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으로 인한 휴가라며 아침도 건너뛰고 느지막이 일어난 루이스는 씻자마자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소파 팔걸이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까딱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그의 무방비한 발을 잡아버리고 싶어진 나는 충동에 사로잡힌 채 조심히 다가갔다.
“으왓, 깜짝이야.”
발을 잡히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던 루이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잡힌 발을 뺄 생각은 없는지 버둥거리지도 않아서 나는 마음껏 그의 발을 만지작거리며 크기와 길이를 가늠했다.
“작군요.”
“갑자기 사람 발을 잡고 하는 말이 겨우 그거예요?”
“작은 걸 작다고 했을 뿐입니다만.”
루이스는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무릎을 모아 앉았다. 발을 놓아주자마자 감추려는 모습이 귀여워 웃자 루이스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랑 내 키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요.”
“키만 차이나는 건 아닙니다만.”
뚱하니 토라진 얼굴이 귀엽다. 나는 급히 입술을 말아 물었으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루이스는 눈을 샐쭉하게 뜨고 나를 흘겼다. 사실무근한 얘기라면 반박이라도 할 텐데, 사실이라 할 얘기가 없는 모양이라 나는 루이스의 옆에 앉아 그가 감추듯 오므린 발에 손을 얹었다.
“오랜만에 쉬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죠?”
“그렇게 느껴집니까?”
전혀 모르겠다는 양 빙긋 웃자 입술을 쭉 내밀고 있던 루이스가 시선을 피했다. 아닌 척 해도 목과 귀가 빨개져서 의식하고 있는 티가 났다. 루이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입술 위에 가로놓인 손가락이 입술을 덧그릴 때마다 내 눈이 그의 손가락을 좇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전에 해준 파스타 맛있었어요. 카르보나라. 베이컨 잔뜩 넣어서.”
“이런. 베이컨이 없는데요.”
“으음.... 사러 가기 귀찮은데.”
진지하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그만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나는 뒤늦게 입을 가렸지만 한 번 터져 나온 웃음은 멈출 줄 몰랐고, 신나게 한바탕 웃은 뒤엔 아까보다 더 뚱해진 표정의 루이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큽, 실례.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아아, 정말.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당신.”
“...웃기려고 한 말 아닌 건 알죠?”
“물론이죠. 너무 웃어서 광대가 다 아플 정도군요. 후.”
“잘 모르겠지만 성격 나쁘다는 소리 엄청 들었을 것 같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웃음이 아직도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바람에 루이스는 더 분해하는 눈치였지만, 이렇다 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는 게 전부였다.
“이미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놨습니다만, 베이컨 대신 햄도 괜찮다면 기꺼이 해드리죠.”
선심 쓰듯 말하자 루이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발을 아래로 내렸다. 완전히 늘어진 자세가 숫제 시위라도 하는 모양새지만, 내게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과 헛웃음마저 귀여운 투정으로 보일 뿐이었다.
“대체 그런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글쎄요. 태생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제 기억은 백지라서요.”
“하아.... 당신이랑 얘기하고 있으면 기운이 빨려요.”
루이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부쩍 즐거워진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미소를 머금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귀여워하며 웃은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의 미소에 루이스가 시선을 피하며 팔을 올린 팔걸이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당신이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와도 차려준 밥 먹고 잠만 자잖아요. 와, 나 완전 식충이네.”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립니까?”
일부러 진지해지는 분위기를 피하고자 하는 과장된 말에 나는 은근하고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며 받아쳤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스는 눈 한 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을 땐 울상도 무엇도 아닌 애매한 미소와 함께였다.
미안함과, 그보다 조금 더 무거운 감정을 담은 미소에 나는 다시 주도권이 그에게 넘어갔다는 걸 느꼈지만 잠자코 루이스를 기다렸다. 그가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을 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기꺼이 그를 위해 기다릴 수 있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청소에 빨래에 밥하고 설거지까지 혼자 다 시키는 게 미안해서 그러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루이스가 장고 끝에 털어놓은 얘기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허무했지만 그 하찮은 고민마저 사랑스러웠다. 그 자신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못내 그게 마음에 걸려 사과를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든 손에 쥐면 부서질 것처럼 세심한 사람이 능력자 전쟁의 영웅이라니, 그 괴리감이 더더욱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당신을 원하는 욕망에 불을 질렀다. 당장 당신을 눕히고 싶은 충동과 뜨거운 열감을 애써 누른 나는 지난밤의 실패를 교훈 삼아 그의 경계를 풀만한 입 발린 말을 골랐다.
“그럼 좀 일찍 들어오시죠.”
“음. 그건 좀.”
“내가 여기 계속 눌러 살면 어쩌려고요.”
곤란하다는 듯 짓는 애매한 미소까지 이렇게 예쁠 일인가. 나는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를 외면하고 웃으며 말을 돌렸다. 성급하게 달려들었다가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조심성이 많은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아주 천천히, 당신이 나에게 잡히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음. 일단 내가 애를 써보다가, 정 형편이 힘들어지면 돈 벌어 오라고 내쫓아야죠.”
“그러다 제가 몸이라도 팔면 어쩌려고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나보다. 당황으로 깜빡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장난이라는 걸 눈치 챈 루이스가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놀리기 쉽군요. 이런 사람이 전쟁 영웅이라니.”
“놀리지 마요. 나도 이런 내가 싫으니까.”
나는 눈을 맞추지 않는 루이스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몸을 바싹 붙였다. 은근한 손길로 다리를 만지작거리자 당황해 몸을 뒤로 빼려는데 좁은 소파에 앉은 채로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래도 꽤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정 뭐하면 시험해보겠습니까?
진득하게 허벅지 안쪽을 긁으며 묻자 루이스의 몸이 굳었다. 방금 전까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행동이었지만 만지면 만지는 대로, 흔들면 흔드는 대로 따라오는 그의 떨리는 눈이 예뻐 자꾸만 손이 갔다. 진한 미소를 띤 채 입을 맞추려 다가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이 정도면 꽤 수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농담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만...!”
훤히 드러난 목을 핥아 올리자 루이스가 멀쩡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사뭇 진지해진 얼굴이 여전히 사랑스러웠지만 이제 정말 물러날 때였다. 더 하면 당장 침대에서 쫓겨나는 건 고사하고 며칠 내내 얼굴을 못 볼지도 몰랐다.
“왜 긴장하죠?”
“그야 당신이....”
“걱정 마세요. 당신이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 둘 테니.”
나를 밀어낸 루이스가 미심쩍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방금 핥은 곳을 손으로 덮었다. 감각이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있는지 긁지도 않고 대고 있을 뿐이라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루이스와 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그 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렸죠. 나는 그저 말을 들을 뿐입니다.”
의심스러운 눈빛에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괘자 루이스가 일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습니까?”
루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영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자 이번에는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토라진 얼굴이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루이스가 떠난 자리를 두드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뭣하면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하죠. 제 진심을 증명할 겸.”
“됐어요. 스토브는 하난데 거기서 자면 벽난로에도 불을 때야 하잖아요. 땔감도 없는데 얼어 죽으려고요?”
“기꺼이 침대에 들여 주시겠다니, 친절하시군요.”
“내 집에서 아는 사람이 동사하는 게 싫을 뿐이에요.”
루이스는 어쩔 수 없다는 투였지만 내게는 그마저도 새침해 보였다. 순박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전쟁영웅이라니. 이제와 사람이 달리 보이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장난스레 대답했다.
“네. 그런 걸로 하죠. 영웅님.”
“그렇게 부르지 마요.”
“왜죠? 이유라도 있습니까?”
“말했잖아요. 당신은 나를 영웅으로 보지 않는 게 좋다고.”
책상에 걸터앉은 루이스는 고개를 숙인 채 울적해진 얼굴로 내가 아닌 바닥을 바라보고, 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빠듯하게 죄는 안타까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며 입을 열었다.
“참고하죠.”
“부탁해요.”
“...그래요. 루이스.”
나에게 당신이 유일하듯, 나 역시 당신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환희와 희열을 눌러 삼키며 낮게 숨을 뱉었다.
루이스의 옷차림은 크게 두 가지다. 책을 만지는 날은 니트에 셔츠, 그리고 '다른 일'을 하는 날은 후드재킷과 청바지. 그의 후드에서는 언제나 약한 화약 냄새와 싸한 소독용 알콜의 냄새가 풍겼고, 루이스의 몸이며 손에는 언제나 새 상처가 생겼다.
위험한 일을 하는 건 확실했지만 루이스가 말하려 하지 않았고, 더 간섭하기도 주제넘은 짓이라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멀쩡히 나갔던 사람이 팔에 붕대를 감고 들어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신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겁니까, 그 꼴로 지금...!”
