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벨져ts루이에 해당되는 글 10건
- 2016.08.30 [벨져ts루이] 취중진담
- 2016.08.06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 2016.08.04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 2016.08.02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 2016.08.02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 2016.08.01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 2016.05.23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1
- 2015.04.11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2.
- 2015.04.11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1.
- 2015.04.11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0.
글
[벨져ts루이] 취중진담
밤늦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급히 달려간 디시카 근처의 한 펍은 좋게 말해도 품위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린 건 공간 자체에 짙게 밴 술 냄새와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거나하게 취해 널브러진 사람들 탓이 더 컸다. 가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벨져는 바닥에, 테이블에 뻗은 연합의 능력자들을 지나 제게 손을 흔드는 혈육에게 다가갔다.
오후에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다 헤어진 연인이 인사불성으로 취해 엎드려 자고 있는 걸 보는 건, 펍의 공기와 분위기보다도 더 질이 나빴다. 대놓고 인상을 쓰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벨져는 후드 사이로 흘러나온 머리카락과 바에 달라붙다시피 한 등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상황을 방관한 것도 모자라 새벽에 저를 불러낸 녀석을 쏘아봤다.
“미리 말해두는데, 난 잘못 없어. 멀쩡한 것 보면 몰라? 난 뒤처리반이라고!”
“용건만.”
“뒤처리반이 할 일이 다 그렇지, 뭐. 데려가.”
이글은 양 손을 어깨 높이로 들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등받이가 없는 원형 의자를 빙글 돌렸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며 발뺌하는 녀석의 뒤통수를 째려보며 팔짱을 끼자 곧 이글이 다시 의자를 돌려 벨져를 마주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쉰 이글은 그 옆에 뻗은 사람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계속 형 찾더라.”
저를 찾더라는 말에 벨져는 잠시 이글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내렸다. 바와 한 몸이라도 될 것처럼 엎드린 사람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어김없이 망할 후드를 입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더럽게 손이 많이 간다. 벨져는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과 함께 팔짱 낀 팔을 풀어 완전히 뻗은 그녀를 일으켰다. 축 늘어져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웅얼거리며 감았던 눈을 뜨는데, 평소의 총기와 서늘한 눈빛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흐리멍텅했다. 거기에 몸을 일으키자마자 풍기는 술 냄새는 덤.
그녀, 그러니까 벨져의 연인이자 연합의 영웅님께서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졸리고 취한 와중에도 눈앞의 사람을 확인하려 눈을 깜빡이다가 배시시, 이런 지저분한 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와 함께 눈웃음을 치는데, 이것만 봐도 얼마나 마셔댔는지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으응, 벨뎌어…….”
침대에서도 가끔, 저 좋을 때나 내는 콧소리와 함께 루이스가 안겨들었다. 머리와 몸을 기대고, 허리를 끌어안은 루이스의 뺨이 붉었다. 안아 올려 달라고 투정인지 술주정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는 루이스의 머리를 받치고, 벨져는 한가롭게 위스키를 마시는 이글을 바라봤다.
“아, 또 뭐어.”
“다른 말은 없었나?”
“별 얘기 안 했어. 알잖아, 우리 영웅님 취하면 자는 거. 그냥 뭐……. 형이 얼굴만 예쁜 개새끼라는 거?”
벨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집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바 위에 툭 던졌다. 이글의 손이 냉큼 지폐를 가져가고, 벨져는 계속 안아서 데려가라고 칭얼거리며 제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는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많이 안 마셨어. 쌩으로 위스키 두 병? 내가 오기 전에 뻗은 모양이더라고.”
용돈을 쥐어주자 술술 잘도 나오는 증언에 벨져는 눈살을 찌푸렸다.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루이스의 뺨을 잡아 올려 눈을 맞추고, 잘도 웃음을 흘려대는 그녀를 보다 푹 한숨을 쉬었다. 이게 귀여워 보이니, 정말 답이 없다.
“속이 안 좋으면 바로 말해라.”
“뭐야, 천하의 벨져 홀든 경께서 그런 허드렛일도 한단 말이야? 우리 영웅님 대단하네~. 사랑의 힘?”
“토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버릴 거다.”
“으응…….”
짓궂은 농담에 차갑게 대답하면서도,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벨져의 손은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자 물 먹은 솜 마냥 늘어진 사람의 체온과 술 냄새가 훅 끼쳤다.
“간다.”
“조심히 들어가~.”
급하게 나오느라 몰랐는데, 밤공기가 꽤 찼다. 머릿속으로 루이스의 집과 거리를 계산한 벨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디 이대로 무사히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언제 역류할지 모르는 게 바로 술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루이스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벨져의 목을 끌어안은 루이스가 벨져의 가슴팍에 뺨을 부비작거렸다. 평소에 이렇게 살갑게 굴면 좋으련만, 루이스는 애정을 표현하는 데는 영 서툴렀다.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루이스는 어떨지 몰라도, 벨져에겐 루이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관계가 이어질 리가 없다.
매번 싸우고 다투고 잠시 헤어졌다가 만나기를 반복하는 것도 다 사랑하니까, 서로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다. 만나면 하나가 되기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는 잃어버린 반쪽.
며칠 새 수척해진 얼굴이 짠해 또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음 같아선 어디도 못 가게 잡아두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욕심이지 루이스의 행복이 될 수는 없었다. 마음껏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 사랑이 뭔지 참 어렵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벨져는 기사단 쪽 일을 하느라 잠시 오스트리아에 다녀오느라, 루이스는 연합 때문에 이 주간 얼굴 한 번 못 보다 겨우 만났는데 만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서로 언성만 높이다 헤어져서 지금 이 모양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정말 결백했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아 노닥거리다 잠시 화장실에 간 루이스를 기다리는데 예의 그 거너가 접근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뿐이면 또 모르지만, 다짜고짜 예쁜이. 시간 있어? 라고 껄렁거리면 누구라도 시비를 건다고 생각하지 작업을 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대체 뭐가 그녀의 예민하고 섬세한 부분은 건드린 것인지. 물론 아예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다. 벨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콤플렉스 덩어리에, 한없이 낮은 자존감의 소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 빌어먹을 총잡이가 대뜸 옆자리에 앉아 척하니 팔을 제 어깨에 얹고 쫓기고 있으니 대충 말을 맞추라고 속삭이느라 얼굴을 가까이 했으니, 뒤에서 봤으면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그 순간에 이주 만에 하는 데이트를 생각했다.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되도 않는 책임감에 짓눌려 사는 사람이 신경을 쓸까봐 그냥 넘기려 한 것뿐이었다. 정말로, 오늘은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재미 좋냐는 천박한 말도 참아 넘겼건만 돌아온 건 루이스의 싸늘한 냉대였다.
루이스는 잠깐이나마 글래머의 금발 미인이랑 연인 놀이라도 해서 좋았냐고 빈정거렸지만, 벨져는 정말 그 점에 대해선 티끌 하나만큼도 죄가 없었다. 금발의 미녀가 아무리 많은들 루이스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 그녀가 제 편을 들기는커녕,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말하는 바람에 덩달아 벨져도 빈정이 상했다. 차분히 설명하면 알아들을 사람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둘 다 서로를 먼저 생각하기엔 지쳐있었고, 결국 벨져와 루이스는 자기 얘기만 하다 헤어졌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떨어져있는 내내 생각했지만, 벨져는 정말 억울했다. 제 편을 들어주어야 할 사람이 자신을 의심하며 믿어주지를 않는데 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머리가 식으면 다시 전화를 하겠거니 싶어서 잠도 설치고 기다렸는데 걸려온 전화는 취한 사람 데려가라는 전화였다.
속상하고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풀어야지, 왜 그걸 술로 푼단 말인가. 미련한 사람 같으니. 그걸 또 받자마자 달려온 자신도 미련하긴 마찬가지다. 사랑. 그래, 그 놈의 사랑 때문에.
벨져는 루이스를 고쳐 안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이 이렇게 찬데 아직도 반팔 티셔츠에 후드 한 벌이 전부라니 이 꼴로는 아무리 루이스라 한들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빠른 걸음으로 루이스의 집에 도착한 벨져는 문 옆 화분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잘 열리지도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고 허름한 공간에 냉기가 감돌았다. 바람만 안 분다 뿐이지 밖이나 다를 게 없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한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 벨져는 루이스를 침대 위에 눕혔다. 내려놓자마자 칭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루이스는 후드를 벗고,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등을 더듬거리는데 한 손으론 역부족인지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벨져는 한심해 하는 대신 루이스의 손을 잡아 내리고 그녀의 등 뒤에 앉았다.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게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어깨끈을 내리자 한결 편해진 얼굴의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바람에 날린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 익숙해진 것인지 전보다 술 냄새가 덜했다.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벨져는 동그란 이마에 키스하며 캐미솔 아래로 브래지어를 빼냈다. 하는 김에 꽉 죄는 타이트한 청바지도 벗기려 루이스의 다리를 무릎에 얹자 루이스가 꼼지락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바지까지 벗기고 나니 루이스는 까만 캐미솔 하나에 얇은 면 팬티 한 장 차림이라 이불을 덮어주려는데, 루이스가 벨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벨져…….”
“속이 안 좋으면 당장 화장실에…….”
“미안…….”
루이스는 고개를 도리 젓다가 벨져를 끌어안았다. 온종일 속을 태운 게 다 부질없어지는 사과에,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벨져는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루이스를 안고 좁은 침대에 누웠다. 피부 위, 옷 위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과 심장이 뛰는 소리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벨져가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허리를 토닥이는 것처럼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 안겨 이따금 얼굴을 부볐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 심장 박동만이 정적을 채웠다.
“루이스.”
“응…….”
“내가 사랑하는 건 너다.”
단호한 말투와 함께 손길이 멎었다.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더없이 진지한 벨져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어쩜 이렇게 한 점 흔들림 없이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러니 다른 사람들이 탐을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사람인지.
다시 고개를 드는 자격지심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자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얼굴을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루이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널 사랑한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루이스는 벨져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
“벨져, 난…….”
“사랑해.”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강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게 전부 제 탓인 것 같아서. 언젠가 이런 제게 질려 떠나버릴 것 같아서, 그처럼 당당할 수가 없었다.
“난……. 미안. 미안해.”
곧은 시선을 피할 곳이 없어 눈을 감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밀려드는 자괴감에 숨을 집어 삼키며, 루이스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네가 언젠가 날 떠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마…….”
“루이스. 날 봐라.”
이 남자는 한 번을 봐주는 법이 없다. 숨고, 도망가고 싶어도 언제나 이 눈빛에, 목소리에 잡히고 만다. 이번에도 벨져는 봐 줄 생각이 없었고,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하지 않는 한 이 상황이 계속될 게 분명했다. 차가운 공기를 폐에 집어넣고,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랑한다.”
“난...!”
“사랑한다.”
“벨져, 그만…….”
“사랑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실어, 꾹꾹 눌러 새기듯 말하는 그의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으니 그제야 벨져가 루이스의 뺨에 손을 뻗었다.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한 번 사랑한다 말하는 벨져의 목소리에 루이스는 벨져의 팔을 잡았다.
“나도.”
“사랑한다.”
같은 마음이라고 말해도, 벨져는 다시 한 번 사랑한다 말했다. 벨져 홀든은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도, 쉽게 사랑을 입에 담을 사람도 아니다. 루이스는 이러는 이유가 벨져의 얼굴에 있기라도 하다는 양 벨져를 바라봤다.
“내가 널, 사랑한다.”
“...무슨 뜻이야?”
“네가 아무리 자존감이 낮고, 못났어도 사랑한다.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이 벨져 홀든이 사랑하는 건 너니까. 알겠나?”
“...뭐야, 그게.”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주지. 물론 네 모든 게 내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한다.”
루이스는 벨져를 바라보다가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계속 눈을 맞추려 밀어내던 벨져가 이번엔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이 남자는, 언제나 완벽한 벨져 홀든 경께서는 지금 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와 견줄 수 있을 리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고, 다른 사람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뿐이니 그 시답잖은 불안과 걱정일랑 할 필요가 없다고.
참 위로에 서툰 사람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 파고들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도무지 솔직하지가 못하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에 담긴 갖가지 감정과 애정은 열 마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을 받고 그냥 입을 다무는 건 공평하지 않다. 루이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벨져의 얼굴은 어느새 퍽 자상해져서, 덩달아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은 사람은 늘, 자기가 사랑받는 걸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대.”
“그렇군.”
“그러니까 나도, 아마 계속 이럴 거야. 잠깐 괜찮았다가..., 또 불안해하고.”
“그 잠깐을 늘려나가면 된다.”
“...할 수 있겠어?”
벨져는 코웃음을 치고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그 미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벨져. 벨져 홀든이다. 난 내가 원하는 건 전부 손에 넣어. 너도 예외는 아니지.”
“대단하네.”
도망가고 숨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단단히 잡고 놔주지 않는 그가 좋아서, 루이스는 고개를 쭉 내밀어 입술을 맞췄다. 몸이 맞닿은 온기에 술이 들어간 몸이 노곤해지고, 무거운 졸음이 다시 몰려왔다.
“벨져.”
“말 하도록.”
“사랑해…….”
루이스는 벨져의 몸 위에 엎드린 채 그의 탄탄한 가슴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허리를 감싸고 머리를 토닥이던 손이 잠깐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제 입으로 몇 번이나 한 말이고, 안 들어본 것도 아닌데 또 느낌이 달랐다. 배시시 웃더니 기력이 다했는지 그대로 잠들어버린 루이스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고, 벨져는 품에 안은 연인을 꽉 끌어안지 않기 위해 이를 물었다.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연인의 사랑스러움이란,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다.
오늘 쌓인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가다 못해 행복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꾸만 광대가 올라가고, 웃음이 나와서 벨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그 누가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간 자기 자신에 대해선 한없이 무딘 사람이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심호흡한 벨져는 이불을 끌어당겨 루이스의 등을 꼼꼼히 덮었다. 아무리 취해도 기억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니 일어나면 분명 이불을 차겠지만, 지금 이 기분이라면 그것도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아무렴, 장장 이주 만에 연인을 안고 잠드는 밤인데 그쯤이야. 좁고 불편한 침대도 상관없다. 넘치는 사랑으로 충만해진 벨져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기대될 따름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무희 (0) | 2016.09.07 |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웹연재 공개분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미공개 분량과 완결편, 부록은 책에 실릴 예정이며 조만간 책 홍보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익숙한 길을, 전혀 익숙하지 않은 차림으로 걷는 기분은 오묘했다. 파티에 나갈 때나 신을 법한 구두와 좋은 옷, 거기에 모자까지 쓰고 길을 걷자니 흘긋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정도였다. 가슴과 허리를 갑갑하게 조여맨 속옷들때문에 숨을 쉬는 것도 버겁다. 날이 덥지 않아서 망정이지, 해가 내리쬈으면 이 차림도 여의치 않았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잘 닦인 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땅에서 한참 올라온 구두 때문에 뛸 수가 없었다. 옷과 구두, 심지어 속옷 하나에 이르기까지 몸에 딱 맞는 것뿐이라 헐렁하게 입고 다녔던 루이스에겐 하나같이 갑갑했다.
생전 꾸며본 적 없는 루이스가 이런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게 된 데에는 어김없이 벨져가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벨져가 부르는 날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 날은 세탁소에 들르는 걸 깜빡한 나머지 옷장에 처박혀 있던 원피스를 입고 그를 만나러 갔다.
뭘 입고 나타나도 탐탁지 않아 할지언정 따로 말은 하지 않아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마침내 빛이 바랜 노란 원피스가 벨져의 한계치를 넘어선 모양이었다. 벨져는 문을 열자마자 위아래로 훑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대체 그 차림으로 어떻게 여길 왔냐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옷은 편하면 그 뿐이고, 벨져의 기준에 맞추려면 그야말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꼴이라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럼 네가 한 벌 해주던가.'라는 말로 응수했다. 아니나 다를까 벨져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사주면 입을 거냐는 말에 답하지 않고 욕실로 직행한 게 문제였던 걸까.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연합으로 출근하니 휴게실에 잔뜩 쌓인 상자와 동료들의 시선이 루이스를 맞았다. 트리비아는 루이스가 오자마자 상자를 풀기 시작했고, 연합의 휴게실은 순식간에 부띠끄로 돌변했다. 원피스가 두 벌, 드레스가 한 벌,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여름용 스커트가 두벌씩. 거기에 속옷과 구두, 모자까지 하나하나 풀자면 끝이 없었다.
트리비아는 화려한 레이스 속옷을 가장 마음에 들어하며 예쁘겠다고 루이스의 몸에 대보고, 나이오비 역시 자기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맞장구를 쳤다. 벨져의 취향은 확고했고, 트리비아는 그 누구보다 즐거워했다. 꼭 살아있는 인형이 된 것 같이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레이튼을 비롯한 연합의 남성들이 민망해하며 자리를 피해도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몇 번을 갈아입고 다른 조합을 맞춰보다 마침내 화장까지 마치고 트리비아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그 바람에 일이 다 밀렸지만 나이오비가 걱정 말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루이스의 손에는 일거리 대신 흰 레이스 장갑과 작은 가방이 들렸다. 넣을 것도 없는데 가방을 왜 들어야 하냐는 질문에 트리비아는 그게 싫으면 양산을 들어야 한다는 말로 루이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래도 양산보다는 가방이 덜 무겁다. 아무렴 해가 다 지도록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상식도 한 몫 했다.
