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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9 [티엔루이] 재회.
- 2015.06.10 [티엔ts루이] Maker
- 2015.04.11 [릭루이] 벚꽃 샤워
- 2015.04.11 [티엔루이] 킹스맨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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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릭루이] 오후, 커피 한 잔.
유입 키워드가 꾸준히 갱신되길래...
새연성 ㅇㅅㅠ...
“많이 기다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엇, 아, 아니오.”
토니와 만나기로 했던 카페,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지는 그를 기다리며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깜빡 졸았던 릭은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릭의 앞자리에 앉은 그는 지하연합의 영웅, 루이스였다. 공성 중에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사적으로 보는 건 처음이다. 릭은 저도 모르게 신입사원의 자세로 돌아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등을 꼿꼿이 폈다. 자신보다 어린데도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싸한 기백이 느껴져 존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릭은 어두운 무표정의 영웅을 앞에 두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후드 때문에 진 그늘 때문인지 공성에서 볼 때보다도 더 분위기가 무거웠다. 루이스는 테이블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켰다. 영국인이라 틀림없이 홍차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유리창을 통과하는 강렬한 햇빛이 그를 비췄다. 햇빛 때문인가, 흰 피부며 새빨간 눈동자, 선이 고운 턱선이 어우러진 옆얼굴이 그림 같았다. 꼭 도나우 강의 물결이 햇빛을 받아 온갖 색으로 반짝이는 것 같다. 순수하게 감탄하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크. 아무리 같은 남자라지만 방금 그 노골적인 시선은 실례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릭을 마주했다. 무표정인건 여전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그늘이 걷힌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침묵이 무겁다. 릭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무미건조한,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웠다. 친구 소개로 여자를 만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찼다. 바지 위에 적당히 닦으면서도 릭은 루이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토니가 급하게 출장갈 일이 생겨서 대신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딱히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색한 공기가 불편하다. 릭은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던 상대를 잠시 떠올렸다가 지워버렸다. 아무리 간부라고 하지만 영웅씩이나 되는 사람을 대신 보내다니. 릭은 토니가 제게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깨닫는 동시에 졸지에 대신 체면치례를 하러 나온 그에게 미안해졌다. 며칠 야근을 하다 온 자신도 자신이지만, 애써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는 상대가 신경 쓰였다.
“그…….”
말을 꺼내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제게 향하는 또렷하고 맑은 눈에 릭은 어설프게 웃었다.
“하, 하하……. 다른 게 아니고, 괜찮소?”
“예?”
망했다. 릭은 어색하게 웃는 그대로 굳었다. 다른 괜찮은 말도 있을 텐데 고작 괜찮냐니, 적어도 그가 소화하는 업무의 양과 스케줄이 평범한 회사원인 자신보다야 많을 텐데! 뻔히 알면서 이도 저도 아닌 긁어 부스럼으로 자폭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 같았다.
“크흠. 괜찮습니다. 덕분에.”
스위치를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릭은 멍하니 뒷머리를 긁던 손을 내렸다. 웃었다. 잠시였지만, 분명 웃었다. 저런 얼굴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아니, 애초에 사람이기는 했구나. 살짝, 눈꼬리가 휘는 게 예뻤다. 순간이었지만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는 것도 예뻤다. 남자에게 비교할 말은 아니지만 꼭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미소였다. 릭은 어디에선가 아침 카페 창가에서 봤던 물망초를 떠올렸다가 꿀꺽 침을 삼키며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지만 그래도 딱딱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한결 풀어진 건 분명했다.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때마침 종업원이 커피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릭은 그가 고개를 돌린 사이 포옥 숨을 몰아쉬었다. 강한 햇볕 때문인지 얼굴이 뜨거웠다.
“그런데 여긴 왜……. 아, 아니지.”
“피곤하시면 들어가 쉬셔도 됩니다.”
“하하, 그건 아니라오.”
커피를 젓던 그가 고개를 들어 릭을 응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운데 마냥 싫지는 않다. 릭은 검지로 무릎을 톡톡톡 두드렸다.
“토니가 당신을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얘기를 해보라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숨을 쉰 루이스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머리를 받쳤다. 근심에 휩싸인 얼굴을 내려 보고 있으니 왠지 손을 뻗고 싶어진다.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싶었다.
“조언자가 필요하단 뜻이 아니겠소. 아니면 가볍게 사귈 친구라거나.”
릭은 충동을 억누르며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사회인에게 학습된 본능과도 같은 처세술은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적어도 중간은 간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릭을 잠시 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앉았다. 김이 오르는 커피를 바라만 보고 있는 그에게, 릭은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밀어주었다.
피곤할 땐 단 게 좋다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완곡한 거절에 릭은 조금 서운해졌다. 하지만 강요를 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릭은 바구니를 다시 제자리로 당겼다.
“다는 그렇고, 반만…….”
씁쓸하게 거절당한 릭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시 무르기 전에 초코칩쿠키를 반 잘라 내밀자 입에도 안 댈 것 같던 그가 쿠키를 받아 입에 넣었다.
“여긴 쿠키도 제법이지만 스콘이 제일이라오. 커스터드 크림도 일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는 게 꽤 귀엽기도 하고, 잘 먹는 게 뿌듯해 릭은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그를 바라봤다. 열심히 쿠키를 먹던 루이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다네요.”
“하하, 그야 물론 초코칩쿠키니까.”
“그러게요.”
릭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잘 먹는 걸 보니 기쁘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묘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토니가 마음을 달래려고 한 거라면 더이상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스터, 저는…….”
“아, 부스러기 묻었소.”
릭은 손을 뻗었다. 뒤로 물러나는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놀라 커진 눈이 귀엽다. 영웅이 아닌, 루이스의 얼굴이 이런 걸까. 릭은 웃으며 손을 내렸다.
“이거 실례를. 거기가 아니라 이쪽이오.”
손등으로 대충 입가를 문지르는 루이스를 보며 릭은 자신의 입술 왼쪽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쿠키 부스러기를 뗀 루이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받을 일은 아니라오.”
루이스는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커피를 마셨다. 커피잔을 쥐는 손가락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다. 붉게 튼 곳이며 분홍색 새 살 위로 다시 새 상처가 생긴 게 그가 짊어진 것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광장에서 책을 들고 있을 때와 공성을 할 때의 그는 정말 다르고,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평화로운 쪽이 좋았다.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평범한 서점 직원이었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랬으면 희고 모양 좋은 손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평소엔 괜찮습니다.”
“아니, 미안하오. 그런 게 아니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괜찮다며 커피를 마시는 그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잠시 어렸다 사라졌다. 혹시 상처를 준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 릭은 필사적으로 무마할 말을 찾았다.
“정말로, 그래서 본 게 아니오. 그게……. 예쁜 손이라 생각해서.”
“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이걸로 오늘만 두 번째다. 이미지는 완전히 망했다. 이게 소개팅이었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남자한테 이런 작업멘트를 해서 무얼 한단 말인가.
“톰슨씨.”
“예, 아, 아니. 음.”
“그렇게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누그러진 표정이 어째 저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아 릭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연하의 남자에게 위로를 받는 직장인이라니. 릭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본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는 건 처음이라오.”
“그렇군요. 저한텐 꽤 익숙해서, 죄송합니다.”
“익숙하다니……. 아.”
릭은 잠시 광장에서 게이트를 여닫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능력자들을 이동시키느라 바빠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만 서점에 서있는 그에겐 제 모습이 보였을 터였다.
“자주 뵙기도 하고요.”
“그야 그렇소만.”
“전 톰슨 씨의 상사도 아닙니다.”
“하하하, 그대를 상사로 두면 내 일이 절반은 줄어들 것 같소만.”
“글쎄요.”
어디 그게 쉬울 것 같으냐는 듯 짓는 짓궂은 미소에 릭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할 줄이야. 릭은 진심으로 대신 그를 보내준 토니에게 감사했다. 덕분에 일주일의 스트레스가 따스한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릭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생각한 것만큼 차가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매번 미안해하는 토니보다 대하기 편했다.
“토니가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딱히 그와 많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니라오.”
“그럼…….”
“그가 미안해할 뿐이지.”
