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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 조만간 책으로 나옵니다 웹 연재분은 언제나 그러듯이 검수 없는 쌩초고
여느 때와별 다를 거 없는 오후, 휴게실 소파에서 빈둥거리려던 이글은 먼저 소파를 차지한 사람을 보곤 혀를 찼다. 대체 어디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지만 지은 죄가 있다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담요를 찾았다.
“뭐 찾아?”
“담요 어디있어?”
턱으로 루이스가 자고 있는 소파를 가리키자 양팔 가득 서류를 들고 나르던 레베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통 소파에 걸쳐져있기 마련인 담요가 보이질 않는다. 레베카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항복을 선언했다. 따라 들어온 트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애들이 가지고 노는 거 아니야?”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뭐가 안 따라주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레베카가 웬일로 남을 챙기냐며 씩 웃으며 팔꿈치로 이글을 툭 쳤다. 말이 툭이지 퍽에 가까운 소리와 통증에 이글은 맞은 팔을 감싸쥐었다.
“짜식, 엄살은.”
“엄살 아니거든!”
“어유, 그래? 그럼 남자답게 시원하게 벗어서 덮어주던가.”
대낮부터 한 잔 한 것처럼 킬킬거리는 레베카를 쳐다보던 이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편한 분위기는 좋지만, 천덕꾸러기 취급은 가문에서 받는 걸로 충분하다. 입을 비죽이자 레베카가 내가 살 테니 이따 한 잔 하자며 윙크했다. 이거 한 대 맞고 공짜술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이글은 냉큼 그녀에게 윙크를 돌려줬다.
“무르기 없기!”
“뭘 물러?”
“레베카가 이따 쏜대!”
“오오, 그거 좋지!”
“너희는 포함 아니거든!?”
따라 들어온 휴톤과 도일이 사람 좋게 웃으며 레베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어째 둘 다 묘하게 텐션이 높다. 이글은 근육질의 남자 둘에게서 풍기는 냄새에 질색하며 물러섰다.
“뭐야, 대낮부터 퍼마신 거야?”
“퍼마시긴! 마, 더워서 한 잔 했다.”
“그럼그럼. 이런 날씨엔 시원한 맥주가 딱이지!”
“한 잔도 한 잔 나름이지.”
이글은 트리비아의 핀잔에 맞춰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음 때문인지 루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누웠다. 하기야 이 소란에 잠이 잘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 사무실에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이 찾아들고, 회의실에서 자기엔 부담된다며 루이스는 굳이 휴게실의 소파를 고집했다. 그마저도 시끄러운 사람들이 다니니 제대로 못 자는 게 당연하다. 이글은 혀를 차며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씨들, 담요 못 봤어?”
“소용 없데이. 윽수로 예민하다 아이가.”
“엑.”
이렇게 떠들면서 할 얘기는 아니지 않나 싶어 두 사람을 보자 휴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부터 그랬어. 저렇게 잠깐 눈을 붙이긴 하는데, 몸에 뭐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
휴톤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길거리의 고아 소녀가 몸을 지키기 위해선 자는 시간마저 온전히 쉴 수 없다. 아마 그 생활이 몸에 배인 모양이라고 말하는 내내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얘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잘즈부르크 축제에 다녀온 벨져의 말이 떠올랐다. 축제 기간에 맞춰 집에 돌아온 벨져는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냐는 이글의 질문에 '잠자리가 불편해서' 라고 답했다. 그 말에 김이 팍 샌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왜 갑자기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는지는 몰라도, 둘 다 예민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둘 다 엮이면 피곤해지니 그냥 모른 척 지나가려는데 마침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이글은 잠든 루이스를 돌아보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다 아는 이상 루이스가 감기라도 걸리면 연합은 대체 사람 관리를 어떻게 하는거냐며 저를 붙들고 또 애먼 화풀이를 할 게 분명했다. 이글은 구석에 방치된 담요를 집어들었다.
