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벨져루이에 해당되는 글 70건
- 2018.02.17 [벨져루이] 유리 온실
- 2018.01.27 [벨져루이] Happy Birthday to you
- 2018.01.12 [벨져루이] Alles Gute zum Geburtstag
- 2018.01.02 [벨져루이] Two Pianos
- 2017.11.27 [벨져루이] 유리 온실
- 2017.09.06 [벨져루이] 유리 온실
- 2017.09.04 [벨져루이] 유리 온실
- 2017.07.05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5.24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5.14 [벨져루이] Midnight fight? 2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늘 그렇듯 책으로 내기 위해 생략한 부분이 있습니다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원고의 90%는 완성되어있으니 나오긴 할 거예요 그때까지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들에 둘러싸여 눈이 부시다. 칵테일 잔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은 루이스는 그런 것들 사이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한 사람을 보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본래 벨져 홀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좋은 옷을 골라 입고 한껏 치장한 벨져는 이 파티에 참석한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벨져는 절대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벨져의 곁에 있기에 자신은 너무나 초라했다.
출신도 미천한 하인 따위가 붙어 있어봤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상한 눈초리와 소문만 더할 뿐이었다. 하인 따위를 대동해야만 공식 석상에 나올 수 있는 벨져 홀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괜히 빌미를 제공하느니 떨어져있는 게 나았다.
마실 걸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뜬 루이스는 벨져에게 물을 갖다 주는 대신 멀찍이 떨어져 이름도 잘 모르는 술을 마셨다. 술을 나르는 다른 하인의 눈초리가 곱지 않고, 입술을 축이는 정도였지만 알콜인지 감정인지 모를 무언가에 목과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왜 혼자 이러고 있어.”
“이글 도련님.”
“그렇게 걱정 돼?”
주어가 없는 질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벨져의 몸 상태는 상당히 호전된 데다 오늘 저녁 파티를 위해 컨디션 관리를 철저히 했고 파티의 교양이나 매너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잠깐 누구 좀 만나볼래? 널 만나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정체 모를 불안이 엄습했으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에 루이스는 이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을 떠나기 전에 돌아본 벨져는 어느 아가씨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어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얼핏 봤을 뿐이지만 그녀는 그와 어울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사람이었다. 아른거리는 장면을 떨쳐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고요해졌고, 손님으로 북적이던 복도는 그 많던 사람이 다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정신이 팔려 깨닫는 게 늦었을 뿐, 일부러 사람을 물린 게 분명했다.
이글은 노크도 없이 테라스 문을 열었다. 오늘 같은 날 작고 아담한 테라스는 밀담을 나누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로 부른 것은 어째서일까. 루이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짓으로 저를 맞는 다이무스를 마주했다.
“미안하군. 따로 불러내기엔 좀처럼 시간이 안 나서.”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과 달리 다이무스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투였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다는 점에서 뻔뻔하기 그지없는 동생들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그들보다는 말이 통할 것 같다. 상식 밖의 인물을 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하면서도, 루이스는 가슴을 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먼 발치에서 봤을 때부터 그랬지만, 다이무스 홀든에게선 감출 수 없는 위압감이 흘렀다. 무기를 다루는 법을 연마하며 사람을 죽이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는, 강철처럼 단단한 사내다.
이글이 가벼운 행동거지로 감춘 예리함과, 벨져의 격과는 다른 무게감에는 자비도, 오만도, 가벼운 흥미도 없다. 그저 책임과 의무에 따른 냉철한 판단과 결단만이 있을 뿐.
그래서일까. 짓눌리는 듯한 침묵과 그의 눈빛에 압도된 나머지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만났을 뿐이지만 루이스의 감은 다이무스 홀든에 대한 경고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루이스가 조용히 심호흡 하는 사이, 그를 면밀히 관찰하듯 바라보는 다이무스의 위스키 잔에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잔을 쥔 채 마실 생각을 않던 다이무스 대신, 루이스는 힘겨운 첫 마디를 뗐다.
“방해 없이 얘기를 나누기엔 너무 수고를 많이 들이신 거 아닌가요.”
저택의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그가 굳이 이런 장소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으리란 예상이 맞았는지 다이무스가 눈썹을 까딱였다. 오래 가진 않겠지만, 파티장에서 벗어나지 않고 벨져의 시야에서 자신을 빼내기에 충분하리라. 다이무스는 얼음이 담긴 위스키 잔을 든 채 이글에게 눈짓했다.
문이 닫히고, 테라스에 단 둘이 됐는데도 다이무스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복도에서 이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며 입을 축였다. 워낙 단단한 풍채에 엄격하고 굳건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지만, 간단한 손짓 하나에서도 그의 단호하고 정확한 성격이 묻어났다.
은행가라기보다는 역시 군인이나 무인에 맞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다이무스의 손과 그의 손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자신의 도련님과 비교하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다이무스 홀든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이야기를 하려 한다면, 분명 그만큼 진지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자리에서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벨져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다이무스의 눈빛은 흠집을 찾는 것처럼 자신을 훑고 있었다. 어떤 틈, 혹은 단점이나 오점을 찾아내려는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도 책이 잡혀선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기에 루이스는 더 자세를 바로 했다.
볼 일이 있어 부른 주인에게 용건을 먼저 묻는 하인은 없다. 방금 먼저 말을 뗀 것만 해도 주제 넘는 짓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눈을 내리깔자 다이무스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잔을 내려놓았다.
“흠.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 없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벨져 도련님껜 아직 제가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귀족가의 하인이라 하면 그에 마땅한 교육과 훈련을 받기 마련이다. 그에 드는 비용도 물론 만만치 않았기에 하인은 곧 그 가문의 격과 가세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금을 쥔 채 무가의 명맥을 이어온 홀든은 그중에서도 단연한 규율과 가풍을 자랑했고, 하인 관리에도 철저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태어날 때부터 봐온 이들과 달랐다. 물론 벨져 홀든이라는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겠지만 주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눈을 마주보며 대등하게 대화를 하는 건 홀든의 하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딱 잘라 하는 거절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쫓아다니며 수발만 들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의 청년이 결연한 의지를 담아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 하는 거절에 눈살을 찌푸렸다. 냉큼 눈을 내리 깔며 공손한 척을 하는데,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게 척 보기에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이러니 마음에 들 수밖에.
“병간호만 하고 있기엔 아깝군.”
“...과찬이십니다.”
위에 선 자로서 부리는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해본 적 없긴 벨져나 다이무스나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자신의 태생과 신분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과 현격히 구분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도구나 다름없는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이글을 한심하다 여겼고, 그것이 홀든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감정에 섣부른 판단을 하는 건 아닌가?”
하지만 그냥 부리고 말 도구가 아니라면. 끈질긴 권유에 루이스는 더 거절하기 힘든지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루이스가 이 자리를 불편해하고 난색을 표할수록 다이무스는 이 초연한 청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지금 막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영민하고 눈치 빠른데다 충직한 아랫사람은 구하기 힘들다. 그런 사람을 고작 병수발 따위에 전념하게 두다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 까다로운 벨져를 이렇게 오래 모시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청년은 그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셈이다. 둘째 녀석은 뭐든 가장 좋은 몫을 가져가곤 했으니까.
“자네를 꽤 아끼는 모양이더군. 나중엔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텐데,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것 같나?”
“......꽤 확신하시는군요.”
“흠. 기회에 대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벨져가 마음에 두고 있으니 절대 놓아줄 리가 없다. 아무리 병석에 있다 해도 그의 지위와 재력으로 얼마든지 잡아둘 수 있고, 홀든의 안주인은 아픈 아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주인의 곁을 떠나는데 이보다 더 깔끔한 제안은 없었다.
그걸 알기에 루이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제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생이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지긋이 바라보며 놓았던 술잔을 들었다. 입술을 축이고, 긴 침묵을 깨려는 찰나 문이 열리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눈살을 찌푸린 건 다이무스와 함께 있는 루이스를 발견한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손위형제를 시원하게 무시한 벨져가 루이스에게 다가가 짜증을 부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이무스는 손에 쥔 술잔을 가볍게 돌렸다. 벨져는 결코 좋은 주인도 상사도 못 된다. 다이무스는 미래를, 많은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방금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몸값을 흥정했다면 오히려 시큰둥해졌을지도 모르나 루이스의 고민과 갈등은 이런 데 도가 튼 다이무스의 눈에도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얘기를 나눴으니 망설이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떠날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주겠다.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제가 드릴 답은 하나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더 이상 사양하긴 곤란하다고 판단한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굽히고 물러설 줄 아는 것도, 강자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다이무스는 벨져가 루이스를 옆에 둔 것이 몹시 그답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운명의 여신은 어쩜 이리도 얄궂은지. 자신은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한 것을 벨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가지고 있다. 벨져의 취향이 묻어나는 옷차림만 봐도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훤히 보인다. 순순히 뺏기는 걸 보고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벨져에겐 미안하지만 그를 데리고 런던으로 돌아가면 조금은 여유가 생길 것이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믿을 만한 사람의 필요성을 사무치게 깨달은 뒤라 더 간절했다. 진심을 다해,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이성적이고 타산적인 결정을 내리길 바랐다. 그러나 소망하는 바와 달리 그의 말간 눈에 어린 망설임과 애정을 보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점이 더 마음에 든 다이무스는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꼿꼿하게 제 주인을 지키려 하더니 약간의 스킨십에 당황해 붉어진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똑부러지는가 싶다가도 어설픈 게 어딘가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라고 첫인상을 고치는 사이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벨져가 매서운 눈초리로 다이무스를 노려봤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벨져.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우지 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잔뜩 가시가 돋친 말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가 날을 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 것을 빼앗아가려는데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대놓고 드잡이질을 하려 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체면을 차리는 걸 보아 둘째 녀석에게 이 하인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픈 동생이 아끼는 걸 뺏기도 미안하지만, 이쪽도 코가 석자다. 이글 녀석이 밖으로 나돌지만 않아도 이렇게 책임과 업무가 과중하지 않을 텐데. 다이무스는 작게 숨을 토하고 벨져와 루이스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발을 옮겼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8. (0) | 2018.02.17 |
---|---|
[벨져루이] Happy Birthday to you (0) | 2018.01.27 |
[벨져루이] Alles Gute zum Geburtstag (0) | 2018.01.12 |
[릭루이] 반장과 모자걸이 (0) | 2018.01.07 |
[벨져루이] Two Pianos (0) | 2018.01.02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Happy Birthday to you
루이스 생일 축하해!
이번에도 도움을 주신 초루님과 실비님꼐 감사 인사 드림니다!
고소한 냄새가 난다. 달군 팬에서 무언가 익어가는 소리와, 식욕을 돋는 맛있는 냄새. 루이스는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을 뿌리치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어젯밤 함께 밤을 보낸 남자가 없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걸로 보아 생일이랍시고 아침상을 차려주려는 모양이었다.
가만 보면 진짜 귀엽다니까.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몸을 돌리려다 허리가 우지끈하고, 골반이며 종아리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어제 그렇게 해댔으니 무리도 아니다. 기운도 체력도 몇 수 위인 그의 페이스에 따라가는 건 원래도 벅차고 힘들었지만 어째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다.
루이스는 새삼스레 생일의 씁쓸함을 느끼며 맨다리를 이불에 비비적거리다 하반신이 특히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급하다고 현관에서 서서 했더니 꼬리뼈에 멍이 든 것도 같았다. 하긴 그렇게 박아댈 때마다 부딪혔으니 멀쩡한 게 더 이상하다. 영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가진 거라곤 평범에서 조금 나은 정도인 신체 능력과 결정능력뿐이다.
아픈 허리를 짚고 걸음을 옮기자 고소한 냄새가 더 진해지고, 둔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걷던 루이스는 몇 걸음 못가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묶고 후라이팬과 냄비 앞에 서있는 연인의 모습을 발견한 루이스는 벽에 몸을 기댔다. 앞치마의 끈까지 꽉 동여매고 머리도 올려 묶은 벨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뒤집개를 들고 있었고, 루이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뒤집개를 꼭 쥐고, 온 신경을 팬 안에 쏟고 있는 벨져가 마침내 뒤집개를 팬에 찔러 넣었다. 입술까지 물며 뒤집기를 시도하는 순간 지켜보던 루이스도 덩달아 숨을 집어 삼켰다.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꽤 공을 들인 게 분명하다. 벨져의 얼굴에 집중하느라 정작 팬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못 본 루이스는 벨져가 안도의 숨을 내쉼과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리가 이렇게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볼 정도로 흥미진진한 것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인기척을 느낀 벨져가 뒤를 돌아봤다. 벨져의 뒤집기를 응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던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벨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분한 얼굴을 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라도 걸쳐라. 야만스럽기 짝이 없군.”
“큼. 자기가 찢은 셔츠가 몇 장인지 모르는 것 같네 홀든경.”
어젯밤 격렬한 정사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벨져는 새침떼기처럼 홱 고개를 돌렸다. 아침에 약한 사람이 일찍도 일어났다 싶어 다가가자 비로소 팬 안에 노르스름하게 익은 팬케이크가 보였다. 일단 모양은 흠잡을 데 없이 예쁘다.
“씻고 와라. 눈곱도 떼고, 옷도 입고.”
“벗길 땐 언제고.”
“때와 장소에 맞는 차림이라는 게 있는 거다.”
벨져의 뒤에서 서성이며 기웃거리자 눈살을 찡그린 벨져가 뒤집개를 잡은 손을 들어 루이스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뭘 들고 있으면 그걸로 치는 게 자연스러운데, 손등으로 밀어내듯 치는 게 또 벨져 홀든다워 피식 웃자 벨져가 루이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어서.”
“알았어. 맛있어 보인다.”
“맛있을 거다. 누가 만든 건데.”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자 팽팽하게 늘어나고 뭉친 근육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특히 아픈 곳을 문지르며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비누 거품을 얼굴에 바르는데 있어야 할 것들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제자리에 있던 것들이 발이 달려 도망갈 리도 없고, 제가 손을 댄 적도 없으니 찾을 곳은 하나다.
“벨져!”
루이스는 비누 거품 수염을 매단 채 화장실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벨져를 찾았다. 오늘의 요리사는 여전히 홀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저를 위해 애쓰는 걸 방해하는 게 조금 미안했지만 당장 급한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 면도칼 네가 치웠어? 칼은 쓰던 게 편한데?!”
벨져가 들은 척도 않자 루이스는 고개만 내민 채 목소리를 높였다. 벨져가 머무는 곳이라면 또 모를까 루이스의 하숙집은 조금만 목소리를 높이면 주방은 물론 침실까지 목소리가 닿고도 남았다.
혼자 고군분투 중이던 벨져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더니 양파를 썰던 칼을 들고 다가왔다.
“내가 치웠다!”
“그것 좀 치워!”
설마하니 그걸 제게 휘두르지는 않겠지만 들고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된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검이라면 또 모를까, 식칼은 도리어 생활감이 넘쳐서 무서웠다.
“그렇다고 프라이팬을 들고 올 수는 없잖나!”
“차라리 팬을 들어!”
진중한 얼굴로 골 때리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바람에 맞받아치려다 큰 소리를 낸 루이스는 아픈 목을 부여잡았다. 눈살을 찡그리며 목을 만지는 사이 몇 걸음만에 부엌으로 돌아간 벨져가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고 프라이팬을 든 채 다시 다가왔다.
“그냥 두고 온다는 선택지는 없어?”
“내가 누구 때문에....”
기가 차 헛웃음을 흘린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집중한다 싶더라니, 잠이 덜 깬 게 분명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내 면도기는?”
“내가 치웠다.”
“갑자기 왜?”
루이스의 턱에서 하얀 비누거품을 엄지로 훔친 벨져가 손가락에 묻은 거품을 루이스의 코에 묻혔다. 그러고는 피식 웃는데,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저를 놀리는 의도가 다분한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식사 후에 알려주지. 다 씻었으면 나와라.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또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잘 차린 아침상에, 사라진 면도용품. 루이스의 입장에서 벨져 홀든이 꾸민 계획은 대게 가늠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루이스는 짐작하기를 멈췄다. 전투나 섹스는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뭘 하려는지 다 보이는데 이럴 때는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상상의 범주가 닿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라 그런 걸까.
루이스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같은 차림에 수건 하나만 더한 상태로 화장실을 나왔다. 잘 세탁해 개켜놓은 새 옷을 꺼내 입고 젖은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털고 나니 조금 여유가 생겼고, 그 틈으로 맛있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급격히 밀려오는 허기와 유혹에 이끌려 주방으로 간 루이스는 아침 준비에 여념이 없는 애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등에 달라붙었다. 아직 일어난 지 얼마 안 됐고, 오늘 아침엔 벨져가 옆에 없었으니까 이 정도 쯤이야. 더구나 오늘은 제 생일이니 조금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그래서일까, 평소 같았으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핀잔을 줬을 벨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루이스의 젖은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그 사소한 스킨십에 기분이 좋아진 루이스는 탄탄한 등과 허리를 더 바싹 끌어안으며 벨져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다. 미운 날이 더 많은 것 같긴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사랑스러운 날도 있는 법이다.
“고마워. 아침부터 고생 많았겠네. 더 자야 하는 거 아냐?”
“괜찮다.”
음식을 다 하고 났더니 긴장이 풀리며 좀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수프를 그릇에 담는 벨져는 꽤 멀쩡해 보였다. 앞치마를 벗는 건 까먹었지만 그건 잘 어울리니 말해주고 싶지 않아 등에 매달려 있으니 벨져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네가 그랬잖나. 생일이라고 추운 밖을 돌아다니느니 집에서 남이 차려주는 밥이나 먹고 싶다고.”
“내가?”
“그래.”
언제 그랬는지는 몰라도 퍽 저다운 소원이었기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걸 또 기억해뒀다가 챙겨주는 그 마음씨가 예쁘고 고맙다. 사랑이 퐁퐁 샘솟아나는 기분이 된 루이스는 까치발을 들어 벨져의 뺨에 뽀뽀를 거듭했다. 그러자 뭐가 탐탁지 않은지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에 이게 무슨 반응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보고 있으니 그릇에 음식을 옮겨 담은 벨져가 루이스를 돌아보며 이마에 뽀뽀했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머리가 거슬려서다. 괜한 오해 말도록.”
“잠깐만.”
루이스는 벨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다 손을 뗐다. 곧장 침실로 가 서랍을 뒤지던 루이스는 물건을 가지고 벨져에게 돌아와 그의 앞머리를 앞으로 모으고 조심스럽게 핀을 꽂았다. 금이나 은은 아니지만 당장 쓰기 편하고 본연의 기능만 다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루이스는 핀을 곱게 꽂은 벨져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아?”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만....”
“괜찮아. 귀여워. 잠깐만 하다가 빼버리면 되잖아. 응?”
벨져는 당장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지 부엌 유리창에 잘 생긴 얼굴을 요리조리 비춰보다 루이스를 돌아보고 체념하듯 입을 앙 다물었다. 핀으로 머리를 올리고 그렇게 심통 난 얼굴을 해봤자 귀여울 뿐이라 싱글벙글 웃은 루이스는 벨져를 위해 손거울까지 가져왔고, 벨져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뒤에 눈을 가늘게 뜨며 한 마디 했다.
“뭐, 나쁘지 않군.”
“그렇다니까.”
루이스는 벨져의 시큰둥한 척에 맞장구를 쳤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는 것도 아니고, 다소 품위 없는 꼴이라 탐탁지 않지만 루이스가 이렇게 좋아하니 더 딴지를 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 자신이 보기에도 제법 괜찮긴 했다.
“나나 되니까 소화하는 거다.”
“그럼, 당연하지. 예쁘다. 귀여워.”
무엇보다 이 해맑은 미소 앞에선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벨져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루이스의 뒷목을 잡아 입 맞추고 그를 가볍게 밀었다.
“가서 앉아라.”
