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다이루이에 해당되는 글 17건
- 2016.08.28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 2016.08.28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 2016.08.18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 2015.12.27 [다이루이] Scarface. 02.
- 2015.12.09 [다이루이] 2
- 2015.12.01 [다이루이] Scarface. 01.
- 2015.11.30 [다이루이] Scarface. 00.
- 2015.11.25 [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 2015.10.25 [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 2015.10.25 [다이루이] 그 해 겨울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보이스를 내주는 바람에....22
은행의 실질적인 업무는 일반 창구 업무가 끝나는 4시부터다. 헬리오스의 에이스에서 은행원의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도 딱 4시였다. 그것뿐이라면 어떻게 병행할 수 있다. 문제는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 쪽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씩이나 되는 사람이 창구 업무를 볼 위치에 있는 건 아니지만 트와일라잇이라고 하면 내로라하는 능력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아무리 능력자 등록제가 시행되고 있고, 연합과 회사가 관리를 한다고 한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일반인이, 그것도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를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들을 상대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들로부터 기간을 엄수해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어느 정도 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신뢰와 정확, 냉철함을 두루 갖춘 데다 능력자들에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 그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은 이미 중역에서 그들의 임무를 다하기 바빴고, 그들을 고작 대여 업무나 시킨다고 트와일라잇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몇 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는 자연스럽게 다이무스에게 돌아갔다. 이 결정이 가장 효율적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문제는 일감은 줄지 않고, 시간은 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헬리오스의 업무에 은행 지부장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업무, 거기에 장비 대여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래도 두말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건 그것이 다이무스 홀든의 책임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홀든의 직계, 그것도 장남의 위치란 그런 것이다. 두 동생이 도움이 되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으나 둘 다 제 역할을 다하긴 커녕 다이무스의 속만 썩이기 바빴다. 전에는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가졌다면 요즘은 그냥 사고만 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루의 업무를 마치려면 퇴근은 당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다. 다이무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야근을 하다 사무실을 나왔다. 내내 앉아서 서류를 보느라 뻐근한 목을 돌리며 서점 앞을 지나려는데 문득, 걸음이 멈췄다.
이 시간까지 뭘 하기에 아직 불이 켜져 있나 했더니, 서점 안 의자에 널브러져 잠든 그가 눈에 들어왔다. 꼭 막내 녀석 같은 포즈로, 입까지 벌리고 자는 게 퍽 안쓰럽고 귀여워 서점 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깰 줄 알았더니 꽤 깊이 잠들었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문을 열어둔 채 불까지 켜고 불편하게 자느니 제대로 정리하고 돌아가 쉬는 게 나을 성 싶어 다이무스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낡은 경칩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 영웅씩이나 되는 남자가 이렇게 무방비한 건 위험하다 못해 무모한 일이다. 이글이야 천성이 그런 녀석이지만 침착하고 냉철한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었다.
물론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루이스에게 실례되는 일이지만. 모름지기 평소 행실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한심하다는 생각 대신 같은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민이 먼저 들고 만다. 그런데 왜, 그 다음엔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다이무스는 한 손에 책을 안은 채 눕다시피 앉아있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숙련된 검사인만큼 발소리가 큰 편은 아니지만 정장에 맞춰 신은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고작 몇 걸음.
가장 평범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깨우기 위해 뻗은 손이 멈췄다. 몸을 뒤척이며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몸을 모로 살짝 튼 채 고른 숨을 내쉬는 루이스의 입술과,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고른 치아에 그만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루이스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차마 다가가질 못했다. 아마도, 그때도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눈을 감으며 살짝, 닿았다 떨어진 다이무스는 그를 깨우려던 손으로 의자를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친애의 표시로도 하는 행위지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다이무스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고 화끈거리는 목을 매만졌다. 루이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고, 입을 맞추었다는 건 자신밖에 모른다. 다이무스는 헛기침을 했다. 떨리는 루이스의 속눈썹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들어올 때만 해도 이런 데서 이렇게 잠든 걸 안타까워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도무지 깨어날 줄 모르는 게 반가웠다.
잠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이무스는 본래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을 하기 위해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루이스.”
“으응…….”
“일어나라. 돌아가서 자도록.”
몸을 웅크리며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도리 저으며 깨어나길 거부하던 루이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다시 잠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루이스가 눈을 떠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에 조금 서운해지려는 찰나, 그의 시선이 다이무스를 피해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 큼. 크흠. 그, 다이무스 경....”
“퇴근하던 중에 불이 켜진 게 보였다.”
“아, 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깨우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루이스도 급히 일어나 떨어트렸던 책을 줍다가 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 발 앞서 나간 다이무스의 손이 루이스의 팔을 잡은 덕에 어디 부딪치는 일은 막았지만 상태가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괜찮나?”
“...네,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입니다.”
“조심하도록.”
루이스가 눈을 내리깐 채 작게 숨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무척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는 게 아쉽지만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할 시간이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것으로 격려를 담아 인사하고 돌아섰다.
들어올 때도 그랬지만 나가는 것 역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작 몇 걸음을 옮기는 게 아쉬워진다. 다이무스. 그의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했다.
그런 기대로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기다린 목소리가 다이무스를 불러 세웠다.
“저....”
기대한 것처럼 이름을 불러준 건 아니지만 충분하다. 다이무스는 한 박자 쉬고 고개를 돌렸다. 멀어지는 동안 낸 목소리만큼이나, 망설임이 가득한 표정이 꼭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려는 것 같아서 손에 든 서류 가방을 꽉 잡았다.
“감사합니다.”
망설임 끝에 겨우 입 밖에 낸 감사가 어찌나 기특한지. 그 자신도 모르게 다이무스의 입술이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하지.”
“네? 아, 예.”
“그럼.”
“좋은 밤 되시길.”
기분 좋게 서점을 나선 다이무스는 밤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나긋한 목소리를 되새겼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 피로가 반절은 덜어진 것 같다. 고작 몇 분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이다. 상투적인 인사일 뿐이라는 것쯤은 안다.
허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다이무스 홀든에게 오늘밤은 그저 평범한 여느 하루와 같지 않아졌다. 불현듯 떠오르는 시상에 다이무스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 누가 이토록 영감을 줄 수 있을까.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듯, 사랑스러운 간질거림이 피어올랐다.
그의 말 그대로, 좋은 밤이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0) | 2016.08.30 |
---|---|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공식에서 갑자기 보이스 업데이트를 해주는 바람에 행복에 겨워 써보았습니다... ^ㅅㅠ
아마도 3부작
블록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씩 목소리가 겹치기 마련이다. 서점과 은행 사이엔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법한 골목 하나가 전부였고, 한가한 시간엔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목소리를 내봤자 듣는 사람은 그와 자신 단 둘뿐일 때도 빈번했다.
그러니 말투가 닮아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루이스는 요즘 선배 목소리에 단호함이 느껴져서 덜컥덜컥한다는 토마스의 말을 떠올리고 왼쪽을 흘긋거렸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가 원인이었다. 서점보다야 은행 업무가 많으니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더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닮아가나? 루이스는 늘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와 말투다. 책과 종이를 대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많지만 그래도 기본은 장사.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미소는 기본이다. 물론 재화와 물건을 대여해주는 그에겐 필요 없는 덕목이겠지만.
루이스는 사이퍼의 역사가 기록된 책을 덮고 벽에 기대어 섰다. 영웅이 되기 이전엔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사는 게 소원이었고, 대공황으로 어려운 시기에 아무리 박봉일지언정 일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지금은 형편이 조금 폈다고 해도 뭐 하나 모자란 것 없이 살아온 그와는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능력자에게 물건을 빌려주던 다이무스가 루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이지만 눈이 마주쳤다. 너무 빤히 본 걸까. 민망함에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넓은 광장과, 카페에서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들. 늘 보는 풍경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무게가 느껴지는 구두소리가 다가왔다.
“무슨 용무라도 있나.”
“아, 아뇨. 아닙니다.”
설마 하니 잠깐 쳐다본 걸 가지고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다이무스의 무표정은 여전했다. 워낙에도 표정에 변화가 많지도 않고, 사사로운 일에 매달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자신에 대한 모욕,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를 그냥 지나칠 사람은 아니었다. 무례한 짓을 한 건 자신이고, 그 시선에 불쾌했다면 응당 사과를 하는 게 맞다.
루이스는 책을 내려놓고 어색한 미소를 지웠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다.”
그럼 왜. 라는 생각이 튀어 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 얼굴은 읽기 어렵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예측할 수가 없다. 검은 그 사람을 닮는다 했던가. 검의 궤도를 읽기 힘든 것도 그 주인을 꼭 닮았다. 침묵이 이어졌으나 다이무스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아직 원하는 답을 못 들었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마른 침을 넘기고 솔직히 답했다.
“별 거 아닙니다. 그저....”
이걸 말해도 되는 걸까. 고작 이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걸 싱겁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데 다이무스가 말해도 좋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라, 모르겠다. 루이스는 손가락 끝으로 두꺼운 책의 표지를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제 말투가 경을 닮아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군.”
막상 말해놓고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얘기를 들은 거지 정말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의식한 게 민망해 뒷목에 손을 가져가는데 다이무스가 작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았다 뜨는 눈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실은 나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군요.”
“하루에 몇 시간씩 나란히 서있으니 무리도 아니지.”
“그렇지요.”
“그래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말에 수긍하던 루이스는 슬그머니 목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다이무스 홀든은 좋게 말해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필요한 것만 입에 담는 과묵하고 진중한 남자가 즐거운 듯 말을 이어가는 게 낯설고, 그가 하는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그런 인지부조화 끝에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당장이라도 입가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얼굴이 붉군.”
뺨에 다가오는 손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뒤로 빼며 뒷걸음질 치다,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뒤통수를 감싼 루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쪽팔려 죽고만 싶었다. 그냥 뛰어내릴까. 얼굴을 향해 오던 다이무스의 손이 고개를 푹 수그린 루이스의 어깨 위에 내려왔다.
“괜찮나. 꽤 세게 부딪친 것 같다만.”
“네, 괜찮, 괜찮습니다.”
그냥은 가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온 다이무스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침묵 속에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기류가 흘렀다. 다가올 것 같은 얼굴이 다가오지 않고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회색 눈동자가 어떤 열망에 흔들린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이무스가 눈을 감으며 물러났다. 어깨를 잡았던 손이 안타깝게 떨어졌다. 미련이 잔뜩 남은 것처럼, 손바닥이 떨어지고 손가락 끝이 쇄골을 스쳤다. 어안이 벙벙했다.
“조심하도록.”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무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뭐였을까.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있는 은행을 등지고 서 손끝으로 입술을 덧그렸다. 닿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것뿐이었나. 그랬으면 왜 밀어내지 않았을까. 그는, 다이무스는, 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것인가.
뺨에 손을 댔다. 얼음을 계속 쥐고 있었던 것처럼 손이 차가운 반면 얼굴이며 목, 귀는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ts루이] 취중진담 (0) | 2016.08.30 |
---|---|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D (0) | 2016.08.28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0) | 2016.08.18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0) | 2016.08.06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어느 은행원과 배우
제 영원한 레이디 아씨님께 드립니다...☆
“네. 접니다.”
“잘 들어갔나.”
“네. 아무렴요.”
“그래. 잘 자라. 사랑한다.”
“네. 저도요.”
액정에 뜨는 익숙한 이름에, 정해진 수순으로 흐르는 대화. 루이스는 전화를 끊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권태기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계속되는 기다림에 조금씩 지치고, 끝내는 화를 낼 것도 없이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일방적인 관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얼굴을 본 지 일 억 년쯤 된 것 같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가끔 하는 통화가 전부라는 게 씁쓸할 뿐이다.
이러다 헤어지는 걸까. 루이스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침대에 앉았다. 솔직히, 지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우리 형이랑 사귀면 금세 나가떨어질 거라던 이글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한숨과 함께 침대에 누운 루이스는 찬찬히 머릿속에 집어넣은 시나리오를 되새겼다. 벨져는 배우로도 유능했지만, 감독이 더 적성에 맞는지 아직 젊은데도 휙 진로를 틀어서 지금은 메가폰을 잡고 있었다. 쉽사리 오케이하지 않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서, 같은 씬을 다섯 번쯤 찍는 건 예사였다.
다른 배우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형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작업보다 지치는 건 사실이다. 루이스는 벨져의 첫 번째 영화에 이어 두 번째 영화에도 주인공을 맡았다. 다이무스는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한 번 질투나 실컷 해보란 심산으로 회사로 들어온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지금. 다이무스는 질투는 커녕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원거리 연애도, 참는 것도 정도가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루이스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별 네 개짜리 호텔답게 떡하니 들어있는 와인을 꺼내 잔을 두 개 가지고 성큼 방을 나섰다.
문을 두드리자 벨져가 문을 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루이스는 당당하게 벨져의 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뭐냐.”
“술 한 잔 하자고.”
“꺼져.”
“이러고?”
“그걸 아는 새끼가 이래?”
벨져는 인상을 쓰며 맞은편에 앉았다. 젖은 머리에, 샤워 가운 한 장 달랑 걸친 채 슬리퍼를 신고 야밤에 감독의 방으로 들이닥친 주연 배우. 어디 잡히기라도 하면 그 날로 구설수에 오르는 건 따 놓은 당상이다.
잔에 싸구려 와인을 따르는 루이스를 쏘아보던 벨져는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루이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기분이 안 좋으면 혼자 퍼마시고 잘 것이지, 왜 저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술만 마실 거라면 그렇게 싸고도는 후배 배우도 있다. 벨져는 혀를 찼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있어야 마셔?”
“내일도 촬영이 있다는 건 아나?”
“그럼.”
“이러는 이유가 뭐야.”
루이스는 눈만 올려 뜨며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풍류 없는 놈. 하, 실소를 흘리자 루이스가 잔을 내려놓았다.
“찍을게.”
무엇을. 벨져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루이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싫으면 말고.”
“안 한다고 하지나 마라.”
어깨를 으쓱인 루이스가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우수에 젖은 듯, 서늘한 무표정이 당장 카메라에 담고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야릇한 분위기 대신 긴장감을 더하는 게, 딱 벨져가 원하던 비주얼 그 자체였다. 벨져는 머릿속으로 촬영 계획과 일정을 수정하며 루이스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별 일이군. 절대 안 벗는다고 그렇게 학을 떼더니.”
“그럴 일이 생겼거든.”
“형아?”
부정도 긍정도 아닌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에 벨져는 확신했다.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녀석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쥐고 흔드는 건 다름 아닌 제 형이었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젓자 루이스가 빈손으로 턱을 괬다.
“그러게 그냥 스폰만 받고 끝내지 그랬나.”
“다이무스 홀든한테 그게 돼?”
“못할 것도 없지.”
벨져는 신이 나 웃음을 머금고 와인 잔을 들었다. 가져온 게 겨우 호텔에 비치된 싸구려 와인이라니, 하여간 멋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뱉었을 와인을 마시며 벨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덕분에 이를 악물고 포기한 누드씬도 생겼겠다, 배우의 감정도 딱 역할에 이입되는 게 감독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루이스라는 사람은 별로지만, 배우 루이스는 벨져의 심미안을 채우다 못해 탐미에 대한 욕구에 불을 지피는 사람이었다.
