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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퍼즈/벨져루이 : 프로게이머au에 해당되는 글 24건
- 2017.07.17 재록본 수요 조사 * 구간 재판 공지 추가
- 2016.02.25 냉장고는 산이 아니라 바다로 가기도 한다
- 2016.02.22 소금사막 *
- 2016.02.22 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 2016.02.15 St. Valentine's Day
- 2016.01.12 Happy Birthday to you, Belzer. 2
- 2015.12.23 Happy birthday to you. 00.
- 2015.10.22 어느 좋은 날
- 2015.07.02 Prequel. 08. 2
- 2015.07.01 Prequel. 07.
글
재록본 수요 조사 * 구간 재판 공지 추가
이번주 일요일이 제 생일이라 셀프 이벤트로 그동안 벨져루이 프로게이머au로 낸 책과 웹에 올린 글을 모아 재록본을 만들어보려 합니다.
재록본은 실주문 수량이 인쇄 최소 수량을 맞춰야 진행되며, 가격과 사양은 아직 미정입니다.
7월 동안 수요조사를 거쳐 8월 첫째주에 실주문을 받을 예정으로 수령일은 8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http://naver.me/xqSvWzte
상기 폼 작성에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추가공지)
재록본 수요조사와 함께 구간 재판에 대한 문의를 많이 받아서 인쇄 최소수량(5권)을 채우는 구간에 한해 재판을 진행하려 합니다!
현재 재판 예정 구간은 '기억의시차'와 '어떤 동행' 2종이나 이 외에 재판을 원하시는 구간이 있으시면 트위터 멘션/dm 혹은 홈의 댓글/방명록으로 알려주세요!
다음주 중에 오픈하는 재록본 주문폼으로 신청하셔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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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냉장고는 산이 아니라 바다로 가기도 한다
* 사족의 느낌이 강하게 나지만... 기왕 썼으니까...
** 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를 먼저 읽어주세요
벨져는 네 명의 셰프들이 각자 할 요리를 정하는 동안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괬다. 어쩐지 스튜디오가 소란스러운 것 같아 스태프들을 보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스냅백에 후드, 거기에 마스크까지 중무장을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벨져가 못 알아볼리 없었다. 벨져는 놀란 나머지 검지로 그를 가리키며 벌떡 일어났다.
“너...!”
“어? 무슨 일이죠? 벨져씨? 어어??? 어???”
벨져의 반응에 시선을 손가락 끝으로 옮겼던 클레어가 놀라 비명을 지르고, 셰프들이 엉거주춤하며 일어났다. 웃으며 스냅백과 후드를 벗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루이스는 급히 달려온 작가가 채워주는 마이크에 목을 내주며 연신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고개와 허리를 꾸벅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화를 했던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자 스튜디오가 발칵 뒤집히고말았다. 벨져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루이스가 웃으며 벨져의 옆으로 다가왔다. 무심코 의자를 내주려던 벨져는 진행자의 호들갑에 촬영중이라는 걸 깨닫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셰프들이 한 칸 씩 옆으로 가서 만든 자리에 앉은 루이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고,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벨져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어떻게 왔냐는 질문에 루이스가 웃으며 침 한 번 안 바르고 벨져가 보고 싶어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 그러지 말고. 방송을 아는 사람이 왜 이래~.”
“하하, 네. 실은 우리 PD님이 꼬셔서 왔습니다. 맨날 보는 얼굴인데요, 뭘. 그리고 이렇게 오면 또 여기 셰프님들이 맛있는 거 먹여주실 것 같아서.”
“어휴. 우리 클레어양 눈빛 좀 봐요. 초롱초롱해.”
“어.... 저 진짜 프로즌씨 팬이거든요. 아참, 루이스씨!”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주는 루이스에 클레어가 호들갑을 떨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반응에 벨져의 표정이 굳어진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소재를 그냥 지나갈 리 없었기에, 진행자들은 맞장구를 치며 바람을 불었다.
“에이, 한 번 안아줘요!”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이돌인데....”
“팬이라잖아요. 뭐 어떻습니까!”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분위기에 떠밀린 루이스가 난처해하며 슬쩍 벨져의 눈치를 봤다. 찔리는 거 알면 가만히 있으라고 루이스를 쏘아봤지만 클레어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키친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겸연쩍게 웃은 루이스가 벨져의 손을 잡아 두드리곤 일어났다. 그리곤 다가온 그녀와 가벼운 포옹.
팬과 우상의 포옹이라 하면 훈훈한 장면일지 모르나 벨져의 눈에는 영 탐탁지 않았다. 임자도 있는 사람이 저렇게 홀랑. 집에 가라니까 제 말은 듣지도 않고 와버린 것도 그렇다. 하나부터 열까지 루이스가 아니꼬워진 벨져가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봐도 루이스는 좋다고 웃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진행자들이 좋다고 떠들어대는 사이 테이프를 갈겠다며 잠시 촬영이 끊겼다. 평소에도 친분이 있었던 셰프와 인사를 한 루이스가 벨져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너 뭐냐.”
“응? 왜?”
“집에 가라니깐.”
졸음이 묻어나는 눈가를 매만지며 작게 혀를 차자 루이스가 눈을 감으며 벨져의 손을 잡았다. 그만하라는 건지, 계속 하라는 건지 손은 잡아놓고 뺨을 기대는 루이스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앞서 클레어의 냉장고로 요리 대결이 끝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꼬박 세 시간을 더 있어야 했다.
벨져는 마침내 시작된 요리대결을 앞에 두고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옆에 찰싹 붙어있던 루이스가 벨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마이크에 목소리가 들어갈까 입모양으로 졸리냐 묻자 거의 반쯤 눈이 감긴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선 면을 삶는다 고기를 튀긴다 정신이 없는데, 화려한 칼질과 좋은 냄새도 벨져의 시선을 루이스에게서 뺏을 순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나른한 얼굴에 입 맞추고 싶은 걸 꾹 참고, 벨져는 루이스의 다리를 토닥였다.
몸을 일으킨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다 반대편 키친에서 불이 붙은 프라이팬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놀란 토끼같은 반응이 귀여워 웃음을 눌러 참은 벨져는 셰프들과 진행자의 중계에 조금씩 말을 보탰다. 그렇게 눈앞에서 요리가 완성되어가는 걸 보랴, 졸음에 기대는 루이스를 토닥이랴 바쁜 사이 십오분이 흘렀다.
공성 한 판 하는 것과 같은 시간인데도, 요리 두 접시가 뚝딱 완성된 걸 보니 또 감회가 남달랐다.
“그럼 먼저 시식을 해보겠습니다!”
“아, 저만 먹나요?”
“어, 저는요?”
루이스가 어울리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벨져를 바라봤다. 이걸 죽여 살려. 벨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숟가락과 포크로 파스타를 말아 루이스의 입에 갖다주었다. 냉큼 입을 벌려 파스타를 입안에 넣은 루이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습니까!”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미묘한 반응에 벨져는 파스타를 제 입에 넣었다. 셰프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 안에 퍼지는 상큼한 토마토와 아보카도의 맛에, 가볍고 간이 심심하니 마냥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파스타는 벨져가 낸 주제에 잘 맞는데다 맛있었다. 벨져조차 루이스가 웃은 이유를 몰라 고개를 돌리니 루이스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루이스가 벨져를 보곤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 반응은 뭐죠? 저절로 웃음이 나는 맛입니까?!”
“아, 그게.... 푸흡. 아, 이럼 안 되는데.... 벨져가 만든 맛이 나요.”
“아아! 이거 어쩌죠! 집에서 먹는 맛이랩니다!”
“아니, 맛있어요! 맛있는데, 어.... 똑같이 건강한 맛인데 벨져씨가 만든 게 좀 더 제 입에 맞는 거 같아요.”
셰프가 고개를 떨구고, 루이스는 미안해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미안하고 웃긴지 자꾸 셰프에게 사과하며 웃는데, 다가가서 손을 잡아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같은 냉장고로 같은 생각을 하고 만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제가 해준 게 더 맛있다는 말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벨져는 입가를 닦으며 루이스가 워낙 막입이라 그렇다며 셰프를 격려했다.
“그래도 뭐, 오늘 선택을 하는 건 루이스씨가 아니라 벨져씨니까요.”
“그럼요. 저는 그냥 곁다리정도로 생각해주세요.”
“넌 이제 집에 가.”
“벨져씨가 집에서 해주시면 되겠네요.”
“왜 얘기가 그렇게 되죠?”
루이스의 얼빵한 반응에 스튜디오에 웃음이 터졌다. 루이스는 억울하다는 듯 벨져를 툭 쳤고,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음 요리로 나온 해산물 리조토를 한 숟가락 곱게 떠 입에 넣은 벨져는 확연히 다른 향신료의 맛을 음미하며 루이스에게 숟가락을 넘겼다. 냉큼 받아든 루이스가 크게 한 숟가락 떠먹는 동안 리조토를 넘긴 벨져는 셰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건 무슨 뜻인가요!”
“향신료를 굉장히 잘 조합해서 썼는데, 치즈를 많이 넣어서 자칫 느끼할 수 있는 리조토를 스파이시하게 잘 잡았군요.”
“별점을 준다면 몇 점입니까!”
“5성 만점으로 3.5 드리겠습니다.”
“크흐. 벨져 홀든 기준으로 별 3개면 레스토랑을 열어도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죠?”
“우리 셰프님 굉장히 짠 점수에 굉장히 황송해하고 있어요!”
벨져는 암암리에 도는 속설을 들으며 입을 닦았다. 루이스를 만나기 전에는 입에 안 맞으면 손도 대지 않았던 벨져였다. 게이머로 이름을 날리기 전부터 벨져는 셰프들 사이에서 까다로운 고객으로 유명했다. 한 번 예약이 들어오면 주방장조차 긴장하게 만든다는 홀든가의 차남. 그러니 이런 프로에 나오는 것부터가 사실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하겠다고 한 것은 오로지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저희들끼리 하는 얘기 있어요. 맛있다고 해주신 메뉴는, 베스트 셀러가 된다고.”
“아, 벨져 홀든 보증제같은 거군요.”
“네, 그리고 별로면 두 번 안 드시고.”
한가득 리조토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루이스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벨져를 바라봤다. 벨져는 제게 돌아오는 높은 평가에 이것 보라며 턱을 들고 오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정작 이 사실을 알아야 할 사람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는 눈치라 김이 빠졌다. 루이스는 벨져 앞에 놓여있던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그냥 넘어갈 수 없죠. 루이스씨, 리조토는 어땠습니까! 여전히 벨져씨 요리가 더 맛있나요?”
“어.... 제가 진짜 피곤한가봐요.”
“왜요? 맛이 없습니까?”
“아뇨, 맛있는데....”
루이스가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자기 딴에 말을 아낀다고 하는데, 그래봤자 이미 꼬투리를 잡은 진행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루이스는 이러다 백만 안티가 생길 것 같다고 밑밥을 깔았다.
“맛있는데, 자꾸 집에서 먹는 느낌이에요.”
“이건 또 무슨 의미죠?”
“되게 제가 벨져씨한테 길들여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 말 되게 이상한데.”
“아아...! 이래서 너무 잘해주면 안 됩니다!”
“이러면 오히려 좀 궁금해지는데요. 게스트석이 아니라 조리복을 드려야하는 거 아닙니까?”
“어, 그것도 되게 괜찮을 것 같아요. 근데 제가 태생이 그렇다 보니 웬만한 건 그냥 다 똑같이 느껴져서.”
난처해하던 루이스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며 성대하게 자폭해버렸다. 무너져가는 애인을 지켜보던 벨져는 루이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이걸 거둬 살리는 제 고생이 어떻겠습니까.”
벨져의 떨떠름한 표정에 루이스가 짐짓 상처받은 얼굴을 하다가 몇 초 못 버티고 웃어버렸다. 환한 미소에 벨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오늘따라 예쁜 말만 하는 그가 퍽 사랑스러워, 냅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려 고개를 내밀었다.
“아, 근데 진짜 먹고 나니까 그 향이....”
몸을 기울여 팔에 머리를 기대는 척, 교묘하게 피해간 루이스가 리조토를 칭찬하며 엄지를 들었다. 이건 분명 일부러 피한 거다. 모두 시식을 하는 사이 눈을 흘기자 루이스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따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이따가라고 하는지 몰라도 다리를 토닥이는 손길이 퍽 자상했기에 벨져는 이번만 모른 척 져주기로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오히려 사귈 때보다 카메라 앞에서 뽀뽀하는 걸 조심하게 된 루이스였다. 그래도 사흘 만에 같이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괜히 싸우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예쁜 짓도 했겠다, 스케줄도 없겠다 침대에서 아침해가 뜰 때까지 뒹굴려면 토라질 일은 가급적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자, 그럼 선택의 시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선택은 어디까지나 벨져씨가 하는 겁니다.”
“그래도 역시 이번 별은 별 두 개의 가치가 있지 않나.”
“그렇죠! 자! 버튼을 눌러주세요!”
처음 두 요리를 먹었을 때부터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기에 선택을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승패를 가른들, 오늘 선보인 레시피는 전부 가질 것이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벨져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핀라이트를 켜고 조명을 끈 스튜디오의 패널에 승패가 떠오르고, 벨져는 이번 대결의 승자의 가슴에 별배지를 달아주었다.
키친을 정리하는 사이, 두 번째 요리 대결이 남았음에도 루이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대결에서 진 셰프에게 식당으로 찾아가겠단 말을 전하던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집에 가.”
“너만 맛있는 거 먹으려고?”
반쯤 뜬 눈으로 귀여운 소리를 해대는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눈을 꿈뻑이다 주변을 둘러봤다.
“좀 조심하라니깐.”
“그러게 여길 왜 와.”
“왜 오긴, 너 보러 왔지.”
“내가 애냐.”
“애지, 그럼.”