“의자는 안 빼줘?”
“원한다면.”
정말 기분이 좋은지 안 부리던 어리광을 부리며 눈웃음까지 살살 치는데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벨져는 생일을 맞은 연인을 위해 기꺼이 에스코트를 자처했다.
“나중에 앙갚음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생일이 좋긴 좋네.”
먼저 식탁에 앉은 루이스는 샐러드와 수프를 가지고 오는 벨져를 보며 웃었다. 벨져 홀든 경이 직접 만든 음식에, 친히 의자까지 빼주시다니 그야말로 영광이 따로 없다.
“뭔가 아침부터 촛불을 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네.”
“시간으로 치면 아침은 한참 지났다만.”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잘 먹을게.”
“들지.”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든 벨져의 눈짓에 루이스도 포크를 들었다. 신선한 샐러드에 빈 속을 데우는 따뜻한 수프. 절로 감탄이 나오는 맛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벨져를 보자 내심 초조하게 반응을 지켜보던 벨져가 그제야 안심한 듯 가볍게 코웃음 치며 웃었다.
“맛있어.”
“흥. 당연하지. 나는 벨져, 벨져 홀든이다. 이 내가 했는데 맛이 없을 리가.”
“집에 빵 없었어?”
방금 전까지 기고만장해져 한껏 자신을 뽐내던 벨져가 흠칫 굳었다. 미리 준비까지 다 해놓고 수프에 빵을 내가는 걸 잊다니.
“아, 그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고, 있으면 좋겠다 정도니까.”
“있다.”
“내가 가져올게.”
벨져의 반응을 눈치 챈 루이스가 다급히 말을 고쳤지만 완벽을 추구한 벨져의 마음엔 이미 작은 스크래치가 난 뒤였다.
“벨져.”
급격히 가라앉은 벨져의 기분을 알아챈 루이스는 굳은 얼굴로 수프를 뜨는 벨져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빵 같은 거 없어도 맛있어. 해준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뭐라고 했나?”
“그냥 그렇다고. 맛이 없어도 좋아했을걸.”
“흥.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 고마워.”
루이스는 눈을 휘어 웃으며 벨져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괜찮다는 위로와 함께 떨어지는 손이 아쉬워 그의 손을 잡아챈 벨져는 엄지로 루이스의 손등을 어루만지다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사랑이 느껴지는 아침이네.”
“언제는 안 그랬나?”
“그러게.”
언제 그랬냐는 양 평소의 벨져 홀든으로 돌아온 연인을 보며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좀 뻔뻔하고 어이없긴 해도 역시 이쪽이 더 보기 좋다.
“뭐 많이 하는 것 같더니, 아침은 이게 끝이야?”
“이건 전채다.”
“본격적이네.”
뭐든 소홀히 대충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이것도 퍽 벨져 홀든스럽다고 생각하며 남은 수프를 입에 넣었다. 딱딱하게 굳은 빵 한 쪽으로 겨우 하루를 나던 시절엔 이것도 감지덕지했을 텐데.
“쓸데없는 감상은 그만.”
“응. 생각이 많았네.”
“내가 다 준비해놨으니 넌 그냥 받기만 하면 된다.”
“하하. 그래. 오늘이 다 갈 쯤엔 너무 황송해서 엎드려 기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흥. 네가 퍽이나 그러겠군.”
샐러드와 수프 그릇을 비우자 일어난 벨져가 그릇을 치우고 새 접시를 가져왔다.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과 서니 사이드 업 반숙 계란프라이, 거기에 토마토와 구운 콩까지. 완벽한 영국식에 놀람 반, 감탄 반으로 입을 헤 벌리고 접시만 바라보고 있으니 도로 자리에 앉은 벨져가 짧게 혀를 찼다.
“내가 한 음식을 식게 둘 셈인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대체 왜 이런 것까지 잘 하는 거야?”
아침상을 차려주는 건 감동이지만, 이건 조금 분하다. 토마스가 한 번 먹어준 뒤로 연합의 동료들은 아무도 제가 한 음식을 먹어주지 않을 정도로 요리에 재능이 없는 루이스로선 주방에 들어가기는커녕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요리사가 차려주는 고급 요리만 먹고 살았을 벨져에게 요리 솜씨로 진다는 게 몹시 억울했다.
저런 얼굴에, 저런 몸에, 거기에 배경과 재능까지 다 주고 요리까지 잘 한다니. 조금은 모자란 구석이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과연 계시긴 한 건지 모를 신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던 루이스는 울상을 지으며 포크를 들어 베이컨과 계란을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간이며 식감이며, 뭐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음식이라 어깨가 축 쳐졌다.
“맛있네.”
“그 얼굴은 뭐지.”
“어떻게 이런 것까지 잘 하는 거야? 불공평해.”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자기 식사 정도는 챙길 줄 알아야지. 나이 먹고 그거 하나 못 하는 쪽이 부끄러운 거 아닌가?”
“나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해.”
“안다. 맛에 대해서는.... 뭐, 그건 내가 잘난 것이니 어쩔 수 없군.”
백 번 맞는 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아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다. 루이스는 뚱한 얼굴로 포크를 쥐고 훌륭한 정찬을 입에 넣었다. 맛있어서 짜증나고, 저를 놀리며 으스대는 벨져의 잘생긴 얼굴도 짜증났지만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봤자 투정에 불과하고, 그럴수록 이 잘난 남자는 저를 귀여워 할 테니.
“그런 날 애인으로 두고 있는 거다. 좀 더 자신에게 긍지를 갖도록.”
“위로가 안 대는데.”
음식을 입에 문 채 웅얼거리며 답하자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홀로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는 벨져의 이마 위에서 반짝거리는 핀과 아름다운 얼굴을 위안 삼으며 물 한 컵으로 답답한 속을 쓸어내린 루이스는 폭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다 가졌으면 좀 재수 없게 굴 수도 있지. 미인은 얼굴값을 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하나는 다행이네.”
“무엇이?”
“나 말고 또 어떤 사람이 널 감당하겠어. 기왕 영웅 하는 김에 내가 희생해야지.”
“희생이라.”
루이스는 바로 날카로워지는 벨져의 눈초리에 상큼하게 웃고 콩과 계란을 입에 넣었다. 넣자마자 음식이 반이나 남은 접시가 벨져 쪽으로 끌려갔고, 이게 무슨 유치한 짓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벨져가 뚱한 얼굴로 턱을 괜 채 루이스와 눈을 맞췄다.
“유치하게 이럴래?”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아침부터 한바탕 하자고?”
“그게 새벽부터 자길 위해 애쓴 사람한테 할 소린가?”
푹. 가슴을 찌르는 말에 루이스는 입 안에 남은 음식을 꿀떡 삼켰다. 맞는 말이라 말문이 턱 막히고 제가 저지른 말실수에 대한 미안함이 몰려왔다. 더 다투고 싶지도 않고, 그의 자존심을 긁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마지못해 하는 걸로 들린다만.”
“...질투했어. 꼴사납지만, 요리까지 완벽하길래 나도 모르게 그만.... 내가 어떻게 할까.”
눈에 힘을 준 채 잠자코 듣고 있던 벨져가 눈을 감았다 뜨며 접시를 루이스 쪽으로 밀었다. 한결 풀어진 표정에 움츠러들었던 루이스의 마음도 같이 풀어졌다.
“마음 같아선 몸으로 갚으라고 하고 싶지만, 날이 날이니 봐주지. 네 말대로 나도 유치했으니 피차일반이다.”
“그럼 이제 아무 문제없는 거지?”
“그래.”
“식겠다.”
밥을 앞에 두고 싸우는 것도 영 보기 좋은 일은 아니다. 루이스가 음식을 입에 넣으며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동안 그 몫의 접시를 비우고 포크를 쥔 채 망설이던 벨져가 말을 붙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맞군.”
“뭐?”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
그답지 않게 주저하는 목소리에 또 무슨 말을 할까 싶어 긴장했던 루이스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말에 벨져를 바라보다 달아오른 귀를 발견하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눌렀다. 앞머리는 핀으로 올리고, 부드럽게 굽이치는 머리카락은 하나로 올려 묶어 안 보일 수가 없었다. 뻔뻔할 정도로 넘치는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의미 없는 포크질을 하는데 방금 전까지 착잡하니 무거운 말을 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걸 이제 알았어?”
“그래도 희생한다는 말은 하지 마라.”
“농담이었어.”
“농담으로라도, 넌 이미 너무 많은 걸 포기하고 살고 있으니까. 적어도 내 앞에선....”
기어이 포크를 내려놓고 눈을 마주한 벨져의 눈빛에 루이스는 말을 잃었다. 갑자기 성큼 다가온 감정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러서 의식적으로 숨을 쉬지 않으면 멈출 것 같았다. 내가 너보다 못나서 희생한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해서 그렇게 화를 낸 거였구나 하고 깨닫자 전보다 더 미안해진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벨져의 손끝을 잡았다.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데.”
“안다. 제길,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불안은 전염병처럼 옮으니까. 루이스는 말을 꺼내는 대신 벨져의 손을 문질렀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같은 말은 해봤자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말만 들을 게 뻔했으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
잔잔하게 깔린 목소리가 담은 말에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젠 딱히 감흥도 없는 하루에 불과하지만 그 날을 축하해주려고 몇날 며칠을 고민했을 연인에게 박하게 굴 수 없었다.
“그럼 이제 치울까? 면도 해준다며.”
“그래. 그건 두고 잠시 쉬고 있어라.”
손을 놓고 일어난 벨져가 설거지거리를 한 데 모으려는 루이스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 직접 설거지라니, 황송해서 차마 두고 볼 수가 없다.
“벨져, 그냥 두고.... 나 허리 아파. 엉덩이도 아프고. 그냥 둬. 응?”
그릇을 들고 가던 벨져는 루이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덜 마른 머리카락과, 아래서 올려다보는 애처로운 눈빛이 제법 볼만했다. 이런 얼굴로 쳐다보면 누구든,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고 싶어질 것이다. 결국 벨져는 루이스의 간절한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시작한 그 날 이 남자를 베어버리지 못한 것도 이 얼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지나갔지만 그 이상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그가 원하는 대로 그릇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양손을 들자 겨우 루이스가 안심한 듯 엷게 눈을 휘며 웃었다.
“준비할 동안 누워있어라.”
“기왕 서비스하는 김에 마사지도.”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이제 아주 막 부려 먹으려 든다. 방금 전까지 예쁘다고만 생각했던 눈이 영악하게 빛나고, 그 여유로운 작태에 벨져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생일을 맞은 애인을 바라봤다. 귀여워 죽겠다는 티를 풀풀 내며 웃는 게 영 못마땅한데 여우같이 구는 게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드니 그야말로 중증이 따로 없었다.
이걸 어찌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끙 앓는 소리를 낸 벨져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여유가 넘치는 미소를 머금고 저를 귀여워하는 그의 이마에 뽀뽀하고 몸을 번쩍 안아들자 그림처럼 웃던 루이스의 표정이 무너졌다.
“으악!”
“품위 없긴.”
여유와 주도권을 되찾아온 벨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침대로 향했다. 루이스의 팔이 벨져의 목에 감겨들고 놀란 가슴을 추스른 루이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내 평생 품위 같은 건 가져본 적이 없는데.”
“안다. 얌전히 쉬고 있도록. 금방 올 테니 그새 잠들지 말고.”
“노력해볼게.”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벨져의 뺨을 잡아 저를 마주보게 한 루이스는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입술을 꾹 눌렀다 떼자 벨져도 마주 안으며 웃는데, 그 아름답고 따스한 미소에 무심코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벨져....”
쪽, 입술이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루이스가 감았던 눈을 뜨자 몸이 뒤로 밀리며 등이 침대에 닿고 가슴 위에 이불이 덮였다.
“보채지 말고 기다려라. 그도 아니면 아직 부족한가?”
“아니. 충분해.”
한 쪽 눈썹을 까딱이며 묻는 시니컬한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오만과 거부하기 힘든 섹시함이 묻어났지만 루이스는 망설이는 일 없이 대답했다. 이 얼굴에 넘어갔다간 침대에서 또 하루가 지나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최고의 컨디션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애인의 체력과 그의 얼굴에 홀려 보내버린 낮과 밤을 떠올린 루이스는 가슴께에 덮인 이불을 꼭 쥐었다. 벨져는 포식자를 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렇지 않은 양 눈치를 보는 남자의 앞머리를 흐트러트리고 그의 이마에 뽀뽀한 뒤 일어났다.
“오늘만큼만 사랑스러우면 더 바랄 게 없겠군.”
“음. 기대 안 하는 게 좋겠어.”
“동감이다.”
예상치 못한 빠른 긍정에 눈살을 찌푸리자 벨져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잘생겨도 얄미운 건 얄미운 거라, 루이스는 참을 생각도 않고 웃는 벨져의 허리를 걷어차려 발을 들었다. 물론 벨져 홀든 경께선 그마저도 유연하고 우아하게 피해버렸지만 어쨌거나.
“자상하게 굴던지 놀리던지 하나만 해, 하나만! 켈록, 컥....”
“흐음. 오늘이 가면 고려해보지.”
“그냥 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군. 뭐, 그런 점도 귀엽다만.”
밥을 먹으면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큰 소리를 내자 밤새 소리를 내지른 목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기침을 뱉었다.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 얄미워 베개라도 내던질까 생각하며 콜록거리던 루이스는 당장 급한 문제 앞에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실리를 택했다. 벨져가 내민 물 컵을 받아들고 쭉 들이켠 루이스는 입가에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어째 한 살 더 먹어도 변함이 없군.”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다는 건 좋은 거지. 칭찬 고마워.”
“뭐, 그런 뜻은 아니었다만....”
능청스럽게 사람 속을 살살 긁는 것도 어쩜 이렇게 능숙한지, 당장 무대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루이스는 무대 위에서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주인공 역을 꿰찬 벨져를 상상하다 빈 컵을 건넸다. 지금도 영화 속 대사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으니 여기서 대중의 인기까지 얻었다간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참. 너 주려고 시집 갖다 뒀었는데.”
“이따 와서 보겠다.”
“얼른 와. 춥다.”
“알겠다.”
루이스의 이마에 입 맞춘 벨져는 걷어차느라 드러난 맨발을 이불로 꼼꼼히 감싸 덮어주고 난로까지 앞에 놓아주고 나서야 등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주방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다리는 동안 눈이 감겼다.
사각사각. 귀를 간질이는 얇은 소리와 간질거리는 감촉에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어김없이 잘 생긴 얼굴이 보였다. 현실감이 없어 반쯤 뜬 눈을 깜빡이며 보고 있으니 턱 밑을 손바닥으로 감싸 잡고 있던 벨져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앞머리에 핀을 꽂고 있는 게 귀여워서 피식 웃자 벨져가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 높이에 이 각도라면 목과 등을 받치는 건 분명 벨져의 허벅지겠지. 무릎베개가 주는 안정감에 취한 것도 잠시, 벨져의 다리에 무게를 덜기 위해 어깨와 등에 힘을 주자 벨져가 루이스의 가슴을 꾹 눌렀다.
“힘 빼고, 움직이지 마라.”
“기다리려고 했는데....”
“쉿.”
조금 뜨겁게 느껴지는 손이 말끔한 턱을 어루만지고, 벨져가 숨을 죽이며 거품을 닦아낸 면도칼을 다시 루이스의 턱에 갖다 댔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목과 턱을 내맡긴 루이스는 도로 눈을 감았다. 목과 턱을 받친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비누 거품을 걷어내는 게 간질거려 눈을 뜨고 있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깬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먹자마자 다시 잠들다니 어젯밤 체력 소모가 꽤 심했나 보다. 벨져는 섹스할 때만큼은 이렇게 자상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좀 크긴 해도 잘 풀어줘서 괜찮지만 불이 붙고 이성이 휘발되면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벨져가 참고 천천히 하려 해도 먼저 애가 닳아 매달리게 된다.
루이스는 어젯밤 부끄러운 소리를 하며 벨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매달리던 자신을 떠올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음탕하다는 소리를 해도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벨져 앞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야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누군데. 루이스는 부끄러운 기억 대신 욕정에 달아오른 눈으로 저를 보며 얼굴을 붉히던 벨져를 생각했다.
야하고, 예쁘고, 다정한데다 부자에 몸도 능력도 좋은 연하의 애인. 그야말로 최고의 상대다. 물론 고작 한 살 차이지만 그것도 한 살 나름이다. 타고난 능력이나 태생부터가 다르다보니 벨져의 체력이나 요구에 맞추다보면 루이스는 꼼짝없이 이렇게 드러누워야 했다. 그걸 자초한 건 자신이지만, 안 그래도 건강한데 신체 강화 능력이라니. 아무리 공정한 신이라도 편애할 만한 외모에 재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가진 자에게 너무 많이 주는 것 같다.
“읏.”
“조심.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거의 다 했으니 조금만 참도록.”
생각을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입술에 힘이 들어갔고, 부드럽게 고개를 돌리던 벨져가 손을 멈췄다. 목에 완전히 힘을 빼고 맡겼던 루이스가 따끔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자 벨져가 칼을 내려놓고 매끈한 턱을 살살 문질렀다.
“피는 안 난다만, 아프면 말해라.”
“됐어. 괜찮아.”
루이스는 벨져의 배에 머리를 기댔다. 한 쪽 귀에서 시작해 반대쪽 귀까지 정성들여 만져주는 건 조금 부끄럽고 간지러워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양 손에 든 검을 휘두를 땐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눈 까딱 않고 베어버리는 주제에 손가락 두 뼘이 채 될까 말까한 칼날에 상처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살살 몇 번씩 손잡이를 고쳐 쥐는 것도, 칼날을 댈 때 숨을 멈췄다가 때면서 내쉬는 것도 전부 사랑스러웠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사랑받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포근한 만족을 주기엔 충분했다.
“시작했으니 하고는 있지만 굳이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군.”
벨져의 배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루이스는 머리를 굴려 말의 뜻을 헤아리는 대신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을 입에 담았다.
“해주고 싶다며.”
“나오는 게 없어서 말이지. 얇고 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난 것 같지도 않군.”
“너 만난다고 깔끔하게 했으니까 그렇지.”
“하루 사이에 못 볼 꼴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럼 볼 꼴이 되는 사람도 있는 거지.”
루이스의 턱에 남은 마지막 거품까지 걷어낸 벨져는 맨들맨들해진 턱을 문질러 확인하고 따뜻한 물수건을 얹었다. 비눗기가 남지 않게 꼼꼼히 눌러 닦고 나니 안 그래도 보송한 피부가 더 맑아 보여 뺨을 톡톡 두드리자 루이스가 벨져의 턱에 손을 뻗었다. 확인하듯 어루만지는 손끝은 얼굴만큼 부드럽지 않지만 그 또한 루이스의 일부였기에 벨져는 루이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손 잡는 것도 주저하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거리낌 없는 스킨십이 나쁠 리 없었다.
“자기도 그러면서 남말하긴.”
“나는 잘 안 보이는 것뿐이다.”
“하긴. 거기도... 으악!”
“품위 없는 소릴!”
평화롭게 이어지던 대화에 끼어든 불순한 말에 물수건을 짜던 벨져가 몸을 돌렸고, 그와 동시에 벨져의 팔꿈치와 루이스의 머리가 부딪쳤다. 졸지에 가만히 있다가 맞은 루이스가 벨져의 무릎 위에서 데구룩 구르고, 벨져는 루이스가 뜨거운 물을 받아놓은 대야를 엎지르지 않게 물이 든 대야를 번쩍 들어올렸다.
“내가 거기랬지, 거기가 어딘 줄.... 앗, 뜨거!”
“내가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것 같나? 가만있어라!”
급하게 드는 바람에 흘러넘친 물이 루이스에게 튀고, 루이스는 왔던 방향의 반대로 굴러 벨져의 무릎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에 진이 빠져버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고 벨져가 대야를 다시 내려놓으며 떠들썩한 상황이 종료됐다.