정작 본인은 잘 풀리지 않는 연애사업에 심란한 나머지 어떻게 이용해보려는 모양이지만, 벨져는 징그러운 커플의 고난과 주연 배우의 누드씬이 반갑기만 했다.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주고 누드씬. 이 정도면 완전 땡큐다. 짜증나는 연애 상담도, 이 조건이면 얼마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내가 질렸나?”
“그럴 리가.”
“...어차피 청소년 관람 불가인 거, 야하게 찍자. 할 수 있지?”
“호오. 감당할 자신은 있고?”
“운동할게.”
맡은 역에 충실 하느라 원래 체중에서 5킬로그램이나 빼놓고, 자진해서 이렇게 나와 주니 없던 감정도 생길 것 같다. 벨져는 여유롭게 등을 의자에 기대며 가운을 벗어보라 손짓했다. 날카롭게 눈을 뜨면서도 잔을 놓고 일어난 루이스가 허리끈을 풀고, 샤워 타월 재질의 가운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 작품을 천천히 훑으며 벨져는 길게 콧소리를 냈다. 돌아보라 손짓하자 말없이 순순히 따른다.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 곧게 뻗은 등과 도드라지지 않는 세밀한 근육이 나름 볼 만 했다.
“유지하는 걸로 하지. 앞은 됐고, 뒤만 쓰지.”
“그것 참 희망적이네.”
바닥에 떨어트린 샤워가운을 집어든 루이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허리끈을 동여맸다.
“형아가 보면 난리가 날 테지.”
“그 전에 귀에 들어가도 좋고. 아니, 역시 그게 좋을지도.”
“흥. 내가 제 발로 기어들어온 기회를 놓칠 것 같나?”
“그래. 그래서 너한테 온 거야.”
“하,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이란.”
“싫으면 마.”
벨져는 샐쭉해진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한 시라도 젊을 때, 가장 아름다운 육체를 담아주는 걸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튕기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벨져는 손에 쥔 걸 놓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멍청이는 눈앞에 있고, 그 덕을 본 건 자신이다. 일단은 영화사에서 압박을 받기 전에 기자들에게 흘리는 게 먼저다.
그새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벨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큰 형을 떠올렸다. 이번 작품을 끝내면 어디 동남아에 잠적이라도 해야 할 성 싶었다.
하나, 둘, 셋. 루이스는 까만 광택이 도는 진홍색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숫자를 세고 전화를 받았다. 계속되는 촬영으로 그 사이에 머리가 말라서 바람에 휘날렸다.
“네. 접니다.”
‘루이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아니라, 네가...!’
“아, 잠시만요. 응. 아, 거기? 그래 더 찍지 뭐.”
루이스는 핸드폰을 잠시 떼어내고 일부러 들리도록 말했다. 한 번 스위치가 켜진 벨져는 방금 찍은 샷을 돌려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의 반응을 끌기엔 충분했다.
‘루이스!’
“아, 미안해요. 무슨 일이에요?”
핸드폰 너머에 침묵이 이어졌다. 차마 누드씬을 찍는다는 말을 못 하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고,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적어도 내겐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말이에요.”
‘루이스.’
“내 몸이잖아요. 당신도 없고.”
‘......내가 그리로 가겠다.’
“걱정 마요. 상대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지 않나!’
“그럼요? 우리, 세 달 동안 한 시간도 못 본 거 알아요?”
‘그건....’
“이젠 당신 기다리는 것도 지쳐요. 나도 내 삶이 있다구요.”
‘만나서 얘기하자. 일단 만나서....’
다이무스의 착잡한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보니 스태프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하고, 벨져만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루이스. 다음 숏 들어갈 거다. 여기서 여기까지. 가운을 벗고 테라스에 서. 역광으로 비출 거다.”
“앞에 누구 있는 건 아니지?”
“흥. 볼 것도 없으면서.”
루이스는 밉살맞게 말하는 벨져의 엉덩이를 쳤다. 짝 소리가 나게 후려치는 바람에 벨져가 발끈해 주먹을 쥐며 노려봤지만 그의 작품을 위해서라도 벨져는 지금 루이스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촬영 들어가야 해요. 끊습니다.”
‘루이스...!’
“오려면 오세요. 어차피 안 올 테지만.”
모질게 말하고,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한 루이스는 대기용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믿었던 보스에게 배신당하고, 연인에게 버림받은 남자 주인공이 될 시간이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꺼놓고, 하루치 촬영이 끝났다. 벨져는 더없이 흡족해했고, 루이스는 배역의 감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저질러버린 일을 수습하러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을 꺼둔 사이 온 문자와 메시지, 부재중 통화 기록이 쏟아졌지만 다이무스의 기록은 없었다.
큰일을 저질러버린 건 아닐까. 뒤늦게 불안이 닥쳤으나 그래봤자 엎질러진 물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맥주를 사러 나가기 위해 후드를 집어 들었다. 내일은 촬영도 없겠다, 오늘 마시고 죽자는 마음으로 여섯 개 들이 팩과 보드카를 담아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이렇게 끝나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땐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회사 차원에서 만난 그는 빈틈없는 슈트 차림에, 딱딱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딱 필요한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났다. 딱히 이렇다 할 접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루이스는 맥주병을 내려놓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이무스 홀든쯤이나 되면 달라붙는 사람도 많을 거고, 저가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내로라하는 미인들이 줄을 설 텐데. 내가 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데다,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남은 병을 비웠다. 벨져의 말이, 다른 모두의 말이 맞다. 오래 갈 수 없는 관계다.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사귀기로 했을 땐 그냥 이 사람이 나와 같은 감정으로 봐주는 게 기뻐서, 통화 한 번에도 설레서 행복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술병이 비어갈수록 루이스의 속은 타들어갔다.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이 타는 속에 막힘없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마셨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루이스가 눈을 떴다. 몸에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살인범이면 어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벽에 머리를 세 번쯤 부딪치고, 겨우 호텔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문이 열리며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단단한 팔이 고꾸라지는 몸을 받치고, 익숙한 향수 냄새와 몸이 훅 루이스를 덮쳤다.
“루이스.”
“다이무스....”
“하아. 이 지경이 되도록....”
한숨을 쉬는 소리에 루이스는 머리를 기댔다. 번쩍 들린 몸이 침대 위에 놓여지고, 루이스는 제게서 멀어지는 팔을 잡고 매달렸다.
“다이무스.... 가지 마요. 나, 계속.... 기다렸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물이 났다. 옆자리가 훅 꺼지고, 뜨겁고 단단한 몸이 루이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를 마주 안고 루이스는 이게 꿈이 아니길 바랐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그래. 안다. 그래서 온 거다. 루이스....”
“가지 마요. 그냥, 나랑....”
“자라. 옆에 있을 테니까.”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꾹꾹 눌러 참다가 터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와서 보니 더 심각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며 등을 쓸어줘도 루이스는 내내 다이무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죄책감이 빠듯하게 가슴을 옥죄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내일. 내일 얘기하자.”
급하게 비행기를 잡아타고 오는 내내 걱정이 돼서 한숨도 못 잔 건 다이무스도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할 일이 태산이지만 일단 지금은. 이 사람을 안고 잠들고 싶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The left stairs : side L (0) | 2016.08.28 |
---|---|
[벨져루이] Notes (0) | 2016.08.23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7 (0) | 2016.08.06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6 (0) | 2016.08.04 |
[벨져ts루이] twenty questions about. 05 (0) | 2016.08.02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Scarface. 02.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한 다이무스는 따라 나갈 필요도 없게 준비된 식료품들을 보고 찬장 가득 들어찬 통조림에서 눈을 돌렸다. 베이컨을 꺼내고, 계란을 꺼내 팬을 달궜다. 간단하게 먹는 거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직접 겪어본 게 아니니 섣불리 판단하는 건 금물이지만 루이스는 영국인이었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부엌을 맡기긴 불안했다. 달궈진 팬에 베이컨을 먼저 올리고, 양상추를 흐르는 물에 씻는 중에 큰 소리가 났다. 계단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다이무스는 불을 끄고 부엌을 나갔다.
“루이스!”
계단에서 내려오다 굴렀는지, 루이스가 머리를 잡고 낮게 신음했다. 약한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다이무스는 몸을 웅크리는 루이스를 일으켜 앉히려했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난 것도 아닌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게 심상치 않았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몸을 안아들었다. 이상하리만치 가볍다.
이렇게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대체 왜 퇴원을 하고 불편한 조건을 받아들였는가. 다이무스는 발로 문을 열고 루이스를 침대 위에 바로 눕혔다. 상태를 살피는 건 그 다음이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다른 손으론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의 숨이 차츰 가라앉았다.
겨우 진정이 됐는지, 붉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다이무스를 향한다. 다이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군.”
“…괜찮습니다.”
“이게 괜찮은 거라고?”
루이스는 머리를 누른 다이무스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제대로 힘도 주지 못하는 주제에, 괜찮다고 하는 건 허세라고 하기도 안쓰러울 뿐이었다. 루이스는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이 정도로 안 좋은 줄은 몰랐다만.”
“잠깐 현기증이 나서 그런 겁니다.”
적대세력의, 그것도 자신의 감시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거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고, 다이무스가 아는 결정의 루이스는 그런 데 약은 수를 쓸 사람도 아니었다. 읽지 못한 다른 수가 있는가. 다이무스는 이 집 문을 열고 들어오던 때보다 더 안색이 안 좋은 루이스의 얼굴을 보며 이 일을 정한 회사의 수뇌부와 연합을 떠올렸다. 홀든을 겨냥한 함정일지도 모르고, 연합의 계략일 수도 있다.
그냥 무시하고 넘기는 게 최선이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이 때 괜히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알고 있다. 다이무스는 신중해야 했고,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됐다. 그래야 한다. 응당 그래야 했다. 하지만 다이무스는 눈 앞의 남자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눈과 상황을 모두 지워버려도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숨을 멈출 것 같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음 절벽 끝에 서서 기우뚱 쓰러질 것만 같은 그였다. 서늘한 전의를 풍기며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과거의 루이스가 아니다. 전장이 아니더라도 흘러나오던 냉기였다. 이렇게 약한 사내가 아니었는데.
다이무스는 베개를 세워 루이스의 등 뒤에 놓고, 이불을 끌어다 무릎을 덮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자신만큼이나 아무 말 없이 제 도움을 받는 그가 낯설었다.
“쉬어라.”
“…다이무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릎을 모아 앉은 루이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모습을 보려 한 게 아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느릿하게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슬며시 웃었다. 쓰디 쓴, 부서지는 듯한 미소에 다이무스의 얼굴이 굳었다.
“저도 이렇게 빨리 들킬 줄 몰랐습니다.”
“…그걸 말하는 이유가 뭐지?”
“숨겨봤자 소용 없을 테니까요. 한동안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이 무슨 어리석은 발상인가. 다이무스의 눈에 힘이 들어간 것과 달리 루이스는 한 짐을 덜었다는 듯 베개에 몸을 기대고 다이무스와 눈을 맞췄다. 그는 저를 속이려 했다는 것에 불쾌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냐는 듯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연합의 영웅이 안타리우스의 습격에 당해 병원 신세를 오래 지고 있는 게 좋을 리 없다. 그건 연합도 회사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웅'이기에 더더욱. 다이무스는 이제야 겨우 왜 자신이어야 했는지를 깨달았다.
루이스가, 능력자들의 영웅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 불안과 공포가 만연한 능력자 세계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불안과 공포는 안타리우스를 비롯한 어둠의 세력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다. 그들은 공포와 불안을 먹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파고들어 세력을 늘리고 회사와 연합,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 전체를 혼란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더 기세등등하게 활개를 치고 다닐 테고, 끝내는 연합과 회사가 손을 합쳐도 막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마지 못해 그가 원한 대답을 내놓았다.
“모르는 걸로 하겠다.”
“고맙습니다.”
“따로 필요한 건.”
루이스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다이무스는 그대로 돌아섰다. 연민인지 무엇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어지럽게 섞이며 가슴을 짓눌렀다. 누구의 의견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설득하는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모두를 위해서'라는 그 말 한 마디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 가혹하고 부당한 요구에 싫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래. 마치 과거에 가문을 위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계단을 내려오던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쓰러졌던 자리에 멈춰섰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더 무거운 역할을 떠맡고 말았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있는 침실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간단하게 하려던 점심이었는데, 편하게 할 수는 없게 돼버렸다. 다이무스는 꺼내놓은 계란과 다 식은 베이컨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오, 홀든 경.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막내! 그래서 저쪽이랑은 어때?”
오랜만에 만난 회사의 용기사들이 살갑게 다이무스를 맞았다. 다이무스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한 침대에서 자는 걸 빼면 딱히 불편한 건 없다. 첫날 합의한 대로 다이무스는 그가 보이는 곳에서 업무를 보고,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같은 말 같지만 전혀 다르다.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는 질문에 다이무스는 그저 다르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찾았다. 그는 연합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제게는 보여주지 않은 서글서글한 미소에 다이무스는 시선을 거뒀다. 그걸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드렉슬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면 어디 에이스까지 나서야 하겠냐. 그가 작게 덧붙인 말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들킨 후로 두터운 벽을 약간 허문 것 같긴 하지만 결정의 루이스는 비밀을 쉽사리 터놓을 인물이 못 됐다.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요?”
타라의 목소리에 화기애애하게 안부인사를 나누던 이들이 싹 입을 다물었다. 타라와 루이스가 서로 못 잡아 안달이 난 사이라는 건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고, 그 둘의 신경전을 막아서던 여제는 이제 없었다. 연합 쪽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루이스에게 쏠렸다. 루이스의 눈치를 보는 그들을 두고 다이무스는 타라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누구고 할 거 없이 자리에 참석한 능력자들이 불과 얼음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야 물론 회사와 연합의 축이 되는 둘이니 회의에 빠질 수 없지만 이래서야 초장부터 삐걱거릴 판이었다. 서늘한 냉기가 가라앉은 공기 속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타라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루이스,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서류를 정리하는 타라.
하나 둘 눈치를 보며 자리를 채우고 마침내 루이스가 둥근 테이블로 다가와 다이무스 옆에 앉았다. 타라와 정반대 자리라곤 하지만, 굳이 다른 자리를 두고 제 옆자리에 앉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몸은 좀 어때?”
“그쪽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럼 다행이네. 바로 실전에 투입할 인력도 부족한데.”
“돈 몇 푼에 휘둘릴 정도로 궁핍하진 않아.”
“어머, 그랬어? 몰랐네.”
아니나 다를까 가벼운 안부로 시작한 대화가 채 일 분도 못가 살벌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둘의 신경전은 어디까지나 있는 일이었기에 다이무스는 그만 하란 뜻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자자, 그만 하고. 이러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연합의 아론 휴톤이 사람 좋은 말투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루이스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이었지만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팔걸이에 얹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다이무스는 못 본 척 했다.
“좋아요.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안타리우스가 여기저기 활개를 치고 다니는 사이에 우리는 근거지를 급습해서 안개수집장치를 파괴합니다. 이미 윗선에서 얘기가 끝난 거니까 더 할 말은 없고, 인선을 확정하고 세부 작전을 세우면 그걸로 회의는 끝. 어때, 간단하죠?”