“하! 애랑 그런 짓 하는 넌?”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고 무릎을 그의 다리 사이로 넣었다. 루이스가 흠칫 몸을 떨며 벨져의 가슴에 손을 얹어 밀어냈으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먹잇감을 몰아넣은 기분에 벨져는 입꼬리를 올렸다. 루이스가 시선을 피하며 빠져나갈 구석을 찾았지만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는 이상 벨져를 밀쳐낼 순 없었다.
“교활하긴.”
“영리한 거겠지.”
“말은 잘해요.”
“말도 못하는 누구보다야 낫지. 안 그런가?”
결국 루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 항복 선언에 흡족해진 벨져는 특별히 어제 오늘 쌓인 앙금을 용서하기로 했다. 밤은 길고, 그 시간을 만족스럽게 보내려면 잘 먹이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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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금사막 *
* 리케님께 드립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불거진 다툼이었다. 루이스는 자고 일어나도록 비어있는 침대의 옆자리와 텅 빈 거실을 둘러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광의 기록이 가득한 거실 벽 한쪽을 짚고 걷다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어젯밤에 내뱉고 만 말이 떠올라 입이 썼다. 정말이지 배부른 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에게 그런 말은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루이스는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팀원들을 보다 그 속에서 저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벨져를 손끝으로 덧그렸다.
“화, 많이 났겠지…….”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혼잣말에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연락 한 번 없는 벨져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거라면 먼저 말을 걸기도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잠은 꼭 같이 자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는데 그것마저 안 지킬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마음이 상한 걸까.
벨져는 보이는 것보다 더 섬세한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상처 받는데 무딘 루이스는 종종 이렇게 벨져에게 무심코 상처를 줬고, 그 다음은 언제나 어려웠다. 자존심때문에 사과를 못해서가 아니라 또 무신경하게 상처를 줄까봐. 그게 마음에 걸려서 쉽사리 먼저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지. 제가 생각해도 답답했다.
착잡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자기비하의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지는 기분에 루이스는 불과 오 분도 안 되어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핸드폰을 베개 아래서 꺼내 화면을 두드렸다. 클랜원들의 단톡방과, 매니저의 문자, 정작 기다리는 사람에게선 부재중 통화는 커녕 문자 한 통 메세지 하나 없었다.
한 번, 딱 한 번 화면을 누르기만 하면 전화를 할 수 있는데도 루이스의 손은 화면 위를 서성일 뿐이었다. 오늘도 스케줄이 있어서 집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이렇게 오래 벨져가 집을 비운 적이 없어서 그런가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남은 공간을 채웠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잡았다. 깊게 심호흡하고, 메신저를 켜 자판을 두드렸다.
집에 와. 와서 얘기하자. 고작 그 두 마디를 써놓고 전송을 못해 망설이다가 큰 마음을 먹고 버튼을 눌렀다. 돌이킬 새도 없이 날아간 메세지 옆에 뜬 숫자 1은 지워지지 않는다. 루이스는 핸드폰 화면을 잠그고 일어나 침대를 정리했다. 씻고 준비하는데 십 분, 매니저가 데리러 올 때까지 한 시간.
루이스는 청소기를 꺼냈다. 뭐라도 해야 했다.
* * *
없다. 촬영을 마치고 핸드폰을 받아든 루이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한 번 화면을 확인했다. 그래도 촬영이 끝나면 확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루이스가 보낸 메세지는 보낼 때 그대로였다. 엄습해오는 불안에 루이스는 메세지 창을 위아래로 훑다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루이스는 침착하려 애쓰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걸그룹의 활기찬 사랑 노래가 대기음으로 울리는 내내 루이스의 손은 입술을 매만졌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속이 탄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어, 왜.”
“이글. 벨져 어디있는지 알아?”
“응?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싸웠는데, 아니. 내가 말을 좀 잘못했는데 나가서 안 들어와.”
“에이, 작은 형이 애야. 가출을 하고 안 들어오게.”
이글의 태평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유치한 반항이라면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울 리가 없다.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며 다짜고짜 촬영장에 난입해 멱살을 쥔다면 또 모를까, 이렇게 걱정시킬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핸드폰도 꺼놨어. 벌써 한나절이 지났고, 메세지도 안 읽어.”
“야, 야. 일단 좀 진정해봐. 넌 어딘데?”
“지금 촬영 끝났는데…. 하아….”
“알았어, 알았어. 찾아볼 테니까 물이라도 한 잔 하고! 어? 짝형이 누구 죽이면 죽였지 어디 뭐 해코지 당하고 그럴 사람은 절대 아니니까 걱정마!”
루이스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 너머의 이글이 볼 리도 없건만, 냉정과 이성이 전부 마비된 것 같았다. 이글의 말대로 해코지를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행여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저를 안 보려는 걸까하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불안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깟 말 한 마디 때문에 깨질 사이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믿지만 그게 또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벨져가 갈 법한 장소를 떠올리던 루이스는 매니저에게 일찍 들어가라며 차 키를 받아들었다. 벨져가 그 나름의 시위를 하고 있는 거라면, 숨은 그를 찾아내는 게 루이스의 몫이었다. 루이스의 차가 도로 위를 달렸다. 이렇게 찾아도 안 만나준다면 그 때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화가 난 완고한 얼굴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돌아온 집. 루이스는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집에도 없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저녁도 안 먹고 벨져를 찾아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벨져는 커녕 그를 봤다는 사람 하나 없었다. 워낙 시선을 많이 받는 녀석이니 못 봤다면 정말로 없는 거다. 루이스는 잠잠한 핸드폰을 보고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의 잠금은 너무나 쉽게 풀리고, 큰 마음 먹고 잡아당긴 문 안으로 보이는 현관은 루이스가 나가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기척은 커녕 따스한 온기조차 없는 휑한 집. 루이스는 무거운 숨을 토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문에 기대어 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네가 날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외친 뒤에, 충격에 굳어버린 벨져의 얼굴이 떠올라 빠듯하게 가슴을 조였다. 덮쳐오는 죄책감에 루이스는 등을 차가운 문에 기댄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이번에 잘못한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그깟 심야 영화, 그냥 보러 갈 수도 있는 거였는데.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 루이스는 너무나 무력했다. 무릎을 모아 안고 이마를 짚었다. 이번 주 내내 스케줄이 바빠서 힘들다고 제대로 밥 한 끼 먹은 적도 없고, 집에 돌아오면 씻고 자기 바빴다. 그 정도면 벨져도 많이 참아준 거였는데 이기적으로 군 건 어느 모로 보나 루이스 자신이란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한 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핸드폰을 꺼낸 루이스는 주저 없이 전화를 걸었다. 벨져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있었고, 루이스의 핸드폰은 배터리를 충전하라며 기계음을 울렸다. 사과하자. 사과하고, 잘못했다고 빌자.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루이스는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때마침 울리는 진동에 반쯤 마음을 놓았던 루이스는 화면에 뜬 이글의 이름에 자포자기하며 전화를 받았다.
“응.”
“야, 짝형 날랐어.”
“무슨 소리야.”
“너랑 싸우고 바로 그냥 아무 비행기나 탄 것 같아. 공항사진이 좀 찍혔더라고.”
“하하, 벨져답네.”
“아직 비행중이라 전화 못 받는가보지 뭐. 걱정하지 마. 연락 오면 빌고! 나 좀 그만 찾어! 알았어?”
“…그래.”
과연, 벨져 홀든은 마음 정리하는 스케일도 남다르다. 루이스는 가볍게 웃었다. 이글과 전화를 마치자마자 핸드폰이 꺼지고, 루이스는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일단 안전하게 잘 있다는 걸 확인한 것 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고,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기 앞에 서니 하는 줄도 몰랐던 긴장이 뜨거운 물에 녹아내렸다.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을까.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들로 가만히 뜨거운 물을 맞고 있던 루이스는 욕실 안에 차오르는 수증기에 콜록거리며 물을 껐다.
환풍기도 안 돌려놓고 들어오다니,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게 분명했다. 벨져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다른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나가도 옷 좀 입고 다니라고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 보일러도 안 켜놓고 나가서 욕실 밖 공기가 차가웠다.
한기와 외로움에 바르르 몸을 떤 루이스는 온도부터 맞춰놓고 핸드폰을 켰다. 샤워하는 사이 충전된 배터리는 겨우 5%. 물에 젖은 머리를 털며 핸드폰을 침실로 가져와 다시 충전기에 연결했다. 진동으로 해두면 혹시라도 못 들을까봐 전화 알림을 진동과 벨소리로 바꾸고, 벨소리 음량을 최대로 올린 뒤 머리를 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메신저 창에 숫자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게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일일줄이야. 루이스는 종종 벨져가 투덜거리던 걸 떠올리고 다시 한 번 깊게 반성했다.
여태껏 널 이렇게 서운하게 만들고 있었구나. 말 없이 기다려주고, 힘들다고 투정을 부려도 옆에 있어주는 사람에게 못할 짓을 해버렸다. 둘이 있어도 넓은 집은 한 사람에겐 너무나 넓다. 빈 공간이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신경질을 내며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다가와 머리를 말려줄 사람이 없다. 루이스는 드라이기를 꺼내 혼자 머리를 말렸다.
같이 쓰는 샴푸와 바디워시 향에 무심코 기대하게 된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걸까, 아니면 네게 길들여진 걸까. 제게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향기는 벨져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머리를 말린 루이스는 그대로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늘 눕는 제 자리 대신 벨져의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다.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노래 가사와 같은 마음에 루이스는 벨져의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전화 오면 뭐라고 하지. 자다가 놓치는 건 아닐까. 그럼 일어나 있어야 하는데, 한 번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 안에서 맨살을 부비고 있으니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루이스는 손을 뻗어 충전기에 연결된 핸드폰을 침대 옆 협탁에 놓고 스탠드를 켰다.
쨍한 불빛에 눈이 아프다고 하자마자 바꾼 스탠드였다. 스탠드 갓을 한 번 쓸어보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오지 않는 연락을 막연한 기대로 기다리는 루이스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왔다. 자지 않기 위해 일어나 앉았지만 일주일 째 쌓인 피로에, 저녁 내내 긴장한 채로 벨져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이불 속에 들어온 이상 잠이 오는 건 제아무리 루이스라 한들 불가항력이었다. 아침해가 밝아오는 새벽, 결국 밀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루이스의 눈이 감겼다.
그렇게 잠들어 고른 숨소리를 내던 루이스를 깨운 건 진동과 함께 울리는 벨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깊게 잠들었던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알람을 끄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눌러 밀었다.
“으으응….”
“루이스.”
알람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묻어도 핸드폰에선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웅얼거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뜬 루이스는 급히 핸드폰을 찾았다. 침대 위에 엎드려 핸드폰을 집어들자 화면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말문이 턱 막혔다.
졸음에 다 뜨이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다시 봐도, 화면에 비치는 풍경은 여전했다. 더없이 아름다운 하늘과, 그 하늘을 담은 땅. 쏟아지는 별빛과 그 모두를 담은 풍경은 언젠가 TV에서 함께 본 곳이었다. 한 번 쯤 가보고 싶다고 했던 걸 또 기억하고 있었는지. 루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참을 생각도 없었지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벨져어.”
영상통화라 화질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동이다. 어떻게 이걸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루이스는 핸드폰을 공손히 양손으로 들고 먼 땅에 홀로 떠나버린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끝내주는 앵글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과 그 하늘을 담은 소금 사막을 보여주던 화면이 빙그르 돌아가더니 조금 지친 얼굴의 벨져가 비쳤다. 루이스는 화면 한 쪽에 뜨는 제 얼굴이 엉망인 걸 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너무 좋은데, 좋아하는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주자니 부끄러웠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라, 핸드폰 액정에 뜨는 벨져를 보며 웃자 벨져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흥, 이런데도 내 사랑이 느껴지질 않는다고 투정을 해?”
“……미안.”
잠결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루이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제야 조금 풀어진 표정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얇게 휘는 눈매가 별빛이 가득한 하늘만큼이나 예쁘다.
“지금 당장 키스해주고 싶은데….”
화면을 손톱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중얼거린 목소리는 닿지 못했는지, 벨져가 다시 카메라를 풍경으로 돌렸다. 아름다운 풍경에 자꾸만 광대가 올라갔다. 보고싶다는 한 마디에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정말이지 배부른 투정이었다. 루이스는 몸을 돌려 누웠다. 팔을 뻗어 핸드폰을 높이 들고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벨져의 이름을 불렀다.
“보고 싶다…….”
잠결에 눈을 깜빡이며 느릿하게 한 말에 다큐멘터리처럼 풍경을 보여주던 핸드폰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다 듣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긴. 루이스는 당장 떠오르는 말을 더했다.
“사랑해. 진짜 많이…….”
분명 잠들기 전까진 할 말이 많았는데, 사과도 하고, 또 다른 말도 하려 했는데 사랑한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미안….”
눈을 비비며 잠을 몰아내려 했지만 한 번 찾아왔던 졸음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핸드폰을 떨어트리며 뺨을 맞은 루이스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며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예쁘다. 근데…. 지금은….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미련하긴.”
“하하, 그러게.”
하는 말은 타박이지만 그 말을 하는 목소리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목소리에 벨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떠올라 루이스는 베개 위에 화끈거리는 뺨을 기댔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핸드폰 액정을 채운 풍경이 아름답다. 그보다 마음을 울리는 건 감히 그 크기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이었다.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기분에 루이스는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랑을 어떻게 다 돌려줄 수 있을까. 벨져 홀든은 언제나 제게 넘치도록 과분한 사람이었다. 초라한 불안과 걱정은 그 앞에 서면 언제나 하잘 것 없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루이스는 제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뉘우치며 밤하늘을 바라보다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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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냉장고도 산으로 간다
* 생각할 땐 재밌었는데....ㅠㅠ 쓰다보니 재미가 없어서 쓴 곳까지만 올림
** 게이머 은퇴 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셰프들이 유명인의 냉장고로 하는 시간제 요리쇼에 오늘 게스트로 초대받은 벨져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루이스에게 카톡을 보냈다. 촬영을 시작했냐는 질문 옆에 숫자가 사라지지 않는 걸 봐선 핸드폰을 볼 여유가 없거나, 아니면 정신 자체가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벨져는 잠시 응원차 방송에 들어가볼까 하다가 그만 뒀다. 괜히 봤다가 또 망해가는 거 보고 심란해지면 이번 방송을 망칠 가능성이 컸다.