“…….휘말려든 쪽이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평범한 일상을 누릴 땐 그게 귀한 줄 모르죠.”
덤덤하게 말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범한 삶, 갑작스러운 사건. 송두리째 바뀌는 삶. 릭은 그 험난한 과정을 지나온 남자를 바라봤다. 눈앞의 남자는 어딘가 애틋한 눈빛으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하듯이, 그 먼 곳을 그리는 눈에 릭은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가슴 위에 올라온 돌은 조금씩 무게를 더할 겁니다. 결국에는 짓눌려버릴지도 모르죠. 그땐 이미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죠.”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루이스는 경고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릭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릭과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걸까 싶을 정도로, 그는 릭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당신의 능력은 매력적이니까요. 누구든, 붙잡으면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있소?”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어디까지나 진심이다. 릭이 아는 루이스란 사람은 스카우터도 아니거니와 이런 걸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유혹하지 않는다. 릭에게 루이스는 어디까지나 연합의 리더이자 믿음직한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가만히 있어도 될 텐데, 어째서 연합에 속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지우려 하는가. 예전의 평범하고 로맨틱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어렴풋이는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고, 또 전쟁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전쟁이 가져다줄 명예도, 부도,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릭 톰슨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글쎄요.”
릭이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쓰게 웃는 그의 눈은 후드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자신이 있을 곳을 정하는 게 좋을 거라는 겁니다. 경험자의 충고라고 해두죠.”
“......”
“그럼 저는 이만. 다음에는 토니가 나올 겁니다.”
루이스는 단숨에 잔을 비우곤 테이블 위에 두 사람 분의 커피값을 내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그대로 릭을 지나쳐갔다. 싸한 냉기가 릭을 덮쳐왔다. 이대로 보내기엔 석연치 않다.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었지만, 릭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불렀다.
“루이스!”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많은 말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릭은 깜빡이는 루이스의 눈을 보며 마침내 입술을 뗐다.
“후회하오?”
“…….”
루이스는 시선을 피했다. 또, 그 눈이다. 릭은 숨을 죽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있던 루이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릭은 카페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등을 지켜봤다. 끝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릭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두 사람분의 커피값을 테이블 위에 놓고 루이스가 두고 간 지폐는 지갑 안쪽에 넣었다.
날씨가 좋다. 릭은 바로 게이트를 여는 대신 조금 걷기로 했다. 빼먹은 게 있나 싶어 돌아본 창가 자리엔 쿠키 반쪽과 다 식어버린 커피만이 남았다.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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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Someday
전작 Keep calm and kiss me의 후일담입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지만 가져와봤습니다 ;ㅅ;)/
서류를 검토하던 티엔은 카페 문의 풍경이 울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던 그녀가 저를 발견하고 걸어오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티엔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정장 차림의 루이스는 티엔의 앞자리에 앉아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별일 없었어요.”
“별일 없는 얼굴이 아닌데.”
그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울상을 지었다. 퍽이나 섭섭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라 티엔은 서류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루이스는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는 입술을 죽 내밀었다. 절대 일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였다. 티엔은 속에서 천천히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 눌렀다.
“나도 노력하고 있다구요.”
“또, 그인가.”
“...오늘은 상사님께 혼났거든요.”
“그만둬라.”
티엔이 진심으로 말하며 손을 잡자 루이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티엔정에게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준 여자에겐 이미 오랜 시간 함께해온 연인이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또 모를까, 그 여자는 어여쁘기만한 얼굴을 하고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고 있는 데다 제게 접근한 것도 그 업무의 일환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직속 상관이자 연인이 다이무스 홀든이라니. 이쯤 되면 아무리 그랑플람의 아시아 지부장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마음을 저버릴 수 없어 찾아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게 티엔이 할 수 있는, 루이스가 허락한 전부였다.
“뭐 이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니까요.”
루이스가 슬쩍 손을 뺐다. 서운해진 티엔은 두손을 포개놓았다.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테이블에 엎드려버렸다. 마음이 상했는데도 작고 지친 그녀가 안쓰러워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자 루이스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 밀어내지 않고 제 손길을 편안히 느끼고 있는 루이스에 다시 마음이 부풀었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가 남은 서운함마저 말끔히 지워냈다.
“그도 그렇군.”
“그런 거죠.”
고개를 들어 생긋, 눈을 휘며 짓는 웃음이 아침 이슬을 머금은 수국같아 티엔은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바보가 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맞는 말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그녀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을 테고, 연락도 없는 그녀를 무턱대고 기다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하는 건 이 미소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마시겠나?”
“그러게요. 주문하고 와야지.”
루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티엔은 어깨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커피잔을 들었다. 티엔이 마시던 커피는 이미 반쯤 식어있었고, 처음 마실 때보다 썼다. 그러나 티엔의 눈을 찌푸리게 한 건 커피가 써서가 아니라, 루이스의 걸음걸이때문이었다. 주문을 하면서 살짝 뒤꿈치를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신발이 편치 않은 게 분명했다. 티엔은 작게 혀를 찼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루이스는 꽤 높은 굽의 힐을 발끝에만 살짝 걸쳤다.
“왜요?”
“신발에 길이 안 든 것 같아서.”
“그럼 바꿔줄래요?”
꽤나 당돌한 말에 티엔은 눈만 움직여 그녀를 마주봤다. 루이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티엔은 어쩔 수 없이 따라웃고 말았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루이스는 연애에 능숙했고, 때로는 그게 거슬리기도 하지만 좋을 때가 더 많았다.
“신발 한 켤레 못 사줄까.”
“농담이에요.”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고들 하지.”
“이미 신발장 가득 신발이에요.”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티엔은 그녀의 뺨을 슬쩍 꼬집었다 놓았다. 말랑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자꾸만 루이스쪽으로 향했다.
“진짜, 당신까지 이럴 거예요?”
뾰로통하게 투덜거리는 목소리마저 귀여워보이니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다. 티엔은 말끔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실수는 인정하지.”
“...됐어요. 하아.”
무언가 또, 제 말이 그녀의 안좋은 기억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티엔은 종업원이 가져온 딸기 파르페와 루이스를 번갈아보고는 대신 숟가락을 들어 아이스크림을 떴다. 여전히 뚱한 얼굴을 하면서도 입을 벌려 받아먹는 루이스의 입술과 살짝 보인 혀끝에 티엔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입술이 얼마나 촉촉하고 부드러운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진정이 되질 않았다.
“맛있나?”
“스트레스 받을 땐 단 게 최고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었지?”
“글쎄, 아니 자기가 잘못해놓고 미안하단 소리도 안 하는 거 있죠?”
“그랬나?”
“그렇다니까요! 정말, 그래서 제가 고생해가면서 해놨더니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냐고 다그치고!”
“누가 누구를 탓하는 건지 모르겠군.”
티엔은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는 루이스에게 적당히 맞장구쳤다. 루이스는 간간히 티엔이 떠먹여주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이무스 홀든이 제게 얼마나 무섭게 혼을 냈는지 털어놓았다. 그야 물론,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굳이 위험한 선택지를 골라가며 임무를 성공시키는 부하라면 혼을 낼 법도 하다.
하지만 그 속풀이를 들으면 들을 수록 티엔은 속이 뒤틀렸다. 다이무스가 화를 낸 것은 자신의 명령에 불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부하로 루이스를 대한 것이 아니었다. 제 여자를 잃기라도 할까봐 겁이 났던 게지. 티엔은 루이스에게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다이무스 홀든에게 공감했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시키고 싶을 리 없다.
티엔은 루이스가 제 연인이었다면 당장 일을 그만두게 하고 집에 곱게 모셔두고 싶었다. 꽃을 돌보고,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저를 맞아주는 아내. 그렇게 예뻐하기만 해도 시간이 아까울 것 같은데. 티엔은 다이무스 홀든을 잠시 떠올리고는 작게 혀를 찼다.
“진짜, 걱정하는 건 알지만 서운하다니까요.”
“그럴 법도 하지.”
“하아.... 나라고 자기 걱정이 안 되는 줄 아나.”
“그리고 그건, 내 앞에서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축 쳐져서 애꿎은 파르페를 휘젓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티엔은 남은 커피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걱정하는 걸 듣고 있으면 속이 뒤틀리니까.”