타라는 안경을 올리며 싱긋 웃었다. 루이스는 가만히 그녀를 노려보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지는 바람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이무스는 지금 루이스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잔뜩 힘을 준 미간. 어지간히 몸이 안 좋은지 의자 팔걸이를 쥔 손에 살얼음이 꼈다. 이쯤 나섰어야 할 루이스가 말이 없자 아론 휴톤이 입을 열어 연합에서 내정한 인선을 터놓고, 로라스가 그 대화에 끼어들며 타라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사이를 틈타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움찔한 루이스가 한 박자 늦게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다이무스에게 눈길을 줬다. 잡은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려 맞잡자 얼음이 녹아 손을 적셨다.
“그래서, 아무리도 토마스가 괜찮지 않을까…하는데…. 루이스?”
“아니. 안돼.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토마스를 내보내기엔 위험이 커. 차라리 재단의 챌피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때론 실전이 더 큰 경험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언제까지 후방에서 깨작거리고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래?”
타라의 도발에 루이스가 눈을 치켜떴다. 여제가 없는 그에겐 여유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
“…좋습니다.”
의외의 답에 앉아있던 이들의 눈이 루이스에게 쏠렸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와 잡았던 손을 놓고,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 양손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당신이 동행하는 걸 조건으로.”
“…좋아.”
타라는 루이스의 눈을 바라보다 시원하게 긍정하고 펜을 움직였다. 서로 한 발씩 물러난 셈이다. 루이스에게 온통 신경을 집중하느라 잠시 흐름을 놓쳤던 다이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묵을 유지했다. 누군가 질문이라도 했으면 곤란했겠지만 평소에도 과묵한 다이무스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나랑 새끼 결정사가 전방에서 연구소 파괴를 맡는 걸로 하고…. 사방에 둘씩은 배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후방은 내가 맡지. 휴톤과 레베카가 각각 측면을 맡아줘.”
“좋아. 우리는 이쪽에 있는 용기사 둘.”
“윽….”
드렉슬러가 낭패를 봤다는 얼굴인 반면 로라스는 화색을 띠었다. 그가 연합의 아론 휴톤을 흠모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아무래도 좋은 기회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보가 새지 않게 시행일만 직전에 고지하는 걸로 남겨놓고 나서야 회의가 얼추 마무리 됐다.
다이무스는 내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꽤 시간이 지나서 오늘 은행 업무를 보긴 무리일 듯 싶었다. 타라는 서츄철을 챙기며 일어나 냉큼 도망가려는 드렉슬러를 잡아 세웠다. 또 서류를 미루고 공방에 틀어박혔겠거니 어림짐작했다. 늘상 있는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타라는 회의실을 나가기 전, 다이무스를 불러세웠다. 무언가를 부탁할 때, 미안해하는 얼굴로.
“홀든. 그럼 수고해줘. 둘이 세트잖아?”
다이무스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둘이 세트, 라는 건 물론 지금 상황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 건지도 모르고,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가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지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걸까. 루이스의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일이 늘 것이라는 표현인가, 그도 아니면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며 그 사이 물이 마른 손을 그러쥐었다. 답답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0) | 2016.01.03 |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0) | 2015.12.30 |
[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0) | 2015.12.24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0) | 2015.12.21 |
[다이루이] (2) | 2015.12.09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ㅂ밖+모바일이라 엔터 대신 줄간격~
2014년 1월에 냈던 다이루이 단편집 수록 원고
Uno.
오후 10시 28분. 모두가 퇴근하고 빈 사무실은 전기절약 캠페인에 따라 어둑했다. 한 군데만 전등이 켜져 있었는데, 그 백열등 아래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남자가 있었다.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진 지 오래였지만 업무를 마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다이무스 홀든에게 야근이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바이어에게 보낼 서류를 처리하던 다이무스는 자료 파일을 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상품개발팀 드렉슬러의 손을 거친 자료는 말 그대로 중구난방에 엉망진창이었다. 개발팀에서 뺄 수 없는 꼭 필요한 인재이고, 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신제품들은 분명 전자기기의 혁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천재이긴 하지만, 그의 서류는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제발 제대로 된 개발서를 올리라고 타라가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이 없었고, 천성이 괴팍한 아웃사이더라 주변에서 대신 서류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요령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천재 개발자의 서류는 돌고 돌아 다이무스의 손에 돌아오곤 했다. 드렉슬러의 서류는 다이무스 정도나 되는 끈기와 책임감을 가지 않고서야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그나마 요새 글씨는 알아보게 써주더니, 타라가 회장님과 함께 해외 출장을 갔다고 금세 이 모양이다. 암호해독가가 필요할 정도로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서류를 앞에 두고 다이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올려 회색 천장과 백열등을 보며 눈을 감다가 목에서 뿌득, 하고 소리가 났다.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감에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라도 마실까 싶어 일어나는데 탕비실에 원두도 그 흔한 믹스커피도 보이질 않았다.
피곤해서인지 단 게 먹고 싶었다. 비척비척 자리로 가 제일 아래 서랍의 잠금을 여는데 늘 챙겨두던 초콜릿도 보이질 않았다. 포기하고 빨리 마치려고 노트북으로 다시 눈을 돌리는데 지렁이가 기어가는 글씨에 도무지 일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문서작업을 그 좋아하는 노트북이나 스마트 폰으로 할 것이지. 이런 중요한 서류에 드렉슬러는 꼭 손으로 써서 스캔을 해서 보냈다. 타이핑 하기도 귀찮다는 걸까.
매일 아침 마시는 카페모카가 마시고 싶었다. 진한 시럽과 거품이 풍부한 스팀밀크, 거기에 에스프레소 샷을 넣고 휘핑크림을 잔뜩 얹어 자바칩을 뿌리고 모카 드리즐까지 뿌린 카페모카. 회사 아래 있는 대형 체인점 말고, 여기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에서.
높은 사무실 빌딩만 죽 늘어선 거리엔 당연히 큰 대형 체인 카페들도 많았지만 다이무스는 그 카페가 좋았다. 다른 곳과 다르게 직접 커피를 볶아서 향도 좋고,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이나 분위기, 뉴에이지 풍의 음악까지. 공간이 다른 카페에 비해 협소하다는 것만 빼면 뭐 하나 빠지지 않았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는 카페를 떠올린 다이무스는 벗어둔 재킷을 입고 멋스러운 버버리 코트를 걸쳤다. 목도리에 장갑까지 끼고 잠시 노트북을 바라보던 그는 전원을 끄고 가방 안에 정리해 넣었다.
이대로 카페에 들렀다가 퇴근할 생각이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제 자리에 켜진 전등을 끈 다이무스는 일의 능률을 위해서라며 퇴근 카드를 찍고 회사를 나섰다.
Due.
오후 10시 12분. 퇴근하는 회사원들마저 거진 다 빠져나간 카페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에 있는 거라곤 높은 회사 사무실 건물뿐이라 이쯤 되면 손님이 없는 게 당연했다. 더러 야근하는 회사원들이 지친 얼굴로 비척거리며 들어와 테이크아웃을 해가는 걸 빼면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월요일부터 명절이니 그 전 주 금요일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찍 가버리는 게 당연했다. 혼자 가게를 보던 루이스는 잠깐 창밖을 내다보며 불이 꺼진 사무실 건물들을 바라보다 슬슬 매장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꺼내다가 어차피 오늘 문 닫으면 한동안 안 나오겠지 싶어서 락스칠도 하려고 전용세재를 꺼냈다.
오후 아홉시에 출근해 아침 여덟시까지, 카페를 지키는 루이스 덕에 조그만 카페는 24시간 내내 문을 열고 밤샘 작업을 하거나 야근하는 회사원들을 맞았다. 더러는 이런 조그만 카페에서 뭐 하러 24시간 영업을 하냐고 했지만 그래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니까.
그래도 손님이 적은 건 사실이라 새벽 시간에는 다른 알바도 없이 루이스 혼자 카페를 봤다. 그 날 쓸 원두를 볶고, 부족한 건 없는지 확인하고 모자란 게 있으면 주문하고 청소하고 나면 새벽 두시 쯤.
카페를 한 번 죽 둘러보고 할 일이 없으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가끔 흘러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선곡 리스트를 수정하고 그래도 할 일이 없으면 노트북을 켜놓고 웹서핑을 하거나 드라마와 예능 프로를 봤다.
그러다 졸리면 알람을 새벽 5시 반에 맞춰놓고 테이블에 엎드려 자기도 했다. 누가 보면 정말 늘어지게 가게 본다고 해도 루이스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뭐 어떠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여섯시부터 출근하는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쿠키 반죽을 만든다. 분명 멀쩡한 반죽인데, 왜 오븐에 넣기만 하면 이상해지는 걸까. 루이스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제가 만들면 이상해진다는 건 알기에 그냥 쿠키가루에 우유를 부어 치대서 냉장고에 넣어서 반죽을 만들어두는 것까지만 했다.
그러다 여덟시 쯤 오전 아르바이트생이 오면 집에 가서 퍼질러 자고, 가끔 누가 부르면 나가서 놀다 출근하는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에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막상 본인은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바닥을 쓸고 닦고 왁스칠까지 했더니 반짝거리는 게 흐뭇한 나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루이스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다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금요일이라 아마 다들 퇴근했을 테고, 혹시 남은 사람이 있어도 이 시간이면 집으로 가지 카페에 들르진 않을 거란 생각에 카운터 안쪽의 간이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Tre.
"큼, 큼."
다이무스는 부러 크게 헛기침을 했다. 카운터 너머엔 아직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건만 앳된 청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빨리 커피 한 잔을 들고 집에 가고픈 다이무스는 평소보다 인내심이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잠에 깊이 빠졌는지 청년은 다이무스의 헛기침 소리를 듣지 못하고 위태롭게 고개를 꾸벅일 뿐이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크게 고개가 꺾이더니 퍼뜩 눈이 마주쳤다.
“어, 어어? 아, 죄송합니다.”
“...카페 모카. 휘핑 올리고 자바칩 추가에 모카드리즐.”
다이무스가 내미는 쿠폰과 카드를 받아들고 영수증과 카드, 전동벨을 함께 건넨 청년은 바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았다. 간 원두를 템퍼로 눌러 머신에 놓고 버튼을 누른 그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가져다 스테인리스 컵에 따르고 스팀기를 켰다.
졸린지 눈을 꿈벅이면서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부드럽게 거품을 내는 게 제법 오래 일한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아침에 들러 커피를 사가거나, 혹은 누가 사오는 걸 마시는 타입이었기에 이미 쿠폰을 몇 개씩 썼으면서도 이 시간에 여길 온 적은 없었다.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에 홀더를 끼우고 생초콜릿을 두 번 펌핑한 그는 방금 전에 데운 우유를 붓고 그 위에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휘핑기를 두어 번 흔들더니 우유 거품 위에 휘핑크림이 멋지게 또아리를 틀었다.
비닐장갑을 끼고 자바칩을 우르르 올리고 모카드리즐을 휘휘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게 아침에 보는 아르바이트생보다 훨씬 능숙했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가져온 그는 무심코 덮으려다 다이무스에게 물었다.
“뚜껑 씌워드릴까요?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아니, 됐습니다.”
컵 위에 담뿍 쌓인 모양새가 흡족해 눌러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뒤돌아 빨대를 꽂고 한모금 마시면 뜨끈하고 풍부한 단 맛에 피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돌아갈 생각으로 발을 옮기는데 바닥을 디뎌야 할 발이 미끄러운 바닥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몸이 기우뚱했다. 한 손에 뜨거운 음료를, 다른 한 손으론 지갑을 쥔 채라 그대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읏!”
“어어...! 풉!”
그리고 아파할 틈도 없이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다이무스는 창피함과 함께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빨리 일어나려는데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다시 허우적거리고 만 다이무스는 일 년치 구길 체면을 다 구긴 것 같은 쪽팔림에 차마 화 낼 생각도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려는 찰나 좀 전까지 웃던 청년이 정신을 차렸는지 급히 다가왔다. 조금 전과 달리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친 덴 없으세요?”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컵이 흔들리는 바람에 커피가 흐르긴 했지만 위에 잔뜩 얹은 크림 덕에 아예 쏟아지진 않았다. 다행이 위쪽은 차가운 크림 덕에 그리 뜨겁지 않았지만 청년은 그걸 보고 주방에 들어가 걸려있던 행주를 집었다. 다이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려는 찰나 청년은 찬장을 열어 새 것으로 보이는 흰 행주에 물을 적시고 얼음을 꺼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몸을 일으킨 다이무스는 옆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고 손을 가볍게 털었다. 손에 묻은 휘핑크림에 미간을 좁히고 아직도 아픈 꼬리뼈를 매만졌다. 쪽팔림이 가시고 짜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어떻게 컴플레인을 걸까 생각하는 사이 행주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온 청년은 대뜸 손을 잡더니 물수건으로 다이무스의 손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나대지마라.”
“아, 죄송합니다. 많이 안 다치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바닥에 왁스칠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자기 때문에 넘어진 사람을 보고 웃어놓고, 정신을 차렸는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청년을 보며 다이무스는 차가운 행주로 손을 마저 닦았다. 한 겨울에 얼음을 대고 있는 것도 우습고, 화상을 입은 것도 아니라 대충 손만 닦고 있으려니 청년이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영수증 쪼가리에 빠르게 뭔가를 적어 건넸다.
“저기, 이거 제 전화번혼데 옷 세탁하시고 연락해주세요.”
그 말에 고개를 숙여 코트를 살피니 휘핑크림과 드리즐이며 커피 얼룩이 남아있어 다이무스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왁스칠을 해놓고 주의하라는 표지 하나 없이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졸던 탓에 생긴 일이 아닌가.
안 그래도 지친 탓에 빨리 가서 쉬고 싶던 다이무스였다. 평소 같았음 그저 이런 카페의 야간 알바를 측은히 여기고 됐다 했을 테지만 아까 넘어지는 걸 보고 웃은 것 때문에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잠깐 앉아계시면 다시 해드릴게요.”
그나마 눈치는 있는지 테이블의 의자를 빼주고 급히 안쪽으로 들어간 청년은 톨 사이즈 컵에 다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워낙에도 듬뿍 얹어주던 휘핑과 자바칩이지만, 조금 전보다 더 잔뜩 얹어진 모습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이번엔 직접 홀더를 끼우고 테이블까지 가져오는 청년의 발밑을 보던 다이무스는 슬쩍 고개를 들어 명찰에 적힌 청년의 이름을 살폈다. Louis. 덜도 더도 없이 딱 다섯 글자만 쓰인 금빛 명찰에 혹시나 카페에서 쓰는 예명인가 싶어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뭔가.”
“아, 루이스입니다. 문자나 전화 주세요.”
“그러지.”
다이무스는 핸드폰에 전화번호와 이름을 저장하고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뒤 컵을 손에 들었다. 아예 문 앞까지 따라 나와서 문을 열어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를 뒤로 한 다이무스는 손에 든 카페모카를 홀짝거렸다. 뜨끈하게 퍼지는 단 맛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스팀 밀크의 부드러움이며 진한 커피 향이 다른 카페들보다 나았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몰라도 아침 출근 시간대에 바쁜 나머지 급하게 내린 것보다 훨씬 나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 카페의 커피보다 맛있는, 그것도 완벽히 제 취향의 커피를 다른 곳에서 마셔본 적이 없었다. 집에 비싼 커피머신을 들여다 놓기도 했지만 뭐가 문제인지 제가 내리는 커피는 맛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골목 앞에 세워둔 벤츠에 오르기 전에 아직 쌓여있는 눈에 신발을 좀 닦고 차에 올랐다. 목을 타고 넘어가 뱃속을 뜨끈하게 데우는 느낌에 만족스러운 나머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모차르트를 틀고, 난방을 튼 차에서 시트에 몸을 기대니 따스히 퍼지는 충족감이 기분 좋았다.