“그래서, 성희롱으로 고소할 거야? 그런 걸로 치면 나도 할 말 많은데.”
끄응. 눈을 가늘게 뜬 벨져가 영 못마땅하다는 신음을 흘리다 루이스의 뺨을 찰싹 때렸다. 소리만 나지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루이스는 흠칫 몸을 떨며 진짜로 맞은 척 뺨을 감쌌다. 장난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과한 반응에 벨져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여 짧게 뽀뽀했다.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데도 올라간 입꼬리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귀엽게 보이니 어쩌겠는가. 결국 웃음을 터트린 루이스는 벨져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오늘 같은 날, 이런 분위기면 아무리 입술이 부르터도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좋아해.”
“안다.”
피식 웃는 루이스를 따라 웃는 벨져가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루이스는 그를 위해 턱을 들었다. 뒷머리에 닿는 무릎베개가 주는 달달하고 포근한 분위기에 취해, 아름답고 강한 연인의 손길에 취해 루이스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뺨을 어루만지자 비단결처럼 매끈한 피부가 손에 착 감겨들었다.
“혹시 내가 생일선물로 고양이나 강아지 데리고 살자고 하면 어쩔 거야?”
조근조근, 속삭이듯 담은 말을 마치자마자 험악해진 얼굴에 루이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상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벨져의 뺨을 잡아 입을 맞추고, 단단히 삐져 입을 열어주지 않는 그의 입술을 핥으며 눈을 올려 뜨자 루이스를 떼어낸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이라서 봐주는 거다.”
“그래.”
“날 안 보고 살 수 있으면 기르고.”
“으음. 그럴 수야 없지.”
루이스는 벨져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두르며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심통을 낸지 얼마나 됐다고 순순히 입을 열어주는 게 귀엽다. 이러니 계속 놀리고 싶지. 루이스는 책임을 전가하며 벨져의 속눈썹이 떨리는 걸 지켜보던 루이스는 벨져가 실눈을 뜨자 바로 눈을 감았다.
“키스할 땐 눈을 감는 게 예의라고 안 배웠나?”
“네가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있어야지.”
“하, 말은 잘 하는군.”
“하지만 사실인걸. 너도 부인하지 않잖아.”
“말할 필요가 없지.”
넘치는 자신감은 오만으로 이어진다. 그 덕에 이 자리에 살아있을 수 있는 루이스는 벨져를 나무라는 대신 다시 한 번 키스했다. 루이스는 벨져의 오만을, 제게는 없는 그 당당함과 자신감을 사랑했다.
“사랑해.”
가끔, 생각이 지나치면 머릿속에 담긴 것이 혀를 타고 흘러넘친다. 잠시나마 형체를 갖추고 사라진 목소리를 깨닫자 루이스의 허리 위에 머물던 벨져의 손이 멈췄다. 마주한 시선 사이, 그 짧은 틈새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오가고 열이 올랐다.
- 띵동.
“어, 잠깐 내가...!”
“아니. 내가 가지. 가만 있어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벨이 올리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누구 하나는 바라보던 사람을 침대 위로 떠밀었을 거다. 너무 달콤해서 마비될 것 같은 시간을 방해하는 소리에 루이스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벨져가 루이스의 어깨를 눌러 눕히고 일어났다. 아직 머리에 핀을 꽂고 있다고 말해줘야 했는데. 뒤늦게 깨달은 루이스는 벨져의 등을 향해 뻗었던 손을 이불 속에 넣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이니 어쩌겠는가. 오면 잘 달래야지. 어쩌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지도 모른다. 벨져 홀든은 웬만한 게 아니고서야 그의 미모로 모든 것을 설득하는 남자니까.
“뭐야? 외판원?”
“아니. 내가 주문한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돌아온 벨져는 웬 상자와 함께였고, 침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벨져를 기다리던 루이스는 빙긋 웃었다. 하긴, 벨져 홀든 경께서 이 정도로 기념일을 건너 뛸 리 없다. 더구나 몇 푼 되지도 않는 봉급을 모아 선물을 해준 다음이라면 더더욱. 보나마나 제 생일선물일 게 분명했지만 루이스는 벨져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뭔데?”
“열어봐라.”
베개로 허리를 받치고 헤드에 몸을 기댄 루이스가 묻자 벨져가 루이스의 다리 위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너무 뻔하게 주는 거 아니야?”
“기대했나?”
“조금?”
“오늘이 점점 가고 있다는 것만 알도록.”
“하하하. 미안. 농담이야. 고마워.”
능청스럽게 모른 척하다 볼에 뽀뽀하자 뚱하니 삐질 것 같던 벨져의 표정이 스르륵 풀어졌다. 아닌 척 해도 엄청 귀엽다니까. 성격도 나쁘고 성질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뻔뻔하고 재수 없지만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냥 열면 돼?”
그리 크지 않은 상자를 들며 묻자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들었는지 몰라도 무거운 물건은 아니다. 그래도 나름 보석을 받았으니 장신구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상자를 열자 작은 상자 세 개가 나타났다. 그것도 그냥 종이 박스가 아니라 귀중품이 들어있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상자다.
“설마 꽝 이런 거 들어있는 건 아니지? 확률 뽑기 그런 거야?”
“하, 이 나를 뭘로 보고.... 전부 네 거다. 어느 걸 뽑아도 당첨이지.”
“다행이네.
루이스는 웃으며 중앙에 있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뭐가 있을까. 이런 상자가 세 개쯤 되면 뭐가 나와도 실망은 안 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상자를 열자 고귀한 은빛으로 빛나는 회중시계가 나왔다.
열어보라는 눈짓에 얼떨떨하게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필체로 쓰인 간지러운 문구와 숫자 대신 보석이 반짝거리는 시계판이 보였다.
“자수정과 가넷이다. 보다시피 특별 주문품이지. 잘 간수하도록.”
“'사랑하는 나의 연인 루이스에게.' 라니,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야?”
루이스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묻자 벨져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멋쩍어하는 것도 귀엽지만 루이스는 다름 아닌 벨져 홀든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에 조금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안쪽에 이름이라도 써줄 걸 그랬군. 물론 잊지 않고 시계 뒷면에 써놨다만.”
“이걸 어떻게 들고 다녀?!”
“못 들고 다닐 이유가 있나?”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일단 넘어가.”
침착해야 한다, 침착해야 한다! 열면 열수록 더 부끄러워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루이스는 당장 눈앞의 고난을 피하기 위해 다음 상자를 열었다. 여전히 고급스럽고 화려하지만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루이스는 얇은 고리를 들어 앞뒤를 살폈다. 자수정이 하나 박혀있는 걸 빼면 그리 특별해보이진 않는 동그란 링의 용도를 몰라 벨져를 쳐다보자 벨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정답을 내놓았다.
“열쇠고리다.”
“아. 시계도 그렇고,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거야?”
“듣고 싶나?”
벨져는 그제야 마음에 드는 질문을 들었는지 팔짱을 낀 채 한 쪽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어떤 긍정의 제스처를 취하기라도 하면 지금의 열 배는 부끄러워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루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언제든 내게 돌아오라는 뜻이고, 시계는 볼 때마다 날 생각하라는 뜻이다. 네가 스물네 시간 언제나 나를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건 아주 잘 안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너도 내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밑지는 장사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나도 네 생각 해.”
“하, 미련하다! 한참 부족해. 알겠나?”
아직 하나가 더 남았는데 이불 속에 숨고 싶은 기분이다. 루이스는 상자만 만지작거리다 작게 숨을 토했다. 그렇게 난방이 센 것도 아닌데 너무 덥다. 손끝이며 뺨이 화끈거리는데 도무지 열이 식을 줄 몰랐다.
“남은 것도 열어 봐라.”
루이스는 기대감에 가득 찬 벨져의 눈빛에 마지못해 마지막 상자를 꺼냈다. 만약 여기서 더 했다간 부끄러워서 죽은 첫 번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연합이 영웅이 애인과 함께 생일을 보내다 행복에 겨워 사망하다. 같은 기사가 나면 다른 건 몰라도 웃기긴 하겠지. 특종이라고 누군가는 좋아하겠지만. 떨림을 잊기 위해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며 루이스는 마지막 상자를 열었다.
벨져가 특히 기대하는 것 같아서 긴장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익숙한 물건이 나왔다. 루이스는 귀걸이 한 쪽을 꺼내 높이 들었다. 반짝이는 보석은 벨져도 자신도 즐겨 쓰는 자수정으로, 세공도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딱 하나.
“이건 왜 하나밖에 없어?”
귀걸이는 본디 두 개가 한 쌍이다. 척 보기에도 엄청 비쌀 것 같지만 다이아몬드나 루비, 사파이어같이 비싼 보석이라면 또 모를까 자수정은 그리 비싼 축에 속하지 않는다. 벨져의 생일 선물을 고른다고 이곳저곳 보석상을 돌아다녔으니 그 정도는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벨져 홀든이 금전적 문제로 그랬을 리는 없었다.
루이스의 질문에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린 벨져는 그의 목깃 안으로 손을 넣었다. 얇은 은색 줄에 조금은 어색하게 달려있는 보석을 보여준 벨져가 목걸이와 옷깃을 정리하고 루이스의 손등에 그의 손을 얹었다.
“언제 어디서나, 너는 내 일부다.”
“......”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뺨이며 피부가 맞닿은 손에 열이 홧홧하게 오르고, 더없이 진중한 고백에 숨이 턱 막혔다. 벨져는 피식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한 손으로 루이스의 뺨을 감싸 입을 맞췄다.
“음, 그.... 고마워.”
벨져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잡자는 건줄 알고 손을 얹자 맞잡으며 눈살을 찌푸리는데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이자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맞잡았던 다시 손바닥을 내밀었다.
“원래 이런 건 선물한 사람이 직접 해주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소독해야 하는데....”
“그럴 줄 알고 다 준비해놨다.”
쑥스러워서 한 발 빼며 시선을 피하자 벨져가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목에 손을 뻗었다. 피할 수도 없는 거리라 목에 닿은 손이 머리카락을 쓸며 귀에 닿았고,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은 벨져의 손에 바르르 몸을 떨자 귓불이 잡혔다. 부드럽게 귀를 만지작거리던 벨져는 말랑한 귓불에 입을 맞췄다.
“읏. 잠깐....”
“가만히.”
어쩜 이렇게 준비성도 철저한지. 루이스는 귓불에 닿는 차가운 알콜에 흠칫하며 눈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예민한 곳이라 간지러워서 자꾸만 목이 움츠러드는데 벨져가 소독한 귀에 호호 숨을 부는 바람에 참기 힘들었다.
“읏, 흐.... 벨져....”
“보채지 마라.”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섹시하다. 순식간에 야릇해진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어 벨져의 팔꿈치를 잡자 잡힌 귓가에서 벨져의 목울대가 울렸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자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지고, 차가운 금속이 살갗에 닿았다. 이미 뚫려있는 곳이라 아프진 않았지만 손끝이 닿은 곳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간지러워 입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됐군.”
“응. 고마워.”
“제대로 보지도 않고?”
“네가 고른 거잖아. 당연히 어울리겠지.”
거울을 가지러 일어선 벨져의 소매를 잡은 루이스의 말에 벨져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가식이나 체면치레라곤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진심과, 그 말이 담고 있는 신뢰와 애정이 기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더없이 즐거워진 벨져는 턱을 치켜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다.”
“네 생일케이크도 같이 왔으니 저녁에는 함께 초에 불을 붙이도록 하지.”
“저녁까지 해주려고?”
“이 나를 두고 다른 사람과 남은 시간을 보낼 생각이라도 한 건가? 어리석군. 미련하다!”
자신이 넘치는 걸 넘어 거만하게 느껴지는 말투와 세상의 온갖 멋짐과 아름다움은 다 제 것이라는 양 뽐내는 얼굴, 빳빳하게 쳐든 고개까지, 어딜 봐도 평소의 벨져 홀든이다. 방금 전까지 너무 두근거려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던 루이스는 작게 웃으며 안도 섞인 숨을 내쉬었다. 자상한 애인도 좋지만, 역시 이 쪽이 조금 더 편하다.
“이제야 좀 살겠네. 고마워. 정말로.”
“...네게 과분하긴 하지. 영광으로 알도록.”
“하하. 그럼. 여부가 있겠습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봐도, 앞머리를 넘긴 핀 때문에 귀여워 보일 뿐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핀을 뺐다. 오래 꽂아놓은 탓에 자국이 남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겨 모양을 다시 잡아주는데 벨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벨져, 오늘은....”
아, 이건 위험하다. 막을 새도 없이 고개를 옆으로 틀며 눈을 감고 입을 맞춰오는 벨져의 입술에 입이 막혔다. 입술을 비비고, 혀가 얽히며 빠져드는 진한 키스에 루이스는 눈을 감고 벨져의 뒷목을 잡았다. 손등을 간질이는 머리카락 틈새로 손가락을 넣고, 키스에 전념하다 보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아, 하.... 벨져....”
“안다.”
새벽까지 해서 더 하는 건 무리다. 애초에 기본적인 체력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문제라지만 존재감을 과시하며 단단하게 부푼 앞섶을 무시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쯤 되면 애인이 너무 건강한 것도 문제다.
“힘들면 그냥....”
“그, 한 번 정도는 괜찮으니까.... 살살....”
“조심하겠다.”
그 애인의 얼굴에 홀려 매번 지고 마는 자신이 제일 문제인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벨져 홀든이면 어떻게든 지게 되어 있다. 어쨌거나 인생은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패자는 그고, 승자는 자신이니 이 정도는 양보하는 게 도리다.
그렇게 오늘도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 루이스는 입술을 맞추러 다가오는 벨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파르르 떨리며 감기는 그의 속눈썹을 보며 눈을 감았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0) | 2018.02.17 |
---|---|
[루드루이] 08. (0) | 2018.02.17 |
[벨져루이] Alles Gute zum Geburtstag (0) | 2018.01.12 |
[릭루이] 반장과 모자걸이 (0) | 2018.01.07 |
[벨져루이] Two Pianos (0) | 2018.01.02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Alles Gute zum Geburtstag
1/10 Late night / Office
1월 12일. 루이스는 달력에 표시해놓은 빨간 동그라미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출발하면 늦지 않게 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연주회는커녕 새해맞이에도 관심이 없지만 애인의 생일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날이기도 하고, 몇 날 며칠을 회유한데다가, 안 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물론 그런 이유가 없어도 애인의 생일을 가까이서 축하해주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작년에는 시간을 맞추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늦어버렸고, 별 다른 선물도 없이 하루 종일 호텔에서 몸의 대화만 나눴는데 올해도 그렇게 때웠다간 한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올해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벼르고 새해를 맞으러 오스트리아로 떠난 애인을 떠올린 루이스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펜을 들었다.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려면 한시라도 바삐 끝내야 했다.
1/11 Afternoon / Platform
새벽까지 서류를 마치고 아침 첫 배를 타고 칼레로, 또 칼레에서 곧장 기차를 타고 몇 시간. 이동하는 내내 정신없이 졸다 깨길 반복한 루이스는 빈에 도착한 열차가 다시 출발하기 전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내렸다.
슬라이드라도 타고 빠져나와야 하나 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계단을 밟고 내려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쉰 루이스는 출발하기 전부터 몇 번이고 확인한 코트 안주머니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플랫폼을 나왔다. 확실히 대륙은 공기가 다르다. 숨 쉴 때마다 뿌연 입김이 서리는 건 똑같지만.
바쁜 걸음으로 역을 나오자마자 루이스는 익숙한 사람과 그와 잘 어울리는 까만 자동차를 발견했다. 차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저를 노려보는 연인과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낯선 도시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가 반갑고, 풍경이 아름답다. 가만 보고만 있어도 절로 지친 마음이 회복되는 것 같은데 정작 루이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남자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역에 사람이 다 빠져나가도 보일 기미가 없기에 네 녀석이 내뺀 줄 알았다.”
“설마. 나 그렇게 신용이 없어?”
“워낙 전적이 화려해야지.”
지치고, 힘들고, 졸려서 인내력의 한계가 가까워지면 장난도 장난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법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해서 왔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루이스는 뚱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벨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열차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데 사람은 안 오지, 연락도 없지. 그야말로 발만 동동 구를 상황이다. 추운데 차에 있지 않고 나와서 기다린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역에 사람이 다 빠져나가도록 안 나타나는 사람을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혹시나 하는 불안에 마음을 졸이다 차를 박차고 나왔을 걸 생각하면 또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이스는 특별한 날을 앞두고 다투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똑같이 짜증내는 대신 앓는 소리를 내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너 보려고 어제, 아니지 오늘 새벽까지 밤새서 일하고 왔어. 좀 봐주라.”
“네가 하는 거 봐서. 며칠 비웠다고 또 이 꼴이 되다니. 쯧.”
벨져 홀든이 그럼 그렇지. 루이스의 예상대로, 벨져는 짜증을 내면서 그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루이스의 목에 두르고 다크서클이 짙게 진 눈 밑을 엄지로 문질렀다. 고급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뺨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동안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솔직하지 못해도 애정 어린 걱정이다.
“일단 타라. 바람이 차군.”
“아, 그....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은 사람을 운전기사로 쓸 것 같나?”
포트레너드야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그렇다 치지만 여긴 오스트리아고, 빈은 유명인사도 많은 도시니 혹시 무슨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물은 거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벨져 홀든이 친히 문까지 열어주시는데 안 탈 이유도 없고, 그의 말대로 바람이 찼기에 바람이 없는 것만으로도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연주회는 언제야?”
“무식하긴. 연주회가 아니라 오페라다.”
“아, 그래.”
벨져가 고개를 까딱이자 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루이스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나 그거나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의 말대로 루이스는 이쪽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성의가 없군.”
“나 열세시간 동안 이동한 건 알지?”
흥. 아름답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미남자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단 투로 코웃음을 쳤다. 다른 사람이 그러면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오만하고 당당한 남자가 그러니 기분이 나빠지려다가도 무심코 그 미모에 홀려 기분 나빠할 틈이 없어지고 만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정장도 없겠군. 적어도 장소에 맞는 격식을 갖추는 정도의 예의는 보여야 할 거 아닌가. 나, 이 벨져 홀든과 함께 빈 오페라 하우스에 가려면 말이지.”
그 얼굴에 홀리는 건 제아무리 냉철한 결정사라도 다를 게 없어서, 루이스는 벨져가 말을 마치고 나서야 잠시 놓았던 이성을 되찾았다. 무표정도 무표정이지만 기분이 좋은 벨져는 더 위험하다. 넋을 잃고 보다가 휘말린 게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그보다, 힘들게 왔는데 좀 좋은 말 해주면 안 돼? 그, 사.... 보고 싶었다던가 그런 건....”
“사랑해. 보고 싶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사랑한다던가, 라는 말은 운전석에 있는 기사의 눈치가 보여 말하지 못하고 조금 더 평범한 말로 돌려 말했는데, 들떠 있던 벨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을 뿐, 목소리에 불쾌함이 묻어나는데 눈치 없이 두근거리는 건 대체 누구의 심장인가. 루이스는 꽁꽁 언 얼음을 다시 얼려버릴 것 같이 싸늘한 벨져의 눈빛과 벨져의 얼굴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에 말을 잊었다.
루이스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벨져를 바라보자 그의 말을 잊게 만드는 장본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다가와 입을 맞췄다. 뒷목을 잡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틀며 눈을 감고 애틋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루이스는 벨져의 마음을 깨닫고 되레 미안해졌다.
오자마자 짜증을 낸 건 아마, 연락도 뜸하더니 특별한 날을 앞두고 제대로 준비도 안 하고 와서 당연한 걸 묻고, 남의 눈치나 보는 게 서운하다는 뜻이겠지. 과연 우아하고 고상한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봐 보고 싶었다, 네가 날 더 신경써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한다. 루이스는 벨져의 매끈한 뺨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
“그래도 힘내서 왔으니까 봐줘. 응?”