“......”
루이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꽤나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붉은 눈은 여전히 변덕스럽게 티엔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티엔은 다리를 꼬고, 찻잔을 비웠다.
“다치지 마라. 몸도, 마음도.”
슬쩍, 그녀의 손을 덮었다.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빛나는 반지. 그걸 가려도 루이스는 손을 빼내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여지를 남겨주는 것때문에 자꾸만 더 위험한 상상을 하게 된다는 걸 알까. 티엔은 남은 손마저 잡아 모았다. 양손으로 그녀의 작은 두 손을 잡고, 기도하듯 모아 슬쩍 입술을 맞추자 루이스가 손을 뒤로 뺐다. 놓아주지 않고 눈만 위로 치켜뜨니 당혹인지 무엇인지, 루이스의 얼굴이 붉었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실수는 인정하지.”
티엔은 루이스의 손을 놓는 척, 그녀의 손바닥에 살짝 입술을 맞추고 놓아주었다. 다이무스 홀든의 험담과 넋두리를 늘어놓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 루이스는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너무 몰아붙이면 도망가고 말 사람이다. 그쯤은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마음은 전혀 다른 문제라서, 잠시 충동에 흔들렸던 티엔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실은 실수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그녀를 제 옆에 두기 위해서, 적어도 제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선 참아야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을.”
루이스가 손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놓고 꼼지락거렸다. 루이스는 제게 미안해하고 있다. 그게 연정이 될지 동정이 될지는 모르는 노릇이나, 티엔은 이럴 때마다 그녀의 여린 부분을 파고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음까지 전부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
“녹기 전에 어서 먹는게 좋겠군.”
“당신, 정말 뻔뻔하다니까요.”
“...그런가?”
되묻자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티엔이 내민 숟가락을 건네받은 루이스는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뻔뻔하다니, 모를 소리라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 약점이나 잡고.”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게 약점이 되나?”
“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흠.”
티엔은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열심히 아이스크림과 그 아래 층층이 쌓인 단 과자와 딸기를 떠먹는 루이스는 꼭 그 달디단 디저트 만큼이나 사랑스러웠고, 단 것은 입과 혀를 즐겁게 하는 만큼 몸에 해로웠다. 그녀 역시 제게 달디 단 독이 되는 것일까. 티엔은 물기에 젖어 빛나는 붉고 도톰한 입술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역시, 해로운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기뻐해야겠군.”
“뭘요?”
“어쨌거나 내가 네 일부가 되었다는 거 아닌가.”
입술에 묻은 크림을 엄지로 훔치며, 티엔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냥 돌아서고 말 임무 대상에서, 그녀의 마음에 발을 들인 상대가 된 것만으로도 기쁘다. 티엔은 진심이었다. 루이스는 포기한 듯 포옥 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똑같아요.”
“뭐가?”
“나 힘들게 하는 거요.”
루이스는 숟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왼손으로 턱을 괬다. 지친 표정에 잠시 미안해지긴 했지만 티엔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 빛나는 그의 흔적을 노려보고, 루이스가 다 녹은 파르페를 흘리기 전에 서류를 정리했다. 언젠가 저 손가락에 다른 반지를 끼워주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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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 재회.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야심한 시간이라 배달부일 리도 없다. 루이스는 창밖을 슬쩍 내다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도어스코프조차 없는 작고 허름한 집이라 확인을 하려면 문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티엔?"
검은색 일색의 남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놀란 루이스의 얼굴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급하게 달려드는 입맞춤에 루이스는 뒤로 넘어질 뻔했으나 저를 강하게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덕에 넘어지는 대신 벽에 등이 부딪혔다. 충격에 입술이 열리고, 그의 혀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안쪽으로 도망치려는 루이스를 낚아챘다. 안쪽 여린 곳을 건드리며 희롱하고, 혀를 감아올리는 사이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열린 입술을 타고 흘렀다. 뇌가 녹진하게 녹는 것 같은 기분에 루이스는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다리가 풀려 볼썽사납게 주저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 잠시의 딴 생각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듯 입천장을 건드리며 입술을 부비고 한 손으로 허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잠들기 전이라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티셔츠 위로 허리를 더듬던 손이 그 안쪽으로 파고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장갑을 낀 손이 예민한 옆구리를 쓸고, 더듬었다. 루이스는 그의 단단한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각도를 바꿔 더 깊이 들어오는 티엔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숨이 모자랐다.
"후우, 하아. 티엔."
"보고 싶었다."
"연락이라도 하, 읍....으응...."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맞추는 연인때문에 루이스의 불만은 농밀한 키스에 묻히고 말았다. 성급하게 갈증나 죽겠다는 듯 몰아치던 첫 키스와 달리 조금은 배려가 섞여있어 간간히 숨을 쉬었다. 코가 부딪히고, 살짝 눈을 뜨면 떨리는 긴 속눈썹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타오르는 욕망가 이질적인, 진지하기 그지없는 짙은 고동색 눈동자가 아찔했다.
"집중해."
"하아, 티엔."
루이스는 눈썹에 힘을 주고 다시 입을 맞추려는 티엔의 뺨을 감싸고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뽀뽀에 티엔이 다시 얼굴을 가까이했으나 루이스는 아직 호흡을 고르기도 바빴다. 한밤중 갑자기 찾아온 연인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안 오기로 했잖아요."
"......."
티엔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몸을 더 바싹 붙였다. 배를 맞댄 채 그와 벽 사이에 눌린 루이스는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감고 입술을 맞췄다. 천천히, 그를 달래듯 입술을 부비며 숨을 주고 받고, 조심스레 혀를 내밀어 희롱하듯 스치고 감으며 타오르듯 붙은 욕망을 애정이 담긴 흥분으로 바꾸어나갔다. 한 달 만에 보는 연인이었다. 루이스라고 반갑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감감무소식인 그를 떠올리며 오늘처럼 찾아오지 않을까 기다린 밤을 셀 수 없었다.
"하아, 루이스."
"나도, 보고 싶었어요."
루이스는 작게 속삭였다. 들을 사람이라곤 눈앞의 남자밖에 없건만, 비밀의 언어를 속삭이듯 은밀했다. 티엔의 눈에 참기 힘든 듯 욕망의 불길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일이라곤 없을 것 같은 그 눈동자가 정욕에 휩싸여 저를 갈망하는 그 오싹한 감각에 루이스는 먼저 입을 맞췄다. 고개를 돌려, 서로의 밑바닥까지 들춰내 가지려는 듯한 흥분에 키스는 점점 거칠어졌다. 루이스는 몇 번이나 벽에 떠밀려 머리를 찧었지만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거친 키스에 흥분했다. 이불 속에서 따뜻해진 몸은 그보다 더한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루이스는 제 허리를 더듬는 티엔의 손목을 잡고 그의 장갑을 벗겨냈다.
"티엔, 하아, 읏...."
뺨을 어루만지다 뒷목을 잡고 키스하던 티엔이 입술을 떼더니 루이스를 번쩍 안아들었다. 같은 남자지만, 티엔의 탄탄한 몸에 루이스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잘 다져진 근육은 물론이고, 웬만한 여자 부럽지 않은 가슴까지. 그의 팔 안에 안긴 루이스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저를 번쩍 들어올리는 그의 힘과 체력에 감탄하면서도 남자로서 약간의 비참함을 느꼈다. 체계적으로 운동을 해서 만든 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근육이 있는 몸인데, 그것도 티엔의 앞에선 그저 초라해질 뿐이었다.
"읏."
"루이스...."
매트리스 위에 던져진 루이스는 제 위에서 검은 코트를 벗으며 저를 애정과 욕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그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넥타이를 잡아 당겨 몇 번째인지 모를 키스를 하며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 사이 티엔의 손은 루이스의 티셔츠를 가슴 위까지 말아올리고 벨트 버클을 풀었다.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흥분을 고조시켰다. 이 다음에 이어질 행위에 대한 기대감으로 아랫도리에 열이 쏠렸다.
"후, 티엔.... 당신 또...."
