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4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일 때문에 몇 번 와보긴 했지만 휘황찬란한 럭셔리 호텔의 구조며 장식들은 여전히 새 것처럼 번쩍거리고, 여전히 낯설었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던 남녀 한쌍은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루이스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괜히 움츠러들어 후드를 더 깊이 눌러 썼다.
이런 장소는 역시 조금 부담스럽다. 화려한 걸로 치면 카모라나 아이리쉬 갱단의 보스들 사무실이 더하지만 공간이 풍기는 분위기는 비견할 수 없었다. 꼭 너같은 게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급스러운 금장이 박힌 문패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우아한 필체를 떠올리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똑, 똑. 루이스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문을 두드렸다. 있는 줄 몰라서가 아니다. 보통은 초인종을 누르니까 그런 평범한 일로 방문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벨져는 루이스의 뒤를 내다보고는 루이스가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껴 섰다. 최소한으로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벨져는 문을 걸어 잠궜다. 누가 벨져 홀든 아니랄까봐, 럭셔리 호텔의 객실은 참으로 그다운 화려하고 우아한 가구로 가득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화장대 위에 뜯지 않은 편지들이며 종이들이 흩어져있었다.
[귀엽더라.]
[눈이 대체 얼마나 낮은 거냐.]
[너 말야.]
대충 방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뚱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꽤 귀여운 수를 썼던데? 꼭 자기같은 꽃도 보내고.]
[하, 별일이군. 답지 않게 꽃말도 아나?]
[정확히는 얽힌 일화를 아는 거지만.]
코웃음친 벨져가 루이스를 지나쳐 작은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의 기다림을 알려주듯 테이블 위엔 와인잔 두 개와 와인 한 병이 놓여있었고, 벨져는 코르크 마개를 따 잔에 따랐다.
[앉지 그래.]
[고마워. 안 그래도 다리가 아팠거든.]
그리 오래 서있던 것도 아니지만 루이스는 일부러 벨져의 신경을 긁을 법한 말을 하며 벨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와인을 따르고 있지만, 순간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만으로도 도발은 충분했다.
[질문할 건 좀 생각해봤어?]
[먼저 할 기회를 주지.]
[그 내려다보는 태도는 여전하구나. 그러다 또 다칠라.]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지. 더 할 말 없나?]
루이스는 벨져가 내민 잔을 손에 들었다. 건배따위는 필요 없겠지 싶어 대답하는 대신 그를 바라보며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려 잔을 기울이자 질 좋은 와인의 달고 상큼한 향이 훅 끼쳤다. 펍의 맥주나 위스키가 입에 맞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걸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에겐 뭐든 싸구려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루이스는 싸하게 포도의 향을 남기고 넘어가는 와인을 삼켰다. 은은히 감도는 향이, 꼭 혀를 희롱하는 것 같다.
넌 내게 줄 게 없다. 네가 가진 것들 중에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없고.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던 벨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남자에겐 이 정도가 당연한 걸 테니까. 아무리 애써도 그의 눈에 찰만한 걸 마련하는 건 무리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전에 내건 조건을 떠올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먼저 물을게. 제키엘 헌팅턴의 테라듀는 우리 쪽 테라듀 능력자의 것과 동일한 금속이야?]
[그렇다.]
루이스는 레베카가 만나러 간다고 했던 '친구'와 가면의 아이작을 떠올렸다. 그리고 레나를 쫓던 스토커. 그 세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면 그의 인간적인 면을 파고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레베카는 그 역할을 하기엔 너무 올곧고, 그렇게 잔인하게 친구를 속일만한 사람이 못 됐다. 배신을 경험하는 건 자신만으로 족하다. 루이스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성급했다. 일단은 이 남자를 상대하는 게 먼저였다.
[네 차례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길래 시간을 준 것 뿐이다.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벨져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우아하게 와인잔을 돌렸다. 붉은 와인이 잔 안에서 물결치며 얇은 선을 남겼다.
[해석하는 건 각자의 자유에 맡기기로 했던 것 같은데.]
[흐응. 딱히 궁금한 건 아니다. 관심도 없고.]
[좋아. 그래서 네 질문은 뭔데?]
[이공간을 통해 얻은 힘은 공간을 파괴하면 사라지나?]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다. 관측할 수 없는, 보고된 적 없는 주제에는 답을 할 수 없다.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새 공간이 발견되긴 해도, 사라진 경우는 아직 우리 쪽에서도 전례가 없어. 그러니까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어. 나만 손해만 본 것 같네.]
모른다는 말을 돌려 말해도 벨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여유롭고, 내려다보는 시선은 변함이 없다. 와인잔을 입에 가져간 벨져의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순간 루이스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이 질문의 답은 솔직하게 대답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벨져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한 번의 기회를 버린 셈이었다.
