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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4.
04.
날이 조금씩 더워지면서 학교 앞 호프집에 손님이 늘었다. 기숙사 살 때가 좋았는데. 혼자 사는 게 좋기도 하지만 집세에 다음 학기 생활비며 면접비, 졸업용 자격증 비용을 생각하면 알바를 늘려도 힘이 들었다. 4년 장학금을 받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중간에 학업을 포기했을 지도 몰랐다.
잠시 심부름을 하러 마트에 다녀온 루이스는 기름 앞에 선 사장님에게 파와 양파가 든 비닐봉지를 건넸다. 사장님은 말도 거칠고, 사람대하는 것도 서툴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었다. 새로 사는 바람에 필요 없어졌다고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노트북을 거저로 주기도 하고, 시험기간이며 과제철이면 손님도 없는데 일찍 접자며 삼사십 분씩 일찍 들여보내주기도 했다.
그와 눈인사를 하고 주방을 나온 루이스는 허리에 두르는 검은색 앞치마를 다시 입었다. 끈을 앞으로 돌려 매려는데 드르륵,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울리는 부저 소리에 루이스는 매장 안으로 가볍게 뛰어가 주문을 받았다.
“사장님! 간장이랑 양념 반반이요!”
루이스는 주문서를 뽑아 렌지후드에 붙여놓고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잔 두 개를 가져다 생맥주를 따랐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거품과 맥주의 비율에 속으로 한 번 뿌듯해하고, 뻥튀기를 접시에 담아 한 번에 들었다. 균형을 잡아 빠른 걸음으로 손님 테이블에 배달한 후에야 루이스는 핸드폰을 꺼냈다.
[야, 우리 형이 너 존나 찾어.]
[한번만 도와줘라 진짜 끈질기다니깐?]
너도 끈질기다 이 자식아. 루이스는 이글의 카톡을 읽고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꾼 뒤 다시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안 왔네. 루이스는 뻥튀기를 퍼 담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한 얼굴을 떠올렸다.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쉬레는 다시 한 번 붙어보자며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알아내 찾아왔더랬다. 그날은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하기야 누가 쉬레를 일하다 볼 줄 알았겠냐마는. 덕분에 루이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귀찮은 짐이 하나 늘고 말았다.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오후 알바 장소인 서점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그냥 한 번 져주고 끝내려고도 해봤고, 방해가 되니 찾아오지 말라고 화도 내봤다. 하지만 그는 제 사정 따위 알 게 뭐냐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애초에 게임은 가끔 기분 전환 겸 애들이랑 놀 때나 하는 게 전부라 이기고 지는 것에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쉬레는 일부러 지려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대번에 무효라며 봐줄 생각 말고 제대로 하라고 눈을 번뜩였다. 그때처럼 멱살을 잡거나 길길이 날뛰진 않았지만, 무섭기로 치면 멱살을 잡히는 쪽이 차라리 나았다. 옆에서 게임을 하던 사람이 말려주지 않았더라면 사단이 났을 지도 몰랐다. 덕분에 루이스는 일주일을 더 시달려야 했다.
쉬레는, 벨져 홀든은 그 예쁘장한 얼굴 뒤에 그에 못지않게 더럽고 사나운 성질머리를 감추고 있었다. 아니 아예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었고, 덕분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쪽은 부당하다 생각하면서도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이글의 형 아니랄까봐 끈질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쯤 했으면 충분하련만 벨져는 끈질기게 함께 공성할 것을 권했다. 말이 권하는 거지 눈빛으로는 안하면 어떻게 할 기세였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피곤하고 귀찮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그런 말은 제게 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한테 하는 편이 백배는 더 건설적일 텐데. 문제는 그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자꾸만 넘어가는 자신이었다.
게임을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더, 루이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제게 큰 의미를 두는 건지도 모르겠고, 잘한다는 얘기는 적잖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게임만 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이스에겐 그런 것보다 당장 모레 내야할 전기세와, 다음달에 내야 할 수도세 같은 게 더 중요했다.
당장 다음 달이면 개강인데 쉴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둬야 했다. 졸업 요건을 채워뒀다곤 해도 자격증이네 면접이네 하면 돈 나갈 일이 잔뜩이었다. 당장 제대로 된 정장 한 벌도 없는데. 영라인 정장도 위아래로 한 벌 맞추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했다.
