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분량과 완결편, 부록은 책에 실릴 예정이며 조만간 책 홍보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익숙한 길을, 전혀 익숙하지 않은 차림으로 걷는 기분은 오묘했다. 파티에 나갈 때나 신을 법한 구두와 좋은 옷, 거기에 모자까지 쓰고 길을 걷자니 흘긋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정도였다. 가슴과 허리를 갑갑하게 조여맨 속옷들때문에 숨을 쉬는 것도 버겁다. 날이 덥지 않아서 망정이지, 해가 내리쬈으면 이 차림도 여의치 않았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잘 닦인 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땅에서 한참 올라온 구두 때문에 뛸 수가 없었다. 옷과 구두, 심지어 속옷 하나에 이르기까지 몸에 딱 맞는 것뿐이라 헐렁하게 입고 다녔던 루이스에겐 하나같이 갑갑했다.
생전 꾸며본 적 없는 루이스가 이런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게 된 데에는 어김없이 벨져가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했다. 벨져가 부르는 날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 날은 세탁소에 들르는 걸 깜빡한 나머지 옷장에 처박혀 있던 원피스를 입고 그를 만나러 갔다.
뭘 입고 나타나도 탐탁지 않아 할지언정 따로 말은 하지 않아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마침내 빛이 바랜 노란 원피스가 벨져의 한계치를 넘어선 모양이었다. 벨져는 문을 열자마자 위아래로 훑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대체 그 차림으로 어떻게 여길 왔냐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옷은 편하면 그 뿐이고, 벨져의 기준에 맞추려면 그야말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꼴이라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럼 네가 한 벌 해주던가.'라는 말로 응수했다. 아니나 다를까 벨져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사주면 입을 거냐는 말에 답하지 않고 욕실로 직행한 게 문제였던 걸까.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연합으로 출근하니 휴게실에 잔뜩 쌓인 상자와 동료들의 시선이 루이스를 맞았다. 트리비아는 루이스가 오자마자 상자를 풀기 시작했고, 연합의 휴게실은 순식간에 부띠끄로 돌변했다. 원피스가 두 벌, 드레스가 한 벌,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여름용 스커트가 두벌씩. 거기에 속옷과 구두, 모자까지 하나하나 풀자면 끝이 없었다.
트리비아는 화려한 레이스 속옷을 가장 마음에 들어하며 예쁘겠다고 루이스의 몸에 대보고, 나이오비 역시 자기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맞장구를 쳤다. 벨져의 취향은 확고했고, 트리비아는 그 누구보다 즐거워했다. 꼭 살아있는 인형이 된 것 같이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레이튼을 비롯한 연합의 남성들이 민망해하며 자리를 피해도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몇 번을 갈아입고 다른 조합을 맞춰보다 마침내 화장까지 마치고 트리비아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그 바람에 일이 다 밀렸지만 나이오비가 걱정 말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루이스의 손에는 일거리 대신 흰 레이스 장갑과 작은 가방이 들렸다. 넣을 것도 없는데 가방을 왜 들어야 하냐는 질문에 트리비아는 그게 싫으면 양산을 들어야 한다는 말로 루이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래도 양산보다는 가방이 덜 무겁다. 아무렴 해가 다 지도록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상식도 한 몫 했다.
호텔에 들어설 때면 수근거리곤 했던 직원들이 오늘은 미심쩍은 눈초리 대신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루이스를 반겼다.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숙녀분. 이라는 친절한 목소리가 저를 향한 것인줄도 몰랐던 루이스는 혼자 갈 수 있다는데도 굳이 엘리베이터까지 동승한 벨보이에게 어설프게 웃고는 번쩍이는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이런 차림은 불편하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은 자신이 아닌 것 같아 낯설었다.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다. 정말 양갓집 아가씨라도 된 것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실수라도 할까봐 떨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건 다 몸을 옥죈 탓이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바로바로 열리던 문이 한참 열리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두드리려는데 철컥, 문이 열렸다. 그런데 벨져의 상태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루이스는 재빨리 문 안으로 들어갔다. 벽을 짚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벨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초점이 흐려지는 듯 눈을 찡그리는 그의 몸이 휘청였다. 루이스는 냉큼 벨져를 받아 안았다. 쓰러지다 시피 안긴 벨져는 몸을 가누질 못했다.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받치자 어깨에 턱을 얹고 몸의 무게를 온전히 루이스에게 실어오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둘째치고 호흡이 불안했다.
이쯤 되면 뭔가 잘못됐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인은 알 수가 없으나 일단 눕혀야 할 것 같아 침대 쪽으로 끌고 가는데 벨져가 루이스의 허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벨져, 정신이 좀 들어? 어떻게 된 거야?!”
“루이, 스....?”