[답지 않게 의심이 많네, 벨져.]
[확실할수록 좋다고 한 건 너였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그 정도는 내줘도 상관 없다는 태연자약한 태도에 루이스는 생긋 웃었다. 오만한 말투며 사람을 깔보는 태도하며, 혼자 여유를 만끽하는 저 잘난 얼굴이 짜증났다. 얄밉다는 말로는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재수 없다. 어쩌다 이 남자와 다시 얽히게 됐을까.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날 그 문을 열었던 걸 후회했다. 아예 마주치질 말았어야 하는데.
[뭐, 그럼 다시 질문하지. 공간을 없애는 걸 시도한 적 있나?]
루이스는 바로 답하는 대신 잔의 밑동을 만지작거리다 가볍게 잡고 들어올렸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고, 눈으론 그를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이 아까울 정도의 고급 와인이지만 쉬지 않고 한 숨에 쭉 잔을 비웠다. 입술을 떼고 흐르는 방울을 혀로 핥자 벨져가 피식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순순히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내가 친절했다는 생각은 않고? 전에 누가 먼저 뻗었는지 기억 안 나나 보네.]
[흥. 그딴 배려 필요 없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벨져 홀든이다.]
[벨져 홀든이시겠지.]
살짝 툭, 건드리기만 했을 뿐인데 벨져가 발끈해 눈에 힘을 줬다. 안 들어도 뻔한 말에 목소리를 겹친 루이스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뺨을 받쳤다. 지킬 게 없다는 건 그만큼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강하고, 더 자유롭고, 그만큼 외롭고. 루이스는 어깨에 준 힘을 뺐다.
벨져는 못마땅하단 표정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아무리 그의 기분이 언짢은들 루이스는 그의 눈치를 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시큰둥할 뿐이었다. 루이스는 벨져 대신 객실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며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갚아주는 게 도리다.
[네 의무는 아직 다하지 못한 거지?]
[...그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해낼 거다. 난, 벨져 홀든이니까.]
테이블 대신 둥근 와인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건드리던 루이스는 한결 진중해진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벨져의 표정에 여유로 가득한 오만한 미소가 걷혔다. 하나마나인 질문을 하는 걸, 같은 방식으로 돌려준 것뿐이고 그라고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한 번 하기로 했으면 적어도 상대를 대등하게 대하는 게 그가 수호하는 기사도가 아닌가. 그러니 이 질문은 아무것도 담지 않고 있음에도 충분히 가치있었다.
[좋아. 질문해.]
벨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새삼 벨져의 속눈썹이 길고 예쁘다는 걸 깨닫고 와인잔의 테두리를 검지의 지문으로 매만졌다. 원을 그리는 손가락에 와인 방울이 맺혀 잔 위를 미끄러졌다.
[회사로 넘긴 연구 일지, 누락된 건 의도된 거였나?]
[계속 말하기 곤란한 질문 뿐이네. 맞아.]
[그럴 거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토니는 알고 있어.]
고르고 골라, 정제해낸 신중한 질문에 루이스는 성의껏 답했다. 모르는 거라면 몰라도 알고 있는 걸 감추진 않는다는 게 이 게임의 규칙이었고, 벨져에게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선 신뢰를 쌓는 게 우선이었다.
비록 그의 시험에 한 차례 통과했다고 해도 교묘하게 답하는 거나, 회피하면 결국 둘 다 시간만 버리고 헛수고만 쌓일 뿐이었다. 전 게임이 그런 식으로 끝난 것도 결국은 신뢰의 문제였으니까. 특유의 오만함이 전부 걷히지는 않겠지만,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면 충분했다. 사실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하는 게 반칙이지만 흥미가 생겼는지 벨져의 눈빛이 이유를 요구했다.
[감이야.]
[뭐?]
예상한대로 벨져가 미간에 힘을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야 물론 그냥 피하려 하는 거라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루이스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근거가 없기에 설명할 수 없을 뿐이었다.
[못 믿겠으면 말고.]
[연합에선 원래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나?]
[기사단에선 원래 이런 식으로 정해놓은 규칙도 존중 안 해?]
[너...!]
[분명히 해두지만, 조직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으로 하는 거래야. 싫으면 당장 그만두던가.]