이글이 한 시즌 우승이면 두 학기 등록금이야 껌값이라고 가볍게 말하는 것도, 다 철이 없어 하는 소리로 들렸다. 공연히 헛된 꿈과 희망을 좇기에 루이스에겐 당장의 현실이 더 급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한 달 용돈으로 백화점 명품매장 쇼핑을 다니는 그와는 사는 세계 자체가 달랐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이제는 짜증이 난다거나 화가 나기보다는 비참했다. 학습된 경험은 쉬이 떨쳐버릴 수 없다.
센치해지려는 찰나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루이스는 냉큼 홀로 나가 주문을 받았다. 여름이라 사람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이 일을 한 지도 꽤 되다 보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금토일 주말만 아니면 그럭저럭 할 만 했다. 감당이 안 되는 진상은 사장님이 알아서 처리해주시기도 하고. 루이스는 주문을 받아 포스기에 입력하고 풀린 앞치마 끈을 앞쪽으로 꽉 동여맸다.
그래도 월요일이라 그런가 벌써 아홉시가 되어가는 데도 테이블이 반쯤 비어있었다. 루이스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주방을 흘긋 보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어젯밤 퇴근하고 나서 새벽에 게임을 했더니 잠이 부족했다. 최근엔 확실히 잠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하루가 고단한 일정에, 쉬레의 장단에 맞춰주느라 잠을 줄이다보니 더 피곤했다.
하루 중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서점에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학기 초였으면 바빠서 몇 번이나 실수를 했을 지도 모른다. 실수를 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없는 게 방학 중의 대학 서점이지만, 그렇다고 서점에 들여오는 책을 정리하고 검수하는 일은 줄어드는 게 아니었다.
주문을 마친 손님에게 뻥튀기 서빙을 마치고 멍을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있던 커플이 소란해지더니 여자가 물을 남자한테 뿌리고 나가버렸다. 가게 안 손님들과 루이스의 시선 역시 물벼락을 맞은 남자에게 쏠렸다. 그는 잠시 앉아있다가, 이내 여자를 따라 나가버렸다.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한 루이스는 냉큼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들어간 마지막 주문은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 보였지만 그래도 양념을 입히기 전에 이 상황을 알렸다. 마침 앉아있던 두 테이블이 계산을 하면서 홀이 비었다.
루이스는 영수증을 전출함에 넣어놓고 핸드폰의 홀드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마감시간이라 바닥에 떨어진 물을 닦고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누가 턱 등을 세게 두드렸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튀어나갈 뻔 했던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험악한 인상의 사장님은 기름 앞에서 열기를 쐬느라 벌게진 얼굴로 루이스의 등을 두드렸다.
“그거 해놓고 문 닫아라. 닭도 남았는데 오랜만에 술 한 잔 하자. 거, 얼굴도 좀 피고!”
루이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가끔 있는 일이었다. 레이튼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루이스는 아픈 등을 쓰다듬으며 허리를 폈다. 한산한 거리를 한 번 슥 내다보고, 앞에 백금색 벤츠가 있는지 확인한 루이스는 매장 문을 닫고 바깥 조명을 껐다. 아무리 그라도 이 시간에 나타나진 않으리라. 보고 싶은 것도 아닌데 자꾸 앞에 나타나니 이젠 없으면 조금 서운했다. 사람 마음만큼 이기적인 게 없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가져다 매장을 닦고, 다시 빨아서 걸고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나오니 레이튼이 치킨 한 소쿠리와 2000짜리 용기에 맥주를 가득 담아놓고 루이스를 맞았다. 하루 일과의 끝 치고는 후한 대접이라, 루이스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자리에 앉았다.
“참, 그놈은 안 왔나? 그 허여멀겋게 생겨서 예쁘장하니 고상한 척 하는 놈.”
“푸하하. 네, 오늘은 없네요.”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쉬레, 아니 벨져가 희고 예쁘게 생긴 건 사실이지만, 레이튼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 이글 홀든의 형이라니.”
“그 형제들이 닮은 거라곤 머리카락뿐일 걸요.”
“그런 것도 같다만.”