“그냥 다시 자라고 하지 뭐.”
휴톤이 말리려들었지만 이글은 후딱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 소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떠드는 소리에 뒤척이다 천장을 보고 누운 루이스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이 봐도 안쓰러운데, 좋아하면 얼마나 속이 썩을까. 이글은 무언가 닿는다는 것마저 느끼지 못하도록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담요를 내려놓았다. 덮어 씌운다는 생각으로 대충 하면 깰까봐 조심하는데 그것도 마뜩치 않았는지 루이스가 웅얼거렸다.
그 소리가 정지 신호라도 된 것 마냥 손을 멈추자 루이스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눈꺼풀이 무겁게 올라가 깜빡였다.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와,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짓는 눈웃음에 순간 사고가 멈췄다. 그 사이 미소와 함께 뻗은 손이 이글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제가 아는 루이스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사근사근한 태도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대로 끌려가자 몸을 겹친 이글의 귀에나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이글의 귀를 간지럽혔다. 포옥, 내쉬는 숨과 목을 끌어안은 부드러운 팔에 어안이 벙벙했다.
혼란에 휩싸인 이글의 목덜미를, 뒤에서 커다란 손이 잡아 당겼다. 그 우악스런 손아귀 힘에 겨우 정신을 차린 이글은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 없이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그 손에서 풀려났을 땐 휴게실에서 회의실로 끌려온 뒤였다. 의자에 억지로 앉혀진 이글 앞에, 주먹 깨나 쓰는 덩치 둘이 자리하고 그 사이 의자에 앉은 트리비아가 다리를 꼬았다. 안 그래도 무서운 누님과, 웃음기가 싹 가신 두 사람을 앞에 두니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사이렌이 왱왱 울린다. 이글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잠깐, 잠깐.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우리 말로 해결합시다!”
“이글.... 난 그래도 네가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동감이데이. 니 혹시....”
“아니라니까! 아, 답답해 미치겠네! 나도 억울하거든?! 나도 피해자라고!”
“뭐? 피해?”
“아악!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어떤 놈들이 겁도 없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가는 상황에 이글은 머리를 쥐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겨우 돌아온 관심에 이글은 깊은 한숨을 토하고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냥 잠꼬대 한 거야. 내가 맹세하는데,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 그리고 쟤도 나이 먹을만큼 먹은 성인인데 자기 맘대로 할 수도 있지!”
신랄하게 두다다 쏟아내는 말에 휴톤과 도일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야 그들이 성급하게 굴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데, 억울함을 토로하고 나니 잡혔던 뒷목이 아파왔다. 목을 돌리자 우두둑 소리가 나고, 목이 뻐근해 주무르자 휴톤이 못내 미안한듯 주춤거렸다. 한 마디 않고 차디 찬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트리비아의 눈매가 살짝 풀어졌다.
오해로 치면 아론 휴톤만큼 역시 오해받는 기분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덩치는 산만해서 금세 순한 얼굴을 하고 미안해해서 짜증이 가라앉긴 하는데, 애초에 오해를 안 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파렴치한 취급이나 하고. 울컥 튀어오르는 서운함과 억울함을 토로하자 휴톤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도.... 억수로 미안하데이.”
“됐거든! 아니 그리고, 댁들이 무슨 막내 여동생 시집 보내기 싫어하는 팔불출 오빠야? 나 그래도 귀족집 도련님이거든? 내가 무슨 해충이야?! 진짜 너무하네!”
“아니, 그게.... 정말 미안하다.”
이글이 뚱하니 팔짱을 끼자 머리를 긁적이던 도일이 어깨를 두드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데.... 그, 가는 우리도 불안타.”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정말 한창인 나인데 연합 일에만 매여있으니까.”
“그게 뭐 하루 이틀이야?”
별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를 구태여 하는 의도를 묻자 휴톤이 멀리서 엘리와 피터를 볼 때 짓는 표정을 지었다.