호텔에 들어설 때면 수근거리곤 했던 직원들이 오늘은 미심쩍은 눈초리 대신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루이스를 반겼다.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숙녀분. 이라는 친절한 목소리가 저를 향한 것인줄도 몰랐던 루이스는 혼자 갈 수 있다는데도 굳이 엘리베이터까지 동승한 벨보이에게 어설프게 웃고는 번쩍이는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이런 차림은 불편하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은 자신이 아닌 것 같아 낯설었다.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다. 정말 양갓집 아가씨라도 된 것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실수라도 할까봐 떨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건 다 몸을 옥죈 탓이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바로바로 열리던 문이 한참 열리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두드리려는데 철컥, 문이 열렸다. 그런데 벨져의 상태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루이스는 재빨리 문 안으로 들어갔다. 벽을 짚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벨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초점이 흐려지는 듯 눈을 찡그리는 그의 몸이 휘청였다. 루이스는 냉큼 벨져를 받아 안았다. 쓰러지다 시피 안긴 벨져는 몸을 가누질 못했다.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받치자 어깨에 턱을 얹고 몸의 무게를 온전히 루이스에게 실어오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둘째치고 호흡이 불안했다.
이쯤 되면 뭔가 잘못됐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인은 알 수가 없으나 일단 눕혀야 할 것 같아 침대 쪽으로 끌고 가는데 벨져가 루이스의 허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벨져, 정신이 좀 들어? 어떻게 된 거야?!”
“루이, 스....?”
고통스러운지 눈을 꿈뻑인 벨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를 행여 놓칠까 싶어 귀를 귀울이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예쁘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루이스는 계속 제 이름과 함께 예쁘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벨져를 안고 얼굴을 굳혔다. 제정신으로 벨져 홀든이 제게 예쁘다는 말을 할 리가 없다. 독일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걸 봐선 환각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벨져의 의도가 무엇이든, 지금은 의사소통이 되질 않는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벨져의 몸에선 술냄새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대신 테이블 위에 피가 묻은 붕대와 잔뜩 어질러진 응급 키트가 눈에 들어왔다. 심한 상처는 아니나 독이나 환각을 일으키는 무언가에 당한 거라 추측한 루이스는 문득 안타리우스의 전 근거지인 디미스트와 디미스트의 안개를 떠올렸다. 퍼즐이 짜맞춰지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들쑤셔진 머리가 찬물을 끼얹은 것마냥 착 가라앉았다.
루이스는 벨져의 몸을 받친 채 숨을 내쉬고 턱 아래 예쁘게 맨 리본을 잡아당겼다. 모자를 바닥에 대충 내던지고, 장갑도 벗어 던졌다. 걷기 힘든 구두에서 내려와 맨발로 벨져를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 전부 토하게 하고 물을 먹여 몸 안에 스며든 안개의 독을 빼내는 게 우선이다.
하루쯤 지나면 알아서 빠져나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시간동안 고통에 시달리게 둘 수는 없었다.
* * *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타는 듯한 갈증에 몸을 웅크렸다. 내리쬐는 햇살이 뜨거워 도로 몸을 돌리며 서서히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이상하다. 위화감의 정체는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이 멍해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와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깼어?”
“.......”
잠긴 목에 쓰디 쓴 무언가가 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무언가를 뱉어내려 콜록거리자 루이스가 신문을 접었다. 고작 기침 몇 번 했다고 몸이 뒤흔들리는 게 불쾌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감각이 가라앉질 않고, 목이 아파 눈물이 핑 고였다. 침대로 다가온 루이스가 내민 컵을 받아 단숨에 물을 들이키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조금 정신이 들자 위화감의 정체가 떠올랐다. 벨져는 루이스를 방에 들인 적이 없었다. 디미스트에서 가면의 남자를 만났고, 돌아와 어찌어찌 상처를 치료한 게 벨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상처를 확인하려 셔츠의 소매를 걷자 깨끗한 붕대가 감겨있었다. 이 셔츠, 어제도 입었던가? 벨져는 이불을 걷었다. 셔츠는 물론 속옷까지 전부 어제 입었던 것과 다르다.
벨져는 홀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어제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니 섣불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고백이라도 했다던가, 혹은 강제로 그녀를 범했다던가. 최악의 상황만 떠올라 루이스의 눈치를 살피는데 조금 퀭할 뿐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무표정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혹시 내가, 큼. 크흠.”
“룸 서비스 시켰어.”
“...뭐?”
“뭔지 모르지만 제일 비싼 걸로 시켰어. 혼자 다 먹을 거야.”
머리를 풀어 어깨 위로 늘어뜨린 루이스가 도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진홍색 실크로 된 나이트 가운은 분명 제 것이고, 보고 있는 신문 역시 벨져의 것이다. 루이스는 그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 태연했다. 어디서부터 트집을 잡아야할 지 모를 정도로 당당해서, 마치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나?”
“기억 안 나?”
루이스는 알고, 저는 모르는 이 상황이 데쟈뷰처럼 겹쳐졌다. 다시 겪어도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지만 그때와는 루이스를 대하는 감정이 달랐다. 벨져는 왜 너는 항상 나를 이런 식으로 만드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루이스가 벨져를 바라보다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초탈한 듯한 태도에 울컥했지만 지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기억이 온전한 쪽이었다.
“그래. 잘 생각해봐.”
“루이스.”
“옷은 다 맡겼어. 이따가 갖다준대.”
“지금 그걸 말하는 게....”
“괜찮아. 갈아입을 옷 가져왔거든.”
무슨 말을 못 꺼내게 단칼에 쳐내는 게 예사롭지 않다. 벨져는 그 기백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잘못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 음식이 도착하고, 루이스는 말 한 마디 없이 포크를 들었다.
끼니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사람이 제대로 식사를 하는 건 기특한 일이지만 분위기가 경직된 나머지 말을 붙이기가 조심스러웠다. 벨져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놀랄 만한 장면이었으나 방 안에는 루이스와 벨져 단 둘 뿐이고, 루이스가 답하지 않는 이상 벨져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 수가 없었다.
방에 루이스를 두고 씻는 내내 기억을 더듬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두통과 짜증만 늘 뿐이었다. 씻고 나오면 뭐라도 얘기해줄 줄 알았더니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이었다.
루이스는 끝내 침묵을 고수했다. 방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마주친 눈이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으나 문이 닫혔다. 루이스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고, 그 의뭉스러운 행동에 벨져의 기분만 찝찝해졌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0) | 2016.08.04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0) | 2016.08.02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0) | 2016.08.02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여느 때와별 다를 거 없는 오후, 휴게실 소파에서 빈둥거리려던 이글은 먼저 소파를 차지한 사람을 보곤 혀를 찼다. 대체 어디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지만 지은 죄가 있다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담요를 찾았다.
“뭐 찾아?”
“담요 어디있어?”
턱으로 루이스가 자고 있는 소파를 가리키자 양팔 가득 서류를 들고 나르던 레베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통 소파에 걸쳐져있기 마련인 담요가 보이질 않는다. 레베카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항복을 선언했다. 따라 들어온 트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애들이 가지고 노는 거 아니야?”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뭐가 안 따라주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레베카가 웬일로 남을 챙기냐며 씩 웃으며 팔꿈치로 이글을 툭 쳤다. 말이 툭이지 퍽에 가까운 소리와 통증에 이글은 맞은 팔을 감싸쥐었다.
“짜식, 엄살은.”
“엄살 아니거든!”
“어유, 그래? 그럼 남자답게 시원하게 벗어서 덮어주던가.”
대낮부터 한 잔 한 것처럼 킬킬거리는 레베카를 쳐다보던 이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편한 분위기는 좋지만, 천덕꾸러기 취급은 가문에서 받는 걸로 충분하다. 입을 비죽이자 레베카가 내가 살 테니 이따 한 잔 하자며 윙크했다. 이거 한 대 맞고 공짜술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이글은 냉큼 그녀에게 윙크를 돌려줬다.
“무르기 없기!”
“뭘 물러?”
“레베카가 이따 쏜대!”
“오오, 그거 좋지!”
“너희는 포함 아니거든!?”
따라 들어온 휴톤과 도일이 사람 좋게 웃으며 레베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어째 둘 다 묘하게 텐션이 높다. 이글은 근육질의 남자 둘에게서 풍기는 냄새에 질색하며 물러섰다.
“뭐야, 대낮부터 퍼마신 거야?”
“퍼마시긴! 마, 더워서 한 잔 했다.”
“그럼그럼. 이런 날씨엔 시원한 맥주가 딱이지!”
“한 잔도 한 잔 나름이지.”
이글은 트리비아의 핀잔에 맞춰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음 때문인지 루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누웠다. 하기야 이 소란에 잠이 잘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 사무실에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이 찾아들고, 회의실에서 자기엔 부담된다며 루이스는 굳이 휴게실의 소파를 고집했다. 그마저도 시끄러운 사람들이 다니니 제대로 못 자는 게 당연하다. 이글은 혀를 차며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씨들, 담요 못 봤어?”
“소용 없데이. 윽수로 예민하다 아이가.”
“엑.”
이렇게 떠들면서 할 얘기는 아니지 않나 싶어 두 사람을 보자 휴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부터 그랬어. 저렇게 잠깐 눈을 붙이긴 하는데, 몸에 뭐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
휴톤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길거리의 고아 소녀가 몸을 지키기 위해선 자는 시간마저 온전히 쉴 수 없다. 아마 그 생활이 몸에 배인 모양이라고 말하는 내내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얘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잘즈부르크 축제에 다녀온 벨져의 말이 떠올랐다. 축제 기간에 맞춰 집에 돌아온 벨져는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냐는 이글의 질문에 '잠자리가 불편해서' 라고 답했다. 그 말에 김이 팍 샌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왜 갑자기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는지는 몰라도, 둘 다 예민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둘 다 엮이면 피곤해지니 그냥 모른 척 지나가려는데 마침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이글은 잠든 루이스를 돌아보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다 아는 이상 루이스가 감기라도 걸리면 연합은 대체 사람 관리를 어떻게 하는거냐며 저를 붙들고 또 애먼 화풀이를 할 게 분명했다. 이글은 구석에 방치된 담요를 집어들었다.
“그냥 다시 자라고 하지 뭐.”
휴톤이 말리려들었지만 이글은 후딱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 소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떠드는 소리에 뒤척이다 천장을 보고 누운 루이스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이 봐도 안쓰러운데, 좋아하면 얼마나 속이 썩을까. 이글은 무언가 닿는다는 것마저 느끼지 못하도록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담요를 내려놓았다. 덮어 씌운다는 생각으로 대충 하면 깰까봐 조심하는데 그것도 마뜩치 않았는지 루이스가 웅얼거렸다.
그 소리가 정지 신호라도 된 것 마냥 손을 멈추자 루이스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눈꺼풀이 무겁게 올라가 깜빡였다.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와,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짓는 눈웃음에 순간 사고가 멈췄다. 그 사이 미소와 함께 뻗은 손이 이글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제가 아는 루이스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사근사근한 태도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대로 끌려가자 몸을 겹친 이글의 귀에나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이글의 귀를 간지럽혔다. 포옥, 내쉬는 숨과 목을 끌어안은 부드러운 팔에 어안이 벙벙했다.
혼란에 휩싸인 이글의 목덜미를, 뒤에서 커다란 손이 잡아 당겼다. 그 우악스런 손아귀 힘에 겨우 정신을 차린 이글은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 없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그 손에서 풀려났을 땐 휴게실에서 회의실로 끌려온 뒤였다. 의자에 억지로 앉혀진 이글 앞에, 주먹 깨나 쓰는 덩치 둘이 자리하고 그 사이 의자에 앉은 트리비아가 다리를 꼬았다. 안 그래도 무서운 누님과, 웃음기가 싹 가신 두 사람을 앞에 두니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사이렌이 왱왱 울린다. 이글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잠깐, 잠깐.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우리 말로 해결합시다!”
“이글.... 난 그래도 네가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동감이데이. 니 혹시....”
“아니라니까! 아, 답답해 미치겠네! 나도 억울하거든?! 나도 피해자라고!”
“뭐? 피해?”
“아악!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어떤 놈들이 겁도 없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가는 상황에 이글은 머리를 쥐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겨우 돌아온 관심에 이글은 깊은 한숨을 토하고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냥 잠꼬대 한 거야. 내가 맹세하는데,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 그리고 쟤도 나이 먹을만큼 먹은 성인인데 자기 맘대로 할 수도 있지!”
신랄하게 두다다 쏟아내는 말에 휴톤과 도일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야 그들이 성급하게 굴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데, 억울함을 토로하고 나니 잡혔던 뒷목이 아파왔다. 목을 돌리자 우두둑 소리가 나고, 목이 뻐근해 주무르자 휴톤이 못내 미안한듯 주춤거렸다. 한 마디 않고 차디 찬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트리비아의 눈매가 살짝 풀어졌다.
오해로 치면 아론 휴톤만큼 역시 오해받는 기분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덩치는 산만해서 금세 순한 얼굴을 하고 미안해해서 짜증이 가라앉긴 하는데, 애초에 오해를 안 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파렴치한 취급이나 하고. 울컥 튀어오르는 서운함과 억울함을 토로하자 휴톤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도.... 억수로 미안하데이.”
“됐거든! 아니 그리고, 댁들이 무슨 막내 여동생 시집 보내기 싫어하는 팔불출 오빠야? 나 그래도 귀족집 도련님이거든? 내가 무슨 해충이야?! 진짜 너무하네!”
“아니, 그게.... 정말 미안하다.”
이글이 뚱하니 팔짱을 끼자 머리를 긁적이던 도일이 어깨를 두드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데.... 그, 가는 우리도 불안타.”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정말 한창인 나인데 연합 일에만 매여있으니까.”
“그게 뭐 하루 이틀이야?”
별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를 구태여 하는 의도를 묻자 휴톤이 멀리서 엘리와 피터를 볼 때 짓는 표정을 지었다.
“연애도 못 해보고, 남들처럼 꾸미는 것도 아니고 일만 하니까.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저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 강한 녀석이라는 건 알지만, 그 등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도 미안하고.... 걱정이지.”
“얼래? 그렇게 치면 앤지는!”
“갸는 그 일 전까진 평범했다 아이가.”
“그래. 상대적으로 루이스가 불우한 시절을 보낸 건 맞지. 게다가 루이스는 뭐냐, 그.... 잔... 잔, 누구였지?”
“잔 다르크?”
“그래! 그 사람처럼 언젠가 홱 죽을 것 같다구. 루이스는.... 늘 혼자 짊어지려 하니까.”
이글은 가만히 휴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중간에 트리비아가 거들지 않았어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녀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답게 말은 어수룩해도 분명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혼자 다 짊어지려다 스러질 것 같다고, 좋은 시절을 전부 연합과 그녀의 그 어리석은 이상에 얽매여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루이스는 위태로운 사람이다. 그건 부정할 여지가 없다. 그런 사람이니까, 라는 말로 넘기면 그 뿐이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못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이 사람들의 유대이고, 그 유대가 강한만큼 루이스를 아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벨져는? 이렇게 답답한 면마저 좋다는 걸까. 문득 스치는 의문에 이글은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방금 제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호기심에 그렇게 된통 당해놓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그 둘은 어느 모로 보나 달콤한 연애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눈이 맞았다? 이글은 못된 장난을 하기 전에 드는 두근거림을 즐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왜, 나름 잘 즐기는 것 같던데.”
트리비아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휴톤은 알고 있었는지 아차 싶은 눈치였고, 도일은 못 알아들었다. 이글은 악동처럼 미소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일은 혼자만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휴톤을 툭툭 쳤고, 휴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이글과 트리비아를 번갈아봤다. 의기양양하게 회의실을 빠져나온 이글의 뒤로 트리비아의 냉기가 흘렀다.
“잠깐 나 좀 볼까?”
“흐응. 미녀의 제안은 거절하지 않아.”
“우리 자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도련님?”
“알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데.”
또각거리는 킬힐 소리와 함께 위험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 트리비아가 이글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대로 벽까지 밀린 이글은 양손을 들어 항복자세를 취했지만 트리비아는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과연 여제, 이글은 그녀의 박쥐들을 떠올리며 미소로 화답했다. 진짜 무서운 건 언제나 여자들이다. 특히나 연합에선 더더욱.
“왜 이러실까.”
“어머, 몰라서 묻는 거야?”
“모르겠는데.”
“저런. 거짓말을 하려면 티는 내지 말아야지.”
“티났어?”
“그럼.”
이글은 아쉬운 척 입을 다셨다. 연합의 누님들은 하나같이 무섭지만 그 중 가장 무서운 건 단연 트리비아 카리나다. 속을 알 수 없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냉기가 꼭 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쪽은 진심이야?”
“그쪽? 어딜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둘째 도련님 말이야.”
“아아, 작은형? 우리 작은형이야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우린 모여 앉아서 연애사업 얘기할 사이가 아니거든. 칼부림이라면 또 모를까.”