샐쭉하게 실눈을 뜬 그를 향해 한껏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이자 벨져가 루이스의 코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요령만 느는군.”
“하하. 그러게.”
연상의 애인, 그것도 화려한 걸 넘어서 고혹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을 만나며 익힌 요령은 연하의 애인을 만날 때도 유용했다. 예쁘고, 화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쉬이 마음을 내주지 않는 고고한 사람들. 이렇게 보면 참 한결같은 취향이다. 루이스는 벨져가 다른 사람 생각을 하는 걸 트집 잡기 전에 그의 입술을 입술로 눌렀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 걸 영 마뜩치 않아하면서도 키스를 거부하지 않는 게 귀여워 웃자 대번에 벨져의 눈매가 변했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 정장 없어. 시작까지 몇 시간 안 남지 않았나?”
“루이스.”
“늘 불만이었잖아. 오늘은 토 안 달고 네 말대로 할 테니까. 응?”
“...정말인가?”
“그래.”
“좋아. 그럼 옷을 맞추러 가야겠군. 아, 물론 그 전에 식사부터 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들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내내 찌푸린 얼굴이던 벨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꿍꿍이속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는 게 보였기에 더더욱 물릴 수 없었다.
무슨 음흉한 짓을 하려는지 몰라도 이 정도면 생일 기념 서비스로 충분하겠지. 사악하게 웃는 것도 두근거릴 정도로 잘 어울리는 애인 때문에 고생길이 열린 루이스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외면하며 달리는 차 안에서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1/11 Still Afternoon / Tailor Shop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루이스는 몇 번째 갈아입는 건지 모를 정장을 입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트리비아의 의상실에서도 해본 적 없는 옷 갈아입기에 지친 몸이 그만 쉬게 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눕고 싶다. 최소한 앉기라도 하면 좋겠다. 쇼핑을 따라다닐 때도 힘들긴 하지만 인형놀이가 수백 배는 힘들다. 루이스는 아까 입었던 것과 뭐가 다른 것인지 모를 정장을 받아들고 다시 한 번 탈의실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벨져가 이건 허리를 줄여야겠느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하고 있고 벨져 홀든이 인정한 테일러는 그에 맞장구를 치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제발 누가 좀 살려줘....”
여기, 도움!을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다시 한 번 셔츠자락을 당긴 루이스는 셔츠 가터에 끝자락을 고정하고 바지를 입었다. 그 위에 서스펜더, 또 거기에 단추가 족히 여덟 개는 달린 것 같은 베스트, 그리고 재킷. 이것만 입어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체 여성복은 얼마나 더 힘들까.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스는 트리비아와 사귀기 시작한 무렵 그녀가 시켜준 경험을 떠올리고 몸서리를 쳤다. 코르셋에 킬힐, 거기에 몸을 죄는 갖은 속옷을 껴입고 또 몸을 옥죄는 것에 비하면 이쪽은 천국이다.
“벨져어....”
힘들어서 축축 늘어지는 목소리에, 울상을 지으며 문을 열고 나가자 벨져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긋이 품평하는 눈빛에 부끄러웠던 것도 처음 뿐, 지금은 그저 이 정장 지옥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후회할 줄은 말을 꺼냈을 때부터 알았지만, 생각보다 후회가 막심했다.
“알맹이는 여전히 격이 떨어지지만.... 뭐, 그럭저럭 봐줄만 하군.”
“그럼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화색을 띠자 잠시 자리를 떴던 테일러의 조수가 넥타이만 한 가득 걸려있는 행거를 끌고 왔다. 벨져는 행거를 흘끗 보고는 대여섯 개를 골라 루이스의 어깨에 널어놓고 고민하다 하나를 골라 목에 둘렀다. 이럴까봐 목깃을 내리지 않았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벨져가 루이스의 턱을 들어 올리고 다시 목깃을 세웠다.
테일러와 조수가 이런 일은 자기네들이 하겠다며 안절부절못하는데도 벨져는 루이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눈치를 보던 루이스가 그들에게 됐으니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조금만 고개를 움직이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시선을 목에 둔 채 집중하는 벨져 때문에 안절부절 못 하는 건 루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가깝지 않아?”
“쉬잇.”
이렇게 가까운데서, 그런 목소리로 낮고 조용히 속삭이다니. 이래서야 심장이 위험하다. 긴장과 떨림으로 뻣뻣하게 굳은 루이스는 숨을 죽이다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난 것 같아 민망해한데 고개를 내릴 수 없으니 딱 미칠 지경이었다.
“됐다.”
벨져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뒤에야 루이스는 멈춘 줄도 몰랐던 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오페라는 시작도 안 했는데 지친 몸은 휴식을 요구하며 늘어지려 했다. 제 작품이 흡족한지 세 발짝 떨어져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가 피식 웃었다.
“왜, 두근거렸나?”
“윽. 당연하지...!”
“솔직한 거 하난 마음에 드는군.”
놀려서 기분이 좋은 건지, 그 자신의 심미안에 뿌듯한 것인지 몰라도 벨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어째 좀 억울하긴 하지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할 말이 없어진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피고 벨져의 입술에 빠르고 짧게 뽀뽀했다.
“마음에 들어?”
“나쁘지 않다.”
“다행이네.”
“머리만 조금 손보면 되겠군.”
“그럴 시간은 돼?”
“빠듯하지만, 될 거다.”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와 재킷 칼라를 만져주다 루이스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검사로서 필연적인 굳은살이 박일지언정 희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이마에 닿고, 얇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넘겨 이마를 훤히 드러냈다.
“좀... 이상하지 않아?”
“...머리는 안 올리는 게 낫겠군.”
“고마워.”
루이스는 벨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머리를 흔들고 늘 하는 대로 정리했다. 머리를 올리고 거울을 볼 때도 어색하지만 이런 반응을 하는 건 비단 벨져뿐만이 아니었다. 트리비아도 한 번 올려보는 게 어때? 라고 하고는 다시 내리고 후드를 권했고,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는 절친한 친구 앤지 역시 딱 지금의 벨져 같은 표정을 하더니 머리를 올리지 말라고 했다. 조금 상처긴 해도 안 어울린다는데 어쩌겠는가. 받아들여야지.
루이스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자 벨져가 답지 않게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올린 머리가 안 어울린다고 한 것도 아닌데 저 혼자 풀이 죽어서 시무룩해하는 스물일곱이라니, 끔찍한 게 정상인데 말도 못 하게 귀엽다. 머리를 올리면 안 그래도 어려보이는 얼굴이 더 어려 보여서 안 되겠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벨져는 루이스의 손을 잡아끌어 그의 허리를 안았다.
“괜찮다.”
“지금 나 괴롭히는 거지?”
“아니, 전혀.”
“거짓말. 눈이 웃고 있잖아.”
부루퉁하니 토라진 루이스의 말에 벨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양 눈썹을 까딱였다. 루이스의 한숨 뒤에, 허리를 마주 안으며 벨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루이스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냥 따듯한 이불속에서 노닥거리면 안 돼??”
“안 돼. 그건 네 생일에 해라. 기꺼이 들어주지.”
“너무하네.”
벨져는 말없이 루이스의 턱을 들어올렸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을 따라 고개를 들면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부드럽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벨져가 보여 머릿속에 가득 차있던 불만이 쑥 들어갔다.
“좋은 옷에 좋은 외투가 빠질 수 없지.”
여기서 또, 외투 지옥이 시작되나. 방금 전까지 설렘에 두근거리는 심장이 다른 의미로 크게 쿵쾅거리며 루이스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려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테일러가 미리 준비한 듯한 코트 한 벌을 가지고 나타났다.
벨져가 입고 있는 것과 색만 다를 뿐인 코트의 등장에 루이스는 뿌듯해하는 벨져를 바라보고, 다시 코트로 눈을 돌렸다.
“이 벨져와 함께 오페라 하우스에 가려면 어느 정도의 격은 맞춰야지. 내 옷을 맡길 때 미리 맡겼다.”
“내 치수는 어떻게 알고?”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나? 내가 네 몸을 얼마나....”
“그만, 거기까지!”
밝은 회색 톤의 코트가 벨져에게 잘 어울리긴 하지만 제게도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망설이자 벨져가 코트를 들고 루이스의 등 뒤에 섰다.
“저기, 벨져.... 이젠 나도 좀 부담스러워지는데....”
“팔.”
말만 했지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루이스는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등 뒤에 선 벨져가 코트를 입혀주고, 테일러가 다가와 매무새를 고쳐주며 거울을 보는 사이 옆에 서있던 벨져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루이스를 보다 입을 열었다.
“역시 이걸로 하길 잘했군. 아, 물론 기장은 네 게 더 짧다.”
짧다는 말에 울컥한 루이스는 팔꿈치로 벨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비싼 값을 하는 건지 고급 수트와 코트를 겹겹이 입었는데도 움직임이 자연스러웠고, 루이스의 팔꿈치에 맞은 벨져가 작게 억눌린 신음을 냈다.
벨져 홀든은 그의 이명이 증명하듯 빛처럼 재빠른 쾌검사다. 아무리 거리가 가까운들 이 정도는 피하는 게 당연했기에 맞을 줄 몰랐던 루이스가 되레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자 벨져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괜찮아?”
“별 거 아니다. 그보다 마음에 안 드는 소릴 한다고 폭력을 쓰다니 천박하군.”
“그걸 알면서 왜 안 피하는데?”
“아픈 구석을 찔렀으니 한 대 정도는 맞아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더 짜증나.”
잠시나마 죄책감에 시달린 루이스가 억울해하자 벨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길 가지고 노는 게 짜증나고 억울한데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막상 할 말이 없어진다. 루이스는 까다롭고 아름다운 사람, 그것도 아름답고 우아하며 오만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홀든의 둘째 도련님을 애인으로 둔 자의 고충을 되새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어울리는 것도 힘들지만 오늘과 내일만은 그를 위한 날이었다. 이 정도는 참고 따라주는 게 도리다. 그동안 바쁘다고 혼자 둔 것도 미안하고, 그 외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벨져가 저를 놀리며 즐거워하는 걸 정당화한 루이스는 벨져가 매준 타이를 한 번 만져보고 거울에서 등을 돌렸다.
“그럼 갈까.”
에스코트 하듯 손을 내밀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벨져가 고개 끄덕이며 루이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아, 장갑 필요하나?”
“이따가. 지금은 이대로 좋다.”
놀리는 게 아닌, 애정이 담긴 자상한 미소가 눈부시다. 루이스는 벨져가 힘주어 잡은 손을 맞잡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미인을 가지면 힘들다던데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옳은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심장에 해로운 건 부인할 여지가 없다.
“또 그러는군.”
“내가 뭘.”
“뭐, 나는 네 그런 모습도 좋아하니 상관없다.”
별것도 아닌 말에 혼자 설레서 눈도 못 쳐다보고, 손만 꿈지럭거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벨져는 대체 누가 이 사람을 두고 냉철하고 침착한 결정사라고 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홍조 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귀찮고 싫다는 티를 풀풀 내면서 어떻게든 제 마음에 들어보려고 애쓰는 게 기특해 상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았다.
“고생했으니 상이라도 줘야겠군. 아이스크림?”
“내가 애야?”
“하긴, 새 옷에 흘리기라도 하면 큰일이군.”
“벨져...!”
“농담이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못 사줄 것도 없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말이지.”
벨져는 루이스가 정말 화를 내기 전에 재빨리 루이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미 조금은 뿔이 난 것 같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벨져의 예상대로 루이스는 벨져를 잠시 흘겨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만 이러면 좋을 텐데,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포트레너드에서는 그나마 음습하고 침울한 후드와 어두운 무표정이 다가오는 사람을 막아주지만, 이렇게 꾸며놓으면 누구나 달라붙을 게 분명했다.
터무니없이 사람이 좋은 것도 문제고, 정이 많은 것도 문제고, 곱상하게 생긴 것도 문제다. 물론 가장 심각한 건 본인이 자각이 없다는 거지만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라 벨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시시때때로 옆을 돌면서 가지를 쳐야지.
거기까지 생각한 벨져는 흐트러진 루이스의 앞머리를 만져주고 코트와 함께 세트로 맞춘 목도리를 둘렀다. 이 정도면 누구도 벨져 홀든의 것이라고 광고하는 꼴이니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테고, 보기에도 좋다.
마음이 한결 개운해진 벨져는 오랜만에 연인을 독점한 기분을 만끽하며 걸음을 옮겼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이니 마음껏 즐기는 게 당연했다.
1/11 Evening / Wien National Opera House
값이 얼만지도 모를 옷과 구두에 실크 장갑까지 끼고 박스석에 앉았건만 루이스는 오페라에 전념하기보다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졸음과 싸워야 했다. 물론 벨져의 생일이니까 그가 하고 싶다는 걸 하는 게 맞고, 그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해주는 게 맞지만 루이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음악, 화려한 가수와 오케스트라. 차라리 무성영화가 나을 지경이다. 그건 언어가 없어도 즐길 수 있으니까 오히려 그 쪽의 수준이 높은 게 아닐까. 예술과 대중성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잠들고 만 루이스는 허벅지를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에 놀라 펄쩍 튀었다. 당연히, 경멸을 가득 담은 애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영화관에서 졸다 깬 것보다 몇 배는 민망하고 창피했다.
“큼, 내가 그래서 해설이라도 해달랬잖아.”
“작품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지 않고 떠드는 건 오페라를 모욕하는 품위 없는 짓이다.”
그럼 데려오지를 말던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은 루이스는 자리에 고쳐 앉으며 레몬 슬라이스가 장식된 탄산수 잔을 집어들었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 벌써 몇 번이나 졸다가 깨서 싸늘한 눈초리를 받다 이번엔 허벅지를 꼬집혔는데, 다음에 졸다 깼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약간 기분이 나쁜데 다음엔 정말 싸우게 될 지도 모른다. 벨져의 기분을 안 상하게 하면서, 내일을 평화롭게 맞고, 나도 멀쩡하려면 이쯤에서 나가야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벨져를 설득할 수 있을까. 루이스는 탄산수 위에 떠있는 얼음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벨져.”
불러도 답이 돌아오기는커녕 아예 무시하기로 한 건지 반응이 없다. 루이스는 완벽한 옆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괬다. 썩 내키진 않지만, 비장의 무기가 하나쯤 있긴 했다.
“빨아줄까?”
이번엔 어떤 표정일까 싶어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빨개진 벨져가 경악에 물들어 입을 벌린 채 뻐끔거리다 루이스의 팔을 덥썩 잡으며 다가왔다. 총알도 튕기는 홀든의 검을, 그것도 둘이나 들고 전장을 누비는 쾌감사의 악력에 악 소리 한 번 못 내고 신음을 삼키며 인상을 쓰자 겨우 패닉에서 빠져나온 벨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소리냐! 아무리 박스석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신성한 오페라하우스에서 그런 음탕한 생각을...!”
“아니, 여기서 말고! 왜 날 무슨 파렴치한으로 보듯이 보는 거야!”
벨져가 목소리를 낮추고 빠르게 속닥거리는 바람에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루이스는 억세게 잡은 벨져의 손을 떼어내고 푹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오늘 몇 번째 한숨을 쉬는 건지 모르겠으나 한숨이 나올 상황인 것은 확실했다.
“나도 얼만지도 모를 옷을 하루도 안 돼서 더럽히고 싶진 않아! 그냥, 여기 말고.... 둘이.... 응?”
공공장소에, 오페라가 한창이라 속닥거리는 게 고작이지만 오히려 말끝을 흐리며 어물쩍거리는 게 통했는지 벨져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두 시간은 여길 나갈 기회가 없다. 루이스는 유혹에 혹해 갈등에 빠진 벨져를 몰아붙이기 위해 고개를 반대로 돌려 얼굴을 가리고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싫으면 말고... 난 그냥 네가 자꾸 해달라고 하니까 생각나서 말해본 거니까. 네가 맨날 더럽게 못한다고 욕하면서 계속 해달라고 조르잖아.”
“못한다고 했지 욕은 안했다.”
“내가 독일어를 배운 적은 없어도 욕하는 것 정도는 알아.”
안 된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잡고 늘어지는 걸 보면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은데, 그래도 고민이 되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다. 루이스가 다시 한 번 벨져의 눈치를 살피려 흘긋 눈을 돌리자 이마에 손을 얹고 눈까지 감은 채 갈등하던 벨져가 입을 열었다.
“가지.”
“...정말?”
무르지 못하게 되묻자 오늘 역에서 처음 봤던 그 탐탁지 않은 눈빛이 돌아왔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다른 게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봐준다는 그 눈빛은 벨져가 타협이라는 말로 그의 고집을 꺾고 한 수 무를 때 짓는 눈빛이었다. 그의 인생에 패배는 단 한 번밖에 있을 수 없고, 그건 연애라는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생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를 이길 상대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 파렴치한 소릴 해놓고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지 마라. 가증스러우니까.”
“그래도 싫단 말은 안하네.”
눈을 가늘게 휘며 미소를 물자 단정한 얼굴이 순식간에 성숙하고 야한 얼굴이 된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의 여유로운 미소에 짙은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그 얼굴을 좋아했다. 분하지만 마음이 동해 거부할 수가 없었다.
홧홧하게 끓어오르는 욕정에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를 감싸며 입을 맞췄다. 오늘 내내 가볍게 한 키스가 아니라, 혀를 얽고 몰아붙이며 육욕을 채우는 키스에 루이스가 앉은 의자가 점점 밀려났다. 더 하다간 여기서 끝까지 가버릴 것 같다는 위기감에 키스를 멈춘 벨져는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아 닦고 파르르 떨리는 루이스의 속눈썹을 보다 일어섰다.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 뒀다.”
“그럴 것 같았어.”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군. 내 생일인데 말이지.”
“네 생일은 내일이야. 뭐, 그래도 싫지 않잖아?”
다 안다는 듯이 여유로운 미소에 울컥한 벨져는 루이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커튼 뒤로 끌어냈다. 벽에 밀어붙이고,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거친 키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스가 벨져를 힘껏 밀어냈다.
“얼마나 잘 빨아주는지 기대하지.”
“하아, 하.... 나 완전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숨을 쉬느라 몸을 숙이고 헉헉거리던 루이스의 말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자초해놓고 이제 와서 결과를 두려워하는 게 귀엽다 못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그보다 더 한심한 건 그 유혹에 넘어간 자신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다 그러한 것을.
“하, 그걸 이제 알았나?”
“못 무르겠지?”
“절대.”
숨을 고른 루이스는 몸을 일으키며 속으로 한동안 고생 좀 하겠네. 하고 체념했다. 아무렴, 벨져 홀든에게 오페라를 뺏으려면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이었다.
1/12 Night / Hotel
공기가 뜨겁다. 정신없이 뒹굴고 난 뒤에 찾아오는 노곤한 탈력감과 해방감, 뜨거운 열기가 돌던 몸이 식는 감각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으니 절로 눈이 감겼다. 아무리 신체 강화 능력자라지만 쓸데없이 건강해서 그에 맞추려면 감당이 안 됐다. 하기 전에 그렇게 조르던 것도 해줬는데, 그래도 따라가기 벅차다.
눈 위에 팔을 얹고 숨을 고르던 루이스는 조금 진정이 되자 팔을 내리고 느릿하게 호텔 방을 훑었다. 뻗어버린 저 대신 물을 가지러 간 벨져의 조각상같은 나신에 눈이 머물다, 그 옆에 있는 시계가 시야에 들어오자 뜨겁게 달궈져 잠시 흐려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컵에 물을 담아 침대로 돌아오던 벨져는 루이스의 시선을 따라 시계를 보고 잠시 멈춰 섰다가 돌아와 컵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가운 하나 안 걸친 몸으로 친히 물 심부름을 다녀온 애인에게 심부름 값으로 뽀뽀를 선사한 루이스는 컵을 비우고 삐거덕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단기간에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혹사당한 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고, 벌서부터 턱이 아프지만 이것까지 벨져의 손을 빌리기는 좀 그렇다.