“그냥 살짝 금간 거니까. 자, 받아요.”
루이스는 한 손에 안고 온 식료품 봉투와 다친 손으로 들고 온 신문을 내밀었다. 입술이 찢어져 피딱지가 진 채로 웃으면서 회피하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짐을 빼앗아 대충 던져놓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손을 잡아 세웠다.
“윽....”
“이게 그냥 살짝 금간 거라고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몰아세우던 나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날을 세우는 그의 눈빛에 긴장의 끈이 팽팽해지고, 이 침묵과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진 내가 루이스를 와락 껴안았다.
고작 하루 못 봤을 뿐인데, 이렇게 애틋할 수 있을까. 차가운 몸을 끌어안자 어제부터 내내 나를 채운 원망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이 꼴이 되어 돌아온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겨우 이 사람을 내 눈앞에 뒀다는 안도감이 그 자리를 매웠다.
품안에 넣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겨우 날뛰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체구가 가녀린 편도 아니건만 왜 이다지도 위태로운지, 가만히 두고 보는 게 힘들었다.
“루이스, 제발.... 당신은 내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걱정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없으면 나는....”
“괜찮아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잇기 전, 루이스가 나를 밀어냈다.
“얼른 씻고 올 테니까 같이 저녁 먹어요.”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 루이스 대신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사이 많이 자란 머리카락이 자꾸 속눈썹을 간질이는 것도 짜증스럽고, 선을 긋는 루이스에게도 짜증이 났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나는 수건으로 손을 닦다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다친 건 왼쪽이니 괜찮다며 설거지까지 하려는 걸 기어코 말려 주방에서 쫓아냈건만 정말이지 말을 듣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에게 다가가다 못 보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좋아요. 뭐가 궁금한데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신경 쓰인다고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진 것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의심하는 눈이던데.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 같아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날카롭게 정곡을 찌른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항복 선언이나 다름 없는 행동에 루이스는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물어봐요. 대답할 수 있는 건 해줄 테니까.”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친절이 과한 거 아닙니까.”
“다 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같이 지낸 시간이 있잖아요. 날 해칠 거라면 진즉 해쳤겠죠. 그런 낌새가 보였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고.”
아니. 당신은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타인에 불과한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까.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한 이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루이스의 눈에 담긴 신뢰에 말문이 막혀 시선을 피하며 손을 만지작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눈빛을 받는 것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꽤 자신이 있나 보군요.”
“내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돼요.”
“정말 그냥 궁금해진 것뿐입니다.”
“음. 연합의 루이스가 나라고 하면 믿겠어요?”
책이나 만질 것 같은 단정한 청년이 연합의 영웅이라. 황당한 소리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 없다는 뜻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루이스는 농담을 하는 사람치고 너무 진지했다.
“설마.... 진짭니까.”
“저 문을 나가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다쳐서 생긴 상처일리 없다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을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가 그 ‘영웅’ 루이스라고는 아무리 좋게 봐도 이미지가 매치되지 않았다. 전설적인 시대의 영웅이 고작 이런 곳에서 이렇게 지낼 리 없다.
“연합의 지원은 한정적이고, 나보다 못한 사정에 처한 사람들도 많거든요. 여유가 되면 양보하는 게 낫죠. 군식구가 생길 줄은 나도 몰랐지만. 어차피 잘 들어오지도 않거든요. 보다시피 이런 집이라 집세도 싸고.”
생각이라도 읽은 건지 루이스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의식을 잃은 시간을 합하면 두 달 가까이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지만 그가 가져다주는 신문은 꼬박꼬박 읽었다. 혹시나 기억에 도움이 될까 시작한 일이지만 집안일을 하고 나면 달리 할 일이 없다보니 지루해서라도 읽게 되는데, 연합의 영웅 얘기는 잊을만 하면 등장했다.
“기사나 이야기나, 아무래도 과장되는 면이 많죠. 잔뜩 부풀린 쪽이 더 잘 팔리니까.”
“...그렇군요.”
“사실은 별 거 아니죠? 어떤 녀석 하나는 영웅이란 말에 잔뜩 부풀려진 말을 듣고 대서양을 건너왔는데, 차마 내 입으로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한동안 멋진 척 하느라 고생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그냥 평범한 동료지만.”
다른 사람 얘기를 하면서 엷은 미소를 띠우는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속에서 더한 짜증이 올라왔다. 그에게 다른 사람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 나에겐 당신밖에 없는데.
“루이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내 품에 가둔다고 가둬질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으로 매달려 붙잡아두면 된다.
“매번 같은 악몽을 꿉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대자 루이스가 무릎 위에 펼쳐놓은 파일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침착하고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으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나는 마음이 복잡한 척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잔뜩 뜸을 들였다.
“누군가에게, 누군지 모를 이들이 나를 쫓는 꿈입니다. 꿈속의 나는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고, 어디로 숨어도 그들은 나를 찾아내서 다시 달아나기를 반복하죠.”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그 누구도 이런 제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쫓기는 이가 그들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심지어는 이런 자신을 비웃고 경멸하는 이들. 쫓기는 이유조차 모른 채 도망치는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최악의 악몽.
“그 꿈에서 뭐라도 알아낼 것이 있다면 좋겠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내 이름조차 모릅니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리자 손이 잡혔다. 손등을 덮고 어루만지는 그의 손의 온기에 고개를 들자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 당신이란 사람은 어째서 이다지도 사랑스러운가.
“그렇지 않아요. 당신 탓이 아니잖아요.”
“루이스.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괜찮아질 거예요. 기억도, 꿈도..... 차츰 나아지겠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 담긴 눈빛에, 그의 그 목소리에 나는 그만 루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았다. 루이스는 손등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나의 등을 토닥이고,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다친 짐승이 온기를 갈구하는 것처럼 루이스의 목에 코와 뺨을 부비며 체향을 맡았다.
들어오자마자 씻으러 들어갔던 루이스가 나의 등 뒤에서 발돋움을 해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면서 킁킁거리는데,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신선한 채소라곤 여기 올라온 게 전부니 내일은 장을 봐와야합니다. 그러고 보니 비누도 새로 사야겠더군요. 어서 앉으시죠.”
다 된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놓자 루이스가 웃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내가 처음 주방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사용한 적이 거의 없는 티가 나는 식탁과 의자였으나 지금은 그와 나의 흔적으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오늘 저녁 메뉴는 남은 자투리 채소로 만든 포토푀에, 끄트머리만 남은 빵, 치즈를 얹은 감자와 소시지 구이가 전부인데 루이스는 이렇게 단출한 식탁이 크리스마스 정찬이라도 되는 양 나의 노고를 치사했다. 그가 내가 한 음식을 맛있다고 하는 것도, 내가 들인 시간과 정성을 알아주는 것도 꽤 흡족하고 뿌듯한 일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빈말로도 그만 하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한때는 이런 걸 꿈꾼 적도 있었는데. 감회가 새롭네요.”
“흠. 저랑 말입니까.”
내가 접시에 음식을 더는 동안 루이스는 식탁에 턱을 괘고 평소에 하던 칭찬과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듣기 좋은 소리였기에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루이스는 순박한 청년처럼 작게 웃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히 정해진 상대는 없었어요. 남자일 줄은 몰랐지만.”
“저랑 있는 게 좋다는 소리로 들리는 군요.”
루이스는 웃으며 긍정했다. 나는 그의 웃는 얼굴과 가볍게 울리는 웃음 소리를 퍽 좋아했고, 내게 눈웃음을 짓는 루이스는 더 좋아했다. 이렇게 웃어주기만 하면 무슨 요구를 해도 다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자주 들어오는 겁니까?”
“그것도 있고, 당신은 내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나는 음식을 접시에 던 두 개의 접시를 내려놓고 내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식전 기도 같은 걸 하지 않았기에 루이스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바로 포크와 스푼을 들었다.
당신은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 묘한 열을 일으켜 음식을 먹는 대신 숟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나를 흘긋 보고 씹던 음식을 넘겼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고 섬세한 그답게, 조금 전보다 더 긴 말이 이어졌다.
“전에는 그냥 일하다 휴게실에서 잤지만 이제는 다르잖아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같이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그러다 잘 자라고 인사하고 아침에 다시 만나는 그런 거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를 통해 가슴까지 퍼지는 감각에 나는 그를 바라보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기억이 없으니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같은 것을 바랐던 것 같다.
마음을 쉴 수 있는 안식처.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의지가 되는 온기와 감정 같은 것. 타인과의 관계가 굳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지만 루이스는 특별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전부 알고 싶고 내가 당신을 원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는 열망. 어쩌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이 남자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나는 살짝 테이블 두드려서 루이스의 시선을 끌었다.