촬영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자리에 앉아 셰프들이며 패널들과 인사를 나눈 벨져는 제작진이 미리 옮겨놓은 냉장고를 보고 가볍게 숨을 토했다. 닥달을 하긴 했지만 집을 비운 이틀 사이에 루이스가 또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모를 일이었다.
“자아, 오늘의 특급 게스트를 모십니다!”
벨져는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 그래도 몇 번, 루이스가 집에서 셀프카메라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잡히면서 기대와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벨져였다. 셰프들의 요리 대결에 앞서 냉장고를 공개하는 시간이 이렇게 긴장될 줄이야. 적당히 오프닝 멘트를 주고받던 벨져는 냉장고 앞에 선 진행자들이 손잡이를 잡는 걸 보고 손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어, 왜요. 왜 긴장을 하시죠? 여태 여유만만이시더니.”
“벨져씨 이런 모습 처음 봅니다. 경기할 때도 긴장을 안 하는 선수였거든요.”
두 엠씨가 긴장을 풀라는 듯 사람 좋게 웃었지만 벨져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정리도 안 된 집을 보여주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인가. 벨져는 영혼 없이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제 동거인이 워낙....”
“아....”
“아, 루이스씨와 동거중이시죠?”
“그렇습니다. 지금 촬영중일텐데.... 제가 집을 이틀동안 비웠는데 그동안 얼마나 엉망으로 해놨을지....”
벨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셰프들이며 같이 나온 패널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벨져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또 오늘 특집이 숙소요리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클레어씨?”
“어머, 그럼요! 사실 아이돌 숙소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또 선수들은 아니잖아요.”
“사실 프로게이머 숙소 냉장고는 이런데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이돌 대표로 나온 클레어 스미스가 해맑게 웃었다. 전에도 한 번 집에 방문해 벨져가 만든 요리를 맛봤던 그녀는 두 사람의 집이 얼마나 깔끔하며 벨져의 솜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늘어놓으며 벨져의 냉장고 오픈을 잠시나마 늦춰주었다. 벨져는 다시 한 번 심호흡했다.
“루이스씨가 집에서 뭔가 요리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뇨. 주방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 아니 루이스씨는 절대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야, 그렇게까지 가나요.”
“그렇습니다. 완제품을 먹는 건 괜찮은데, 자기가 직접 하는 건.... 라면 정도일까요.”
더없이 진지한 벨져의 말에 애써 웃음을 눌러 참은 진행자가 냉장고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루이스씨는 그럼 전혀 냉장고에 손을 안 대는 겁니까?”
“못 대게 하죠. 보통.”
“이야.... 이거 왠지 불쌍한데요. 그 친구가 참 괜찮은 친구거든요.”
“사람이야 뭐....”
갑자기 루이스에게 기우는 동정론에 말끝을 흐렸다. 물론 사람이야 괜찮지만, 동거하는 애인이 아니라 같이 사는 입장에서 보면 루이스는 꽤나 번거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청소하기 귀찮다고 안 움직이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안 먹고 사람 속을 썩이는 데다 또 냉장고는 왜 그렇게 헤집어놓는지. 벨져는 지금 열심히 방송을 하고 있을 애인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럼 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죠! 전화 연결 한 번 해볼까요!?”
“아마 지금 촬영중이라 힘들 겁니다.”
“아, 어떤...?”
“타방송국의 조그만 텔레비전인데 실시간으로 하니까 아무래도....”
“그렇군요! 하긴 또 요즘 섭외순위 1순위가 아닙니까. 제가 듣기론 벨져씨보다 더 버신다고....”
짓궂은 질문에 벨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수입으로 치자면 그렇지만 워낙 보유 자산이 다르니까요.”
턱을 들고 당당하게 말하자 셰프들이 박수를 치고 말을 꺼낸 진행자가 난처하게 웃었다. 종종 가는 레스토랑의 메인 셰프가 계산은 루이스가 하지만 실제 카드는 벨져의 카드라는 증언을 보탰고, 벨져는 이틀동안 첫 출연이라고 저를 보는둥 마는둥 했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그까짓 BJ 짝퉁 방송, 그냥 자기 채널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방송국까지 가서 해야 하나 싶었지만 루이스는 첫 공중파라며 같이 이 프로에 나오자는 벨져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가버렸다.
그래. 그까짓 출연료 안 벌어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 수 있다. 벨져 홀든은 애인 한 사람쯤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못해 그를 위해 구단까지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울화가 치밀어올라 벨져는 아까 접어든 카드를 꺼냈다.
“그래도 뭐, 시험 삼아 한 번 전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방송중이라고 전화를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벨져는 다시 한 번 웃으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 시작 전에 꺼둔 전원을 넣고 잠깐 흘러가는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는데 손에 든 핸드폰에서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벨져는 핸드폰을 들어보이며 피식 웃었다.
“또, 우리 루이스씨가 양반은 못 되네요.”
“아! 루이스씨한테 전화가 온 겁니까!”
“받겠습니다.”
벨져는 셔츠에 찬 마이크를 약간 당기고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자마자 여태 속을 썩인 못난 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아직 안 들어갔어? 다행이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클레어가 눈을 반짝였다. 평소 프로즌의 팬이라던 그녀니 당연하지만,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루이스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긴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어. 너는.”
“나? 이제 생방 끝났는데 완전 정신 없었어.... 너는 언제 끝나? 데리러 갈까?”
“지금 촬영중이다.”
벨져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침묵 속에 감도는 당황과 혼란이 여기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약간의 투정과, 늘어지는 말끝에서 풍기는 그 나름의 애교에 결국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루이스?”
“야, 이...!”
“루이스씨! 안녕하세요!”
“아, 어.... 안녕하세요! 아 근데 이거 방송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루이스의 맹한 대답에 스튜디오에 웃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 루이스의 황망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벨져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고, 진행자가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앞서 벨져씨가 두분의 동거생활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셨는데요, 평소에 벨져씨가 요리를 자주 해주시는 편인가요?”
“아, 그게 좀 허세가 든 방송용....”
“뭐?”
“네, 자주 해주죠. 오늘 셰프님들이 벨져씨의 입맛에 맞춰주시느라 힘드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짓말 아니구 벨져 요리 되게 잘해요.”
“그렇군요! 허세가 좀 들었지만 그래도 맛은 있다?”
짓궂은 질문에 루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참 벨져씨도 그렇고, 서로를 감싸주는 두 분의 우정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언제 한 번 나오셔야죠!”
“하하, 같이 사는데 같은 냉장고로 두 번 나갈 수는 없죠. 아니면 지금 갈까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오긴 어딜 와. 집에 가!”
참다가 짧게 윽박지르자 루이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늘상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살갑게 대하며 능청스레 넘어가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그럼 저희 벨져씨한테 맛있는 거 많이 먹여주시구, 저는 집에서 본방 시청하기로 하고 여기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묘하게 피해간 루이스가 전화를 끊고 집에서 보자며 (웃음) 이모티콘을 보냈다. 아직 냉장고를 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에 벨져는 어깨에 힘을 빼며 메시지에 답장도 않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벨져가 핸드폰을 끄고 집어넣는 사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냉장고로 돌아갔다. 저들끼리 얘기를 진행하다 마침내 냉장고의 손잡이를 잡은 그들이 냉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스튜디오에 작은 탄성이 터졌다.
“이야.... 이거 여느 살림꾼 냉장고 못지 않은데요?”
“일단 굉장히 깔끔합니다. 이건 와인인가요?”
벨져는 진행자들이 꺼내든 와인 병을 보고 기억을 더듬었다. 제 술은 전부 와인 셀러에 있으니 직접 산 건 아니고, 그렇다면 루이스가 넣어둔 것일 텐데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보다는 제가 집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리된 냉장고가 배는 신경 쓰였다.
내내 방송 준비한다고 전화도 안 받더니, 냉장고 정리용기에 정리해놓은 거며 유리병, 플라스틱 통, 냉장고 주인인 벨져조차 꺼내 봐야 알아볼 비닐팩에 유통기한과 내용물이 라벨지에 곱게 적혀있었다. 멀리서 흘긋 봐도 선명한 루이스의 글씨에 잠시 품고 있던 감정이 녹아내렸다.
“글쎄요. 제 건 아닙니다.”
“이렇게 두 분의 사생활이 탄로나나요! 이게 동거인한테 주긴 아까운.... 그.... 벨져씨가 집을 비울 때 마시려고 넣어둔 게 아닐까요. 혹시 짐작가는 게 있습니까!”
노골적인 떠보기에 벨져는 애매한 미소와 함께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 숨겨둔 연인이 있느냐, 묻는 것이지만 그 연인이 다름 아닌 벨져 홀든 그 자신이라는 건 아무리 당당한 벨져라도 대답하기 곤란했다.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후환은 두렵다. 벨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중에 루이스씨가 나오면 물어보시죠.”
“아, 이렇게 피하시는군요! 이 아름다운 우정!”
“아무래도 오래 됐으니까요.”
“또 이렇게 마음이 맞는 친구끼리 사는 것도 로망이 있죠.”
“아무렴 이렇게 같이 살면 집에 여자는 안 데리고 오게 되는 게 또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냉장고를 뒤지다 말고 주거니 받거니 저들끼리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늘어놓던 두 사람이 허허 웃고, 아까 벨져의 편을 들었던 셰프가 벨져의 눈치를 봤다. 데이트할 때 자주 가고, 그 역시도 스트레이트가 아니었으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저 와인 되게 구하기 힘든 거예요.”
“아, 그런가요?”
“제가 되게 좋아하는 브랜드의 샴페인인데, 저게 지금 딱 27년된 거거든요. 진짜 구하기 힘든 거예요.”
27년. 벨져는 들어있던 와인의 정체를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연말도 연초도 아니니 루이스가 선물받은 와인인 게 분명했다.
“아, 그리고 이건.... 같이 먹는 건가요?”
“그것도 선물 받은 겁니다. 루이스씨가 여기저기서 받아오는 게 많죠.”
“인기인이군요?”
“뭐, 그래도 나쁜 친구는 아니니까요. 밤마다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야, 밤마다.... 외박을 자주 하는 편인가요?”
“아뇨. 잠은 꼭 집에 와서 잡니다.”
루이스의 신상 캐묻기가 되어가는 흐름에 벨져는 한 팔로 턱을 괬다. 루이스가 보고 싶다. 냉장고 따위 평소대로 해놔도 괜찮으니 어제 영상통화나 조금 더 길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산 지 반십년이 다 되어가도 루이스의 세심함은 어딘가 모르게 벨져의 핀트를 어긋나곤 했다. 자상하고 세심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다른 것보다 제게 신경을 써주었음 하는 마음을 토로해도 그때 뿐.
벨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리는 동시에 냉장고 탐색이 끝나고, 진행자들이 오늘의 요리 주제를 발표했다.
“이야, 범상치 않습니다! 밤에 먹어도 부담 없는 한 끼 식사는 그렇다 치고, 건강한 정크푸드는 대체 뭐죠?!”
“저는 제 입에 들어가는 이상 좋은 재료에 건강과 맛을 둘 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그야 그렇죠. 그런데 이건....”
“전 제 취향에 맞게 해먹을 수 있으니까요. 맛있는 걸 해줘도 안 먹고 햄버거같은 걸 찾는 누구씨를 위한 절충안입니다.”
셰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벨져는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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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Valentine's Day
* 둘 다 은퇴하고 사귀기 시작한 후입니다
** 발렌타인은 지나지 않았습니다 벤쿠버시간으로 아직 2월 14일 오후 9시입니다 저는 늦지 않습니다 저는 날짜를 넘기지 않앗습니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연인들의 날. 루이스는 웬일로 운전대를 잡은 벨져를 잠이 덜 깨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벨져.”
“깼군.”
흘긋 적선하듯 시선을 준 벨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꿈이 아닌지 눈앞의 풍경은 변하지않았다. 루이스는 잠시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벨져의 옆얼굴을 쳐다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우리 어디 가?”
“더 자라.”
“납치야?”
분명 눈 뜨기 전까지만 해도 푹신한 침대 위였는데 무릎을 덮은 담요며 한껏 뒤로 젖혀놓은 조수석 의자가 웬말인가. 루이스는 벨져를 올려다보며 무거운 눈을 깜박였다.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머리를 쓸었다. 텅 빈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포르쉐의 조수석 승차감은 끝내주게 좋았고, 벨져의 손은 딱 좋은 정도로 따뜻했다.
그 손이 머리를 쓰다듬다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 끝으로 비비며 내려와 루이스의 눈 위를 덮었다. 따스한 손바닥이 이끄는대로 눈꺼풀을 내린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가 벨져 홀든 아니랄까봐 연인의 날 한 번 거하게 치를 모양이었다. 그래도 루이스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루이스의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마침내 벨져 홀든이 기나긴 무자각의 터널을 빠져나와 현재에 이른 지금 이번 발렌타인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맞는 연인의 날이었다. 그러니까 챙기고 싶었겠지. 로맨틱과 분위기를 목숨처럼 여기는 벨져니 당연했다.
“나 잔다....”
벨져의 손이 얼굴에서 떨어지고, 루이스는 포개놓은 손의 반지를 만지며 도로 눈을 감았다.
* * *
이마를 쓰다듬는 간지러운 손길에 눈을 뜨자 벨져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 보는 얼굴이지만, 언제 봐도 예쁜 얼굴이라 루이스는 나른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싸고, 당기는대로 끌려오는 벨져에게 입술을 내밀자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다가온 벨져가 입술을 포갰다. 입술이 벌어지며 새는 나른한 숨. 몇 번만에 젖은 입술로 벨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떨어진 루이스는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며 끝까지 밀어놓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래서, 어디야?”