더 늘어지면 이대로 졸 것 같아 창문을 약간 연 뒤 커피를 홀더에 놓고 핸들을 잡았다. 밤공기는 차고, 방금 전까지 커피를 손에 들고 있던 손은 따뜻했다.
Quattro.
루이스는 손님을 보내고 비척비척 화장실로 발을 옮겼다. 아까 빨아서 걸어둔 걸레를 들고 와 바닥에 엎질러진 커피를 닦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껏 왁스칠 한 데다 뜨거운 물 부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과 왜 하필 이럴 때 졸아버려서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대충 크림과 커피를 다 닦고 마른 걸레를 가져다 한 번 더 닦은 뒤, 주의 표지판을 가져다 세웠다.
“하아....”
이 플라스틱 덩어리 하나 갖다 놓는 게 뭐 그리 귀찮다고. 잠시 쉰다는 게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존 데다 제 실수로 넘어진 사람을 보고 웃어버리다니 제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이 나왔다.
마저 가게 안을 정리하고 그라인더를 살폈다. 얼마 남지 않은 원두를 마저 갈아 에스프레소를 내린 루이스는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느긋하게 마시며 로스팅기에 예열버튼을 누르고 미리 따로 포장해둔 원두를 꺼냈다.
매일같이 그 날 쓸 원두를 로스팅하는 건 물론 귀찮은 일이지만, 루이스는 그래야 커피 맛이 제대로 난다고 생각했다. 사실 제일 좋은 건 핸드드립이지만 일일이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뭐. 이렇게 좁은 골목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손님이 밤늦게까지 끊이지 않는 것은 다 이런 수고로움에서 온다는 게 루이스의 신념이었다.
아무도 맛없는 커피를 들고 가게를 나가게 하지 않겠다는 그 다짐은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젊은 사장 루이스가 처음 가게를 열면서 마음먹고 6년째 지켜오는 한 가지였다. 이젠 제법 단골도 생기고 입소문도 퍼져서 오전 오후 저녁 파트를 나눠 아르바이트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매출도 안정되고, 모아둔 걸로 확장을 해도 될 정도였지만 루이스는 딱 이정도가 좋았다.
모든 자리 구석구석에 제 눈이 닿고, 자기가 하나하나 손을 볼 수 있는 작은 카페. 물론 요새 들어선 돈이 생기니 욕심이 나서 빈 벽에 책장도 놓고 책이며 이것저것 인테리어 소품을 들여놓고 싶기도 했다.
루이스는 걸레를 빨아 널어두고 예열이 완료된 로스팅기에 원두를 넣었다. 도로록 도로록 커피콩이 볶아지며 내는 고소한 향이 이윽고 카페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고, 루이스는 허리에 맨 검은 앞치마의 매듭을 다시 여몄다.
날이 바뀌기도 전에 사고를 한 번 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어 졸음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황금연휴의 시작이라곤 하지만 밤샘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휴일을 반납하고 일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루이스의 기다림은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뭘 할까 잠시 고민하던 루이스는 노트북을 켜고 테이블에 앉았다. 인테리어 소품이라도 바꿔볼까 쇼핑몰에 들어간 루이스의 눈이 메인에 뜬 남성브랜드 런칭 이벤트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떡하니 걸린 디자인이 조금 전 실례를 저지르고 만 손님의 코트와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흘긋 보고 로그인을 하려는데 그 아래 뜬 런칭 기념 세일 가격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헉소리를 냈다. 아니 물론 대기업들 본사가 주르륵 늘어선 곳이긴 하지만, 임원진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명품에 월급을 붓나? 아니면 집이 갑부라도 되는 건가?
떨리는 손으로 클릭해서 죽 스크롤바를 내렸다. 주머니의 장식단추며, 소매의 버클, 안감과 허리띠까지 보고 나니 그냥 비슷한 코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드라이 세탁이었고, 다시 봐도 충격적인 가격에 루이스는 마른 세수를 하며 과연 세탁비로 얼마가 깨질까 고민했다. 모카 드리즐에 휘핑크림, 거기에 뜨거운 라떼까지 하면 잘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새해를 맞아 데스크탑을 장만하려던 계획은 접어야 할 성 싶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핸드폰 기기 할부도 안 끝났는데. 루이스는 암담한 숫자계산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비싼 옷에 커피를 쏟은 데에 별 말도 안 한데다, 톨사이즈에 휘핑크림을 잔뜩 얹자 슬쩍 미간의 주름이 가시던 걸 떠올린 루이스는 그가 아예 옷값을 물라고 할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는데다 무슨 일만 생기면 자다가도 전화를 받고 불려나오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는 루이스였다. 주로 그런 상황에 루이스가 하는 건 진상 고객 처리인데, 사실 얼굴만 봐도 그런 분위기가 풍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싸늘해 보이긴 하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한숨을 쉬다가 문득 그가 제게 반말을 했다는 걸 떠올렸다. 분위기에 압도되는 바람에 반말을 하는 줄도 몰랐다. 당황스럽고 죄송한 나머지 눈치도 못 챈 거겠지.
게다가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비싼 코트에, 그런 인상이며 태도를 봐선 엘리트 회사원이겠지 싶었다. 분명 일처리도 칼같이 해서 고속승진을 해왔을 거다. 그럼 돈도 많이 벌 텐데 이 정도 쯤은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던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잘못한 건 사실이니 옷값을 청구해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멍청한 나, 바보같은 자식.
Sei.
컵을 들고 차에서 내린 다이무스는 바로 잠금 버튼을 누르고 지하 주차장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꼭대기 층을 눌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다이무스는 빈 컵과 차 키를 식탁 위에 놓고 넥타이를 풀었다. 옷을 벗다가 코트에 진 얼룩에 살짝 한숨을 쉬었다.
뭐, 세탁소에 맡기면 알아서 처리해주겠거니 했다. 어머니께서 계절마다 옷장을 채워주시기에 그 코트가 얼마나 하는지는 커녕 제 손으로 옷을 사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 다이무스로선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일단은 마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집까지 일을 가져오지 않으려 했건만, 연말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드렉슬러의 서류를 떠올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옷을 벗었다. 차라리 샤워라도 하면 나아질까 싶었던 그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가볍게 샤워를 하려 물을 틀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자니 아까 그 아르바이트 청년이 떠올랐다. 남자치곤 선이 가는 얼굴에 수더분하니 척 봐도 참한 학생같아 보였더랬다.
아까야 피곤하고 만사가 짜증나는 상태였던 데다 허우적거리며 넘어진 꼴을 보여서 그렇지, 정말로 세탁비를 청구할 심산은 아니었다. 애가 실수를 한 것 같지고 진지하게 화내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데다, 그 처음 잠깐 웃은 것만 빼면 아주 죄송해서 울상을 짓는 게 훤히 보인지라 더 뭐라 하기도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어머니의 안목이니 고작 카페 알바 봉급 가지곤 세탁비만 해도 부담스러울 터였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이 제법 귀엽기도 했다. 제 동생이었다면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실컷 웃은 뒤 미안해하기는커녕 실컷 두고두고 놀려먹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아르바이트라도 한다는 가정 하에.
“형! 치킨 사 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냥 생각만 했을 뿐인데 이글이 문 너머로 외쳤다. 집에 왔을 땐 사람이 왔는 지 개가 왔는 지 거들떠도 안 보던 녀석이 꼭 이럴 때만 찾는다. 아주 지가 상전이지, 상전이야. 다이무스는 못 들은 척 무시하기로 하고 샴푸를 펌핑했다. 그것도 감정을 담아 꾹, 꾹.
나가면 또 치킨 시켜달라며 찡찡 생떼를 쓸 게 분명했다. 나이는 스물넷이나 먹어가지고, 아직도 하는 행동은 열일곱 질풍노도의 시기다. 다이무스가 회사에 취직하면서 출퇴근 시간이 왕복 세 시간이 넘자 아버지는 독립을 허락하셨다.
대학을 다니던 이글은 제대로 출석도 안 하고 늘 날을 넘겨서 돌아오던 주제에 학교랑 집이 가까워지면 나아질 거라며 냉큼 따라 들어와 방 하나를 차지했다. 막을 새도 없었다. 다이무스 생의 첫 독립의 자유는 그렇게 동생의 뒤치다꺼리가 됐다.
이글은 여전히 출석을 하지 않았고, 술에 취해 날이 지나 기어들어왔으며, 학사경고까지 받았다. 다음 학기에도 F를 받으면 쫓아내겠다는 말에 이글은 휴학계를 냈다. 정말이지, 그래놓고 빨래며 청소, 요리 하다못해 설거지 한 번도 먼저 하는 법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를 헹궜다. 짜증으로 잠이 깨긴 했지만 그래도 찬물을 틀었다. 오싹하니 개운하게 드는 한기에 몸을 떨고 걸어둔 가운을 걸쳤다. 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보며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젖은 머리를 털며 화장실을 나섰다. 샤워 한 번에 피로가 한결 가시는 기분이다.
머리를 털며 새 옷을 꺼내 침대 위에 던져놓고 젖은 머리를 마저 말렸다. 미리 꺼내둔 옷을 챙겨 입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물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시끄러운 동생을 피해 문을 잠그고 이어폰을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일 다시 출근하지 않기 위해,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연휴에는 좀 쉴 수 있게 일을 빨리 마치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검은 뿔테 안경을 꺼내 쓰고 노트북의 전원을 넣었다. 긴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망했다. 다이무스는 떠오는 아침 해와 밝아오는 제 방을 보고 절망했다. 중간에 이글이 치킨을 사달라며 문을 두드리다 못해 부술 지경이 되는 바람에 한 마디 하려고 문을 열었던 게 화근이었다.
언제 코트 주머니에서 흐른 건지, 영수증에 적힌 전화번호를 가지고 이글이 누구한테 번호를 받은 거냐며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다이무스는 일을 잠시 놓아두고 차분히 이글에게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글은 도통 들어먹지를 않아서, ‘형은 인기 많아서 좋겠네!’라는 식으로 자꾸 시비를 걸며 당치도 않는 질문을 해댔다. 쉴 새 없이 나불거리던 그 입은 결국 다이무스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치킨을 시켜주고 나서야 닫혔다. 사실 그보단 치킨을 먹느라 바빴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지만.
치킨만 시켜주고 들어가서 마저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만 고소한 튀김 냄새에 끌려 같이 치킨을 먹었다. 이글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 두 병을 꺼내왔고, 다이무스는 먹은 걸 정리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이 없었다.
어젯밤에 한 거라곤 드렉슬러의 서류를 다시 만든 것 뿐이다. 암담했다. 이래서야 퇴근하고 집에 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당장 일요일까지 타라에게 직접 전해줘야 하는 일인데, 시차를 생각하면 이제 24시간도 안 남았다. 다이무스는 일어나 세수부터 했다. 까치집이 된 머리는 대충 왁스로 넘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입었던 코트를 걸치려던 다이무스는 코트에 얼룩이 졌다는 걸 깨닫고 다른 코트를 꺼내 입었다. 목도리를 대충 목에 감고, 식탁 위 테이크아웃 컵과 함께 놓아둔 차키를 가지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에 있으면 이글이 또 저랑 놀아 달라 보챌 테고, 밥도 해 먹여야 하니 그냥 회사에서 일 하는 편이 능률적으로, 심적으로 나았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시계를 보니 7시 48분이다. 지금 출발하면 딱 8시 반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회사로 향했다.
Sette.
[ 정말 죄송해요...콜록, 콜록...! ]
"아냐, 괜찮아. 푹 쉬어."
[ 으으, 어제 애들이랑 놀아주다 그만... 콜록, 내일은 나을 거예요. ]
“난 괜찮으니까, 나을 때까지 쉬어. 어차피 오늘까지 하고 내일은 나도 가게 닫을 거니까. 목 많이 쓰지 말고, 몸 따뜻하게 하고 있어. 끊는다.”
안타까울 정도로 상한 토마스의 목소리에 루이스는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착하고 싹싹한 토마스는 같이 일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딱히 같이 일하는 사이가 아니라도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애였다.
어차피 아침에 나오는 나이오비는 주말에 안 나오고, 연휴가 코앞이니 조금 일찍 닫는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어쨌거나 여기 사장은 루이스 자신이었으니 당장 문 닫고 집에 가버려도 상관없는 것이다.
간밤을 돈걱정으로 꼬박 샌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시계를 보니 8시 반이 넘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아무도 안 찾아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찍 접어도 될 것 같다가도, 어제 한 짓을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싶었다. 어차피 전기세고 뭐고 하면 그게 그거일 것 같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른 걸레를 가져다 바닥을 닦았다. 혹시 몰라서 신발도 닦았다. 혹시 그래도 미끄러울까봐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바닥을 뽀득뽀득 닦아보는데 문의 풍경이 또로록 울렸다.
“엑...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렸더니 어제 그 손님이다. 루이스는 당혹스러웠다. 어제 마지막 손님이 오늘 아침 첫 손님이라니, 아니 그것보다 왜 하필 이러고 있을 때 들이닥친단 말인가. 루이스는 손님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 같은 걸로 드릴까요?”
애써 웃으며 말을 걸자 매서운 인상의 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오늘은 한층 더 무섭다. 어제 자길 쏘아보던 것보다 더하다. 루이스는 냉큼 안쪽으로 가려다 아직 자기가 걸레를 들고 있단 걸 깨닫고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걸레를 빨아서 널어두고, 항균 비누로 꼼꼼히 손을 닦고 나와 달디 단 카페모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뭐라도 같이 내놓으면 좋을 텐데, 쿠키는 오늘 토마스도 안 나오게 된 바람에 새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베이글과 식빵, 치즈와 햄이 냉장고에 들어있어 루이스는 자기 아침을 챙길 겸 크로크무슈를 만들 준비를 했다. 전기 팬에 햄과 빵을 올려두고, 계란을 달달달 풀어 파슬리 가루와 소금을 살짝 쳤다. 샌드위치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듣곤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없었다. 나쁘지 않다는 거지 맛있다는 건 아니니까.
앉아서 노트북 충전기를 연결한 손님을 흘긋 본 루이스는 미리 데워둔 머그에 에스프레소를 붓고 휘핑크림과 자바칩, 드리즐을 뿌리는 것으로 카페모카를 완성했다. 소반에 티슈를 깔고, 시나몬칩을 두 개 얹어서 자리로 가져가면서 루이스는 살짝 긴장했다.
“주문하신 카페모카 나왔습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의 눈은 노트북 화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바쁜가보다, 하고 돌아서서 안쪽 주방에 들어온 루이스는 팬의 전원을 켰다. 햄이 구워지는 냄새며 계란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소리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무심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지금 카페에 음악을 안 틀어놨다는 걸 깨닫고 갑자기 확 부끄러워진 나머지 뒤집개를 들고 한숨을 쉬다가 크로크무슈를 태울 뻔 했다. 다행이 제 때 뒤집어 노릇노릇 먹음직한 크로크무슈 두 개를 대각선으로 잘랐다.
