과에 전학생이 온다는 소문은 벨져의 흥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 까다로운 입학 심사관과 임직원들이 편입을 허가한 것일까.
학 학년 위의 전학생이 왔다는 소리에 벨져는 오랜만에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소문의 전학생은, 벨져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함이란 어딜 봐도 찾아볼 수 없고, 그냥 지나치다 한 번 돌아볼 것 같다는 게 전부다. 어딜 봐도 평범한 얼굴에, 침침한 후드.
벨져는 헛웃음을 치고 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전학생에게 다가갔다. 학 학년 위의 상급생 반이지만 개의치 않고 팔짱을 낀 채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을 내려다 봤다.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그 뿐이다.
이 학원에 발을 들였다는 건 곧 그 역시 아이돌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벨져는 전학생에게 넘볼 수 없는 격을 몸소 가르쳐주기 위해 대결을 신청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넘어가려 해도 소용없다. 교실이 술렁거렸고, 프로듀서 과의 여학생이 전학생의 어깨를 잡고 무어라 속삭였다. 벌써부터 스카우트를 하려는 속셈인지 몰라도 그녀의 말에 전학생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고, 벨져는 두 시간 뒤에 광장에서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벨져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와 실력, 그 모든 것에 환호하는 팬. 아무리 프로듀서가 붙은들 결과는 같을 것이다.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벨져는 여유를 만끽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하고도 십 분 뒤, 벨져는 굴욕적인 패배에 무릎을 꿇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벨져가 졌다는 사실을 바꿀 순 없었다.
관객 속에서 누군가가 전학생을 영웅이라 불렀다. 우습지도 않은 별명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비웃으려는 순간 객석의 관객들이 웅성거리더니 파도처럼 그의 이름 앞에 영웅이라는 말을 붙여 외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이었던, 자신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승리와 대중이 등을 돌렸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그들이 환호하며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이름은.
벨져는 도망치듯 스테이지를 내려왔다. 십육 년 만에 처음, 벨져 홀든의 자존심이라는 감싼 드높고 공고한 벽이 부서진 날이었다.
처음은 특별하다. 첫 키스, 첫사랑, 처음으로 시작하는 온갖 미사여구와 로맨틱한 말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처음은 특별하기 마련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루이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에 푹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보지 말고 말을 해.”
“드라마를 찍었다지.”
“왜. 또 뭐.”
“그 시간에 춤 연습을 하는 게 낫지 않나?”
루이스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한 숨 죽이며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족히 이미터는 넘어 보이는 담벼락에는 또 어떻게 올라갔는지, 멋들어지게 앉아있는 게 꼭 고양이 같았다. 사납고, 성질 더럽고, 예쁘긴 또 엄청 예쁜 고양이.
“그러니까, 난 아이돌이 될 생각이 없대도.”
“흥. 이미 아이돌인데 어떻게 다시 아이돌이 된다는 거지?”
여전히 말이 안 통한다. 기인은 재능이 특출나게 뛰어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거라던 말을 떠올린 루이스는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사이 벨져가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놀란 나머지 무심코 뒷걸음질 친 루이스에게 가볍게 착지한 벨져가 다가왔다. 정말 고양이라도 되는지 그 높이에서 뛰어내렸으면서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는 게 여러모로 대단했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루이스의 앞에 선 벨져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귀한 도련님 아니랄까봐 잘 생기긴 또 무지하게 잘생겼다.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역시, 화려한 미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름답다는 건 같다.
벨져의 얼굴은 취향을 가리지 않고 미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니 매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어도 이렇게 웃으면, 순간 가슴이 떨리는 것도 당연하다. 하는 행동이며 말이 다 재수 없어서 그렇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고 우아한 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에게 도취된, 얄밉기 그지없는 오만한 미소도 어쩜 이렇게 근사할 수 있는지. 루이스는 신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바로 따라와 거리를 좁히는 벨져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 됐지만 그래도 불편하다고 의사 표현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왜.”
“곧 세시가 된다.”
“어. 알아.”
“기대되지 않나?”
“전혀?”
“이 내가, 참여하는데도?”
“사람 많이 오겠네.”
안 그래도 랭킹을 달리는 팬은 많고, 그들을 수용할 자리는 좁아서 다들 힘들어하는데 이번에도 벨져가 참전하면 팬들의 의욕이 꺾이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벨져가 나오지 않는 이벤트 기간에도 '벨져님이 좋아하니까'라는 말로 '트릭스타'의 무대를 채우던 팬들을 떠오른 탓이었다.
야광봉 불빛보다 더 빛나는 눈이 과연 그의 팬답다 싶었다. 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같이 랭킹을 달리는 팬들이 어찌나 힘겨워 하던지, '트릭스타'의 다른 멤버들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팬은 다 팬이니까 이렇게 말하면 벨져의 '나이츠'와 자신의 '트릭스타'를 같이 좋아해주는 팬들에게는 미안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첫 패배가 충격적이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벨져의 집착은 라이벌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굳이 따지자면, 라이벌이라기보다는 까의 성향이 짙은 빠에 가깝다고 할까.
루이스는 두 달 전 '트릭스타'의 이벤트 랭킹에 벨져가 내내 1위를 지키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가, 눈앞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얼굴을 마주하는 건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루이스에게 벨져는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어려웠다. 다른 기인들도 있지만, 그 쪽보다 벨져를 상대하는 게 수 배는 어려웠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미련하긴. 대화의 기본은 눈을 맞추는 거다.”
“자. 됐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팔짱을 끼고 턱을 살짝 든 채 내려다보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얼굴만 아니었어도 더 말을 섞지 않고 그냥 무시했을 텐데.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이 목울대를 울리며 넘어갔다. 얼굴이, 가깝다.
“저, 나, 그 라이브 준비도 해야 하고...!”
“흥. 네가 내게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나?”
“그냥 내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안 되는 거야?”
“뭐, 별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트릭스타' 팬들이, 내 팬들을 불편해한다지.”
별 거 아니라더니, 내심 신경 쓰고 있던 핵심을 쿡 찌른다.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벨져를 바라봤다. 이 고고한 귀족 도련님께서는 그 역시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지만,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 팬을, 그것도 타팬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그냥 받아들여라.”