굳이 못 할 건 없지만,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라고 할까. 기왕 준비한 선물은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직접 주는 게 도리였다. 루이스는 들고 온 가방을 뒤지며 출발할 때부터 고이 모셔온 선물을 찾았다.
“아까 분명히 넣어놨는데.... 아, 찾았다. 여기.”
벨져는 루이스가 건넨 작은 박스를 받아 들었다. 그래도 나름 신경을 썼는지 벨져가 아는 범위의 브랜드는 아니어도 제법 모양새를 갖춘 포장이었다. 안에 든 내용물이 뭔지, 형편도 안 되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의아해진 벨져는 우두커니 서서 손 안에 딱 들어오는 사이즈의 박스에 들어갈 만한 것들을 떠올렸다.
“생일선물.”
벨져가 상자를 들고만 있자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로 돌아간 루이스가 이불을 끌어안고 말을 보탰다.
“기대할 만한 건 아닌데.... 싸구려라고 뭐라 하지만 마.”
값에 상관없이 뭔가 해주고 싶다는 그 마음이 갸륵하다.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벨져는 루이스의 옆에 앉아 상자에 감긴 리본을 당겼다. 매듭을 풀고, 상자를 열자 안에서 나온 것은 자수정 커프스 한 쌍이었다. 그의 말대로 벨져가 쓰는 최고급은 아니지만 나름 신경을 썼는지 투명하고 진한 레드와인 색 수정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네가 쓰는 거에 비할 건 못되겠지만.... 그래도 뭔가 주고 싶었어. 난 늘 받기만 하잖아.”
“원래 이런 건 선물한 사람이 해주는 거 아닌가?”
머쓱해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또 귀여우니 상관없지만 너무 눈치를 보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아 말을 돌리자 루이스가 커프스를 가져가려다 피식 웃었다. 그나 저나, 실오라기 한 올 안 걸친 차림이라 커프스는 소용이 없었다.
“내일.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뭐, 나는 지금 차려입고 나가서 산책해도 상관없다만.... 정성이 갸륵하니 특별히 봐주도록 하지.”
벨져는 커프스를 다시 상자에 넣고 처음 받았던 그대로 리본을 곱게 묶어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상자만 봐도 흐뭇해 입꼬리가 올라가고, 당장이라도 어디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 귀여워 루이스의 입꼬리도 함께 올라갔다. 평소보다 더 기고만장해져서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인다. 모름지기 선물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쁘게 하는 법이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흐뭇하게 벨져를 보던 루이스는 밀려오는 졸음에 하품을 하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미안한데, 나 이제 도저히 안 되겠어.”
“벌써 지치다니. 영웅 체력이 말이 아니군.”
“알잖아. 밤샘에 장거리이동에, 하루 종일 벨져 홀든 경 비위 맞추느라 힘들었다고.”
“비위만 맞춘 게 아닐 텐데. 재미를 본 건 네 쪽 아닌가?”
“그래, 네가 다 맞아. 그러니까 나 좀 놔주라....”
“할 일 다 했다는 투군.”
몸에 힘이 빠지자 반쯤 감긴 눈이 더 무거워지고 말이 느려졌다. 그냥 보기에도 슬슬 한계였기에 벨져는 루이스를 위해 전등을 껐다. 루이스의 옆에 모로 누워 손으로 턱을 받치고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벨져를 향해 돌아누워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이주정도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동갑이 된 기분 어때? 뭐, 워낙에도 형 취급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즐겨봐.... 그러다 친구도 먹고... 그러는 거지.”
“헛소리 하는군. 자라.”
벨져는 루이스의 눈 위에 손바닥 얹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이고, 벨져의 손에 눈을 감은 루이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응.... 너도, 잘 자.... 생일 축하해. 벨져.”
“...그래.”
이불을 끌어당겨 꼼꼼히 덮고 루이스를 끌어안은 벨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침이 무척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1/12 Happy Birthday / Alles Gute zum Geburtstag
갓갓소재 제공해주신 초루님께 감사드립니다.
벨져 생일 축하해! ㅠㅇㅠ 노모에 벤쿠버타임 하느라 힘냇어!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8. (0) | 2018.02.17 |
---|---|
[벨져루이] Happy Birthday to you (0) | 2018.01.27 |
[릭루이] 반장과 모자걸이 (0) | 2018.01.07 |
[벨져루이] Two Pianos (0) | 2018.01.02 |
[벨져루이] 유리 온실 (0) | 2017.11.27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Two Pianos
존잘님께 선물로 드렸던 벨루 피아노 콩쿨AU
낙엽이 떨어지는 11월의 어느 날. 대기실에 다리를 꼬고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소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기실에 비치된 모니터를 통해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 연주자가 실수를 하고 눈에 띄게 흐트러진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따분한 탓이 컸다.
아무리 학생부 1차 예선이라지만 지금 연주자나 그 전이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시시하고, 진부하고, 따분하다. 앞으로 이어질 연주라고 별로 다르지 않을 터.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소년은 팔짱을 풀고 일어났다.
“벨져.”
“시시해서 더 못 봐주겠군. 더 듣다간 내 귀까지 썩겠어.”
동세대에선 견줄 사람이 없다는 유망주, 데뷔 이레 근 10년간 출전한 대회마다 우승을 휩쓴 홀든의 벨져. 자신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 그지없는 천재. 그 외에도 소년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많았으나 벨져는 개의치 않았다.
벨져 홀든에게 그 정도 찬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고, 본디 가지지 못한 이들은 저보다 나은 이를 질시하는 법이니 뒤로 무슨 소리가 들려도 그저 덤덤했다.
대기실을 나온 벨져는 서늘한 공기에 손으로 팔을 감싸 팔짱을 꼈다. 놓고 온 재킷이 생각났으나 못 견딜 정도로 추운 것도 아니고, 다시 돌아간들 껄끄러울 뿐이니 조금 걷는 게 나을 성 싶었다.
이제 막 네 번째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했으니 제 순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인터미션 전에만 들어가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여유롭게 복도를 걷는데 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긴장만 안 했어도...!”
“됐어. 어차피 홀든 때문에 준우승밖에 못 하는 콩쿠르였잖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못 이긴다고.”
“그래그래. 어차피 다들 힘 빼고 할 테니까 너무 그러지 마. 잘해봤자 2등이고.”
“그 새끼는 이미 가진 트로피도 많으면서 왜...! 좀 양보하면 어디가 덧나냐고! 왜 그렇게 다 가지지 못해서 안달이야? 뻐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제길....”
누군가 했더니, 두 번째로 시작해서 악보를 까먹더니 결국 심사위원의 커트로 연주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그만둔 연주자다. 센스가 부족한 건 둘째 치고 자신감이 없는 건 다 연습 부족이다. 머리가 나빠도 몸이 반응하도록 확실히 숙지했으면 그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야말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데다, 저 좋을 대로 남 탓을 하는 것까지 총체적인 난국이다. 그야말로 평가 대상 외. 저런 정신머리로는 뭘 해도 그저 그런 정도겠지. 격이나 급을 따질 것도 없다. 벨져는 작게 혀를 차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심한 패배자들 사이를 당당히 걸어가는 건 입상 발표 때나, 시상식 때면 충분하다. 벨져는 적개심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지뢰밭에서 자신을 뽐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손이라도 씻고 갈까. 대기실 주변 화장실은 이미 긴장과 압박감을 못 견딘 녀석들로 가득했기에 벨져는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녀석이 하나.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혀를 찼다. 급하게 빌린 티가 나는 정장에, 사이즈도 맞지 않는 낡은 구두. 거기에 머리카락이 젖을 정도로 물을 뒤집어쓰고도 떨리는 손까지. 대충 봐도 견적이 나오는 행색에 그나마 봐줄만한 건 티 없이 맑은 얼굴뿐이다.
대충 훑어본 것으로 파악을 마친 벨져는 물을 틀어 손을 적셨다. 가시지 않는 시선에 살짝 눈을 흘기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 어설프고 같잖은 반응에 벨져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샜다.
“못 치겠으면 시간 뺐지 말고 돌아가라. 어차피 도망친다 한들 너 같은 패배자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주제도 모르고 각오도 없이 콩쿠르에 발을 들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그게 당장 제출할 상이 필요하거나, 콩쿠르에 참가하는 비용도 아까운 처지라면 더더욱.
평소 같으면 먼저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타인에게 간섭하는 일도 없지만 어줍잖은 치기로 긴장에 벌벌 떠는 멍청이를 보고 있자니 절로 말이 나왔다. 다른 이유는 없다. 물에 젖어 저를 바라보는 눈과 얼굴이 신경에 거슬렸을 뿐이다. 차가운 물밖에 나오지 않는 화장실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몰라도, 손끝이 빨개질 정도로 차갑게 굳은 손가락으로 제대로 피아노를 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벨져의 신랄한 말에 이름 모를 소년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까와 그리 다를 것도 없는 반응에 김이 빠진 벨져는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았다. 그렇게 본다고 뭐가 해결되지도 않는데, 되받아치지도 않다니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기껏 무대에 올라가서 피아노 건반 한 번 못 쳐보고 내려오는 구제불능. 자신의 과오와 연습 부족은 나 몰라라 하고 남 탓을 하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자기연민에 빠지는 게 더 답이 없다. 아까 지나치며 들은 말을 떠올린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대충 뒷주머니에 넣었다.
벨져는 찝찝하고 꿉꿉한 짜증을 걸음에 실었다. 복도를 울리는 벨져의 구두 소리 뒤로 다급한 발소리가 따라붙고, 드디어 되받아치려는 건가 싶어 멈춰 서자 따라온 그가 여전히 희고 맑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저기, 손수건 떨어트렸어.”
뭔가 했더니, 정말이지 멍청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벨져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도로 무시하면 적당히 알아들을 법도 한데 따라붙은 시선은 걸음을 옮겨도 가실 줄 몰랐다. 벨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주기 위해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연주를 앞두고 괜한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고, 주제도 모르는 게 성가시게 엉겨드는 것도 딱 질색이었다.
“흥. 백기 대신 써라. 포기할 게 아니라면 그 얼어붙은 손부터 어떻게 하도록.”
벙찐 얼굴을 뒤로하고, 벨져는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돌아서면 잊어버릴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더 이상 신경을 쓰는 의미도 가치도 없었다.
쇼팽 에튀드- Op.10 No.4.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연주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벨져는 가볍게 숨을 토하며 목을 죈 보타이를 풀었다. 시상식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다시 맬 시간은 차고 넘친다. 남은 건 지루하고 감흥 없는 연주 뿐.
벨져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대기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딛은 순간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다시 걸음을 내딛다 고개를 돌렸다.
분명, 전에 없이 깨끗한 음색이지만 뭔가 달라. 적어도 제가 아는 동년배 중에 이런 피아노는 없다. 벨져는 다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빠른 걸음은 이내 뜀박질이 되고, 열린 커튼 사이로 비치는 무대 조명에 벨져는 계단을 뛰어 올랐다.
깨끗한 렌토는 온데간데없는 격정적인 알레그로. 몰아치는 바람을 휘감은, 차가운 겨울.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던 상대라면, 그건 아마도.
열린 커튼 너머 칠흑으로 빛나는 피아노 건너편을 바라보며 벨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스친 예상대로, 그가 있었다.
맹한 얼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무표정과, 그의 손가락을 타고 울리는 피아노 소리. 벨져는 숨을 옥죄는 연주 앞에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는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제가 누른 건반이다. 앞의 연주자 모두 똑같이 쓴 피아노인데도 그의 손끝에 닿은 건반은 전혀 다른 피아노인 양 소리가 다른 소리를 냈다. 마치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고 강렬하게 울리며 청중을 휘어잡고 그들의 심장을 묶는다.
몰아치는 바람과 같은 주선율은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옮겨 가고, 이어지는 에스프레스에 숨이 멎는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피아노와, 감정이라곤 내비치지 않는 무표정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그. 몰아치는 감정과 그 모두를 담아낸 소리에 벨져조차 넋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테크닉이 좋아도, 아무리 어려운 곡을 들고 나왔더라도, 기계처럼 악보의 지시를 정확히 지키는 연주를 해도 이걸 넘어설 수 없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는 음표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린다.
겨울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미스터치 하나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연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벨져는 커튼을 움켜쥐었다. 졌다. 이름도, 출신도 모를 녀석의 연주에 압도당해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패배를 시인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사위원의 평이 어떻든 벨져 홀든이 졌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중요했다.
쇼팽 에튀드- Op.25 No.11 '겨울바람‘. 분하게도, 저 지독히 무신경한 얼굴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래. 아무리 쫓은들 바람을 손에 쥘 수는 없겠지.
벨져의 헛웃음과 함께 소년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에서 떨어지고, 연주를 마친 그가 숨을 토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숨은 안도와 후련함을 담고 있지만 그 눈은 여전히 찬바람이 부는 시린 동토에 머물러있다. 먼 곳을 그리는 그 눈빛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목 아래 일렁이던 감정이 꿈틀거렸다.
뜨겁고, 묵직한, 호승심을 닮은 무언가. 그 누구도 준 적 없는 감정에 벨져는 커튼을 움켜쥐었던 손을 제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옷 위로 닿은 손이 뜨겁다. 쓰러트릴 상대가 있다. 잠시 느낀 수치와 굴욕은 몇 배로 갚아주면 된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은 벨져는 그를 향해 보내는 박수 소리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장장 10여 년간 이어진, 오만하고 고고한 독주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Alles Gute zum Geburtstag (0) | 2018.01.12 |
---|---|
[릭루이] 반장과 모자걸이 (0) | 2018.01.07 |
[벨져루이] 유리 온실 (0) | 2017.11.27 |
[릭루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0) | 2017.11.14 |
[이글루이] 엘리멘트리au (1) | 2017.10.20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업로드 순서랑 시간의 흐름이 안 맞아서 넘버를 붙이진 못하고 제목을 통일했습니다ㅠㅇ ㅠ
정리하는 김에 이 AU 첫연성이었던 Notes를 봤는데 역시 책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쓴 원고랑 시간 배열이나 방향이 많이 다르더라구요ㅠㅠ
해가 중천 가까이 오른 아침, 벨져의 기상 시간에 맞춰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온 루이스는 알아봐달라는 듯 부스럭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글을 발견하곤 잠시 망설이다 그를 향해 다가갔다.
“거기서 뭐하세요.”
“이야, 하필이면 여기서 또 보네?”
“막내 도련님과 마주치는 장소 치고는 협소하지만, 네. 또 뵙네요.”
“하하, 원래 몰래 먹는 게 더 맛있다잖아?”
식탁 아래서 기어 나온 이글은 들고 있던 파이 조각을 내려놓고 손을 털며 싱크대 옆에 앉았다. 자유분방하다 못해 한 소리를 들어도 크게 들을 것 같은 행동거지였지만 루이스는 그를 타이르는 대신 찬장을 열어 찻잎을 꺼냈다.
“보통은 그러다 들키면 혼쭐이 나는데요.”
“음. 그럼 나는 보통이 아닌가보지. 그러는 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빈 주전자에 물을 넣었다. 이글은 발을 흔들다 악동처럼 씩 웃고 루이스의 등 뒤로 다가와 서성였다.
“뭐 드릴까요?”
“아니? 너보단 내가 여길 더 잘 알걸?”
“그럼 왜 그러세요.”
“혹시 그거 알고 있나 해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기에 루이스는 이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재치와 총기로 반짝이는 이글의 눈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무심코 벨져를 떠올렸다가 마른 침을 삼켰다.
벨져는 결코 이런 눈을 하지 않는다. 그와 꼭 닮은 색을 띤 눈은 재기와 총기로 빛날지언정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차갑게 식은 눈과 달리 입가에 띠운 예쁜 미소는 완벽했기에 더 경계를 놓을 수 없었다. 위험하기로 치면 벨져보다 수십 배는 더 위험하다.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리자 이글이 가볍게 미소를 물고 있던 입술 한 쪽을 올리며 키득거렸다.
“아, 정말. 그런 얼굴 하지 마. 무슨 장난 하나를 못 치겠네.”
“고작 장난 하나 치자고 이런 수고를 들일 것 같진 않은데요.”
“그새 벨져가 옮았어? 하긴, 우리 작은 형 비위 맞추고 살려면 보통 눈치로는 안 되지. 보기보다 더 감이 좋네.”
한량처럼 굴던 이글은 그 말을 끝으로 미소를 지웠다. 가벼운 태도가 가시자마자 오싹할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와 본색이 드러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 작은형, 곧 결혼해.”
“네?”
머리를 세게 때리는 듯한 충격에 루이스는 누굴 대하고 있는지도 잊고 되물었다. 이글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는데,
“꽃이라는 건 여름 한철 장사잖아. 아무리 비싸고 화려한 꽃도 지고 나면 쓸모가 없지.”
루이스는 입술을 물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꽉 쥔 주먹에 핏줄이 불거지고 짧게 자른 손톱이 파고들었으나 숨 한 번 제대로 쉬기 힘든 루이스가 주먹을 펴는 일은 없었다. 숨과 울음 비슷한 묵직한 덩어리를 목 아래서 삼킨 루이스는 무거운 입을 뗐다.
“그럼, 그럼 그 분은요.”
“누구? 아, 형수 될 사람? 글쎄. 그건 너한테 달렸지.”
너에게 달렸다. 다시금 무겁게 짓누르는 말의 무게에 루이스는 숨을 눌러 삼켰다. 차갑고 무덤덤한 시선이 저를 책망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아니라는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뭐, 그래도 작은형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못 되니까 사랑은 아니어도 존중은 하겠지. 그런 허울뿐인 자리라도 감지덕지인 사람은 널렸고. 그것도 네가 없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야. 굳이 남겠다면야 뭐.... 그런 거지. ”
아무리 헌신적인 사람이라도, 아무리 배려와 양보가 넘치는 사람이라도 자기 남편이 다른 사람을, 그것도 출신도 모를 하인을 옆에 두고 끼고 도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가만히 있을 귀족 아가씨가 어디 있을까.
결국 벨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집안의, 가장 별 볼일 없는 사람을 고르게 될 것이다. 홀든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그런, 남은 것이라고는 과거의 영광뿐인 집안의 여자를 들이고 제대로 눈길 한 번 안 준 채 그렇게. 하지만 입을 막아도 결국은 탄로 나겠지. 벨져 홀든의 고아한 명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테고, 더러운 추문만 남을 것이다.
그게 바로 벨져 홀든의 곁에 남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대가다. 루이스는 찬연히 빛나고 있는 벨져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그저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 그래서 그녀도.
“루이스. 벨져를 사랑해?”
루이스는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그 자신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통과 회한, 슬픔 같은 감정을 씹어 삼키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진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러니까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투덜거려 봐도 답이 없다. 괜히 얘기를 꺼냈다 싶었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마음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어차피 맞닥뜨리게 될 현실에 대해 얘기한 것뿐인데 못할 짓을 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못된 장난은 하고 나면 즐겁기라도 하지. 좋아질 기색이 없는 루이스의 눈치를 살피던 이글은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장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좀 생각해봐. 너 정도면 다른 곳도 얼마든지 갈 수 있잖아. 꼭 벨져 옆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한 눈치가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은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다 축 쳐진 루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 탓이 아니야. 배신은 더더욱 아니고.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지. 넌 최선을 다했잖아.”
루이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그 분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럴 리가 없지.”
이글은 방금 루이스가 웃었던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다. 그 성격에 루이스가 떠나는 걸 배신이라 여기지 않을 리 없고, 그 자존심에 상처를 받지 않을 리도 없다.