“네 눈으로 봐라. 내려.”
루이스는 먼저 내리는 벨져를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차 문을 열었다. 밀려들어오는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며 양팔로 몸을 감싸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펼쳐졌다. 잘 꾸며놓은 나무 펜스에 기대어 바다를 보다가 어깨를 덮는 코트에 웃음이 샜다.
“뭐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거냐.”
“글쎄.”
벨져가 뾰루퉁하니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게 또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루이스는 벨져의 입술에 쪽 가볍게 뽀뽀했다. 빙그레 웃자 벨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쁘다.”
“올라가서 보면 더 예쁠 거다.”
“아니, 바다 말고.”
루이스는 벨져의 손끝을 가볍게 잡고 눈꼬리를 휘었다. 전부 말하지 않아도 말뜻을 알아들은 벨져의 표정이 풀어졌다. 좋으면서 아닌 척, 독기도 뭐도 하나 없는 눈으로 흘겨봐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루이스는 웃으며 벨져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벨져가 기겁하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게 어딜 만져!”
“닳지도 않는 거 좀 만지면 어때서.”
벨져가 입을 벙긋거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게 꼭 영상화보같아 가만히 바라보던 루이스는 난간에 팔꿈치를 올렸다. 이마를 짚은 벨져의 왼손 약지에 빛나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방송인이라는 녀석이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왜, 아무도 없잖아.”
“네 눈은 무슨 옹이구멍이냐.”
벨져가 고개를 돌려 턱끝으로 뒤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바다를 바로 앞에 둔 예쁜 카페. 루이스는 창가를 올려다보고 벨져에게 시선을 돌렸다. 벨져는 코트깃을 매만지며 손을 잡아이끌었다.
“방금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난 괜찮다.”
“뭐야, 그게.”
이상한 논리에 웃음을 터트리자 카페 계단을 오르던 벨져가 고개를 돌려 쪽, 입술을 훔쳤다. 그리곤 주변을 돌아보고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러게 왜 방송을 하겠다고 해서.”
“미안.”
루이스는 벨져의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며 발뒤꿈치를 들었다. 한 계단 위의 벨져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귀기 전에도 수없이 했던 뽀뽀지만 지금은 의미가 달랐다. 전에는 카메라 앞에서 뽀뽀를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고작 입술을 포갰다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벨져의 뺨을 가볍게 잡아 가볍게 뽀뽀하는 걸 끝으로 떨어진 루이스는 이제야 천천히 눈을 뜨는 연인에게 미소지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 깊게 그림자가 지는 속눈썹이 아찔했다.
“미련하긴.”
한 번 더, 기어이 자기 좋을대로 입을 맞춘 벨져가 오만한 미소와 함께 계단을 마저 올랐다.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벨져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오는 내내 잤다고 하지만 차 안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드했다. 목을 돌리자 나는 뿌드득 소리에 어깨를 돌리며 올라가자 창틀 안에 방금 본 바다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겼다.
“예쁘다.”
“안다.”
“너 말고.”
벨져가 대번에 눈을 흘겼다. 루이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메뉴판으로 눈을 돌렸다. 어차피 메뉴는 아메리카노로 정해져있지만 벨져가 사납게 눈꼬리를 올리는 게 참 예쁘고 귀여워서 매번 제 무덤 파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물론 너도 예쁘지.”
“됐다.”
“삐졌어?”
“삐지긴.”
루이스는 메뉴판을 벨져에게 돌려주며 테이블에 턱을 괬다. 벨져가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마치고 단 둘이 된 루이스는 벨져의 손 위에 손을 얹어 약지에 낀 벨져의 반지를 매만졌다.
“왜.”
“아니, 그냥. 새삼스러워서.”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벨져의 손이 루이스의 손을 덮었다. 꼼짝없이 잡힌 루이스는 고개를 들었다. 보석보다 예쁜 벨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손등을 덮은 벨져의 손이 손가락끝을 잡더니 벨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잡은 손을 부드럽게 당기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사르르 눈을 감는데 확 열이 번졌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작게 웃으며 새어나온 숨이 손등을 간질였다. 손을 빼려 해도 벨져는 놔주질 않았고, 루이스는 항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훗. 귀엽긴.”
“하여간 다 네멋대로지.”
“왜, 좋아하지 않나?”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벨져를 가만히 쳐다봤다. 다 이겼다는 듯 웃고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홱 고개를 돌리니 잡은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깍지를 끼는데, 또 거기에 홀랑 넘어가버리는 자신이 미웠다.
“싫어?”
“그건 반칙이야.”
“사랑에 반칙이 어디 있나.”
“지금 네가 하고 있어.”
벨져는 그마저도 가소롭다는 듯 웃어넘기며 다시 한 번 루이스의 손등에 입맞췄다. 사랑은 먼저 반한 쪽이 지는 거라는데 왜 항상 지는 기분일까. 루이스는 안 잡힌 손으로 턱을 괘고 벨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자상한 벨져의 눈빛에 루이스는 다리를 꼬았다. 타는 목마름에 힘겨워하던 게 얼마나 됐다고, 넘칠 정도의 애정에 이젠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누가 알았으랴, 짝사랑보다 더한 게 연애일줄.
“됐어.”
“삐졌나?”
“그래, 삐졌다.”
때마침 종업원이 다가오면서 루이스는 냉큼 벨져의 손에 잡혀있던 손을 뺐다. 조금 전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게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벨져는 손을 빼도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루이스의 아메리카노와 벨져의 차를 내려놓은 종업원이 벨져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루이스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의 바다로 눈을 돌렸다.
차가운 잔을 만졌던 손이 차갑고, 살짝 열이 오른 뺨이 뜨거웠다. 아직 2월이라 그런지 바다의 파도가 거셌다. 파도를 보며 열기를 가라앉히는데 벨져가 톡톡, 다리를 건드렸다. 말로 부를 것이지, 하여간 이 도련님은 다른 사람이라면 기분 나빠할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놓고 다.
고개를 돌리자 묘하게 조금 전보다 더 기분이 좋아보이는 벨져가 찻잔의 손잡이 부분을 루이스쪽으로 돌려 밀었다. 벨져의 차를 받은 루이스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이건 뭐야? 향 좋다.”
한참을 뜸들이던 벨져가 피식 웃고는 같이 시킨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내밀었다. 아무리 밖에서 보이지 않는 자리라지만 남자 둘이 카페에서 디저트를 시켜놓고 떠먹여준다니. 남이 볼까 민망해 고개를 도리저으며 몸을 뒤로 뺐지만 벨져는 단호했다.
“어서.”
“...해달라고 하지 마.”
언제나 결국 뜻한 바를 이루는 벨져 홀든이었다. 루이스는 얌전히 입을 벌려 벨져가 내민 케이크 조각을 받아먹었다.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이 입 안에서 녹았다. 단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녀석이 웬일로 초콜릿 케이크를 다 시켰는지 잠시 생각하던 루이스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새삼 깨닫고 아메리카노와 함께 케이크를 넘겼다.
“이게 다야?”
“그러는 넌?”
“글쎄. 넌 뭐 하고 싶은데?”
“공개 연애.”
“그거 말고.”
루이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벨져는 여태껏 잘만 뽀뽀하고 끌어안고 다했으면서 왜 그거 하나 못해주냐고 불만이 많았지만 이것만큼은 루이스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기는 괜찮다고 해도, 홀든의 둘째 도련님이 게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둘 다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안 그래도 스캔들나는데 둘 다 게이라고 하면 기자들이 사냥개처럼 달려들걸.”
“지금도 그 스캔들 막느라 힘들다만.”
힘들다고 하는 것치고 벨져의 얼굴이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쁘지 않다기 보다, 뭔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이다. 루이스는 이 남자가 이번엔 또 무슨 이벤트를 준비해놓고 저를 기다리는지 예상답안을 추리다가,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여기 케이크 맛있다.”
“많이 먹어라.”
“자, 아.”
루이스는 벨져의 입을 막기 위해 케이크 조각을 잘라 내밀었다. 초콜릿을 좋아도 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입을 벌리는 게 얄미워 벨져의 입으로 향하던 포크를 돌려 제 입에 넣었다. 벨져가 눈을 가늘게 흘기며 도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유치하긴.”
“몰랐어?”
“알고는 있었다만.”
“그럼 예상을 했어야지.”
“앞으로는 감안하겠다.”
벨져는 코트를 정리하곤 차를 홀짝였다. 정말 이렇게 입만 다물고 있으면 행동 하나하나가 화보인데, 왜 입만 열면 이 모양이 될까.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포크로 케이크를 잘랐다.
“자.”
“안 속아.”
“진짜야. 싫으면 말고.”
관심 없는 척 하더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얌전히 입을 벌리는 게 예뻐서, 루이스는 포크 대신 입술을 내밀었다. 쪽,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자 놀란 벨져가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미안. 이제 진짜.”
웃으며 케이크를 내밀자 벨져가 포크를 쥔 손을 쥐고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 와중에도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매서웠다.
“진짜라니까.”
“첫 발렌타인데이다. 망치고 싶지 않아.”
벨져답지 않게 진지한 투정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벨져와 그런 무드는 약에 쓸래도 찾기 힘든 루이스. 둘이 기념일이면 사랑을 속삭이는 대신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래도 전여친이랑 사귈 땐 이렇진 않았는데, 친구로 지낸 날이 많아서인지 왠지 모르게 벨져 앞에선 로맨틱한 말도 분위기도 다 낯설었다.
“그거 알아?”
“뭐.”
“오늘 마틴 생일인거.”
“루이스.”
“그런 얘기 아니야. 그냥, 기념일이 생일인 사람들은 어떨까 싶어서.”
마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벨져가 표정을 굳히며 팔짱을 꼈다. 황색 경보 발령. 기분이 언짢으시니 바로 풀어드릴 것. 루이스는 머릿속에 울리는 경보에 냉큼 말을 돌렸다.
“우리 다음엔 어디가?”
“몰라.”
삐졌다.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도 퉁명스럽게 나오는 걸 봐선 뽀뽀 몇 번으로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루이스는 카페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는 벨져를 보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나 잠깐 화장실.”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벨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껏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서 하루동안 전세를 낸 것까진 좋았는데,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녀석을 납치하듯 조수석에 태우고 달릴 때만 해도 두근거렸는데 왜 또 이 모양 이 꼴인지. 머리를 헤집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르며 벨져는 창 밖의 바다를 바라봤다.
발렌타인 데이란 모름지기 연인들의 날이고, 그러니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귄다고 얘기도 하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내 사람이라고 말도 하고 싶은 건데 하나같이 안 된다고만 하는 루이스가 야속했다. 아까 반응을 봐선 오늘이 발렌타인인 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러니 당연히 선물이나 이벤트를 준비했을 리 없었다.
늘 그렇듯이, 애태우는 건 저 혼자라는 생각에 속이 탔다. 다정하고 자상하기로 치면 숙소생활을 하던 그 때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벨져는 루이스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탄 속에 냉수가 들어가니 좀 살 것도 같았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에 벨져는 밖을 기웃거렸지만 벨져가 앉은 자리에선 목소리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음. 이거 되게 오랜만인데. 그래도 한 번 해보겠습니다. 부족해도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언제 또 기타를 들었는지, 맑은 기타 소리에 벨져는 어깨에 힘을 빼며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댔다. 잔잔한 기타 반주에 사랑을 속삭이는 가사. 노래가사처럼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벨져는 루이스를 보러 나가는 대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차피 카페 안엔 직원들과 자신뿐이었고, 즐길 땐 확실하게 즐기는 게 좋았다.
프로즌이 은퇴하기 전, 그러니까 숙소 생활을 하던 시절엔 그렇게 조르고 협박을 해도 안 하던 노래를 뜸 한 번 안 들이고 하는 건 그 나름의 연인 한정 애정표현이었다. 돌아가면 괜찮은 기타를 한 대 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제게 바치는 세레나데는 마리아쥬의 웨딩임페리얼보다 더 향기롭고 감미로웠다.
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를 내려놓는 소리에 이어 루이스가 돌아와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좀 봐주지.”
“잘 들었다.”
루이스가 싱긋 웃고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칭찬해달라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같은 모습에 벨져는 손목에 찬 시계부터 확인했다. 조금 이르지만 체크인부터 해놓고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어나.”
“아직 다 안 먹었는데.”
루이스는 말만 그렇게 하고 벗어놓은 코트를 집어들었다. 평소에도 이정도만 고분고분하게 따라주면 좋을 텐데.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포석을 깐 보람이 있었다. 카페를 나온 벨져는 세워둔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았다. 루이스를 전용 기사로 부린 지도 어언 반십년이지만 오늘은 데이트 코스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벨져가 시동을 걸도록 밖에서 미적거리던 루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웬일이래. 운전을 다 하고.”
벨져는 구태여 이유를 말하는 대신 조수석에 앉은 루이스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달칵, 고정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자 입술을 맞춘 루이스가 씩 웃었다. 그리곤 뺨을 잡아 고개를 살짝 기울여 눈을 감으며 다가오는데, 거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입을 열자 혀가 닿고, 달근하고 물컹한 무언가가 넘어왔다. 밀어내려 해도 혀를 감으며 뺨을 꽉 잡는 바람에 도망갈 곳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루이스의 허리를 잡았던 벨져는 혀와 혀가 얽히고 감기며 녹는 게 달고 쌉쌀한 초콜릿이란 걸 깨닫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해피 발렌타인. 놀랐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루이스의 입가에 초콜릿이 묻어있었다. 답지 않게 귀여운 짓을 한다 싶어 옆구리를 쿡 찌르자 루이스가 몸을 웅크렸다.
“뭘 그렇게 부스럭거리나 했더니.”
“별로였어?”
“뭐, 나쁘진 않았다.”
“다행이네. 주머니 가득 초콜릿이거든.”
불룩한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한 줌 꺼내더니 그대로 쥐고 흔들며 웃는 루이스가 귀여웠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에서 초콜릿 하나를 뺏어 입에 쏙 넣었다.