그럼 그렇지. 잠시나마 감동을 했을 지도 모르는데, 결국 이 모양이다. 기대한 자기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루이스는 지난 이벤트 내내 1위를 차지한 벨져가 상태 메시지에 '네 첫 번째는 나니까.'라고 적어놓은 걸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기대도 안 했다.”
“무슨 소리지?”
작게 내뱉은 혼잣말에도 멋진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루이스는 시시콜콜 제 일에 간섭하는 벨져에게 신경 끄라고 말하는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고 벤치에 앉았다.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우두커니 서서 벤치를 내려다보기에 루이스는 교복 마이를 벗어 벨져가 앉을 수 있도록 깔았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루이스의 옷을 깔고 앉은 벨져가 다리를 꼬았다. 신은 정말 불공평해서, 외모도 재능도 머리도 팬도 돈도 다 가진 놈이 다리까지 길다. 루이스는 쭉 뻗은 다리를 보다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벨져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너울져 흔들리는 모양이 은실다발을 널어놓은 것 같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벨져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시선만으로 떨쳐내기에 벨져의 시선은 늘 제게 붙어 떨어질 줄 몰라서,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루이스의 손을 멈추지 못했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릿결에 감탄하는 사이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서늘하고 가느다란 그 촉감은 루이스의 삶에서 경험해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비싸고, 아름답고, 좋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 그런.
왠지 간지럽고 쑥스러워진 루이스는 다시 머리카락을 만지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렸다. 밀어내지도, 한 마디 말도 없이 줄곧 저를 바라보는 벨져의 눈에는 어김없이 자신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 말라는 말보다 침묵이 더 어색해 손을 내리려는데 벨져가 길게 콧소리를 내더니 루이스의 반대편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덕분에 벨져의 등과 머리를 마주하게 된 루이스는 멀뚱히 눈을 깜빡거렸다. 마음껏 해도 좋다는 듯이 몸을 돌려준 의도를 모르겠다. 만져도 된다는 건지, 아니면 토라진 것인지 몰라 망설이는데 벨져가 흘긋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바라봤다.
“뭐하고 있나.”
“으, 응?”
“줘도 못 먹는 멍청이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다만.”
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 벨져에 울컥 짜증이 올라왔지만 루이스는 차마 예쁜 뒤통수를 쥐어박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신 예쁜 머리카락에 조심조심 손을 뻗어 어느 실보다 곱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다 어릴 적 고아원의 동생들에게 해주던 것처럼 한 줌을 쥐고 세 갈래로 나누어 땋기 시작했다. 늘 관리를 하는 머리카락은 한 번 꼬이는 일도 없이 비단실을 땋는 것처럼 사르르 거렸다.
입만 열지 않으면 이렇게 예쁘고 좋을 수가 없는데. 라이브를 앞두고 저도 모르게 해버린 긴장이 풀리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바람에 흔들려 피부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간지럽고, 얌전하게 제 손길을 받고 있는 벨져가 새삼 예뻐 보였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도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이러고 있으니 정말 행복해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천천히 공들여 한 가닥을 땋고 손을 놓자 고정되지 않은 끄트머리가 슬며시 풀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등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니 벨져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미안.”
양손을 어깨 위로 들고 말하자 눈살을 찌푸리던 벨져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예쁜 뒤통수를 마주하게 된 루이스는 숨죽여 웃고, 벨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드르르륵, 바지 주머니에 넣어 놓은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지 않았다면 이 귀여운 소꿉장난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세 시를 알리는 알람에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났다.
“먼저 가볼게.”
“그래.”
“나중에 봐!”
알람을 끄자마자 바로 걸려오는 토마스의 전화를 받으며, 루이스는 무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살랑 불어오는 바람. 흔들리는 네 머리카락이 나를 흔들고 네 모습이 눈에 번져가.
노린 건 아닌데 꼭 누구에게 하는 말 같다. 이번 신곡의 제 파트 가사를 읊조리며 한 사람을 떠올리고, 마이크를 잡았다.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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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도련님 벨져(19)와 그 병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루이스(20)
언어의 장벽... 그것은 사퍼에게 묻는 것으로....☆
그리구 왠지 이것도 연재를 하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든....ㄷㅏ....
Day 1.
늦은 여름, 오스트리아 홀든 가의 저택엔 어김없이 햇살이 쏟아져 들었다. 짜증날 정도로 좋은 날씨에 아직 소년의 인상이 다 가시지 않은 청년이 문을 두드렸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의 이름은 루이스. 볼 일 없는 교육수준에, 돌봐줄 사람도 없는 천애고아. 청년에게서 그나마 봐줄만한 곳이라곤 성실한 태도와 준수한 얼굴 뿐이었다.
든 것도 없는 짐가방을 가지고, 루이스는 성 같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죽하면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낼 정도일까.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저택의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건물의 외관도 그랬지만 안은 더했다. 이런 집도 이주면 익숙해지겠지만.
루이스는 앞으로 자신이 묵을 방을 둘러보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때 벗었던 모자를 내려두고 커튼을 쳤다. 식사 시간이며 생필품을 어디서 받으면 되는지, 자잘한 것들을 늘어놓는 집사를 향해, 루이스는 모두가 꺼리는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래서.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은 어디에 계시죠?”
집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루이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닳을대로 닳아서 감흥이 없는 것인지 몰라도, 청년은 차분한 무표정으로 집사의 시선을 마주했다. 비열하지도, 굽신거리지도 않는 영민한 하인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집사는 흔들림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문제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명문 홀든 가의 가장 큰 고민이자, 조금 교육을 받은 것뿐인 고아 따위를 고용한 이유.
문을 두드리자 무언가 문에 맞아 깨지는 소리가 났다. 슬쩍 청년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무표정으로 서있었다. 집사는 아무 말 없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고, 청년에게 들어가보라 눈짓했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문을 닫고 물러섰다.
눈 하나 깜짝 않는 게 여간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버텨줄런지. 집사는 지나가던 하녀에게 방을 치우라고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한밤중에 도망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문이 닫히고, 루이스는 슬쩍 방 안을 살폈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지만 성인도 아닌 아이에게 이렇게 큰 방, 거기에 욕실까지 딸려있는 큰 방이라니 과연 손 꼽히는 재력가 다웠다.
“하, 이젠 들여다 보지도 않는군.”
루이스는 허리를 숙여 하얀 도자기 파편이 깨져 나뒹구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큼직한 파편들을 모아 한 데 몰아놓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기 바쁘던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도자기보다 더 하얀, 소년인지 소녀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가 흉흉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노려봤다.
