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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유리 온실
유리온실에서 이어집니다.
스물. 루이스는 막연히 제 나이를 셌다. 많다고 하면 많을 수도, 적다고 하면 적을 수도 있는 숫자다. 의지할 곳 없는 거리의 고아치고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남는 아이는 별로 없으니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운이 좋았다. 루이스는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표현했다. 어느 해 겨울, 동사 혹은 아사를 목전에 뒀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수도사 하나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친절한 수도사는 혼자 지내기 적적했다며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책을 펴놓고 창밖을 내다보던 루이스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책을 덮었다. 제멋대로에, 더럽게 까다로운 도련님이 마님과 돌아온 모양이었다. 벨져가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벨져를 돌보는 것은 루이스의 몫이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라곤 지금처럼 마님이 벨져와 정원을 산책 할 때뿐으로, 보통 이십 분 정도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루이스는 짧은 휴식을 마치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벨져가 돌아오면 주려고 차게 식혀놓은 레몬티를 찾는데 무언가 후다닥 움직였다. 몰라보려야 몰라 볼 수 없는 은발이 툭 튀어나와있는데, 그 딴에는 제법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걸 모른 척 해, 말어. 눈을 가늘게 뜨고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보며 냉장고를 연 루이스는 반쯤 비어버린 병을 발견했다. 그리고 떡하니 놓여있는 물기 어린 컵. 숫제 뭘 훔쳐 먹다 걸린 반응이라고 생각했더니, 정말일 줄이야.
루이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 허리 위에 손을 올렸다. 대충 짚이는 곳이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오시죠.”
“으아, 봤어?”
“다 보였는데요.”
“거 눈 되게 좋네.”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지금까지 다들 그냥 눈 감아 준 거 아닙니까.”
“헤헤. 너, 제법인데?”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장난기 가득한 눈을 빛낸 그가 식탁 아래서 나오다 머리를 찧고는 엄살을 부렸다. 막내다운 응석이었으나 루이스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비워놓은 건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곧 도련님이 돌아오시는데요.”
“나도 도련님이거든!”
“아픈 도련님은 아니죠.”
“뭐, 그건 그렇지만.”
“제 도련님도 아니시고요.”
“우와, 방금 그거 엄청 위험하게 들리는데?”
루이스는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막내 도련님을 내려다봤다. 매사가 장난인 양 가볍게 굴고 있지만 본능적인 감이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거리 출신답게, 살아남기 위해 익힌 눈치와 감각이다. 아닌 척 철없는 막내의 가면을 쓴 채 제 잇속을 챙기는 영악함은 루이스가 잘 아는 것이었다.
귀족가 막내 도련님치고는 의외지만, 그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와 사정이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오래 살아남으려면 저와 상관없는 문제엔 끼어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어차피 계약제지만요.”
“하하하, 작은형 하인이야 일주일이 멀다 하고 도망가는데 뭘. 며칠 째야?”
대체 얼마나 하인을 갈아치웠는지 날짜를 세는 단위도 이 모양이다. 루이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속으로 오늘의 날짜와 처음 이 저택에 온 날을 셌다.
“한 달이 조금 넘었네요.”
“뭐? 한 달? 흐응. 보기보다 인내심이 훌륭한가봐?”
“식사 시간도 못 참고 주방에 숨어드시는 도련님보다야 낫죠.”
하인치고 다소 건방진 발언이었지만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저택의 막내 도련님은 그마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웃음을 참으려는 의지랄 것도 없었고, 이 댁의 말썽꾸리기에 대해 들은 게 있었기에 딱히 걱정이 되진 않았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벨져 홀든의 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하인이었다. 지금 벨져의 기분을 잘 맞추고 있는 걸 생각하면 겨우 막내 도련님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해고되진 않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조금 괴롭힘을 받을지는 몰라도, 반응을 보고 있으면 정말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이 시답잖은 대화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루이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으므로, 루이스는 그가 마음껏 즐거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남들의 시선이나 조롱에 익숙한 몸이다. 고작 재밌다고 웃는데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작은형은 어때?”