“당신. 그거 압니까?”
막 덜어낸 음식을 입에 넣으려던 루이스가 눈 동그랗게 뜨고, 그의 포크에 달랑 들린 감자와 소시지 덩어리에서 치즈가 길게 늘어졌다.
“당신, 웃으면 정말 어려 보인다는 거.”
루이스는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거였냐는 듯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눈을 휘며 보내는 눈빛이 더없이 따스했다.
“남자한테 외모로 칭찬 받아도 별로 기쁘지 않은데요. 진짜로 잘생긴 사람이 그러면 더 기분 이상하다구요.”
“칭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럼 그런 걸로 해요.”
루이스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에게 그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을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대신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루이스를 관찰했다. 잘 먹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보고 있으면 그를 기다리는 내내 지루해한 걸 잊어버릴 정도로 즐거웠다.
식사를 마치고,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며 나서는 루이스에게 주방을 맡긴 나는 포트에 커피를 내려놓고 그를 기다렸다. 음식을 하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지만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설거지는 맡겨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루이스는 자신을 너무 못 믿는다며 노골적으로 서운하다는 티를 냈지만 아무리 귀여운 얼굴을 해도 안 되는 건 있는 법이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루이스가 가져온 신문을 대충 훑는 사이 집안 가득 진한 커피 냄새가 퍼지고 이내 물소리가 멎었다. 양손에 컵을 하나씩 들고 온 루이스는 내 전용이 된 머그컵을 내밀고 소파에 앉아 컵을 만지작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래서인지도 몰라요.”
“뜬금없이 무슨 소립니까?”
“자주 들어오는 이유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나도 좀.... 힘들었거든요.”
“그렇습니까.”
“좀 지쳐있었어요. 다른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도피처가 필요했는지도 모르죠.”
루이스는 쓴웃음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아련하고 지친 표정에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손을 루이스의 다리 위에 얹었다. 따로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맞춘 듯 두 벌씩 마련되어 있던 식기와 읽지 않는 책. 불현 듯 스쳐지나가는 불쾌한 의혹에 얼굴이 굳었다.
“여자 문제입니까?”
“...내가 빠지면 곤란한 일이 많아서요.”
“그녀가 떠났군요.”
정곡을 찔렀는지 루이스가 눈을 감으며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면서도 안쓰러움 대신 알 수 없는 분노와 질투가 끓어올라 나는 추궁을 계속했다.
“그래서 떠난 겁니까? 당신이 일에 매진하는 바람에?”
“그녀와 나는 바라는 게 달랐어요. 항상 여길 떠나고 싶어 했죠. 좀 더 고요하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당신은 남고 싶었고요.”
루이스는 비참하지만 다 괜찮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어리석고 한심해서,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잡지 못하고 떠나보낸 남자.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있는 힘껏 안고 그의 고통까지 들이마실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자 익숙한 손길이 나의 등을 두드렸다. 아픈 구석을 찌른 건 난데, 어째서 당신이 나를 위로하는가.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나는 당신의 세계에서 숨을 쉬지 못할 테고, 당신 역시 나의 세계에서 숨을 쉴 수 없다. 누구 하나는 망가지고 말겠지. 더 다가가면 안 된다는 이성의 경고음이 굉굉하게 울리는데도 나는 품에 안은 남자를 놓지 않았다.
숨이 찬다. 이대로는 잡히고 말 것이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들을 피해서, 나를 쫓아오는 그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숨고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이제는 안 돼. 누군가, 누군가 나를 좀 도와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입에 단내가 나는데도 잡히면 죽을 거란 공포에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만, 이제 그만. 소리조차 내지를 수 없는 어둠, 보고도 외면하고 마는 사람들. 아무리 외쳐도, 아무리 울어도 도움은 오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는 달려야 한다.
급박한 발소리, 나를 쫓아오는 사냥개, 울리는 소리. 온 힘을 다해 달리던 나의 몸이 크게 굴렀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끈적하고 소름끼치는 어둠이 발목을 휘감고 나를 쫓던 이들이 서서히 손을 뻗었다. 발버둥 칠수록 몸을 휘감은 어둠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몸을 뒤덮었다. 빛 한 줌 보이지 않는 어둠에 집어삼켜지며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싫어, 제발, 그만...!
마지막 발버둥으로 뻗은 손이 잡혔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일으키는 감각에 눈을 뜨자 짙은 어둠 속에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보였다.
“괜찮아요? 무슨 꿈을 그렇게....”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쿵쿵 뛴다. 불안과 공포, 일방적으로 무력하게 쫓기는 감각이, 그 때의 심장소리가, 아직도 달라붙어있는 것 같다. 마른 침을 삼키자 젖은 손이 등을 쓰다듬다 떨어졌다.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얼굴에 겨우 꿈속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그를 꽉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에 뺨을 부비며 숨을 토하자 그제야 밖에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저, 나 옷이 젖어서....”
루이스는 그의 그 순박한 목소리로 난처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나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남성의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안심이 된다. 루이스의 손길은 자상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소리와 미지근한 체온은 잔뜩 긴장한 마음을 도닥였다.
“괜찮아. 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아요.”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모르면서, 루이스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나의 등을 토닥였다. 일순 든 충동에 고개를 든 나는 곧장 그에게 키스했다.
“읏...”
당황한 듯 움찔한 그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가 혀를 얽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진하고 질척한 키스가 주는 아찔한 쾌감에 나는 공포도, 불쾌한 악몽도 전부 단번에 잊어버리고 혀와 입술에 집중했다. 처음에 밀어내려던 루이스도 양순히 입을 벌리고 내 혀를 빨고 입술을 부딪치며 입술과 혀를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숨이 가빠지고 혀뿌리가 뻐근하도록 이어지는 키스에 나는 루이스의 뒷목을 잡고 고개를 돌려 각도를 바꿔가며 혀를 밀어 넣었다. 젖은 몸을 더듬다 그의 허리를 잡으려는데 루이스가 나를 떼어내고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이제 진정했어요?”
“...조금은요.”
“음. 아래는 아닌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도 붉어진 뺨과 살짝 풀어진 눈시울이 예뻐 정신없이 쳐다보던 나는 그의 눈짓에 팽팽하게 솟은 바지춤을 발견했다. 아랫배에 묵직한 열이 쏠린 건 루이스와 있을 땐 으레 있는 일이었고, 키스를 하다 보면 또 그렇게 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혼자 지내며 손으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는 루이스를 붙잡으려 했으나 루이스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다 안다는 듯 슬쩍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리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깝고 분해 눈살을 찌푸렸으나 옷장을 향해 돌아선 루이스에게 보일 리 만무했다.
루이스는 젖은 후드재킷을 의자에 걸어놓고 젖어버린 티셔츠를 벗었다. 꼼꼼하게 균형이 잘 잡힌 등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사이 새 옷을 입은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턱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해결하고 와요. 기다릴 테니까.”
“당신이 먼저 씻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음. 너무 지쳐서 힘들어요. 오늘만 봐줘요. 나도 그럴 테니까..”
나는 방금 전의 키스를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려는 루이스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눕히고 하던 것을 마저 이어가고 싶지만 그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싫다.
망설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옷을 벗으면 어떻게 될지 안다는 듯 젖은 바지는 벗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다.
“...먼저 잠들지 마세요.”
“노력해보죠. 너무 기대는 말고.”
겨우 나온 말이라는 게 이런 거라니,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약간의 침묵과 약하고 애절한 말투로 루이스는 경계를 풀고 미소 지었다. 나는 그를 조금 더 바라보다 화장실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거센 빗소리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루이스의 체중을 받아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를 듣고 지퍼를 내려 단단히 일어선 물건을 손에 쥐었다.
“큿... 흐.... 루이, 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뜨겁게 맥동하는 욕정에 나는 빠르게 손을 놀렸다. 그의 단정하고 말간 얼굴이 흥분을 못 이겨 달뜬 신음을 뱉으며 쾌감에 물드는 걸 보고 싶다. 몸에 난 상처와 흉터 위에 입을 맞추고, 흰 목을 물고, 그리고, 그리고.
“후우.... 하.... 하, 하하....”
다리를 벌리고 그의 안으로 파고드는 상상 끝에 나는 사정했다. 정액을 토하며 꺼떡이는 분신도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으나 아직은 상상에 불과한 욕망일 뿐이었다.
그를 잃고 싶지 않다. 아무리 친절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해치려드는 사람을 계속 품어주진 않을 테고, 그랬다가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 뿐이다.
더해가는 열감 속에 흥분하면서도 철저한 계산을 하고 마는 자신을 알면 루이스는 더 경계할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비치는 건 어딘가 세간의 상식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 자신이 아닌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 자신이다. 그럼 결코 나를 버리지 못할 테니까.