명백한 적의와 경계에 루이스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봤자 신경질적인 환자에 불과하다. 다만 그 환자가 상상도 못할 부자에, 권력까지 거머쥔 홀든의 둘째 도련님이고, 사람을 아주 짐승같이 부릴 뿐이다.
“이렇게 물건을 던지면 다칩니다.”
“뭐야, 넌.”
“도련님의 열일곱번째 하인입니다. 아시겠지만 절 고용한 건 마님이고, 내쫓을 수 있는 것도 도련님이 아니라 마님이죠.”
“하,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루이스는 손을 털었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엔 핏기가 없고, 있는 거라곤 귀족 특유의 오만과 거만, 그리고 분노 뿐이다. 그 분노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 화풀이를 하고 있다. 그 대상이 된다는 게 더럽지만 이미 과분할 정도로 넘치는 돈을 받았다.
그 돈은 파산 직전이었던 수도원으로 갔고, 루이스는 앞으로 삼개월간 꼼짝없이 이 히스테리한 도련님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이주. 사람이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이주가 걸린다. 그게 결코 좋지 않더라도, 시간은 감정을 무디게 해준다.
“내기하시겠습니까?”
침대 위에 앉아있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결코 호의를 품지 않는 푸른 눈동자에, 루이스는 담담히 말을 이으며 다가갔다.
“제가 먼저 도망갈지, 아니면 도련님이 절 쫓아내는 게 먼저인지.”
“내가 얻는 게 뭐지?”
“글쎄요, 승리? 도취감? 뭐. 십 분도 채 안 가겠지만.”
“원래 말을 그딴 식으로 하나?”
“뭐, 도련님께서 공손하게 말씀하시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하인 치고 주제 넘은 발언이지만 이 방에는 그와 루이스 단 둘 뿐이었다. 앞으로 더한 것도 볼테니 거리낄 것도 없다. 간병인이며 하녀, 내로라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붙여도 채 일주일을 못 넘기고 도망치고 만다는 도련님이다.
밖에 떠도는 소문은 그렇다 쳐도, 집안 사람들까지 그의 호전되지 않는 병세와 신경질에 진력이 났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그게 더 환자를 무력하게 만들고, 무력감은 곧 독이 된다. 열다섯까지만 해도 뛰어난 재능으로 촉망받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응당 화가 날 테고, 그의 형제들을 보면 자신의 것이었던 것이 떠올라 상실감과 분노가 끓어오르겠지.
“흥. 시궁창을 구르던 쥐새끼 주제에.”
그렇게 생각했다. 길길이 날뛸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싸늘한 눈빛을 한 번 주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조롱 다음은 무시인가. 루이스는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벨져에게 다가갔다.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을 잡자 벨져가 손을 쳐냈다. 발끈해서 노려보는 그의 손을 다시 힘주어 잡고, 손등과 손바닥을 살핀 뒤 놓았다. 검을 잡았다던 손은 생각한 것보다 딱딱하고 차가워서 시체를 만지는 것 같았다.
“상처는 없군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도자기나 유리는 던지는 중에도 깨질 수 있으니까.”
“너....”
“손목을 다칠 수도 있습니다.”
당혹, 혹은 짜증, 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무언가로 얼룩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강한 충격과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도자기 파편을 치우던 하녀가 움찔 놀라 루이스를 바라봤고, 눈이 마주친 루이스는 그녀에게 괜찮으니 어서 나가보라 눈짓했다. 침대에서 사는 것 치고 손이 맵다.
화끈거리는 뺨 대신, 루이스는 방금 제 뺨을 친 손을 잡았다. 발갛게 부은 손바닥을 확인하려는데 그의 손이 다시 날아들었다. 맞아주는 대신 손목을 잡아챈 루이스는 그를 내려다 보며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두 사람의 힘으로 두 사람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련님. 이거 내리시죠.”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지 알아?”
“때리면, 그럼 기분이 좀 풀립니까? 아닐걸요.”
손을 놓자 다시 한 번 고개가 돌아갔다. 기왕이면 다른 쪽으로 때리던가. 그래도 양 쪽 볼이 퉁퉁 부은 채 흉한 몰골로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인 일이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 도련님과 지내는 일은 더 고될 듯 했다.
“얼마든지 해보시죠.”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전 뭔가를 믿는다는 것에 회의적인 편인데요.”
“세 치 혀로 농간을 부릴 셈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을걸.”
“앞으로 차차 알게 되시겠지만, 전 말이 많은 편이 아닙니다.”
루이스는 목에 맨 타이를 풀고 하녀가 남기고 간 빗자루를 집어들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깨진 파편을 정리하고 있으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일어나는 대신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그가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내기를 하자고 했지. 좋아. 받아들이겠어. 대신 조건이 있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 마주한 얼굴이 진지했다. 오가는 시선과 이어지는 침묵 속에 그가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지면, 평생 내 밑에서 일하도록.”
“안정적인 직업 제안 같은데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지.”
“그야 두고 볼 일이죠.”
“흥. 커튼부터 쳐. 빌어먹을 햇빛.”
그, 벨져 홀든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베개에 몸을 기댔다.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동작에 루이스는 내심 감탄하며 커튼을 쳤다. 얇은 여름 커튼 뿐인 제 방과 달리 얇은 커튼 옆에 두꺼운 커튼이 한 겹 더 붙어있었다.
루이스는 벨져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햇빛이 비치지 않게 커튼을 치고, 방 안에 있던 물병을 집어들었다. 옆에 놓여있는 수건에 물을 적셔 그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지 않았을 뿐 편안하게 누워있는 벨져의 손을 잡아 살짝 부은 손에 적신 수건을 갖다 댔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파편을 만질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손을 적시고 호호 불어가며 식히는 동안 벨져는 손을 뿌리치지도 빼내지도 않았다. 사람을 부리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잘한 일 따윈 제 손으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가늘고 흰 손을 식히고 나서야 제가 그 사이 무릎을 꿇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친다.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손을 놓았다. 내내 내려다 본 건 자신일 텐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 올려다 본 것만 같다. 루이스는 숨을 삼키며 일어났다. 세면대 앞에서 물수건에 남은 물을 짜고 거울 너머로 흘긋 그를 바라봤다. 그 역시 자신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어 다시 눈이 마주쳤다.