“흐응. 뭐, 좋아. 두고 보면 알겠지.”
트리비아의 손이 떨어졌다. 이글은 태연한 척을 하느라 집어삼킨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작 문제의 당사자는 태평하게 잘만 자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 된 걸까. 간만에 착한 일을 하려 해서 그런가, 얻은 거 없이 손해만 왕창 본 기분이었다.
이글은 잠든 루이스를 가만히 지켜보다 입가를 매만졌다. 나쁜 장난을 할 때면 팽팽 돌아가는 잔머리가 활발하게 돌아가고, 만족스러운 계획이 세워지자 씩 웃으며 자리를 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이글은 고양이도 아닐 뿐더러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난 이글은 목 뒤에 양팔로 깍지를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0) | 2016.08.06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0) | 2016.08.02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0) | 2016.08.02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0) | 2016.08.0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이상하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이글은 요 며칠 새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 최초의 생각으로 회귀했다. 역시 이상하다. 조용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폭풍전야가 따로 없었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폭풍을 앞둔 고요다.
최근 들어 가장 이상한 걸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예민하고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제 작은 형이라 하겠다.
멋대로 예고도 없이 방을 썼는데 일언반구 없고, 오히려 즐거워보이기까지 했다. 어딘가를 떠도는 건 전이랑 다를 게 없지만 안타리우스의 근거지에서 돌아온 뒤로 한참 바쁘더니, 파티에 참석하질 않나, 요즘은 큰형이 있는 광장에서도 언뜻언뜻 돌아다니기까지. 분명 무언가 감추는 게 있다. 이글의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이글은 제 심증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라지만 이글은 개의치 않았다. 호기심은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욕구고, 그런 욕구는 본디 바로바로 풀어줘야 하는 법. 여느 때처럼 연합의 휴게실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던 이글은 냉큼 일어나 검을 들었다.
워낙에도 딱딱하고 젠체하는 형들을 먹이는 건 특기지만 오늘은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판도라의 상자를 열러 가는 기분이랄까. 벨져의 비밀을 파헤칠 생각을 하니 어린애마냥 들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회사와 연합은 안타리우스와 물밀듯 들어오는 신흥 세력들에 치여 완전 카오스 상태고, 당연스럽게도 이글은 회의에서 배제됐다. 알려주는 건 이미 퍼져서 공공연한 사실이 된 정보 정도일까. 연합에 투신하기 전에도 이런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건 익숙했기에 별 감정은 없다. 그들이 히든 카드로 쓰겠답시고 감춰둔 정보는 이미 이글의 손에 들어와있는 경우도 많았다.
골방에 틀어박혀 머리를 맞댄들 이 상황이 나아질 리 없다. 누구라도 같은 마음일 테지. 공공의 사라지면 그 후에 이권과 공적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두고 또 치열한 밥그릇 싸움을 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연합과 회사는 여전히 능력자 세계의 큰 축이지만 그 비대해진 몸집을 감당하지 못하고 내부의 파벌이 힘겨루기를 하고, 그러느라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언젠가 무너질 걸 알고 있음에도 그들이 독립을 선언할까 섣불리 손을 손쓰지 못하는 건 연합이나 회사나 똑같았다. 그 지경에 이른 걸 어찌 해보겠다고 토니와 루이스를 비롯한 측근 참모진이 고군분투하는 중이지만 전쟁의 행보란 조커 급의 능력자인 토니 조차도 예측할 수없는 문제였다.
“뭐, 애초에 그게 가능했으면 인간이 아니겠지만.”
이글은 가벼운 걸음으로 공중에 혼잣말을 날려보냈다. 따라 붙는 시선이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살기도 적의도 서려있지 않은 미행. 대충 정체는 짐작이 간다. 그제인지 언제인지 벨져의 호텔에서 봉사만 하고 허탕을 친 그것때문이겠지. 이글은 나이스한 바디에 붉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를 떠올렸다. MI7의 요원이라는 건 몰랐지만 홀든 가의 망나니에게 정보를 빼내려 접근하는 미녀는 수도 없이 많았고, 덕분에 이글은 그네들이 예쁘장한 얼굴, 관능적인 몸매, 진한 화장과 화려한 치장으로 가린 정체를 간파하는데 통달한 상태였다.
글쎄, 누구라도 벨져같은 형제와 함께 살다보면 그렇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게 벨져 홀든이고, 그를 낳은 어머니다. 주변엔 하나같이 에쁘고 잘생긴 사람들 뿐이고 이글 그 자신도 얼굴로는 어디 내놔도 뒤쳐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후광쯤 비치거나 웬만큼 신비롭지 않고서야 이글이 외모에 홀릴 일은 없다. 이글은 제 작은 형을 떠올리고 혀를 찼다. 다이무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잘난 가문에서 하라면 군말 없이 결혼할 사람이다.
그런데 벨져는, 그 아름답고 오만한 인간은 오죽하랴. 벨져는 그냥 아무 여자랑 원나잇을 하기엔 눈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게다가 그 몹쓸 자존심. 그러니까 귀족으로서 가지는 고결함과 품격엔 맞지 않는 행위라며 점잖을 떠느라 제대로 연애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물론 한 사람과 오래 만나지 않기는 이글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이글은 제 욕구와 흥미엔 충실한 편이었다.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기왕 사는 거 즐겁게 다 누려봐야지. 하여간 형들이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글은 문고리에 걸려있는 룸서비스 사양용 팻말을 슥 보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을 땄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못 할 것도 없다.
대체 무슨 짓을 하길래 문까지 꽁꽁 걸어잠그셨나 했더니, 그 답지 않게 방 안이 어수선했다. 별다른 위험은 느껴지지 않지만, 평소와는 확실히 다르다.
빈 방에는 머스크 향이 가득했다. 벨져가 애용하는 향수의 냄새다. 그런데 그 아래로 은은한 꽃냄새가 난다. 강한 머스크와 비누에서나 날 법한 냄새. 다소 이질적인 조합에 이글은 벨져의 화장대 위를 살피다 익숙한 향수병을 집어들었다.
화려한, 딱 벨져 홀든 같은 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쪽. 수수하고 은은한, 웬만해서는 눈치 채지 못할 향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하고 욕실에 들어가 문제의 답을 찾으려 했지만 욕실에도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글은 제 형의 취향이 참 일관됐다는 것만 새삼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벨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여기 왔었다. 타인의 흔적을 찾아 방 안을 훑던 이글의 눈이 침대에 멈추고,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어쩐지 요즘 엄청 바쁘더라니. 화장대 앞에 걸려있는 흰 목욕가운과 두 사람이 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침대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벨져 홀든을 모르는 사라이라면 또 모를까, 이글의 눈엔 이 방을 본 것만으로 그간의 정황이 훤히 보였다. 이글은 확신을 위해 이불을 걷어 시트를 만져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게 둘 다 나간지 얼마 안 된 모양인데, 그것도 놀라웠다. 벨져 홀든이 다른 사람을 침대에 들인 것도 모자라 아침까지 함께 있었다니! 다른 호텔도 아니고 여기로 데려올 정도면 그건 정말 진심이란 뜻이고, 놀라운 만큼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비싸게 굴더니 제일 먼저, 그것도 비밀로 애인을 만들어?
이글은 괘씸한 작은 형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베개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이 눈에 들어온 건 정말이지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결코 짧지 않은, 벨져의 것보다 더 탁한 색의 머리카락. 익숙한 색이다. 머리카락을 집어들어 빛에 비춰본 이글은 떠오른 인물에 말문을 잃었다.
그러고 보면 둘 다 요즘 통 안 보이긴 했다. 워낙 바쁜 사람들이고, 상관을 안 하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그 실상이 이거일 줄이야. 저도 모르는 사이 충격에 입을 벌렸던 이글은 다시 한 번 손에 쥔 머리카락을 보고 기가 찬 나머지 실소를 흘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둘이? 이글은 문제의 두 사람을 잘 알았다. 가장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세상에서 떠들어대는 것보다는 잘 알았다. 둘 다 연애하고는 연이 없는 사람인 건 둘째 치고 이 시국에 자기들 감정에 빠져 없는 시간을 허비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럼 뭔가 더 있다는 건데. 숨은 뜻을 참으로 머리를 굴려도 이렇다할 게 떠오르지 않아 끙끙거리던 이글은 머리를 헤집으며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를 쓰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무렴. 그 둘이 한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벨져는 과거의 패배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걸 즐겼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정말 초월하고 극복했을 리 없다. 그러기에 벨져는 너무 잘났고, 그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신경 안 쓴다고 하느라 더 신경을 쓰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그런데 그 상대와 잔다고? 루이스도 그렇다. 벨져가 그러는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 왜?
이글은 그 둘 사이에 제가 모르는 모종의 거래를 상상하며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하긴, 첫 만남이 그렇게 강렬했으니 또 모르지. 소위 운명의 짝이라는 걸지도 모르고, 섣불리 판단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하이힐을 신은 여자마냥 도도한 발소리에 이글은 방 주인이라도 된 양 일어나지도 않고 괘씸한 작은 형을 맞았다. 예상한 대로 벨져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다가왔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벨져가 예쁜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이글을 쏘아봤다.
“어~. 작은 형,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바쁘게 쏘다녀?”
“뭐하는 짓이냐, 이글.”
“어, 열려있더라구. 왜? 내가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혹시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실실 웃자 벨져가 대놓고 그 수려한 외모에 짜증과 불만을 담아 미간을 찌푸렸다. 핵심을 찔려 더 불쾌하겠지. 이글은 계속해서 아픈 구석을 찔러댔다.
“어? 진짠가 본데. 누구야? 예뻐?”
“이글.”
“에이, 그러지 말고~. 응? 누군데. 응? 아, 속 시원히 말 좀 해봐!”
“그런 거 없다.”
“정말? 그럼 이 머리카락은 뭐야?”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눈을 찡그리던 벨져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당황한 벨져의 눈빛에 이글은 상큼하게 웃었다. 나는 다아 알고 있어요. 비록 제 대사는 아니지만 지금은 재단의 동갑내기 독심술사의 말이 딱이었다.
“어디 보자, 형 거라기엔 좀 길고, 색도 탁하고…. 흐으음…. 누구더라?”
“이글!!!”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르고 그래?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봐?”
벨져가 이죽거리는 이글을 쏘아봤다. 떨리는 입가가 억지로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래봤자 이미 평정을 가장하기엔 한참 늦었다. 이글은 실실 웃으며 손을 펼쳤다. 공중에 뜬 머리카락이 둥실 떠다니다 떨어졌다.
“뭐, 형 반응 보니까 대강 알겠네. 근데 설마 억지로 한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망발이냐!”
“아무렴 시정잡배들고 아니고 명예를 목숨같이 아는 벨져 홀든 경께서 그러셨겠어. 근데, 좋았어?”
“이글!!”
“아, 소리 치지 말고 말 좀 해봐.”
어라, 이상하다. 벨져의 반응이 어째 시원치 않다. 아니,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게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과할 정도로 반응하는 게 어째 더 수상하다. 이러니까 마치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시뻘개진 얼굴이며 자기가 모욕당한 것보다 더 날카롭게 반응하는 게 딱 그랬다.
그 총잡이도 이런 분위기였지. 이글은 제 가정이 점점 더 확실해지는 걸 깨닫고 무미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벨져가 사랑에 빠진 건 두고두고 놀려먹을 일이지만, 웃음이 안 나왔다. 이건 하나도 재밌지가 않다.
“형, 미쳤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적당히 해라.”
“걔가 누군지 몰라? 진짜로?”
“그런 거 아니다. 제길, 설명해줄 테니 나와.”
“형!”
“나오라고 했다.”
싸늘한 눈빛에 이글은 입을 다물었다. 더 볼 것도 없다. 벨져가 하려는 말은 기껏해야 그의 감정을 어떻게든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티가 나다 못해 이 정도면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감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벨져가 루이스를 좋아한다. 그것도 이성적인 감정으로.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길은 너무 험하고 힘든 길이었다. 몰랐으면 또 모를까, 다칠 게 훤히 보이는데 가만히 지켜있을 수는 없다. 이글은 제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였다는 걸 시인했다. 열면 안 되는 상자를 열어버렸다.
“루이스가 좋아?”
“…….”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마주한 형제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그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하는 소모전. 이글이 먼저 시선을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걘? 걔도 형을 좋아해?”
“……”
“진심이야?”
사랑이란 한 쪽의 감정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옆에서 안타까운 짝사랑을 하는 사람을 봐왔기에 잘 알았다. 그 애처로운 사랑 얘기의 주인공이 벨져가 될 줄은 몰랐지만 그라고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나 사람의 마음은 더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음 심장을 가진 그녀다.
벨져는 원하는 걸 가지는 사람이지만, 그녀는 아니다. 이글은 가까이서 지켜본 루이스와, 그녀의 등을 떠올렸다. 얼핏 가녀려 보이는 어깨지만 그 어깨에 짊어진 건 수 십 수만명의 목숨이다. 루이스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또 모를까, 제 아무리 벨져라 한들 그녀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녀의 이상은 너무나 멀고, 이 혼란한 세상과는 동떨어진 것이기에 더더욱.
때문에 이글은 벨져가 말로라도 아니라고 답하길 바랐다. 차라리 모르면, 그렇게 부인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멀어지면 되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벨져는 답이 없었다. 침묵은 긍정이라 했던가. 더구나 지금 이 상황에서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이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뜻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짜 미친 거야? 걔가 누군지 몰라서 이래? 그래. 예쁘긴 하지. 근데 예쁘기로 치면 형이 더 예쁘거든?!”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백 번 양보해서 형이 좋아한다고 해. 뭐 그럴 수도 있지! 가끔 하는 거 보면 귀엽기도 하고! 근데…!”
“잠깐.”
말을 막은 벨져의 눈빛이 험악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위협적인 눈빛에 이글은 움찔 뒤로 물러났다. 말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법이고, 이글은 제 형의 주먹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뭐?”
지금 어이가 없는 사람이 누군데, 벨져는 기가 차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뭐라는 건가. 아니, 기껏 사람이 걱정을 해줬더니 병신 취급을 해? 그것도 친동생을 상대로? 질투를? 벨져 홀든이?
이글은 차례로 떠오르는 의문에 헛웃음을 흘리다 웃어제꼈다. 이 정도면 정말 답이 없다. 지랄도 적당히 해야 불쌍히 여기지,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다. 한바탕 폭소한 이글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자신을 가라앉히고 벨져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이글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자초지종을 추궁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벨져 홀든이라니 소름이 끼쳤지만 그래도 그는 제 형이었다. 몹쓸 형이지만 어쨌거나. 그러니 어느 정도까지는 도와주는 게 맞다. 이글은 잠시 머릿속으로 연합과 벨져를 저울질하다 한 번 더 튕겨 보았다.
“나 연합 소속이걸랑?”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냐?”
“아, 예…. 참 잘나셨네요. 하아. 진짜 내가 미쳤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라. 이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옆에서 본 게 몇 년인데 귀여운 거 좀 볼수도 있지! 분명히 말하는데, 걔가 웃어주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거든?! 형보단 내가 걔를 잘 알어! 알아?!”
누구 염장지르는 것도 아니고, 꼴에 좋아한답시고 되먹지도 않은 질투를 하는데 억울한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팔짱을 끼고 못마땅해하던 벨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왔다.
“그럼 아는 김에 말해봐라.”
“…뭐?”
“그녀에 대해 아는 거 전부. 그럼 멋대로 군 것 정도는 용서해주지.”
벨져는 이글을 내려다봤다. 그 딴엔 선심 써서 아량을 베푼다고 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이건 권유가 아니라 협박이다. 말 안하면 용돈을 끊던가, 아니면 주먹이나 발이 날아오겠지. 이미 그의 승리에 도취해있는 형을 올려다보며 이글은 눈을 깜빡였다.
정말이지, 걱정을 해봤자 보람을 느낄 수가 없는 형제다. 이 거지같은 형을 걱정하느니 루이스를 걱정하는 게 심신의 평화에 이로울 성 싶었다. 일단은 제 신세부터 걱정해야겠지만. 이글이 속으로 갈등하는 사이 벨져는 의자를 끌어다 앉고 와인까지 들고 와 홀짝였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다. 판도랑의 상자를 연 순간 빠져나갔다는 온갖 부정한 것들. 그 모두가 한데 섞여 벨져 홀든의 형상을 띠었다. 이글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글이 연 상자의 밑바닥에는 일말의 희망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글쎄, 희망이 있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일까.
벨져는 이글이 다 토해내기 전까지 보내줄 사람이 아니었고, 다이무스처럼 은근슬쩍 속아주는 사람도 못됐다. 이글은 지금쯤 연합의 사무실에서 용을 쓰고 있을 루이스를 떠올리고 쓴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샤드가 제 머리를 강타하는 감각이 아직도 선했지만, 지금 그녀는 아주 멀었고 벨져는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가까운 주먹이 무서운 법이었다.