접시를 꺼내 반으로 자른 크로크무슈 두 개를 올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티슈로 감싸 그 옆에 두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원래 메뉴가 아니라 별 다른 장식은 하지 않으려다 그래도 구색이나 갖추자 싶어 방울토마토 두 개와 양상추를 뜯어 한쪽에 놓았다.
더 고민하다간 크로크무슈가 식을까봐 여기까지 하고 한 손으로 접시 아래를 받쳐 손님의 자리로 갔다. 여전히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앞에서 루이스는 영업용 스마일을 띠우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아직 아침 안 드셨으면 드실래요?”
그제야 그의 눈이 루이스를 향했다. 그 회색 눈에 루이스가 잠시 움찔한 사이 살짝 한숨을 내쉰 남자가 안경을 벗고 노트북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루이스는 냉큼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와 함께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왠지 모를 열기에 뺨이 다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카페 안 난방이 너무 센가보다. 아니면 잠을 못 자서 내가 이상해졌거나.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제 몫의 크로크무슈를 집었다.
손이 기름에 묻는 게 뭐 대수이랴. 한쪽 귀퉁이를 베어물고 우물거리는데 괜찮았다. 그래, 이 정도면 뭐라 한 소리 듣지는 않겠지. 소금을 설탕으로 착각하지도 않았고 하나로 뭉치지 않게 계란물도 잘 풀었다.
실수한 거 하나 없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카운터 안쪽의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남자 쪽을 바라보는데, 간단한 요깃거리 하나에도 나이프와 포크를 쓰는 게 꼭 별 다섯 개짜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먹는 폼이었다. 그래 저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눈이 그리로 향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마냥 불편했다. 답답한 나머지 빈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던 루이스는 손에 든 걸 그냥 입 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살짝 치켜뜬 무심한 회색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아메리카노를 내려 마시려다가, 속이 답답해 그냥 찬 물을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저쪽은 나를 아는데 나는 저쪽을 모른다. 마냥 기다리며 언제 세탁비를 청구할지 불안에 떠는 것 보다 연락을 할 수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게 걸렸던 거 아닐까!
루이스는 답을 얻은 것 같은 기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바람에 무릎을 서랍에 찧어 악소리도 못 내고 몸을 수그린 채 무릎을 잡고 몸부림치다 고개를 드는데 눈앞에 남자가 서있었다.
쪽팔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한심하지만 차마 내색은 안하려는 그 표정에 루이스는 우선 허리를 폈다. 그러자 남자는 접시를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피식 웃었다. 순간 부드러워진 눈매며 미미한 호선을 그리는 입매에 루이스는 잠시 숨을 쉬는 걸 잊었다.
“저, 저기요! 이름이 뭐예요?”
그리곤 막힌 날숨을 내쉬는 동시에 말을 던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정신없이, 찰나의 정적에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고.
“...다이무스. 다이무스 홀든.”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크리스마스니까 (0) | 2015.12.24 |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0) | 2015.12.21 |
[벨져루이] The movie. (0) | 2015.12.04 |
[다이루이] Scarface. 01. (0) | 2015.12.01 |
[다이루이] Scarface. 00. (0) | 2015.11.30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Scarface. 01.
01
다이무스는 집사의 인사를 받으며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는다. 미리 받은 주소로 짐을 부쳐놓은 뒤라 늘 들고다니는 가방 외에 딱히 챙길 게 없었다. 오늘부터 연합 쪽에서 제공한 집에서 그와 단 둘이 생활해야 한다. 보안상의 문제로 잡역부도 들일 수 없으니 말 그대로 단 둘이. 딱히 불편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 집처럼 편할 순 없다.
리버포드에 위치한 이층집 앞에 차를 세웠다. 생각한 것보다 외관이 준수했다. 이탈리아풍의 이층집. 누구의 소유인지 감이 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이무스는 코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찰칵,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다이무스를 맞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에는 아니나 다를까 꽤 고급스러운 가구가 즐비했다. 연합은 마피아에 모태를 두고 있으니,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소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이무스는 거실 한 가운데 놓인 제 짐을 확인하고 집 안을 둘러봤다. 일층에 넓은 거실, 서재, 작은 부엌과 식당, 이층에 있는 침실까지. 다른 곳은 원래 비워둔 건지 급히 치운 건지 가구 하나 없이 휑했다.
다이무스는 집을 둘러보고 텅 빈 벽난로에 장작을 던졌다. 바로 오겠다던 사람은 아직 소식이 없다. 먼저 불이나 피워둘 생각으로 난로 앞에 섰는데, 불씨를 던져 넣어도 불이 쉽게 오르지 않았다. 다이무스가 한참 마른 장작과 씨름하며 회사에 있는 그녀를 떠올릴 무렵, 문이 열렸다.
“...... 뭐……. 하십니까?”
“....... 불 피우는 중이었다만.”
“아.”
여전히 추워 보이는 차림의 그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옆으로 매는 가방을 소파에 대충 던진 그가 난로 앞에 다가와 안을 기웃거렸다.
“불 있으십니까?”
다이무스는 라이터를 내밀었다. 수십 번을 시도해도 붙지 않던 불이, 그가 왔다고 붙을 리가 없었다. 다이무스에게 이런 추위는 그리 견디기 힘든 것도 아니었지만 루이스는 방금 막 퇴원한 환자였다. 이대로라면 하루를 보내기도 전에 동사할 지도 모른다. 난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을 꺼내려는데 루이스가 가방에서 신문을 꺼냈다. 루이스는 장작을 다시 쌓더니 대충 만 신문지에 불을 붙여 장작 속에 던졌다.
하얀 손과, 더 파리해진 것 같은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결정능력자라 추위를 잘 타지 않는다고 해도 옷차림이 너무 얇다. 다이무스는 코트를 벗어 신문지를 던져 넣는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은 것 치고 안색이 좋지 않군.”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벽난로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벽난로 앞에 쪼그려 앉은 루이스가 다이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달라는 뜻인 줄 알고 그의 손을 잡아당기자 무슨 짓이냐는 듯 올려다본다. 다이무스는 그제야 제 손에 부지깽이를 말하는 것을 깨닫고 잡은 손을 놓았다. 부지깽이를 내밀자 루이스는 장작을 몇 번 들쑤시더니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좀 쌀쌀하네요. 보일러부터 틀고 오겠습니다.”
“침실은 이층이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무스는 짐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르다 멈춰 섰다. 침실은 하나뿐이다. 방금 확인하지 않았던가. 다이무스는 이게 대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원망하며 계단을 마저 올랐다. 심지어 한 방에 투베드도 아니고, 성인 남성 둘이 굴러다녀도 될 정도로 큰 침대가 떡하니 놓여있을 뿐이다. 다이무스는 짐가방의 옷부터 정리했다. 세탁이나 다림질이야 세탁소에 맡긴다 해도, 청소며 요리를 비롯한 가사는 직접 해야 한다. 다이무스는 새삼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고 한탄했다. 아직 방의 공기가 데워지지 않아 다른 코트를 걸치고 넓은 침대에 얄궂게 자리한 베개 두 개를 노려봤다. 그런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뭐라도 있습니까?”
“아니다.”
가방을 들고 온 루이스가 방 안을 휙 둘러보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먼저 옷장을 쓴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는 열려있는 옷장을 보고, 옆에 있는 서랍을 열어 옷가지를 정리해 넣었다. 생각한 대로 루이스는 같이 살기에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짐을 정리한 루이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이무스는 묵묵히 짐을 정리했다. 먼저 와서 정리를 시작했음에도 짐의 양 자체가 차이나다 보니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방 안은 많이 따뜻해져서 숨을 내쉬어도 하얀 김이 서리지 않았다.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내상이 심했다고 들었다만.”
“밖으로 안 보이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조심하도록.”
루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지친 기색이 농후했다. 다이무스는 조금 더 자라고 하려다가 쓸데없는 참견이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컨디션 조절 정도는 알아서 할 것이다. 그보다 두 사람의 일정을 조율하는 일이 먼저였다.
“연합에서 일은.”
“알아서 할 겁니다. 같이 다녀야하는 만큼 둘을 쓰는 임무를 주겠죠. 저보단 다이무스씨의 일정을 조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전 중으로 은행 업무를 볼 거다. 오후는 비워놓았고, 5시 이후엔 다시 은행 업무를 보고 7시 전으론 퇴근하도록 하지.”
“좋습니다. 그럼 그동안 서점에 있도록 하죠.”
셔츠를 개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바라봤다. 그는 눈을 맞추긴 커녕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스물 네 시간, 동행하라는 말은 못 들었나?”
“그럼 장식장이라도 할까요.”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긴 싫단 소리다. 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영웅에게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까. 그렇게 따지면 멀쩡한 집을 놔두고 업무도 제대로 못 하고 묶여있는 저도 할 말이 많지만 다이무스는 한 번 참기로 했다. 첫단추부터 잘못 꿰고 싶지 않았다. 그 냉랭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열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았고, 다이무스는 그보다 더 심한 동생을 둘이나 가지고 있었다. 둘째 녀석에 비하면 이 정도야 까칠한 축에도 못 든다.
“나쁘지 않군.”
“당신에게, 나쁘지 않은 거겠죠.”
“내가 네 상황을 이해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제게 당신의 상황을 이해해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이스.”
“미리 말씀드리죠. 뭔가 알아내려 하는 거라면, 공연히 힘 빼지 마십시오.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백제를 투여해도 답은 같을 거예요. 믿지 않겠지만.”
루이스는 자조했다. 다이무스는 잠시 제 안에 가라앉아있던 연민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본 적이 있던가. 다이무스가 아는 연합의 영웅은 이렇게 약한 남자가 아니다. 얼음같이 차가운 남자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든 여자를 떠올렸다. 보는 사람마저 안쓰러워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루이스는 낯설고, 또 대하기 어렵다. 다이무스는 한 발 물러났다.
“임무일 뿐이다.”
“……. 그러겠죠. 당신도…….”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잠시 제게 머물렀던 그의 붉은 눈이 달아나버렸다.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 다이무스 씨가 이렇게 묶여있는 것도 금방 끝날 겁니다.”
“무언가 알고 있나?”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곧 쓸모없다는 걸 깨닫게 되겠죠. 당신도, 그들도.”
루이스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상처와 비밀. 어느 쪽에서 기인한 태도인지는 모르나 다이무스는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파헤친다고 속내를 터놓을 사람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회사의 에이스가 아닌 다이무스 홀든은 루이스 개인을 존중했다. 그가 쌓아올린 공적과 짊어지고 있는 것들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의 병실을 가득 채운 선물이 증명하듯 그는 사랑하고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곳에 있는 건 헬리오스의 에이스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별개다. 다이무스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의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침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 시야 안에 있어라.”
“.......”
루이스의 시선이 다이무스를 향했다. 그걸 느끼면서도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잔뜩 겁먹은 토끼처럼 다시 도망갈 것 같아 마지막 남은 바지를 옷걸이에 걸어 넣으며 말을 덧붙였다.
“은행과 서점은 가까우니 사무실을 잠시 그리로 옮긴다고 생각하지.”
“.......”
“싫다면 계속 이 집 안에 있어야 한다만.”
“……. 좋습니다.”
“그래. 그럼 점심부터 먹도록 하지.”
빈 짐가방을 닫아 방 한 쪽에 세워놓고,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눈을 맞췄다. 도망가지 않고 저를 마주하는 붉은 눈에 잠시 빛을 잃었던 총기가 돌아왔다. 흡족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2) | 2015.12.09 |
---|---|
[벨져루이] The movie. (0) | 2015.12.04 |
[다이루이] Scarface. 00. (0) | 2015.11.30 |
[벨져루이] Exorcismus (2) | 2015.11.28 |
[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0) | 2015.11.25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Scarface. 00.
00.
코를 찌르는 알싸한 냄새. 소독용 알콜과 세제 특유의 냄새가 나는 복도를 한 남자가 걸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긴 검은 병문안을 의심하게 했지만 어쨌거나 목적은 병문안이 맞았다. 검을 들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다이무스는 연합 쪽에서 전해 받은 정보를 다시 한 번 곱씹고 흰 문 앞에 섰다. 정중하고 간결하게 노크한 뒤 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자 차분한 목소리가 다이무스를 반겼다.
“예상대로군요. 당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연합의 영웅은 창가에 서있었다. 겨울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그는 당연히도 얇은 환자복 차림이었다. 다이무스는 문을 닫았다. 갈 곳을 잃고 가라앉은 바람에 펄럭이던 커튼이 멈췄다.
“아이스.”
다이무스는 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다이무스를 향해 쓰게 웃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들이쳐, 역광이 졌다. 할 수만 있다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겨울 도나우 강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는 지쳐보였고, 그 기색을 감추려하지도 않았다.
트리비아 카리나가 떠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 함께 있었던 유일한 남자는 홀로 돌아왔다. 자연히 새 공간과 정보에 혈안이 되어있던 이들의 관심은 그에게 쏠렸다. 자백제라도 투여해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지천에 널렸다.
연합에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곤 하지만 그는 연합의 영웅이었다. 새 공간, 그로부터 파생될 막대한 힘. 그 유일한 목격자. 세계는 안타리우스의 재림과 더불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능력자단체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고, 새로운 공간과 힘을 연합이 독점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언제 이 경쟁에서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은 결국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회사에서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결정의 루이스는 24시간, 회사 측 인물과 동행할 것. 연합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정보의 우위를 점한 건 그들이나 물자를 가진 건 회사다. 그것은 2차 능력자 전쟁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루이스가 안타리우스로 추정되는 괴인들에게 습격 받아 혼수상태에 빠진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연합에선 루이스가 정보를 털어놓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회사에서도 그가 순순히 협조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보호라는 명목 아래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을 뿐이었다.
연합에서는 그 괴한들 역시 회사의 소행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었지만 회사는 전면 부인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소식, 그러니까 기어이 안타리우스의 의식이 성공했다는 정보가 이글을 통해 들어오면서 일주일간 이어진 탁상공론이 끝을 맺었다.
동생들의 소식을 적대세력을 통해 전해 듣는 기분이란. 다이무스는 통탄했다. 기어이 녀석들은 제멋대로 뛰쳐나가 일을 벌였다. 안전이라곤 보장되지 않는 곳에 몸을 던지고 불나방이라도 되려는 것인지. 거기에 아메리카 대륙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소식까지 더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합도 회사도 더는 무의미한 소모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빠른 동맹을 맺고, 회사와 연합은 협력을 약속했다. 회사가 부랴부랴 내놓은 타협안에 연합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아무렴 연합에 경호인원 하나 없겠냐는 불만이 터져나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회의 끝에 그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건 다이무스였다.
안타리우스의 습격에 대응할 수 있고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며 배신하지 않는 믿을만한 사람. 거기에 그가 숨기고 있는 것들을 알아내고 감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게 윗선의 결정이었다. 이런 일에 내보낼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있었고 타라는 빈말로도 그와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다. 그녀가 이성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아무렴 동성이라도 화장실이나 욕실까지 들여다보는 건 아니지만 성별이 다르면 여러모로 제약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다이무스는 병실 한편에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루이스의 병실엔 꽃이며 간식거리며 과일 같은 선물이 가득했다. 베개 옆에는 사랑스러운 곰인형까지 있다. 연합에서 그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이 병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결정의 루이스는 명실공히 연합의 영웅이다.