루이스는 잔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고 나기를 귀족, 그것도 홀든의 벨져. 이 남자와 동등한 자격으로 거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스는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고 생각도 없었고,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이 게임을 이어가야 할 정도로 아쉬운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연합은 가장 능력자들이 많은 조직이고, 그만큼 들어오는 정보도 많았다. 물론 그걸 솎아내는 것도 일이지만 연합은 회사, 혹은 국가 하나와 정보전을 해도 밀리지 않는다. 하물며 오스트리아에 국한된 기사단이 얼마나 유익한 정보를 가지고 있겠는가. 루이스는 벨져에게 이렇게까지 의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쉬운 건 벨져고, 그걸 알기에 제안한 것 뿐이다. 두 가지에 답했고, 한 가지 답을 얻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등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벨져의 목소리가 루이스를 불러 세웠다.
[잠깐.]
[영양가 없는 소리나 하면서 계속 날 무시하고 깔볼 거라면 더 있고 싶지 않은데.]
[...다시 앉아주겠나?]
딴에 많이 참은 듯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 나름대로 양보한 거라는 걸 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자의 입장에서 봐주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아량을 베풀 듯 굽혀주는 게 아니라, 동등한 위치를 원했다.
[다시 앉으면? 어차피 계속 그런 식으로 굴 거잖아? 자기만 양보하고, 참는 것 같고 그래?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하지 마.]
[...약속하지.]
[뭘?]
[노력하겠다.]
겨우 한다는 말이 노력하겠다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벨져는 자신이 한 약속을 나몰라라 할 위인은 못 됐다.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그 높다란 자존심에 꽤 상처일 테고,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에 루이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도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가 질문할 차례였다.
[프리츠를 돕는 건, 한 사람을 위한 거야?]
[아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나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이득을 볼 수는 있겠지.]
[흐응. 그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투군.]
벨져가 그 예쁜 얼굴에 불쾌하다는 걸 드러냈지만 루이스는 덤덤했다. 한 차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놓고 자기는 이런 식으로 구냐는 불만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지금은 연합의 능력자도, 기사단의 단장님도 아니니까 뭐.... 내가 감이라고 답한 거랑 비슷한 거지.]
[시키지도 않은 설명을 한 건 너다.]
[그러니까 잘 걸러서 들어야지. 그건 해석하는 사람 몫이야.]
[자의적 해석으로 답을 회피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질문에 포함이야?]
질문에는 질문으로. 싸늘한 신경전 속에 날카로운 말이 오갔다. 계속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바람에 고작 세 번 질문이 오갔음에도 피곤이 몰려왔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고급 와인이라 방심하고 한 번에 들이킨 게 이제야 올라오는지 머리가 아팠다. 임시방편으로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이를 악물다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 같으니.]
[동감이야. 그보다 슬슬 피곤한데.]
[쯧.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마시랬나.]
벨져가 일어나 객실 한 쪽에 있던 크리스탈 물병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고압적인 말투나 시종일관 사람을 얕잡아보는 것만 아니면 소설 속에나 나오는 기사님 같았을 텐데. 물론 전형적인 기사님은 따로 있지만 이런 면에선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두 사람의 정의가 다를 뿐이라던 말을 떠올린 루이스는 고맙다고 인사한 뒤 물을 마셨다. 와인보다 더 미지근한 물에선 비린 맛이 나지 않았다. 얼음을 녹이지 못한 날이면 그냥 수도에서 따라 마시는 물과는 천지차이다.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루이스는 잔을 반쯤 비우고 내려놓았다.
[네 차례야.]
[계속 할 수 있겠나?]
[이정도 쯤이야. 사실 오늘 야근해야 했는데 덕분에 탈출했거든.]
루이스는 엷은 미소를 띠며 머리를 마사지하던 손을 내렸다. 앤지도 토니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챈 벨져는 영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춰서 해가 됐으면 됐지 득이 될 게 없다는 건 벨져 역시 잘 알았다.
[헌터가 프리츠에도 관여했나?]
[헌터라....]
모호하고 위험한 질문에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졌다. 헌터가 어느 개인을 특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직업군을 뜻하는 것인지도 애매할뿐더러 프리츠에 관계했냐니. 홀든과 프리츠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건 전세계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제게 묻는 의도는 무엇인가. 정말 몰라서?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더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벨져가 잔을 들었다.
[망설인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넘어가도록 하지.]
[조금 의외라서. 그런 거 안 궁금할 것 같았거든.]
[그런 거라.]
[그렇잖아. 아니면 이것도 너를 위한 거야?]
[그것도 질문에 포함인가?]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나른하게 고개를 저었다. 뺨이며 몸이 뜨뜻한 게 피곤한 나머지 술기운이 금방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안 해도 될 말이 나오는 건 다 그 때문이었다.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꽤 많이 돌아다녔거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미지근한 물에 얼음을 만들어 넣었다. 잔에 얼음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연합이야 그렇다 쳐도 그동안 서점에서 안 잘린 건 기적이지.”