“단 거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얼릉.”
어떻게 이걸 입에 넣고 어떻게 말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발음이 뭉개졌다. 소년처럼 맑게 웃으며 다가온 루이스가 목에 팔을 감으며 눈을 감았다. 입 안에서 녹는 초콜릿이 끈적하고, 달았다. 미각이 마비되는 것 같은 단 맛은 취향이 아니지만 달디 단 키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떠넘기려 해도 초콜릿을 혀 위에 두고 꾹 누르는 루이스의 장난에 마른 허리와 옆구리를 문지르는 것으로 응수하자 루이스가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키스하는 중에 그러는 게 어디있어.”
“네가 먼저 시작했다.”
“야, 난 입 안에서 놀았지.”
루이스가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투덜거렸다. 그 사이에 초콜릿이 다 녹아 입안이 텁텁해진 벨져는 루이스의 목에 팔을 감아 그대로 끌어당겼다.
“사랑한다.”
“.......”
장난기가 가득했던 눈동자가 움찔하더니 그대로 눈을 깜빡이다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려 도망갔다.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워 슬며시 웃으며 흰 목에 입맞추자 루이스가 다급하게 팔을 잡았다. 벨져는 루이스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따뜻한 허리를 어루만지자 루이스의 몸이 굳었다.
“잠깐. 아니, 그러니까....”
“사랑해.”
“윽, 그래도 차 안에선 안 돼!”
“왜지?”
“왜냐니!”
노을이 번진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루이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바라보자 입만 벙긋거리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는데, 좀처럼 보이지 않는 반응이 신선했다.
“썬팅 다 해서 밖에서 안 보인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럼?”
다시 한 번, 루이스의 말문이 막혔다. 벨져는 루이스가 좋아하는 얼굴을 십분 활용하기로 마음 먹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나?”
“...그야....”
꼴에 한 살 연상에, 연애 경험도 사회 경험도 많다고 여유를 부리던 루이스가 부끄러워하는 게 꽤 흡족했다. 벨져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눈도 못 마주치고 시선을 피하는 루이스라니, 이 이상 즐거울 수가 없었다.
“차에서 하면! 환기도 안 되고! 시트 청소하기도 힘들고! 계속 생각날 텐데!”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리는 안 귀여운 소리에 벨져는 조수석 의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정색했다. 그야 물론 환기도 어렵고 청소도 힘들겠지만, 그걸 이유로 드는 건 말이 안 됐다. 잠시 루이스의 말을 곱씹던 벨져는 반 박자 늦게 루이스가 극구 반대하는 의미와 붉어진 얼굴의 의미를 깨닫고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하아. 그러니까, 그게....”
“그래. 차에 탈 때마다 섹스하고 싶어질 것 같다는거군.”
“미친...!”
“그래. 잘 알겠다. 감안하지.”
벨져는 자상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갔다. 한껏 몸을 문쪽으로 붙이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눈을 질끈 감은 게 꼭 순결을 뺏기지 않으려 필사적인 모양새였다. 벨져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누르고 쪽,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대로 굳어있는 루이스를 내버려두고 조수석 의자를 잡고 뒤를 보며 주차해둔 차를 뺐다. 무언가 더 이어질 거라 예상하고 있던 루이스는 차가 움직이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왜 그만뒀는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벨져는 루이스의 시선에 답하지 않았다. 별다를 것 없는 뽀뽀에도 눈을 꼭 감고 있는 게 귀엽기도 했고, 괜히 제 욕심을 앞세워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한적한 도로 위를 달렸다. 루이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어쩌다 너랑 이렇게 됐을까 싶어서.”
“흐응.”
루이스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지쳤음을 토로하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루이스가 카섹스를 거부하는 이유를 안 것만으로 오늘의 수확은 충분했다.
“그래서, 진짜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나.”
“지금 하고 있다.”
“데이트는 맨날 하는 거잖아. 그거 말고.”
“또 까먹고 미안하다고 할 거면 하지 마라.”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쏘아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루이스가 미안해하는 걸 알고 있는데 괜히 아픈 구석을 건드린 것 같아 슬쩍 눈치를 살피니 예상대로 상처받은 얼굴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그냥 해본 말이다.”
“아냐.”
“루이스.”
“내가 죄인이지 뭐.”
또, 같은 패턴이다. 벨져는 차를 세우려다 액셀을 밟았다. 이렇게 된 이상 중간에 레스토랑도 바다도 다 패스하고 호텔로 직진이다. 이럴 때 어떻게 수습해본답시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할수록 어그러지고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는 건 이미 수 차례 반복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적막이 깊어지는 차는 텅 빈 도로를 달려 예약해둔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오는 내내 마음을 좀 가라앉혔는지, 루이스의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직 다섯시밖에 안 됐지만 루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 아슬아슬한 침묵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 벨져는 차에서 내려 문을 잠그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차라리 싸우면 섹스하면서 풀기라도 하지, 이렇게 토라진 루이스를 달래고 제 잘못을 사과하는 건 아직도 힘들었다. 그깟 말 한 마디가 뭐 그렇게 힘드냐고 생각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때 뿐이었다. 벨져는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하면서 멀찍이 떨어져있는 루이스를 흘긋거렸다. 제가 보지 않는 데서 축 쳐진 얼굴을 하고 있는 루이스때문에 양심이 따끔거렸다.
루이스는 제 눈치를 살피기 바쁜 벨져에게 등을 돌렸다. 기분이 안 상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못 넘길 것도 아니었다. 제멋대로에, 오만하고 저만 아는 도련님이긴 하지만 벨져는 기본적으로 제 사람에겐 무른 사람이었다. 그게 루이스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천하의 벨져 홀든을 전전긍긍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게 뿌듯하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론 미안하기도 해서, 루이스는 청승은 이쯤하기로 하고 초콜릿을 하나 까 입 안에 넣었다.
어쩌랴, 미우나 고우나 사랑하는 건 변함이 없는데. 루이스는 연인의 날을 고대하고 있던 벨져에게 맞춰주기로 결심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벨져에게 다가가자 눈치를 보던 벨져가 슬그머니 손끝을 잡았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루이스는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하고 싶은 거 있었는데.”
“뭐?”
루이스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그의 어깨를 잡아 벽에 밀치며 입술을 겹쳤다. 입술로 입술을 물었다 놓고 떨어지길 세 번. 촉촉촉 물기 어린 사랑스러운 소리에 루이스는 감았던 눈을 떠 벨져를 바라봤다.
“호텔방에서.”
쪽. 입술을 포개며 눈웃음 한 번.
“맨몸으로 부비적거리면서,”
어깨를 잡았던 손을 뻗어 목을 감싸안으며 다시 한 번 입을 맞춘 루이스는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오전 내내 늑장부리는거야.”
“...나쁘지 않군.”
푸흐흐, 웃음이 샜다. 덩달아 풀어진 벨져가 웃으며 이마를 맞댔다. 본인은 자각이 없겠지만, 내내 마음을 졸인 게 보여 미안했다.
“왜 우리는 매번 후회할 짓을 해놓고 미안해할까.”
“우리라니. 너겠지.”
“하하, 그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루이스는 벨져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맞는 첫 발렌타인은, 아무래도 침대 위에서 보내게 될 것 같았다. 루이스는 카드키에 문이 열리자마자 키스하며 허리를 감싸안는 벨져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억지를 부리고 싸우고 서운하게 만들어도 좋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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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챙겨주려다가 운명을 발견햇습니다 빰
다음편은 벨져 생일에...
“형들, 대회 일정 나왔다!”
“응. 지금 보고 있어.”
이글의 우렁찬 목소리에 일어나자마자 꼭 붙어앉아 아이패드를 보고 있던 덩어리 중 하나가 대답했다. 하여간 자리도 넓은데 왜 저러고 있담. 이글은 입을 비죽 내밀며 벨져에게 안기다시피 기대있는 루이스의 옆에 앉았다. 루이스를 끌어안고 패드를 만지던 벨져가 화면을 보다 입을 열었다.
“이대로면 네 생일에 결승을 하겠군.”
“그 전에 네 생일에 4강을 하겠지.”
“그거야 당연히 이길 테니까.”
루이스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옆에서 이글이 질색을 했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루이스는 이글의 다리를 두드리며 이해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 잠깐도 뺏기기 싫은지 바로 벨져가 목에 감고 있던 팔을 당겼다. 목이 졸리는 대신 벨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를 올려다보자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대진표를 확인한다. 루이스는 벨져의 아이패드를 꺼버렸다.
“뭐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거 없어?”
“그냥 늬들은 서로를 줘라. 줘. 노예권.”
“니들이라니. 이글.”
“에휴, 난 줄 거 없다! 형들 알아서 해!”
선물 얘기가 나오자마자 냉큼 달아나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이글을 보다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 루이스와 벨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 기대도 안 했지만....”
“저 새끼는 평생 저럴 거다.”
“그래서, 너는 뭐 생각해놓은 거 있어?”
“딱히 없다만.”
루이스는 벨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벨져의 눈길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노예권 줄까?”
“미쳤냐.”
“아니면 뽀뽀쿠폰같은 거?”
“......이글이 옮았군.”
“걔가 무슨 병균이냐.”
피식 웃으며 말하자 벨져가 혀를 차며 목에 둘렀던 팔을 내려 허리를 끌어안았다. 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준다고 해도 과연 벨져 홀든의 눈에 찰까 싶지만 그래도 생일이니만큼 뭔가 해주고 싶었다. 루이스는 벨져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떠올렸다. 같이 산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벨져는 어려웠다. 비싼 고급 크리스탈 잔 같은 녀석이라 무디기 짝이 없는 센스의 루이스에게 벨져 홀든의 생일선물은 난제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축에 속했다.
“글쎄, 물질적인 건 별로.”
“그래.”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는 세상이 비슷할 때나 통하는 얘기다. 벨져가 수실로 옷장에 채워넣는 옷만 해도 그렇다. 루이스가 생각하는 옷값에 0을 몇 개를 더 붙여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돈으로 구할 수도 없는 한정판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방 안에 즐비했다.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숙소 생활을 시작한 몇 주동안은 벨져의 물건과 자신의 물건을 구분하다 못해 가격부터 생각하던 루이스였다.
“경기 끝나고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회식 하고 바로 연습하겠지.”
“그러게....”
벨져가 시선을 내렸다. 영 좋지 않은 표정에 뭐 문제라도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벨져가 푹 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글 녀석의 멍청함이 옮았나.”
“.......”
루이스는 눈을 깜박였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가 예뻐서, 흰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런 척 해도 엄청 좋아한다니깐. 피식 웃으며 아예 벨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아이패드를 내려놓은 벨져가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넌. 뭐 갖고 싶은 거.”
“없는데.”
쯧. 또 혀를 찬다. 루이스는 예상한 반응에 가늘게 웃으며 벨져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사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다이무스의 자리를 대신해 새로 영입한 탱커와 조합을 맞추고 본선 경기를 연습해야 하는데 꼼짝도 하기 싫었다. 벨져의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넣자 벨져가 가슴을 두드리며 자지 말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눈을 감아버렸다.
“방금 일어나놓고 또 자냐.”
“안 자.”
“결승 끝나면 휴가니까 어디라도 가던지.”
“둘이?”
“주렁주렁 다 달고 가면 제대로 쉬겠냐.”
난 좋은데. 네가 둘이 가고 싶은 거겠지.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여행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휴가라고 하면 그냥 집에서 늘어지게 쉬는 게 훨씬 좋지만 벨져는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드라이브를 하면서 바람을 쐬야하고, 밥도 그냥 한 끼 때우는 게 아니라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우선은 결승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벨져와 제 생일 사이엔 딱 15일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결승은 일요일, 본선은 토요일에 하는 경기 일정 상 8강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벨져의 생일에 4강전을 하는 거야 정해진 수순이었다. 더구나 이번 상대는 유독 홀든A에게 약한 서포터 위주의 신생팀이었고, 사실상 홀든 A는 결승까지 수월하게 가지 않겠는냐는 게 대세적인 여론이었다.
“이대로 올라가면 또 그랑플람이랑 만나겠네.”
“콩라인으로 굳혀줘야지.”
“너만 잘 하면 돼....”
“내가 못한다는 소린가?”
“아.”
루이스는 잘못 속내를 말해버린 것처럼 입을 가렸다. 가슴을 아프지 않게 치는 벨져가 입술을 비죽인다. 삐진 게 귀여워서 이렇게 장난을 치고 마는 걸 알까. 알면 이럴 리가 없지. 키득거리며 미안하다고 말하자 깍지 낀 손을 놓고 내려놓았던 아이패드를 든다. 너 그거 떨어뜨리면 나 오늘 연습 못해. 벨져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가 때 다른 약속 잡지 마. 이번에도 파토내면 앞으로 네 얼굴 안본다.”
“그럼 그랑플람으로 옮겨야겠네.”
벨져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린다. 이러다 진짜 토라질 기세라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목을 뒤로 빼며 한 번 튕기다가 결국은 뺨을 내준다. 늘 관리를 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등을 간질였다.
“농담이야.”
루이스는 벨져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엄지로 뺨을 찬찬히 매만졌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벨져의 눈에 힘이 풀린다. 그 모습이 좋아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자 벨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당연히 입술을 맞추겠거니 싶어 눈을 감았는데도 반응이 없다. 슬며시 눈을 떠볼까 하는데 코를 잡혔다.
“아아아, 미안!”
루이스는 코를 비트는 고통에 벌떡 일어났다. 코를 잡고 눈을 흘기니 벨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흥. 덤빌 구석을 보고 덤벼야지.”
“...너 내가 너보다 형이란 건 아예 안중에도 없지?”
“고작 한 살 가지고.”
“아, 몰라몰라. 넌 생일 선물 취소야.”