그래도 예전엔 한 마디씩 말을 붙였던 것 같은데.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자리에 앉아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서류와 안경을 꺼냈다. 임무는 내일부터지만 은행일까지 쉴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가 이글 같은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루이스는 침묵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너무나 당연해서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처음 건넨 말이 이 상황에 대해 느끼는 전부라는 듯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바깥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불편해하면 나가면 그만이고 말을 걸면 그에 맞는 답을 하면 그뿐이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상태를 보러 온 것 뿐이니.
기어이 보던 서류를 정리하고 나서야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면 어느새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다이무스는 안경을 벗으며 말을 꺼냈다.
“내일이 퇴원이라 들었다만.”
“우연이군요. 저도 내일부터라고 들었는데. 바로 갈 겁니다. 챙길 짐도 별로 없고.”
좋게 봐줘도 우호적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말투에 눈에 힘을 줘도 루이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 시간 반이 흐르도록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내일 뵙죠.”
완곡하지만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다이무스는 서류를 챙기고 배웅은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사내의 등에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살펴 가십시오.”
다이무스는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돌아섰다.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한동안 같이 살게 될 텐데, 그동안 부딪히지 않으려면 이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가 서로에게 훨씬 유익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The movie. (0) | 2015.12.04 |
---|---|
[다이루이] Scarface. 01. (0) | 2015.12.01 |
[벨져루이] Exorcismus (2) | 2015.11.28 |
[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0) | 2015.11.25 |
[다이루이] 가이드 (0) | 2015.11.2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명왕아들 루이스au
Good evening, sir.에서 이어집니당
루이스 밀러의 경호 첫 날. 다이무스는 일찌감치 은행일을 마치고 명왕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를 다시 만난다는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묘한 열기가 손끝을 감싸고돌았다. 그리고 그 긴장은 루이스의 방 앞까지 이어져, 다이무스는 문을 두드리는 단순한 행동조차 망설였다.
“어...?”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기억 속의 그 날 처럼 말간 얼굴의 그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본다. 다이무스는 문을 두드리기 위해 올렸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가 놀란 토끼를 연상시켰다.
“오늘부터 경호를 맡은 다이무스 홀든입니다.”
“아, 오늘부터였구나. 잘 부탁드려요.”
루이스는 문을 열고 나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아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다이무스는 목을 매만졌다. 은연중에 봄철에 새순을 틔운 나뭇가지같이 곧고 하얘서 잘 만든 도자기 인형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굳은데다 차가웠다. 차가운 건 그 능력 때문이겠지만 손끝에서 간질거리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뭇 레이디들의 손을 잡으면서도 무덤덤했던 다이무스에겐 낯선 경험이었으나 다이무스는 그마저도 목 안쪽으로 삼켜버렸다.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바쁜 분의 시간을 뺏는 거 아닌가 싶네요.”
“괜찮습니다.”
윌라드는 루이스가 콕 집어 자신을 지목했다고 했다.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한다 해서 누군가 이익을 보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루이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윌라드 크루그먼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진심이라 없는 말일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런데 왜 모른 척 하는가. 다이무스는 들어오라는 권유에 루이스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명왕의 집다운 인테리어지만 그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바깥보다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이었다. 다이무스가 잘 관리된 방을 둘러보며 습관처럼 사각을 찾는 사이 루이스가 창문을 열었다.
“정말로 할 일이 없을 겁니다. 대외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앨리셔를 마중가거나 가끔 산책하는 갓 뿐이니까.”
“그래도 제 일입니다.”
“그럼 좀 쉬어간다 생각하세요.”
루이스는 창을 등지고 미소 지었다. 햇살이 물에 닿아 부서지며 오색 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듯이.
다이무스는 집어삼켰던 숨을 몰래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자리를 권하며 침대에 앉았다. 그의 집이고, 방이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다이무스는 침대에 있는 루이스가 신경 쓰였다. 이글이나 벨져가 그랬다면 눈길을 주기는커녕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텐데. 창문을 열었음에도 방안이 더웠다. 방주인은 편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초면이나 다름없는 타인의 방에서 편하게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스가 신문을 펼쳐들었다. 다이무스는 집에서 보려고 챙겨온 서류를 꺼냈다.
코끝에 도는 향기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잠시 존재를 잊었던 루이스가 양 손에 잔을 들고 앞자리에 앉았다.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보기 시작한 서류였건만, 보다 보니 그만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집중해버렸다. 다이무스는 펼쳐놓은 서류를 한 데 모았다.
“차랑 커피 어느 쪽이 좋을지 몰라서.”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방해될 것 같아서요. 차? 커피?”
“그럼 커피를.”
루이스는 다이무스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남은 잔에 담긴 홍차는 곧장 그의 입으로 향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기왕 쉬는 김에 체스 하실래요?”
별로 어려운 요구도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눈을 빛내며 둥근 탁자 위에 체스 판을 가져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별로 표정이 변한 것도 아니지만 신이 난 게 빤히 보이는 그가 소년같이 귀여웠다. 다이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고 커피를 마시며 판이 채워지길 기다렸다. 동생들과 놀아주는 건 이미 십년도 더 전에 졸업했지만, 고작 두 살 어린 사내는 제 혈육들보다 훨씬 더 귀여운 동생 같았다.
이런 동생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을 텐데. 무심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유년기를 상상하던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걱정하던 앨리셔를 떠올렸다. 둘은 피가 이어져있지 않아도 좋은 남매임에 틀림없다.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한 때 잠이 들기 전 눈을 감고 바라던 '귀여운 동생'에 대한 환상과 이상을 전부 모아놓은 사람 같았다.
다이무스는 기꺼이 루이스가 양보한 흰 말을 잡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처음에 봐준답시고 악수를 둔 게 아까워질 정도로 어렵다. 많이 고민하고 두는 것도 아닌데 루이스의 수는 거침이 없었다. 이기긴 힘들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수를 되짚으며 엷은 미소가 걷힌 루이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예리한 눈매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눈을 사로잡는다. 예쁘게 웃는 얼굴보다, 오히려 이 쪽이 진짜가 아닐까.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던 다이무스는 비숍을 움직였다. 아니, 실수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돌이킬 수 없는 악수를 둔 다이무스는 낮게 신음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무 봐주시는데요.”
“그만.”
“벌써요?”
다이무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봐줬다 해도 진 건 진 거다. 루이스가 슬쩍 웃고는 말을 돌렸다. 이겼는데도 썩 즐거워보이지 않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뭔가 굉장히 실망시킨 것 같은 기분이다. 다이무스는 제가 불편해한다고 오해를 하나 싶어 탁자 쪽으로 몸을 숙였다.
“한 판 더 두겠나?”
“봐주기 없이?”
“그래.”
“좋아요.”
또 얼마쯤 말을 움직이며 수를 주고받았을까, 마침내 루이스의 흑색 킹을 잡은 다이무스는 가볍게 체크메이트 선언을 했다. 순순히 항복한 루이스는 오히려 아까보다 후련해보였다. 훨씬 나아진 얼굴에 덩달아 기분이 나아진 다이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말을 정리하다 고개를 든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얇게 눈을 휘며 웃었다. 오후의 햇살에 눈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순간 숨을 멈췄던 다이무스는 한 박자 늦게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기습만큼이나 위험한 미소다. 다이무스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를 바로 볼 수가 없다. 잠시 머물 곳을 찾아 헤매던 다이무스의 눈은 장식장 위 시계에 멈췄다. 고작 두 판을 두었을 뿐인데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걷었던 소매를 내려 소매 단추를 잠갔다. 그 사이 체스 판을 다 정리한 루이스가 다이무스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다이무스는 슬쩍 몸을 돌렸다. 갈고닦은 몸이 부끄럽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그를 흘긋 돌아보며 눈치를 주자 루이스가 멋쩍게 웃었다.
“아, 시간이. 슬슬 나가볼까요.”
외출인가.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둘이라 그다지 준비할 것도 없다는 게 그나마 기꺼웠다. 재킷을 집어 들고 모자를 쓰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루이스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따라 뒷자리에 앉아야 할지, 기사 옆 조수석에 앉아야할지 망설였다.
“뭐해요?”
“아닙니다.”
문을 열고 옆자리를 비운 채 기다리는 루이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문을 닫았다. 바로 출발하는 차는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리고, 루이스는 창틀에 팔을 올린 채 밖을 바라봤다. 멍하니 정면을 보던 다이무스는 작은 콧소리에 옆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매끈한 턱선과 옆얼굴이 지난 밤 기차에서 본 것과는 또 달랐다.
루이스의 옆얼굴을 보던 다이무스는 너무 빤히 쳐다보는 건 신사로서 할 행동이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다이무스는 무릎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말이 많은 것도, 사교성이 좋은 것도 아니다. 다이무스 홀든은 오히려 너무 말이 없어서 답답하단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겐 말을 붙이고 싶다. 침묵이 어색한 것도, 그가 불편하게 구는 것도 아니지만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대화가 하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한참 망설이다 백미러로 루이스를 보곤 운을 뗐다.
“어디로 가십니까.”
루이스가 차에 탄 뒤 처음으로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돌렸다. 다이무스에게 향한 붉은 눈동자가 잠시 그대로 멈춰 있다가 슬며시 풀렸다.
“앨리셔의 수업이 끝날 시간이라서요.”
“경호원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왜 굳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앨리셔는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공성전에 투입되는 사이퍼다. 그녀보다 열 살이나 많은 루이스보다 강한 게 당연하다. 불한당을 만났을 때 오히려 불한당의 신변을 걱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할까봐 나름 돌려 말한다고 한 건데, 루이스는 단번에 뜻을 파악했다. 머리가 너무 좋아도 탈이다. 혹시 열등감을 자극한 걸까.
“능력이 보잘 것 없어도, 오빠는 여동생이 걱정되는 법이거든요.”
차분한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해서, 열등감이나 질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나마 마음을 졸인 게 민망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다이무스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침묵을 가르는 목소리에 눈을 맞추자 루이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말 놓으셔도 돼요. 아까처럼.”
말을 놓은 적이 있었나. 다이무스는 기억을 뒤졌다. 오늘이 정식으로 경호를 맡은 첫날이고, 전투가 아니라지만 이 역시 엄연히 임무다. 하물며 경호 대상에게 하대를 하다니. 다이무스의 머리가 빠르게 기억을 되짚는 사이 루이스가 눈꼬리를 휘며 작게 웃었다.
“왜, 체스할 때요.”
“.......”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그만 낭패의 한숨을 지었다.
“편하게 하세요. 저도 그 편이 편하고.”
루이스가 말을 덧붙이며 재킷의 단추를 잠갔다. 차가 멈추고, 다이무스에게 싱긋 웃은 루이스가 차에서 내렸다.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예상 외로 루이스 밀러 경호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임무는 임무. 그것도 굉장한 중책이다. 다이무스는 차에서 내려 루이스의 뒤에 섰다. 앨리셔가 다니는 하교 정문엔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나오고 있었다.
“루이스라고 불러도 돼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앨리셔의 모습을 찾으며 하는 말엔 두 번이 없다. 다이무스는 정답을 말하고도 석연치 않아 루이스를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불만을 가득 안고 침묵했다. 이글의 변덕이 옮기라도 한 걸까. 거절한 건 자신인데도, 기분이 상했다.
“아, 오빠!”
“안녕, 앨리셔. 잘 지냈어?”
“아침에 인사하고 얼마나 지났다구요. 아, 다이무스씨도 안녕하셨나요.”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한 남매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잠시 멈춰있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움직여 인사했다. 앨리셔는 두말할 것도 없고,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앨리셔의 가방을 대신 든 루이스는 누가 봐도 한 번쯤 돌아볼만한 남자라 지나가던 학생들의 발길이 멈췄다. 그냥 같이 서있는 것만으로 그림이 되는 남매라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다. 다이무스는 더 사람이 많아지기 전에 차문을 열었다.
“타시죠.”
“자, 아가씨 먼저.”
“감사합니다.”
뒷자리에 두 사람이 타고, 문을 닫은 다이무스는 자연스레 남은 조수석에 탔다. 선택지가 없었던 것 뿐이지만 왠지 섭섭했다. 두 사람은 정답게 떠들고, 다이무스는 잠자코 앞을 보며 두 사람의 둘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학교생활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내놓는 앨리셔와, 그녀에게 맞장구치며 귀기울여주는 루이스는 그야말로 자상한 오빠였다.
“우왓!”
“오빠!”
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에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명왕의 자녀들이 탄 차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 일. 다이무스는 두 사람이 무사한 걸 먼저 확인하고 검을 쥔 채 내렸다. 꾸물거리는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우였습니다.”
“오빠, 괜찮아요?”
“응. 너무 그렇게 보호해주지 않아도 돼.”
“아, 죄송해요.”
루이스는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앨리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갈등이 격화된 능력자전쟁을 고스란히 겪은 세대니 무리도 아니었다. 지난 몇 년도 대학에 갔다고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피신해있었다는 게 명왕의 친아들에 대해 범람하는 소문 중 가장 유력한 설이었다.
딱히 소문을 믿는 건 아니지만, 다이무스 궁금했다. 이 데운 우유같이 말간 남자의 과거가, 베일에 싸인 그를 알고 싶다는 욕구가 차올랐다. 더, 알고 싶다. 다이무스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그러쥐었다. 아침에 혼자 차를 타고 올 때 느꼈던 묘한 열기가 여전히 손끝에 맴돌고 있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루이] Scarface. 00. (0) | 2015.11.30 |
---|---|
[벨져루이] Exorcismus (2) | 2015.11.28 |
[다이루이] 가이드 (0) | 2015.11.23 |
[티엔루이] 선물 (0) | 2015.11.01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1. (0) | 2015.10.28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재록본 수록용으로 썼던 벨져루이다무 디스토피아물
이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팔을 베어도, 다리를 베어도, 심장을 찔러도 어기적거리며 다가온다. 벨져는 오래 전에 들은 네크로멘서와 죽은 시체들의 얘기를 떠올렸다. 끝나지 않는 시체들의 밤. 그런 허무맹랑한 전설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랬다. 이대로라면, 당한다. 머리를 베어야 겨우 멈추는데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벨져는 한 발 물러섰다.
깨어나보니 폐허뿐인 낯선 도시, 거기에 베어도 베어도 달라붙는 적, 이미 한 차례 길을 헤맨 뒤라 퇴로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한다. 벨져는 흉측하게 뼈를 드러내고도 달려드는 그것의 머리를 베었다. 단번에 베지 않으면. 벨져는 양손에 든 검으로 시체가 썩는 악취를 내는 그들을 죽였다. 죽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겐 차라리 죽음이야말로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길인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벨져는 혀를 찼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가. 검이, 박혀 빠지지 않았다. 얼마를 이렇게 쫓겼는지, 신체강화능력을 사용해도 역부족이었다. 벨져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무식하게 높은 건물과, 거무죽죽한 하늘. 지금이 몇 시인지도 알 수 없는 조건. 이게 혹시 질 나쁜 꿈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위에서 창문이 깨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당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귀가 멍멍한 총성이 울리더니 달려들던 흉악한 얼굴이 발치에 나뒹굴었다. 단 한 발의 총성. 구원과도 같은 소리에 벨져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이어를 타고 내려오면서 터지는 총성에 맞춰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하나씩 쓰러졌다. 침착하고, 신중한 명중률이다. 검은색 일색으로 무장한 저격수는 벨져 앞에 착지했다. 그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벨져는 힘주어 검을 뽑았다. 그인지 그녀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벅지에 찬 총이 두 정, 허리춤에 하나, 군용 나이프에 기관총까지 갖추고 중무장을 한 채 큰 가방을 메고 있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멋쩍어져 한 마디했다.