영웅님. 미안. 나도 좀 살자. 이글은 긴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0) | 2016.08.06 |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0) | 2016.08.04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0) | 2016.08.02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0) | 2016.08.01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0) | 2016.08.0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일 때문에 몇 번 와보긴 했지만 휘황찬란한 럭셔리 호텔의 구조며 장식들은 여전히 새 것처럼 번쩍거리고, 여전히 낯설었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던 남녀 한쌍은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루이스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괜히 움츠러들어 후드를 더 깊이 눌러 썼다.
이런 장소는 역시 조금 부담스럽다. 화려한 걸로 치면 카모라나 아이리쉬 갱단의 보스들 사무실이 더하지만 공간이 풍기는 분위기는 비견할 수 없었다. 꼭 너같은 게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급스러운 금장이 박힌 문패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우아한 필체를 떠올리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똑, 똑. 루이스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문을 두드렸다. 있는 줄 몰라서가 아니다. 보통은 초인종을 누르니까 그런 평범한 일로 방문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뒤를 내다보고는 루이스가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껴 섰다. 최소한으로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벨져는 문을 걸어 잠궜다. 누가 벨져 홀든 아니랄까봐, 럭셔리 호텔의 객실은 참으로 그다운 화려하고 우아한 가구로 가득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화장대 위에 뜯지 않은 편지들이며 종이들이 흩어져있었다.
[귀엽더라.]
[눈이 대체 얼마나 낮은 거냐.]
[너 말야.]
대충 방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뚱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꽤 귀여운 수를 썼던데? 꼭 자기같은 꽃도 보내고.]
[하, 별일이군. 답지 않게 꽃말도 아나?]
[정확히는 얽힌 일화를 아는 거지만.]
코웃음친 벨져가 루이스를 지나쳐 작은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의 기다림을 알려주듯 테이블 위엔 와인잔 두 개와 와인 한 병이 놓여있었고, 벨져는 코르크 마개를 따 잔에 따랐다.
[앉지 그래.]
[고마워. 안 그래도 다리가 아팠거든.]
그리 오래 서있던 것도 아니지만 루이스는 일부러 벨져의 신경을 긁을 법한 말을 하며 벨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와인을 따르고 있지만, 순간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만으로도 도발은 충분했다.
[질문할 건 좀 생각해봤어?]
[먼저 할 기회를 주지.]
[그 내려다보는 태도는 여전하구나. 그러다 또 다칠라.]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지. 더 할 말 없나?]
루이스는 벨져가 내민 잔을 손에 들었다. 건배따위는 필요 없겠지 싶어 대답하는 대신 그를 바라보며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려 잔을 기울이자 질 좋은 와인의 달고 상큼한 향이 훅 끼쳤다. 펍의 맥주나 위스키가 입에 맞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걸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에겐 뭐든 싸구려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루이스는 싸하게 포도의 향을 남기고 넘어가는 와인을 삼켰다. 은은히 감도는 향이, 꼭 혀를 희롱하는 것 같다.
넌 내게 줄 게 없다. 네가 가진 것들 중에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없고.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던 벨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남자에겐 이 정도가 당연한 걸 테니까. 아무리 애써도 그의 눈에 찰만한 걸 마련하는 건 무리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전에 내건 조건을 떠올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먼저 물을게. 제키엘 헌팅턴의 테라듀는 우리 쪽 테라듀 능력자의 것과 동일한 금속이야?]
[그렇다.]
루이스는 레베카가 만나러 간다고 했던 '친구'와 가면의 아이작을 떠올렸다. 그리고 레나를 쫓던 스토커. 그 세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면 그의 인간적인 면을 파고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레베카는 그 역할을 하기엔 너무 올곧고, 그렇게 잔인하게 친구를 속일만한 사람이 못 됐다. 배신을 경험하는 건 자신만으로 족하다. 루이스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성급했다. 일단은 이 남자를 상대하는 게 먼저였다.
[네 차례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길래 시간을 준 것 뿐이다.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벨져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우아하게 와인잔을 돌렸다. 붉은 와인이 잔 안에서 물결치며 얇은 선을 남겼다.
[해석하는 건 각자의 자유에 맡기기로 했던 것 같은데.]
[흐응. 딱히 궁금한 건 아니다. 관심도 없고.]
[좋아. 그래서 네 질문은 뭔데?]
[이공간을 통해 얻은 힘은 공간을 파괴하면 사라지나?]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다. 관측할 수 없는, 보고된 적 없는 주제에는 답을 할 수 없다.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새 공간이 발견되긴 해도, 사라진 경우는 아직 우리 쪽에서도 전례가 없어. 그러니까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어. 나만 손해만 본 것 같네.]
모른다는 말을 돌려 말해도 벨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여유롭고, 내려다보는 시선은 변함이 없다. 와인잔을 입에 가져간 벨져의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순간 루이스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이 질문의 답은 솔직하게 대답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벨져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한 번의 기회를 버린 셈이었다.
[답지 않게 의심이 많네, 벨져.]
[확실할수록 좋다고 한 건 너였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그 정도는 내줘도 상관 없다는 태연자약한 태도에 루이스는 생긋 웃었다. 오만한 말투며 사람을 깔보는 태도하며, 혼자 여유를 만끽하는 저 잘난 얼굴이 짜증났다. 얄밉다는 말로는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재수 없다. 어쩌다 이 남자와 다시 얽히게 됐을까.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날 그 문을 열었던 걸 후회했다. 아예 마주치질 말았어야 하는데.
[뭐, 그럼 다시 질문하지. 공간을 없애는 걸 시도한 적 있나?]
루이스는 바로 답하는 대신 잔의 밑동을 만지작거리다 가볍게 잡고 들어올렸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고, 눈으론 그를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이 아까울 정도의 고급 와인이지만 쉬지 않고 한 숨에 쭉 잔을 비웠다. 입술을 떼고 흐르는 방울을 혀로 핥자 벨져가 피식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순순히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내가 친절했다는 생각은 않고? 전에 누가 먼저 뻗었는지 기억 안 나나 보네.]
[흥. 그딴 배려 필요 없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벨져 홀든이다.]
[벨져 홀든이시겠지.]
살짝 툭, 건드리기만 했을 뿐인데 벨져가 발끈해 눈에 힘을 줬다. 안 들어도 뻔한 말에 목소리를 겹친 루이스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뺨을 받쳤다. 지킬 게 없다는 건 그만큼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강하고, 더 자유롭고, 그만큼 외롭고. 루이스는 어깨에 준 힘을 뺐다.
벨져는 못마땅하단 표정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아무리 그의 기분이 언짢은들 루이스는 그의 눈치를 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시큰둥할 뿐이었다. 루이스는 벨져 대신 객실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며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갚아주는 게 도리다.
[네 의무는 아직 다하지 못한 거지?]
[...그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해낼 거다. 난, 벨져 홀든이니까.]
테이블 대신 둥근 와인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건드리던 루이스는 한결 진중해진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벨져의 표정에 여유로 가득한 오만한 미소가 걷혔다. 하나마나인 질문을 하는 걸, 같은 방식으로 돌려준 것뿐이고 그라고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한 번 하기로 했으면 적어도 상대를 대등하게 대하는 게 그가 수호하는 기사도가 아닌가. 그러니 이 질문은 아무것도 담지 않고 있음에도 충분히 가치있었다.
[좋아. 질문해.]
벨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새삼 벨져의 속눈썹이 길고 예쁘다는 걸 깨닫고 와인잔의 테두리를 검지의 지문으로 매만졌다. 원을 그리는 손가락에 와인 방울이 맺혀 잔 위를 미끄러졌다.
[회사로 넘긴 연구 일지, 누락된 건 의도된 거였나?]
[계속 말하기 곤란한 질문 뿐이네. 맞아.]
[그럴 거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토니는 알고 있어.]
고르고 골라, 정제해낸 신중한 질문에 루이스는 성의껏 답했다. 모르는 거라면 몰라도 알고 있는 걸 감추진 않는다는 게 이 게임의 규칙이었고, 벨져에게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선 신뢰를 쌓는 게 우선이었다.
비록 그의 시험에 한 차례 통과했다고 해도 교묘하게 답하는 거나, 회피하면 결국 둘 다 시간만 버리고 헛수고만 쌓일 뿐이었다. 전 게임이 그런 식으로 끝난 것도 결국은 신뢰의 문제였으니까. 특유의 오만함이 전부 걷히지는 않겠지만,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면 충분했다. 사실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하는 게 반칙이지만 흥미가 생겼는지 벨져의 눈빛이 이유를 요구했다.
[감이야.]
[뭐?]
예상한대로 벨져가 미간에 힘을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야 물론 그냥 피하려 하는 거라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루이스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근거가 없기에 설명할 수 없을 뿐이었다.
[못 믿겠으면 말고.]
[연합에선 원래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나?]
[기사단에선 원래 이런 식으로 정해놓은 규칙도 존중 안 해?]
[너...!]
[분명히 해두지만, 조직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으로 하는 거래야. 싫으면 당장 그만두던가.]
루이스는 잔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고 나기를 귀족, 그것도 홀든의 벨져. 이 남자와 동등한 자격으로 거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스는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고 생각도 없었고,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이 게임을 이어가야 할 정도로 아쉬운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연합은 가장 능력자들이 많은 조직이고, 그만큼 들어오는 정보도 많았다. 물론 그걸 솎아내는 것도 일이지만 연합은 회사, 혹은 국가 하나와 정보전을 해도 밀리지 않는다. 하물며 오스트리아에 국한된 기사단이 얼마나 유익한 정보를 가지고 있겠는가. 루이스는 벨져에게 이렇게까지 의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쉬운 건 벨져고, 그걸 알기에 제안한 것 뿐이다. 두 가지에 답했고, 한 가지 답을 얻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등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벨져의 목소리가 루이스를 불러 세웠다.
[잠깐.]
[영양가 없는 소리나 하면서 계속 날 무시하고 깔볼 거라면 더 있고 싶지 않은데.]
[...다시 앉아주겠나?]
딴에 많이 참은 듯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 나름대로 양보한 거라는 걸 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자의 입장에서 봐주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아량을 베풀 듯 굽혀주는 게 아니라, 동등한 위치를 원했다.
[다시 앉으면? 어차피 계속 그런 식으로 굴 거잖아? 자기만 양보하고, 참는 것 같고 그래?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하지 마.]
[...약속하지.]
[뭘?]
[노력하겠다.]
겨우 한다는 말이 노력하겠다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벨져는 자신이 한 약속을 나몰라라 할 위인은 못 됐다.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그 높다란 자존심에 꽤 상처일 테고,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에 루이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도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가 질문할 차례였다.
[프리츠를 돕는 건, 한 사람을 위한 거야?]
[아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나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이득을 볼 수는 있겠지.]
[흐응. 그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투군.]
벨져가 그 예쁜 얼굴에 불쾌하다는 걸 드러냈지만 루이스는 덤덤했다. 한 차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놓고 자기는 이런 식으로 구냐는 불만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지금은 연합의 능력자도, 기사단의 단장님도 아니니까 뭐.... 내가 감이라고 답한 거랑 비슷한 거지.]
[시키지도 않은 설명을 한 건 너다.]
[그러니까 잘 걸러서 들어야지. 그건 해석하는 사람 몫이야.]
[자의적 해석으로 답을 회피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질문에 포함이야?]
질문에는 질문으로. 싸늘한 신경전 속에 날카로운 말이 오갔다. 계속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바람에 고작 세 번 질문이 오갔음에도 피곤이 몰려왔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고급 와인이라 방심하고 한 번에 들이킨 게 이제야 올라오는지 머리가 아팠다. 임시방편으로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다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 같으니.]
[동감이야. 그보다 슬슬 피곤한데.]
[쯧.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랬나.]
벨져가 일어나 객실 한 쪽에 있던 크리스탈 물병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고압적인 말투나 시종일관 사람을 얕잡아보는 것만 아니면 소설 속에나 나오는 기사님 같았을 텐데. 물론 전형적인 기사님은 따로 있지만 이런 면에선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두 사람의 정의가 다를 뿐이라던 말을 떠올린 루이스는 고맙다고 인사한 뒤 물을 마셨다. 와인보다 더 미지근한 물에선 비린 맛이 나지 않았다. 얼음을 녹이지 못한 날이면 그냥 수도에서 따라 마시는 물과는 천지차이다.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루이스는 잔을 반쯤 비우고 내려놓았다.
[네 차례야.]
[계속 할 수 있겠나?]
[이정도 쯤이야. 사실 오늘 야근해야 했는데 덕분에 탈출했거든.]
루이스는 엷은 미소를 띠며 머리를 마사지하던 손을 내렸다. 앤지도 토니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챈 벨져는 영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춰서 해가 됐으면 됐지 득이 될 게 없다는 건 벨져 역시 잘 알았다.
[헌터가 프리츠에도 관여했나?]
[헌터라....]
모호하고 위험한 질문에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졌다. 헌터가 어느 개인을 특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직업군을 뜻하는 것인지도 애매할뿐더러 프리츠에 관계했냐니. 홀든과 프리츠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건 전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제게 묻는 의도는 무엇인가. 정말 몰라서?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더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벨져가 잔을 들었다.
[망설인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넘어가도록 하지.]
[조금 의외라서. 그런 거 안 궁금할 것 같았거든.]
[그런 거라.]
[그렇잖아. 아니면 이것도 너를 위한 거야?]
[그것도 질문에 포함인가?]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나른하게 고개를 저었다. 뺨이며 몸이 뜨뜻한 게 피곤한 나머지 술기운이 금방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안 해도 될 말이 나오는 건 다 그 때문이었다.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꽤 많이 돌아다녔거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미지근한 물에 얼음을 만들어 넣었다. 잔에 얼음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연합이야 그렇다 쳐도 그동안 서점에서 안 잘린 건 기적이지.”
“흥. 둘 다 같은 이유겠지.”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다른 건 몰라도 ‘영웅’의 이름은 꽤 매력적인 선전 도구니까.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돌려 말해주는 게 친절인지, 아니면 그냥 한 말인지 몰라도 그 핵심만큼은 정확했다. 그래. 둘 다 같은 이유다. 그걸 제외하면 남는 거라곤 얄팍한 연민과 정뿐이다. 그렇게 배신당해놓고 또 사람을 믿는 자신도 참 우습지만.
“다른 소릴 해대는 걸 보아하니 취했나보군.”
잠시 생각에 빠져 동료들의 얼굴을 그리는 사이, 벨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이 떨리고 그림자가 지는 모습이 예뻐 눈을 뗄 수 없었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엷게 웃었다.
벨져 홀든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남자다. 외모도 그렇지만,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포식하는 맹수와도 같이 강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강하기 때문에 여유롭고, 강하기 때문에 약자를 굽어 살피는 아량도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그 자신만을 사는 그에게 제 모습은 퍽 답답하게 비춰질 터였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한심하다는 듯 볼지도 모른다. 벨져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고, 이유를 말한다 한들 이해할 수 없다.
루이스는 벨져의 오해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안 하느니만 못 한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 겨우 와인 한 잔에 취할 리가 없고, 설령 취했다한들 정신은 말짱했다. 피곤에 절은 몸이 받쳐주지 않는 것 뿐. 그렇다 해도 벨져는 더 이어갈 의지가 없어보였기에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 와인 잘 마셨어.”
“간다고? 이 시간에?”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물론 날이 바뀌어 오긴 했지만 못 갈 것도 없는 시간이다. 루이스는 그게 뭐 어때서?란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우아하고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론 머리를 받치고 있던 벨져가 인상을 쓰며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전장을 나뒹군다 한들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협은 어쩔 수 없다. 성큼성큼, 힘으론 절대 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루이스는 긴장하며 뒷걸음질 쳤으나 벨져는 홀든의 쾌검사였다.
등이 벽에 닿고, 벨져가 다가와 팔을 뻗었다. 얼굴 옆, 벽을 짚어 자신을 가둔 그의 손과 팔이 거북했다. 그래봤자 한 팔 뿐이니 완전히 가둔 것도 아니고 못 빠져나갈 것도 없지만 이런 식은 불편하다. 문득 떠오르는 지난밤의 기억에 루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세게 뛰었다.
“저, 저기…. 벨져…?”
“아무리 너라도 새벽 두 시는 늦은 시간이지. 자고 가라.”
진중한, 푸른 바다를 담은 듯한 눈동자. 에메랄드와 코발트의 염료가 함께 섞여 어우러진 것 같은 예쁜 눈은 이탈리아의 바다를 떠오르게 했다.
“…원래 이런 식이야?”
“이런 식이라니.”
“이렇게 꼬시냐고.”
“하! 웃기지도 않는군.”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친 벨져가 턱을 살짝 올려 루이스를 내려다봤다. 원래도 내려다보긴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깔보는 시선이라니. 그 잘난 얼굴에 얄미운 미소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명치에 주먹을 꽂아야 할까 생각하며 주먹을 쥐는데 귓가에 금속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옆 방을 빌려놨다.”
“모든 귀족이 다 너같은 건 아니지?”
“흥. 그럴 리가. 모든 영국 남자들이 신사던가? 종종 불청객이 찾아와서 그 방비용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고마워.”
“…가 봐.”
루이스는 실없이 웃으며 열쇠를 받아들었다. 태연한 척 미소를 머금고 열쇠를 고쳐 쥐자 사납게 치켜 올라갔던 벨져의 눈매가 슬쩍 풀어졌다. 짜증나긴 하지만 한편으론 참 알기 쉬워서 좋다. 루이스는 돌아서자마자 가식으로 띄운 미소를 거뒀다.