벨져를 내버려두고 소파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뭐 그런 게 있냐는 둥 어이 없어하는 벨져를 두고 식탁 의자에 대충 걸어놨던 잠바를 집어들었다. 족히 두 사이즈는 큰 잠바는 원래 다이무스의 것이지만 다이무스가 은퇴하면서 자연스레 루이스의 소유가 됐다. 딱히 탐이 났던 게 아니라, 자기 옷과 헷갈려서 자주 입고 다닌 것 뿐이지만 어쨌거나 다른 건 다 사무실에 돌려놓은 다이무스가 오더의 역할과 함께 루이스에게 준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야!”
“나 먼저 간다!”
물론 벨져는 그런 거에 의미를 붙이는 게 오글거리지도 않냐며 질색을 했지만. 루이스는 벨져의 외침을 무시하고 이글과 토마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충 슬리퍼를 신고 문을 열면 결국 벨져가 몸을 일으킨다. 비척비척 토마스의 손에 이끌려 나온 이글도 춥다면서도 슬리퍼를 꿰찼다.
“아이작씨는?”
“아까 먼저 나가셨어요.”
“으아, 춥다. 으으으.”
“아, 형!”
“오늘은~ 우리 토마스가~ 몇 쓰레기나 당할까요~?”
“이글 형! 형이나 잘, 으악!”
이글은 능글맞게 웃으며 토마스의 옷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 토마스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리고, 애를 놀리던 이글이 결국 벨져에게 등짝을 맞았다. 한 걸을 떨어져 걷던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글의 호들갑에 웃으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벨져의 생일까지 앞으로 한 달 남짓, 고민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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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좋은 날
홀든A팀의 팬인 클레어 설정이 들어있습니다.
접기를 열기 전에 미리 주의해주세요.
프로 은퇴 후, 동거하는 벨루.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내친집!”
“안녕하신가! 정의롭고 힘찬 오후일세!”
“로라스씨, 오늘 찾아갈 집이 아주 특별한 곳이라면서요?”
“그렇다! 오늘은 특이한 직업군에 있는 유명인 집에 찾아갈 예정이지!”
“어우,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자, 그럼 주인공을 찾아 가봅시다!”
케이블 채널의 인기프로 ‘내 친구의 집’을 진행하는 두 엠씨, 클레어와 로라스는 오늘도 활기차게 오프닝을 열었다. 오늘 찾아갈 곳은 다름 아닌 전직 프로게이머이자 현 기획사 사장 벨져 홀든의 집. 이미 수차례 팬들로부터 요청이 들어왔지만 번번이 거절당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클레어는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을 둘러보다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보이며 방긋 웃었다.
이번 촬영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클레어였다. 매번 거절당하는 피디와 작가들 대신 그 어렵다는 촬영허가를 받아낸 게 바로 그녀다. 물론 그 적극적인 태도에 사심이 들어있지 않다고는 말 못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 ‘벨져 홀든’에게 촬영허가를 받아냈다는 게 중요하지.
클레어는 잠시 이 일을 성사시켜준 베프를 떠올렸다. 촬영만 잘 끝나면 꼭 하루 데이트 풀코스를 쏘리라. 클레어는 오랜만에 만난 로라스와 담소를 나누며 차로 이동했다. 호기심 유발용 힌트 멘트를 따는 사이 차가 한 고급 아파트 앞 카페에 멈췄다.
차에서 내리기 전 화장을 고친 클레어는 차에서 내리기 전 다시 한 번 기합을 넣었다. 아자아자, 파이팅! 일이라고 하면 떨리지도 않을 텐데, 결코 팬심이 없다고 할 수 없기에 두근거렸다.
클레어는 마음을 다잡고 치마를 털었다. 분주한 카메라 감독님과 작가들 사이로 범접할 수 없는 클라스를 당당히 과시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꺄악! 클레어는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특별 공연 전후로 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커피를 마시던 벨져 홀든이 일어나 클레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감격한 팬의 마음으로 악수하고, 화장실에 갔던 로라스와 벨져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클레어는 자리에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심호흡했다. 그래도 직업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다 보니,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진행자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다보니 한껏 긴장상태였던 제작진들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클레어 특유의 발랄하고 유쾌한 리액션도 있지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선을 딱 긋고 방송을 하는 벨져의 태도도 한 몫 했다.
방송을 하기엔 편하지만, 그것뿐이다 보니 클레어는 조금 아쉬웠다. 한 사람의 팬으로선 아무래도 인간 벨져 홀든이나 쉬레가 아닌 기획사 대표 벨져 홀든 같아 들뜬 마음이 가라앉았다. 카페 안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카메라가 돌기 시작한지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벨져와 함께 아파트로 향했다.
그토록 기대하고 기다리던 집 앞, 클레어는 도어락을 가리고 문을 여는 벨져 뒤에서 심호흡했다. 모두 숨죽인 복도에 전자음만 울렸다. 일 년 전에 은퇴하고 본격적으로 방송 생활을 시작한 프로즌이 자취하던 걸 쉬레가 불러다 동거하기 시작한 게 딱 두 달 전이었다.
덕분에 팬덤은 또다시 뒤집어졌고, 클레어와 로라스가 진행하는 내친집에도 팬들의 요청이 수없이 들어왔다. 그들의 살림집이 궁금한 건 클레어도 마찬가지였고, 벨져 홀든편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이 나가자마자 화제가 된 지라 제작진도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오늘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집을 공개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떨리네요.”
벨져가 의례적인 미소와 함께 문을 열었다. 카메라가 먼저 들어가고, 클레어와 로라스도 벨져를 따라 발을 옮겼다. 전체적으로 화이트와 그레이의 심플한 인테리어가 깔끔하면서 모던했다. 오빠들 잘해놓고 사는구나. 클레어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탄하며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넓고 깔끔한 집은 남자 두 사람이 사는 것치고는 엄청나게 관리가 잘된 편이었다. 과연 벨져 홀든. 감탄하며 둘러보던 로라스가 직접 청소한 거냐고 묻자 벨져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렇지, 쉬레님께서 직접 청소를 할 리가.
클레어는 거실 소파 쿠션 사이에 자리한 아이스와 래피드의 인형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사진도, 트로피도 없이 넓기만 한 집이지만 생활감이 묻어나는 집이었다. 클레어는 두 달 전 라디오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리첼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출연한 쉬레와, 깜짝 이벤트로 전화연결을 한 프로즌. 그것만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이 미소가 번졌다.
[오늘의 사연입니다. 제목부터가 강렬해요. 익명님께서 보내주신, 쉬레님의 치명적 단점. 이거, 벨져씨가 읽어주시겠어요?]
[아무래도 내부 고발자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데요. 잡히면 죽습니다.]
[아이, 오늘은 저희 호라이즌 빛나는 밤에의 청취자분이시니까요, 잘 읽어주세요!]
[큼, 큼.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쉬레님의 오랜 팬입니다. 저희 오빠는 잘생기고, 게임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돈도 많고, 얼마나 멋진지 몰라요.]
[어우, 칭찬 일색이네요.]
[그런 저희 오빠에게도 단 한 가지 단점이 있답니다.]
[벨져씨한테 단점이요?]
[큼, 크흠. 그건 바로……. 하아. 이거 제가 계속 읽어야 하나요?]
[아이, 읽어주세요.]
[친구가 없다는 겁니다. 여자 친구도 없고, 그냥 친구도 없는 것 같아요. 맨날 보면 프로즌이랑 다니고 밖에 따로 다니는 친구가 없는 것 같아서 늘 걱정입니다. 이러다 프로즌이 결혼하면 저희 오빠는 어쩌죠? 있습니다. 친구. 있어요. 있습니다.]
[어머, 정말 벨져씨를 좋아하는 분이신가봐요. 이렇게 걱정도 해주시고.]
[후……. 쓸데없는 걱정 같은데요.]
[네에, 그럼 여기서 전화연결 해보겠습니다. 청취자분의 익명성을 위해 음성변조를 해드리겠습니다. 연결 됐나요? 익명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너, 누구냐.]
[오빠……. 제가요……. 오빠 장가는 언제 갈까 걱정이 많아요…….]
[어우, 벨져씨랑 친하신 분인가봐요.]
[저 친구 있습니다. 누구신지 모르겠는데. 이글이니?]
[오빠…….]
[야!!! 야익…….!]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왜 익명 보장을 안 해줘요. 첫마디 떼는데 바로 이렇게 음성변조 빼고. 밑장빼기 있습니까?]
[하하하, 아무래도 저희 음향감독님이 실수를 하신 것 같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자기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너 죽는다?]
[네 안녕하세요, 호라이즌 빛나는 밤에 청취자 여러분. 프로즌 루이스입니다. 또 이렇게 인사를 드리네요. 모자란 점이 많지만 저희 벨져씨 잘 부탁드리구요. 다음엔 또 직접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어딜 와.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와.]
[네, 좀 있으면 벨져씨 생일이에요. 다들 축하해주시구요]
[어디야? 집이야?]
[그럼 저는 이만 자도록 하겠습니다.]
[왜 벌써 자?]
[벨져씨 조심히 들어오시구요. 리첼씨 힘들겠지만 힘내세요. 호라이즌 파이팅!]
[야!]
[벨져야 우리 팀의 이미지를 생각해.]
[팀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놈이 허구헌날 술 쳐먹고 다니고! 어?]
[어 어... 사회적인 교류는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거야.]
[교류를 인사불성으로 하냐?]
[사랑해.]
[어우, 두 분 사이가 정말 사랑이 넘치시네요. 지금 문자가 난리에요. 난리.]
[됐고, 어젠 어디서 잤어? 지금 어디야?]
[집에서 봐요 안녕 안녕 청취자여러분.]
[네, 저는 숙소입니다. 그리고 음... 우리 숙소에 아주 큰일이 생겼어요.]
[레나가 집나갔어?]
[아뇨, 우리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잠자리를 제공해주던 침대가 무너졌어요.]
[아이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ㅋㅋㅋㅋㅋㅋ]
[야 장난치지마.]
[진짜야.... 내가 뭐하러 이런 장난을 치냐. 올때 침대사와요....]
[아니, 뭐, 어쩌다가?]
[우리 집에 기르는 개 있자나. 그 머리 길고 완전 날뛰는 비글. 어, 걔가 그랬어. 우리 숙소에 와보니까 그렇게 됐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우리 비글이 침대를 뿌셔먹었구나.]
[굉장히 사람같은 비글이 있으신가봐요.]
[네, 아무래도 저희가.... 나간 사이에 이런 불상사가 벌어졌네요.]
[알았어요. 제가 집에 갈 때 꼭 침대 사갈 테니까요. 루이스씨는 그거 고친다고 한밤중에 망치 꺼내지 말고 기다려요. 알았죠?]
[와 이 가식적인 말투 봐. 누구세요? 저 제 팀메이트를 찾는데요.]
[잘해줘도 욕이냐?]
[엉 빨리 와. 내가 밥 차려놓고 기다릴게요.]
[네가 했어?]
[샀어, 샀어, 샀어.]
[알았어요. 프로즌씨, 프로즌씨 오늘도 술 먹으러 나가면 이번엔 진짜 도어락 바꿀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아, 안 나갑니다. 벨져씨가 자꾸 저한테 집착해서 걱정이 많아요. 그래도 뭐, 오늘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요.]
[알았어. 기다려.]
[응. 사랑해.]
[어, 나도.]
[와우, 정말 사랑이 넘치시네요.]
[프로즌, 루이스씨가 워낙 못난 영혼이라 제가 거둬 먹여 살려줘야죠.]
[그래도 두 분 정말 사이가 좋아보이세요. 저도 쌍둥이 언니가 있는데 이렇게 친하진 않거든요. 정말 스스럼없이 막대하고 그런 거 보니까 부럽네요.]
[그렇게 부러워하실 건 없습니다. 뭐, 그냥 데리고 사는 거죠.]
[루이스씨가 벨져씨를요?]
[아뇨, 그 반대죠.]
클레어는 다시 듣지 않아도 자동재생되는 라디오 내용을 떠올리며 웃다가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카메라의 사각에서 안면근육 운동을 했다. 두 사람의 스윗한 목소리와 생활감 넘치는 대화가 정말 좋아서 광대가 마구 올라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프로는 프로. 클레어는 로라스와 함께 맡은 바 임무에 성실하게 벨져와 루이스의 집을 훑었다. 거실에서 작업실, 그리고 웬만한 연예인 저리 가라할 정도의 드레스룸에 감탄하고 대망의 침실. 클레어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봤자 별거 없다며 낮게 웃은 벨져가 마침내 문을 열고, 낮임에도 빛 한 점 안 들어오는 깜깜한 어둠에 클레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무엇이 있는지 채 보기도 전에 앞에 서있던 벨져가 성큼 걸어갔다. 불을 켜나 했더니.
“응? 왜 커튼이.... 뭐야. 너 왜 여기있어.”
적잖이 당황한 눈치의 벨져에 클레어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복도에서 들어오는 빛에 어슴푸레 비치고 나서야 보이는 것은 넓은 방 안에 떡하니 자리한 침대와, 그 위에 앉아 이불뭉치를 살펴보는 벨져였다. 이불뭉치가 꿈틀거리고 머리가 빼꼼 튀어나왔다.
“야, 좀 일어나봐. 야.”
당황해서 커졌던 벨져의 목소리가 조금씩 다정해졌다. 촬영중인것도 잊었는지 돌아누운 루이스의 어깨쪽으로 추정되는 이불뭉치를 흔들며 고개를 숙여 속삭이는데, 그 모습이 스윗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다 뽀뽀하도 할 기세라 클레어는 눈을 크게 떴다. 스태프들도 모두 숨죽이고 점점 작아져 속삭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일 오는 거 아니었어?”
“아쫌....멍청아.... 시차....”
벨져의 끈질긴 질문 끝에 마침내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민 루이스는 한껏 얼굴을 찌푸리며 잔뜩 긁힌 목소리로 짜증을 내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벨져는 그제야 루이스에게서 떨어져 침대에서 일어났다. 완전 낭패라는 표정이었으나 차마 촬영중이니 나가라고 할 수 없었는지 클레어와 로라스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안방 문을 다시 닫았다.