허울뿐인 빈말이 통하기엔 이미 벨져 홀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버린 뒤인데다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네 탓이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 말이 듣고 싶었던 때도 있었죠.”
“응?”
“그런데 그런 건 하나도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도망쳐왔는데.”
웃음 대신 쓰디 쓴 고통을 되새기는 얼굴로 뜻 모를 말을 하는 루이스를 멀뚱히 바라보던 이글은 그에게 얽힌 사연을 캐묻는 대신 그에게 말을 맞췄다. 본인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더라도 사람과 돈을 쓰면 평범한 사람의 사연을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고, 당장 눈앞의 사람이 하는 말이 더 중한 법이었다.
“그래서, 다른 선택을 해보려고?”
“...모르겠네요. 이제는 더 갈 곳도 없는데.”
이글이 가면을 벗은 것처럼, 그가 켜켜이 껴입은 것들을 걷어내자 침착하고 진중한 하인의 얼굴 대신 세상에 지치고 상처로 얼룩진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기에 털어놓을 수 있는 본모습. 벨져가 그토록 원하는 사람의 속내를 확인한 이글은 저도 모르게 희열을 느끼며 입술을 물었다.
“에이, 그럼 그냥 다 때려 치고 나랑 갈래? 사실 나도 네가 좀 마음에 들었거든. 그러니까 벨져고 홀든이고 뭐고 다 신경 끄고, 세계를 유랑하는 거야. 어때? 죽이지 않아? 난 버린 자식이라 책임이니 기대니 그런 것들도 상관없이 펑펑 돈만 쓰는 입장이라고.”
루이스는 그제야 조금 편해진 얼굴로 웃었다.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든다.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고 할까, 가만 두고 보기가 애처로워서 자꾸만 손이 간다.
머리가 복잡해진 이글은 벨져가 왜 루이스를 옆에 두려 하는지 더 깊이 생각하는 대신 루이스의 팔을 잡고 활기차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미 정해진 결말에 헛된 희망을 품는 게 더 괴로운 법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릭루이] 반장과 모자걸이 (0) | 2018.01.07 |
---|---|
[벨져루이] Two Pianos (0) | 2018.01.02 |
[릭루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0) | 2017.11.14 |
[이글루이] 엘리멘트리au (1) | 2017.10.20 |
[릭루이] (0) | 2017.09.26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온실시리즈 이어서 제목을 얼른 정해야 하는데....
루이스는 빈 꽃병에 백합을 꽂아 놓고 곧장 욕실로 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소매를 걷고 목욕 준비를 하고 있으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지지만 하인 신분으로는 손을 담그는 게 고작이다.
매일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도 그렇지만 한 병이 같은 무게의 금값과 비슷하다는 향유며 입욕제를 풀고 그 물을 그냥 하수구에 버리는 건 귀족들, 혹은 그만한 부자나 할 수 있는 호화로운 목욕이다. 감히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맨몸으로 있어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욕실이 수증기로 덥혀지고 나서야 루이스는 도련님을 모셔 왔다. 낮에 입힌 옷을 벗기고, 미리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벨져가 들어가면 그 때부터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달리 할 일도 없고, 옆을 떠날 수도 없는 루이스는 욕조 옆 작은 간의 의자에 앉아 벨져를 바라봤다. 하루 종일, 몇날며칠을 함께 있었는데도 이 얼굴은 질리지가 않는다. 어디 질리다 뿐이랴, 매번 새롭게 감탄하고 만다.
루이스는 날카롭게 뻗은 눈매며 오뚝한 코, 다물린 입술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벨져 홀든은 미의 극치를 인간의 형태로 빚어놓은 것만 같은 사람이고, 그의 까다롭고 극성스러운 성미에는 익숙해질지언정 벨져 홀든의 고매한 아름다움에 익숙해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깐 좀 뜨거운 것 같았는데, 지금은 딱 좋네요.”
벨져는 별다른 말없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는 것으로 루이스의 말을 긍정했다. 제 취향대로 섞은 향기와 따스한 온기에 취해 몸과 마음이 노곤해졌다. 근거 없는 행복에 젖어 정신을 놓고 있으니 욕조 옆에 앉아 물을 찰박이던 루이스와 손이 스쳤다. 눈이 마주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타오르는 석양의 색을 하고선, 불꽃조차 삼켜버릴 것 같은 냉기를 품은 심연의 눈동자. 들여다보면 그 심연에 빠져버릴 걸 알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신비로운 눈이다. 저 벽 너머, 깊은 밑바닥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벨져가 생각을 하는 사이 눈을 내리깐 루이스가 스펀지에 비누거품을 냈다. 손을 물에 담그며 슬며시 풀어지는 눈매가 곱다.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 따뜻한 물로 씻는 것도 감지덕지라며 엷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고, 날숨과 함께 말이 튀어나왔다.
“들어오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불현듯,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노골적이다.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당연했다. 제길. 며칠 있었다고 벌써 이글의 나쁜 점이 옮기라도 한 걸까.
루이스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하고 덤덤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바라보며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게 다행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바로 쫓겨나요.”
“여긴 너랑 나 둘 뿐인데 누가 안다는 거지?”
“그래도, 하인과 함께 목욕하는 주인은 없어요. 홀든의 도련님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인과 도련님이라는 관계를 들먹이며 사양했지만 벨져의 귀에는 정중한 사양이라기보단 완고한 거절로 들렸다. 욕조에 걸친 팔을 따뜻하게 적신 스펀지가 문지르며 지나간다. 벨져는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하겠다는 하인에게 매달릴 사람이 못 됐기에 시큰둥하게 다른 팔에 턱을 괬다. 괘씸한 녀석 같으니.
“뭐, 그렇다면야.”
벨져가 아무렇지 않게 넘기자 루이스는 착실히 하인의 본분을 다했다. 오히려 오늘따라 손이 더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을 끼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만지는 것 같은 손길은 처음 목욕을 도울 때와 변함이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조금 더 능숙해졌다는 것일까.
눈을 내리깐 채 제 몸을 씻기는데 열중하는 루이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불쾌한 감정이 비누거품과 함께 조금씩 씻겨 나갔다. 팔과 어깨, 가슴과 배를 거쳐 물속에서 다리를 문지르고 있을 때 벨져는 굳게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군.”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실 걸요.”
“그건 내가 결정해.”
루이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종아리를 문지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의 당혹만은 여실히 느껴졌다. 저 침착하고 투명한 눈이 흔들리고 표정이 바뀌는 걸 보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때는 무슨 짓을 해도 눈 하나 까딱 않던 녀석이 고작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원하신다면야.”
원하는 걸 얻어낸 벨져는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그를 기다렸다. 루이스는 나름의 각오가 필요한지 작게 숨을 내쉬었고, 그 숨이 담은 체념과 포기에 벨져는 점점 더 의기양양해졌다.
“음...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고아입니다. 어떤 애들은 부모를 알기도 하고, 한쪽만 알거나 친척에게 맡겨지거나 하는데 전 어느 쪽도 아니었어요. 그냥 거리의 고아였죠.”
루이스는 눈을 내리깐 채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법 듣기 좋은 목소리에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섞여들었다. 그러고 보면 참, 물을 닮은 남자다. 벨져는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드넓은 호수를 떠올렸다.
“그중에 몇몇은 자기 발로 고아원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얼마 못 가 돌아오곤 했죠. 거리에 고아가 넘치는 만큼 고아원에도 자리가 없었거든요.”
말하는 사이 몸을 다 씻긴 루이스가 자리를 옮겨 벨져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두피를 마사지하고 머리카락을 감기는 손길에 절로 눈이 감기고 졸음이 밀려왔다. 온전히 루이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잡념을 비누거품과 함께 물에 쓸려 보내던 벨져는 문득 루이스의 이야기가 제 머릿속에 있는 정보와 다르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 수도원출신 아니었나?”
“원래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얘기는 흥미로운 법이죠.”
시니컬한 대답에 벨져 눈살을 찌푸림 그런데 귀를 씻기던 중이라 루이스가 아파서 그런 줄 알고 작게 죄송해요. 라고 속삭이듯 말하고 다시 얘기를 이어나감.
“그래서 보통 애들이 그러는 것처럼 버려진 아이들 무리에 끼어 살았죠. 우리는 각자 하는 일이 달랐어요. 보통은 으레 그러하듯 소매치기나 도둑질, 구걸, 배달, 구두닦이, 신문팔이부터 꽃팔이, 돈 되는 건 뭐든 해서 그걸로 먹고 살았죠.”
“너는? 어느 쪽이었지?”
“글쎄요. 뭐였을 것 같으세요?”
말끝에 피식 웃는 소리가 섞인 것 같다.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는 요령 좋게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고 수건을 덮어 마무리했다.
“물에 너무 오래 계시면 안 돼요.”
좀처럼 웃지 않는 녀석이 띠운 엷은 미소에 벨져는 그러쥔 주먹에 힘을 줬다. 그 자신도 짓고 있는 줄 모르는 미소는 아주 예쁘고 상냥해서,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너는 나를.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감각에 벨져는 짜증내던 것도 잊고 루이스의 팔을 잡아 당겼다. 말로 다 하지 못한, 할 수 없는 마음을 담은 손은 뜨거웠고, 붙잡은 팔은 차가웠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글루이] 엘리멘트리au (1) | 2017.10.20 |
---|---|
[릭루이] (0) | 2017.09.26 |
[루드루이] 07. (0) | 2017.09.05 |
[벨져루이] 유리 온실 (0) | 2017.09.04 |
[루드루이] 06. (0) | 2017.09.0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여름해가 차츰 짧아지는 게 느껴지는 애매한 계절, 아침부터 온종일 내리는 비에 벨져와 루이스는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창가에 앉은 루이스는 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벨져는 침대에 앉아 그런 루이스를 바라보며 스케치북을 들었다.
그림을 그리기에 침대 위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다. 하지만 환절기라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고 하루쯤은 그냥 쉬라며 루이스가 극성을 부린데다, 가끔은 이렇게 거리를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것에 흥미를 느끼고 끌리기 마련이라는 말이 떠올라 연필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루이스의 고개가 돌아왔다.
“뭐가 잘 안 되세요?”
“빨리도 묻는군.”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차라도 가져올까요.”
참 시간이 안 가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차를 마실 시간이 다 됐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을 들었다 놓는 애달픈 감정의 이름을 깨달은 이후로 벨져는 조금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
손을 잡고, 하얀 소매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손목 안쪽을 문지른다거나, 함께 잠들 때 그의 허리를 안고 은근히 다리를 쓸어내린다거나. 하지만 루이스는 거부하지 않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벨져는 오기에 더 스킨십의 수위를 높여갔으나 루이스는 그 말간 얼굴에 동요나 당황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투라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애초에 루이스가 그런 오해를 하도록 만든 건 벨져 자신이었다. 이제 와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봤자 긁어 부스럼만 될 게 뻔했고, 그렇다고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영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벨져는 이 꼴이 되고도 누군가에게 부탁 한 번 해 본 적 없었다. 평생 싫은 소리, 입 발린 아부 한 번 입에 담지 않은 건 그래도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런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으나 이번에는 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살갑게 굴며 다가가는 것도 통하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타고난 아름다움과 고귀한 출신 덕에 벨져는 언제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쪽에 속했다.
덕분에 그 마음과 관심을 거절하는 데에는 능숙했지만 타인의 환심이나 호감을 사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받아주면 그 뿐이겠으나 루이스는 거리를 벌리면 벌렸지 결코 그의 의지로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못 견디게 짜증나 입술을 물던 벨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지금 이 저택에 단 한 사람뿐이다. 루이스는 문을 열고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하게 트레이를 가지고 들어와 발로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닫았다. 양손으로 들기 힘들었는지 팔에 받치고 있는데 여간 버거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안에 계신다고 주방에서 힘을 좀 썼다나 봐요.”
“그걸 그렇게 들고 왔나?”
“이 앞까지는 카트에 올려서 가져왔죠.”
일부러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나 싶어 눈살을 찌푸리자 테이블에 널찍한 트레이를 내려놓은 루이스가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무겁진 않았어요. 이것저것 챙겨주는데 거절하기도 그랬고요.”
“아무 말도 안 했다만.”
“얼굴로 다 말 하셨어요.”
벨져는 다음부터는 그냥 카트에 실어 오라고 하려다 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트레이 가득 가져온 단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기껏 힘들여 가져온 성의를 봐서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오이 샌드위치는 오랜만이네요.”
“원래 자주 먹는다. 부담도 적고, 단 건 별로라서.”
루이스는 차를 따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눈동자가 담은 뜻 모를 눈빛에 벨져는 뭔가 잘못 말했나 생각하다 그동안 티푸드로 단 것만 올리라고 지시했던 것을 떠올렸다.
“친절하시네요. 얼마 전까지 이름도 모르셨으면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시고.”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시선을 내렸다. 대개 그런 행동은 순종의 의미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서 복종이나 순종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이상하다. 오히려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물지 않았으면 했다.
새벽의 꽃잎, 혹은 세상을 소복이 덮는 눈 같은 미소가 보기 좋았다. 눈이 싱그러워지는 느낌이라고 하면 알까. 벨져는 시집의 온갖 미사여구와 언어를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저 미소를 다 담을 표현은 없다. 그야 물론 그 저명한 시인들은 이 녀석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지만.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어떻게 되는 지 가르쳐줘야 하나?”
“흠. 전 가끔 도련님 침대에 콩 한 알을 넣어보고 싶어지는데, 지금이 그러네요.”
루이스는 납죽 엎드리는 대신 부드럽게 응수했다. 돌려 말했지만 까다롭고 예민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뜻을 벨져가 모를 리 없었다. 벨져는 작게 실소를 흘렸다.
이 녀석은 첫날부터 그랬다. 돌보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를 고용한 건 홀든의 안주인이니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했던가. 하인이라기엔 거친 느낌이 나는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가끔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수를 둔다.
그의 그 당돌한 면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일단은 말이 통하는 상대도 오랜만인데다, 제 말 한 마디에 죽는 시늉을 하는 하인들에게 싫증이 난 상태였기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루이스의 이런 반응은 꽤 신선했다. 그래서 벨져는 채찍을 드는 대신 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해보지 그래?”
“싫어요. 그럼 제가 매트리스까지 다 갈아야 하잖아요.”
“넌 그런 거 안 해도 된다.”
“글쎄요.”
루이스는 애매한 말로 에둘렀다. 활자 속에 눈을 두고 있는데도 바로 맞받아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끔은 이 '당연함'이 무섭다. 겪어본 적 없는 세계,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과 사고는 낯설다 못해 섬짓했다. 여기 익숙해지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위기감과 막연한 공포. 다른 세계를 접하는 충격 앞에 루이스는 애써 의연한 척 했다.
벨져는 지금 오랜만에 적수를 만나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약한 면을 보였다간 금세 흥미를 잃고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될 게 뻔했다.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는 부품은 교체된다. 거리에서 나고 자란 루이스는 그 섭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제 일인걸요.”
“계속 그렇게 살 생각인가? 남 수발이나 들면서? 그렇게 봉사를 즐기는 타입은 아닌 걸로 아는데.”
“도련님이 건강해지시면 전 떠나게 될 텐데요.”
“남겠다는 생각은 없나? 굳이 이 저택이 아니라도 홀든에 네 자리 하나 쯤이야 우습지도 않지.”
“남아서 계속 당신을 모시라고요?”
아름다운 얼굴이 속내를 들킨 양 얼어붙었다. 그 자신도 생각지 못했다는 반응에 입맛이 썼다. 평생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하인이라니, 대를 이어 한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 자란 귀족 도련님 답다.
벨져 홀든에겐 이게 당연한 것이다. 이쯤 되면 우습지도 않다. 설마하니 이 유치한 억지가 통할 거라 생각한 걸까. 루이스는 책을 덮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해도 결국은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다.
아무리 디킨스 책을 읽어도 루이스같은 사람의 삶과 미래가 어떤지 알 리 없다. 그래. 한 입 크기로 자른 오이 샌드위치를 티푸드로 먹으며 빵에는 갈색 껍데기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귀하디 귀한 도련님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했다.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벨져도 이 거리를 느끼고 있을 터다. 뭐든 척척 대답하는 사람이 말문이 막혀 눈만 꿈뻑이고 있는 걸 보면 그랬다.
“차가 식었네요. 다시 준비해올게요.”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과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저 등을, 저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벽에 가로막히는 느낌이다. 그 벽은 너무 두텁고 높아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거부당하는 느낌, 모두 벨져 홀든에겐 생소한 것이라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같이 자라다시피 한 형제나 또래의 아이들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당황스러움이었다,
“가끔, 난 네가 너무 멀어.”
멀어지는 등에, 닫히는 문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중얼거렸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라 그 말이 루이스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0) | 2017.09.06 |
---|---|
[루드루이] 07. (0) | 2017.09.05 |
[루드루이] 06. (0) | 2017.09.03 |
[벨져루이] 유리 온실 (0) | 2017.09.01 |
[루드루이] 05. (0) | 2017.09.0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온실 시리즈에서 이어집니다.
* 병약한 벨져와 그런 도련님을 돌보는 하인 루이스
햇살과 바람, 지저귀는 새소리. 벨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몸이 무겁지 않다. 아주 잠깐 달콤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이렇게 상쾌한 아침을 맞은 게 대체 얼마마인가. 건강할 땐 너무나 당연했던 감각에 벨져는 기지개를 켜지도, 눈을 비비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 순간과 감각을 온전히 즐기고 싶어 눈을 감았다. 역시, 오늘은 컨디션이 좋다.
벨져는 침대 머리맡에 둔 작은 은종을 흔들려다 씩 웃으며 종을 손에 쥐었다. 잠을 설치지도 않고, 식은땀에 젖어 깨지도 않은 데다 악몽도 꾸지 않은 건 그 녀석 때문이다.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문이 열리며 루이스가 들어왔다. 양손 가득 수건을 들고 있는 루이스의 머리카락은 방금 씻은 것처럼 젖어있었고, 소매와 목깃도 다 잠그지 않은 채였다. 흰 얼굴이 물기에 젖은 것에 비해 입술만 붉다. 거기에 단정하지 않은 차림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벨져가 멍하니 평소와 다른 루이스를 바라보는 동안 루이스도 가만히 멈춰서 눈을 깜빡였다. 어째 덩달아 멍청해지는 것 같다. 루이스는 스스로 일어난 벨져를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눈이 떠지더군.”
웃으며 말하자 루이스가 아까보다 더 눈에 띄게 멈칫하며 벨져를 바라봤다. 어딘가 잘못된 곳을 찾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기분이 상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 표정은 뭐야.”
“아뇨. 제가 아는 도련님이 맞나 싶어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전혀.”
벨져가 홱 짜증을 내며 돌아서자 루이스가 다가왔다. 벨져는 창틀에 팔을 올린 채 바깥을 바라봤다. 늘 같은 풍경인데 오늘따라 더 환하게 빛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을 재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자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아무리 재도 열은 없다. 루이스는 그러고도 의심스러운지 얼굴을 가까이했다. 순간 이마가 차가워졌다.
“윽, 너...!”
“열은 없네요.”
루이스가 이마를 맞대며 눈을 깜빡였을 때, 벨져의 뺨에 없던 열이 번졌다. 기껏 상쾌한 아침을 맞아 좋았던 기분이 그 잠깐 사이에 오르고 내리며 심장이 뛰었다.
“, 네가 오기 전까지 완벽한 아침이었다!”
“제가 뭘요?”
“네가 자꾸...!”
턱, 말문이 막혔다. 벨져는 한숨과 함께 혼내기를 포기하고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세수할 거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주방에서 따뜻한 물을....”
“찬 물도 괜찮아.”
“...도련님 오늘 되게 이상한 거 아시죠?”
“얼른 가지 그래?”