이런 식으로 친절을 베푸는 건 어디까지나 주인과 하인의 관계고, 그건 아직도 그가 저를 깔보고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자신이 베푸는 아량에 감사할 줄 아는 시녀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루이스는 찝찝한 감정을 뒤로 하고 벨져의 방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기대 비슷한 걸 한 게 무색하기도 하고,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도 못하는 걸 혼자 의식하고 있다는 게 쪽팔리고 분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도로 열쇠를 던지고 싶지만,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 침대와 최신 설비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손을 대고 열을 가라앉힌 루이스는 옆방으로 향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0) | 2016.08.04 |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0) | 2016.08.02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0) | 2016.08.01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0) | 2016.08.01 |
[티엔루이] 위험한 사람 (0) | 2016.07.10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다음주에 온다던 사람입니다 너무 늦었지요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
불꽃이 일고 금속음이 터지며 곳곳에서 공격이 날아드는 교전 상태, 가장 앞에 선 벨져는 박쥐로 변해 후방으로 달아나는 여제를 쫓았다. 그녀를 상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를 악문 순간, 벨져의 옆으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얼음 레일이 벨져의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제길…!”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급하게 몸을 돌려 검을 던져다. 섬광보다 빠르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이라면 막을 수 있다…!
“전부, 얼어버려!”
한 끝, 한 끝 차이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녀를 막지 못한 대가는 차가운 얼음 감옥이었다. 후드 안으로 휘날리는 청회색 머리카락. 얼음 속에 갇힌 채 후방에서 교전중이던 이들이 얼음 산탄총에 쓰러졌다. 벨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짐이라고는 하나 회사의 능력자라는 사람 넷이 단번에 리스폰 기어로 올라가버리는 기분이란. 꼼짝할 수 없게 가뒀던 얼음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벨져는 모든 기술을 써버린 루이스에게 달려들어 올려 베었다. 네 번, 베고 잡아 착지하며 안개지역의 상자 안으로 밀어넣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크흣…!”
“그 잘난 영웅의 이름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군.”
“네가 상관할 바가…, 큭!”
“아직 내 질문에 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하, 먼저 내빼놓고 이제 와서?”
벨져는 유치한 도발로 기회를 엿보는 루이스를 잡아 빠르게 발도해 베었다. 그녀만큼 단번에 큰 피해는 입힐 수 없지만 일대일인 이상 이런 식으로 갉아먹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우위를 점하고 이어가는 건 제 쪽이다.
아무리 환영의 도시라한들 고통마저 없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루이스의 얼굴이 고통에 물들었다. 그 와중에도 눈을 감지 않는 건 칭찬할만 하지만 그녀는 과거 첫 대결에서도 그랬다. 그러니 딱히 칭찬해줄 필요도, 전처럼 한 수 물러줄 것도 없다.
“흥, 아직 남은 질문이 있지 않나?”
“후우. 하,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둔 거야? 의외로 쪼잔하네! 홀든!”
깔끔하게 베어넘기며 잠시 손을 놓은 틈으로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날카로운 얼음의 위력은 몸소 체험해 본 자만이 안다.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라는 걸, 벨져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검의 괘적을 바꾸는 것보다 루이스의 검이 더 빠르다. 벨져는 검으로 쳐내는 대신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이 거리면 언제든 검을 던져 공격할 수 있다. 루이스의 사정거리를 가늠한 벨져는 다시 그녀에게 검을 던져 돌아가려 했다.
“나가라!”
여제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뒤에서 날아든 박쥐 떼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앞은 루이스, 뒤는 여제. 벨져는 작게 혀를 찼다. 어느 쪽이든 피할 수 없다. 루이스가 미소짓는 게, 옅은 안개 너머로 보였다. 그리고 작게 움직이는 입술.
“제길…!”
박쥐 떼가 등을 덮치고, 몸이 떠오른 순간 루이스가 벨져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른팔을 왼팔로 받치고, 귓가에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속삭이더니 곧장 쨍한 냉기와 함께 얼음이 폭발했다. 쟁쟁한 소리와 투박한 통증이 이어지고, 곧이어 벨져는 리스폰 기어 위로 올라갔다.
자아도 없이 끌려가는 기분이란 언제 당해도 기분 나쁘다. 먼저 올라와있던 넷이 제 눈치를 살피는 게 더 짜증나 벨져는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팔짱을 꼈다. 십 분 내내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밀어 붙이고 있었는데, 방금 그 한 방으로 열세를 극복하고 승기를 가져간 주역이 본진까지 들어와 무자비하게 수호자를 쓰러트리는 걸 손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영 심기가 불편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녀의 능력만큼이나 싸늘하게 얼어붙은 표정이야말로 벨져가 방금 전까지 상대하고 있던 사람의 본모습이었다. 전날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여느 아가씨마냥 머리를 틀어올린 게 이레귤러일 뿐이었다. 제 눈 앞에서 까딱이던 희고 가는 발목과, 매끈한 종아리. 그리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향락의 기억.
당황한 나머지 먼저 살롱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할 거라곤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루이스가 너무 태연한 탓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쪽은 말을 꺼낸 벨져였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저들끼리만 화기애애하느라 공성을 망친 팀원들이 먼저 리스폰 기어를 나간 탓에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의 그 술집에서 봐.”
홀로 남은 벨져는 마지막으로 루이스가 속삭인 말을 곱씹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겨우 그 말만 가지고 어떻게 찾아가겠냐고 하겠지만 벨져에겐 짚이는 곳이 있었다.
아니, 거기밖에 없다. 루이스는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고,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디시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볼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제 망나니 동생이 그가 가진 가장 귀한 재산에 흉터를 내고 가문의 위상을 더럽힌 곳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능력자에게 당한 제가 낫다. 비록 3급 능력자라 하지만 적어도 루이스는 그녀가 가진 다른 이름 앞에 한 치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방금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루이스는, 분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는 상대였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벨져라 한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벨져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웅' 루이스를 옹호해야 하는 쪽에 가까웠다. 겨우 그렇고 그런 능력자따위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만큼 굴욕적인 건 없을 테니까.
그 때의 일은 제 오만과 방심이 빚어낸 실수에 불과했지만 '루이스'는 달랐다. 그녀는 벨져 홀든을 꺾은 능력자답게 성장해나갔고, 이제는 더 나아가 연합의 한 축을 맡고 있다. 이 쯤 되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어차피 일생에 한 번쯤 겪을 일이라면, 오히려 그녀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벨져는 화를 내며 올라온 르블랑의 꼬마 숙녀와 명왕의 양녀를 내버려두고 부서져가는 HQ를 바라봤다. 니케가 루이스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누구에도 지는 법이 없는 자신이건만 루이스 앞에만 서면 흐름이 이상하게 흘렀다. 마지막으로 기어를 타고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벨져는 내려가지 않았다. 여제가 비행을 시작한 이상 끝난 게임이었고, 내려가봤자 기세등등한 적을 마주해 분풀이를 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열두시. 디시카. 당초 얼굴을 비추는 것에 의의가 있었던 만큼, 벨져는 이번 공성을 진들 이긴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예정에도 없던 루이스가 나오는 바람에 아주 약간 진심이 되었던 것뿐이다. 오히려 소득이라면 소득이 있었지.
여느 때처럼 서로 격려와 위로를 주고 받는 회사 사람들을 두고 벨져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잔소리꾼이라도 만나면 귀찮아질 게 뻔했다.
* * *
포트레너드의 쪽, 디시카는 워낙에도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지만 회사와 연합의 갈등이 깊어지고 안타리우스가 성횡하는 근래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술냄생와 퀴퀴한 악취가 진동하는 술집으로 발을 들인 벨져는 손을 들어 코를 손등으로 가렸다. 그런다고 악취가 가시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손등에 남아있는 향수 냄새가 이 냄새에 적응하기까진 도움이 될 터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술집에는 불량배며 정신이 빠진 녀석들이 즐비했고, 벨져는 저를 이런 곳으로 불러낸 사람을 찾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능력자라 한들 여자 혼자서 들어올 곳이 못 된다. 척 봐도 질이 나쁜 녀석들이 여자를 끼고 수작을 부리거나, 공기가 탁해질 정도로 담배를 피워대며 싸구려 술을 퍼마시는 지저분한 술집은 고귀함과 품위를 호흡하며 자란 벨져에겐 아무리 좋게 봐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잘도 이런 싸구려 술집에 발을 들일 생각을 했구나, 이글. 막내를 떠올리며 혀를 차던 벨져는 안쪽 구석에 후드를 쓰고 앉아있는 루이스를 발견했다. 눈여겨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구석 자리엔 싸구려 위스키 한 병과 유리잔 두 개, 맥주병이 늘어서있었다. 혼자 마실 양은 절대 아니다. 벨져는 갈색 맥주병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훑던 루이스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눌러쓰고 고개를 수그린 그녀를 내려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꼭 이런 곳이어야 했나?”
“보다시피 제정신 안 박힌 놈들 뿐이거든. 이 시간엔 더더욱. 걱정마, 여기 주인이랑 아는 사이니까.”
“흥. 말은 잘하는군.”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평소에 입는 후드재킷보다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도 여성 특유의 골격까지 감출 순 없다. 조악한 불빛 아래 잘 보이지 않는 얼굴과, 곳곳에 생채기가 난 가는다란 손가락. 벨져는 잔을 들어 루이스에게 내밀었다. 마시지도 않을 맥주병만 만지작거리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야?”
“이런 술이야 그냥 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얼음이 나올 리도 없고.”
“그냥 달라고 해.”
루이스는 손을 쥐었다 펴며 빈 잔에 얼음을 채웠다. 기묘한 장면이지만 능력자들의 도시에서 이 정도는 놀라운 축에 끼지도 못했다. 라벨도 상표도 없는 위스키를 따 잔에 따른 벨져는 얼음과 술이 섞이도록 잔을 가볍게 흔들고 입술을 축였다. 그대로 내려놓으려 했는데, 무언가의 기대를 담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단숨에 들이켰다.
“후후. 만만히 볼 게 아니지?”
“…너….”
“그게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야. 싫으면 다시 문 열고 나가.”
색을 보고 당연히 위스키겠거니 생각한 술은 식도와 위를 태우는 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셌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인상을 썼던 벨져는 여유롭게 웃는 루이스를 쏘아봤다. 루이스는 만지작거리던 병을 따 손에 들고는 의장에 등을 기댔다. 가시지 않은 쓴 맛과 타오는 속 때문에 입가가 씰룩거렸으나 루이스는 제가 먹인 골탕이 만족스러웠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래.”
“잘도 나를 기만하는군.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고.”
“기대할게.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해?”
“그것도 질문에 포함인가?”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게 인지상정. 말문이 막혔는지 루이스가 테이블에 팔을 올리며 벨져 쪽으로 몸을 숙였다. 후드 안에 감춰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피처럼 붉은 눈이 벨져를 향했다.
“기억 안 나는 모양인데. 혼자 남겨지는 거, 기분 정말 별로였거든.”
“윽……. 그때는….”
“알아. 경황이 없었겠지. 바쁘셨거나. 그런 걸로 연연하고 매달리는 레이디가 아니니까 걱정 마.”
아무렇지 않게 아픈 구석을 찌르고 빠지는 바람에 기세등등하게 루이스를 몰아붙이던 벨져의 기세가 꺾였다. 아침에 일어나 목도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충격적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벨져가 입을 다문 사이 루이스가 도로 몸을 뒤로 빼고 팔짱을 꼈다.
“그땐 나도 완전히 취했었고…. 그냥 서로 실수한 걸로 치고 넘어가자고. 참고로 전에는 술로 때우려다가 그 방에 있는 술을 동내고 밑천이 없어서 옷 벗기로 했던 거야.”
“누가 먼저….”
“알고 싶어?”
“아니, 됐다!”
누가 침착한 결정사 아니랄까봐, 잘도 부끄러운 얘기를 술술 늘어놓는 루이스때문에 벨져만 뺨이 달아올랐다. 어느 쪽이든 상상하고 싶지 않다. 전말을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했고, 없던 일로 하는 건 이쪽도 원하는 바였다.
벨져가 죽고 싶을 정도로 쪽팔려하는 게 재미있어,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발로 벨져의 눈매가 사나워졌지만 그가 루이스를 볼 때 고운 얼굴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고, 확률로 치면 다시 한 번 거대 일식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희박했다.
“뭐, 지난 질문에 다시 답하는 건 포함시키지 말자구.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하냐고 물어본 거야. 이걸로 세 번째네.”
“으윽….”
분명 엇비슷하게 마셨던 것 같은데 먼저 정신을 놓고 기억을 못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벨져는 도로 팔짱을 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분명해서, 루이스는 조금이나마 다이무스의 고충을 이해했다. 이글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픈데 벨져까지 돌보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루이스가 그런 생각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사이 벨져는 이미 몇 번이고 되짚었던 기억을 돌이켰다. 영화의 필름이 끊긴 것처럼 유독 생각이 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레코드가 긁힌 것처럼 띄엄띄엄 이어지는 기억 속에는 지금의 이 무감각한 얼굴이 아닌, 잔뜩 흐트러져 할딱이는 여자가 있었다. 충동에 휩싸여 저지른 하룻밤의 실수. 단편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타들어가는 속만큼이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그래도 쓰린 속에 또다시 누가 불을 지른 것만 같다.
눈을 감았다 뜬 벨져는 자신을 다잡았다. 취한 것도 아닌데 멀쩡한 제정신으로 루이스에게 말려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서로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만 해댔지. 네가 여제의 행방에 마지막 남은 와인을 들이키던 것까진 기억난다.”
“설마하니 그렇게 다 피해가고픈 질문만 할 줄은 몰랐거든.”
“동감이다.”
“규칙을 수정해야겠어. 물론 계속한다는 가정 하에.”
“무슨 생각이지?”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돼. 어쨌거나 조건은 전과 같아. 소속의 대표가 아닌 개인으로서 하는 거래고, 제공자의 신원 보호는 철저하게 지켜야 해.”
“차라리 종이와 펜이라도 가져오지 그러나.”
“이런 건 확실히 하는 편이 좋으니까. 기왕이면 서로 안전한 편이 좋잖아?”
“그래서 새 규칙은.”
“간단해. 답은 예, 아니오. 대신 대답하기 곤란하면…. 술보다는 조금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요구할 수 있는 선에서 뭐든지.”
“그렇게 하면 네가 내놓을 게 있나? 공평한 거래라고 들리지 않는데.”
“벌써부터 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왕이면 안전한 편이 좋지.”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사항을 늘어놓는 건 침착하고 차분한 그녀의 성격탓일 수도 있지만, 벨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영웅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다 한들 변함없이 겁쟁이일 뿐이다.
돈, 명예, 권력. 모두를 쥔 건 벨져지 루이스가 아니다. 벨져의 말은 다소 가혹할지 몰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루이스가 가진 거라곤 그녀의 몸과 명석한 두뇌, 능력과 정보 정도가 전부다. 자랑하는 능력도, 침착하고 냉정하다는 영리함도, 그리고 그녀가 아껴 마지않는 동료들도 전부 하나같이 내놓을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나를 줄게.”
“하! 전혀 매력적인 조건이 아니군. 이만 일어나도 되겠나?”
“그래? 전에는 꽤 좋아했던 것 같아서. 아쉽게 됐네.”
이 인간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벨져는 이를 악물었다. 고작 그 하룻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러는 게 불쾌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이래서 엮이고 싶지 않았건만. 벨져는 입가를 씰룩이며 루이스를 노려봤다. 루이스는 여전히 덤덤한 무표정으로 맥주병을 기울이며 벨져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방금 그 말, 상당히 불쾌하게 들리는군.”
“그러게 누가 기억하지 말래? 잊은 건 너야. 홀든. 정 궁금하면 질문이라도 해보던가.”
“흥. 차라리 술을 마셔라.”
“그게 별로라는 걸 경험해서. 아까도 말했지만, 혼자 남겨진 기분 진짜 별로거든.”
“윽…,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대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내 마음이다. 그리고!”
주먹을 부들거리던 벨져는 홧김에 루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건 전혀 벨져 홀든스럽지 않지만 이렇게나 열심히 도발하는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한 번쯤 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결코, 음란한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소녀같이 순수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바람에 더 오기가 생겼다.
“장소는 내가 정해.”
“아무렴.”
생긋. 루이스는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막 봉우리를 틔운 하얀 꽃처럼 웃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얄미워 벨져는 대충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술값을 던졌다.
“이런 악취나는 곳에 한 시도 더 있고 싶지 않군. 일어나.”
“응? 잠깐. 아깝잖, 으왓…!”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술이 아까운 것 뿐이었는지 루이스는 저항 한 번 없이 끌려왔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벨져는 술집을 나오자마자 루이스의 손목을 놓았다.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가늘다. 장갑을 끼고 만졌음에도 손에 남은 촉감이 왠지 간질거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여름인데도 밤공기가 찼다. 말 한 마디 없이 가스등이 드문드문 서있는 거리를 걷는데 루이스가 추운지 팔을 감싸고 목을 움츠렸다. 손으로 팔을 쓰는 궁상맞은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샜다.