“…사례하지.”
“이봐, 뛸 줄 알아?”
작게 인사를 말하자 흘긋, 뒤를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쳤다. 꼭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눈동자. 무례한 언사였으나 그 눈빛에 시선이 사로잡힌 벨져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면 뛰어!”
발을 움직이게 만드는 목소리에 따질 겨를도 없이 뛰었다. 귓가를 스치는 총성에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 목소리도, 눈빛도 어딘가 익숙했다. 불쾌하고 찝찝한 그 감각.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던 그 눈동자.
“아까운 총알을 낭비하게 하지 마, 토마스. 이봐, 이쪽.”
남자는 빠르게 골목을 돌며 뒤로 돌아 기관총을 쏘아댔다. 벨져는 어두컴컴하고 좁은 골목을 달리며 흘긋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기관총 대신 안정적인 자세로 몇 발 더 발포하면서 오른쪽으로 돌라고 눈짓했다. 따라오는 발소리에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자 격자로 된 철창이 열렸다. 바로 팔만 뻗으면 다가올 정도로 앞까지 다가온 그것을, 총을 바꿔든 그가 쏘아 죽였다. 바로 앞에서 터지는 썩은 피. 벨져는 마침내 열린 문에서 저를 잡아끄는 손에 끌려가고, 그가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저기, 괜찮아요? 어디 물린 곳은?”
“물려…? 아니, 없다.”
“운이 좋았네요. 마침 총기점에 식료품을 전달해주고 오는 길이었거든요.”
마에스트로. 서류에 있는 사진으로 몇 번 본 게 고작인 청년의 얼굴에 벨져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석을 동경해 한 달을 걸려 영국으로 건너와 지하연합에 들어갔다는 다른 얼음쟁이. 그가 살갑게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벨져는 뒤를 돌아봤다. 헬멧과 고글을 벗고 머리를 터는 그는 분명 제가 아는 그가 맞았다.
“…루이스…?”
“어, 루이스 씨를 아세요?”
“알다마다.”
빌어먹을 정도로 잘 알지. 벨져는 이를 악물며 눈썹에 힘을 줬으나 루이스는 벨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문을 이중으로 닫고도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있었다.
“참,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전 토마스라고 해요. 토마스 스티븐슨.”
“벨져 홀든이다.”
“엑, 홀든?”
“그래.”
젊은 결정사가 난처한 듯 루이스를 바라봤다. 명백한 구원요청이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벽에 걸려있는 패드에 무언가를 입력하느라 바빴다.
“저기, 루이스씨….”
“총알 서른발짜리 전리품 치곤 꽤 짭짤하네. 뭐, 그것도 통신이 먹통이 아닐 때나 소용있는 일이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랑 똑같아. 이봐, 괜찮으면 들어.”
“너…!”
척척 다가온 루이스가 그때까지 매고 있던 가방을 턱 던졌다. 상당히 무거운 무게에 벨져는 가방의 끈을 잡으면서도 일부러 배를 노리고 던진 그를 쏘아봤다. 정작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옆에 있는 꼬맹이 자식이 안절부절 못하며 안색을 살폈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벨져는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리곤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왜?”
“그새 총같은 거나 두르고, 이거 영웅 꼴이 말이 아니군. 이젠 이 몸까지 모른 척이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잘난 능력은 어디다 갖다 버리고 이러고 있는 거지.”
“…하아. 토마스, 무시하고 데려가. 아무래도 약이라도 한 모양이다.”
“네, 네!”
얘기를 듣기는 커녕 사람 얼굴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더니 약쟁이 취급이라니. 벨져는 제게 다가오는 마에스트로를 밀어내고 루이스의 멱살을 잡았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이 지독히도 익숙했다.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대답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설명해. 밖에 득실거리는 저것들은 또 뭐고, 너는 또 왜…!”
소리치는 중에 팔이 잡히고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순식간에 벨져를 엎어매친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 주변을 털었다.
“일단 올라가서. 조금 진정하라고.”
벨져가 내던진 가방을 다시 짊어지고 둔중한 철문 앞에 선 루이스는 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렸다. 그 신호에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이중 삼중으로 엄중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게 안타리우스의 본거지를 방불케 했다. 불만도 의문도 가득했지만 일단은 그의 말대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데 마에스트로가 다가와 속닥였다.
“루이스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예요?”
“뭐? 무슨 소리지?”
영웅을 동경한다는 주제에 2차 능력자 전쟁과 그를 영웅으로 만든 저를 모른다니. 연합엔 바보밖에 없는 건가.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 루이스씨는 얼마 전까지 용병이셨다고 하니까, 음. 아무래도 저같은 일반인은 잘 모르거든요. 이번 일도 그렇고….”
일반인?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결정 능력으로 영웅이 된 사내는 능력 대신 총을 든 용병이라 하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은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벨져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검이라니, 신기하네요.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확실히 총이나 포가 발달하긴 했지만, 홀든이니까.”
“하하, 그래도 확실히 이런 데서 일본도는 보기 드물죠.”
“토마스, 그만 떠들고 와서 이것 좀 밀어봐.”
“아, 네!”
토마스는 루이스와 함께 셔터를 밀어올렸다. 딱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만 열어 허리를 숙여 들어가는데, 더 올리면 될 것을 굳이 몸을 숙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밖보다도 어두컴컴한데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넓은 홀. 벨져는 주변을 둘러봤다. 루이스는 다시 셔터를 닫고 가지고 있던 라이트로 주변을 슥 훑었다. 적막한 공간에 세 사람의 발소리만 울렸다. 한 번 둘러본 루이스는 라이트도 꺼버렸다. 어떻게든 공간에 대한 정보를 모으려 했으나 잠시 스쳐간 불빛의 잔상에 눈이 적응하질 못했다.
“그쪽이 아니라 여기.”
다른 쪽 통로를 봐두려 했는데, 잘 보이지 않아서 헤맨다고 생각했는지 루이스가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 되도 않는 친절에 코웃음을 쳤으나 루이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바리케이드가 겹겹이 쳐진 계단을 오르자 마침내 루이스가 문을 열었다. 계단의 비상등에 의지해 걷던 벨져는 들어오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토마스, 모두에게 소개 부탁해. 난 가져다 놓고 씻으러 다녀올 테니까.”
“아, 네! 다녀오세요!”
루이스는 손을 흔들어보이곤 어둠 속으로 걸어 사라졌다. 토마스 스티븐슨과 단 둘이 된 벨져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발소리만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저, 저기….”
“뭐냐.”
“따라오세요. 다들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면 기뻐할 거예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운이 좋았어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지? 저것들은 또 뭐고.”
사람 좋게 웃던 토마스 스티븐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보더니 갑자기 팔을 잡았다.
“저기, 잠시만요.”
“무슨 짓이냐!”
“잠시면 돼요.”
기어이 팔을 잡고 소매를 걷은 녀석은 팔꿈치 안쪽을 보고 나서야 팔을 놓았다. 그리곤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으로 보는데, 벨져로서는 도무지 그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약…하는 거 아니죠?”
“아까부터 자꾸 약쟁이 취급을 하는데, 전혀 손대본 적 없다.”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토마스가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났다던가…?”
벨져는 대답하는 대신 표정을 굳힌 채 그를 빤히 쳐다봤다. 토마스는 금방 백기를 들었다.
“그, 외 떠들썩했던 바이러스 있잖아요. 그게 퍼졌어요. 여긴 몇 안 되는 안전거점 중 하나구요. 다른 데랑 달리 번화가의 쇼핑몰이라 주변이 위험한 것도 있지만 적어도 생필품이 모자라진 않아요. 전기도 돌아가고.”
“바이러스?”
“네, 그 좀비 바이러스 있잖아요. 어딘가에서 연구진들이 백신을 개발중이라곤 하는데 그것도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아, 혹시 형제가 있지 않나요?”
“…있다.”
토마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그게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 했는데, 여기서 보니까 알겠네요. 얼른 가요! ”
뭐가 그리 기쁜지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혹시 여기에 다이무스나 이글이 있는 건가. 연합의 인물이니 이글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디 갖다 던져놔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녀석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소식을 들으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능력은 어떻게 된 거지?”
“네?”
“자랑하는 얼음 감옥 말이다.”
“얼음이요? 식료품을 최대한 한군데 몰아넣느라 얼음은 없어요.”
마치 능력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듯한 말투에 벨져는 미간을 찌푸렸다. 둘러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제가 동경하는 영웅이 저를 한 번 이겼다 해도 그 아래 있는 녀석까지 무시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검을 빼들지 않는 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느끼고 있는 위화감, 믿을 거라곤 그 잘난 결정능력밖에 없는 주제에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그들. 불길한 예감이 벨져의 발목을 휘감고 올라왔다.
“아, 혹시 아까 루이스씨가 쏜 총에 맞기라도 했어요?”
“…아니다. 그보단 안내를 부탁하지.”
“네, 바로 여기예요.”
쇼핑몰이라고 하는 건 백화점 같은 것인지 구역별로 물건이 늘어서있었다. 잔뜩 어질러진 데다 군데 군데 비어있는 게 한차례 소동에 털린 것 같긴 하지만. 조금 더 걸어가니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 왔어요!”
“토마스!”
“토마스가 왔어!”
“토마스 오빠!”
“뭐야, 누구야?”
“누구랑 같이 왔는데?”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금방 시끄러워졌다. 수가 적긴 했지만 대충 보기에 연합의 능력자들 몇과, 기타 세력의 능력자 몇, 그리고 회사 쪽의 인물도 몇 섞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동생 녀석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악에 물들어 한 달음에 달려오는 녀석의 표정이 꼭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다가와 성난 표정으로 주먹을 날리며 무슨 소린지 모를 욕설을 지껄이기 전까지, 벨져는 제게 펼쳐진 지옥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루이스는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장비를 벗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 덕에 몸을 움직이느라 몸은 땀범벅인 데다 녀석들의 썩은 피냄새가 배인 옷을 입고 있자니 찝찝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물은 곧 자원. 최대한 물을 아껴가며 샤워를 마친 루이스는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고 피에 젖은 장비엔 미리 만들어둔 소독제를 뿌렸다. 가급적 물을 쓸 일이 있다면 한 번에 신속하게 하는 편이 좋다. 근 십 년간 몸에 익힌 생존지식은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데 퍽 유용했다.
뒷처리까지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루이스는 이 층에 유일하게 샤워룸이 갖춰진 직원실을 나왔다. 이 역시 전투인원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였다.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지만. 루이스는 쓰게 자조했다. 그래도 임무를 완수한 데다, 생존자를 한 명 더 데려왔으니 이 정도면 남는 장사였다. 관리실 앞에서 걸음은 멈춘 루이스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가 붙어있는 철문에 대고 정중하게 노크했다.
대답 대신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왔나.”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로군.”
“교환 임무는 완료했습니다. 거기에 생존자를 한 명 구출했고요. 내역은 리스트와 대조해보시면 됩니다.”
“수고했다. 가서 쉬도록.”
“다이무스.”
루이스는 딱딱하게 대답하는 그를 불러세웠다. 아직 작동하는 CCTV와 그 통제실에 있는 그라면 들어올 때부터 알았을 것이다.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 차림으로 등을 돌리고 선 그, 그리고 그 옆에 기대어 둔 기다란 검. 루이스는 한 걸음 다가갔다.
“읏…!”
돌아선 그는 루이스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더운 숨이 샜다. 혀를 얽고, 몸을 더듬거리다 보니 벽에 부딪쳤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루이스.”
“후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다이무스는 애틋한 눈으로 팔 안의 남자를 바라봤다.
“녀석 때문이냐.”
“…다이무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전,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네 책임인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군.”
루이스는 다시금 떠오르는 나쁜 기억에 쓰게 웃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팔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눈을 맞추려 했으나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어리석은 남자였다. 버림받고도 주인을 찾아가려는 미련함이 야속했다.
“루이스. 다시 생각해 봐라.”
“노력해보겠습니다.”
“두 번째가 없으리라 생각하지 말고.”
뼈아픈 충고였다. 루이스는 제 팔을 아프도록 잡은 그의 팔을 잡았다. 이것이 남자의 질투인지, 아니면 진심어린 충고인지는 모르나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걸 알기에 괴로웠다. 루이스는 제 목줄을 잡았던 남자를 떠올리고 가볍게 숨을 토했다.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아 황폐화된 도시와 파멸한 인류. 그 속에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해봐야 지옥 속의 시한부 인생에 불과했다. 루이스는 저를 바라보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여기서 어떻게 더 나빠질 수가 있을까요.”
“곧 비가 내릴 거다.”
“그리고 눈이 내리겠죠. 저들이 썩어 없어지는 것과 우리가 저들에게 먹히는 것, 어느 게 먼저일까요.”
“루이스.”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엄한 목소리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팔을 잡아 떼자 다이무스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루이스를 끌어안았다. 휑하게 드러난 목언저리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루이스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마주 안으려 손을 뻗다가 멈췄다. 역시, 아직은 이 남자를 마주 안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럼 이만.”
“그 녀석은 널 버릴 거다.”
“…그럴 지도 모르죠.”
따스한 온기를 밀어내고 차가운 철문에 손바닥을 댄 루이스는 쓰게 자조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저를 버린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제가 얼마나 바보같은지도 잘 알았다. 그리고 그게 저를 바라봐주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루이스는 무겁고 차가운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으로 걸어가며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여전히,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엔루이] 선물 (0) | 2015.11.01 |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1. (0) | 2015.10.28 |
[다이루이] 그 해 겨울 (0) | 2015.10.25 |
[벨져루이] I'm Fine (0) | 2015.10.24 |
[벨져루이토마] 어느 짝사랑. (0) | 2015.10.23 |
설정
트랙백
댓글
글
[다이루이] 그 해 겨울
2013년도 1월 앤솔에 냈던 원고인데 다시 보니 꽤 마음에 들어서 일부만 공개해봅니다 :3
모티브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시리즈.
어? 잠깐.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한창 원고지를 써내려가는 중에 트릭에 허점이 보인 것 같아 손을 멈추었다. 앞부분을 다시 보려는데 옆에 둔 원고지뭉치가 없었다. 어어, 분명 여기 뒀는데? 하고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옆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움찔했다.
한 번 집중하면 옆에 누가 와서 무슨 짓을 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옆에 앉은 사람 때문에 루이스는 하마터면 강의 중이라는 것도 잊고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루이스는 옆에 앉은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
루이스가 알고 있는 그는, 완벽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수석으로 입학해 과탑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좋은 머리에, 잘 나가는 집안, 잘 생긴 외모. 사람들로 하여금 질투와 선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는 주사위를 여섯 번 굴려도 여섯 번 모두 6을 나오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주름 하나 없는 연한 하늘색의 와이셔츠, 단정한 감색 재킷. 해질녘의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이는 시계. 그 모두가 오로지 그를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완벽했다.