다짜고짜 묻는 게 너무 직설적이라, 루이스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질문은 같이 지내기에 벨져 홀든이 어떠냐는 뜻으로도, 벨져 홀든의 상태가 어떠냐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루이스의 감은 전자를 가리켰으나 처음 본 사이에 고용주, 그것도 까다롭고 예민하기로 유명한 벨져 홀든과 사이가 어떠냐는 얘기는 하인으로서 대답하기 난처한 것이었다. 루이스는 가장 무난하고 상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오래 보지 않았던 가족이다. '네가 보기에 우리 작은형은 어떤 사람이야?' 보다는 형제의 상태가 어떤지 묻는 게 당연했다.
“도련님이야 늘 그러시죠.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져서....”
“잠깐, 나한테 몸이 어떠하네 상태가 좋네 그런 건 설명할 필요 없어. 보면 알겠지만 나는 홀든이고, 벨져보단 어려. 그러니 난 태어난 순간부터 벨져를 본 거라구. 나한테 내 작은형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필욘 없어. 그리고, 너도 어차피 여기 오래 있진 않을 거잖아?”
말투는 여전히 장난스럽지만 그 안에 든 말은 홀든이 자랑하는 검만큼 날카롭다. 식탁을 짚고 빙긋 웃은 그의 미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웃고 있지만 수가 틀리면 언제든 제 목을 꺾어버릴 것처럼 흉흉하다. 벨져보다도 어리니 저보다 어린 것은 당연한데, 홀든 가의 막내는 '홀든'이 원래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미소 끝에 이글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장난스러운 제스처의 의미는 항복이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롭고 가벼웠다.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에 루이스는 '말썽꾸러기 막내'에 대한 첫인상을 수정했다. 약자에겐 약자 나름의 방식이 있다. 루이스는 그저 이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루이스가 침착해진 것과 반대로, 탐색하듯 루이스를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잠시 웃음을 참는가 싶더니 결국 폭소를 터트렸다.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루이스는 굳이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너무 웃는 바람에 한 번 뒤로 넘어가기까지 하면서, 배를 잡고 눈을 훔친 이글 홀든이 루이스를 마주했다. 겨우 몇 분, 혹은 몇 십 초를 보냈을 뿐인데 무거운 공기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너무 그러지 마. 해칠 생각 없다고. 요즘 날카롭지? 그럴 거야. 곧 어머니 생신이고, 그날만큼은 아버지가 큰 파티를 열거든.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그 때라도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댁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병신은 아니라고 말이야. 덕분에 나는 올해도 작은형을 위한 희생양이 될 참이고.”
저택이 떠들썩하고 벨져가 날카로운 건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걸 제게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루이스는 오래 있지도 않을 소모품에 불과했다. 애초에 시중이나 드는 하인에게 집안사정을 말해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얘길 하는 저의가 뭡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하인을 이용해 친형제를 해치려는 게 아닌 이상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느낀 위기감. 루이스는 벨져와 닮은, 그러나 전혀 다른 빛을 띤 눈을 마주했다.
“오, 예리한데? 한 달 지났다고 했나? 그럼 적어도 벨져 마음에 들었다는 거네.”
이글은 이런 취향인 줄 몰랐는데 말이야.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문제는 그 혼잣말이 다 들린다는 거지만 루이스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내내 장난스럽던 그의 눈빛이 달라진 탓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더 이상 놀잇감이 되어주기 싫거든. 네가 해줄 일은 아주 쉬워. 독을 타라거나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말만 해주면 돼. 없는 애길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형한테 날 만났다고만 해. 아, 물론 내가 시켰다는 말은 말고. 어때? 이 말만 전해주면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생기는 거야. 까칠한 도련님 모시면서 설설 기는 종노릇 그만 두고, 내 집 마련해서 행복하게. 어때? 끌리지 않아? 자, 이건 선금.”
이글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루이스에게 던졌다. 꽤 묵직한 주머니를 열자 노란 빛이 루이스를 맞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금화일 것이다. 그것도 순금. 생전 가져본 적 없는 금화를 손에 들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진짜 금으로 된 금화라구. 일이 잘 되면 똑같은 무게로 하나를 더 줄게. 어떻게 할래?”