전에 이글이 스타이거 교수와 한바탕 소란을 피운 곳도 바로 여기였다.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잠시 전화번호를 가르쳐줄 때까지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여기에 출석 도장을 찍던 벨져를 떠올렸다. 알려주면 안 올 줄 알았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서점으로 찾아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와 하는 공성이 싫은 건 아니었다. 프로답게 벨져는 게임을 잘 했고, 의견 충돌도 잦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 거냐.”
“아무 일도 없는데요.”
“흥, 거짓말은. 어디 그런 녀석이 여기까지 와서 치킨이나 뜯고 있을 놈이냐? 척 봐도 너 때문에 오는 건데. 혹시…….”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조심스러워지는 말투에 루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벨져가 저를 끈질기게 쫓아다니고, 벨져가 웬만한 여자보다 예쁘고 섬세한 데다 까탈스럽긴 하지만 결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지. 사실 그와 제 관계는 딱히 이렇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했다. 스카우터라기에 벨져는 안정적인 수입이나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았고, 친구라기엔 소원했으며, 그냥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 하기에도 뭔가 모자랐다.
“그냥 같이 게임하자고 하는 것 뿐이에요.”
“그것뿐이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겠지.”
“...대회를 나가자는데, 아시잖아요.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는 거.”
루이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입안이 씁쓸한 이유였지만 레이튼은 턱을 만지며 그 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이다 되물었다.
“잘하냐?”
“글쎄요.”
“그 녀석은.”
“걘 프로구요. 꽤 유명해요. 우승도 몇 번 하고, MVP도 몇 번 받고.”
레이튼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크게 숨을 뱉었다.
“그런 녀석이 같이 하자는 건 너한테 그럴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팡, 아플 정도로 센 손바닥이 등짝을 두드렸다.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아픈 등에 손을 얹었다. 순간의 고통이 가신 후에도 얼얼한 게 아무래도 티셔츠를 까보면 레이튼의 그 거북이 등딱지 같은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실수할 수도 있지! 해보지도 않고 벌써 겁부터 먹는 거냐? 사내자식이. 잘 하는 게 있는 지도 모르고 사는 녀석들이 태반인 세상이다. 루이스. 기회가 앞에 왔는데 겁부터 먹고 뒷걸음질 칠 테냐?”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쉬레도 그렇게 말했다. 도망치지 말라고. 왜 기회를 앞에 두고 안전한 길만 가려 하느냐고. 그 말에 루이스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하지 않은 기회에 걸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 위험을 생각하면, 그 다음을 생각하면 지금 있는 자리라도 놓을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섭다고들 하지만, 백을 가진 사람이 하나를 잃는 것과 하나를 가진 사람이 하나를 잃는 것은 다르다. 그 무게가 너무나 달라서 어떻게 이해를 시킬 수도 이해를 할 수도 없었다. 루이스는 레이튼의 말에 시선을 피하며 숨을 집어삼켰다.
“루이스. 나는 말이다, 네가 더 크게 될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손님들이 놀라 쳐다볼 정도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던 레이튼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워낙이 괴팍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굉장히 상냥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틀렸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루이스는 대학이 매 년 쏟아내는 엘리트들과는 다를 거란 말이지. 알겠냐?”
서툰 위로와 격려에 담긴 건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루이스는 가타부타 대답하는 대신 제 어깨에 올라온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역시,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루이스는 레이튼이 포스기 정산을 확인하는 사이 마저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했다. 괴팍한 사장님의 변덕 덕에 호프집 일렉버스트의 영업시간은 들쭉날쭉했다. 루이스는 대걸레까지 빨아 걸어놓고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홀로 나왔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또 비가 쏟아졌다. 매장 안에는 에어컨이 추울 정도로 돌아가고 있지만 루이스의 마음 에는 창밖에 내리는 것 같은 장대비가 내리며 지독한 습기를 채웠다. 루이스는 금세 지치고 우울해지는 이 계절이 싫었다. 앞으로 이주면 창밖의 비가 그치겠지만 제 마음 속의 비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다들 제가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라는데, 그게 저한테만 안 보이나 봐요. 루이스는 문 앞까지 나와 우산을 챙겨주는 레이튼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담은 한숨은 우산을 두드리는 거센 빗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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