숨 쉬기도 힘든 무거운 공기 속에 루이스는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필요해서 보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타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루이스는 수건을 내려놓고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가만히 앉아 눈을 살짝 내리 깔고, 손을 다리 위에 얹었다. 부르면 언제든 답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는 것도 하인의 일 중 하나다. 앞으로는 시간을 죽일 책이라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구부정하게 수그렸던 허리를 폈다. 이제 겨우 만난 것뿐인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Day 2.
일 없이 가만히 있는 동안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건 좋은데 성질이 사나운 것 같다. 정말 예쁘다. 씻기는 동안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게 고역이었다
Day 3.
우리 도련님은 모시기 정말 힘든 분이다. 왜 다들 못 버티고 나갔는지 알겠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벨져가 예쁘다는 것이다. 돈때문에 하는 일이긴 하지만 사나흘이면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은데 그 얼굴을 보면 그래도 조금 참을만 하다.
Day 4.
어제는 책을 읽는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더니 오늘은 또 괴테를 읽어달라신다. 내일부터는 손에 집히는 반경에 약통 외에는 두지 말아야겠다. 어제는 책에 맞았는데 오늘은 찻잔이 날아왔다. 맞진 않았지만 뭔가를 던지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신호다. 스케치용 연필이야 맞아도 주우면 그만이지만.
Day 5.
신경질과 짜증을 받아주느라 완전히 지쳐버렸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정신도 쉽게 지치기 마련이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
Day 7
일주일째다. 어제는 일기를 쓸 짬이 없었다. 엉망이 된 방을 치우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들었다. 지금은 수면제와 진정제를 먹고 자고 있지만, 솔직히 이 일을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Day 10
하필 오른 손을 다치는 바람에 펜을 잡기 힘들다
Day 11
마님과 얘기를 나눴다 벨져의 상태가 부쩍 좋아보인다고 한다. 어디가 좋은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벨져는 마님을 닮았다. 주인어른은 뵌 적이 없다.
Day 12
노크를 깜빡했는데 그냥 한 번 슥 쳐다보는 걸로 끝났다 지금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아름답다
Day 13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에 하인들이 수채 물감이며 유화 물감이며 캔버스를 날라다 내 방에 가져다 놓았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이지만 착잡하다 벨져의 기분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한다 꽃을 보고 싶대서 꺾어온 장미를 병째 내던졌다. 손질이 다 되지 않은 장미 가시에 찔려서 그랬다고 하는데 변명인지 설명인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머리를 빗어달라기에 빗질을 했는데 바로 짜증을 내며 꺼지라고 했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머리 빗는 것도 배워야겠다
Day 14
씻으면서 봤더니 몸에 멍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한숨이 나왔지만 얻어맞는 것보단 덜하다. 오늘은 점심 메뉴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안 먹으려는 걸 겨우겨우 달래서 한 스푼씩 떠먹였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벨져는 싱글벙글 웃었다 물론 순수한 웃음이 아니라 비웃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것보단 낫다 약을 안 먹는다고 뻗대기에 꿀을 잔뜩 넣은 차에 타서 먹였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Day 15.
이런 저런 일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이 주가 지났다. 까칠하고 까다로운데다 신경질적인 도련님과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깨지고 부서진 집기가 몇, 그 바람에 생긴 상처가 또 얼마쯤. 홀든 가의 하인들은 그래도 다른 도련님들이 안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루이스를 위로했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딱 이주가 걸린다. 그 시간은 지났고, 루이스는 벨져의 화법과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그의 변덕에 익숙해졌다. 그 역시 루이스에게 익숙해졌는지 노크 없이 방을 드나들어도 눈총을 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면 벨져는 일어나 피아노를 치거나 그림을 그렸다. 책을 읽는 건 지루해 하기에 그럼 체스라도 두겠냐고 한 것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통산 전적 24승 23패. 짜증과 신경질로 무장하고 별 것도 아닌 걸 트집 잡아 시비를 걸던 벨져가 조용해지는 건 그 때와 잘 때 뿐이었다.
잠들면 그렇게 천사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는데. 가장 반짝일 시간에 이렇게 침대에 박혀 지내야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의 수발을 드는 자신도, 안타깝기는 매한가지지만. 이래서 돈이 좋다. 귀찮고 성가신 일을 미루고도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니까. 돈이란, 재물과 권력이란 일단 가지고 보는 것이다.
루이스는 그렇게 자신을 도닥였다. 벨져는 오늘도 어김없이 까다롭게 이 옷 저 옷을 벗었다 입길 반복했고, 벨져가 그나마 낫다고 하며 거울에 그의 몸을 비춰 볼 땐 녹초가 되어 찬 물을 들이켰다.
오늘은 산책을 가겠다며 나가기도 전에 체력을 뺀 장본인은 아주 큰 마음을 먹어주신 걸 감사히 여기라는 듯 뻐겨댔다. 그것 참 아주 감사한 일이네요. 라고 빈정거리지 않는 건 기특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쨌거나 마님은 벨져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며 기뻐하고 있었고, 집사는 새로 하인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홀든 저택의 사람들은 루이스가 떠나기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벨져조차도.
첫날 이후로 루이스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필요할 때 손발이 되어주고, 자잘한 일을 처리하고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루이스는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그만두고, 왜 밤중에 도망갔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쏟아지는 비아냥과, 아픈 구석을 쿡쿡 찌르는 날카로운 말투, 거기에 사람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고 모욕을 주는 것까지.
벨져는 특권층이었고, 그가 가진 것들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와 하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와 벨져의 태도가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그의 말이 무조건 맞는 척을 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거리의 고아로 자라 온갖 것들을 보고 자란 자신도 가끔 울컥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스는 주방에서 챙겨준 피크닉 용 도시락과 벨져의 약, 돗자리를 챙겼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양산까지 챙기고 나서야 벨져의 방문을 두드렸다. 제 손으로 입히며 보긴 했지만 일곱 번이나 갈아입은 흰 셔츠 위에 감색 조끼, 베이지색 면 바지가 퍽 잘 어울렸다.