루이스는 말없이 무거운 주머니를 챙겼다. 뜻하는 바를 이룬 이글이 씩 웃으며 다가와 루이스의 어깨 툭툭 두드렸다.
“그럼 잘 부탁해.”
얼굴이 가까운 거리에서, 이글이 한 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며 고개를 까딱였다. 루이스는 잠시 이글의 행동을 곱씹는 듯 가만히 서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모두를 창 너머에서 지켜본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저도 모르는 새 꽉 쥔 주먹이 떨렸다. 손톱이 마른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한 번 쥔 주먹을 풀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빨라지고 거세진 걸음에 매일 반질반질하게 닦는 목재 계단이 쿵쿵 울렸다.
온 저택이 다 들으라는 듯 발을 굴러 방에 도착한 벨져는 방금 산책에서 돌아온 것처럼 식식거렸다. 큰 소리로 진즉 나와 저를 맞이했어야 하는 녀석을 부르려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말갛고 순한 시종의 얼굴을 하고 차가운 레몬티를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온 루이스가 능숙하게 방문을 닫았다. 벨져의 매서운 눈빛에도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양 투명한 크리스탈 잔에 차를 따랐다. 루이스가 공손히 내민 잔이 바닥을 굴렀다. 유리가 깨져 부서지고 차가 양모 러그를 적셨으나 루이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대신 깨진 유리조각을 한 번 바라보고, 작게 한숨 비슷한 것을 삼켰다.
“......다른 걸로 바꿔와.”
“위험하니까 도련님은 잠깐 앉아 계세요.”
루이스는 능숙하게 러그 위에 있는 의자를 옮기고 유리조각 위에 러그를 덮어놓고 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벨져 홀든은 긴 숨을 토하며 침대 앞 디반에 앉았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있으니 하녀 하나가 들어와 러그와 유리조각을 치웠다.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제 할 일을 마친 하녀가 나가고, 벨져는 머리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벨져의 숨이 가라앉을 즘 다시 문이 열렸다. 루이스는 얼음을 띄운 컵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벨져는 노란 꽃잎 하나가 떠다니는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루이스가 쥐어준 그대로 들고만 있었다.
곧 벨져의 발치에 장미 꽃잎이 담긴 도자기 대야가 놓였다. 루이스가 소매를 걷고 김이 오르는 물을 붓더니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하고 주전자에 담아온 물을 더 부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루이스의 물기어린 손이 벨져의 구두와 양말을 벗겼다.
물 온도를 재던 손은 딱 좋을 정도로 따뜻했고, 하얀 발을 만지는 손길은 더없이 자상했다. 트집 잡을 곳 하나 없이 도련님의 발을 씻긴 루이스가 한 쪽 무릎을 세웠다. 무릎 위에 수건을 올리고 벨져의 발을 그 위에 올려 물기를 닦았다. 발가락 사이로 수건과 손가락이 파고들고, 꼼꼼히 주무르고 마사지 한 뒤에 빠져나간다.
고작 발을 닦는 것뿐인데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게 느껴질 정도다. 한 번 맡은 일은 허투루 하는 법 없는 충직한 하인. 벨져 홀든을 위해 손을 데우고, 물의 온도를 맞추고, 발을 주무르는 루이스.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발에 키스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벨져는 얌전히 내리깐 눈과 그 위에 드리운 속눈썹을 보며 제 발등에 키스하는 루이스를 겹쳐 보다 동그란 정수리로 시선을 올렸다. 꽉 막혀있던 숨을, 들리지 않게 토해냈다. 속단하긴 이르다. 출신이 미천해 당장은 돈에 혹했을지 몰라도 주인을 저버리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 적어도 아직은.