혀뿌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진한 키스에 루이스는 고개를 뒤로 빼 감았던 눈을 떴다. 풀어 헤친 셔츠 아래 배를 감은 붕대가 바로 루이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티엔은 급하게 넥타이를 풀어 던지며 인상을 찌푸린 루이스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별 거 아니다."
"별 거 아니긴, 아직 다 낫지도 않은 거 아니에요?"
"괜찮다. 루이스,"
루이스는 입을 맞추려는 티엔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힘으로는 당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 관계의 주도권은 루이스에게 있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다 터졌잖아요. 됐어요."
"루이스! 널 만나려고 일을 마치자마자 온 거다."
티엔이 루이스의 팔을 잡으며 급하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있는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루이스는 어정쩡하게 제 허리 위에 무릎으로 앉아있는 티엔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걸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티엔이 루이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려 다가왔지만 루이스는 다시 그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그리고 반대로 그를 눕히며 다리를 모아 일어났다. 루이스는 이미 잔뜩 불거진 티엔의 앞섶을 어루만지며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입으로 해줄 테니까, 다 나으면 해요."
아쉽기는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기대한 만큼 실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아픈 사람에게 무리를 시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눈밑에 진 다크서클과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한숨도 못돌린 채 저를 만나러 온 게 분명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같은 남자의 걸 입에 넣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티엔의 것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이스는 입을 벙긋거리는 티엔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 손바닥 아래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것을 해방시켜주기 위해 브리프를 내렸다. 갑갑하게 조이던 천에서 밖으로 나온 그의 성기는 탱탱하게 고개를 쳐들고 잔뜩 불거진 핏줄이 채 불뚝거렸다. 잘 빠진 모양에, 흠잡을데 없는 굵기와 크기에 루이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게 제 뒤를 뚫고 들어와 쑤셔댄 거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며 구멍이 움찔했다.
"루이스, 나는...흐읏...!"
호기롭게 말한 것과 달리 막상 보니 입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루이스는 손으로 튼실한 기둥을 쓰다듬으며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틀거리는 그의 성기를 바라보다, 티엔이 일어나며 멈추려하는 것에 마음이 급해져 눈을 딱 감고 입 안에 넣었다. 루이스를 말리려 몸을 반쯤 일으켰던 티엔은 성기를 감싸는 따뜻하고 습한 점막의 감촉에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손에 힘을 주면 아파할까봐 움켜쥐지도 못하고, 성기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쾌감에 딱 죽을 맛이었다.
입 안에 티엔의 성기를 품은 루이스는 천천히 코로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무성한 음모와 복근, 그리고 저를 내려다보는 티엔의 표정에 덩달아 흥분한 루이스는 용기를 내 혀를 움직여 귀두의 끄트머리를 조심스레 핥았다. 눈을 찡그리며 쾌감을 참으려는 티엔의 얼굴이, 지나치게 섹시했다. 루이스는 옴폭 패인 곳을 혀끝으로 콕콕 누르고 그 위를 핥았다. 말랑말랑하고 미끈한 감촉이 생경했지만 티엔이 낮게 내뱉는 흥분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루이스는 작정하고 티엔을 기분좋게 해주기 위해 과감하게 혀를 움직였다. 어설프지만, 야동에서 흔히들 하는 것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빨다가 귀두 아래를 핥고 머금고 있던 것을 뺐다. 입으로 숨을 쉬다가, 그의 것을 잡고 기둥에 불거진 핏줄을 혀로 핥으며 옆에서 이 대신 입술로 물고 빨았다. 조금씩 새어나오는 티엔의 숨소리와 신음이 야했다.
"하아, 티엔.... 기분 좋아요?"
"으음, 하, 후우.... 그래."
"다행이다...."
루이스는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엉덩이를 위로 치켜들고, 티엔의 고간에 얼굴을 묻은 채 큰 아이스크림을 빨아먹듯 입을 벌려 그의 성기를 입안에 담았다. 다 들어갈 것 같진 않지만, 조금 더 안쪽에 넣어보면 그의 귀두가 입천장을 지나 목 안쪽에 닿았다.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하지? 루이스는 이를 세우지 않게 조심하며 그의 것을 빨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움직였다. 위아래로 빨아당기며 얇은 피부의 막이 제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외설스러워 루이스의 성기에도 열이 쏠렸다.
"흐읏, 하, 루이스...!"
"웅, 하아...."
루이스는 스스로 하듯 티엔의 기둥을 감싸고 위아래로 당기며 귀두를 핥았다. 손이 빨라지면서 제 어깨를 잡은 티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가 아팠지만 그보다는 그의 성기를 애무해주는 게 더 우선이었다. 루이스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침대를 짚던 손으로 그의 고환을 주물렀다. 한번 더 빨아주기 위해 입을 벌리는데, 티엔이 어깨를 세게 움켜쥐더니 얼굴에 뜨끈한 액체가 뿌려졌다.
"크흣, 하아...."
한 박자 늦게,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후에는 이미 티엔의 정액이 끈적하게 루이스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적시고 있었다.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성기가 두 차례 더 끊어 사정하고, 루이스는 속눈썹에 진하게 붙은 정액에 눈을 감았다. 다시 뜨려했으나 뜨끈하고 진한 정액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비릿한 냄새가 역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흥분되는 게, 아무래도 저도 많이 쌓여있었던 것 같았다.
"읏, 티엔...."
"하아.... 미안하다...."
루이스는 손등으로 뺨에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정액을 닦았다. 입술에 붙은 것을 슬쩍 혀로 핥자 미끈하고 끈적거리는 비릿함이 느껴져 슬쩍 인상을 쓰며 눈을 부비고 있으니 티엔의 크고 따스한 손이 다가와 눈을 쓸어주었다.
"한 달이나 못 했으니까..., 그래서 그렇다."
묻지도 않았건만 티엔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평소보다 사정이 빠른 걸 말하는지, 아니면 참지 못하고 사정해버린 것을 말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쌓여서 진한 정액을 말하는지 몰라도 겨우 그런 걸로 이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게 퍽 귀여웠다. 루이스가 피식 웃자 티엔은 안절부절 못하며 침대 아래 떨어진 정장재킷의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루이스는 잠시 생각하다 그의 손목을 잡았다.
"티엔."
티엔은 왜 그러냐는 듯한 눈으로 루이스를 바라봤다. 루이스는 그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빼 대충 얼굴을 문대 닦아 던지고, 그의 가슴 위에 양손을 올려 밀어 눕혔다. 무슨 남자 가슴 촉감이 이렇게 좋담. 루이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 하고 싶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루이스는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키려는 티엔의 위에서 체중을 이용해 그의 가슴을 눌렀다. 티엔이 무슨 짓이냐는 듯 루이스를 올려다봤다. 루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손으로 바지와 팬티를 벗고 티엔의 허리 위에 올라탔다. 티엔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 굳은 얼굴을 하고 루이스의 손목을 잡았다. 루이스는 슬쩍 엉덩이를 움직여 한 발을 빼고도 우뚝 서있는 그의 것에 골을 비볐다. 단번에 티엔의 표정이 바뀌었다.
"...루이스."
"당신, 다쳤잖아요."
"이게 더 괴롭다. 차라리 내가 움직이는 게 낫겠군."
"누워있으라니까요."
루이스가 짜증을 내자 티엔이 입을 다물었다. 루이스는 제 것을 탄탄한 티엔의 배에 부비다가, 침대 옆 협탁에서 젤을 꺼내 제 손에 죽 짰다. 티엔은 그거라도 제가 해주겠다고 했지만 루이스는 티엔이 자주 그러는 것처럼 입술로 그의 말을 막아버렸다. 언제나 여유가 넘치게 저를 휘두르던 그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귀엽게 구는 것도 좋았다. 루이스는 지금 우위를 점한 기분이 어떤 것인지 톡톡히 느끼는 중이었다.
손가락을 타고 흐를 정도로 녹은 젤을 뒤로 가져가 한 달 동안 쓰지 않아 꽉 다물린 구멍에 치대듯 바르고,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밀어넣었다. 하나 정도는 괜찮은 것도 같아서, 안쪽에 젤을 꼼꼼히 바른 후 하나를 더 넣었다. 두 개는 빠듯한 것 같아 빼고 싶었지만 티엔이 그런 것처럼 루이스도 마음이 급했다.
