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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Notes
아픈 도련님 벨져(19)와 그 병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루이스(20)
언어의 장벽... 그것은 사퍼에게 묻는 것으로....☆
그리구 왠지 이것도 연재를 하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든....ㄷㅏ....
Day 1.
늦은 여름, 오스트리아 홀든 가의 저택엔 어김없이 햇살이 쏟아져 들었다. 짜증날 정도로 좋은 날씨에 아직 소년의 인상이 다 가시지 않은 청년이 문을 두드렸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의 이름은 루이스. 볼 일 없는 교육수준에, 돌봐줄 사람도 없는 천애고아. 청년에게서 그나마 봐줄만한 곳이라곤 성실한 태도와 준수한 얼굴 뿐이었다.
든 것도 없는 짐가방을 가지고, 루이스는 성 같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죽하면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낼 정도일까.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저택의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건물의 외관도 그랬지만 안은 더했다. 이런 집도 이주면 익숙해지겠지만.
루이스는 앞으로 자신이 묵을 방을 둘러보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때 벗었던 모자를 내려두고 커튼을 쳤다. 식사 시간이며 생필품을 어디서 받으면 되는지, 자잘한 것들을 늘어놓는 집사를 향해, 루이스는 모두가 꺼리는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래서.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은 어디에 계시죠?”
집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루이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닳을대로 닳아서 감흥이 없는 것인지 몰라도, 청년은 차분한 무표정으로 집사의 시선을 마주했다. 비열하지도, 굽신거리지도 않는 영민한 하인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집사는 흔들림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문제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명문 홀든 가의 가장 큰 고민이자, 조금 교육을 받은 것뿐인 고아 따위를 고용한 이유.
문을 두드리자 무언가 문에 맞아 깨지는 소리가 났다. 슬쩍 청년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무표정으로 서있었다. 집사는 아무 말 없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고, 청년에게 들어가보라 눈짓했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문을 닫고 물러섰다.
눈 하나 깜짝 않는 게 여간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버텨줄런지. 집사는 지나가던 하녀에게 방을 치우라고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한밤중에 도망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문이 닫히고, 루이스는 슬쩍 방 안을 살폈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지만 성인도 아닌 아이에게 이렇게 큰 방, 거기에 욕실까지 딸려있는 큰 방이라니 과연 손 꼽히는 재력가 다웠다.
“하, 이젠 들여다 보지도 않는군.”
루이스는 허리를 숙여 하얀 도자기 파편이 깨져 나뒹구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큼직한 파편들을 모아 한 데 몰아놓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기 바쁘던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도자기보다 더 하얀, 소년인지 소녀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가 흉흉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노려봤다.
명백한 적의와 경계에 루이스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봤자 신경질적인 환자에 불과하다. 다만 그 환자가 상상도 못할 부자에, 권력까지 거머쥔 홀든의 둘째 도련님이고, 사람을 아주 짐승같이 부릴 뿐이다.
“이렇게 물건을 던지면 다칩니다.”
“뭐야, 넌.”
“도련님의 열일곱번째 하인입니다. 아시겠지만 절 고용한 건 마님이고, 내쫓을 수 있는 것도 도련님이 아니라 마님이죠.”
“하,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루이스는 손을 털었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엔 핏기가 없고, 있는 거라곤 귀족 특유의 오만과 거만, 그리고 분노 뿐이다. 그 분노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 화풀이를 하고 있다. 그 대상이 된다는 게 더럽지만 이미 과분할 정도로 넘치는 돈을 받았다.
그 돈은 파산 직전이었던 수도원으로 갔고, 루이스는 앞으로 삼개월간 꼼짝없이 이 히스테리한 도련님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이주. 사람이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이주가 걸린다. 그게 결코 좋지 않더라도, 시간은 감정을 무디게 해준다.
“내기하시겠습니까?”
침대 위에 앉아있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스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결코 호의를 품지 않는 푸른 눈동자에, 루이스는 담담히 말을 이으며 다가갔다.
“제가 먼저 도망갈지, 아니면 도련님이 절 쫓아내는 게 먼저인지.”
“내가 얻는 게 뭐지?”
“글쎄요, 승리? 도취감? 뭐. 십 분도 채 안 가겠지만.”
“원래 말을 그딴 식으로 하나?”
“뭐, 도련님께서 공손하게 말씀하시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하인 치고 주제 넘은 발언이지만 이 방에는 그와 루이스 단 둘 뿐이었다. 앞으로 더한 것도 볼테니 거리낄 것도 없다. 간병인이며 하녀, 내로라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붙여도 채 일주일을 못 넘기고 도망치고 만다는 도련님이다.