이게 아주 보자보자 하니까 자꾸 기어오른다. 이러다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오를 기세라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냉큼 화장실로 들어가 주전자에 물을 채워왔다. 벨져는 루이스가 세면대에 물을 붓고 꽃잎을 띄우는 모습을 지켜보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는 어젯밤 잠옷 소매에 묶어놓은 리본을 풀어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리고, 결 좋은 은발을 뒤로 모아 묶었다.
루이스는 수건을 들고 벨져의 세수가 끝나길 기다렸다. 뜨거운 물이 아니라 평소보다 꽃향기가 덜하지만 비누에서 나는 향기와 약간의 물기만으로도 벨져 홀든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일찍 일어나 바람을 쐬는 거며, 잘 웃는 게 아무래도 오늘은 좀 살 만 한가 보다. 루이스는 비누거품을 닦아내는 벨져를 거울을 통해 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전에 여섯 번째인지 일곱 번째인지 모를 하인 하나가 벨져 앞에서 방긋방긋 웃다가 뭐가 그렇게 즐겁냐며 짤렸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 루이스는 벨져 앞에서 잘 웃지 않았다. 하기야, 자기는 아프고 비참해 죽겠는데 옆에서 누가 즐겁고 행복해하면 더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하인이라는 사람이 그러고 있는 걸 이 고고한 도련님의 자존심이 허락할 리 없었다.
“수건.”
벨져를 바라보던 루이스는 한 박자 늦게 보송하게 잘 마른 수건을 건넸다. 늦다고 성질내는 일 없이 거울을 보며 물기를 닦아낸 벨져가 폭 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나?”
“네. 일어나서 환기도 해야 하고 씻고 밥도 먹어야죠.”
그러고 보니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벨져가 보는 루이스는 언제나 문 앞에 세워둬도 될 만큼 멀끔하고 깔끔했고, 그게 너무나 당연해 다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 흐트러진 모습이라던가 씻고 먹는 것만 해도 그렇다. 잠시 머릿속에 느슨한 잠옷을 입고 잠든 루이스를 상상한 벨져는 괜히 차가운 물에 다시 손을 넣었다.
“아침 드셔야죠. 조금만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안 급해.”
“드시고 나면 더 기운이 날 거예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벨져는 고개를 저었다. 대충 물기를 털려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손을 수건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까지 빈틈없이 닦아내는 섬세한 손길에 고개를 내리자 생채기와 흉터로 엉망인 루이스의 손이 보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벨져의 손도 그리 다를 건 없었다. 검을 잡아 생긴 굳은살과 상처들이 자랑이었던 적도 있다.
“그럼 하고 싶으신 건요.”
검을 잡기는커녕 정원을 산책하는 게 고작인 몸이 되고 부터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녀석이 오기 전 까지는 그저 하루하루, 피와 살로 만든 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억울해서 분풀이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은.
“글쎄.”
애매한 대답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옷장 문을 열었다. 미의식이 꽝인 하인 대신 벨져는 매일 아침 입을 옷을 직접 골랐다. 루이스가 셔츠가 가득한 서랍을 다섯 개 열고, 일상복으로 채운 옷장을 두 개 열고나서야 벨져는 오늘의 옷 고르기를 멈췄다.
“정원에 꽃이 피던데 나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늘 보는데 뭐 하러.”
셔츠를 입히고 단추를 채운 루이스가 다시 무릎을 꿇고 바지를 입혔다. 벨트를 허리에 꿰고 나서야 루이스는 작게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버클은 채우지 않은 채로 벨져의 등 뒤로 돌아와 셔츠를 입힌 루이스가 벨져의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온실은 잘 안 가시잖아요. 다들 예쁘다던데. 올해 장미가 더 탐스럽게 피었다고 얘기가 자자해요. 그걸 보러 오는 사람도 있다던데.”
“흥. 잘도 아는군.”
“주워들은 게 있죠. 같이 가자는 사람도 있고.”
벨져가 시큰둥하게 빈정거리자 루이스가 다시 벨져 앞에 섰다. 아래서부터 셔츠 단추를 채우는 손길은 언제나와 같이 군더더기가 없었다. 다만 단추를 채우느라 집중하며 내리깐 눈이 신경 쓰일 뿐이다.
“그래봤자 꽃이 꽃이지.”
“그래도요.”
“하, 그렇게 가고 싶으면 혼자 가지 그래?”
가시 돋친 말에 베스트의 장식 줄까지 채운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하고 무심했다. 이 말간 얼굴로 다른 하녀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전 도련님 몸종이잖아요.”
당연한 소리다. 의식하지 않아도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명제인데도 그 말 한 마디에 울컥 감정이 치밀고 눈가가 시큰해진다. 말문이 벨져는 괜히 목을 만지며 구두를 신기는 루이스의 정수리를 바라봤다. 누가 뭐래도 나는 당신의 것이라는 그 말 한 마디에 다시 우쭐해졌다.
벨져는 루이스가 구두끈을 묶는 동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씰룩거리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썼다. 구두끈을 묶고 일어나 열어놓은 서랍과 옷장을 정리하는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는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가면 되겠군.”
“피크닉이란 얘긴 꺼내지도 마세요. 피크닉 바구니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시죠? 그 안에 식기며 그릇까지 다 들어간다구요.”
“내가 들면...!”
“그럼 제가 짤리는 거구요.”
루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기껏 인심을 써줬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영 별로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가자고 꼬셔놓고. 루이스의 손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불쾌했다.
“그래서, 나랑 가기 싫다는 건가?”
“...가고 싶으시면 가세죠. 도련님 집이잖아요. 누가 당신을 막겠어요.”
“그럼 준비해. 조금 걸을 거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요.”
그 놈의 식사. 벨져는 한 번 웃고 휑하니 나가버린 루이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도로 침대에 누웠다. 루이스의 젖은 머리카락이 아른거리고, 물기를 닦아주다 닿은 손이 간지러웠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루이] 05. (0) | 2017.09.01 |
---|---|
[홀든루이] 세상의 끝 (0) | 2017.08.31 |
[릭루이] Bittersweet (2) | 2017.06.21 |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5.24 |
[벨져루이] Midnight fight? (2) | 2017.05.14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유리온실에서 이어집니다.
스물. 루이스는 막연히 제 나이를 셌다. 많다고 하면 많을 수도, 적다고 하면 적을 수도 있는 숫자다. 의지할 곳 없는 거리의 고아치고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남는 아이는 별로 없으니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운이 좋았다. 루이스는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표현했다. 어느 해 겨울, 동사 혹은 아사를 목전에 뒀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수도사 하나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친절한 수도사는 혼자 지내기 적적했다며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책을 펴놓고 창밖을 내다보던 루이스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책을 덮었다. 제멋대로에, 더럽게 까다로운 도련님이 마님과 돌아온 모양이었다. 벨져가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벨져를 돌보는 것은 루이스의 몫이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라곤 지금처럼 마님이 벨져와 정원을 산책 할 때뿐으로, 보통 이십 분 정도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루이스는 짧은 휴식을 마치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벨져가 돌아오면 주려고 차게 식혀놓은 레몬티를 찾는데 무언가 후다닥 움직였다. 몰라보려야 몰라 볼 수 없는 은발이 툭 튀어나와있는데, 그 딴에는 제법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걸 모른 척 해, 말어. 눈을 가늘게 뜨고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보며 냉장고를 연 루이스는 반쯤 비어버린 병을 발견했다. 그리고 떡하니 놓여있는 물기 어린 컵. 숫제 뭘 훔쳐 먹다 걸린 반응이라고 생각했더니, 정말일 줄이야.
루이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 허리 위에 손을 올렸다. 대충 짚이는 곳이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오시죠.”
“으아, 봤어?”
“다 보였는데요.”
“거 눈 되게 좋네.”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지금까지 다들 그냥 눈 감아 준 거 아닙니까.”
“헤헤. 너, 제법인데?”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장난기 가득한 눈을 빛낸 그가 식탁 아래서 나오다 머리를 찧고는 엄살을 부렸다. 막내다운 응석이었으나 루이스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비워놓은 건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곧 도련님이 돌아오시는데요.”
“나도 도련님이거든!”
“아픈 도련님은 아니죠.”
“뭐, 그건 그렇지만.”
“제 도련님도 아니시고요.”
“우와, 방금 그거 엄청 위험하게 들리는데?”
루이스는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막내 도련님을 내려다봤다. 매사가 장난인 양 가볍게 굴고 있지만 본능적인 감이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거리 출신답게, 살아남기 위해 익힌 눈치와 감각이다. 아닌 척 철없는 막내의 가면을 쓴 채 제 잇속을 챙기는 영악함은 루이스가 잘 아는 것이었다.
귀족가 막내 도련님치고는 의외지만, 그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와 사정이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오래 살아남으려면 저와 상관없는 문제엔 끼어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어차피 계약제지만요.”
“하하하, 작은형 하인이야 일주일이 멀다 하고 도망가는데 뭘. 며칠 째야?”
대체 얼마나 하인을 갈아치웠는지 날짜를 세는 단위도 이 모양이다. 루이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속으로 오늘의 날짜와 처음 이 저택에 온 날을 셌다.
“한 달이 조금 넘었네요.”
“뭐? 한 달? 흐응. 보기보다 인내심이 훌륭한가봐?”
“식사 시간도 못 참고 주방에 숨어드시는 도련님보다야 낫죠.”
하인치고 다소 건방진 발언이었지만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저택의 막내 도련님은 그마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웃음을 참으려는 의지랄 것도 없었고, 이 댁의 말썽꾸리기에 대해 들은 게 있었기에 딱히 걱정이 되진 않았다. 어쨌거나, 루이스는 벨져 홀든의 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하인이었다. 지금 벨져의 기분을 잘 맞추고 있는 걸 생각하면 겨우 막내 도련님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해고되진 않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조금 괴롭힘을 받을지는 몰라도, 반응을 보고 있으면 정말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이 시답잖은 대화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루이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으므로, 루이스는 그가 마음껏 즐거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남들의 시선이나 조롱에 익숙한 몸이다. 고작 재밌다고 웃는데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작은형은 어때?”
다짜고짜 묻는 게 너무 직설적이라, 루이스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질문은 같이 지내기에 벨져 홀든이 어떠냐는 뜻으로도, 벨져 홀든의 상태가 어떠냐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루이스의 감은 전자를 가리켰으나 처음 본 사이에 고용주, 그것도 까다롭고 예민하기로 유명한 벨져 홀든과 사이가 어떠냐는 얘기는 하인으로서 대답하기 난처한 것이었다. 루이스는 가장 무난하고 상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오래 보지 않았던 가족이다. '네가 보기에 우리 작은형은 어떤 사람이야?' 보다는 형제의 상태가 어떤지 묻는 게 당연했다.
“도련님이야 늘 그러시죠.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져서....”
“잠깐, 나한테 몸이 어떠하네 상태가 좋네 그런 건 설명할 필요 없어. 보면 알겠지만 나는 홀든이고, 벨져보단 어려. 그러니 난 태어난 순간부터 벨져를 본 거라구. 나한테 내 작은형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필욘 없어. 그리고, 너도 어차피 여기 오래 있진 않을 거잖아?”
말투는 여전히 장난스럽지만 그 안에 든 말은 홀든이 자랑하는 검만큼 날카롭다. 식탁을 짚고 빙긋 웃은 그의 미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웃고 있지만 수가 틀리면 언제든 제 목을 꺾어버릴 것처럼 흉흉하다. 벨져보다도 어리니 저보다 어린 것은 당연한데, 홀든 가의 막내는 '홀든'이 원래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미소 끝에 이글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장난스러운 제스처의 의미는 항복이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롭고 가벼웠다.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에 루이스는 '말썽꾸러기 막내'에 대한 첫인상을 수정했다. 약자에겐 약자 나름의 방식이 있다. 루이스는 그저 이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루이스가 침착해진 것과 반대로, 탐색하듯 루이스를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잠시 웃음을 참는가 싶더니 결국 폭소를 터트렸다.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루이스는 굳이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너무 웃는 바람에 한 번 뒤로 넘어가기까지 하면서, 배를 잡고 눈을 훔친 이글 홀든이 루이스를 마주했다. 겨우 몇 분, 혹은 몇 십 초를 보냈을 뿐인데 무거운 공기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너무 그러지 마. 해칠 생각 없다고. 요즘 날카롭지? 그럴 거야. 곧 어머니 생신이고, 그날만큼은 아버지가 큰 파티를 열거든.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그 때라도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댁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병신은 아니라고 말이야. 덕분에 나는 올해도 작은형을 위한 희생양이 될 참이고.”
저택이 떠들썩하고 벨져가 날카로운 건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걸 제게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루이스는 오래 있지도 않을 소모품에 불과했다. 애초에 시중이나 드는 하인에게 집안사정을 말해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얘길 하는 저의가 뭡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하인을 이용해 친형제를 해치려는 게 아닌 이상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 느낀 위기감. 루이스는 벨져와 닮은, 그러나 전혀 다른 빛을 띤 눈을 마주했다.
“오, 예리한데? 한 달 지났다고 했나? 그럼 적어도 벨져 마음에 들었다는 거네.”
이글은 이런 취향인 줄 몰랐는데 말이야.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문제는 그 혼잣말이 다 들린다는 거지만 루이스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내내 장난스럽던 그의 눈빛이 달라진 탓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더 이상 놀잇감이 되어주기 싫거든. 네가 해줄 일은 아주 쉬워. 독을 타라거나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말만 해주면 돼. 없는 애길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형한테 날 만났다고만 해. 아, 물론 내가 시켰다는 말은 말고. 어때? 이 말만 전해주면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생기는 거야. 까칠한 도련님 모시면서 설설 기는 종노릇 그만 두고, 내 집 마련해서 행복하게. 어때? 끌리지 않아? 자, 이건 선금.”
이글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루이스에게 던졌다. 꽤 묵직한 주머니를 열자 노란 빛이 루이스를 맞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금화일 것이다. 그것도 순금. 생전 가져본 적 없는 금화를 손에 들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진짜 금으로 된 금화라구. 일이 잘 되면 똑같은 무게로 하나를 더 줄게. 어떻게 할래?”
루이스는 말없이 무거운 주머니를 챙겼다. 뜻하는 바를 이룬 이글이 씩 웃으며 다가와 루이스의 어깨 툭툭 두드렸다.
“그럼 잘 부탁해.”
얼굴이 가까운 거리에서, 이글이 한 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며 고개를 까딱였다. 루이스는 잠시 이글의 행동을 곱씹는 듯 가만히 서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모두를 창 너머에서 지켜본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저도 모르는 새 꽉 쥔 주먹이 떨렸다. 손톱이 마른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한 번 쥔 주먹을 풀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빨라지고 거세진 걸음에 매일 반질반질하게 닦는 목재 계단이 쿵쿵 울렸다.
온 저택이 다 들으라는 듯 발을 굴러 방에 도착한 벨져는 방금 산책에서 돌아온 것처럼 식식거렸다. 큰 소리로 진즉 나와 저를 맞이했어야 하는 녀석을 부르려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말갛고 순한 시종의 얼굴을 하고 차가운 레몬티를 투명한 유리병에 담아 온 루이스가 능숙하게 방문을 닫았다. 벨져의 매서운 눈빛에도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양 투명한 크리스탈 잔에 차를 따랐다. 루이스가 공손히 내민 잔이 바닥을 굴렀다. 유리가 깨져 부서지고 차가 양모 러그를 적셨으나 루이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대신 깨진 유리조각을 한 번 바라보고, 작게 한숨 비슷한 것을 삼켰다.
“......다른 걸로 바꿔와.”
“위험하니까 도련님은 잠깐 앉아 계세요.”
루이스는 능숙하게 러그 위에 있는 의자를 옮기고 유리조각 위에 러그를 덮어놓고 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벨져 홀든은 긴 숨을 토하며 침대 앞 디반에 앉았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있으니 하녀 하나가 들어와 러그와 유리조각을 치웠다.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제 할 일을 마친 하녀가 나가고, 벨져는 머리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벨져의 숨이 가라앉을 즘 다시 문이 열렸다. 루이스는 얼음을 띄운 컵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벨져는 노란 꽃잎 하나가 떠다니는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루이스가 쥐어준 그대로 들고만 있었다.
곧 벨져의 발치에 장미 꽃잎이 담긴 도자기 대야가 놓였다. 루이스가 소매를 걷고 김이 오르는 물을 붓더니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하고 주전자에 담아온 물을 더 부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루이스의 물기어린 손이 벨져의 구두와 양말을 벗겼다.
물 온도를 재던 손은 딱 좋을 정도로 따뜻했고, 하얀 발을 만지는 손길은 더없이 자상했다. 트집 잡을 곳 하나 없이 도련님의 발을 씻긴 루이스가 한 쪽 무릎을 세웠다. 무릎 위에 수건을 올리고 벨져의 발을 그 위에 올려 물기를 닦았다. 발가락 사이로 수건과 손가락이 파고들고, 꼼꼼히 주무르고 마사지 한 뒤에 빠져나간다.
고작 발을 닦는 것뿐인데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게 느껴질 정도다. 한 번 맡은 일은 허투루 하는 법 없는 충직한 하인. 벨져 홀든을 위해 손을 데우고, 물의 온도를 맞추고, 발을 주무르는 루이스.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발에 키스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벨져는 얌전히 내리깐 눈과 그 위에 드리운 속눈썹을 보며 제 발등에 키스하는 루이스를 겹쳐 보다 동그란 정수리로 시선을 올렸다. 꽉 막혀있던 숨을, 들리지 않게 토해냈다. 속단하긴 이르다. 출신이 미천해 당장은 돈에 혹했을지 몰라도 주인을 저버리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 적어도 아직은.
생각이 떠다니는 사이 루이스는 다 닦은 발을 다른 수건 위에 올려두고 물에 잠겨있던 발을 꺼내 방금 한 행동을 반복했다. 발을 온전히 내맡긴 채 벨져는 루이스의 동그란 머리 위에 손을 얹는 상상을 했다. 머리에 손을 얹고, 퍼석하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귓바퀴를 어루만지는 상상을 끊은 건 루이스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얄팍한 기대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루이스가 운을 뗐다. 이불 위에 올려놓은 벨져의 손이 부드러운 천을 움켜쥐었다. 잘 개켜놓은 천이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도련님의 동생 분을요.”
벨져의 발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루이스가 말을 이었다. 어떤 기색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하고 안한했다. '오늘은 날씨가 궂네요.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돈도 주더군요. 주머니 가득 채운 금화로.”
더 참지 못하고, 벨져는 제 발을 마사지하던 루이스의 가슴팍을 찼다. 루이스가 형편없이 뒤로 나동그라졌으나 조금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조차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했다.
“지금 날 팔아 넘겼단 소릴 하는 건가?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돈 몇 푼이라뇨. 저 정도 금을 제가 살면서 만져볼 일이나 있겠어요. 뭐, 상관없어요. 저 말고도 거기 또 누가 있었으니 어차피 새어나가게 될 텐데.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보자보자 하니 아주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파행을 당연하다는 듯 입에 담는 하인이라니, 당장 채찍질을 해 내쫓아도 할 말이 없다. 기가 막힌 나머지 말문이 막힌 벨져는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난 루이스가 엉덩이를 털었다.
“쌓인 게 많았나봐요. 벨져는 고약한 심술쟁이에, 성격도 더러운데다 꼴같잖은 거드름이나 피우고 다니는 멍청이라고 하더라구요.”
“뭐? 이글은 그런 말까진....!”
아차. 홧김에 반박하던 벨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버렸는지 깨닫고 말을 멈췄다. 피식, 엷은 소리와 함께 루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개를 든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벨져는 그동안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얇게 휜 붉은 눈과 슬며시 올라간 입매.
“저도 충성을 시험한 수고비 정도는 받아야하지 않겠어요?”
