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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루이] 01.
짐승을 주운 루이스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눈을 썼을 땐, 낯선 공간에 있었다. 격통에 배를 움켜쥐자 까슬한 붕대가 손바닥에 닿았다. 통증에 눈을 질끈 감고 헐떡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 철제 침대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냈다.
치료가 된 환부와, 낡고 허름한 집.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필요한 것만 잘 정돈된 공간을 눈으로 훑으며 주변을 면밀히 둘러보면 볼수록 낯선 공간에 대한 이질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렇다 할 위험은 느껴지지 않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배의 통증에 더불어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쨍하게 울리는 두통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자신의 몸에는 왜 이렇게 흉터가 많고 이렇게 큰 부상을 입은 채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뜬 것인가. 무엇이든 떠올려보려 해도 초조함에 두통만 심해질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꼭 기억에 검은 잉크를 부어놓은 것 같다.
그렇게 고통에 허덕이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몸을 지킬 수 잇을만한 것을 찾다가, 침대 옆에 있는 가위를 쥐고 도로 침대에 누워 자는 척 숨을 죽였다. 문고리와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 뒤에, 경첩이 삐그덕 거리며 문이 열렸다.
선이 가는 체구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종이봉투를 주방에 내려놓고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호의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상과 허름한 집. 다친 자신을 데려와 치료를 하고 돌봐준 걸 보면 당장 자신을 해치진 않을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죽일 생각을 하다 퍼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혼란스러워졌다. 왜,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당연하게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고, 이렇게 부상을 입은 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눈을 뜨게 된 것인가.
침대로 다가온 사람의 몸에선 낡은 종이와 먼지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도서관이나, 서류를 만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서늘한 손이 조심스레 이불을 걷었다가 다시 덮고는 멀어지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는 것이, 너무 낯설다. 어색하고 낯선, 경험해보지 못한 온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손길과 눈길에 덜컥 겁이 나면서, 가슴과 눈이 뜨거워졌다. 마치 이런 보살핌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구는 자신이 무섭고, 눈을 떴을 때 펼쳐질 상황이 두려웠다. 또다시 쫓기게 되는 건 아닐까.
삽시간에 저를 덮치는 어둠에 손에 꽉 거머쥔 가위를 놓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는 것조차 결심이 필요했다. 눈을 뜨자마자 공황에 빠졌던 것과 너무 차이가 나면 의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쫓기지 않는다는 확신이, 안전하다는 확인이 더 우선이었다.
지금 이 남자도, 사주를 받고 잠시 저를 돌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어나면 다시 어딘가로 끌려가,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가위를 쥐고 눈을 떴다. 제게 무슨 해코지를 할 지 모른다는 불안과,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려야한다는 판단 하에 다시 다가오길 기다리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노련한 사냥꾼은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법.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복부의 통증과 함께 머릿속이 굉굉 울리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덮쳐왔다.
“큭...! 크허, 허억. 헉.”
“괜찮아요? 숨 쉬어요. 자, 괜찮으니까....”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부여잡았던 머리를 당겨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제 몸에 손을 대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의 품에 기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으면, 점차 고통이 잦아들며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낡은 종이 냄새와 비누 냄새. 살짝 감도는, 시원한 향. 지척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 소리. 그 사소한 것들에 술렁이던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숨을 고르자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떨어졌다. 왠지 그 손이 떨어지는 게 아쉬워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좀 괜찮습니까?”
“당신은....”
“아, 루이스. 그냥 루이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느낌이다. 잘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왠지 이 사람은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처가 꽤 깊었어요.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왜 날....”
“...기억 안 납니까?”
기억이라는 소리에, 다시 두통이 찾아와 눈을 질끈 감고 그 통증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신은 누군지, 이 사람은 왜 자신을 도와주었으며 왜 자신은 이런 생각들만 하는 것인지, 혼란에 휩싸여 그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허억. 헉. 당신, 나를 압니까?”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묻자 자신을 루이스라고 밝힌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그 반응에, 낭패감과 함께 혀를 찼다. 방금 했던 것처럼 기대기라도 하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루이스는 다시 머리를 감싸지도 어깨를 내어주지도 않았다.
“당신, 글림듀에 쓰러져있었습니다. 기억 안 나요?”
“제길,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내가 누군지도, 뭘 하던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일순 루이스의 표정이 굳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루이스가 몸을 돌려 책상에 있던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데, 그 옆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눈치라 덩달아 긴장하다가도 문득 학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자란, 순수하고 선한 청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데려와 치료를 하고 돌봐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게 그 옆얼굴을 바라보는데 루이스가 한 쪽으로 기운 천칭을 그린 종이를 눈앞에 내밀었다.
