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실질적인 업무는 일반 창구 업무가 끝나는 4시부터다. 헬리오스의 에이스에서 은행원의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도 딱 4시였다. 그것뿐이라면 어떻게 병행할 수 있다. 문제는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 쪽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씩이나 되는 사람이 창구 업무를 볼 위치에 있는 건 아니지만 트와일라잇이라고 하면 내로라하는 능력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아무리 능력자 등록제가 시행되고 있고, 연합과 회사가 관리를 한다고 한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일반인이, 그것도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를 일반 사무원이 능력자들을 상대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들로부터 기간을 엄수해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어느 정도 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신뢰와 정확, 냉철함을 두루 갖춘 데다 능력자들에게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 그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은 이미 중역에서 그들의 임무를 다하기 바빴고, 그들을 고작 대여 업무나 시킨다고 트와일라잇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몇 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트와일라잇의 대여 업무는 자연스럽게 다이무스에게 돌아갔다. 이 결정이 가장 효율적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문제는 일감은 줄지 않고, 시간은 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헬리오스의 업무에 은행 지부장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업무, 거기에 장비 대여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래도 두말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건 그것이 다이무스 홀든의 책임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홀든의 직계, 그것도 장남의 위치란 그런 것이다. 두 동생이 도움이 되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으나 둘 다 제 역할을 다하긴 커녕 다이무스의 속만 썩이기 바빴다. 전에는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가졌다면 요즘은 그냥 사고만 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루의 업무를 마치려면 퇴근은 당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다. 다이무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야근을 하다 사무실을 나왔다. 내내 앉아서 서류를 보느라 뻐근한 목을 돌리며 서점 앞을 지나려는데 문득, 걸음이 멈췄다.
이 시간까지 뭘 하기에 아직 불이 켜져 있나 했더니, 서점 안 의자에 널브러져 잠든 그가 눈에 들어왔다. 꼭 막내 녀석 같은 포즈로, 입까지 벌리고 자는 게 퍽 안쓰럽고 귀여워 서점 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깰 줄 알았더니 꽤 깊이 잠들었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문을 열어둔 채 불까지 켜고 불편하게 자느니 제대로 정리하고 돌아가 쉬는 게 나을 성 싶어 다이무스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낡은 경칩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 영웅씩이나 되는 남자가 이렇게 무방비한 건 위험하다 못해 무모한 일이다. 이글이야 천성이 그런 녀석이지만 침착하고 냉철한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었다.
물론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루이스에게 실례되는 일이지만. 모름지기 평소 행실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해도 다른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한심하다는 생각 대신 같은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민이 먼저 들고 만다. 그런데 왜, 그 다음엔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다이무스는 한 손에 책을 안은 채 눕다시피 앉아있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숙련된 검사인만큼 발소리가 큰 편은 아니지만 정장에 맞춰 신은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고작 몇 걸음.
가장 평범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깨우기 위해 뻗은 손이 멈췄다. 몸을 뒤척이며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이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몸을 모로 살짝 튼 채 고른 숨을 내쉬는 루이스의 입술과,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고른 치아에 그만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루이스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차마 다가가질 못했다. 아마도, 그때도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눈을 감으며 살짝, 닿았다 떨어진 다이무스는 그를 깨우려던 손으로 의자를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친애의 표시로도 하는 행위지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다이무스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고 화끈거리는 목을 매만졌다. 루이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고, 입을 맞추었다는 건 자신밖에 모른다. 다이무스는 헛기침을 했다. 떨리는 루이스의 속눈썹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들어올 때만 해도 이런 데서 이렇게 잠든 걸 안타까워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도무지 깨어날 줄 모르는 게 반가웠다.
잠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이무스는 본래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을 하기 위해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루이스.”
“으응…….”
“일어나라. 돌아가서 자도록.”
몸을 웅크리며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도리 저으며 깨어나길 거부하던 루이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다시 잠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루이스가 눈을 떠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에 조금 서운해지려는 찰나, 그의 시선이 다이무스를 피해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 큼. 크흠. 그, 다이무스 경....”
“퇴근하던 중에 불이 켜진 게 보였다.”
“아, 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깨우기 위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루이스도 급히 일어나 떨어트렸던 책을 줍다가 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 발 앞서 나간 다이무스의 손이 루이스의 팔을 잡은 덕에 어디 부딪치는 일은 막았지만 상태가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괜찮나?”
“...네,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입니다.”
“조심하도록.”
루이스가 눈을 내리깐 채 작게 숨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무척 아름다워, 눈을 떼지 못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는 게 아쉽지만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할 시간이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것으로 격려를 담아 인사하고 돌아섰다.
들어올 때도 그랬지만 나가는 것 역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작 몇 걸음을 옮기는 게 아쉬워진다. 다이무스. 그의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했다.
그런 기대로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기다린 목소리가 다이무스를 불러 세웠다.
“저....”
기대한 것처럼 이름을 불러준 건 아니지만 충분하다. 다이무스는 한 박자 쉬고 고개를 돌렸다. 멀어지는 동안 낸 목소리만큼이나, 망설임이 가득한 표정이 꼭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려는 것 같아서 손에 든 서류 가방을 꽉 잡았다.
“감사합니다.”
망설임 끝에 겨우 입 밖에 낸 감사가 어찌나 기특한지. 그 자신도 모르게 다이무스의 입술이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하지.”
“네? 아, 예.”
“그럼.”
“좋은 밤 되시길.”
기분 좋게 서점을 나선 다이무스는 밤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나긋한 목소리를 되새겼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 피로가 반절은 덜어진 것 같다. 고작 몇 분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이다. 상투적인 인사일 뿐이라는 것쯤은 안다.
허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다이무스 홀든에게 오늘밤은 그저 평범한 여느 하루와 같지 않아졌다. 불현듯 떠오르는 시상에 다이무스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 누가 이토록 영감을 줄 수 있을까.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듯, 사랑스러운 간질거림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