밖에 떠도는 소문은 그렇다 쳐도, 집안 사람들까지 그의 호전되지 않는 병세와 신경질에 진력이 났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그게 더 환자를 무력하게 만들고, 무력감은 곧 독이 된다. 열다섯까지만 해도 뛰어난 재능으로 촉망받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응당 화가 날 테고, 그의 형제들을 보면 자신의 것이었던 것이 떠올라 상실감과 분노가 끓어오르겠지.
“흥. 시궁창을 구르던 쥐새끼 주제에.”
그렇게 생각했다. 길길이 날뛸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싸늘한 눈빛을 한 번 주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조롱 다음은 무시인가. 루이스는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벨져에게 다가갔다.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을 잡자 벨져가 손을 쳐냈다. 발끈해서 노려보는 그의 손을 다시 힘주어 잡고, 손등과 손바닥을 살핀 뒤 놓았다. 검을 잡았다던 손은 생각한 것보다 딱딱하고 차가워서 시체를 만지는 것 같았다.
“상처는 없군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도자기나 유리는 던지는 중에도 깨질 수 있으니까.”
“너....”
“손목을 다칠 수도 있습니다.”
당혹, 혹은 짜증, 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무언가로 얼룩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강한 충격과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도자기 파편을 치우던 하녀가 움찔 놀라 루이스를 바라봤고, 눈이 마주친 루이스는 그녀에게 괜찮으니 어서 나가보라 눈짓했다. 침대에서 사는 것 치고 손이 맵다.
화끈거리는 뺨 대신, 루이스는 방금 제 뺨을 친 손을 잡았다. 발갛게 부은 손바닥을 확인하려는데 그의 손이 다시 날아들었다. 맞아주는 대신 손목을 잡아챈 루이스는 그를 내려다 보며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두 사람의 힘으로 두 사람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련님. 이거 내리시죠.”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지 알아?”
“때리면, 그럼 기분이 좀 풀립니까? 아닐걸요.”
손을 놓자 다시 한 번 고개가 돌아갔다. 기왕이면 다른 쪽으로 때리던가. 그래도 양 쪽 볼이 퉁퉁 부은 채 흉한 몰골로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인 일이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 도련님과 지내는 일은 더 고될 듯 했다.
“얼마든지 해보시죠.”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전 뭔가를 믿는다는 것에 회의적인 편인데요.”
“세 치 혀로 농간을 부릴 셈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을걸.”
“앞으로 차차 알게 되시겠지만, 전 말이 많은 편이 아닙니다.”
루이스는 목에 맨 타이를 풀고 하녀가 남기고 간 빗자루를 집어들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깨진 파편을 정리하고 있으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일어나는 대신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그가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내기를 하자고 했지. 좋아. 받아들이겠어. 대신 조건이 있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 마주한 얼굴이 진지했다. 오가는 시선과 이어지는 침묵 속에 그가 씩,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지면, 평생 내 밑에서 일하도록.”
“안정적인 직업 제안 같은데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지.”
“그야 두고 볼 일이죠.”
“흥. 커튼부터 쳐. 빌어먹을 햇빛.”
그, 벨져 홀든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베개에 몸을 기댔다.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동작에 루이스는 내심 감탄하며 커튼을 쳤다. 얇은 여름 커튼 뿐인 제 방과 달리 얇은 커튼 옆에 두꺼운 커튼이 한 겹 더 붙어있었다.
루이스는 벨져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햇빛이 비치지 않게 커튼을 치고, 방 안에 있던 물병을 집어들었다. 옆에 놓여있는 수건에 물을 적셔 그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지 않았을 뿐 편안하게 누워있는 벨져의 손을 잡아 살짝 부은 손에 적신 수건을 갖다 댔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파편을 만질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손을 적시고 호호 불어가며 식히는 동안 벨져는 손을 뿌리치지도 빼내지도 않았다. 사람을 부리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잘한 일 따윈 제 손으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가늘고 흰 손을 식히고 나서야 제가 그 사이 무릎을 꿇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친다.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손을 놓았다. 내내 내려다 본 건 자신일 텐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 올려다 본 것만 같다. 루이스는 숨을 삼키며 일어났다. 세면대 앞에서 물수건에 남은 물을 짜고 거울 너머로 흘긋 그를 바라봤다. 그 역시 자신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어 다시 눈이 마주쳤다.