다른 하인 없이 단 둘이,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세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고, 벨져는 뒷짐을 진 채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벨져의 걸음이 멈추고, 루이스도 따라서 멈춰 섰다. 탐스럽게 핀 꽃을, 와인 잔을 들듯이 잡은 벨져는 부쩍 지쳐 보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조금 쉬어 가자고 해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 벨져가 푹, 숨을 내쉬며 꽃을 놓았다.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나?”
“아니오. 꽃은 잘 모릅니다.”
“...그래. 그렇군.”
“조금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들은 적이 없군.”
“아.”
루이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주 하고도 하루가 되도록 이름도 몰랐다 말인가.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로 루이스는 제 입으로 이름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너라고 부르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루이스가 입을 다문 동안에도 벨져는 재촉하는 일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순순히 늦은 답을 내놓았다.
“루이스. 루이스입니다.”
“...격이 떨어지는 이름이군.”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도 아니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벨져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그가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해하며 홱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걷는데, 여전히 그 변덕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Day 16
어제 산책을 하고 온 뒤로 벨져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는다 헐레벌떡 가보면 그냥. 이라고 한다 내 이름에 노이로제가 걸릴지도 모르겠다 빗질하는 건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다
Day 17
벨져가 자고 있다 하루밖에 안 됐는데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자다가도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깜짝깜짝 놀란다.... 여전히 잘 때만큼은 천사가 따로 없다
Day 18
차에 약을 타는 걸 들켰다 앞으론 어떻게 먹여야할까 길길이 날뛰는 벨져를 진정시키느라 펜을 들 힘이 없다
Day 19
큰일났다 아무래도 잠깐 존 것 같다 아닌 척 펜을 들었는데 벨져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무슨 말이 쏟아질지 안 봐도 뻔하다 꽃이라도 꺾어와야 할까
다행이다. 오늘의 빗질은 통과인 것 같다 머리카락이 가늘고 결이 좋아서 꼭 실크를 만지는 것 같다 그리고 씻길 때마다 생각한 거지만 정말 피부가 희고 깨끗하다 전에 생긴 상처인지, 오래된 흉터 몇개가 있는 게 아까울 뿐이다 아름답다는 말이 이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Day 20
오늘은 비가 와서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었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려도 벨져는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기에 다가가서 손을 잡았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머리를 기대왔다 창문을 닫는 대신 등을 토닥여주었다 지금은 자고 있다 일어나면 따뜻한 거라도 먹여야겠다
Day 21
벨져가 감기에 걸렸다 의사가 다녀 갔다
Day 22
열이 도통 내려가지 않아서 밤새 돌봤다 열에 시달리는 내내 내 손과 소매를 잡는 바람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열이 내려서 잘 자고 있다
Day 23
의사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자 벨져는 그딴 건 쓸모가 없다며 짜증을 냈다
Day 24
벨져가 마님과 산책을 나갔다 아무래도 무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돌아와서 다시 열이 오를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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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것까지 어쩌면 그리 닮았는지.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곤 티푸드랍시고 접시 위에 다소곳하게 올라온 마카롱과 터키쉬 딜라이트, 한 조각의 쇼콜라에서 눈을 거뒀다. 굳이 차를 마셔보지 않아도 오늘의 다과가 루이스의 손을 타지 않은 게 분명히 보였다. 혹시나 해서 한 모금 마셔본 차는 온도가 낮고, 제대로 우리지 않아 떫은맛까지 났다. 이런 걸 다과랍시고 올린 인간의 면상에 네가 한 번 먹어보라고 한 바탕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겨우 이런 걸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아깝다.
벨져는 제 기분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래.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이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오늘은 늦은 시간에 왔음에도 나와 맞지를 않았다. 아무리 바쁘다해도 그렇지 다과가 이따위로 나오도록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게 괘씸했다.
그를 생각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득 될 게 하나도 없다. 벨져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책상 위를 매운 서류철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없어도 돌아간다는 걸 입증하듯이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에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뒤로 받은 돈이며 정보, 사람이 전부 종이 위에 있었다. 참으로 작은 세상이다.
늘상 하던 것처럼 사인을 하기 위해 펜을 들던 벨져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종이 속에 담긴 세상을 찬찬히 훑었다. 그냥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시간을 때우려던 것뿐이었는데. 벨져는 본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읽고, 다른 서류철을 열어 종이를 넘겼다.
이 작은 세상 위에는, 루이스의 이름이 없다.
벨져가 느낀 위화감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하나같이 그의 이름이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언제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리 서류에 사인하는 게 일의 전부라지만, 정말 그것뿐일 리 없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근 두 달간 벨져의 책상 위로 올라온 서류는 이 거대한 성채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담고 있다기엔 너무 적고 깨끗했다.
누군가 일부러 더러운 일을 전부 치워버리지 않고서야 이렇게 깔끔할 리가 없다. 이 자리에 앉기를 거부한 것도 다 추악하고 썩은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대로라면 아직 미성년자인 이글을 앉혀놔도 될 정도였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읽고 있던 서류철을 전부 펼쳐봤다.
가장 먼저 집어 들었던 서류철을 내려놓고 다리를 꼬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시간이 이렇게 가도록 눈치를 못 챈 자신이 한심한 것도 짜증이 나는데, 제게 이런 얕은 수를 썼다는 데서 더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벨져는 사무실 전화기로 비서를 호출했다.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벨져는 들어오라고 답했다.
“찾으셨습니까.”
“루이스는?”
“아……. 그게 지금, 아래 룸에 문제가 생겨서…….”
나타나지 않는 루이스와 대답을 피하는 비서. 그것만으로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표정을 굳히고 눈으로 그를 추궁하자 비서는 시선을 피하며 답하지 않았다. 그래, 다 한통속이라 이거지.
벨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당황해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려 했지만 아무리 그런들 벨져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문을 닫고 그 앞에 버티고 선 비서를 노려보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비켜.”
“저, 그게, 금방 오실 겁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것도 자네에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하, 하나같이 자기들이 뭘 위해 일하는지 모르는 자들뿐인 건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 비켜.”
비서는 곤란해 하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 그가 열어준 문 밖으로 나간 벨져는 고위층을 접대하는 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더니 층버튼을 누르고 비껴섰다.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이 비서조차 다이무스가 남겨둔 사람이니 그와 함께 뒤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제 행적을 죄다 고해바치고 있는지도 모르지. 좀처럼 저를 그의 눈 밖에 내놓지 않는 형을 떠올리자 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제 혈육이라지만 그와는 좀처럼 잘 지내기가 힘들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어쨌거나 벨져에게 형제란, 특히 형의 존재란 귀찮고 성가신 것에 불과했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자신을 가르치고 돌보려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리고는 결국 제 것이어야 할 것을 모조리 가져가고는, 남은 걸 선심 쓰듯 내주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혈육이라 한들 그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벨져는 패배의 기억을 떠올리곤 손등이 희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어디에 있나.”