생각이 떠다니는 사이 루이스는 다 닦은 발을 다른 수건 위에 올려두고 물에 잠겨있던 발을 꺼내 방금 한 행동을 반복했다. 발을 온전히 내맡긴 채 벨져는 루이스의 동그란 머리 위에 손을 얹는 상상을 했다. 머리에 손을 얹고, 퍼석하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귓바퀴를 어루만지는 상상을 끊은 건 루이스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얄팍한 기대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루이스가 운을 뗐다. 이불 위에 올려놓은 벨져의 손이 부드러운 천을 움켜쥐었다. 잘 개켜놓은 천이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도련님의 동생 분을요.”
벨져의 발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루이스가 말을 이었다. 어떤 기색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하고 안한했다. '오늘은 날씨가 궂네요.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돈도 주더군요. 주머니 가득 채운 금화로.”
더 참지 못하고, 벨져는 제 발을 마사지하던 루이스의 가슴팍을 찼다. 루이스가 형편없이 뒤로 나동그라졌으나 조금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조차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했다.
“지금 날 팔아 넘겼단 소릴 하는 건가?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돈 몇 푼이라뇨. 저 정도 금을 제가 살면서 만져볼 일이나 있겠어요. 뭐, 상관없어요. 저 말고도 거기 또 누가 있었으니 어차피 새어나가게 될 텐데.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보자보자 하니 아주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파행을 당연하다는 듯 입에 담는 하인이라니, 당장 채찍질을 해 내쫓아도 할 말이 없다. 기가 막힌 나머지 말문이 막힌 벨져는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난 루이스가 엉덩이를 털었다.
“쌓인 게 많았나봐요. 벨져는 고약한 심술쟁이에, 성격도 더러운데다 꼴같잖은 거드름이나 피우고 다니는 멍청이라고 하더라구요.”
“뭐? 이글은 그런 말까진....!”
아차. 홧김에 반박하던 벨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버렸는지 깨닫고 말을 멈췄다. 피식, 엷은 소리와 함께 루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개를 든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벨져는 그동안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얇게 휜 붉은 눈과 슬며시 올라간 입매.
“저도 충성을 시험한 수고비 정도는 받아야하지 않겠어요?”
루이스는 답지 않게 엷은 미소와 함께 노래하듯 말했다. 당했다. 당혹감과 함께 빠르게 돌아가는 이성이 벨져 홀든의 패배를 고지했다. 졌다. 완벽한 패배다. 벨져는 뺨과 목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냥 맹하고 우직하게 일만 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정도면 제법 얄밉고 영악한 하인이 아닌가. 물론 진짜 얄밉고 영악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
“....... 알고 있었나?”
“네. 모를 수가 없었죠. 알려주던걸요. 손가락으로 당신이 있는 곳을 열심히 가리키더라구요. 친절히도.”
“칫, 이글....”
벨져는 자신의 시야의 사각에서 이글의 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어쩐지 녀석 치고 시킨 대로 잘 한다 했다. 녀석을 너무 믿은 것이 제 패착이다. 하물며 제가 놓은 수에 자신이 걸려들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치사하게 시험하는 것보다는 낫죠. 그쪽은 그래도 형을 도와준 거잖아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만 툭 던지고, 루이스는 다시 한 무릎을 꿇고 젖은 수건을 주웠다. 루이스가 대야를 치우는 동안 벨져는 평생 몇 번 맛본 적 없는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웃고 있을 이글의 얼굴이 그려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의기양양해진 루이스가 가련한 패배자를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제길. 다 알면서 왜...!”
“제가 말해야 했나요?”
원망이 가득한 말에 돌아온 대답이 매정할 정도로 침착해 벨져는 고개를 들었다. 진한 굴욕과 패배감에 끓는 화를 내보내는 벨져와 달리 루이스는 여전했다. 그 태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울하고 화가 나, 벨져는 크게 소리 쳤다.
“그게 무슨!”
“저는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죠. 도련님 똑똑하시잖아요. 눈치도 빠르고, 예민하고. 뭐 다른 게 있나보다 하고....”
“뭐?”
“...모르셨어요?”
엉뚱한 대답에 벨져는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루이스는 그 자신이 오히려 당황했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벨져의 머릿속에서 내내 맞춰지지 않았던,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던 답답함의 퍼즐 조각이 나타났다.