루이스의 미소와, 곤란해하면서도 끝내 받아주고 말 때의 표정을 떠올린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그가 조금 더 마음을 놓고, 내게 익숙해지면 이렇게 혼자 달래지만은 않을 것이다.
도저히 한 번으로 끝낼 수 없어진 나는 더운 숨을 내쉬며 땀과 정액으로 젖은 손으로 다시 내 분신을 감싸고 짜릿한 상상을 이어갔다.
비가 내리는 저녁, 쫄딱 젖은 채로 돌아온 그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천이 바닥 타일에 철퍽 떨어지고, 문이 닫히며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나는 스토브를 켜고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날도 추운데 비를 맞아놓고 찬물로 샤워를 하려면 몸이 차가워지는 게 당연했다.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루이스는 금세 욕실을 나왔다. 머리 위와 허리에 수건을 둘렀을 뿐인 그는 추위에 무방비했고, 발뒤꿈치를 든 채 덜덜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싸고 걸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 잠시 담요라도 덮어주기 위해 다가갔다.
“루이스.”
흠칫. 담요를 덮어주기 위해 젖은 맨 어깨에 손을 올렸을 뿐인데 루이스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맹수 앞에 선 토끼같이 떨리는 몸과, 희게 질린 얼굴, 붉은 눈동자 위에 드리운 속눈썹에 물기가 어려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표정을 감추기 힘들 정도로, 아찔했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차는 뭘로?”
“아무거나 괜찮아요.”
흰 피부. 왜소하지도, 근육이 과하지도 않은 다부진 몸. 섬세한 잔 근육이 팔을 올리며 드러나고, 이내 밋밋한 천에 가려졌다. 그게 무척이나 아쉬워 나는 그의 맨 등에 손을 얹고, 손끝에 닿는 피부를 느끼며 근육 하나하나를, 그 아래 혈관의 떨림까지 모두 가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군데군데 총상이며 자상, 그을린 흉터까지 온전한 곳을 찾기 힘든 몸이지만, 고작 그런 것들로 본래의 매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구석구석 핥고 입 맞추고 싶어 목이 탔다.
빤히 지켜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루이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흘긋, 책망하듯 보는 시선에 나는 찻잎을 고르는 척 딴청을 피웠고, 루이스가 허리에 묶어둔 수건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수건 아래 감추고 있던 허리와 엉덩이가 드러났고, 나는 그의 몸을 눈에 새겼다.
매끈한 허리와 희고 튼실한 엉덩이. 거기에 허벅지로 떨어지는 라인까지, 양껏 눈요기를 하다 주전자를 들어 뜨거운 물을 찻잎 위에 부었다. 찻잎이 투명한 물을 물들이며 떠다니고, 루이스가 팬티와 바지를 걸쳤다.
신경 쓰고 있지 않은 척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귀여운 사람 같으니.
“밥은 먹었습니까?”
“아. 깜빡했어요.”
“차보단 수프가 낫겠군요. 머리라도 말리면서 기다리시죠.”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디건을 집어 들었다. 스톡을 끓이고, 간단하게 루를 만들어 섞은 뒤 후추와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수프가 완성되고, 남은 빵으로 만들어둔 크루통을 올려 마무리했다. 한 손엔 수프, 한 손엔 숟가락을 들고 가는데 그새를 못 참고 드러누운 루이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샜다.
입을 벌린 채 잠든 건 그렇다 쳐도, 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테이블 위에 뜨거운 수프를 내려놓고, 그릇을 들고 오느라 뜨거워진 손을 그의 배 위에 올렸다. 그냥 올린 건 아무렇지도 않은지 루이스는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팔을 가슴 위에 올릴 뿐이었다. 그에겐 다소 큰 내 가디건의 소매가 그의 손등을 덮고 손끝이 앙증맞게 나와 있어 장난기가 돌았다.
“헉, 흣...!”
매끈한 배를 문지르다, 노골적으로 간질이자 루이스가 퍼드득 몸을 떨며 일어났다. 놀라 깬 그가 나를 칠 뻔했지만 버둥거리느라 팔이 허공을 휘젓고 허무하게 내려갔다. 나는 킬킬거리며 다시 부드럽게 그의 배를 쓰다듬었다.
“만져달라는 줄 알았지 뭡니까.”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체념한 듯 한숨을 쉰 루이스가 그의 배 위에 손을 얹은 내 손을 잡아 떼어냈다.
“당신... 가끔 엄청 아저씨 같은 거 알죠?”
“변태 같다고 해도 됩니다.”
“알고 있네요.”
“뭐....”
어깨 으쓱이자 루이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흘겨보는 게 아닌, 조금 진지해진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건조한 눈빛이 향하는 곳은 자신의 배다. 니트 아래 가려진 피부에 자리한 문신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먼저 운을 뗐다.
“만져도 됩니다.”
“아뇨.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냥...”
“그냥?”
“...아파보여서요.”
“그렇습니까?”
한참 뜸을 들였던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 보인다니. 생각해본 적 없는 감상에 나는 솔직히 답했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요. 알다시피,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군요. 당신도 해보는 건?”
루이스는 고개를 젓다가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눈은 비록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엔 내 옆구리에 자리한 문신과 그 아래 흉터들, 그리고 실밥을 빼고 분홍색 새살이 돋은 상처가 선명히 떠오를 터였다.
상처투성이인 것은 같은데, 어째서일까. 이 사람은 너무 상냥하다. 그의 상처는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다친 희생의 결과가 아닐까. 루이스의 손이랑 등에 무수히 많은 흉터를 떠올리며 그의 손끝을 지긋이 보고 있으니 루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소매 아래 가렸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 이것부터 들어요. 더 식기 전에.”
거짓말. 실은 다 알고 싶으면서. 하지만 꼬치꼬치 캐물으며 몰아붙였다간 겁을 먹고 달아날지도 모른다. 이 사람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든지 감정의 거리를 넓히고, 토끼처럼 굴을 파고 숨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릇을 받아든 루이스가 냄새가 좋다며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턱을 괬고,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루이스는 그릇을 비우고 맛있었다는 말로 감사를 표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상.
“읏.”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자란 손톱에 또, 니트의 보풀이 걸렸다. 손톱 아래 약한 살에 파고드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이쪽을 쳐다봤다. 나는 손톱에 걸린 니트의 보풀을 뜯어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손톱이 자라서 자꾸 걸리는 것뿐입니다.”
“당기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요.”
루이스는 그릇을 내려놓고, 바느질용 작은 가위를 가져와 내 손을 잡고 보풀을 끊었다. 끄트머리만 남은 실 가닥을 빼려했으나 루이스는 내 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톱 가장자리에 가위를 댔다. 조심스럽게 손톱의 흰 부분을 자르는 루이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상처라도 입힐까 작은 가위질에 공을 들이는 게 나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는 것 같다. 뿌듯해진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 위에 나의 손. 자연스럽게 루이스의 손을 보게 된 나는 짧게 자른 손톱을 보고 띠웠던 미소를 지웠다. 이렇게 손이 예쁜데, 아깝다.
잘려나간 손톱 조각이 다섯 개가 되고, 나는 반대편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렇게 짧게 자르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책을 만지다보니 종이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책을 만지는 일을 하는구나. 그의 몸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책 냄새라는 걸 알고 나니 책이 가득한 장소에서 차분학고 고요히 책장을 넘기는 루이스가 떠올랐다. 모양 좋은 손에 자리한 상처는 종이에 벤 상처라기엔 투박하고 훨씬 깊었지만 새삼 떠오른 호기심에 잠시 위화감을 덮었다. 나는 이 사람이 몇 살인지도 모른다. 그저, 이십대 초반쯤 되겠거니 짐작할 뿐.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군요.”
“아뇨, 뭐 익숙하니까. 고아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왠지 모를 동질감에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루이스는 가볍게 웃으며 나의 손등을 토닥이고, 떼어냈다. 이 거리를 좁히려면, 당신에게 더 다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욕망을 채우려면, 그렇게 하려면.
“루이스.”
“정말 괜찮아요. 혼자인 것도, 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아니니까. 그냥 가끔 외로울 뿐이죠.”
쓰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을 잇는 그의 손을 잡아 쥐고, 나는 눈을 맞췄다. 루이스는 난색을 표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놓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다봤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루이스,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당황해 나를 일으키려는 그의 손을 잡고, 나는 홀린 사람처럼 말한 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른 입술과, 그보다 더 건조한 손등. 경애의 키스. 이 사람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루이스....”
“그만, 다 됐으니까 일어나요.”