“혹시 이런 문장 본 적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그게 뭐죠?”
“그렇군요.”
예상을 벗어났는지 루이스가 종이를 책상 위에 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건 순식간이다.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에 무심코 옷깃을 잡자 루이스가 돌아보며 제 손 위에 그의 손을 올렸다. 막연히 생각한 것과 달리 그의 손은 조금 차갑고 딱딱했지만 제 손을 떼어놓지는 않았다.
얼핏 서늘해보여도 제게 매달리는 사람은 내치질 못한다. 그리 매정한 사람은 못 되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전 집을 비울 때가 많아서.... 뭔가 생각나거나 그러면 말없이 그냥 나가도 됩니다. 일단 오트밀 죽을 만들긴 했는데.... 음. 있는 건 다 먹어도 돼요.”
“보통은 의심부터 하는 거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믿어도 되나요?”
침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수긍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데도 수상하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루이스는 잠시 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해서 접근하는 거라면, 보통은 기억을 잃었다는 터무니없는 말로 속일 생각을 하지는 않죠. 안 믿으면 그만이니까.”
“그걸 알면서 이러는 겁니까?”
“네.”
“왜죠?”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너무 사람을 쉽게 믿는 거 아닙니까?”
“덜컥 사람을 믿는 타입은 아닌데요. 굳이 따지자면 불신하는 쪽이라서.”
“행동과 말이 어긋나는데요.”
“당신, 일주일 넘게 누워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일어나자마자 남을 속일 정신머리가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사경을 헤매다보면 무슨 일이 안 생기겠어요.”
루이스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겪어본 적 있다는 듯 덤덤했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 같아 슬쩍 기분이 상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기억이 없었고, 아무리 시큰둥하게 굴어도 그는 제 생명의 은인이었다.
당장 어디 의지할 곳도 없이 밖으로 나간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당장 내쫓겨도 할 말이 없는 처지에, 다친 자신을 데려와 치료한 사람의 에게 조금 더 신세를 지는 게 괜히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낫다는 건 따져 볼 것도 없었다.
“그럼 조금만 더 신세를 지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트밀을 데워 오겠다며 일어났다. 오트밀 죽은 맛이 느껴지지 않지만 따뜻했고, 그는 다 먹는 걸 지켜본 뒤에 물 한 컵과 함께 침대 옆 책상 위에 있는 약을 종류 별로 알려주고는 차를 끓여 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찻잎 향이 가득 퍼지고, 루이스가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차와 책. 어딘가 서늘한 인상을 풍기는 그. 이 모든 게 왠지, 기묘한 운명이 쓴 하나의 드라마 같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창밖은 어둑했고, 큰 상처를 입은 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점차 약기운에 눈이 감기며 그렇게 다시 몽롱한 수면에 빠져들었다.
* * *
또 얼마를 잤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숨소리마저 시끄러울 정도로 고요한 밤이었다. 그 사이에 붕대가 바뀌었고, 집주인인 그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릎 밖을 소파 밖으로 뻗은 채로 고른 숨소리를 내는 그에게 발소리를 다가가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살이나 됐는지, 갓 스물 초반이나 됐을까 싶은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삶에 지친 자의 얼굴이다. 달빛조차 희미한 짙은 어둠 속. 천천히 홀린 것처럼 그의 목에 손을 뻗었다. 흰 피부는 서늘하고, 손끝에 닿는 맥박에 갑자기 두통이 찾아와 머리를 부여잡았다.
꾹 감은 눈꺼풀 아래로 비명과 피비린내, 살육의 현장이 스쳐 지나갔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체와, 차가운 피부, 그리고 손끝에서 사라져가던 생명의 울림. 그 모든 것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눈을 뜨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다시 그가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숨소리가 가슴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다지도 끔찍한 장면을 보며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대뜸 목을 쥔 것도 그렇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와 눈을 감고 한숨과 함께 낮은 신음을 내뱉자 루이스가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덮어주려 손을 뻗는데 돌연 그가 제 손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움찔 숨을 집어 삼켰지만 그냥 잠꼬대에 불과했는지 더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이불을 덮어준 뒤에도 루이스는 깨어나지 않았다. 힘이라곤 전혀 들어가있지 않은 손은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지만 왠지 모르게 애틋해 놓고 싶지가 않았다. 서늘한 목과 달리 그새 따뜻한 손을 마주잡자 잠시나마 그의 얼굴이 풀어진 것 같았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호감을 느끼다니. 제가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마음 어딘가에선 이 사람에게라면 그래도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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