숨 쉬기도 힘든 무거운 공기 속에 루이스는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필요해서 보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타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루이스는 수건을 내려놓고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가만히 앉아 눈을 살짝 내리 깔고, 손을 다리 위에 얹었다. 부르면 언제든 답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는 것도 하인의 일 중 하나다. 앞으로는 시간을 죽일 책이라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구부정하게 수그렸던 허리를 폈다. 이제 겨우 만난 것뿐인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Day 2.
일 없이 가만히 있는 동안 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건 좋은데 성질이 사나운 것 같다. 정말 예쁘다. 씻기는 동안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게 고역이었다
Day 3.
우리 도련님은 모시기 정말 힘든 분이다. 왜 다들 못 버티고 나갔는지 알겠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벨져가 예쁘다는 것이다. 돈때문에 하는 일이긴 하지만 사나흘이면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은데 그 얼굴을 보면 그래도 조금 참을만 하다.
Day 4.
어제는 책을 읽는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더니 오늘은 또 괴테를 읽어달라신다. 내일부터는 손에 집히는 반경에 약통 외에는 두지 말아야겠다. 어제는 책에 맞았는데 오늘은 찻잔이 날아왔다. 맞진 않았지만 뭔가를 던지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신호다. 스케치용 연필이야 맞아도 주우면 그만이지만.
Day 5.
신경질과 짜증을 받아주느라 완전히 지쳐버렸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정신도 쉽게 지치기 마련이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
Day 7
일주일째다. 어제는 일기를 쓸 짬이 없었다. 엉망이 된 방을 치우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들었다. 지금은 수면제와 진정제를 먹고 자고 있지만, 솔직히 이 일을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Day 10
하필 오른 손을 다치는 바람에 펜을 잡기 힘들다
Day 11
마님과 얘기를 나눴다 벨져의 상태가 부쩍 좋아보인다고 한다. 어디가 좋은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벨져는 마님을 닮았다. 주인어른은 뵌 적이 없다.
Day 12
노크를 깜빡했는데 그냥 한 번 슥 쳐다보는 걸로 끝났다 지금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아름답다
Day 13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에 하인들이 수채 물감이며 유화 물감이며 캔버스를 날라다 내 방에 가져다 놓았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이지만 착잡하다 벨져의 기분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한다 꽃을 보고 싶대서 꺾어온 장미를 병째 내던졌다. 손질이 다 되지 않은 장미 가시에 찔려서 그랬다고 하는데 변명인지 설명인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머리를 빗어달라기에 빗질을 했는데 바로 짜증을 내며 꺼지라고 했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머리 빗는 것도 배워야겠다
Day 14
씻으면서 봤더니 몸에 멍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한숨이 나왔지만 얻어맞는 것보단 덜하다. 오늘은 점심 메뉴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안 먹으려는 걸 겨우겨우 달래서 한 스푼씩 떠먹였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벨져는 싱글벙글 웃었다 물론 순수한 웃음이 아니라 비웃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것보단 낫다 약을 안 먹는다고 뻗대기에 꿀을 잔뜩 넣은 차에 타서 먹였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Day 15.
이런 저런 일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이 주가 지났다. 까칠하고 까다로운데다 신경질적인 도련님과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깨지고 부서진 집기가 몇, 그 바람에 생긴 상처가 또 얼마쯤. 홀든 가의 하인들은 그래도 다른 도련님들이 안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루이스를 위로했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는 딱 이주가 걸린다. 그 시간은 지났고, 루이스는 벨져의 화법과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그의 변덕에 익숙해졌다. 그 역시 루이스에게 익숙해졌는지 노크 없이 방을 드나들어도 눈총을 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면 벨져는 일어나 피아노를 치거나 그림을 그렸다. 책을 읽는 건 지루해 하기에 그럼 체스라도 두겠냐고 한 것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통산 전적 24승 23패. 짜증과 신경질로 무장하고 별 것도 아닌 걸 트집 잡아 시비를 걸던 벨져가 조용해지는 건 그 때와 잘 때 뿐이었다.
잠들면 그렇게 천사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는데. 가장 반짝일 시간에 이렇게 침대에 박혀 지내야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의 수발을 드는 자신도, 안타깝기는 매한가지지만. 이래서 돈이 좋다. 귀찮고 성가신 일을 미루고도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니까. 돈이란, 재물과 권력이란 일단 가지고 보는 것이다.
루이스는 그렇게 자신을 도닥였다. 벨져는 오늘도 어김없이 까다롭게 이 옷 저 옷을 벗었다 입길 반복했고, 벨져가 그나마 낫다고 하며 거울에 그의 몸을 비춰 볼 땐 녹초가 되어 찬 물을 들이켰다.