“저기, 난 이쪽인데….”
“그래서?”
“응?”
“앞장서라. 시간이 늦었으니까.”
대로의 갈림길에서 멈춰선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말하는 의도야 뻔하지만 그렇다고 새벽에 혼자 돌려보내기엔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루이스가 얼음보다 더 차갑고, 능력자 다섯쯤은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능력자라 한들 이런 시기에 혼자 돌아다니는 게 안전할 리 없었다.
“지금 레이디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고개를 기울여 올려다보는 루이스에게 정색하고 말하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바로 섰다.
“다행이네. 보다시피 사람이 전혀 없거든.”
루이스는 싱긋 웃더니 거리에 얼음길을 깔고는 미끄러졌다. 자랑하는 기동력이 이럴 때도 쓰이는 모양이다. 벨져는 한달음에 멀어진 루이스의 뒷모습과 바스라진 얼음이 순식간에 기화되는 걸 보고 돌아섰다.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따라갈 의무까진 없다. 어차피 쉽게 당할 리가 없기도 하고,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건 그녀에게 추근덕거릴 멍청이들의 안위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인다. 벨져는 이미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가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자꾸 루이스가 마음에 걸리는 건 몸에 익힌 매너와 습관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손에 쥐었던 가느다란 손목이 생각나서, 벨져는 샤워를 하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루이스를 생각했다.
하루를 늦게 마치는 것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하루에 두 번 씩이나 루이스를 마주하기란 여간 피곤한 게 아니어서, 금세 잠이 몰려왔다. 눈을 감기 전, 연락할 수단과 만날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이것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한 이유를 깨달은 벨져는 베개를 잡아 당겨 편한 자세를 잡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나머지는 일어나서 생각하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는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그녀가 나왔다. 귀에 끈적하게 감겨드는 목소리가 달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0) | 2016.08.02 |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0) | 2016.08.01 |
[티엔루이] 위험한 사람 (0) | 2016.07.10 |
[릭루이] 햇살과 나그네 (0) | 2016.07.10 |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5 (0) | 2016.06.19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1
수위가 있다고 해야할지 없다고 해야할지 나는 도저히 모르겟다
그지만 신간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아마... 나오지 않을까....? :Q
큰일 났다. 사고를 쳐버렸다. 그것도 엄청 크게. 뻐근하고 나른한 몸을 일으킨 루이스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 남자와 자버리다니. 루이스는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한 순간 루이스의 뇌리를 스친 건 다름 아닌 제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야한 신음소리였다.
자기가 들어도 야한 비음과 함께, 앙앙거리며 눈앞의 남자에게 매달려 쾌감을 좇던 감각. 질척한 물소리와 함께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난잡하게 섞여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저를 집어 삼킬 것처럼 열망하고 욕정하는 얼굴. 그 푸른 눈동자.
루이스는 떠오르는 기억을 지워내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눈을 뜨면, 어젯밤 저를 탐하던 남자의 자는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어쩜 이리도 예쁜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남자, 그러니까 벨져 홀든은 눈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성별을 초월한 절대적인 미. 아름다움과 예술에 관해선 무지한이나 다름없는 루이스지만 그래도 벨져가 얼마나 예쁜지 정도는 알았다. 그는 정말이지 천사 같다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미모의 소유자였고, 인간을 굽어 살피는 천사마냥 그를 제외한 사람을 내려다보곤 했다. 굽어 살핀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그는 오만했다.
원하는 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권력과 재산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고귀함을 몸에 두르고, 타고나길 온갖 재능을 부여받은 채 태어난 고귀한 남자. 루이스는 가만히 벨져를 바라보다, 그의 속눈썹이 희고 길다는 걸 발견했다. 멋지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얼굴은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사고를 친 지금 무엇보다 빨리 그 뒷수습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루이스는 다시 제 상황을 깨닫고 벨져의 얼굴에 다가가고 있던 제 손을 몸 쪽으로 당겼다. 그의 뺨을 만지려던 게 들킨 것 같아 뺨에 열이 오르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시 한 번,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른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뒤로 뺐다. 붙어 있던 다리를 떼자 벨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깨지는 않았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날 때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몸 상태와, 어젯밤 이 침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축축한 시트에 루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허벅지와 음부에 아직도 물기가 있는데, 끈적한 덩어리가 질벽을 타고 쏟아지는 것 같은 그 감각에 몸이 굳었다. 보나마나 뻔하다. 루이스는 그걸 깨닫자마자 욱신거리며 당겨오는 아래에 조금 더 세게 입술을 물었다.
섹스가 처음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때보다 지금이 더 수치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런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벨져가 깨기 전에 이 난감한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말마따나 칼부림을 했으면 했지 낯간지러운 말을 속삭이며 사랑을 나눌 사이가 결코 아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을 질끈 감았던 루이스의 머릿속에 서서히 한 장면이 떠올랐다. 쉴 곳을 찾아 들어온 살롱의 발코니에 기대어있던 벨져. 그때만 해도 두 사람 다 지루한 파티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에 불과했다. 시작은,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먼 곳을 보던 벨져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고부터였다.
* * *
벨져는 불청객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높디높은 자존심과 긍지는 과거의 과오를 보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고, 그가 껄끄러운 건 루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에겐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다른 방은 이미 밀담을 나누는 사람들 혹은 밀회를 즐기는 연인들로 차버렸고, 다른 방을 찾은들 저를 찾아다니며 어떻게 한 번 해보려는 남자들이나 제게서 연합의 기밀을 빼내려는 스파이를 만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벨져가 낫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 들었다 내리며 다른 방이 없어서. 라는 시답잖은 이유를 들었다. 그에겐 그냥 둘러대는 것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쉴 곳을 찾는다는 점에선 사실이기도 했다. 당장 쫓아내거나 빈정거리며 제 신경을 긁을 거라 생각했던 벨져는 루이스를 경계하며 눈을 떼지 않을 뿐, 쫓아내지는 않았다.
비쌀 게 분명한 예쁜 의자에 앉은 루이스는 주먹을 쥐고 다리를 두드렸다. 높은 굽과 뾰족한 앞코의 하이힐은 보기엔 예쁘지만 운동화에 익숙한 루이스에겐 일종의 고문도구에 불과했다. 이런 걸 신고 어떻게 다니는 거지. 다시 한 번 트리비아의 아찔한 킬 힐과 고양이처럼 우아하고 도도한 걸음걸이를 떠올린 루이스는 멍하니 다리를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지만 한 번 벗었다간 다시 신지 못할 게 분명했다.
벨져는 제 앞에서 무방비하게 넋을 놓고 있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이젠 자길 위협적이라고 생각도 안 한다는 듯한 그 태도가 괘씸했다. 영웅이라는 자리에 올라 떠받들어주니 자신이 누구인지, 본래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도 잊고 저를 무시하는 거라면 오만하기 짝이 없다는 말은 제가 아닌 그녀에게 돌아가야 했다. 물론 워낙에 맹한 사람이니 지금 그러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익숙하지 않은 차림새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루이스는 벨져가 보기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리고 진주알과 크리스탈이 반짝이는 머리장식을 꽂고, 같은 세트가 분명한 귀걸이를 한 채 푸른 드레스를 입은 루이스는 이제 갓 사교계에 데뷔한 순진한 아가씨처럼 보였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벨져는 천천히 루이스를 향해 다가갔다.
전장에서는 한 걸음만 다가가려 해도 고개를 돌려 육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안개 속을 경계하는 그녀다. 이 여자는 지금 그 자신이 너무 힘들어 정신을 잠시 놓았거나, 자신을 위험대상에 넣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희고 둥그런 맨 어깨와 머리카락이 조금 삐져나온 가는 목덜미를 보며 루이스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올려다보는 루이스의 눈빛에, 벨져는 옅게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바른 루이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제가 있는 곳이 아니라 어디 질 나쁜 플레이보이라도 만났으면 비명 한 마디 못 질러보고 잡아먹히는 순진한 아가씨가 떠올랐지만 루이스는 그 남자를 패고 나왔으면 나왔지 결코 당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왜 그리 빤히 보냐는 눈빛에 벨져는 한 손에 쥘 수 있는 목과 곧게 뻗은 쇄골, 그리고 드레스 안쪽으로 얼핏 보이는 살갗의 흉터에 그녀를 훑던 시선을 거뒀다.
“연합이 사람을 잘못 보냈군.”
발끈할만한 말에도 루이스는 그녀의 코드명처럼 차갑고 덤덤하게 벨져를 바라봤다. 그 붉은 눈동자가 살기도,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제게 향해있는 게 꽤 신선해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인계를 쓰려거든 더 적합한 인물이 있었을 텐데.”
“흐응. 실패할 게 뻔한데 인력을 낭비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서.”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에 손을 올려 턱을 괬다. 괜한 신경전으로 체력과 정신을 소모할 여유가 없었다. 벨져 홀든은 오만한 사람이니 적당히 버릇없게 굴며 흥미가 없다는 걸 보여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물러갈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운 그이니 미인계가 통할 리 없다. 빈정대긴 했지만 루이스의 말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기분을 돋웠는지, 벨져는 기분이 상해 돌아서기는커녕 루이스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버렸다. 편히 쉬고 싶었던 루이스에겐 낭패였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픈 발과 다리를 위해 참을 만 했다.
“새로운 공간을 찾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과연 연합의 영웅이란 족쇄는 대단하군. 친히 이런 곳까지 왕림해주시고.”
“그건 벨져 경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식의 문을 파괴하려다 발렸다며?”
“때를 놓친 것뿐이다. 알다시피 워낙 여기저기서 일을 많이 터트리는 바람에.”
“천하의 벨져 홀든도 변명을 하는구나. 이거 놀라운 걸? 어디 신문사라도 찾아갈까봐.”
“살롱에서 나눈 대화는, 그 안에서 비밀에 부쳐지는 법이지.”
“그런 규칙을 따라야 할 정도로 귀족 아가씨가 아니라서.”
살벌한 대화 끝에 먼저 말을 멈춘 건 벨져였다. 정말로 흥미가 없다는 듯 구는 그녀의 표정과 눈빛에 벨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역시 쉽지 않은 상대다. 사실 이쯤 되면 그 날 그렇게 무릎을 꿇었다는 게 그리 부끄럽지도 않았다.
루이스는 그 날 이후로 제 빛을 드러내기 시작한 보석처럼 연마되어 더더욱 찬란히 빛나고 있었고,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스노우 퀸보다 영웅 루이스가 새로운 연합의 주축이라는 소리마저 돌까. 벨져는 다리를 꼬았다.
연한 하늘색 에나멜 구두와 흰 발, 그 위로 뻗은 루이스의 가는 발목이 꼭 잘 만든 도자기 같았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글쎄. 뭐인 것 같나.”
“보다시피 지금 너무 지쳐서 이대로 뻗을 수도 있거든? 제정신일 때 해.”
루이스는 양손을 들어 항복하듯 흔들었다. 아직 정신은 멀쩡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일 뿐이었다. 차라리 공성을 연달아 뛰고 말지, 이런 사교계 파티에서 내키지도 않는 웃음을 짓고 끝없이 이어지는 춤 신청을 거절하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피해 빠져나왔더니 이번엔 벨져 홀든. 정말이지,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게 딱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았다. 벨져는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길고 곧은 손으로 피아노를 치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에 속으로 감탄하며 그의 침묵을 기다리는 게, 꼭 나쁜 짓을 저지르기 전처럼 두근거렸다.
“…….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쥐고 있지.”
“예를 들면?”
“정보.”
날카로운 눈빛에 루이스는 잠시 풀어져있던 긴장을 잡았다. 그를 바라보는 제 눈빛이, 지금 보고 있는 벨져의 눈빛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란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루이스는 연합이 필요로 하는 안타리우스와, 이글과 나이오비가 끝끝내 함구한 '그 날'을 떠올렸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그 마수는 능력자와 비능력자, 소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을 원하며 시커먼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면, 적어도 제 사람들만이라도 지켜내려면 무엇보다 정보가 필요했다.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
“뭘 원해.”
“거래할 의사는 있는 것 같군.”
“그건 말을 꺼낸 쪽도 마찬가지 아니야? 미리 말하지만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개인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물론, 알고 있다.”
벨져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영웅이기 이전에 연합의 영웅이다. 연합의 한 기둥이니만큼 알고 있는 것도, 손에 쥘 수 있는 정보도 많지만 그녀가 마음대로 다루고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답이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벨져의 말에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다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워낙 선이 곱긴 하지만, 그 턱과 목덜미가 자아내는 아름다움이란 가히 사슴에 견줄 만 했다.
“그럼 거래는 성립이네.”
“그런 셈이지. 솔직했으면 좋겠군.”
솔직하고, 진실하게. 갑자기 목이 말라와 일어나자 벨져의 시선이 등 뒤로 따라와 붙었다. 아무리 솔직하고 진실 되다 한들 마음을, 머릿속을 꺼내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건 어디까지나 각자의 몫이었다.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까. 벨져가 그런 수작을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걸 해석하는 건 자신이었다.
제가 잘못하면,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죽음의 공포도, 배신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었다. 자신은 무력했고,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영웅의 행세를 잘 해내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에 비해 눈앞의 남자는 어찌나 당당한지. 어쩜 그렇게 강할 수 있는지. 루이스는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손이 떨렸지만 벨져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등 뒤로 다가온 벨져가, 손목을 잡아챘다. 제 심장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거리. 등 뒤에 선 남자에게 느껴지는 향수냄새.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지금은, 위험하다.
“…….”
“벨져.”
간신히 입을 뗀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에 냉큼 돌아서려 했지만, 그보다 벨져가 루이스의 몸을 돌려 제 품으로 당기는 게 더 빨랐다. 말도 하지 못하게 머리를 가슴에 꽉 누르고, 허릴 안은 채 조용히. 라고 속삭이는 벨져의 목소리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벨져.”
“아쉽지만 때를 잘못 잡은 것 같군. 다이무스 경.”
벨져는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의 방문에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는 이상 그가 아닌 누가 보더라도 밀회를 즐기는 남녀로 보일 터였고,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를 방해하는 건 살롱의 규칙에 어긋났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화가 나있었고,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제가 혼자 있지 않은 이상 더 방해할 순 없다. 벨져는 이렇게 제 큰형을 골탕 먹이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기 직전이라면 더더욱.
“이제 그만 나가주겠어? 내 아가씨가 부끄러워하는데. 설마 레이디의 이름에 흠을 내려는 건 아니겠지. 홀든 경?”
“…….”
좀처럼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다이무스지만 지금은 그 속이 훤히 다 보였다. 자신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데서 느끼는 불쾌함과, 내내 답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동생을 향한 답답함과 분노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벨져는 진심으로 즐거워졌다.
다이무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한 마디 하려는 표정으로 결국 등을 돌렸다. 그는 다이무스 홀든이었고, 여성의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기도 했다. 그러니 당연히 억울해도 나갈 수밖에. 벨져는 다이무스가 나가자마자 루이스를 놓고 문을 잠갔다. 애초에 그를 피해서 들어온 거였는데, 이 정도면 속도 잔뜩 긁었겠다 오히려 이득을 본 셈이었다.
“지금 나한테 하나 빚진 거 맞지?”
기분 좋게 돌아서는데 들려오는 간드러진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이 기분을 만끽했을 텐데. 벨져는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와인을 마시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였으나 루이스는 이미 그런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 앉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흐리멍덩한 눈을 반쯤 뜨고 있던 주제에, 지금은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생기가 넘치는 게 정말이지 밉상이 따로 없었다.
“……. 원하는 걸 말해.”
“좋아. 스무 고개 할 줄 알아?”
벨져는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은 여자를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맹하고 순진해서 무슨 말을 하면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은 외모와 달리, 루이스는 영리하고 교묘한데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유치한 놀이 말인가.”
“그래. 직접 모든 걸 주는 건 너무 쉽잖아? 장황한 얘기라면 더더욱 이야기를 섞기 쉬워지니까. 알다시피 질문에 대답은 예스와 노. 뭐, 대답하기 곤란해서 답을 피하고 싶다면 글쎄……. 침묵 한 번에 한잔씩?”
“나쁘지 않군.”
“굳이 예스 노가 아니더라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게.”
예쁘게 웃는 게, 누가 보면 연인에게 짓는 미소라 해도 믿을 법 했지만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라곤 그녀의 코드명만큼 차디 찬 거래일뿐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덫이 아닐까 의심부터 했겠지만 제가 아는 루이스는 누굴 속여가면서, 그것도 자신을 속여가면서 이런 제안을 할 사람이 아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할 걸 상정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벨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잔 두 개와 비치된 위스키 병을 양손에 들었다. 다리를 꼰 채 발을 까딱거리던 루이스의 발끝에 걸린 구두가 유리구두를 연상시켰다. 동화 속의 공주님과 달리 열두시 종이 울린다고 도망갈 사람이 아니지만, 그 여리고 가는 발과 발목만큼은 그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좀 편하게 있을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루이스는 아슬아슬하게 발에 걸려있던 구두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다른 한 쪽도 벗어버리고, 발을 문지르는 그녀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 벨져는 혀를 찼다.