“그게…….”
“자네가 누굴 위해 일하는지도 알려줘야 하는 건가?”
“…이쪽입니다.”
비서는 벨져를 더 깊고 후미진 복도로 이끌었다. 어두워진 조명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딱 좋은 분위기에 화려한 오탁의 향이 더 짙어졌다. 벌써부터 그 지독한 냄새에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지만 벨져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보이는 공간보다 보이지 않는 밀실이 훨씬 화려하고 넓다. 홀에는 거의 헐벗다시피 한 여자들이 돌아다니고, 좋은 옷을 갖춰 입은 사내들이 짐승의 냄새를 풍기며 게걸스럽게 탐욕을 채우는 공간. 더러는 비굴해지고, 더러는 추악해지는 이 공간이 역겨웠다.
향락을 경험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런 건 스무 살의 벨져에겐 낯설다 못해 더럽게 느껴졌다. 벨져를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려했지만 벨져는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둡고,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속에 비서가 걸음을 멈췄다.
룸의 앞에 선 벨져는 문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렇게 하면 안이 투시되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차갑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애꿎은 문을 노려봤지만 방음처리가 워낙 잘 된 터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안에서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얼마든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지만 벨져는 움직이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이는 것밖에,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또, 같은 장면을 보고 싶지 않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뭐 하러 되풀이한단 말인가. 벨져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제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천박하게 그지없는 행위에 흥분에 젖은 숨을 눌러 삼키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벨져는 이 비이성적인 행위를 없던 것으로 하기로 하고 돌아섰다. 비서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이르고 싶으면 이르라지. 다이무스가 뭐라 하던 알 바인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상관하지 않으면 그 뿐이었다.
올 때만큼이나 단호하고 빠른 걸음으로, 벨져는 아편굴 같은 내실을 빠져나왔다. 확 밝아진 조명과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벽과 바닥이 전부 끔찍했다. 이 안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어 벨져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숨이 막혔다. 당장이라도 넥타이를 푸르고 싶었지만 여즉 붙어있는 비서 때문에 꾹 눌러 참았다. 다이무스에게 말이 흘러가는 건 상관없지만 루이스에게 전해지는 건 그렇지 않았다.
뭐가 그렇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벨져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거세게 닫고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 당겼다. 겨우 이딴 거나 보자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눈빛을 외면하고, 여길 떠나야 했다. 벨져는 재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서류가 쌓여있는,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책상 따위 꼴도 보기 싫었다. 마음 같아선 다 뒤엎고 싶지만, 그랬다가 손해를 보는 건 자신뿐이라 그렇게 홀로 분을 삭이고 있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정중하게 두 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소리. 벨져는 이를 악물며 문을 노려봤다. 저를 이렇게 뒤흔든 그가 문 앞에 서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고저 없이 평소와 같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벨져는 팔걸이를 꽉 잡았다.
“……아까 저를 찾으셨다고.”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일어난 벨져는 문을 뒤로 하고 섰다.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벨져의 사무실 안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한 침묵이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루이스였다. 몇 시간이고 불러놓고 세워둬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그가. 저를 밀어내고 거절하고 있었다. 벨져는 홱 몸을 돌렸다. 한 마디 해주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희게 질린 얼굴과 핏기가 가신 입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며, 애써 참고 있는 그 얼굴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하려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잠깐.”
벨져는 끝을 고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자 루이스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피했지만 벨져의 손보다, 루이스의 목보다 벨져의 눈이 더 빨랐다. 마침 흘러내린 진득한 붉은 방울에 벨져의 손이 멈췄다.
베스트를 적신 짙은 자국과, 평소와 다른 앞머리의 방향.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흰 피부에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지독히도 붉은 선혈에 벨져는 방금 전 그랬던 것보다 더 세게 이를 물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흰 셔츠에 떨어졌다.
“...누구지?”
“도련님, 이건....”
“누구냐고 물었다.”
이를 악 문 채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벨져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벨져는 거절당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선 이 사내에게 이 분노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탓이 아니다. 그걸 너무나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그동안 외면해온 탓에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끝내는 이런 식으로 제 앞에서 망가지고 있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벨져는 주먹을 쥔 손을 내렸다. 너는 내 건데. 왜 함부로 너를 망치지?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럼에도 묻지 못하는 건, 그의 입으로 부정하는 걸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며 루이스에게 돌아섰다. 너무 세게 힘을 준 주먹이 부들거렸다.
이 감정은 갈 곳이 없다.
“...나가봐.”
간신히 내뱉은 한 마디에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걸음을 옮겼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그 발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이다, 문이 닫히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벨져는 참아온 분노를 표출했다. 컵이 깨지고, 서류철에 곱게 끼워져있던 종이들이 공중을 날았다. 벨져는 엉망이 된 사무실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제 것에 손을 댄 무뢰한에게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은 벨져는 풀었던 넥타이를 고쳐 매고 벗어둔 재킷을 걸쳤다. 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 잔뜩 움츠러든 채 서있던 비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새끼, 아직 거기 있나?”
“예? 아, 잠, 대표님!! 대표님!!!”
벨져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아버렸다. 남은 건 켜켜이 쌓인 분노를 받아 온당한 곳에 쏟아내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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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L3
* 현대물, 암흑가에 다른 방식으로 깊이 자리잡은 두 사람
** [벨져루이] 위험한 관계 의 프리퀄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 벨져루이<-다무 주의
칼로 피부를 긋는 것만이 자해는 아니다. 루이스는 언제나 괜찮은 척 했다. 그 '척'에 넘어가지 않는 건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 둘은 차라리 제가 손목이라도 그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루이스는 안 그래도 흉한 몸에 더 흉터를 늘릴 생각이 없었다. 모진 학대에 시달린 등은 홀든 가에서 지내는 동안 점차 나아갔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도 보기 흉했다. 그나마 반반하게 생겨 팔이며 다리, 얼굴같이 보이는 곳은 피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최소한 등을 내보일 일은 흔치 않으니까.