"읏...."
"루이스, 억지 부리지 마라."
"흐으, 할 수 있다니까요."
루이스는 은근슬쩍 엉덩이를 잡아 당기는 티엔의 손에 발끈해 두 개도 버거운 구멍에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상처 없이 저 큰 것도 삼키던 곳이었다. 루이스는 슬쩍 세번째 손가락을 빼고 두 개로 구멍에 젤을 바르고 입구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늘 그가 해주던 거라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안을 휘젓고 안과 밖을 드나들던 감각을 기억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루이스, 제발...."
티엔은 이제 애원하다시피 하며 루이스의 가슴과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췄다. 예쁘게 도드라진 유두가 눈에 어른거려 입에 물자 루이스는 가슴 끝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감각에 아래에 힘을 주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열심히 풀던 구멍이 손가락을 조이며 다시 움츠러든 게 원망스러워 그를 흘겨봤으나 티엔은 눈까지 감고 루이스의 가슴에 집중하고 있었다. 약하고 예민한, 그가 끈질기게 괴롭혀 개발된 유두가 그의 혀에 빙글빙글 돌려지고, 빨리는 바람에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끄트머리를 살짝 깨무는 바람에 루이스는 깨문 입술 사이로 약한 신음을 냈다. 티엔은 양손으로 루이스의 엉덩이를 잡아 터트릴 것처럼 주물렀다. 그 바람에 손가락을 머금은 구멍이 양쪽으로 벌어지고, 빈 틈 사이로 공기가 들어왔다.
"응, 읏...! 티엔...!"
"후우, 그러게 내가 하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루이스는 울상을 짓다가 벌름거리는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전보다 수월하게 손가락을 받아들인 구멍은 이제 젤에 질꺽거리는 야한 물소리를 내고, 그 안쪽은 손가락보다 더 길고 큰 것으로 꽉 채우는 것을 기대라도 하듯 뜨거워졌다. 티엔이 꼬집고 비트는 유두가 찌릿찌릿했다. 잔뜩 괴롭혀지면서 느끼는 쾌감이 오랜만이라 더 힘들었다.
"그리고, 후으. 오늘따라 네가 더 천박하게 구니까, 읏. 더 참기 힘들다...."
천박하게 군다는 말에 루이스는 허리를 움직여 그의 성기와 제 것을 비볐다. 두 기둥이 부딪혀 비벼지다 퉁 튕겨나갔다. 두 성기는 앞에서 투명한 액을 흘리며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확실히 제가 생각하기에도 외설스러운 광경이었다. 거기에 흥분하는 자신은, 그의 말대로 야하기 짝이 없었다.
"으응, 하지만 이게 다.... 당신이.... 후우...."
"그래. 응, 후. 루이스, 넣고 싶다.... 넣게 해다오."
"응, 하아. 원해요, 티엔."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였다. 안쪽까지 깊게 찌르고 거칠게 박아줬으면 좋겠다. 이미 안쪽과 입구가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가끔 하는 것처럼, 엎드린 채로 뒤로 짐승처럼 박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의 연인이 너무 오랜만이었고, 또 티엔의 배에 감긴 붕대가 마음에 걸렸다. 오랜만이라 얼굴을 보고 살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등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질색을 하며 싫어했을 체위를 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당신은 움직이지 말아요."
루이스는 티엔의 가슴에 다시 양손을 올렸다. 티엔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루이스는 티엔의 손을 잡아다 제 엉덩이에 놓았다.
"만지는 건, 허락해 줄테니까...."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한 손으로 구멍을 벌리고 한 손으로 티엔의 성기를 잡아 뒤에 맞췄다. 제대로 입구를 찾아 뭉툭한 귀두를 반쯤 넣고, 루이스는 아랫입술을 앙물었다. 천천히 허리를 내리자 안으로 파고드는 부피와 질량감에 얼마 가지 못해 한숨을 토하며 멈춰섰다. 티엔의 손은 루이스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티엔의 것을 삼킨 구멍이 벌렸다 다물렸다.
"크흐.... 루이스...."
"....후우, 잠시만요....잠깐만...."
이도저도 못하고, 루이스는 땀을 흘리며 티엔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처음 부드럽게 들어오던 것과 달리 굵은 것이 입구를 벌리는 게 너무 아팠다. 제대로 풀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자세가 달라서 그런가. 하지만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할 게 뻔했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접합부를 더듬었다. 젤이 잔뜩 발려있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콘돔을 씌우지 않았다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후우, 티엔.... 으읏...!"
"하아, 루이스...!"
루이스는 마음을 크게 먹고 단숨에 허리를 내렸다. 안을 깊게 찌르며 뚫는 성기에 고개가 젖혀졌다. 눈물을 흘리며 아파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루이스를 달래기 위해 티엔은 몸을 일으켜 가슴돌기를 핥고, 그의 가늘고 예쁜 목덜미에 짧은 버드키스를 하며 루이스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등을 쓰다듬었다.
"흐으, 하아...."
"크흐, 루이스.... 숨을 쉬어라."
"윽.... 흐윽.... 티엔......."
잔뜩 젖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가에 입을 맞춘 티엔은 제 목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고개를 묻는 연인의 목덜미와 어깨, 귀에 입술을 맞췄다. 왜 그러게 시키지도 않은 짓을 사서 했는지. 물론 그게 다 저를 위해서지만, 더는 지켜보고 있기 힘들었다. 티엔은 정말 많이 참았고, 오랜만에 만난 연인의 애교도 이정도면 충분했다.
"루이스, 사랑한다."
티엔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잠시 기다리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진정이 되었는지,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고, 입술이 맞닿는 건 금방이었다. 키스가 오래 이어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티엔...."
루이스는 연인을 바라보다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아픈 건 둘째치고서라도 그도 남자였다. 아무리 체격이나 힘이 딸린다고 해도, 물러설 수 없는 게 있는 법이었다. 루이스는 티엔의 어깨를 잡고 무릎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래로 죽 딸려나가는 감각이 낯설었지만 이미 안쪽까지 들어와있었던 거라 생각하면 못할 것 같지도 않아 엉덩이를 아래로 내렸다.
"크흣, 루이스...."
"하아, 하, 으읏...."
루이스가 허리를 들썩이면서 위아래로 움직이자 그를 눕히려던 티엔은 예상치못한 적극적인 행위에 이를 악물었다. 제 어깨를 꽉 잡고 고통을 참으며 허덕이는 루이스의 얼굴이 야했다. 티엔은 루이스의 골반을 잡았다. 제 위에 올라탄 루이스는 허리를 돌리며 다시 위아래로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직접 움직이는 것만큼 만족스럽진 않지만 제 성기를 꽉꽉 물며 조이는 내벽은 익숙한 것이었다. 뜨겁고 제 것을 맛있게 오물거리는 구멍에 티엔도 허리를 움직여 안을 두드렸다. 지금도 깊이 들어가있긴 하지만 그가 느끼는 곳은 조금 더 안쪽, 거칠고 깊숙하게 박아야 닿는 곳이었다.
루이스는 스스로 움직이며 좋은곳을 찌르고 문질렀다. 티엔이 움직일 때처럼 머릿속이 날아가는 것같은 쾌감은 없어도, 야릇하고 간질거리는 기분좋은 감각에 루이스는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욱신거리며 간질거리는 곳은 닿지를 않았다. 그 때, 티엔이 루이스의 골반을 꽉 잡고 위로 쳐올렸다.
"하으응...!"
"후우, 하, 듣기 좋구나. 더, 들려다오."
티엔은 파들파들 떠는 루이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잇자국을 낸 뒤 씩 웃었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곳을 노리고 반복해 허리를 움직여 쳐올리자 이내 배에 뜨끈한 정액이 뿌려졌다. 티엔의 추삽질에 사정한 루이스는 목에 팔을 감으며 발가락을 움츠렸다. 오물오물, 제 것을 맛있게 삼키고도 더 달라 조르는 야한 몸이 예뻐 티엔은 루이스를 침대에 눕혔다.