“흥. 둘 다 같은 이유겠지.”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다른 건 몰라도 ‘영웅’의 이름은 꽤 매력적인 선전 도구니까.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돌려 말해주는 게 친절인지, 아니면 그냥 한 말인지 몰라도 그 핵심만큼은 정확했다. 그래. 둘 다 같은 이유다. 그걸 제외하면 남는 거라곤 얄팍한 연민과 정뿐이다. 그렇게 배신당해놓고 또 사람을 믿는 자신도 참 우습지만.
“다른 소릴 해대는 걸 보아하니 취했나보군.”
잠시 생각에 빠져 동료들의 얼굴을 그리는 사이, 벨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이 떨리고 그림자가 지는 모습이 예뻐 눈을 뗄 수 없었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엷게 웃었다.
벨져 홀든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남자다. 외모도 그렇지만,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포식하는 맹수와도 같이 강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강하기 때문에 여유롭고, 강하기 때문에 약자를 굽어 살피는 아량도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그 자신만을 사는 그에게 제 모습은 퍽 답답하게 비춰질 터였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한심하다는 듯 볼지도 모른다. 벨져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고, 이유를 말한다 한들 이해할 수 없다.
루이스는 벨져의 오해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안 하느니만 못 한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 겨우 와인 한 잔에 취할 리가 없고, 설령 취했다한들 정신은 말짱했다. 피곤에 절은 몸이 받쳐주지 않는 것 뿐. 그렇다 해도 벨져는 더 이어갈 의지가 없어보였기에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 와인 잘 마셨어.”
“간다고? 이 시간에?”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물론 날이 바뀌어 오긴 했지만 못 갈 것도 없는 시간이다. 루이스는 그게 뭐 어때서?란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우아하고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론 머리를 받치고 있던 벨져가 인상을 쓰며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전장을 나뒹군다 한들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협은 어쩔 수 없다. 성큼성큼, 힘으론 절대 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루이스는 긴장하며 뒷걸음질 쳤으나 벨져는 홀든의 쾌검사였다.
등이 벽에 닿고, 벨져가 다가와 팔을 뻗었다. 얼굴 옆, 벽을 짚어 자신을 가둔 그의 손과 팔이 거북했다. 그래봤자 한 팔 뿐이니 완전히 가둔 것도 아니고 못 빠져나갈 것도 없지만 이런 식은 불편하다. 문득 떠오르는 지난밤의 기억에 루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세게 뛰었다.
“저, 저기…. 벨져…?”
“아무리 너라도 새벽 두 시는 늦은 시간이지. 자고 가라.”
진중한, 푸른 바다를 담은 듯한 눈동자. 에메랄드와 코발트의 염료가 함께 섞여 어우러진 것 같은 예쁜 눈은 이탈리아의 바다를 떠오르게 했다.
“…원래 이런 식이야?”
“이런 식이라니.”
“이렇게 꼬시냐고.”
“하! 웃기지도 않는군.”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친 벨져가 턱을 살짝 올려 루이스를 내려다봤다. 원래도 내려다보긴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깔보는 시선이라니. 그 잘난 얼굴에 얄미운 미소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명치에 주먹을 꽂아야 할까 생각하며 주먹을 쥐는데 귓가에 금속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옆 방을 빌려놨다.”
“모든 귀족이 다 너같은 건 아니지?”
“흥. 그럴 리가. 모든 영국 남자들이 신사던가? 종종 불청객이 찾아와서 그 방비용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고마워.”
“…가 봐.”
루이스는 실없이 웃으며 열쇠를 받아들었다. 태연한 척 미소를 머금고 열쇠를 고쳐 쥐자 사납게 치켜 올라갔던 벨져의 눈매가 슬쩍 풀어졌다. 짜증나긴 하지만 한편으론 참 알기 쉬워서 좋다. 루이스는 돌아서자마자 가식으로 띄운 미소를 거뒀다.
이런 식으로 친절을 베푸는 건 어디까지나 주인과 하인의 관계고, 그건 아직도 그가 저를 깔보고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자신이 베푸는 아량에 감사할 줄 아는 시녀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루이스는 찝찝한 감정을 뒤로 하고 벨져의 방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기대 비슷한 걸 한 게 무색하기도 하고,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도 못하는 걸 혼자 의식하고 있다는 게 쪽팔리고 분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도로 열쇠를 던지고 싶지만,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 침대와 최신 설비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손을 대고 열을 가라앉힌 루이스는 옆방으로 향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0) | 2016.08.04 |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0) | 2016.08.02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3 (0) | 2016.08.01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2 (0) | 2016.08.01 |
[티엔루이] 위험한 사람 (0) | 2016.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