루이스는 셔츠를 입으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며 기뻐하는 것도, 그를 마주하는 것도, 괜찮은 척 하는 것도 전부. 결코 돌아올 리 없는 희망에 매달려 애걸복걸하고, 자신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모는 이 관계를 그만 끝내고 싶었다.
변함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벨져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하루 아침에 저를 모질게 버려두고 떠났던 것처럼 제 얼굴따위 보기도 싫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다. 차라리 그 태도가 계속 이어졌으면 조금은 덜 괴로웠을까.
무관심과 외면 속에 덧난 상처가 아팠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저를 보는 그의 그 눈동자가 따스한 빛을 머금을 때면 독인 줄 알면서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혀끝에 담기는 지독히도 달콤한 독. 넘기자마자 몸 속을 태우고, 끝내는 파멸에 이르게 할 걸 알면서도 그 실낱같은 연민에 기대하게 된다. 다시 한 번, 헌신짝처럼 버려질 희망을 꿈꾸고 다시 자신을 괴롭히는 이 지독한 굴레.
그래서 루이스는 절대 벨져 앞에서 셔츠를 벗지 않았다. 끔찍한 학대의 흔적을 보면, 그리하여 그가 어린 시절의 그 소년을 떠올리고 값싼 동정을 베풀기라도 할까봐. 그 자그마한 연민에 매달려 놓을 수 없게 될까봐.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돼. 루이스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다잡았다. 아직까지도 '루이스'를 존재하게 하는 건 그 시절의 벨져였다. 너는 아직도 나를 죽이고 살리는구나.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무릎을 당겨 모았다. 무릎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골랐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이 감은 눈 아래 펼쳐졌다.
그 날 벨져는 주름이 들어간 흰 셔츠에, 진한 녹색 비로드 리본을 맸다. 리본과 같은 색 반바지를 입고, 풀밭에 앉아 손바닥에 새로 생긴 상처에 눈살을 찌푸리곤 손수건을 감아주던 소년의 목소리, 표정 하나까지 또렷했다.
[약점을 보여선 안 돼.]
[도련님에게도 그런 게 있나요?]
[글쎄. 뭐일 것 같아?]
당당하게, 턱을 살짝 든 채 말하는 당신은 나보다 어린 소년임에도 너무나 빛나서, 참으로 빛나는 사람이구나. 결코, 때묻지 않은 빛이라 함께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건 소년의 동경이자 처음 느껴보는 따스한 감정이었다. 따스한 기억 속 벨져는 어리고, 당당했으며, 햇빛이 무색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 기억때문에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비록 그 숨이 이윽고 정반대의 감정을 수반할지라도 작은 위로가 되어 기뻤다.
봐, 벨져. 난 아직도 이렇게 널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았어. 루이스는 입만 벙긋거리며 꽁꽁 숨겨온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소리 없이 말하고는 양손을 입술 위에 포갰다. 너무 소중해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뭘까. 이게 사랑이 아니면, 세상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루이스가 아는 사랑이라곤 그가 가르친 게 전부였다. 그러니 그로부터 부정당하는 순간 숨기며 지켜온 감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터였다. 인어공주의 사랑은 그녀를 죽인다.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한 번 말해보지 못하고 지고 만.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든 꽃에 꽃잎이 한 장이라도 떨어질까 조심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 누구도 이 기억에, 제 애틋하고 괴로운 사랑에 손을 델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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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져루이<-다무 주의
벨져가 그 날에 대해 아주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루이스는 그의 오해와 그날의 진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다이무스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 감사와.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 때는 어렸고, 한 사람 외에는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지만, 그 날부터 지금까지 쭉, 그 앞에 서면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지만 그 때는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행복에 겨워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짓밟은 대가였을까.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자신과, 똑같이 아파하면서도 저에 대한 마음을 거두지 않는 그. 그리고 그런 그에게 마음을 기대는 나.
그렇게라도 옆에 두고 싶다는 마음을 알기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봐도 못 본 척하며 저도 참 못됐다는 생각을 지우질 못했다. 다이무스 앞에 서면, 그의 호의와 친절, 그리고 이따금씩 경계를 넘어오는 감정에 도망가기 바빴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이무스를 사랑했으면 달랐을까. 그럼 우리 모두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으나 손에 집히는 게 없었다. 루이스는 작게 욕을 하며 머리를 짚었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그건 불가능했다. 루이스는 그 간절한 회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힘들어하는 걸 알아도 도와줄 수가 없다. 그게 자신 때문이라 더,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지고 숨이 막혀왔다.
왜 그 땐, 그걸 몰랐을까.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줄 자그마한 선물을 가지고 그의 방 문 앞에 섰다. 저를 구원해준 그가 집을 떠나 유학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방문을 두드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자 책상 앞에 서서 제가 그에게 주었던 들꽃을 들고 아련한 눈을 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루이스.”
루이스는 슬며시 웃으며 들어갔다. 한 손을 등 뒤에 숨기고, 다 말라 툭 손을 대면 바스라질 것 같은 작은 꽃다발을 든 그의 손을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내내 그랬던 것처럼, 꽃잎 하나 떨어지지 하게 않겠다는 듯이 조심스레 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드세요?”
“...가져갈 짐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던 중이었다.”
“다 부서질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그렇게 말하는 다이무스는 그답지 않게 어딘가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집을 떠나 혼자 생활해야 했기에 아무리 믿음직하고 의젓한 맏형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은 두려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루이스는 제게 눈길을 주는 대신 꽃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다이무스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그,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다이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바라봤다. 손에 들고 온 선물을 건네기 위해 그의 손을 잡자 다이무스가 흠칫 놀라 손을 빼려다 뻣뻣하게 굳은 손을 내어주었다. 늘 따스했던 그 손이 차가워진 게 안타까워, 루이스는 그의 손바닥을 엄지로 매만지며 작은 선물을 그 위에 올렸다. 순간, 몸이 확 당겨졌다. 허리를 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놀라 고개를 들자 다이무스의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눈을 꽉 감고 입술로 입술을 누른 그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놀라 얼어붙은 자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당황하기를 몇 초,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입술을 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루이스. 함께 가자.”