오늘은 산책을 가겠다며 나가기도 전에 체력을 뺀 장본인은 아주 큰 마음을 먹어주신 걸 감사히 여기라는 듯 뻐겨댔다. 그것 참 아주 감사한 일이네요. 라고 빈정거리지 않는 건 기특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쨌거나 마님은 벨져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며 기뻐하고 있었고, 집사는 새로 하인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홀든 저택의 사람들은 루이스가 떠나기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벨져조차도.
첫날 이후로 루이스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필요할 때 손발이 되어주고, 자잘한 일을 처리하고 제가 모셔야 할 도련님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루이스는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그만두고, 왜 밤중에 도망갔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쏟아지는 비아냥과, 아픈 구석을 쿡쿡 찌르는 날카로운 말투, 거기에 사람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고 모욕을 주는 것까지.
벨져는 특권층이었고, 그가 가진 것들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와 하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와 벨져의 태도가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그의 말이 무조건 맞는 척을 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거리의 고아로 자라 온갖 것들을 보고 자란 자신도 가끔 울컥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스는 주방에서 챙겨준 피크닉 용 도시락과 벨져의 약, 돗자리를 챙겼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양산까지 챙기고 나서야 벨져의 방문을 두드렸다. 제 손으로 입히며 보긴 했지만 일곱 번이나 갈아입은 흰 셔츠 위에 감색 조끼, 베이지색 면 바지가 퍽 잘 어울렸다.
다른 하인 없이 단 둘이,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루이스는 벨져의 세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고, 벨져는 뒷짐을 진 채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벨져의 걸음이 멈추고, 루이스도 따라서 멈춰 섰다. 탐스럽게 핀 꽃을, 와인 잔을 들듯이 잡은 벨져는 부쩍 지쳐 보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조금 쉬어 가자고 해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 벨져가 푹, 숨을 내쉬며 꽃을 놓았다.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나?”
“아니오. 꽃은 잘 모릅니다.”
“...그래. 그렇군.”
“조금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들은 적이 없군.”
“아.”
루이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주 하고도 하루가 되도록 이름도 몰랐다 말인가.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로 루이스는 제 입으로 이름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너라고 부르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루이스가 입을 다문 동안에도 벨져는 재촉하는 일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순순히 늦은 답을 내놓았다.
“루이스. 루이스입니다.”
“...격이 떨어지는 이름이군.”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도 아니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벨져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그가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해하며 홱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걷는데, 여전히 그 변덕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Day 16
어제 산책을 하고 온 뒤로 벨져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는다 헐레벌떡 가보면 그냥. 이라고 한다 내 이름에 노이로제가 걸릴지도 모르겠다 빗질하는 건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다
Day 17
벨져가 자고 있다 하루밖에 안 됐는데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자다가도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깜짝깜짝 놀란다.... 여전히 잘 때만큼은 천사가 따로 없다
Day 18
차에 약을 타는 걸 들켰다 앞으론 어떻게 먹여야할까 길길이 날뛰는 벨져를 진정시키느라 펜을 들 힘이 없다
Day 19
큰일났다 아무래도 잠깐 존 것 같다 아닌 척 펜을 들었는데 벨져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무슨 말이 쏟아질지 안 봐도 뻔하다 꽃이라도 꺾어와야 할까
다행이다. 오늘의 빗질은 통과인 것 같다 머리카락이 가늘고 결이 좋아서 꼭 실크를 만지는 것 같다 그리고 씻길 때마다 생각한 거지만 정말 피부가 희고 깨끗하다 전에 생긴 상처인지, 오래된 흉터 몇개가 있는 게 아까울 뿐이다 아름답다는 말이 이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Day 20
오늘은 비가 와서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었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려도 벨져는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기에 다가가서 손을 잡았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머리를 기대왔다 창문을 닫는 대신 등을 토닥여주었다 지금은 자고 있다 일어나면 따뜻한 거라도 먹여야겠다
Day 21
벨져가 감기에 걸렸다 의사가 다녀 갔다
Day 22
열이 도통 내려가지 않아서 밤새 돌봤다 열에 시달리는 내내 내 손과 소매를 잡는 바람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열이 내려서 잘 자고 있다
Day 23
의사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자 벨져는 그딴 건 쓸모가 없다며 짜증을 냈다
Day 24
벨져가 마님과 산책을 나갔다 아무래도 무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돌아와서 다시 열이 오를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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