“드문 일이네요. 그것도 몰라보시고. 평소엔 셜록 홈즈 저리가라시면서. 설마 모르실 거라곤 생각 못했죠.”
벨져 홀든은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모든 정황을 알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장난에 어울려준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루이스의 그 짜증날 정도로 무심한 태도도 말이 된다. 멀쩡히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고 시험한 주인에게 서운해 하고 따져 묻지 않는 것만 해도 그렇다.
모든 것은 벨져 홀든이 이 모두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벨져 홀든은 루이스에게 그런 존재다. 그 별 거 아닌 인정을, 얼마나 바라 마지않았던가. 잠시 잊었을지 몰라도 벨져 홀든은 원래 대단한 사람이다. 격의 차이와 품위, 모두가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
방금 전까지 화를 냈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뿌듯해진 벨져는 루이스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뭐, 알려주지 않았다면 저도 깜빡 속았을 테니까 기분 푸세요. 이건 추가 수당으로 칠 테니까.”
“흥. 말은 잘 하는군. 다음엔 이렇게 끝나진 않을 거다.”
“또 시험하시면 그땐 그만 두죠. 이거랑 지금까지 일한 거면 십 년은 거뜬할 텐데.”
“윽, 지금 해보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조금만 봐주면 바로 기어오르는 게 아무래도 하인 길을 잘못 들인 것 같다. 겁을 먹지 않고 옆에 붙어있는 건 칭찬할 만하지만 역시 이래서 하인으로 부리기엔 곤란하다. 벨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제 기분을 들었다 놓는 버르장머리 없는 하인을 노려봤다.
좀 눈치를 살피란 뜻이었으나 루이스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대신 루이스는 손을 씻고 다가와 벨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얼굴이 얄미워 도로 걷어차 줄까 생각하는데 루이스가 다시 엷게 눈을 휘었다.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바닐라에 제비꽃 사탕 얹어놨는데.”
“너나 먹어!”
“정말요?”
조금 봐줬더니 아주 사람을 갖고 논다. 잠시 그 미소에 숨을 죽였던 벨져는 울컥 치미는 짜증에 손에 집힌 베개를 집어 던졌다. 루이스는 슬쩍 몸을 옆으로 돌려 손쉽게 피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올게요.”
다시 한소리 하려 입을 열려는 찰나, 루이스가 벨져의 무릎을 토닥이며 일어났다.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그와 자신만의 비밀 같아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기분이 불쾌해진 벨져는 방을 나서는 루이스를 불러 세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너.”
등과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문을 나서려던 루이스가 돌아봤다. 이대로 그를 온전한 승자로 두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문을 나가면 제 손을 빠져나갈 것 같아서 더, 손에 쥐고 있어야만 안심이 됐다.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마.”
“네?”
무슨 연유에서인지, 벨져의 혀와 입술은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저가 잘나봤자 하인, 괴롭히려면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 주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창을 뒹굴고 고된 일만 하며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고, 채찍을 들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그만인데도.
“이글이랑 얘기하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아이스크림만 가지고 바로 올라와.”
“...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 이상 루이스는 벨져의 이상한 명령을 따를 것이다. 문이 닫히고, 벨져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다 제 행동이 참을 수 없어져 이불을 마구 차고 베개를 던졌다. 분이 풀리지 않아 식식거리면서도 떠오르는 건 '도련님 똑똑하시잖아요.'라고 하던 루이스의 목소리와 미소뿐이었다.
일을 할 땐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 원망과 짜증이 뒤섞였다. 이게 다 이글 때문이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이상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조금 몸을 격하게 움직였다고 차오른 숨에 벨져는 다시 침대 위에 엎어졌다.
아픈 몸과, 빼앗긴 것들 대신 얻은 건 하인 하나뿐이다. 밤낮으로 먹어야 하는 약과 어머니의 걱정을 비롯한 다른 모두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하나마저 자신을 저버린다면 그때는. 벨져는 생각을 멈추고 긴 숨을 내쉬었다. 다정도 지나치면 무정이라는 말이 떠올라 눈을 감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정말,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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