“죄송합니다. 해외스케줄때문에 일정이 꼬였나봅니다.”
“아, 괜찮아요!”
“넘어가야죠 뭐.”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자 담당 피디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이곤 주방을 보여주겠다며 방송용 미소를 띠웠다. 아마 이 쯤에 편집이 들어갈 것이다. 클레어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한 주방의 모습에 감탄하고, 로라스가 요리를 즐겨하냐고 묻자 벨져는 요리사가 휴가를 가면 가끔 한다고 능청스레 대답했다.
앞에 있었던 헤프닝과 방송분량을 위해서인지 앞치마까지 찾는 그를 보며 클레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팬들이 선물해줬다며 카페 원더 코스튬의 앞치마를 찾아낸 벨져가 허리끈을 질끈 묶었다. 그 팬이 누군지 몰라도, 이 방송이 나가면 꽤나 뿌듯하리라. 그리고 벨져 홀든의 가르송 앞치마 하나에 몇 명이 행복해질지. 클레어는 너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며 포즈를 잡아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로라스가 원래 토끼 귀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을 꺼내는데 어찌나 고마운지! 클레어는 로라스를 껴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침실을 공개하지 못하는 벨져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달칵. 문이 열렸다.
“어?”
벨져에게 쏠려있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퀭한 얼굴의 루이스가 반쯤 풀린 눈으로 비척비척 주방으로 걸어오더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곤 얼이 빠져있는 벨져를 슥 쳐다봤다.
그리곤 다가와 가만 서있는 손을 뻗어 벨져의 뺨을 감싸며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쪽. 물기어린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적나라한 소리에, 눈앞에서 뭐가 벌어졌는지 순간 공황상태가 된 스태프들의 눈이 흔들렸다.
대체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정작 입을 맞춘 장본인은 경악에 빠진 사람들을 뒤로하고 자기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덜 풀린 눈으로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당황하기는 벨져도 마찬가지였는지, 화장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이 새끼야!”
“하하! 오늘도 사이가 좋군! 보기 좋은 우정일세!”
아니 대체 어느 정도로 사이가 좋으면 촬영팀도 인식 못할 정도로 비몽사몽인 사람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뽀뽀를 할 수가 있는 거죠? 클레어는 묻고 싶었으나 벨져가 머리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는 게 더 빨랐다.
“오래 같이 살다보니....”
포기했는지 벨져는 영혼이 탈곡된 표정으로 씨도 안 먹힐 변명을 힘없이 내놓았다. 워낙 순식간에 잡아채서 입술을 훔친 분이 오 년째 동거한 남자가 아니었다면 이번 주 방송은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할 판이었다. 콩깍지가 껴서 그렇지, 원래 이 오빠들은 뽀뽀가 생활이고 습관이라는 걸 떠올린 클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벨져에게 동조해주었다.
“하긴 벨져씨는 루이스씨랑 동거한지 오래되셨죠?”
“선수 생활할 때는 숙소에서 같이 살았으니. 거기다 유명한 징크스도 있으니 그렇겠지. 하하. 드렉슬러도 술을 마시면 자주 주변 사람들한테 뽀뽀를 한다네.”
“원래 자주 저럽니다. 주로 자기 내킬 때.”
“아, 그럼 오늘은...”
“자기 기분이 괜찮은 거죠.”
“하하하. 선수 생활 할 때야 같이 생활하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활동을 따로 하니까. 부딪히는 일도 많기 마련이지. 선수 생활 후에도 이렇게 잘 지내는 경우는 드물고.”
이해한다는 로라스의 말에 벨져가 싱긋 웃었다. 그리곤 화장실 문을 가리키며 혀를 끌끌 차는데, 그때 또 기가 막히게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오는 수증기와, 젖은 루이스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주방에 있는 촬영팀을 못보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는데, 들어갈 때와 달리 아래만 챙겨 입어서 새하얀 등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떨리는 마음에 클레어는 포옥 숨을 내쉬었다. 좀처럼 노출하는 법이 없는 프로즌이다. 그런데 졸지에 서비스 대방출! 그것도 카메라 앞에서! 클레어는 피디님을 꼬셔서 편집 전 필름을 꼭 복사해서 개인소장하리라 다짐했다. 이건 꼭 소장해야해! 방송인의 마음보다 팬의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럼 다시 갈까요?”
잠깐 깜짝 출연했던 루이스에게 쏠렸던 제작진의 시선이 다시 벨져에게 행했다. 프로즌 루이스도 루이스지만 시청자들에게 어필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벨져 홀든이니까. 클레어는 웃으며 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그러니까, 분명.
달칵.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만 고개가 돌아갔다. 청바지에 후드티, 가벼운 집업재킷을 걸친 루이스가 촬영팀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도 적잖이 당황한 듯 했지만 곧 침착한 얼굴로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금방 나갈게요.”
“어디 가는데!”
“밖에.”
“아, 저...!”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차키를 가지고 무심하게 손을 흔든 루이스는 그대로 현관을 향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 하고 작게 낸 목소리에 가슴이 기대감으로 콩닥거렸다.
“오랜만이네요, 클레어씨. 로라스씨도, 수고하세요.”
어쩜 우리 프로즌 선수는 피곤한 얼굴도 멋지신지...! 클레어는 잠시 카메라를 꺼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결승전 축하무대를 하러 갔다가 무대 뒤편에서 복잡한 케이블에 걸려 넘어질 뻔한 걸 잡아줬을 때도 꼭 저런 얼굴이었는데. 클레어는 잠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도리 저었다. 아무리 사랑에 빠지기 쉬운 십대 소녀라지만 그래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에는 저스티스리그의 메인 간판 클레어 스미스여야 했다.
그래도 악수 정도는 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지만 이미 닫힌 현관문을 보고 있어봤자 나간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씁쓸하게 고개를 돌리자 뚱한 표정의 벨져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무겁다. 클레어는 일부러 발랄하게 박수를 치며 묘한 기류를 환기해보았다.
“자자, 그럼 다시 힘내서 가자구요!”
“벨져군의 요리 얘기 중이었지?”
“뭐, 늘 있는 일이니까요. 신경 쓰지 마시죠. 뭐, 저 박정하고 메마른 놈의 실체를 까발리셔도 좋습니다. 하하.”
아무리 봐도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지만 그의 미소만큼은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클레어는 그를 따라 웃으며 후에 두 사람이 크게 싸우지 않기를 바랐다. 안 싸우길 바라는 건 오빠들이 늘 화목하고 화기애애하길 바라는 팬의 입장으로 생각해도 무리다. 안 그래도 허구한 날 치고 박고 싸우는데. 클레어는 아까부터 식탁 위에 있던 상자로 그의 관심을 돌려보았다. 그래도 일단은 방송중이니까.
“어머, 그런데 이건 뭐예요? 저희 주시는 선물?”
“아, 잠시만요. 우리 잠꾸러기걸수도 있는데…….”
박스와 쇼핑백을 열어본 벨져의 표정이 묘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표정에 클레어는 빼꼼 내용물을 들여다봤다. 흘긋 뭔가 보이긴 했는데, 금방 상자가 닫히는 바람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애초에 남의 물건인데다 벨져도 루이스가 사온 거라며 금방 치워버렸다. 잠시 있었던 해프닝은 그저 해프닝이라는 듯이 촬영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진행됐고 클레어는 만족스럽게 컷을 외치는 피디의 목소리에 어깨에 주고 있던 힘을 뺐다. 일이 끝나니 완전히 팬의 마음이 되어버려서, 꼭 관광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클레어! 다음 스케줄 가야지!”
“네, 가요!”
클레어는 매니저가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스태프와 로라스, 작가님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담당 피디에게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보이질 않았다.
“피디님 먼저 가셨어요?”
“아뇨. 아까 얘기하고 계시던데.”
“감사합니다!”
과연 주방 쪽으로 가니 벨져와 얘기를 나누는 피디가 보였다. 뭔가 자기들끼리 작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아 클레어는 멀찍이 떨어져서 손을 흔들었다.
“감독님! 그럼 이만 가볼게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 응. 조심히 들어가고.”
“네! 벨져씨도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어서 들어가 보라며 손짓하는 피디님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한 클레어는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그 부분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희가 방송생활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는 피디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평소처럼 못 들은 척 지나갈 수가 없었다. 클레어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순수한 호기심에 벽에 바싹 붙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바로 의자가 끌리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서두르라는 매니저를 따라 나왔다.
딱히 오늘 촬영에 문제될 건 없었고, 굳이 있다면 루이스의 난입인데 그것도 그렇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물론 중간에 기습뽀뽀가 좀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로라스의 말처럼 오래되고 스스럼없는 친구사이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애정표현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클레어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타려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손바닥을 짝 쳤다. 그리고 감격해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매니저의 구박에 다시 냉큼 차에 올랐다.
설마 저 오빠들 사귀나? 그래서 그런가? 클레어는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아무리 두 사람이 잘 생겼고, 쉬레의 프로즌 앓이가 대단하고, 프로즌도 못지않게 쉬레를 챙기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클레어가 내적갈등을 하는 사이 차는 매끄럽게 움직여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도로 위를 달렸다. 클레어는 핸드폰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기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단 말인가. 우리 오빠들이 같이 살겠다는데. 클레어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싱숭생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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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8.
웹연재 공개분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미공개 분량과 완결편, 부록은 책에 실릴 예정이며 추후에 책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08.
마침내 대학생활이 끝났다. 루이스는 후련한 마음 반, 어딘가 섭섭한 마음 반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숨을 푹 내쉬었다. 졸업식만 가면 이제 정말 끝이다. 루이스는 노트북을 덮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거의 매일같이 붙어 지내다시피 하다가 한동안 얼굴을 못 보니 부쩍 그 생각이 났다. 루이스는 최근 통화 목록에서 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을 듣는 동안, 묘하게 두근거리고 설레기도 해 루이스는 노트북을 톡톡 건드렸다.
“여보세요.”
“응, 벨져.”
“잘 끝났나?”
“응. 덕분에.”
공사장에 있기라도 한 건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가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아니, 그냥.”
그냥. 보고싶어서. 보고싶다는 말은 목에 걸린 것 처럼 간질거리며 나오질 않았다. 루이스는 목에 걸린 것을 털어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벨져의 목소리에 짙게 배인 피곤이 신경쓰였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지내는지도 한 번 묻지 않은 게 떠올랐다. 시험기간이라 바쁘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무심했단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바빠?”
“아니, 안 바쁘다.”
“그럼 만날래?”
“그래. 그 카페에서 보도록 하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알았어.”
벨져는 걱정과 달리 별로 기분이 상하거나 서운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어질러진 방을 슥 둘러봤다. 오랜만에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냉장고도 좀 채워놔야지. 전같았으면 바로 시작했을 수순의 앞에 자연스럽게 벨져가 떠올랐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벨져가 말한 세 달도 끝난다. 루이스는 할 일을 적어놓은 캘린더를 펼쳤다. 알바며 과제, 팀플이며 시험으로 빼곡한 봄학기와 달리 가을학기 이후에는 과제 기한이 적혀있는 게 전부였다.
루이스는 캘린더를 덮고 일어나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샤워도 하고, 오랜만에 사람 꼴로 나가기 위해 아껴둔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딱 분침이 절반 지나 있었다. 루이스는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털고 잠바를 걸쳤다. 벨져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집에서 가만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키홀더와 지갑, 핸드폰을 챙긴 루이스는 집을 나섰다. 가지만 남은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바람이 매서웠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티셔츠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어차피 요 앞이니까 이 정도야 어떠랴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험기간이라 꽉 찼던 카페들도 방학을 맞아 한산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들어선 루이스는 매장을 슥 둘러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늘 앉던 창가 자리에 앉은 루이스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처음 여기서 만날 때만 해도 해가 쨍하니 내리쬐던 여름이었는데. 이제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바뀌고, 아메리카노 한 잔도 얼음이 담긴 유리잔 대신 따뜻하게 데운 하얀 머그로 바뀌었다. 루이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따뜻한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였다.
세 달. 벨져가 얘기한 세 달은 루이스의 학기와 함께 시작해 끝나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지난 시간을 천천히 되돌아봤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감상 속에 어느 순간 제가 섞여있었다. 그 해의 겨울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풍경이었다. 결코 닿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고, 다른 세계를 동경할 새도 없이 주어진 것에 아등바등하느라 꿈을 꿔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욕심이 났다.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손을 내미는 그가 너무 눈부셔서, 닿고 싶었다. 그의 옆에 서고 싶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시지프스가 되는 건 아닐까 했다. 신들의 아량으로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뻐기다가, 결국은 끊임없이 무거운 돌을 산 꼭대기까지 올리는 형벌을 받은 인간. 제 꼴이 딱 그 짝이었다. 되도 않는 헛된 꿈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한 것도 벌써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은, 벨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사람은, 버려지는 것에 대해 어떠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제 안에 들어와 있었다. 결국 그는 저를 꾀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첫만남이 너무 극적이어서, 그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따뜻한 머그를 감싸쥐었다.
까만 수면에 자신이 비쳤다. 하고 싶은 것은 확실히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계절의 끝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루이스.”
“왔어?”
“기다렸나?”
“아니, 오래 안 기다렸어.”
부쩍 수척해진 얼굴의 벨져가 장갑을 벗으며 다가와 앞자리에 앉아 목도리를 풀었다. 눈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이 안쓰러웠다. 벨져는 손을 뻗어 머그를 잡고 있던 루이스의 손등을 감쌌다. 따스한 온기에 루이스는 그를 향해 슬쩍 웃어보였다. 벨져는 대번에 혀를 찼다.
“손이 이게 뭐냐.”
“요 앞인데 뭘.”
“미련하긴.”
“너는. 잘 지냈어? 피곤해 보이는데.”
“못 지낼 것도 없지.”