“질문 몇 개면 바로 뻗겠군.”
“누가 나만 줄창 마신대?”
“그야 두고 볼 일이지.”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벨져를 응시했다. 새초롬하다고도, 무미건조하다고도 못할 무언가. 아무리 뛰어난 벨져라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어려웠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벨져의 중심 아주 가까이에 맴돌고 있었다. 비록 그게 의도한 게 아닐지라도, 그날 이후로 언제나 벨져 홀든의 아주 깊은 곳에는 ‘루이스’가 있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손을 털어 얼음을 만들어내는 걸 지켜보며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얼음으로 손을 닦고는 빈 잔에 얼음을 채운 루이스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시작하지.”
“좋아. 누가 먼저 마시게 되나 보자고.”
루이스의 도발에 벨져는 턱을 치켜들며 가벼운 코웃음으로 답했다. 질문은 스무 개 뿐이지만, 긴 밤이 될 터였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2 (0) | 2016.06.09 |
---|---|
[벨져루이]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B1 (0) | 2016.06.09 |
[벨져루이] (0) | 2016.03.01 |
[벨져루이토마] 한 걸음 더 가까이 (0) | 2016.03.01 |
[벨져루이] 눈 쌓인 교정, 분수대 앞. (0) | 2016.02.27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2.
2014/12/23
* 아마 이것도 미공개분 포함.
연합의 오후, 나이오비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엘리를 돌보며 휴게실을 지키던 토마스는 그만 난로 앞에서 깜박 졸고 말았다. 그 사이 그림을 그리며 놀던 엘리가 토마스의 얼굴에 낙서를 해놓고 까르륵 웃으며 우다다 뛰어가고, 토마스는 엘리를 잡으러 복도로 뛰어나갔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냅다 뛰어가는 엘리 앞에 문이 열리며 문과 아이의 머리가 부딪치기 일보직전, 토마스가 황급히 소리쳤다.
“엘리!”
“히히, 엘리 몰라!”
“앗, 선배?”
“안녕, 토마스.”
“고생이 많군요, 스티븐슨군.”
열리던 문이 멈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는 다시 까르륵 웃으며 빙글 돌았다. 겨우 따라잡은 토마스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엘리를 안아 올리자 다시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나오며 인사를 건넸다. 순간 움찔한 토마스는 루이스 옆에서 미소를 머금은 요기 라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점에서 일하는 옷차림의 루이스에겐 어설프게 웃었다.
“루이스 언니 예쁜 옷! 엘리 마니마니 보구시펐어!”
“고마워, 엘리.”
엘리가 토마스의 품에서 루이스에게 양팔을 뻗었다. 엘리를 안아든 루이스는 제게 뺨을 부벼오는 애교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사람도 절로 미소가 번지는 훈훈한 광경에 요기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엘리가 루이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리기 시작하자 요기는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잠시 눈짓을 교환하고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버렸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토마스는 셋이 되고 나서도 편하게 입을 열지 못했다. 루이스가 병실에 있는 동안 한참 바빴기에 얼마 찾아가지도 못했던지라 오랜만에 보는 선배가 반가운 건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그보다 무거운 감정들이 앞섰다.
“선배, 좀 어떠세요?”
“그럭저럭 괜찮아.”
“아, 있지이. 엘리가 빨리 나으라구 맨날맨날 기도했어!”
루이스는 대답 대신 엘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칭찬을 받은 엘리는 제가 생각해도 뿌듯했는지 루이스의 품에 안겨 부비거리며 웃었다. 엘리의 천진난만한 말에 혼자 가슴을 졸이던 토마스는 루이스의 씁쓸한 미소에 입을 다물었다. 제 동경의 대상이자, 언젠가 뛰어넘겠다고 생각한 목표가 무너졌다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버티고 있는 루이스를 보는 게 더 마음 아팠다.
“선배…….”
“오늘 이 말만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괜찮아.”
토마스는 루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다. 그렇게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지만 지금 한 말은 믿기 힘들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거짓으로 태연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언제나 믿음직하게 보였던 팔과 등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서, 언제나 동경의 눈길로 바라본 후드 차림이 아니라서. 나란히 걷는 걸음이, 전과 같지 않아서. 토마스는 느릿하게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고작 한 사람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 너무했다.
“루이스!”
“핫, 언니!”
“안녕, 잉게.”
복도 끝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토마스와 루이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성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온 나이오비는 루이스의 품에서 엘리를 빼앗아 내려놓고는 토마스를 다그쳤다.
“넌 생각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그만, 잉게. 토마스가 안 된다는 걸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거야.”
“너도 그래! 얘가 아직도 갓난앤 줄 알아? 퇴원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
나이오비의 불같은 성격은 토마스에게서 바로 루이스에게 넘어갔다.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배려하지 못한 제 불찰에 토마스가 얼굴을 붉히고 엘리가 울상을 지었다. 나이오비가 이러는 것도 다 자기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루이스는 얌전히 그녀의 잔소리를 들었다. 나이오비를 말린 건 함께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레베카와 도일이었다.
그마저도 잠시 들른 것뿐이지만, 복도에서 이러지 말자며 휴게실로 돌아온 그들은 이내 소란스럽게 루이스의 주변을 둘러싸고 안부를 물었다.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질문에 다 대답할 수 없어 곤란해 하던 루이스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동료들이 반갑기도 하고 드디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라 말을 잇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루이스 앞에 떳떳하지 못한 토마스는 휴게실을 오가던 사람들이 루이스를 알아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위로와 안타까움이 섞인 인사를 건네는 걸 멀찍이 떨어져 지켜봤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앤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선배는 전설이 되고, 저는 영웅이 될 거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때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깨질 것 같지 않던 얼음성같은 그녀에게서, 연합에게서 영웅을 빼앗아간 그가 미웠다. 능력이 사라진다니, 그런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제 막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기회를 허무하게 망쳐버린 자신이 미웠다. 토마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 날, 제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과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도 전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는 후회, 그리고 무엇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미안함에 눈물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루이스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며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게 될 거라는 걸 아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미숙함과 함께 그에 대한 원망이 끓어올랐다.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루이스가 그를 대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겠지만 루이스는 아니었다.
점점 숨통을 조여 오는 죄책감에 토마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제게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영웅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기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토마스는 제가 책임을 지고 연합에 도움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가봐야 할 시간이라.”
“피터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또 올게.”
나이오비의 아쉬움 섞인 말에 토마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이스는 코트도 없이 일어났고, 밖에는 버린 물이 얼 정도로 추웠다. 토마스는 다른 사람이 나서기 전에 앞으로 나섰다.
“가, 같이 가요. 선배!”
“응?”
“그…, 저도 그쪽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원래대로라면 아직 더 늑장부려도 될 시간이지만 성치 않은 발목으로 빙판이 진 길을 가려면 전보다 서둘러야 했다. 매년 겨울, 눈이 내리고 빙판이 지면 마음 놓고 결정 슬라이드를 타도 되니 편하겠다고 하던 우스갯소리도 이제는 전부 과거의 추억일 뿐이었다.
루이스는 에스코트를 자청하는 토마스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워낙에도 세심한 성격이긴 하지만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시종일관 주눅이 들어있는 그가 가여운 동시에 미안했다. 아무리 잊으라 해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것도, 그 짐은 그리 쉬이 벗어던질 수 없다는 것도 루이스 역시 잘 알았다.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토마스에게 다가갔다.
“그럼 오랜만에 둘이 나갈까? 잘 부탁해, 후배님.”
루이스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토마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생긋 웃었다. 토마스는 팔짱이 어색한지 쭈뼛거리다 루이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고, 루이스는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토마스가 안절부절 못하고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걸 슬쩍 바라보곤 넘어지는 척 그의 팔을 꼭 잡았다.
“미안.”
“아, 괜찮아요!”
토마스는 냉큼 루이스가 팔짱을 낄 수 있게 팔을 내주었다. 팔짱을 끼며 자연스레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조금씩 차이가 나던 걸음이 같아졌다. 어색하던 기류 대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별 거 아닌 농담에 마침내 토마스가 웃었다. 루이스는 토마스를 따라 미소지으며 미끄러지지 않게 발에 힘을 주며 걸었다.
별 거 아니지만, 루이스는 이렇게라도 토마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완전히 잊거나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을지라도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건 자신 하나로 족했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던 건 자신이었다. 애써 밝은 척, 제 앞에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토마스를 보고 있으니 자신의 오만이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이스는 토마스가 카페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으며 속으로 쓴 속내를 삼켰다.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어.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말은 루이스가 마지막까지 능력자로서 가졌던 마음이자 다짐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이 모두를 구할 순 없다고 말해도 루이스는 그 첫 마음만은 지키고 싶었다.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를 잃는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비극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게 싫었다.
그러니 능력을 대가로 두 사람을 살렸으면 그리 밑지는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 루이스는 제게 소리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불쑥불쑥 튀어오르는 그 날, 병실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길게 숨을 토하곤 제 팔을 지지해주는 토마스의 온기에 조금 더 몸을 기대어 걸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하나하키 2. (0) | 2015.04.11 |
---|---|
[다이루이] 하나하키 1. (0) | 2015.04.11 |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1. (0) | 2015.04.11 |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0. (0) | 2015.04.11 |
[다이루이] 감사합니다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1.
2014/12/15
* 미공개분 추가
그 후로 벨져는 루이스의 병실에 찾아가지 않았다. 병실 앞 복도에서 마주친 이글에게 루이스를 괴롭히지 말라는 소리까지 듣고 나니 제가 얼마나 얼간이같은 행동을 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후였다. 이글이 가끔 흘리듯 내놓는 소식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미 그걸로 끝난 일이라면 더이상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고, 거부한 것은 그 멍청한 여자다.
그걸 다 아는데도 신경이 쓰이는 건, 분명 답지않게 처연한 표정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해버린 그 공허한 눈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벨져의 양심을 자꾸만 괴롭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날 그 병실, 희고 슬프게 빛나던 그녀가 지워지질 않았다. 처음으로 볼썽사납게 무릎을 꿇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하긴 했지만 분노와 굴욕에 잠 못이루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안 좋았다. 왜 제 오만의 대가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짊어져야하는가. 왜 그 빚을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가.
결국 멤돌던 상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땀에 흠뻑 젖은 벨져는 숨을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루이스의 목소리가, 표정이, 그 날의 아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떠올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친 벨져는 분에 못이겨 젖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곤 검을 검집에 넣었다. 셔츠를 벗어던지고 샤워실로 향한 벨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다짜고짜 찬 물을 틀었다.
머릿속까지 스며드는 것같은 냉기에 벨져는 몸을 떨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자기가 받지 않겠다고 해도 주면 그만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 * *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정중했다. 이런 식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얼마 없기에 루이스는 보던 신문을 내려놓고 등을 세워 고쳐앉았다. 병실에 하릴없이 가만 앉아있는 것도 고역인지라, 손님의 방문이 반가웠다.
“들어오세요.”
“실례하지. 잘 지냈나.”
“어제랑 똑같아요.”
은행 업무를 보다 퇴근한 듯한 다이무스는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권했고, 다이무스 역시 사양않고 자리에 앉았다. 루이스가 깨어난 지도 벌써 이주. 그동안 다이무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루이스를 찾아왔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돌려보내기도 했지만 매일같이 찾아오는 사람을 매번 내치기도 미안하거니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퍽 지루해 그의 방문을 허락한 게 열흘째였다.
“흠. 식사는 했나?”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네요.”
“제대로 안 먹었단 소리로 들리는군.”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루이스는 저를 타박하듯 보는 다이무스의 눈빛에 대답 대신 슬쩍 웃어보였다. 어제도 했던 대화를 똑같이 되풀이하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원밥은 정말 맛이 없으니까요.”
“그 얘긴 어제도 들었던 것 같군.”
제가 했던 소릴 그대로 돌려주는 무뚝뚝한 말투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동생이 둘인 맏형답게 사람을 챙기는 데 세심했지만 또 그만큼 단호했다. 루이스는 그의 두 동생들만큼 그에게 익숙하지 못했고, 투정을 부릴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식욕도 없고, 환자식은 정말 맛이 없었지만 결국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고 항복 선언을 했다.
“저녁은 꼭 다 먹을게요.”
“나머지 식사도 거르지 말도록.”
루이스는 빙그레 웃으며 이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작은 형때문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해주는 대로 내버려둬. 안 그럼 더 귀찮아질걸? 혹시 몰라, 사과도 토끼 모양으로 깎아줄지.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속 편한 농담이라고 여겼는데 요 며칠 다이무스 홀든을 겪어본 바로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다이무스 홀든이 제 명의로 메이드와 하인이 하나씩 딸린 집 한 채를 해주겠다며 서류를 들고 왔을 때도 그렇지만, 루이스는 그의 이런 행동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몸이 먼저 움직인 것 뿐이다.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저를 찾아왔던 그를 떠올리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양말고 말해라.”
“아뇨. 괜찮아요. 거기까지 신경쓰지 말아요.”
다이무스는 틈만 생기면 뭔가를 해주려했지만 루이스는 그 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 능력과 맞바꿀만한 게 있을 리 없다. 더구나 루이스는 그에게 받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주는 모든 것은 갚아야 할 빚이 된다. 안 그래도 안타리우스가 다시 일어나고, 회사와 연합 안에서도 분쟁이 생기는 마당에 괜한 의혹을 사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걸 모를 다이무스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다는 건 분명 그 역시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그쪽은 좀 어떤가요.”
“...글쎄.”
두루뭉술한 질문과 답. 다이무스는 답하기를 회피했고, 루이스는 더 묻지 않았다.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였기에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큼.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쉬어라.”
“조심히 가세요.”
불편해진 자리를 먼저 피한 건 다이무스였다. 루이스는 움직일 수 없으니 그가 떠나는 게 당연했다. 온 지 채 십 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역시 며칠간 이어진 일상이었다. 루이스는 그를 붙잡지 않았고, 다이무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연합의 검과 회사의 검. 그걸로 충분하다. 루이스는 거기에 괜한 채무관계가 더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열리던 것처럼 조용하고 묵직하게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풀썩 누워버렸다. 등의 상처는 아직 욱신거렸지만 가만히 천장을 보며 숨을 마시고 내쉬는 동안 차츰 가라앉았다. 손을 들어 얼음 결정을 만들려했지만 평생을 함께한 능력은 묵묵부답이었다. 루이스는 멀끔한 제 손을 슥 보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 * *
귓가에 메아리치는 목소리,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루이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그랬냐며 따져묻는 그의 얼굴엔 특유의 시니컬함도 여유도 없었다. 속내를 감출 생각도 않고 또 다시 깨진 자존심에 분노하는 벨져 홀든. 이성을 잃은 채 던진, 순수해서 더 알 수 없는 의문에 루이스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이거 산에서 길길이 날뛰던 때도, 영웅이라 불리는 동안에도 그 승리를 얻은 건 전부 자신과 엔지의 조언 덕이라고 생각했지 그에겐 별 감정이 없었다. 자신과 동료를 죽이려던 이에게 정당방위로, 어렵사리 살아나갈 길을 만든 것 뿐.
그런데 왜, 토마스가 아닌 벨져를 감쌌을까. 병실에 누워있는 내내 그 생각을 했지만 끝은 언제나 한숨을 내쉬는 걸로 끝났다. 그저 평소처럼 상황을 살피고,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그러니 루이스는 다른 대답을 돌려줄 수 없었다. 그 순간의 판단때문에 너무 큰 것을 잃고 말았지만.
루이스는 처음 깨어나던 순간을 기억했다. 눈을 떴을 땐 온몸이 아팠고, 그 통증에 제 가슴을 관통하던 날카로운 칼날과 자욱하게 깔리던 연기가 떠올랐다. 그 다음은 다시 칠흙같은 암전. 진통제와 수면제에 의존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깨어나고 잠들길 반복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루이스를 반겼다. 붉어진 눈시울의 앤지가 내뱉던 떨리는 목소리. 몰라볼 정도로 강해진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고, 휴톤이 참담한 표정으로 낮게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루이스는 그 사망선고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리고, 시트를 그러쥐며 결정을 맺으려 했다. 얼어붙어야할 시트는 루이스의 손 안에서 구겨질 뿐, 손에선 한기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루이스는 병실 안에 걸린 온도계를 발견하고 다시 웃었다. 급격히 밀려드는 오한에 양팔을 교차해 제 몸을 끌어안고 숨을 삼켰다.