고통스러운지 눈을 꿈뻑인 벨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를 행여 놓칠까 싶어 귀를 귀울이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예쁘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루이스는 계속 제 이름과 함께 예쁘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벨져를 안고 얼굴을 굳혔다. 제정신으로 벨져 홀든이 제게 예쁘다는 말을 할 리가 없다. 독일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걸 봐선 환각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벨져의 의도가 무엇이든, 지금은 의사소통이 되질 않는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벨져의 몸에선 술냄새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대신 테이블 위에 피가 묻은 붕대와 잔뜩 어질러진 응급 키트가 눈에 들어왔다. 심한 상처는 아니나 독이나 환각을 일으키는 무언가에 당한 거라 추측한 루이스는 문득 안타리우스의 전 근거지인 디미스트와 디미스트의 안개를 떠올렸다. 퍼즐이 짜맞춰지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들쑤셔진 머리가 찬물을 끼얹은 것마냥 착 가라앉았다.
루이스는 벨져의 몸을 받친 채 숨을 내쉬고 턱 아래 예쁘게 맨 리본을 잡아당겼다. 모자를 바닥에 대충 내던지고, 장갑도 벗어 던졌다. 걷기 힘든 구두에서 내려와 맨발로 벨져를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 전부 토하게 하고 물을 먹여 몸 안에 스며든 안개의 독을 빼내는 게 우선이다.
하루쯤 지나면 알아서 빠져나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시간동안 고통에 시달리게 둘 수는 없었다.
* * *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타는 듯한 갈증에 몸을 웅크렸다. 내리쬐는 햇살이 뜨거워 도로 몸을 돌리며 서서히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이상하다. 위화감의 정체는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이 멍해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와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깼어?”
“.......”
잠긴 목에 쓰디 쓴 무언가가 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무언가를 뱉어내려 콜록거리자 루이스가 신문을 접었다. 고작 기침 몇 번 했다고 몸이 뒤흔들리는 게 불쾌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감각이 가라앉질 않고, 목이 아파 눈물이 핑 고였다. 침대로 다가온 루이스가 내민 컵을 받아 단숨에 물을 들이키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조금 정신이 들자 위화감의 정체가 떠올랐다. 벨져는 루이스를 방에 들인 적이 없었다. 디미스트에서 가면의 남자를 만났고, 돌아와 어찌어찌 상처를 치료한 게 벨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상처를 확인하려 셔츠의 소매를 걷자 깨끗한 붕대가 감겨있었다. 이 셔츠, 어제도 입었던가? 벨져는 이불을 걷었다. 셔츠는 물론 속옷까지 전부 어제 입었던 것과 다르다.
벨져는 홀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어제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니 섣불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고백이라도 했다던가, 혹은 강제로 그녀를 범했다던가. 최악의 상황만 떠올라 루이스의 눈치를 살피는데 조금 퀭할 뿐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무표정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혹시 내가, 큼. 크흠.”
“룸 서비스 시켰어.”
“...뭐?”
“뭔지 모르지만 제일 비싼 걸로 시켰어. 혼자 다 먹을 거야.”
머리를 풀어 어깨 위로 늘어뜨린 루이스가 도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진홍색 실크로 된 나이트 가운은 분명 제 것이고, 보고 있는 신문 역시 벨져의 것이다. 루이스는 그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 태연했다. 어디서부터 트집을 잡아야할 지 모를 정도로 당당해서, 마치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나?”
“기억 안 나?”
루이스는 알고, 저는 모르는 이 상황이 데쟈뷰처럼 겹쳐졌다. 다시 겪어도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지만 그때와는 루이스를 대하는 감정이 달랐다. 벨져는 왜 너는 항상 나를 이런 식으로 만드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루이스가 벨져를 바라보다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초탈한 듯한 태도에 울컥했지만 지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기억이 온전한 쪽이었다.
“그래. 잘 생각해봐.”
“루이스.”
“옷은 다 맡겼어. 이따가 갖다준대.”
“지금 그걸 말하는 게....”
“괜찮아. 갈아입을 옷 가져왔거든.”
무슨 말을 못 꺼내게 단칼에 쳐내는 게 예사롭지 않다. 벨져는 그 기백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잘못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 음식이 도착하고, 루이스는 말 한 마디 없이 포크를 들었다.
끼니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사람이 제대로 식사를 하는 건 기특한 일이지만 분위기가 경직된 나머지 말을 붙이기가 조심스러웠다. 벨져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놀랄 만한 장면이었으나 방 안에는 루이스와 벨져 단 둘 뿐이고, 루이스가 답하지 않는 이상 벨져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 수가 없었다.
방에 루이스를 두고 씻는 내내 기억을 더듬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두통과 짜증만 늘 뿐이었다. 씻고 나오면 뭐라도 얘기해줄 줄 알았더니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이었다.
루이스는 끝내 침묵을 고수했다. 방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마주친 눈이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으나 문이 닫혔다. 루이스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고, 그 의뭉스러운 행동에 벨져의 기분만 찝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