못 지낼 것도 없다면서, 그 또렷한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제 손등을 감싸고 온기를 나눠주는 게 간질간질해 루이스는 숨을 죽였다. 이 모든 것이 깨면 사라질 꿈이 아니기를 바라. 잠시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는 손의 온기와 감촉에 낮게 일던 파도가 가라앉았다.
“벨져.”
벨져가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그 시선에 잠시 생각을 골랐다. 오랜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전에는 어떤 얘기를 했더라. 그 날 공성이나, 무슨 일이 있었다, 내일은 뭘 하고 밥은 뭘 먹을까. 정말 일상적인 얘기밖에 안 했구나. 그런 생각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등을 감쌌다.
“너는, 잘 지냈나?”
“응. 이제 다 마쳤지.”
“학사모 쓸 일만 남았군.”
“너는?”
“나?”
이런 질문이 의외라는 듯 벨져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피식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기졸업했다. 별로 흥미도 재미도 느끼지 못하겠더군.”
“너 답네.”
“당연하지.”
수긍하자 벨져는 더 만족스럽게 웃으며 종업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받아 차를 주문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공기에 루이스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그의 입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벨져는 테이블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벌써 겨울이네.”
“오늘은 눈이 온다더군.”
“그래? 벌써 첫눈이 내릴 때가 됐구나.”
루이스는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했더니, 벌써 비 대신 눈이 올 날씨가 되었나보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금방 벨져의 차가 나왔다. 벨져가 시킨 진한 홍차향이 코를 간질였다.
“그건 뭐야? 냄새 좋네.”
“얼그레이.”
벨져는 마셔보라는 듯 찻잔의 손잡이를 루이스 쪽으로 돌려주었다. 금테가 둘러진 잔을 조심스레 잡고 입술을 댄 루이스는 가까이서 올라오는 향기에 차를 마시는 건지 향기를 마시는 건지 모를 기분이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벨져 쪽으로 손잡이를 돌려놓은 루이스는 다시 머그를 잡았다.
“그냥 그렇네.”
“다음에 제대로 우려주지. 홍차는 전문점이 아닌 이상 제대로 맛을 못 내더군. 그래도 이 정도면 쓰레기는 아니지만.”
루이스는 바로 홍차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는 벨져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예 양팔을 테이블 위에 놓고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벨져가 한참 베르가못이니, 찻잎의 원산지니 하는 얘기를 하다가 말을 멈췄다. 너무 가까이 갔나 싶어 벨져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당겨 의자 쿠션에 몸을 기댔다.
“밥은?”
“어…, 먹었을 걸?”
일어나서 메일 확인하고, 하던 일을 마치기까지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노트북의 글씨만 보고 있다 보면 시간 감각이라고 하는 게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벨져를 만나러 나오며 쐰 햇빛이 사나흘 만이었다. 비타민D를 위해 광합성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는데 벨져가 혀를 차더니 반도 마시지 않은 차를 두고 일어섰다.
“가자. 밥부터 먹고 차를 마셔야지. 빈 속에 그 쓴 걸 집어넣어?”
“어어, 너는? 점심 먹고 온 거 아니야?”
“이 멍청아,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나와.”
“넌 몇시에 먹었는데.”
“하아, 나도 안 먹었으니까 밥부터 먹자고.”
신경질이 섞인 벨져의 말에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게 못마땅했는지, 벨져는 제 손목을 덥석 잡아 끌었다. 얼떨결에 그의 손에 끌려 가면서도, 피식 웃음이 샜다. 이 짜증과 신경질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반가웠다. 고작 몇 주 못 본 것 뿐인데 한 일 년은 못 본 것처럼 그리웠고, 또 반가웠다. 그간의 공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끌어당겨주는 게 고마웠다.
“뭐, 먹고 싶은 건?”
“별로 없는데.”
“그래도 먹긴 먹어야지. 쯧, 그새 잘 먹여놨더니 이 꼴이 뭐냐.”
“너도 그새 말랐다.”
벨져는 코웃음을 치며 계산대 앞에서 장지갑을 꺼내들었다. 루이스도 지갑을 꺼냈으나 벨져는 이미 카드를 내민 후였다. 뭐 그런 걸 꺼내냐는 듯 벨져는 그 잘생긴 얼굴의 미간을 찌푸렸다.
“넣어둬.”
“어떻게 커피 한 번을 못 사게 하냐?”
“그 돈을 누가 주는데. 밥이나 제대로 사 먹어. 굶고 다니지 말고.”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 말이건만 벨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그런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제 지갑에 들어있는 건 벨져의 지갑에서 나온 돈이기도 하고, 벨져에게 이 정도 커피값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끔은 그냥 기분이라도 내게 해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오랜만에 한 잔 할래?”
“…나쁘지 않지. 그래도 식사는 제대로 하고. 그 다음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계산을 하는 사이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벨져의 시선에 루이스는 그를 마주봤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싶어 제 옷차림을 슥 보는데 벨져가 들고 내려온 목도리를 두르고 매듭을 지어주었다.
“나 추위 별로 안 타는데.”
“흥, 그래놓고 감기나 걸리지 마라.”
벨져는 영수증 대신 카드만 받아 지갑에 넣고는 돌아섰다. 루이스는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넣었다. 훈기가 내려오는 카페의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목을 감싸면 체온 유지가 잘 된다던데, 벨져가 하고 다니는 거라 그런지 맨살에 닿는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벨져는 차를 빼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며 먼저 나가버렸다. 같이 가재도 그는 듣는 법이 없었다. 따라나가려 하면 또 짜증을 낼 게 분명했고, 오랜만에 만나서 서먹해진 채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루이스는 한 발 양보했다. 사실 늘 양보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벨져 홀든은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지금도 흔들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감상에 젖어 카페 문 앞에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코 끝에 차가운 게 닿아 녹아내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치고 있으니 아직 덜 얼은 진눈깨비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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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7.
07.
“왔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순위를 메긴다면 단연 상위권에 오를 사람이 제 집 소파에 앉아 저를 부르고 있었다. 당장 돌아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전화로 하면 될 걸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꽤 일이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번 시즌도 넘길 테냐? 너라면 충분히 헬리오스에도 들어올 수 있을 거다. 내가 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형아. 그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럼 가면 되겠네.”
벨져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이글 놈이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해도 알려주지 않으리라. 문을 열기 전까지 기분좋게 돌아온 벨져였다. 오늘은 드디어 루이스가 조커1을 찍은 날이었고, 벨져는 그와 함께 5연승 기록을 세우고 피씨방을 나섰다. 곧 기말고사다 졸업 논문 심사다 뭐다 하는 일로 한동안은 얼굴을 보기 힘들 터였다. 그 전에 조커1을 찍은 게 기특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 혼자 차를 세워두고 근처 바에서 한 잔 하고 오는 길이었다. 애당초 세웠던 계획도 차근차근 잘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최근 벨져의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아니 '프로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맵을 읽는 센스, 냉철한 판단력과 상황에 대응하는 순발력. 무엇보다 위기 상황에서 더 그를 빛나게 만드는 침착한 태도. 벨져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자신의 감과 판단을 믿었다. '쉬레'의 플레이도 그랬다. 지금까지 있었던 팀에서 벨져는 종종 오더를 무시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리는 곧 자신이 맞다는 증명이었고, 팀원과 오더는 아연실색하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벨져는 혼자서 게임을 이끌어나가는데 능숙했다. 최종 목표가 승리라면 탱커나 서포터 한 둘 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아무리 서포터와 탱커가 잘 해도, 딜러가 없으면 말짱 헛고생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프로즌'은 저와 정반대라 해도 좋을만한 플레이를 했다. 결과적으로 하는 행동은 똑같지만, 그는 팀을 이끌줄 알았다. 그러니까, 사람을 다독이고 끌어들여 유대를 형성하는 면에서. 본인은 아니라고 하고 자각도 없는 것 같지만 한 걸음만 떨어져 지켜보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아마 처음 그 날 졌던 이유도 그래서가 아닐까 할 정도로, 루이스는 팀원을 믿었다.
AOS에서, 그것도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하는 게임에서 믿음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이던가. 벨져는 그런 신뢰와 믿음은 5인 공성을 돌릴 때나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신뢰와 유대는 강력한 무기지만, 때로는 그 마음이 발목을 잡기도 하는 법이었다. 지지난 시즌의 32강, 힐러가 잡혔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는 불나방 플레이를 선보인 멍청이 덕에 신인 Darkness는 결국 본선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일반전에서나 볼 법한 플레이였고, 벨져로선 드물게 그들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팀의 빈자리에 영입하려거든 반대할 생각으로 기억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벨져. 그 때 일이 걸려서 이러는 거라면 이번 시즌은 쉬어도 좋다. 하지만,”
“내가 알아서 해.”
“말을 끊지 마라.”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의 큰형과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저를 아래에 두고 어르고 훈수하려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릴 때야 그렇다 치지만,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었다. 성인이 된 지도 꽤 됐다. 벨져는 거리를 가득 메운 불빛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듣기 싫으니 어서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제레온 감독이 승부조작 혐의를 받고 있다. 아직 기사는 안 났다만.”
“뭐?”
“후임 로리아노가 애쓰고 있지만, 가망이 없어 보이더군. 검제로 돌아가긴 힘들 거다. 다음 시즌에 데뷔하는 것도 힘들 테고.”
“…그걸 나한테 굳이 얘기해주는 의도는 뭐야?”
“……공백기가 너무 늘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다. 너도 알다시피, 새로 생겼다 사라지는 팀도 무수히 많지.”
벨져는 무뚝뚝하게 말하는 다이무스를 노려봤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레온에 대한 진위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오랜 연을 맺어온 프리츠를 버린다는 소리였다. 일방적인 통보에 벨져는 이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벨져는 검의 형제를 위해 몸 바치다시피 한 제레온을 떠올렸다. 잘 부탁한다며 사무실을 나가던 날까지도 그는 제게 맞는 팀원을 구해주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던 사람이었다. 입 안이 써 담배가 고팠다.
루이스랑 있는 동안 담배 한 대를 못 태웠던 게 떠올라 벨져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확 추워진 날씨에 여전히 가을이라도 되는 양 옷이 얇았다. 그렇게 다니니 감기를 걸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게 보일러도 좀 틀고 옷도 좀 사고 하라니까,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다. 자연스럽게 루이스 생각을 하던 벨져는 불을 붙이고, 니코틴을 들이마셨다. 다이무스는 실내에서 무슨 짓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여긴 자신의 집이고, 그는 무단 침입한 불청객이니까. 벨져는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 뱉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형아.”
“걱정이 되니까 하는 소리다.”
“하! 그 걱정은 이글 녀석에게나 해주지 그래? 좋아라 할 텐데. 그 자식 이번에 중간고사도 자느라 안 본 거 알아?”
“…하아. 이만 가보겠다.”
“그거 참 반가운 소리네.”
벨져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다이무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대로 돌아서 나가던 다이무스가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소문이 돌더군.”
“무슨 소문.”
“네가 듀오를 돈다는 것 말이다.”
“…….”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잘 하리라 믿겠다. 그럼 잘 자거라.”
젠장. 벨져는 둔탁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도어락의 잠금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치미는 짜증에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라도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어 양손을 허리에 놓고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자나. 벨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응? 벨져? 왜?”
“…….”
“왜, 무슨 일 있어?”
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벨져는 헝클었던 머리를 다시 쓸어올렸다. 한숨을 깊게 내쉬며 소파에 풀썩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데 건너편에서 루이스가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은 먹었냐.”
“응? 아, 먹었어.”
“거짓말 말고 먹어. 먹고 자.”
“그거 얘기하려고 전화 한 거야?”
“…아니.”
“취했어? 술 마셨어?”
벨져는 피식 웃었다.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슬쩍 눈을 감았다. 그래, 이렇게 착잡하고 머릿속이 어지러운 건 기분이 좋은 나머지 빠르게 마셔서인지도 모른다.
“아니, 안 취했다.”
“얼른 자.”
“그래. 너도 자라.”
“알았어. 끊는다.”
“…그래.”
벨져는 잠시 잡을까 하다가 대답했다. 이 시간까지 안자고 있는 건 아마 졸업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울까 하다가 루이스가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지나가듯 걱정하던 게 떠올라 담배 각을 재킷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곧 연락이 올 것이다. 벨져는 다이무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제가 구상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상을 현실에 옮기려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나 다른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물론 거기엔 여러 가지 신경 쓸 일 투성이였지만 루이스가 시험공부를 하고 졸업논문을 쓰는 사이 마냥 그만 기다리기도 뭐했다. 벨져는 잠시 소파에 앉아있다 일어났다. 서재 겸 작업실로 쓰는 방 안 책상 위엔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아무도 알아줄 리 없는 고충에 벨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슬슬 신생팀과 기존 팀은 윈터를 준비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쉬레는 이번 시즌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헬리오스를 비롯한 다른 팀에서도 쉬레를 부르고 있었지만 벨져는 이제 다시 다른 팀에 속할 생각이 없었다.
새로운 시작. 벨져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지새우고 찾아올 계절이야말로 벨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빨리 보여주고 싶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했다. 벨져는 나가기 전까지 쓰던 기획서를 펼쳤다. 새 팀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루이스였다. 지금 한창 이름을 날리는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그. 프로즌은 스스로 자신이 쉬레에게 합당한 상대였음을 증명해야 했다. 커뮤니티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과 손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벨져는 프로즌의 전적을 검색했다. 승률은 63%. 아이스의 랭킹에도 진입한 게 뿌듯해 미소가 지어졌다. 루이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차분한 목소리와 제게 향하는 그 눈빛이 그리워졌다. 벨져는 지난 시간을 더듬어 처음 그를 만난 행사장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창. 해가 쨍쨍하니 내리쬐던 더위도 이제는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의류매장에는 코트와 니트가 걸리고, 거리를 물들인 낙엽도 한 차례 내린 비에 쓸려나갔다.
겨울이 오는 동안 준비할 게 산더미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게 못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새 사무실과 대신 일을 해줄 사람들, 리그 진출과 영업. 벨져는 키보드를 다그락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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