이제와서. 왜 지금에서야. 순간적으로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뒤이어 떠오르는 동료들의 얼굴,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고 했던 맹세. 루이스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충격이 너무 크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더니 정말 아무생각이 나질 않았다. 제게 향하던 기대와 시선에 뭐라 대답해야 할까. 능력을 잃는다는 것은 곧 능력자로서의 삶이, 영웅이라는 이름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명 영웅이라는 이름에 따르는 책임과 기대에 짓눌려 괴로웠고, 그들을 저버릴 수 없어 힘들어하며 짐이 줄기를 바랐지만 이런 식의 끝은 아니었다. 제가 거리의 고아로 자라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름의 사명감과 벅찬 뿌듯함을 가졌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었고, 루이스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던 능력을 잃었다. 그 상실감은 다른 어떤 걸로도 채워질 수 없었지만 루이스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쓰게 웃으며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병실을 찾아오는 이들을 맞았다. 한창 행동을 조심해야할 앤지는 세 번이나 직접 찾아왔고, 보통 사람처럼 온기를 머금은 손을 꼭 잡으며 연합엔 언제나 네 자리가 있으니 걱정말라며 비서직을 제안했다.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루이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하는 것 밖에 없었다. 잔뜩 붉어진 눈과 코를 하고 들어온 토마스는 애써 눈물을 참다가, 결국 채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전부 자기 때문이라며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같이 온 잉게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레베카는 루이스를 복돋아주려고 더 밝은 척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때가 다 되어 찾아온 트리비아와 이글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지친 트리비아가 한숨을 내뱉으며 잘 얘기하라고 휙 나가버리고, 답지않게 쭈뼛거리던 이글은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리고는 루이스의 침대 가에 앉았다.
“좀 어때.”
“별로.”
“그..., 작은형은 왔다 갔어?”
장난기가 섞이지 않은 이글의 진지한 목소리가 낯설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뒤통수를 벅벅 긁적이던 이글은 온몸으로 자신이 덩달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루이스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꾹꾹 눌러삼키고 고개를 가로저은 뒤 말했다.
“별로 탓한다거나 원망하지 않아. 따지자면 내 잘못이지.”
“아이씨, 지금 누가 잘잘못 따지재?!”
“그럼 뭘 해야 하는데?”
루이스의 날카로운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이글은 눈을 크게 뜨고는 혀를 차며 시선을 피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루이스가 아니었으면 벨져 홀든은 목숨을 잃거나,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할 지라도 능력을 잃었을 것이다. 벨져를 대신한 시점에서 홀든은 루이스에게 빚은 진 셈이었다. 이글은 한숨을 내쉬며 입가를 매만졌다. 적잖이 불편해하는 모습이 루이스에게도 불편했다.
“내가 뭘 바라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알지. 연합의 영웅님은 이치를 따지는 덴 젬병이니까.”
이글이 연합에 투신한 이후로 죽 서로를 봐 온 두 사람이었다. 이글은 루이스가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었고, 루이스는 이글의 한량같은 모습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았다. 처음엔 호기심, 그 다음은 호의. 그리고 거기서 이어진 동료의 유대. 이글은 함께 지내온 세월을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루이스를 잃는다는 것은 곧 등 뒤를 지켜줄 믿음직한 동료를 잃는다는 말이었다.
이글은 루이스를 꽤 마음에 들어했고, 언제나 미련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소망이 이뤄지길 바랐다. 언젠가 바스라지고 꺾여버릴 지라도 그 등을, 영웅의 상징과도 같아져버린 후드를 보고 있으면 마음 속에 도사리는 불안과 초조한 긴장은 눈 녹듯 사라지곤 했다. 그 순간의 뿌듯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 지 몰라도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이글은 자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루이스에게 무언가를 해주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생각했다. 그 중에 으뜸이어야 하는 사람은 물론, 이 자리에 없는 제 작은 형이었다.
“소식은 전해줄게. 안 그런 척 엄청 불안해하고 있거든.”
이글은 슬쩍 미소를 머금곤 주먹을 내밀었다. 공성을 만족스럽게 치르고 나면 으레 그러하듯이.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링거 바늘이 꽂힌 손을 쥐어 이글의 주먹에 맞부딪쳤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이글은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고, 그가 찾아왔다.
“하아....”
루이스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짓이라도 한 것 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쁜 짓이라기보단 애를 울린 쪽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신경이 쓰였다. 차마 동료들 앞에서 내보일 수 없던 억울함과 불안,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절망을 그에게 쏟아부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상처입는 게 빤히 보이는 벨져 홀든이라니, 전 같았으면 쓸 데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을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등을 돌려 문을 나가기 전, 벨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해 말 하지 않았지만, 그 때 그는 자기가 더 억울하고 아프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보였다. 꾹꾹 울음을 집어삼키는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 한 번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만나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그녀 자신 조차 의뭉스럽지만, 그래도 만나야 제 안에 또아리 튼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았다.
이제 곧 퇴원이니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도 신중히 생각해야 했다. 다이무스는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그건 받을 수 없었고, 공성은 못하더라도 연합의 일을 하거나, 서점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이글은 연합의 마스코트는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건 이미 예전부터 하고 있는 일에 불과했다. 이런 시기엔 일자리를 구할 수만 있어도 행운이었다.
루이스는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밀린 집세와 새로 들어왔을 책을 떠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서류는 잉게나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주었겠지만 이런 사적인 부분까지 그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울적해진 루이스는 천천히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스며드는 익숙한 한기에 루이스는 차가운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찬 바람이 루이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흔들었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얼음 결정은 맺히지 않았다. 눈을 감으며 제 속에 가둔 공기를 내보낸 루이스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한 번 잃은 것을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하나하키 1. (0) | 2015.04.11 |
---|---|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2. (0) | 2015.04.11 |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0. (0) | 2015.04.11 |
[다이루이] 감사합니다 (0) | 2015.04.11 |
[벨져루이] 리퀘 3주제 (0) | 2015.04.11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0.
2014/12/09
*마지막이 될 뻔 했던 미발 원고.
벨져는 걸음을 서둘렀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벨져는 정보를 부정했다. 제 앞을 가로막던 작은 몸과 시야를 붉게 물들이던 선혈과 그 뜨끈하고 비릿한 감각이 되살아나 입술을 깨물었다.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무너지던 다리와 힘없이 가늘게 흩어지던 머리카락이 지금도 느릿하게 흘렀다.
그 전부를 또렷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몸을 던져 지킨 사람이 벨져 홀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지원이 도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급로를 지키던 건 벨져와 연합의 다른 결정사 마에스트로였다.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까 싶은 토마스 스티븐슨은 실전이 처음인지 연신 불안해하더니 결국 뒤를 노리던 강화인간의 등장에 당황해 도움이 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라고 해도 이미 공포에 하얗게 질린 얼굴에 벨져는 검을 빼들었다. 사실 벨져에겐 다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건 네 명 째를 처리 했을 때였다. 급습을 각오한 것 치고 너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게 께름칙했다. 본디 기습은 두 번 통하지 않는 법. 벨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마에스트로에게 다가가려 발을 뗀 순간 쓰러진 강화인간들이 폭발하며 검붉은 안개가 퍼졌다.
재빨리 스카프를 풀어 코와 입을 막았지만 이미 몸의 반응이 둔해진 후였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서는 강화인간들은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뜯어고친 건지, 몸에서 태엽과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절그럭거리는 게 노인의 나무인형을 떠오르게 했다.
트루퍼가 해체되며 내뿜는 안개가 능력자를 강화시켜준다면, 이것들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한 번 더 복구되는 게 영 성가셨다. 핵을 완전히 부수지 않으면 동력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 회복을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라 검 두 자루를 바투 쥐었다. 토마스가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에 제 가정이 맞음을 확신한 벨져는 확연히 둔해진 몸을 움직였다. 신체강화능력을 잃어도 홀든은 홀든. 겨우 기계 따위에 질 리가 없었다.
문제는 소형화된 기계들이 다 제각기 다른 패턴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몸은 점점 무거워지는 감각에 입술을 악물며 두 번째 기계의 팔다리를 베어냈을 때, 멀리서 절그럭거리던 기계가 포탄을 쐈다. 원상태였다면 장치를 베어내고 그것마저 피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포탄에 맞은 벨져는 그대로 주르륵 쓰러졌고,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나머지 내상에 울컥 피를 토했다.
루사나 수도원에서 봤던 강화인간마냥 날카로운 칼날을 손에 장착한 채 다가오는 기계가 하나, 또 다시 포탄을 쏠 준비를 하는 기계가 또 하나. 벨져가 이를 악물며 검을 쥐었으나 팔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벨져의 움직임을 더뎌지고 말았다.
이렇게 끝나는가 싶은 동시에 전에도 겪었던 참혹한 패배가 떠올랐다. 빠른 도약과 함께 흩날리던 머리카락, 결연한 빛을 띤 붉은 눈동자.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기억이 하필이면 뼈저린 오점이라니. 허무하고 어이없어 코웃음쳤을 때였다.
‘샤드!’
순간, 그 때가 떠오른 건 비단 벨져의 회상때문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쨍그랑,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포를 쏘려던 기계가 와르르 부서졌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은 여전히 벨져에게 향해있었기에 무릎을 세우고 검을 들었으나 순간 어찔하게 찾아온 현기증에 눈을 찡그렸을 때,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벨져의 얼굴에 튀었다.
비틀거리던 루이스가 피를 토하고, 다시 한 번 쨍한 파열음이 귀를 두드렸다. 그녀의 몸을 관통한 칼날이 기계팔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수상쩍은 안개를 내뿜기 시작했다. 부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가고, 루이스의 등에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던 다리가 무릎부터 털썩 무너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찰나의 시간이, 벨져에겐 늘어진 필름마냥 느릿하게 흘렀다. 단 일 초도 놓치지 않고 새겨진 기억은 벨져 홀든의 오만의 대가였다. 이미 한 번 그녀를 통해 그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왜 하필이면.
급한 대로 재킷을 벗어 상처부위를 눌러 지혈을 해보았지만 이미 전방에서 구르다 온 루이스는 정신을 잃은 후였다. 지원부대가 도착해 그녀를 데려가기 전까지 벨져는 저를 감싼 멍청함을 책망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죄책감과 후회. 그 모든 감정은 벨져 홀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빚을 졌다. 이번엔 그냥 오만함의 대가를 치렀다는 말로 넘어갈 수 없었다. 벨져가 그녀에게 치러야 할 것은 제 목숨값이었다. 그걸 알기에 얌전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 큰형을 만났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소식을 기다렸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소식을 들고 온 동생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벨져는 말을 꺼내길 주저하는 동생을 채근했다. 참담한 얼굴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글의 멱살을 잡았다. 죽었다는 말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다. 그리 여겼건만, 벨져는 마침내 입은 연 동생의 말에 순간 아득해졌다.
숨을 밭으며 실소를 흘리자 대번에 인상을 쓰며 저를 노려보는 이글의 표정에 손을 놓았다. 그럴 순 없었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라는 말에 벨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다이무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무시하면 그뿐이었다.
도착한 병실 앞. 문 옆에 쓰인 그녀의 이름에 벨져는 숨을 골랐다. 문고리를 돌려 열면 그만인데도 쉬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려오긴 했지만 마주하는 데는 각오가 필요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은 벨져는 문을 열었다.
들이닥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창에서 빛이 쏟아져 눈을 찡그렸다 뜨자 창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흔드는 머릿결이, 그녀의 뒤에 퍼지는 빛이 눈이 부셨다. 바람에 실려 온 약냄새에 벨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오만했음을 시인했다.
능력을 잃었음에도, 루이스는 그 삭막한 병실 안에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너…!”
그림같은 풍경에 잠시 멈춰 섰던 벨져는 태연하게 자신을 맞이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그게 무슨 태도냐고 따지려다 다시 입을 다문 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루이스의 태도 때문이었다. 제가 들은 게 사실이라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벨져는 순간 제 막내동생이 또 질 나쁜 농담을 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벨져가 진 빚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벨져는 말을 골랐다. 도대체 이 사람을 어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죄책감을 닮은 온갖 착잡하고 꿉꿉한 감정들이 섞여 소용돌이치고,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이 이어졌다.
단조롭고 삭막한 병실 안, 루이스만 홀로 색을 띠었다. 푸른빛이 도는 잿빛 머리카락도, 흰 피부도, 그리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 루이스의 그 차가운 눈빛과 무표정에 벨져는 마른침을 삼켰다. 침묵 속에 감정을 내보인 게 저뿐이란 생각에 분했지만 어쨌거나 벨져는 이제 루이스를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이냐.”
“알고 온 거 아니야? 부인하고 싶은 거라면 대답해줄게. 사실이야.”
딱 잘라 선을 긋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벨져는 루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루이스를 바라보기만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던 그 벨져 홀든의 얼굴은 잔뜩 경직되고, 오만하게 타인을 내려보던 눈동자 역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결정사 루이스는 이제 없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웃었다. 그 씁슬하고 아픈 미소에 벨져는 누군가 제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졌고,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돌아가.”
단호한 축객령에도 벨져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루이스가 언뜻 내비친 그 뼈저린 상실감은 저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벨져는 그녀가 잃은 것을 되찾아줄 수도 없다.
“왜 그랬지.”
그래서 벨져는 물었다. 이대로 고분고분 루이스가 하는 말에 따라주고 싶지도 않거니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벨져는 루이스가 하는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벨져에게서 고개를 돌렸던 루이스는 크게 숨을 내뱉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그녀를 마주한 적이 있던가. 이렇게 가까이서 단 둘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벨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루이스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가 저를 구한 이유를 구했으나 끝끝내 답을 얻지 못한 벨져였다.
“글쎄.”
“얼버무리지 마라.”
“…너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누군가를 지키는 건, 습관같은 거야. 그 날부터 쭉.”
그 날. 벨져는 루이스가 말하는 그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는 말도, 지킨다는 것도 다 연합의 동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벨져는 루이스가 지키는 울타리 안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벨져에게 루이스는 유일무이한 패배를 안긴 사람이었고 벨져는 한 때 그녀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이었다.
서로의 목을 노리는 사이라면 또 모를까, 루이스와 벨져 사이엔 유대감이라 부를 것도 무엇도 없었다. 덕분에 벨져는 갚을 수도 없는 빚을 지는 동시에 설욕의 기회를 잃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증오와 분노가 섞인 말을 내뱉으며 원망하는 편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루이스를 대하는 건 그녀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무슨 속셈이지. 우리가 그런 사이였나?”
“네게 받은 이름, 돌려줬다고 생각해.”
그래서 벨져는 일부러 날을 세웠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지는 건 이번에도 자신이 될 것 같아 비아냥거렸지만 루이스는 전보다 더 두터운 얼음벽을 두른 채 벨져를 밀어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무엇도 바라지 않을 뿐더러 되려 오래전 진 빚을 청산한 거라 말하는 루이스 앞에 벨져는 무력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하자고. 그걸로 끝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뭐라 한단 말인가.
“하, 건방떨지 마라. 이렇게 내숭떤다고 네게 남는 게 뭐가 있지? 내가 괴로워하길 바라나?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하는 홀든? 원하는 게 있어서 꾸민 일인 거 아닌가? 얼마든지 주지. 그러니까 말 해!”
“윽…!”
성큼 다가간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올리고 소리쳤다. 환자고, 여성이란 것도 잊고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지만 벨져에겐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루이스의 차가운 눈동자에 잔뜩 일그러진 벨져의 얼굴이 비쳤다.
“없어.”
벨져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환자복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우악스런 멱살잡이에 끌려왔던 루이스는 목 언저리를 만지며 콜록거렸고, 벨져는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움찔 입가를 씰룩였다. 흐트러진 환자복 안으로 흘긋 보이는 붕대와 손목에 꽂힌 바늘, 피가 역류하는 튜브. 워낙에도 희긴 했지만 백지장처럼 핏기가 가신 얼굴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벨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콜록, 흐…….”
제가 한 짓이라 다가가지도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선 벨져는 제 분에 못이겨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력한 상대를 앞에 두고 길길이 날뛰었던 건 그 때도 마찬가지지만 지금과 그 때는 상황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왜, 잘 된 거 아냐?”
침착함을 유지하던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루이스. 벨져는 당장이라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젠 ice도, 영웅도 죽었으니까!”
악을 쓰듯 내뱉는 말은 그녀의 결정검만큼이나 날카롭고 시렸다. 벨져를 구한 대가로 루이스가 치른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신경을 다친 채로 무리하게 움직이느라, 다시는 뛸 수 없다고도 했다. 사이퍼에게 능력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벨져는 아주 잘 알았다.
힘을 바라며 모여드는 비능력자들, 그 욕망을 이용한 조직. 전쟁 이후로 꾸준히 그들을 쫓았던 벨져였다. 그리고 루이스는 전쟁 이후로 책임과 기대를 떠맡으며 영웅이 된 사람이었다. 영웅 루이스가 벨져 홀든을 구하고 능력을 잃었다. 사실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신문 1면에 실릴 헤드라인으로 이것보다 더 적합한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벨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이게 질 나쁜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 깨고 말 하룻밤의 꿈이라면 그걸로 끝일 텐데. 하지만 입을 앙 다문 채 저를 올려다보는 루이스의 눈은 이게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일깨웠다.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친 그녀 앞에서 벨져는 입이 두 개 라도 할 말이 없었다.
“비웃으려면 지금 해. 어차피 앞으로 계속 들을 테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벨져는 대답하는 대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뒤돌아섰다. 도망치듯 병실을 나와 어떻게 쉬었는지 모를 숨을 토해냈다. 최악. 이보다 더 나쁠 순 없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2. (0) | 2015.04.11 |
---|---|
[벨져ts루이] Put on your shoes. 01. (0) | 2015.04.11 |
[다이루이] 감사합니다 (0) | 2015.04.11 |
[벨져루이] 리퀘 3주제 (0) | 2015.04.11 |
[벨져루이] 기묘한 동거 + (0) | 2015.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