그의 손등에 뺨을 부비다 나를 일으키는 그를 올려다보며 열기에 가득 찬 숨을 쉬었다. 루이스. 나의 사랑. 그래. 이것은 사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마음을 해명할 길이 없다. 당혹스러워하는 그를 더 몰아붙이려다가, 나는 인내하기로 했다.
본디 좋은 사냥꾼은 인내할 줄 아는 법이다. 가장 좋은 때를 기다려, 상처 하나 없이 사로잡을 그 때까진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시야에 두고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당신을 내 손에 넣고, 내 품에 가졌을 때, 당신은 어떤 표정을 할까. 상상만으로 등골이 오싹거리는 희열에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뜨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혜를 갚겠다는 겁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알겠으니까 일어나요.”
“물론 갚는 방법은 제 마음대로입니다만.”
“잘 모르겠지만 거부권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하하. 글쎄요. 두고 보시죠.”
“처음으로 두고 보자는 말이 두려워졌어요.”
“저런. 책임지고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죠.”
“그런 뜻이 아닌데요.”
나는 능청스럽게 싱긋 웃으며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널브러졌고, 하품을 했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고,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가 묘한 뉘앙스를 풍겼지만 나는 차가운 물에 그릇을 씻으며 애써 그를 모른 척 했다. 루이스가 하는 말은 사실이었고, 나의 말도 사실이었으나 나는 온전히 내 의지로 잠든 그를 만져댔기에 언쟁에선 불리했다.
물론 그가 이 쓸데없고 하찮은 언쟁에 이긴다 해도 다시 혼자 자는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릇을 마른 천으로 닦아 올려놓는 사이 루이스는 침대에 누웠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자는 얼굴이 정말 귀엽다. 괜히 볼을 콕콕 누르며 괴롭히고 싶은 충동에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눈을 떠 나를 흘겨보는 바람에 놀라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상한 생각 말아요.”
“이상한 생각이라니, 어떤?”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하긴 어려운지 루이스가 입술을 달싹이다 홱 돌아누웠다. 토라진 아이 같은 반응에 나는 소리 내어 웃었고, 루이스는 하나뿐인 이불을 그의 몸에 꽁꽁 둘렀다. 그만 웃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애벌레 같은 모양새가 귀여워 웃음이 멎질 않았다.
“좋아요. 제가 졌습니다. 쿡, 큽.”
“비도 오는데 어디 계속 해보시죠.”
“오, 내쫓기라도 하려고요?”
“못할 것도 없죠.”
루이스는 시니컬하게 대답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나는 허리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이불 위에 팔을 얹고 몸을 기댔다.
“봐주시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 비오는 거리로 내쫓기다니 처량하지 않습니까. 내일 아침 문 앞에서 동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르고요.”
“신원 미상의 시체가 한 구 늘겠네요.”
“루이스.”
지그시 그를 바라보자, 따박따박 시니컬하게 대답하던 루이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꽁꽁 싸맨 이불을 조금 풀고 몸을 벽에 가까이 붙여 자리를 만들어준 그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하고, 나는 좁은 자리에 내 몸을 욱여넣었다. 침대를 넘어가는 긴 다리로 루이스의 다리를 감싸고 한 팔은 그의 허리에 감자 비로소 안정감이 들었다.
“나는 가끔, 당신 없이 어떻게 잠드나 싶습니다.”
루이스는 등을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역시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바람은 더 차가워지고 있기에 혼자인 밤은 더더욱 외롭고 추워질 터였다. 함께 라는 것만으로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그 또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곤히 잠들 리가 없다. 나는 그의 허리를 안고,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씻은 지 얼마 안 되는 그의 몸에서 비누 냄새가 났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몸을 움직일 정도가 됐지만 기억은 여전히 불완전한 채로 멈춰있었다. 기억이 수반하는 끔찍한 두통에 비하면 돌아오는 정보는 터무니없이 적고, 단편적인 기억과 습관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체를 유추하는 속도는 답답하다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더디다. 드문드문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고, 루이스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애매한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정 생각나지 않으면 잠시나마 쓸 가명을 스스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름 달력을 봐도 내키지 않았다. 루이스는 더 말하지 않았고, 이틀에 한 번 꼴로 들어왔다. 화약 냄새와 약 냄새, 싸한 알콜 냄새와 함께 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오래된 종이와 책 냄새와 함께 들어오기도 했다.
그 사이 두통은 잦아들고 상처도 아물어 갔지만 짙은 어둠에 잠긴 기억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뿔뿔이 흩어진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려 해도 주어진 퍼즐 조각이 너무 적었다.
루이스가 가져오는 신문을 보거나, 집안일을 하고 그를 기다리며 식사를 준비하는 게 하루의 전부. 이렇게 지루한 일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했다. 언제든 나갔다 와도 좋다며 열쇠를 줬지만 왠지 모르게 나가고 싶지 않았다.
레시피에 부족한 재료가 있어도 문 앞에 서면 안전하고 아늑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끝끝내 발을 잡곤 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까지, 의식주 전부를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이 상황이, 낯설면서도 즐거웠다.
“저기.”
“무슨 일입니까?”
부르는 소리에 스튜를 끓이다 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루이스가 구급상자를 꺼내 놓고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지만 해주겠다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끓이던 스튜의 불을 끄고 다가가 셔츠를 벗자 루이스가 손을 뻗었다. 그를 둘러싼 냄새들을 전부 걷어내면, 루이스에게선 미미하게 서늘한 향이 났다.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나 겨우 맡을 수 있는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싸한 민트 향을 떠올렸다. 루이스의 손은 배를 감싼 붕대를 풀고 거즈에 알콜을 묻혀 상처를 소독했다.
아찔한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지만 루이스를 잡지는 않았다. 전에 무심코 잡았다가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는 바람에 루이스의 어깨엔 아직도 옅은 멍이 들어 있었다. 그 멍자국을 볼 때마다 기묘한 도취감에 휩싸인다는 것을 과연 이 단정한 얼굴의 남자가 알까.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동안 소독을 마친 루이스가 상처를 물끄러미 보다가 후, 숨을 불었다. 알콜이 날아가며 닿는 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큼 목을 가다듬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담기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자신이다.
흰 피부를 물어뜯고, 짓씹어 삼키고 싶다. 손끝에서부터 번지는 충동과 열기에 목울대가 울렸다. 잠시 눈을 맞추던 루이스는 아무 말 없이 작은 가위를 알콜로 닦고 배를 잡았다. 상처를 꿰맨 실밥을 풀어내려는 것뿐이지만, 제게 집중한다는 그 하나의 사실에 홧홧한 열기가 아랫배에 몰렸다. 당장, 이 사람을.
밀어 넘어뜨리고, 아무것도 못 하게 제압한 뒤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치우고 싶다. 흰 목덜미를 손에 쥐면 어떤 표정을 할까. 그 붉은 눈동자에 어떤 감정을 담고 나를 바라볼까.
툭, 툭, 가위가 실을 끊는 소리와 함께 루드빅은 달뜬 숨을 내뱉었다. 호흡이 거칠어진 것은 흥분했기 때문이다. 가위가 실을 당기는 통증마저도 아찔했다.
“후, 루이스....”
“조금만 참아요. 거의 다 끝났으니까....”
셋, 둘, 하나. 마지막 실이 끊기고, 자그마한 핀셋으로 실을 뽑아내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이어졌다. 낮게 신음하자 작게 속삭이듯 말한 루이스가 다시 알콜을 묻힌 솜을 갖다 댔다. 아린 통증에 고개를 숙이자 그의 손이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토닥였다.
그 상냥하고 자상한 손길에 그만, 참고 있던 충동이 달려 나갔다.
“읏.”
“당신....”
침대 위로 넘어트린 루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붉은 눈으로 바라볼 뿐. 등골이 오싹해지는 스릴에 고개를 숙여 내려가자 루이스의 손이 그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그의 눈이, 서늘한 무표정에 강한 욕망이 들끓는다.
단호한 거부 앞에 얇게 눈을 휘며, 혀를 내밀어 제게 향한 손바닥을 핥자 루이스의 손이 움칫 굳었다.
“루이스.”
“좀 당황스럽네요.”
“하하, 당황한 얼굴이 아닙니다만.”
흠칫흠칫 떨리며 주먹을 그러쥐는 손끝에 입을 맞추고 눈을 치켜 올리자 루이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 허리를 쓸어내리자 루이스가 턱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짓, 위험하다고 생각 안 합니까?”
“쫓아내기라도 하려고요? 이제 와서?”
“못할 것도 없죠. 이제 거의 다 나았고.”