“연애도 못 해보고, 남들처럼 꾸미는 것도 아니고 일만 하니까.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저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 강한 녀석이라는 건 알지만, 그 등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도 미안하고.... 걱정이지.”
“얼래? 그렇게 치면 앤지는!”
“갸는 그 일 전까진 평범했다 아이가.”
“그래. 상대적으로 루이스가 불우한 시절을 보낸 건 맞지. 게다가 루이스는 뭐냐, 그.... 잔... 잔, 누구였지?”
“잔 다르크?”
“그래! 그 사람처럼 언젠가 홱 죽을 것 같다구. 루이스는.... 늘 혼자 짊어지려 하니까.”
이글은 가만히 휴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중간에 트리비아가 거들지 않았어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녀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답게 말은 어수룩해도 분명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혼자 다 짊어지려다 스러질 것 같다고, 좋은 시절을 전부 연합과 그녀의 그 어리석은 이상에 얽매여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루이스는 위태로운 사람이다. 그건 부정할 여지가 없다. 그런 사람이니까, 라는 말로 넘기면 그 뿐이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못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이 사람들의 유대이고, 그 유대가 강한만큼 루이스를 아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벨져는? 이렇게 답답한 면마저 좋다는 걸까. 문득 스치는 의문에 이글은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방금 제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호기심에 그렇게 된통 당해놓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그 둘은 어느 모로 보나 달콤한 연애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눈이 맞았다? 이글은 못된 장난을 하기 전에 드는 두근거림을 즐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왜, 나름 잘 즐기는 것 같던데.”
트리비아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휴톤은 알고 있었는지 아차 싶은 눈치였고, 도일은 못 알아들었다. 이글은 악동처럼 미소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일은 혼자만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휴톤을 툭툭 쳤고, 휴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이글과 트리비아를 번갈아봤다. 의기양양하게 회의실을 빠져나온 이글의 뒤로 트리비아의 냉기가 흘렀다.
“잠깐 나 좀 볼까?”
“흐응. 미녀의 제안은 거절하지 않아.”
“우리 자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도련님?”
“알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데.”
또각거리는 킬힐 소리와 함께 위험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 트리비아가 이글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대로 벽까지 밀린 이글은 양손을 들어 항복자세를 취했지만 트리비아는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과연 여제, 이글은 그녀의 박쥐들을 떠올리며 미소로 화답했다. 진짜 무서운 건 언제나 여자들이다. 특히나 연합에선 더더욱.
“왜 이러실까.”
“어머, 몰라서 묻는 거야?”
“모르겠는데.”
“저런. 거짓말을 하려면 티는 내지 말아야지.”
“티났어?”
“그럼.”
이글은 아쉬운 척 입을 다셨다. 연합의 누님들은 하나같이 무섭지만 그 중 가장 무서운 건 단연 트리비아 카리나다. 속을 알 수 없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냉기가 꼭 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쪽은 진심이야?”
“그쪽? 어딜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둘째 도련님 말이야.”
“아아, 작은형? 우리 작은형이야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우린 모여 앉아서 연애사업 얘기할 사이가 아니거든. 칼부림이라면 또 모를까.”
“흐응. 뭐, 좋아. 두고 보면 알겠지.”
트리비아의 손이 떨어졌다. 이글은 태연한 척을 하느라 집어삼킨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작 문제의 당사자는 태평하게 잘만 자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 된 걸까. 간만에 착한 일을 하려 해서 그런가, 얻은 거 없이 손해만 왕창 본 기분이었다.
이글은 잠든 루이스를 가만히 지켜보다 입가를 매만졌다. 나쁜 장난을 할 때면 팽팽 돌아가는 잔머리가 활발하게 돌아가고, 만족스러운 계획이 세워지자 씩 웃으며 자리를 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이글은 고양이도 아닐 뿐더러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난 이글은 목 뒤에 양팔로 깍지를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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