엉덩이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제 것을 보는 것도, 제 위에서 위아래로 흔들리며 요분질을 하는 루이스도 절경이었지만, 역시 이게 더 좋았다. 티엔은 루이스의 무릎 안쪽을 잡아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루이스는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뻗다가 눈을 가렸다. 그래봤자 귀엽기만 할 뿐이라 티엔은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손을 잡아 떼내고 잔뜩 젖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붉어진 눈가에 입을 맞췄다. 루이스는 입을 삐죽였지만 허리를 움직여 안을 치대자 바로 그 예쁜 입술에서 신음이 터졌다.
"으응, 아, 하읏, 티엔, 조금 천천ㅎ...!"
"후우, 루이스. 보고 싶었다."
"아흥, 아, 크흣, 거기...!"
티엔은 루이스의 다리를 잡은 채 마음껏 허리를 움직였다. 시트를 움켜쥔 루이스의 흰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하지만 티엔은 울먹임에 발음이 뭉게지는 연인의 울음소리에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는 커녕, 제 허리에 다리를 감아 조이며 쾌감을 조르는 루이스의 안을 휘젓고 두드리는 속도를 붙였다. 아까 그의 펠라치오로 한 번 사정했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티엔은 루이스의 안쪽을 마구 찌르다 루이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사정했다. 안에 퍼지는 뜨거운 점액의 감각에 한 번 사정했던 루이스는 몸을 잘게 떨었다.
"흐으, 아...."
"하아, 루이스...."
루이스의 머리를 끌어안고 사정의 여운에 잠시 호흡을 고르던 티엔은 눈물로 범벅이 된 루이스의 눈가를 엄지로 쓸다 입을 맞추고 핥았다. 짠 맛이 났지만 눈물이 방울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곧 붉은 눈동자가 저를 향하는 게 예뻐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췄다.
"하아, 후우.... 티엔.... 크흠."
신음을 내지르느라 갈라진 목소리가 동했지만 티엔은 지친 연인을 배려해 그의 옆에 누워 다리를 루이스의 다리 위에 얹었다. 아직 숨쉬기 바쁜 루이스를 품에 안자 땀에 범벅이 된 두 사람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티엔은 루이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베개를 그의 머리에 받쳐주었다. 루이스가 베개 반쪽을 내밀어 한 베개에 머리를 누인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르륵 눈을 휘었다.
"상처는 좀 어때요."
"괜찮다."
"......알겠어요.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호랑이 한 마리를 잡다가 스친 것 뿐이다. 상처는 깊지 않아."
루이스는 호랑이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티엔이 바로 주름진 미간에 입을 맞추는 바람에 금세 풀긴 했지만, 상상도 못한 이유였다. 루이스가 표정을 풀지 않자 티엔은 눈을 피했다. 걱정도 걱정이지만, 혼날까 변명을 찾는 게 귀엽기도 하고 일이 끝나자마자 날아온 노력이 가상하기도 해 루이스는 이번 한 번만 봐주기로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심해서 다녀요."
"알겠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분고분 하는 말에 수긍하는 연인의 눈동자에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꿈벅이자 티엔이 등을 토닥이며 떨어진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었다. 기분 좋은 체온에 루이스는 티엔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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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Maker
※ 핵전쟁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일어난 근미래, 센티넬버스, 티엔(29), TS루이스(17)
탱이 원딜을 물었다. 하랑은 재빨리 마우스를 클릭해 다가오는 적에게 스킬을 쏟아부었다. 4단계, 이번 한타만 이기면 이긴다. 팽팽한 접전 끝에 마지막 한타라 하랑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막 지원을 온 같은 팀 팀원들이 뒤로 돌아오는 걸 본 하랑의 검지가 바빠졌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위험하다. 하랑은 마우스와 키보드 위에 올린 손을 바삐 놀렸다. 집에 오자마자 시작한 게임은 지금까지 네 판을 모조리 졌다. 이번 판이라도 이겨야 속이 풀릴 것 같은데, 아군이 제법 하는 대신 적도 만만치 않았다. 그 전까지 트롤러들을 만난 하랑은 1인분을 하기 위해 집중했다.
"하랑."
"아, 왜!! 나 지금 바빠!!"
하랑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짜증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갑자기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저를 향해 달려오는 적을 제 때 피했을 터였다. 이제 오분이면 되는데 고작 그걸 못 기다려서 방까지 올라오고. 하랑은 제 보호자가 무슨 소리를 하던 헤드셋도 빼지 않고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 좀, 한 판만 이기면 안 되냐고. 하랑은 반피가 된 제 캐릭터가 빨리 일어나길 바라며 남은 스킬을 맞춰 반격할지, 아니면 도망을 가야할지 고민했다. 믿음직한 아군 탱커는 적 원딜들을 쫓느라 바쁘고, 다들 제게 와줄만한 여유가 없어보였다. 어떻게든 지금 이 난관을 빠져나가야 한다.
하랑은 캐릭터가 일어나자마자 제 앞의 근딜러를 눕혔다. 바로 궁극기를 쓰기 위해 키보드를 누르려는데, 갑자기 화면이 멈췄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열심히 누르던 하랑이 무슨 일인지 몰라 잠시 벙쪄있는 사이, 게임 화면에 서버에 접속할 수 없다는 문구가 떴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제 사부가 랜선을 들고 서있었다. 울컥 차오르는 화에 하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씨발 뭐하는데!"
"루이스가 늦으니 가서 데려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리고 다음엔 랜선을 뽑겠다고도 했지."
"아오, 씨발!! 존나 다 이긴 판이었다고!!"
"듣지 않은 건 너다. 이미 전에도 몇 번 경고하지 않았나."
"3분이면 됐다고!"
하랑은 티엔의 변하지 않는 무표정에 분을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짜증은 나는데, 덤벼봤자 진다는 걸 아니 뭐라고도 못 하겠고, 승질이 난 하랑은 애꿎은 의자를 발로 찼다. 바퀴 달린 의자는 주르륵 밀려가 벽에 부딪히고, 하랑은 행거에 대충 걸어뒀던 바람막이를 집어들었다.
"에이씨, 걔가 어디 그냥 기집애야? 걜 건드리는 사람이 더 위험할걸? 오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한 시간 전에 센터를 나왔는 연락이 왔다."
"뭐?"
한 시간이면 이미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짜증을 내던 하랑은 갑자기 드는 걱정에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핸드폰의 잠금을 열어 봐도 딱히 연락이 온 건 없다. 센터에 다녀와야 한다길래 혼자 보내긴 했지만, 언제든 틈만 나면 나가 놀려는 저와 달리 그녀는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이라 어디 다른 곳으로 샐 리도 없었다.
"전화는?"
"안 받는다."
"에이씨...."
하랑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계단을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 바로 코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에 군침이 돌았다. 티엔은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버리고, 하랑은 오늘 티엔이 모처럼 고기 요리를 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주방을 기웃거리다 한입 주워먹는 것보다는 어디에 있는지 모를 사람이 먼저라 하랑은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꽤 날이 쌀쌀하다. 몸을 스치는 한기에 부르르 떤 하랑은 제 양팔을 쓰다듬으며 걸었다. 저보다 옷도 얇게 입고 다니는 녀석이 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이 시간까지 안 들어오고 사람을 걱정시키는지. 하랑은 이긴 거나 다름없던 마지막 판을 떠올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아가면 승리 대신 깎인 알피와 중단 전적이 저를 반길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랜선을 뽑을 수가 있지. 하랑은 저를 방해한 사부의 그 철면피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언젠가 톡톡히 그 값을 치르게 하리라.
그건 물론 사부가 제 방까지 찾아와 마중을 보내게 만든 녀석도 마찬가지다. 하랑은 동갑내기 여자애를 떠올리곤 애꿎은 돌맹이를 걷어 찼다.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렴, 걔가 어디 늦으려고 늦는 앤가. 그 무뚝뚝하고 목석같은 정티엔이 죽고 못 살 정도로 아끼는 애다. 그 녀석은 무슨 일이 생겼으면 생겼지 절대 어디 다른 곳에 새거나 할 위인이 아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하랑의 걸음이 빨라졌다. 버스가 서는 정류장 앞 벤치에 다다르기까지 고작 오 분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한 시간 전에 출발했다던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하랑은 초조하게 정류장을 서성이다 벤치에 앉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고,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게임을 켜던 하랑은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의 불빛에 고개를 들었다. 퇴근 시간대가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빽빽해 누가 내리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제가 못 찾는 건가 싶어 일어나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내리는 사람 중엔 그녀가 없었다. 하랑은 초조해진 나머지 게임창을 끄고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수신음만 가고 답이 없어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을 보일 즈음, 이거 어디 다른 길로 먼저 들어가서 엇갈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티엔에게서도 들어오라는 연락이 없어 하랑은 다리를 떨며 간간히 차가 지나가는 도로만 쳐다봤다.