“몸이 낫는다고 전부 낫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 팔을 잡아챈 그의 손을 잡아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깍지를 끼기 전, 루이스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내 잡히고 말았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 쪽, 그의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며 다리 사이로 무릎을 넣어도 루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저항하고 거부하며 혐오할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너무 조용하다.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 고개를 들자 루이스가 빈손으로 뺨을 감쌌다. 약간 차가운 그의 손이 뺨에 닿을 때, 움찔 떤 것은 오히려 다가가던 제 쪽이었다. 누군가가 제게 다가오는 게, 호의를 베푸는 게 낯설다.
감정 없는 관계. 그저 유린하고, 농락하며 제 욕구를 채울 뿐인 그런 무미건조한, 일방적인 관계가 되어야 했다.
“그만.”
“...루이스.”
“괜찮아요. 이런 짓 안 해도 되니까.... 조금 쉬어요.”
잠시 망설이다 저를 끌어안은 루이스는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끔찍한 악몽을 꾸고 헐떡이며 일어난 자신을 달랠 때처럼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대게 하고 어르는 목소리는 자상하고, 뺨에 닿는 피부는 따뜻했다. 이 남자는 제가 남창이나 귀부인들의 노리개 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쫓기며 달아나는 꿈을 꾸다 보면 그것이 제 과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루이스의 추측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닐지 모른단 생각이 들면서도, 몸에 가득한 상처와 문신을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린 피 냄새와, 살육, 먹잇감을 쫓고 먹어치우는 그런 충동과 감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데 겨우 그런 일을 했을 리가. 하지만 그런 오해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들은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것이라, 나는 굳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품.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달고, 또 따스했다. 한 순간 깨져버릴 것만 같아서 더, 놓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 모두가 그저 값싼 동정과 연민에 불과할지라도.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조금은 태도가 변할 법도 하건만 그는 서운할 정도로 태연했다. 같이 저녁을 먹고, 루이스는 서류를 보다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드러눕는다.
실밥도 풀었으니 이제 당당히 그의 침대를 요구해도 될 텐데. 말을 꺼내려다, 거절할 것 같아 도로 입을 다물었다.
며칠간 함께 생활한 바로 미루어 보건데 루이스를 움직이려면 곧이곧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 아닌 것 같아도 정에 약한 그를 뜻대로 움직이려면 약은 수를 쓰는 게 훨씬 빠르다.
나는 불을 끄고 누워 잠시 시간을 죽이다 화들짝 놀란 듯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잠에 빠져든 그. 소파 앞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이름을 불렀다.
“루이스.”
“으응.... 또 악몽 꿨어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손을 잡에 제 머리 위에 올리고, 머리를 기대자 루이스가 올라오라 손짓했다. 냉큼 그의 위에 올라타 몸을 겹치자 루이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자줬으면 좋겠는데.”
“...나 잠버릇.... 있어서....”
“무슨?”
“옆에 누구 있으면.... 자꾸.... 끌어안아서....”
어지간히 졸린 것인지 루이스의 말이 다 늘어졌다. 버릇인 줄은 몰랐지만 품에 파고든다는 것은 전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와중에도 성실하게 답을 하는 게 귀엽고 안쓰러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린 그에게 입 맞추고 싶은 걸 꾹 참고, 눈을 휘며 웃었다.
“좋아요. 좋습니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안 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신경을 안 쓰는 건 아니었다는 게 기뻐, 잠투정처럼 하는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침대는 아직 체온이 다 식지 않아 미지근했지만 성인 남성 둘이 눕기엔 역부족이라 모로 누워야 했다. 숨이 닿는 거리, 무방비하게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그.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먼 과거부터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 속 나는 쫓기고 있었고, 그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그 긴 추격 끝에 내가 승리했으리란 것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지만 기억이 돌아올 때 함께 찾아오는 두통과 감정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왜, 어째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런 의문과 억울함은 서서히 분노가 되었고, 이윽고 빛으로 덮여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됐다. 거추장스러운 기억일 뿐이지만,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쥐면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차가운, 자잘한 상처투성이인 그의 손은 머리나 등을 쓰다듬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고, 그저 가만히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머리를 쓰다듬는 온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이 사람만 이렇게 함께 있어주면 지긋지긋한 두통도, 악몽처럼 다가오는 기억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루이스.”
가만히 누워, 입모양으로 달싹거린 이름에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혀끝에, 손끝에 피어오르는 열과 감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야망도, 분노도, 짜릿한 희열도 아닌, 작고 따스하게 피부를 간질이는 미풍.
차가울 뿐인 공기가 이 사람을 거쳐 달콤한 숨이 된다. 루이스가 내쉬는 공기를 마시며, 그를 가진 기분에 흠뻑 취한 나는 팔 안에 안긴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느껴본 적 없는 온기가 따스해 양손에 움켜쥐고 놓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가 늦는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들어오던 사람이 사나흘에 한 번 꼴로 들어오는데, 그를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한 나머지 밖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매번 신문과 이런저런 잡지를 가지고 돌아와, 식사도 건너뛰고 죽은 듯이 잔다. 그마저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소파에서 뒤척거리며 잠을 설치기 일쑤라 침대로 옮겨준 게 벌써 한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도 문이 열리자 지친 얼굴의 그가 종이 뭉치를 한 다발 내밀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는 종이뭉치를 받아들고 마른세수를 하며 앓는 소리를 내는 루이스를 불렀다.
“루이스.”
“괜찮아요. 오늘은 좀 잤으니까....”
혼을 내듯 짐짓 엄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리고,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 초췌했다.
피곤한 것뿐이지만 무감각한 시선이 묘한 긴장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홀린 듯 다가가자 루이스의 손이 내 셔츠의 소매를 만지고, 그의 조금 차가운 손끝이 손목을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그러쥐었으나 루이스는 개의치 않고 옷을 만지다 보풀이 일어난 부분을 잡았다.
“잠시만 잡고 있어요.”
서랍에서 실과 바늘을 꺼내온 루이스가 나를 옆에 앉혔다. 바늘구멍에 실을 꿰고, 손목을 잡아 튿어진 소매의 단추를 풀어 해진 천에 바늘을 넣어 빼는 행위를 반복하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심장이 뛰는 소리가 부쩍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눈앞을 가리는 노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루이스와 그의 손. 저 손을, 곧게 뻗은 손목을 잡아 쥐고 싶다.
숨을 죽이던 나는 팽팽한 긴장과 솟구치는 욕망을 감추기 위해 입을 열었다.
“능숙하군요.”
“필요하면 다 하게 되어있는 거죠.”
별 거 아니란 듯 대답한 루이스는 고개를 소매에 처박다시피 하고 손을 놀렸다. 새하얀 손등에 새로 난 분홍색 흉터. 마지막으로 본지 얼마나 됐다고 루이스의 손등이며 손가락에 상처가 또 늘었다. 루이스의 몸에선 여전히 오래된 종이와 먼지 냄새가 났지만 종이만 만지는 사람이 이렇게 다칠 리 없다.
단정한 얼굴과 달리 그의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과 단순한 사무직이 아니라는 것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은 그냥 이대로, 고요한 호수처럼 있어줬으면 좋겠다.
옷을 벗기지도 않고, 한 번 찌르는 일도 없이 소매를 꿰매던 그가 실을 팽팽하게 당기다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기, 최근 한 달 실종자 명단을 봤는데... 당신이랑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뇨. 아마.... 신고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루이스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다 이로 실을 끊었다. 왜냐는 말도, 뭔가 생각났냐는 말도 없이 그냥 그렇게 툭. 실을 끊으며 나의 말도 끊어낸 그는 실과 바늘을 갈무리해 일어났다. 나는 목 아래 고여있던 숨을 뱉고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그의 등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루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뭐 필요한 건?”
“글쎄요, 새 옷이랑.... 등유, 밀가루, 토마토, 당근이랑....”
왠지 모를 오기와 불만에 퉁명스럽게 말하자 루이스가 도로 소파에 앉더니 작은 통을 건넸다.
“웬 겁니까? 사탕이라니.”
“전에 잔뜩 받은 게 있었는데, 다른 건 아이들 나눠주고 남은 거예요.”
“의도를 모르겠군요. 먹고 입 다물란 겁니까?”
루이스는 싱긋 웃으면서 사탕 내밀었고, 나는 그 미소에 못 이긴 척 사탕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이 사람의 얼굴에, 그 중에서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웃음에 약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민트의 향에 모르게 반가운 기분이 들어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단 맛에 입을 열었다.
“뭐.... 나쁘디 않군요.”
“다행이네요.”
“당시는?”
“장 봐올게요.”
사탕 때문에 새는 발음이 우스꽝스럽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짓는 미소에 생각이 멈췄다. 루이스는 바로 일어나버렸지만, 손끝이며 뺨에 번지는 열은 쉬이 가시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금방 올 줄 알았더니 저녁 늦게 양손 가득 식료품을 들고 온 루이스는 소파에 앉았다가,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대로 누워 반대편 팔걸이에 다리를 올렸다.