“도련님, 저는....”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입술을 떼 떨어지자 한 박자 늦게 그를 밀어냈다.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웠다. 행위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다. 루이스는 단 한 번도 그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열정과 결의에 타오르는 다부진 눈길이 낯설었다. 다이무스가 다가오자 루이스는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를 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벨져 때문인가?”
“.......”
“널 구한 건 나다.”
한참 뒤에 나온 목소리에는 꽉 억눌린 감정이 모두 배어있었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눈을 보지 못하고, 그의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리는 걸 바라봤다. 다이무스의 목소리는 엄하고, 진중한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감정이란 폭풍이 채찍처럼 몰아쳤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다이무스를 모욕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적어도, 그의 감정을 모른 척 외면해서는 안 됐다.
“...큰 도련님은 제 은인이시죠.”
“그런데 왜!”
“그래서, 그 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제게 아버지이고, 형이고, 은인이에요. 그럴 순 없습니다.”
“...그래.”
지옥같은 침묵 끝에 내뱉은 말에, 루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한 그대로 다이무스는 제게 벨져만큼이나, 혹은 어떤 의미론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이런 식으로 상처 주는 게 루이스라고 편할 리 없었다. 무거운 죄책감에 한숨짓고 방을 나온 루이스는 그대로 벨져에게 향했다.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마음을 가라앉힐 곳이 필요했다. 그냥 옆에 앉아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숨을 쉬고 싶었다.
그리고 벨져는, 다이무스에게 줄 선물을 같이 고르고 얼른 다녀오라며 등을 떠밀었던 벨져는 한순간에 돌변했다.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저를 한 번 보고는, 그 뒤로 완전히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말을 거는 것도, 손을 뻗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심장을 꺼내 줄 수 있을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순간에 남보다 못한 사람처럼 자신을 대하는 그 기분이란.
벨져는 철저히 루이스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려달라고 해도, 싸늘한 눈으로 한 번 눈길을 주었을 뿐이었다. 네 죄를 네가 모르냐고 묻는 그 눈빛에 루이스는 항변할 수도 없었다. 그건 다이무스를, 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벨져가 말하지 않는대도 그걸 아는 순간 벨져는 그의 승리에 도취될 터였고, 그게 사실이라 한들 루이스는 다이무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굴어선 안 됐다.
루이스에게 다이무스는 구원자였다. 존경해 마지않는 형이었으며, 벨져는 이상과도 같았다. 꿈과 이상, 그 반짝임을 몸에 두른 그. 루이스는 그 모두를 손에 쥐려다 한 순간에 두 사람을 잃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게 어떤 것인지 루이스는 몸소 깨달았다.
그래도 처음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해일 뿐이라고, 천천히 시간이 흐른 뒤에 말하면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벨져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알아준 첫 사람이었다. 그런 그니까, 순간의 감정이 누그러지면 분명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돌아와 줄 거라고, 그의 오해였음을 깨닫고 멋쩍어 화를 낼지언정 결국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오년에 걸쳐 배신당했다. 순간의 망설임. 벨져가 준 기회에 잠시 망설인 그 몇 초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그게 더, 그와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건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제와 후회한들 흐른 시간은 돌이킬 수 없었다.
벨져가 떠난 첫 해, 그동안 루이스는 어떤 수단으로도 벨져와 닿지 못했다. 며칠을 걸쳐 심혈을 기울인 편지는 뜯지도 않은 채 반송됐고, 전화는 제가 수화기를 받아들면 끊겼다. 다가오는 부활절에 드디어 그를 만날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벨져는 여전히 루이스를 유령 취급했다. 말 한마디 붙여보려 하면 자리를 피했고, 방문을 두드리면 자는 척 하거나 문을 걸어 잠갔다.
문 밖에서 아무리 기다리고 말을 건넨들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루이스의 말을 단 한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도 모른 척 무시했다. 이 년째엔 방학이며 명절에 여행을 간다며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 때문인지 굳이 생각할 것도 없다. 벨져는 그의 인생에서 자신을 그의 치부처럼 여기고, 지워버렸다. 가장 반짝이는 시절은 그렇게 외면당했다.
다이무스와 벨져가 떠난 저택엔 적막이 흘렀다. 이글마저 없었다면 혼자 고독에 잠기어 자신을 죽이고, 인간의 삶을 끝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은 건 산 채 죽어가는 자신에게 이글이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간간히 그보다 더 자신을 걱정하는 다이무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책임감이라고 자조하면서도, 이글이 까불거리다가도 금세 표정을 바꿔 손을 꽉 잡아온다거나 지친 목소리의 다이무스가 제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 비탄에 찬 삶을 견뎌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려니 진동 소리가 울렸다. 마음 같아선 그것도 몰라라 하고 싶었지만 두 번 빠르게 울렸다 잠잠해지는 소리에 루이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이글이면 끊어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자 어찌 또 힘겨워하는 걸 알았는지, 다이무스의 이름이 액정에 떠있어 급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예. 접니다.”
“음. 그래. 몸은 좀 어떻고.”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걱정과 상냥함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이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괜찮다고 답했다. 잠겼던 목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요즘, 무리하는 것 같다더구나.”
“늘 그렇죠.”
“나는...... 네가 너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상냥한 진심에 루이스는 잠시 느꼈던 따스한 위로와 그 뒤에 찾아온 씁쓸한 감정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진 않겠지만, 잠시 핸드폰을 뗐다가 다시 얼굴 옆에 가져갔다.
“전 괜찮습니다.”
“혹시 그래도 힘이 들면....”
“네, 큰 도련님은 항상 제가 필요하시죠.”
다이무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던가. 루이스는 작게 웃었다. 그가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듯, 루이스 역시 다이무스를 잘 알았다.
“정말입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루이스.”
“아시잖습니까. 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단 강해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다른 말을 붙이기 전에 냉큼 반대편의 시간을 계산하고 다이무스에게 그야말로 휴식이 필요하며, 제가 없다고 마구 야근을 하다가 기껏 올려놓은 다크서클이 다시 내려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몰아붙였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제게 약했다. 먼저 사랑에 빠진 쪽이, 혹은 더 사랑하는 쪽이 지기 마련이라고 하는 세간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다이무스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웃었을 때, 루이스도 그를 따라 웃으며 그만 자라고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자리가 되어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오히려 더 갈 수가 없다는 걸 알까. 루이스는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한숨짓는 일이 많아졌다는 걸 안다.
이제는 정말 이 지독한 사랑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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