그러기를 얼마, 반짝반짝한 까만 고급 승용차가 앞에 멈췄다. 버스 정류장에 무슨 차를 세운담. 하랑이 눈살을 찌푸리고 애꿎은 차를 노려보는데 차의 뒷문이 달칵 열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내렸다. 푸른 기가 섞인 잿빛의 긴 머리카락.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난 하랑은 운전석을 향해 연신 고개를 꾸벅이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루이스!"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하랑은 아직도 인사 중인 그녀 옆에 섰다. 루이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곤 차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못 본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낯빛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땅거미가 진 거리가 어둡다 해도 그 정도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하랑은 대번에 루이스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볼살이 하랑의 손에 밀리는 바람에 퍽 귀여운 얼굴이 됐지만 그래도 지친 기색을 지울 순 없었다. 제 손을 잡아 떼내는 그 손에도 힘이 없어 하랑은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센터에서 조금 일이 생겨서, 데려다주셨어."
"쯧, 핸드폰은?"
"가방에. 아, 무음으로 바꿔놓은 거 깜박했다. 미팅때문에."
"가이드?"
하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루이스를 향해 혀를 차며 그녀의 가방을 뺏어 들었다. 어깨에 대충 둘러매고 묻자 루이스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또 꽝이구만. 어쩐지 사부가 예민하더라니. 하랑은 더 묻지 않고 루이스와 발을 맞춰 걸었다. 루이스는 벌써 몇년째 정식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이었다. 그것도 유능한. 물론 다른 센티넬에 비해 능력의 조절과 제어가 탁월하다 해도 정식 가이드가 없다는 건 센티넬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자 오점이었다. 언제 자신의 능력에 휘말려들지 모른다.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과 같다던 티엔의 말이 떠올라 하랑은 흘긋 루이스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엔 얄미울 정도로 흔들림 하나 없는 주제에, 제가 알아챌 정도로 잔뜩 쳐져선 우울해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옆에 걷던 루이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는지라 하랑은 슬금슬금 루이스의 눈치를 봤다. 맞는 가이드가 없는 것도 하루이틀이 아닌데 오늘은 어째 더 우울해하는 것 같다. 뭐라고 기운을 복돋아줘야 하는 걸까. 위로 같은 데 소질이 없는 하랑은 괜히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때가 되면 어련히 나타나겠지."
"응."
속 편한 소리로 들릴 진 몰라도, 괜히 어줍잖은 위로를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안 그래도 자존감이 밑바닥을 기는 애다. 하랑은 루이스가 어서 평소의 그 잔잔하고 광활한 호수같은 루이스로 돌아왔음 싶었다. 돌맹이 하나 던져봤자 잠시 파문이 일고 마는 호수. 하랑은 그런 그녀가 좋았다. 센티넬이고 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가 그랬다.
루이스는 누가 티엔 정이 손수 키운 센티넬 아니랄까봐 철두철미하고 똑부러지는 녀석이었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무표정에 먼저 살갑게 다가가는 요령이 없어서 그렇지, 사소한 것 하나도 기억하고 챙겨주는 거며 사람을 살피고 돌보는 게 일상인 좋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루이스는 딱히 뭔가를 바라고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하랑이 이 제 1구역의 중앙도시에 온 첫 해, 누군가 축하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한 생일을 챙겨준 루이스였다. 심지어 제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운동화를 곱게 포장한 상자에 담아 선물했다. 사실 그런 것보다는 일상에서 스쳐지나가면서 자기도 잊고 있던 걸 기억하고 챙겨줄 때가 더 감동이지만.
하랑은 어색해진 분위기에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센티넬이 경쟁력이 되는 세계수 근처의 거점 도시들이야 센티넬 하나 하나에 목숨을 걸지만, 하랑이 자란 곳은 거점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다. 하루 하루가 전쟁같은 곳에서 하랑은 아버지와 함께 산 속 깊이 들어가 살았다. 계절에 따라 농사를 지으면 두 사람이 먹고 살기엔 부족하지 않다. 가끔 물건을 교환하러 마을에 내려가는 게 전부요, 가끔 점을 쳐주고 산에선 못 구하는 생필품을 교환하는 게 가끔 있는 낙이었다. 하랑은 티엔을 만나기 전까진 제가 센티넬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처음 말로만 듣던 거점 도시에 왔을 땐 공기조차 다르고 생활 자체가 달라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더랬다. 그런 하랑을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준 게 바로 루이스였다.
하랑은 센티넬이기 때문에 거둬진 루이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센터에서도 센티넬로 분류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에스퍼계 센티넬은 애매한 위치다. 아직 완전히 능력을 제어하지도 못하는 하랑은 센터에서 등급을 부여받는 의무 테스트 이후로 불려가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잡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하랑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절로 얼굴을 구기게 되는 티엔의 번호가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고향에 계신 아버지만큼이나 반가웠다.
"어! 지금 가는 중."
'그래. 얼마나 걸리나.'
"이제 세 블럭 남았수다."
하랑은 일부러 껄렁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까지는 이제 두 블럭. 무심히 걷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루이스가 작게 웃고, 하랑은 머쓱해진 나머지 걸음을 빨리 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루이스는 살짝 뛰어와 다시 하랑의 옆에 섰다. 더 뛸래야 집 앞이라 하랑은 이게 다 네가 늦어서라고 투덜거렸고, 루이스는 그런 하랑에게 미안하다며 등을 두드렸다.
티엔이 루이스에게만 무르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투덜거리는 하랑이지만 그녀에게 무르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쁜 여자애가 헤사하게 눈꼬리를 휘며 생긋 웃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제가 아는 기집애들이라곤 만날 드잡이질에, 사내애들보다 더 목청도 크고 괄괄했는데 루이스는 글에서나 보던 선녀같았다. 청순하고, 예쁘고, 상냥하고, 다가가면 꽃 향기가 날 것 같은 그런 여자애. 하랑은 결국 루이스의 미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늦었군. 씻고 내려와라."
하랑은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고 2층 계단으로 휙 올라가버렸다. 루이스는 신발을 벗어 하랑의 운동화까지 정리했다. 그새를 못 참고 현관까지 나온 티엔이 팔짱을 끼고 내려보자 힘 없이 웃는데, 한소리 하려고 벼르고 있던 게 전부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루이스는 티엔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티엔은 쭈뼛쭈뼛 선 루이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 돌아서 주방으로 향했다.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죽어가던 그녀를 주운 그 날부터 지금까지 제가 키우다시피 한 아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얼굴 표정만 보면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건 하랑도 마찬가지지만, 하랑은 아버지와 단 둘이 살며 사람과 접촉을 피한 탓에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 거리의 고아로 눈치밥을 먹으며 자라 나이에 맞지 않게 신중하고 침착한데다 생각과 감정을 숨기는 데도 능숙했다. 그녀를 데리고 왔을 땐 한동안 그것 때문에 애를 먹었던 티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데운 음식을 그릇에 담았다. 하랑이 노래를 부르던 갈비찜에 마파두부, 제 철인 사과를 갈아 만든 소스를 올린 샐러드에 고슬고슬한 밥까지 한 상을 차린 티엔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두 녀석을 기다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하랑과 장난을 치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단정한 교복 대신 까만 나시티와 후드집업에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갈아입은 루이스의 허벅지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루이스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는 하랑을 보며 키득거리는 중이라 딱히 말을 꺼내기도 뭐해 티엔은 아이들이 앉기를 기다렸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예정보다 식사 시간이 늦어져 배가 많이 고팠던지, 하랑이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식사 예절에 대해 한 마디 하기도 전에 고기 덩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통에 티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는 그런 하랑이 재미있는지 피식 웃으며 앞접시에 고기를 한 점 덜어 티엔의 밥공기 앞에 내밀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르륵 눈웃음을 치는데, 오늘 낮에 점심을 먹고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다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윌라드 크루그먼과 웨슬리 슬로언, 거기에 티엔의 상관인 브루스까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딸이 최고라고 한 것이다. 그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둘을 보고 있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엔은 빈 앞접시를 가져간 루이스가 샐러드의 푸성귀를 가져다 먹는 걸 보며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고 기운을 내야 할 텐데. 하랑이 밥 한 보람이 있게 잘 먹는 것에 비해 루이스는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놨는데도 먹는 게 시원치 않았다. 아마 오늘도 가이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티엔은 안타까운 마음에 큰 살점을 덜어 루이스의 앞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루이스는 결정 능력이라는 비주류 능력을 가진 센티넬 치고 전투력이 높았다. 물론 거기엔 그녀의 타고난 성격과 재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년간의 스카우터 활동으로 다져진 티엔의 코치도 한 몫 했다. 그래서일까, 세간에서 루이스는 티엔 정의 미완성품이라 불리고 있었다.