“밥 안 먹어도 되니까 깨우지 말아줘요.”
“또 거기서 잘 겁니까?”
담요를 끌어다 덮다가,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무미건조한 시선에 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종이 식료품을 정리하다 말고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다가가 빈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그의 소파에 손을 올렸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
말없이 눈을 깜빡이던 루이스가 시선을 내렸다. 내리깐 눈과 떨리는 속눈썹, 그 아래 드리우는 그림자. 그 뺨에 손을 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크지 않지만 명확한 동의의 표현 앞에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루이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고, 이불을 덮어쓰곤 돌아누웠다. 나는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를 바라보다 소파 위의 담요를 접어놓고 하던 정리를 마저 하기 위해 일어났다.
딱히 배가 고프다거나 식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정리를 마치고 바로 그가 잠든 침대로 향했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벌써 잠들어 무방비한 상태의 루이스가 어른거려 옆에 있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들어가 좁은 침대에 몸을 누이자 루이스가 몸을 웅크렸다. 작은 동물 같은 반응이 귀여워 건드리고 싶으면서도, 이대로 곤히 잠든 모습을 보고 싶어 머리를 받치고 그를 내려다 봤다.
이렇게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같은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특별한 기분이 든다. 이 사람에게 구해져, 이 집의 가구처럼, 혹은 말을 잘 듣는 개처럼 이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삶.
묶여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누군가에게 예속될 수 있다니. 묘한 기시감과 불쾌한 기분이 들어 주먹을 쥐었다가, 루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흠칫, 떨리며 움츠러드는 게 꼭 괴롭히지 말라는 것 같았다. 괜한 심술에 꽉 끌어안자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이던 그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무거운 눈을 밀어 올려 제게 향하는 멍한 시선.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던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다 몸에 힘을 빼곤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을 잡고, 검지로 손바닥을 간질이자 루이스가 미간을 좁히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귀엽다. 누군가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온전치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제게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루이스.”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내 불러보는 이름이 달았다. 마치 전에 그가 준 쿨캔디처럼, 혀끝에서 달콤하게 녹아들어 서늘한 향이 퍼지는 것 같았다. 루이스가 쥔 주먹에 잡힌 손가락을 그대로 밀어 넣어 손깍지를 꼈다. 잠든 그는 밀어내지 않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맞춰 숨을 쉬는데 루이스가 작게 웅얼거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추위를 원망했다면 모를까 반겨본 적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오늘만큼은 추위와 어둠이 고마웠다. 감사해야 하는 밤이었다.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눈을 썼을 땐, 낯선 공간에 있었다. 격통에 배를 움켜쥐자 까슬한 붕대가 손바닥에 닿았다. 통증에 눈을 질끈 감고 헐떡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 철제 침대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냈다.
치료가 된 환부와, 낡고 허름한 집.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필요한 것만 잘 정돈된 공간을 눈으로 훑으며 주변을 면밀히 둘러보면 볼수록 낯선 공간에 대한 이질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렇다 할 위험은 느껴지지 않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배의 통증에 더불어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쨍하게 울리는 두통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자신의 몸에는 왜 이렇게 흉터가 많고 이렇게 큰 부상을 입은 채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뜬 것인가. 무엇이든 떠올려보려 해도 초조함에 두통만 심해질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꼭 기억에 검은 잉크를 부어놓은 것 같다.
그렇게 고통에 허덕이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몸을 지킬 수 잇을만한 것을 찾다가, 침대 옆에 있는 가위를 쥐고 도로 침대에 누워 자는 척 숨을 죽였다. 문고리와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 뒤에, 경첩이 삐그덕 거리며 문이 열렸다.
선이 가는 체구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종이봉투를 주방에 내려놓고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호의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상과 허름한 집. 다친 자신을 데려와 치료를 하고 돌봐준 걸 보면 당장 자신을 해치진 않을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죽일 생각을 하다 퍼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혼란스러워졌다. 왜,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당연하게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고, 이렇게 부상을 입은 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눈을 뜨게 된 것인가.
침대로 다가온 사람의 몸에선 낡은 종이와 먼지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도서관이나, 서류를 만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서늘한 손이 조심스레 이불을 걷었다가 다시 덮고는 멀어지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는 것이, 너무 낯설다. 어색하고 낯선, 경험해보지 못한 온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손길과 눈길에 덜컥 겁이 나면서, 가슴과 눈이 뜨거워졌다. 마치 이런 보살핌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구는 자신이 무섭고, 눈을 떴을 때 펼쳐질 상황이 두려웠다. 또다시 쫓기게 되는 건 아닐까.
삽시간에 저를 덮치는 어둠에 손에 꽉 거머쥔 가위를 놓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는 것조차 결심이 필요했다. 눈을 뜨자마자 공황에 빠졌던 것과 너무 차이가 나면 의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쫓기지 않는다는 확신이, 안전하다는 확인이 더 우선이었다.
지금 이 남자도, 사주를 받고 잠시 저를 돌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어나면 다시 어딘가로 끌려가,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가위를 쥐고 눈을 떴다. 제게 무슨 해코지를 할 지 모른다는 불안과,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려야한다는 판단 하에 다시 다가오길 기다리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노련한 사냥꾼은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법.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복부의 통증과 함께 머릿속이 굉굉 울리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덮쳐왔다.
“큭...! 크허, 허억. 헉.”
“괜찮아요? 숨 쉬어요. 자, 괜찮으니까....”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부여잡았던 머리를 당겨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제 몸에 손을 대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의 품에 기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으면, 점차 고통이 잦아들며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낡은 종이 냄새와 비누 냄새. 살짝 감도는, 시원한 향. 지척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 소리. 그 사소한 것들에 술렁이던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숨을 고르자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떨어졌다. 왠지 그 손이 떨어지는 게 아쉬워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좀 괜찮습니까?”
“당신은....”
“아, 루이스. 그냥 루이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느낌이다. 잘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왠지 이 사람은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처가 꽤 깊었어요.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왜 날....”
“...기억 안 납니까?”
기억이라는 소리에, 다시 두통이 찾아와 눈을 질끈 감고 그 통증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신은 누군지, 이 사람은 왜 자신을 도와주었으며 왜 자신은 이런 생각들만 하는 것인지, 혼란에 휩싸여 그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허억. 헉. 당신, 나를 압니까?”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묻자 자신을 루이스라고 밝힌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그 반응에, 낭패감과 함께 혀를 찼다. 방금 했던 것처럼 기대기라도 하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루이스는 다시 머리를 감싸지도 어깨를 내어주지도 않았다.
“당신, 글림듀에 쓰러져있었습니다. 기억 안 나요?”
“제길,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내가 누군지도, 뭘 하던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일순 루이스의 표정이 굳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루이스가 몸을 돌려 책상에 있던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데, 그 옆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눈치라 덩달아 긴장하다가도 문득 학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자란, 순수하고 선한 청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데려와 치료를 하고 돌봐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게 그 옆얼굴을 바라보는데 루이스가 한 쪽으로 기운 천칭을 그린 종이를 눈앞에 내밀었다.
“혹시 이런 문장 본 적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그게 뭐죠?”
“그렇군요.”
예상을 벗어났는지 루이스가 종이를 책상 위에 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건 순식간이다.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에 무심코 옷깃을 잡자 루이스가 돌아보며 제 손 위에 그의 손을 올렸다. 막연히 생각한 것과 달리 그의 손은 조금 차갑고 딱딱했지만 제 손을 떼어놓지는 않았다.
얼핏 서늘해보여도 제게 매달리는 사람은 내치질 못한다. 그리 매정한 사람은 못 되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전 집을 비울 때가 많아서.... 뭔가 생각나거나 그러면 말없이 그냥 나가도 됩니다. 일단 오트밀 죽을 만들긴 했는데.... 음. 있는 건 다 먹어도 돼요.”
“보통은 의심부터 하는 거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믿어도 되나요?”
침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수긍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데도 수상하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루이스는 잠시 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해서 접근하는 거라면, 보통은 기억을 잃었다는 터무니없는 말로 속일 생각을 하지는 않죠. 안 믿으면 그만이니까.”
“그걸 알면서 이러는 겁니까?”
“네.”
“왜죠?”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너무 사람을 쉽게 믿는 거 아닙니까?”
“덜컥 사람을 믿는 타입은 아닌데요. 굳이 따지자면 불신하는 쪽이라서.”
“행동과 말이 어긋나는데요.”
“당신, 일주일 넘게 누워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일어나자마자 남을 속일 정신머리가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사경을 헤매다보면 무슨 일이 안 생기겠어요.”