루이스는 언젠가 이글이 제 형은 숨 막힐 정도의 완벽주의자라고 한 것을 떠올렸다. 집 안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다던 말을 지금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제 글을 읽고 있다. 그것도 자기 바로 앞에서.
초조함에 책상을 두드리다가, 손톱을 입에 물었다가 이내 자신의 행동이 불안해하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에 깍지를 끼고 얌전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번엔 다리를 떨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해도 뼈마디가 굵은 그의 손에서 제 원고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저절로 눈이 다이무스의 손을 향했다. 흘긋거리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제 담당 편집자인 고혹적인 미녀를 떠올렸다. 수많은 신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트리비아 카리나의 앞에서도 루이스는 이렇게 떨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는 소설에 쓰이는 스토리와 트릭을 두고 말다툼을 벌이긴 하지만, 4살 연상의 그녀는 언제나 좋은 파트너였다.
애초에 루이스를 등단시킨 것은 오랜 친구인 앤지의 도움이 컸다. 고등학교 동창이던 그녀는 알고 보니 대기업 수장의 딸로, 앤지는 아버지의 계열사중 하나인 출판사에 제 소설을 가지고 갔다.
당시 매출이 저조했던 지라 모험삼아 낸 루이스의 소설은 예상 외로 히트를 쳤고, 루이스는 도서출판 ㈜연합의 영웅이라 불릴 정도가 되어버렸다. 앤지가 없었더라면 아직도 루이스는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루이스가 쓸데없이 과거회상을 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을 때, 강의실이 웅성거려 고개를 드니 교수님과 학생들이 짐을 싸고 있었다. 때마침 다이무스의 손에서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겨우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네?”
다이무스의 회색 눈이 루이스를 향했다. 정면으로 시선을 받고 있자니 와, 정말 잘생겼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어어...그게...”
“아직인가.”
아뇨. 당신 때문에 생각해둔 게 지금 전부 날아갔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루이스는 애써 참았다. 아직 강의실 안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다이무스 홀든을 향하고 있었다.
하긴, 얼굴도 잘 생겼겠다. 집안도 좋겠다, 유능한 인재라 졸업 시즌에 앞서 스카우터들이 모셔가려 한다는 소문도 달고 다니는 그다. 굳이 여자가 아니라도 그의 옆에 붙어 뭐라도 해볼 생각으로 달라붙는 사람이 많았다지만, 정작 다이무스는 그런 시선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게 타고난 카리스마와 여유라는 걸까. 이런 사람이 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구나, 하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시간 있나.”
“네?”
“아까부터 두 번 말하게 하지마라, 루이스.”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강의인 범죄심리학은 목요일 마지막 강의였다. 마감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고, 오늘은 늘 저를 따라다니는 토마스도 대타 알바가 들어왔다며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돌아갔기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 강의인데...”
“그렇군. 저녁은 먹었나?”
“아뇨.”
“그럼 내가 사지. 짐 챙겨라.”
멍하니 있다가 다이무스가 건네는 원고지 뭉치를 받아들고 퍼뜩 빈 원고지들과 만년필을 정리해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먼저 성큼성큼 강의실을 나서는 그를 따라가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저기, 다이무스 홀든씨?”
“뭐지.”
“저 아세요?”
분명 같은 강의를 듣긴 하지만 분명 그와 루이스는 초면이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당연하게 루이스에게 반말을 했다. 아무리 루이스가 나이 21를 먹고도 아직도 술을 사러 가면 신분증 검사를 당하는 동안의 소유자라도, 보통이라면 존대를 했을 것이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다.
같은 과 동기인 이글이 집에서 제 얘기를 하기라도 했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과 얼굴을 매치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이글은 새벽 2~3시까지 클럽을 쏘다니거나 술 먹으러 가고 다음날 오후 강의에나 간신히 얼굴을 내미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다이무스가 루이스를 알 일은 없을 텐데.
“.....”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알 만큼은 알고 있다. 동생 둘이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벨져도 홀든이었지. 문득 그를 떠올렸다. 1학년 때, 멋모르고 앤지의 손에 이끌려 토론대회에 나섰다가 마주친 오만한 남자. 단순히 경력을 쌓기 위해 참가한 벨져는 당연히 우승을 예상했지만, 결승전에서 루이스와 논쟁을 벌이고 결국 패배했다. 그 이후로 아직까지 벨져는 루이스만 보면 이를 갈고 있었다.
전파를 타고 방송까지 됐으니, 동생을 보려고 TV를 봤다면 충분히 제 얼굴을 알만했다. 한 번 본 사람을 기억할 정도라면 그의 기억력이 좋거나, 아니면 주위의 누구-아마도 벨져-가 계속 떠오르게 했겠지.
그렇게 납득하고 나니 괜한 말을 꺼냈단 생각에 멋쩍어져 어깨에 맨 크로스백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애초에 다이무스 홀든 같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기한테 관심을 가질 리가 없는데. 공연히 맥이 빠져버렸다.
자신을 잘 따르는 토마스는 가끔 부담스러울 정도로 루이스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곤 했지만, 루이스의 성적은 겨우 중위권을 유지하는 정도고 딱히 학과 활동이나 다른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루이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로서도 아직 부족하고.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생각을 하는 사이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 뛰었다. 그 바람에 후드가 벗겨지고 시월의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로 옆도, 뒤도 아닌 애매한 간격을 두고 그를 따라 걸었다.
어색함만 감도는 침묵 속에서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아 입술을 핥았다. 튼 곳이 있었는지 따끔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단편집 마감을 하고 나서 급하게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마치느라 제대로 침대에 들어가 잔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으니, 입술이 이렇게 되는 거야 당연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어...딱히 가리는 건 없는데요.”
“그렇군.”
학교 정문을 나서면서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어왔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니 수긍하는 것으로 대화가 끊겼다. 그런데 담백하고 간결한 그의 화법은 이상하게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냥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일까.
그런데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마감과 과제에 치여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체육대회 때문에 거리에 형형색색의 학과 잠바를 입은 학생들이 가득했다. 새삼 이런 날 강의를 풀로 하고 과제를 걷어간 스타이거 교수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불같은 금요일 저녁. 학교 언덕을 내려가 봐야 클럽과 술집뿐이니 그냥 간단하게 먹자는 제안에 다이무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강의실을 나온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거리에 화려한 조명이 켜질 무렵에야 겨우 분식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직장을 은퇴한 선배님이 차린 분식집은 값싸고 양 많고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직접 운영하는 곳의 가게 이름이 왜 엄마 손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한 번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는 말도 돌았다.
그렇지만, 다이무스 홀든과 분식집이라니.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곁들이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좁은 분식집에서 라면을 시키는 걸 보고 있자니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려서 헛웃음이 나왔다.
“즐거워 보이는군.”
“아...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사과라면 오히려 내가 해야겠지.”
뭐에 사과한다는 걸까, 하는 순간 불연 듯 다시 고개를 드는 민망함에 시선을 피했다. 테이블에 마주 앉고 나니 다이무스의 시선이 곧장 루이스에게 꽂혔다. 피할 수도 없어 따라 둔 물만 들이켰다.
“흥미롭더군.”
“...감사합니다.”
루이스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팬래터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체크하곤 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피드백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트리비아의 회유와 협박에도 나서기 싫다며 일관했던 루이스였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지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다.”
잠깐, 앞뒤를 다 잘라먹는 직설적인 화법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뭐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드니 다이무스는 아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수학과 조교인가?”
아, 들켰다. 망연해지는 기분에 어색하게 웃었다. 루이스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다이무스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스토커는 독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가짜 범인일 테지. 스토커라면 일부러 가면을 놓아두는 행위는 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그녀를 납치한 것까지는 스토커의 짓인가?”
“계속 하세요.”
눈앞의 남자는 정확히 내용을 짚었고,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계속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무스는 어디까지 답을 낸 걸까하는 생각에 조금 두근거렸다. 아니, 엄청 두근거렸다.
“여자는 독신에 술집 종업원이었다. 교수인 연인을 제외하면 딱히 친한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그 연인에게 연정을 품은 조교가 있다. 더 볼 것도 없는 치정극이더군.”
범인과 동기. 추리소설의 3요소 중 두 가지를 풀어냈으니 마지막으로 트릭이 남았다. 모름지기 추리소설엔 이 셋이 고루 섞여야 한다는 것이 루이스의 지론이었다. 하나라도 빠지면 완벽한 답이 될 수 없다.
거침없이 말을 잇던 다이무스가 입을 닫았다.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행동이 그가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직 트릭에 대한 답을 내지 않았다. 애초에 트릭에 허점을 느끼고 펜을 멈춘 루이스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완벽한 사람의 표본인 다이무스 홀든이라도, 단번에 간파당하면 작가의 이름이 울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천천히 턱을 괬다. 조금 전까지의 긴장이 다 거짓말이라는 듯 여유를 가장하고, 슬쩍 미소까지 띠웠다.
“그리고?”
다이무스는 돌변한 루이스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 여유를 가장하고 경계하며 떠보고 있다. 루이스에겐 가장 강력하고 비밀스러운 패가 하나 남아있었고, 다이무스는 아직 그 패를 뒤집을 수를 찾지 못한 듯 했다.
“...그 밀실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읽는 사람이 풀어야죠.”
다이무스의 손가락이 나무 재질의 테이블을 두드렸다. 식당 안의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지만 그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나는 소리만 또렷이 들렸다. 다이무스가 손가락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 당돌한 면이 있군.”
“절 잘 모르시나 보네요.”
다이무스의 눈매가 순간 부드러워졌다. 아, 이런 표정도 짓는구나. 저도 모르게 손은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기분이 묘했다. 홈즈를 만난 모리아티의 기분이 이런 거 아닐까. 호적수를 갖는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라면, 무슨 문제를 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푼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누가 말했던가, 범죄자와 탐정 사이는 오히려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묘한 유대감과 긴장이 둘을 아주 가까운 거리의 평행선이 되어 달리게 한다.
오싹할 정도의 흥분이 루이스의 몸 안에서 휘몰아쳤다.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기분 좋은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도 그렇군. 그럼,”
“주문하신 라면 나왔습니다~.”
넉살좋게 웃으며 양 손에 음식을 들고 온 주인 아저씨가 음식을 상 위에 척척 차리면서 다이무스의 말이 끊겼다. 맥이 탁 풀리는 동시에 그냥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러모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수저통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 건넸다.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면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선입관에 사로잡혀버렸던 건지.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좋았다. 무뚝뚝한 건 사실이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이글이 말하는 것처럼 꽉 막힌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지만, 그와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앤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을 때랑 비슷하기도 하고, 조금 더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막상 김이 하얗게 오르는 음식을 눈앞에 두니 식욕이 돌아 짧게 잘 먹겠다고 말한 후 젓가락을 들었다.
확 깨져버린 분위기에, 따듯한 음식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도 영 아니다싶어 조용히 먹기만 했다. 다이무스역시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다 먹고 일어서서도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계산하는 다이무스를 두고 먼저 가게 문을 밀고 나서는데 바깥 날씨가 제법 추워 후드를 뒤집어썼다. 거리의 나무들이 떨군 잎들이 바싹 말라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걸 보니 새삼 올해 가을이 다 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처연해져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엔 유독 보름달이 크고 밝았다.
“달이 밝군.”
딸그랑- 풍경 소리와 함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후드 짚업의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도 않고 뒤돌아서니 다이무스가 다가와 덮어쓴 후드를 벗겨냈다.
“이게 훨씬 보기 좋다.”
찬바람이 드러난 목덜미를 스치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에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후드를 썼다. 루이스가 집을 나설 때만해도 해가 짱짱한 가을 날씨였기에 후드 짚업 안은 반팔 티 한 장 뿐이었다.
“전 이게 편해요.”
물론 후드를 쓰고 있으면 따뜻하기도 했지만, 루이스는 후드를 쓰고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언제부터 후드를 쓰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건 언제든지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동굴과도 같았다. 혹시 언짢아하는 건 아닌가 싶어 안색을 살피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너무 포커페이스라 읽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지만.
“잘 먹었습니다.”
“그래.”
딱히 더 생각나는 말이 없어 으레 하는 감사 인사를 했다. 고개를 끄덕인 다이무스는 다시 앞장 서 걷기 시작했고, 어차피 역으로 가는 방향이었기에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여전히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애매했다.
그의 뒤도, 옆도 아닌 미묘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다이무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걸음걸이에서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꼿꼿하니 바른 자세로 걸었다.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것만큼 당당하지만 그보다 진중하고, 결코 뽐내지는 않는다. 그의 숨길 수 없는 자신감과 여유가 잘 생긴 호랑이를 연상시켰다.
문득 다음 작품엔 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도 이야기 거리로 어떻게 만들어 볼 수 없을까를 고민하는 게 글을 쓰는 이에겐 습관이나 다름없는 법. 다이무스 홀든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있자니 괜히 손이 근질거렸다.
잘 생긴 얼굴에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고, 두뇌명석하기까지 한 좋은 집안의 장남. 만능형 캐릭터는 식상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다. 그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 걷는데도 이상하게 다이무스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학교 골목거리에서 대로로 나오니 사람들이 즐비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이따금 인파에 치일 때면 뒤를 흘긋 보며 걸음을 늦춰주었다. 딱히 더 할 말도 없다면 그냥 밥 먹고 간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훌쩍 가버려도 상관없는 것을, 그의 작은 배려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까지 5분 되지 않는 짧은 거리를 그렇게 걸었다. 이상하게 그 5분은 긴 것 같기도 했고 짧은 것 같기도 했다. 뭐 하나 딱 떨어지는 것 없이 미묘하고 애매한 데, 간질거리는 그 기분이 싫지 않았다.
“잘 들어가라.”
“어, 다이무스씨는요?”
“차 가지고 왔다.”
잠깐, 지금 뭐라는 거야? 차 가지고 왔다고? 근데 왜 여기 있어요? 지금 나 데려다 준 거예요? 라고 묻고 싶었는데 입에선 이미 멍청하게 되묻는 소리만 나왔다.
“네?”
“그럼 이만 가보지. 늦었으니 조심해서 들어가라.”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 본 다이무스는 그렇게 말하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의 등을 눈으로 쫓다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 역시 사람이 많았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아까 하던 구상을 잇기 시작했다. 무겁고 날카로운 검 같은 남자. 배경은 현대보단 근대로, 자식이 없는 고령의 괴짜 노인이 지인 몇을 저택에 초대해 신비의 액자를 걸고 추리 대결을 시작한다.
초대받은 사람은 총 다섯. 아름다운 여배우, 세도가 집안의 장녀, 노인의 주치의, 참석하지 못한 기업가의 대신으로 온 여비서, 마지막으로 주인공과 그의 친구.
머릿속으로 대강의 배경을 잡고,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배터리가 1% 남았다는 경고창이 떠서 손가락을 멈췄을 땐 이미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세 정거장이나 지나친 후였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1. (0) | 2015.10.28 |
---|---|
[벨져루이다무] 삶과 죽음의 경계 (0) | 2015.10.25 |
[벨져루이] I'm Fine (0) | 2015.10.24 |
[벨져루이토마] 어느 짝사랑. (0) | 2015.10.23 |
[다이루이] (0) | 2015.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