루이스는 답지 않게 엷은 미소와 함께 노래하듯 말했다. 당했다. 당혹감과 함께 빠르게 돌아가는 이성이 벨져 홀든의 패배를 고지했다. 졌다. 완벽한 패배다. 벨져는 뺨과 목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냥 맹하고 우직하게 일만 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정도면 제법 얄밉고 영악한 하인이 아닌가. 물론 진짜 얄밉고 영악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
“....... 알고 있었나?”
“네. 모를 수가 없었죠. 알려주던걸요. 손가락으로 당신이 있는 곳을 열심히 가리키더라구요. 친절히도.”
“칫, 이글....”
벨져는 자신의 시야의 사각에서 이글의 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어쩐지 녀석 치고 시킨 대로 잘 한다 했다. 녀석을 너무 믿은 것이 제 패착이다. 하물며 제가 놓은 수에 자신이 걸려들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치사하게 시험하는 것보다는 낫죠. 그쪽은 그래도 형을 도와준 거잖아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만 툭 던지고, 루이스는 다시 한 무릎을 꿇고 젖은 수건을 주웠다. 루이스가 대야를 치우는 동안 벨져는 평생 몇 번 맛본 적 없는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웃고 있을 이글의 얼굴이 그려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의기양양해진 루이스가 가련한 패배자를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제길. 다 알면서 왜...!”
“제가 말해야 했나요?”
원망이 가득한 말에 돌아온 대답이 매정할 정도로 침착해 벨져는 고개를 들었다. 진한 굴욕과 패배감에 끓는 화를 내보내는 벨져와 달리 루이스는 여전했다. 그 태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울하고 화가 나, 벨져는 크게 소리 쳤다.
“그게 무슨!”
“저는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죠. 도련님 똑똑하시잖아요. 눈치도 빠르고, 예민하고. 뭐 다른 게 있나보다 하고....”
“뭐?”
“...모르셨어요?”
엉뚱한 대답에 벨져는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루이스는 그 자신이 오히려 당황했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벨져의 머릿속에서 내내 맞춰지지 않았던,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던 답답함의 퍼즐 조각이 나타났다.
“드문 일이네요. 그것도 몰라보시고. 평소엔 셜록 홈즈 저리가라시면서. 설마 모르실 거라곤 생각 못했죠.”
벨져 홀든은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모든 정황을 알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장난에 어울려준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루이스의 그 짜증날 정도로 무심한 태도도 말이 된다. 멀쩡히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고 시험한 주인에게 서운해 하고 따져 묻지 않는 것만 해도 그렇다.
모든 것은 벨져 홀든이 이 모두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벨져 홀든은 루이스에게 그런 존재다. 그 별 거 아닌 인정을, 얼마나 바라 마지않았던가. 잠시 잊었을지 몰라도 벨져 홀든은 원래 대단한 사람이다. 격의 차이와 품위, 모두가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
방금 전까지 화를 냈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뿌듯해진 벨져는 루이스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뭐, 알려주지 않았다면 저도 깜빡 속았을 테니까 기분 푸세요. 이건 추가 수당으로 칠 테니까.”
“흥. 말은 잘 하는군. 다음엔 이렇게 끝나진 않을 거다.”
“또 시험하시면 그땐 그만 두죠. 이거랑 지금까지 일한 거면 십 년은 거뜬할 텐데.”
“윽, 지금 해보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조금만 봐주면 바로 기어오르는 게 아무래도 하인 길을 잘못 들인 것 같다. 겁을 먹지 않고 옆에 붙어있는 건 칭찬할 만하지만 역시 이래서 하인으로 부리기엔 곤란하다. 벨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제 기분을 들었다 놓는 버르장머리 없는 하인을 노려봤다.
좀 눈치를 살피란 뜻이었으나 루이스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대신 루이스는 손을 씻고 다가와 벨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얼굴이 얄미워 도로 걷어차 줄까 생각하는데 루이스가 다시 엷게 눈을 휘었다.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바닐라에 제비꽃 사탕 얹어놨는데.”
“너나 먹어!”
“정말요?”
조금 봐줬더니 아주 사람을 갖고 논다. 잠시 그 미소에 숨을 죽였던 벨져는 울컥 치미는 짜증에 손에 집힌 베개를 집어 던졌다. 루이스는 슬쩍 몸을 옆으로 돌려 손쉽게 피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올게요.”
다시 한소리 하려 입을 열려는 찰나, 루이스가 벨져의 무릎을 토닥이며 일어났다.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그와 자신만의 비밀 같아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계속 휘둘리기만 하는 기분이 불쾌해진 벨져는 방을 나서는 루이스를 불러 세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너.”
등과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문을 나서려던 루이스가 돌아봤다. 이대로 그를 온전한 승자로 두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문을 나가면 제 손을 빠져나갈 것 같아서 더, 손에 쥐고 있어야만 안심이 됐다.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마.”
“네?”
무슨 연유에서인지, 벨져의 혀와 입술은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저가 잘나봤자 하인, 괴롭히려면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 주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창을 뒹굴고 고된 일만 하며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고, 채찍을 들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그만인데도.
“이글이랑 얘기하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아이스크림만 가지고 바로 올라와.”
“...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 이상 루이스는 벨져의 이상한 명령을 따를 것이다. 문이 닫히고, 벨져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다 제 행동이 참을 수 없어져 이불을 마구 차고 베개를 던졌다. 분이 풀리지 않아 식식거리면서도 떠오르는 건 '도련님 똑똑하시잖아요.'라고 하던 루이스의 목소리와 미소뿐이었다.
일을 할 땐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 원망과 짜증이 뒤섞였다. 이게 다 이글 때문이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이상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조금 몸을 격하게 움직였다고 차오른 숨에 벨져는 다시 침대 위에 엎어졌다.
아픈 몸과, 빼앗긴 것들 대신 얻은 건 하인 하나뿐이다. 밤낮으로 먹어야 하는 약과 어머니의 걱정을 비롯한 다른 모두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하나마저 자신을 저버린다면 그때는. 벨져는 생각을 멈추고 긴 숨을 내쉬었다. 다정도 지나치면 무정이라는 말이 떠올라 눈을 감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정말,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7.05 |
---|---|
[릭루이] Bittersweet (2) | 2017.06.21 |
[벨져루이] Midnight fight? (2) | 2017.05.14 |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0) | 2017.01.27 |
[벨져루이] (0) | 2016.12.1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 Midnight fight?
해리포터au
루이스 2학년 벨져 1학년 꼬꼬마 애기시절
늦은 밤, 루이스는 몸을 뒤척였다. 침대에 든 지 오래 된 것 같은데 잠이 오질 않았다.
‘오늘 밤 자정, 숲으로 나와!’
그렇게 악을 쓰듯 외친 녀석의 분에 찬 얼굴이 아른거려 잠을 잘 수가 없다. 벨져 홀든은 입학 첫날부터 루이스를 괴롭히고 시비를 거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결과였다. 맹세코, 루이스는 벨져의 첫인사가 호의적인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열차에서 그의 제안 아닌 제안을 거절했을 때도 그랬지만, 오늘은 어디서 무슨 소릴 들었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렇게 선언하고는 대꾸할 새도 없이 슬리데린 테이블로 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결국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사로잡혀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저녁 시간에 말을 해보려 슬리데린 테이블을 기웃거렸지만 벨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맛있는 저녁을 제대로 못 먹고 포근한 이불을 덮고도 잠들지 못하는 건 전부 벨져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다시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벨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슬리데린 기숙사로 찾아갈까 하면서도 벨져의 형을 비롯한 슬리데린의 상급생이 떠올라 걸음을 돌렸다. 교수님이나 반장들에게 얘기했다간 또 벨져 때문에 슬리데린이 벌점을 받을 테고, 벨져는 또 제 탓을 할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심지어 늘 같이 다니는 앤지조차도 없었으니 벨져가 잡히는 즉시 제가 일러 바친 것을 알아챌 게 분명했다. 그럼 또 미움을 사겠지. 주변을 맴돌며 괴롭히는 것도 심해질 테고.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스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상관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역시 엄청나게 신경이 쓰인다.
결국 루이스는 체념하고 몸을 일으켰다. 포근하고 따뜻한 깃털 이불을 걷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루이스에게 조금 높은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루이스는 침대 아래로 발을 뻗었다.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엄지가 바닥에 닿는다. 몇 번 굴러 떨어져본 뒤로 루이스는 항상 침대에서 내려올 때 발끝을 세워 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슬리퍼에 발을 넣고 차가운 공기에 팔을 쓸어내린 루이스는 잠옷 위에 망토를 걸쳤다.
낡은 잠옷과 낡은 망토는 모두 물려받은 것이다. 고아원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므로 루이스는 기꺼이 물건을 나누어준 상급생들에게 고마워했다.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불평하기엔 너무 과분하다. 혹시 모르니 지팡이를 챙기고, 구겨져 올라간 원피스형 잠옷의 끝단을 내린 루이스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기숙사를 나왔다.
벨져 하나 때문에 오밤중에 이게 무슨 짓인지.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시험 기간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랬으면 늦게까지 공부하는 상급생들에게 꼼짝없이 붙들렸을 것이다.
휑한 복도를 조심히 걸으며 루이스는 목도리라도 챙길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텅 빈 공간만 해도 추운데, 벽과 바닥이 죄 돌이다 보니 더 추웠다. 지금이라도 따뜻한 침대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벨져가 숲에서 혼자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그쪽은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저를 손봐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벼르고 있다 해도, 벨져는 이제 막 입학한 일학년이다.
고작 한 살 차이에, 키도 몸집도 비슷하다지만 어쨌거나 신입생이다. 고아로 자라 제 밑의 아이들을 챙기는데 익숙한 루이스는 이것도 어쩔 수 없는 버릇이라 생각했다.
알아주는 명문가 출신에, 어려움이라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도련님이라도, 사사건건 시비에 어깃장만 놓는 되바라진 애라도 돌봐줘야 할 것 같았다. 더 훌륭하고 듬직한 보호자가 있음에도 그랬다.
숲은 위험하니까 얼른 데려와야 한다. 자칫 잘못했다간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저를 골탕 먹이려고 불러낸 거고, 정작 벨져는 침대에서 잠들어있으면 좋겠다. 물론 벨져 홀든 성격에 그럴 리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루이스는 벨져가 다이무스에게 붙잡혔거나 시간이 되길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기를 바랐다.
다들 자러 갔는지, 평소엔 꼭 한두번 씩 마주치기 마련인 유령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학교를 나온 루이스는 멀리 보이는 사람의 형체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코 온 모양이다.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루이스는 지팡이 끝에 자그마한 불빛을 밝히고 걸음을 재촉했다. 발에 젖은 풀잎이 스치고, 선물 받은 슬리퍼를 망치는 게 조금 미안하고 아까워졌지만 그보다 급한 게 있었다.
“벨져!”
“조용히 해, 이 멍청아! 꼴이 그게 뭐냐? 너, 설마 내가 부른 걸 까먹고 잠들었어?”
기껏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나왔더니, 환영 인사 한 번 거창하다. 루이스는 머리를 숙이고 달려오느라 차오른 숨을 뱉었다. 방금 침대에서 나온 차림인 루이스와 달리 벨져는 망토 안에 스웨터에 가디건까지 제대로 입고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됐다. 시답잖은 일로 불러낸 거면 이번엔 꼭 한 대 날려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루이스는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하? 그걸 몰라서 물어? 너 진짜 바보야? 당연히 결투지! 그것도 몰라?”
피가 싸하게 식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여태 벨져를 걱정한 자신이 한심해진 루이스는 더 들을 것도 없이 등을 돌렸다. 짜증이 치밀어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한밤중에 몰래 기숙사를 나온 것도 모자라 명문가의 자제를 때리기까지 하면 퇴학 처분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이를 악물고 왔던 길을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저따위를 걱정해준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야!”
“거절할게, 홀든. 그럼 이제 끝이지? 앞으론 말 걸지 말아줄래? 이딴 식으로 사람 휘두르는 거, 도련님인 너한텐 당연할지 몰라도 정말 불쾌하거든.”
루이스는 전에 없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하다못해 부모님이라도 계셨다면, 그랬다면 앞뒤 안 보고 다퉜을지도 모르지만 루이스는 지금 호그와트에 다니는 것도 기적이었다. 교수님들이나 같은 기숙사의 상급생, 친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역시 나중에 좀 성가셔도 그냥 이를 걸 그랬다. 흙이 묻고 젖어버린 슬리퍼가 눈에 들어와 더 서러워진 루이스는 눈을 문질러 닦았다. 아무리 분하고 서러워도 벨져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 서!”
직접 말하긴 무섭고, 다이무스 홀든에게 익명의 투서를 몰래 보낼 생각을 하는데 벨져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루이스를 붙잡았다. 얼굴만큼이나 예쁜 목소리라 그만, 걸음을 멈췄다. 루이스는 사실 벨져가 벨라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했다. 예쁘고, 똑똑하고, 가진 것도 많으면서 왜 저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루이스가 받아치려 고개를 돌린 순간 벨져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벨져! 뒤!”
“뭐, 뭐야!”
루이스는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털로 뒤덮이고, 팔다리가 네 개 달린 요정을 닮은 생명체. 픽시랑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르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루이스는 그들에게 지팡이 끝을 겨누며 벨져에게 달려갔다. 날개를 파닥거리던 그들이 뒤를 돌아본 채 굳어버린 벨져를 향해 달려들고, 루이스는 재빨리 벨져를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루모스!”
“멍청아, 그런 걸로 되겠...!”
“누구 때문에 저것들이 따라오는데! 네가 시끄럽게 하니까 그렇잖아!”
지팡이가 내뿜는 빛에 그들의 날개짓이 수그러들며 주춤했다. 밝은 빛에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본 루이스는 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지팡이를 거뒀다. 저건 사람을 골리는 픽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독시다. 더 다가오지 않고 독낭을 부풀리는 걸 본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이 주문이 통하길 빌며 주문을 외쳤다.
“임페르비우스!”
다행히, 루이스가 만들어낸 방수막이 한껏 부푼 독시의 독낭에서 흩뿌려지는 독액을 막아냈다.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걸 감지한 독시들이 날개짓을 하며 웅성거리고, 루이스는 안도했다. 한숨을 내쉬고, 한 팔로 꼭 안고 있던 벨져를 놓아주려는데 루이스의 발이 끈적한 무언가에 젖어들었다. 방수막을 타고 흐른 독액과, 이미 젖어버린 슬리퍼.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스는 끔직한 통증에 지팡이를 꽉 쥐었다. 독시들이 다시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루이스?”
“윽....”
“임묘뷸러스!”
“벨져!”
독시들이 얼어붙고,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져의 고개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급히 달려온 다이무스가 벨져를 발견하고,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인 카인 스타이거와 함께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벨져!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나는, 그러니까.... 형아, 난....”
“홀든! 동생을 데리고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라. 나는 루이스를 병동에 데려다줘야겠다.”
안절부절 못하는 벨져가 다이무스의 망토를 잡고 루이스를 바라봤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앓고 있는 루이스를 안아든 카인이 돌아서고, 다이무스가 어린 동생을 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벨져, 정말이지, 네 녀석은...!”
“홀든 군. 자네가 빚을 졌다는 걸 잊지 않는 게 좋을 걸세.”
“.......”
입술을 앙 다물고 있던 벨져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다이무스는 제 동생이 분에 못 이겨 교수에게 달려들어 소리치면 어쩌나 했지만, 고개를 든 벨져는 다이무스의 예상과 정 반대의 말을 했다.
“내일, 병동에 보러 가도 될까요.”
“사과 받을 사람은 따로 있지.”
“알겠습니다.”
머글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공손한 모습에 다이무스는 내심, 벨져가 루이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양 굴던 게 다른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으면 쌤통이라고 못된 말을 했을 녀석이, 장난을 치다 이글을 다치게 했을 때처럼 굴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관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벨져는 솔직하지 못한 아이였으므로, 다이무스는 기숙사 점수를 오십 점이나 깎아먹은 주제에 제 앞에선 죽어도 울지 않으려는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독시의 독이 그리 위험하지 않으며, 루이스는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위험천만했던 밤이 지나고, 루이스는 병동에 한가득 쌓인 사탕과 과자, 쿠키, 케이크, 초콜릿 사이에서 눈을 떴다. 조금 다쳤다고 이렇게 대접을 받는 게 처음이라 쑥스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지루한 마법의 역사 수업도 빼먹고, 하루 종일 누워서 과자나 야금야금 먹고 있는 신세라니, 분에 겨워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새 슬리퍼와 잠옷을 선물해준 트리비아에게 조금 혼이 나긴 했지만 루이스는 그것도 좋았다. 걱정과 애정이 섞인 꾸지람은 평생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 더 각별했다. 점심시간에 찾아온 앤지는 작은 꽃다발 하나와 꼼꼼히 정리한 필기 노트를 건네주고, 벨져가 아침 식사 내내 저기압이더란 얘기를 해주고 오후 수업을 들으러 가버렸다.
루이스는 발에 감겨있는 붕대와 선물을 보다 몸을 뒤척였다. 기껏 이런 기회가 왔는데 공부는 싫다. 뭘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작은 헛기침 소리에 루이스는 커튼 너머에 누가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니지만,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소년에겐 또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
“벨져?!”
“윽, 괘, 괜찮나보네.”
“뭐,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양팔을 등 뒤로 감춘 벨져는 평소의 기세는 어디 감췄는지 루이스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왜 왔어. 설마하니 벨져 홀든 경께서 미천한 천민한테 사과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난, 그....”
가볍게 한 농담에 벨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 말을 망설이는 모습에 루이스도 덩달아 당황해버렸다. 이런 모습의 벨져는 처음이라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제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거나, 멍청하게 자기 발밑도 못 본다거나, 너 때문에 혼났으니 책임지라는 뻔뻔한 태도를 예상한지라 너무 낯설어 벨져 홀든이 아닌 것 같았다.
“미안....”
“어, 어.... 응....”
내내 양 손을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벨져가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작고 엉성한 꽃다발과 편지로 추정되는 종이. 그리고 풀물이 잔뜩 든 손. 루이스는 감히 받을 생각을 못하고 눈만 꿈뻑거렸다. 뽀얗고 보드라운 벨져의 손에 물든 풀물만큼이나,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잠시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벨져가 침묵과 쑥스러움을 못 이기고 소리쳤다.
“어, 얼른 받아, 이 멍청아!”
“아, 응!”
얼떨결에 받아든 루이스는 꽃다발이라고 생각했던 나뭇가지와 꽃을 다시 살폈다. 꽃다발이라기엔 묘하게 모양을 만든 것 같은데, 타원도 원형도 아닌 무언가라 영 의심이 갔다.
“저기, 벨져.”
“뭐냐.”
평소대로 소리치고 나니 조금 괜찮아졌는지, 팔짱을 낀 벨져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린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거... 화환.... 맞지? 엄청 못 만든다.”
“뭐야?! 너, 사람이 기껏...!”
“고마워.”
겨우 눈을 마주친 벨져에게 생긋 웃자 길길이 날뛰려던 벨져가 방금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과 예쁜 파란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펑, 하고 터지는 것처럼 벨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벨져 홀든이라도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화환을 엮으면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한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윽.... 두고 봐! 다음엔 그런 소리 절대 못 하게 해줄 테니까!”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던데.”
“너, 이익...!”
“으악, 사람 살려!”
폼프리 부인이 달려들려던 벨져에게 병동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며 쫓아내고, 루이스는 식식거리며 돌아보는 벨져를 향해 예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루해했던 게 거짓말처럼 즐거워지고, 이상한 화환 하나와 편지 한 장이 손에 남아 있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릭루이] Bittersweet (2) | 2017.06.21 |
---|---|
[벨져루이] 유리 온실 (2) | 2017.05.24 |
[벨져루이] just wanna be with you (0) | 2017.01.27 |
[벨져루이] (0) | 2016.12.13 |
[루드루이] 04. (0) | 2016.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