루이스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겪어본 적 있다는 듯 덤덤했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 같아 슬쩍 기분이 상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기억이 없었고, 아무리 시큰둥하게 굴어도 그는 제 생명의 은인이었다.
당장 어디 의지할 곳도 없이 밖으로 나간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당장 내쫓겨도 할 말이 없는 처지에, 다친 자신을 데려와 치료한 사람의 에게 조금 더 신세를 지는 게 괜히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낫다는 건 따져 볼 것도 없었다.
“그럼 조금만 더 신세를 지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트밀을 데워 오겠다며 일어났다. 오트밀 죽은 맛이 느껴지지 않지만 따뜻했고, 그는 다 먹는 걸 지켜본 뒤에 물 한 컵과 함께 침대 옆 책상 위에 있는 약을 종류 별로 알려주고는 차를 끓여 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찻잎 향이 가득 퍼지고, 루이스가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차와 책. 어딘가 서늘한 인상을 풍기는 그. 이 모든 게 왠지, 기묘한 운명이 쓴 하나의 드라마 같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창밖은 어둑했고, 큰 상처를 입은 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점차 약기운에 눈이 감기며 그렇게 다시 몽롱한 수면에 빠져들었다.
* * *
또 얼마를 잤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숨소리마저 시끄러울 정도로 고요한 밤이었다. 그 사이에 붕대가 바뀌었고, 집주인인 그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릎 밖을 소파 밖으로 뻗은 채로 고른 숨소리를 내는 그에게 발소리를 다가가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살이나 됐는지, 갓 스물 초반이나 됐을까 싶은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삶에 지친 자의 얼굴이다. 달빛조차 희미한 짙은 어둠 속. 천천히 홀린 것처럼 그의 목에 손을 뻗었다. 흰 피부는 서늘하고, 손끝에 닿는 맥박에 갑자기 두통이 찾아와 머리를 부여잡았다.
꾹 감은 눈꺼풀 아래로 비명과 피비린내, 살육의 현장이 스쳐 지나갔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체와, 차가운 피부, 그리고 손끝에서 사라져가던 생명의 울림. 그 모든 것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눈을 뜨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다시 그가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숨소리가 가슴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다지도 끔찍한 장면을 보며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대뜸 목을 쥔 것도 그렇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와 눈을 감고 한숨과 함께 낮은 신음을 내뱉자 루이스가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덮어주려 손을 뻗는데 돌연 그가 제 손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움찔 숨을 집어 삼켰지만 그냥 잠꼬대에 불과했는지 더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이불을 덮어준 뒤에도 루이스는 깨어나지 않았다. 힘이라곤 전혀 들어가있지 않은 손은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지만 왠지 모르게 애틋해 놓고 싶지가 않았다. 서늘한 목과 달리 그새 따뜻한 손을 마주잡자 잠시나마 그의 얼굴이 풀어진 것 같았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호감을 느끼다니. 제가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마음 어딘가에선 이 사람에게라면 그래도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트리비아 카리나를 놓친 건 간발의 차였다. 의뢰는 트리비아 카리나의 생포. 그게 안 된다면 그녀의 동행인 영웅 루이스라도 생포할 것. 루드빅은 제 발을 잡고 쓰러져 피를 토하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접근해 급소를 차버린 덕에 몸을 일으키는 것도 무리일 텐데, 그 와중에 제게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는 게 용했다. 루드빅은 트리비아가 사라져버린 방향을 한 번 슥 보고는 바짓단을 잡고 놓을 줄 모르는 영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세를 낮춰 쪼그려 앉은 루드빅은 루이스의 머리를 잡아올렸다. 고통에 눈을 찡그린 루이스의 얼굴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루드빅은 루이스의 머리를 놓고 일어나 잡힌 다리를 털듯 그의 어깨를 걷어찼다. 그 와중에도 다리를 놓을 줄 모르는 손이 희게 질렸다. 푸르스름한 서리가 어리는 걸 본 루드빅은 그의 손을 발로 밟았다. 여태 신음 한 번 안 내던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호오, 이제야 조금 협조할 마음이 든 겁니까?”
“협조는, 무슨.... 크흑....”
“저는 의뢰를 받은 것 뿐입니다만.... 그렇게나 그 여자가 소중한 겁니까? 그녀는 당신을 버렸는데도?”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머리를 잡아 눈을 맞출까 생각하며 발 아래 손을 짓이기듯 발을 움직이자 루이스가 다시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질렀다. 조금 즐거워졌는지도 모른다. 기회를 노리며 지켜보는 내내 고요한 호수처럼 얼어붙어 연인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남자다. 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 루드빅은 루이스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올렸다.
“큿, 컥.... 흑....”
“대답하세요. 그렇게 그녀가 소중합니까?”
루이스가 손을 긁으며 떼어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목이 잡힌 채론 말도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잡고 있다가 놓아주자 루이스가 막힌 숨을 들이마시며 콜록거렸다. 반복된 폭력은 사람을 체념하게 만든다. 반항해도 상관 없지만, 기왕이면 고분고분한 편이 포획과 이송에 편한 법이었다. 루드빅은 다시 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억지로 끌려온 루이스의 눈은 여전히 붉은 적의로 가득차있었다.
“사랑 때문에 대신 죽어주려는 멍청이들이 있긴 했지만.... 안심하세요. 당신도 의뢰 대상 중 하나니까. 순순히 말만 들으면 더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큭.... 그냥, 지금 죽여서 시체를 갖지 그래?”
“저런.... 모처럼의 호의였는데, 거절하신다면야.”
루드빅은 루이스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그의 명성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서라도 과격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건만, 도저히 꺾일 줄 모르는 먹잇감을 상대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루드빅은 루이스의 손과 발을 묶어 어깨에 들쳐맸다. 몹시 드물게도, 흥미가 생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할 방식의 고문 앞에 그는 어떤 표정일까. 기대로 걸음이 빨라졌다.
눈을 뜬 루이스는 입에 묶인 재갈과,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된 채 높이 묶인 팔의 상태를 깨닫고 낙담했다. 무슨 약을 쓴 건지, 아니면 그 사이에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건지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진 것처럼 멍했다.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멍한 머리를 굴렸다.
이래서야 능력을 쓸 수도,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볼 수도 없다. 상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헌터. 입이 자유롭다 해서 세 치 혀의 농간에 놀아날 리도 없지만 그래도 거래가 된다는 점에서 협상의 여지는 있었다. 어차피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건 트리비아의 몫, 루이스에겐 이렇다할 정보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노리는 것은, 능력자 세계에 고하는 일종의 위협이었다. 2차 능력자 전쟁의 영웅, 연합의 영웅이 헌터에게 사냥당했다. 그 한 마디 명제로 안 그래도 소란스러운 밤에 혼란과 공포가 더할 게 뻔했다. 그러니 여기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차분한 방 안은 호텔이거나 그 비슷한 주거공간이고, 원래 입고 있던 옷 대신 얇은 샤워 가운이 입혀져 있었다. 고문용 전기의자나 소, 돼지처럼 매달린 것도 아니고 침대에 누워있지만 루이스의 발이 닿는 곳에는 흉기는 커녕 이불 조차 없었다.
손을 묶은 사슬을 끊어보려고도 했지만 사슬은 얼음의 냉기를 빨아들여 차가워질 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헌터가 사이퍼를 사냥하기 위해 쓰는 사슬이니 그냥 사슬과 같을 리 없었다.
루이스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슬을 끊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안 된다면 괜한 데 힘을 낭비할 수 없다. 깨어날 때부터 멍한 머리가 아파왔다. 몸에 열기가 도는 게, 아무래도 감염이 됐거나 무슨 약이라도 주사한 모양인데 이대로는 루드빅이나 다른 사람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는 서서히 오르는 열기에 몸을 일으켜 베개 위에 등을 기댔다. 계속 들려있던 팔이 저렸다. 팔꿈치를 내려 차라리 누구든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도중에 마침내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열리고 금발의 사내가 들어왔다.
“이런, 깨어계셨군요. 어떻습니까, 영웅에서 먹잇감이 된 소감은?”
입에 문 재갈때문에 어차피 대답을 할 수 없는 루이스는 소리 없이 그를 노려봤다. 루드빅은 웃으며 다가와 목을 손에 쥐었다. 그대로 힘주어 잡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루드빅의 손은 가볍게 목을 쓰다듬고는 떨어졌다. 그의 손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동시에 손가락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열이 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루드빅이 무릎을 잡았다.
“아, 혹시라도 반항 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루드빅은 아직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고 움츠러든 루이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말끔히 씻기고, 사전 작업을 해둔 그는 뭇 여성들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무릎을 모아 당기는 방어자세가 내내 품고 있던 흥미를 부추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