미완의 센티넬. 루이스가 보여주는 무긍무진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심사에서 3급밖에 받지 못한 데에는 가이드가 없다는 게 가장 컸다. 혼자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다 해도,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을 쓰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센터에 있는 가이드들 중엔 그 누구도 루이스와 동조율이 30%가 넘는 사람이 없었다. 개중에 그나마 제일 높은 게 자신인데, 그마저도 50%가 안 됐다. 덕분에 복잡한 절차를 거쳐 임시 가이드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었다. 티엔은 그녀에게 맞는 가이드가 나타나길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았다.
아홉살, 죽어가던 그녀를 안아들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루이스는 저만 바라보는 아이였다. 제가 없으면 죽어버릴 것처럼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아이. 티엔은 웬 양아치 같은 놈팽이가 그녀의 가이드라고 나타나기라도 할까봐 루이스가 가이드 문제로 센터에 갈 때면 노심초사했다. 더러는 그래도 개중에 가장 동조율이 높으니 그녀와 귀속 관계를 맺는 게 어떠냐 제안하기도 했지만 티엔은 그럴 수 없었다. 첫째는 자신이 스카우터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티엔이 그녀를 무척 아끼기 때문이었다.
센티넬은 가이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간단하지만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를 아끼기 때문에 티엔은 루이스가 남은 평생을 제게 매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쁘고, 강하고, 제게 과분할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다.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듬뿍 사랑받으며 살 수 있는 아이였다. 티엔과 루이스의 나이차는 열 둘.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티엔은 양심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정식 센티넬이 되면 센티넬의 폭주로 이어지는 결핍증세를 막기 위해 신체 접촉이 필수인데, 채 50%도 안 되는 동조율로 그녀를 안정시키기 위해선 단순히 손을 잡거나 안고 있는 걸로는 턱 없이 부족했다.
티엔이라고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후, 나아갈 길을 고르는 그 시간에 제 옆에 있었던 건, 어쩌면 제 스카우터 생에 가장 큰 역작이 될 지도 모르는 미완의
센티넬이었다. 어떻게 탐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유혹을 뿌리치기에 루이스는 너무나 달콤한 열매였다. 가이드가 없는 건, 그 중에서도 자신의 동조율이 가장 높은 건 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손만 뻗으면 재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욕망을 억누른 건 다름 아닌 그녀에 대한 애정이었다.
한 번 그렇게 옭아매면, 돌이킬 수 없다. 그때 루이스는 고작 열다섯이었다. 저를 은인으로 알고 무엇이든 해서 그 값을 돌려주려는 아이다. 절대 거절할 리 없었다. 대개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는 센티넬의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다. 귀속을 하지 않은 지금도 이런데, 그녀가 자신의 센티넬이 되면. 티엔은 두려웠다. 그녀를 '루이스'가 아닌 '센티넬'로 대하게 될까봐, 그녀를 도구로 쓰게 될까봐, 그녀가 더 자라서 알을 깨고 나올 즈음 제게 원망과 저주를 퍼부을까봐. 센티넬은 생존을 위해 가이드를 필요로 하고, 한 번 정식으로 귀속을 맺으면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다. 게다가 센티넬 쪽에선 가이드가 주는 심리적 안정과 스킨십을 사랑이라 여기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비즈니스적인 관계, 혹은 친구의 선을 넘지 않는 게 센티넬의 수명이 오래 가는 비결이라 할 정도였다.
센티넬은 다른 사람보다 예민하고 특별한 존재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루이스에 티엔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완벽에 가까운 남자라 일컬어지는 그 스스로도 루이스를 아직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티엔은 다른 센티넬과의 계약 대신 센티넬 급으로 강한 체술과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스카우터가 된 사람이었다. 대개 스카우터는 센터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센티넬과의 전투도 불사해야 할 때가 있기에 보통의 센티넬보다 능력치가 현저히 높은 이를 뽑는 게 관례라는 걸 생각하면 센티넬이 아닌 스카우터 티엔 정이 어떤 존재인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아이들을 먼저 올려보낸 티엔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따라놓은 물 한 컵을 그대로 들이켰다. 하랑은 밥을 두 공기나 더 먹었고 루이스는 밥을 반절이나 남겼다. 모처럼 한 요리를 담은 그릇은 싹 비워졌건만, 속이 쓰렸다.
시험기간이라 공부하다 의식의 흐름대로 보고싶은 것만 씀.
안그래도 바쁜데 루이스 모델링 변경때문에... 심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름ㅠ
이제 루이스한테 동안에 미인이라고도 못할거 아냐...ㅠㅠ
그 전에 개편 전 루이스로 연성을..많이...해야하는데...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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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벚꽃 샤워
2015/04/10
이것이 새로운 사약의 맛인가요....?
대기실에 들어온 릭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익숙한 뒤통수를 보고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후드를 쓰지 않아 동그란 머리가 움직이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루이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아직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다른 이명만큼이나 어깨에 많은 것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그 나이에 조직의 중추에 선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힘든 상태라는 건 분명했다.
그에게 다가간 릭은 얼굴을 빤히 보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 색만큼이나 차가울 줄 알았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가늘고, 그닥 매끄럽지는 않은 머리카락. 그 끝을 엄지와 검지로 매만지다 아예 손바닥으로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던 릭은 그 감촉에 빠져 그가 눈살을 찌푸리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으음..., 릭?”
“아, 미안하오. 나 때문에 깼소?”
“아뇨, 그건 아닙니다. 혹시 지금 시간이....”
“아직 공성 시간까진 이십분 정도 남았다오.”
다행히 루이스는 제가 머리를 만진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아이도 아니고 성인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는 게 이상할 법도 한데 그걸 뭐라 하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릭은 최근 자신이 게이트를 열었던 횟수와 그를 만났던 횟수를 세고는 짧게 혀를 찼다. 연합에서 그를 공성에만 내보내는 게 아니니 요 며칠간 제대로 쉰 적이 없는게 분명했다.
“제대로 숙면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오. 서른이 넘어가면 싫어도 하루하루 느껴진다오.”
“충고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루이스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늘 보는 사이인데 이렇게 거리를 벌리는게 조금 섭섭했다. 조금은 마음을 열어줘도 좋을 텐데. 토니 리켓이 제게 미안해하는 건 그렇다 쳐도 연합의 영웅이 자신을 멀리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라면 또 모를까. 릭은 혹시 제가 밉보일 짓을 하기라도 했나 기억을 더듬었으나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릭은 소파에서 일어나 팔을 돌리며 어깨를 푸는 루이스의 등을 빤히 쳐다봤다. 전에는 그래도 인사는 잘 받아줬는데.
릭은 아직 머리카락의 감촉이 선명하게 남은 손을 그러쥐며 씁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연인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돌아온 영웅은 전보다 어두워져있었다. 그의 연인인 트리비아 카리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고 루이스는 그녀에 대해 입을 다물었으므로 주위에서 지레짐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릭은 물을 마시는 루이스의 손목과 물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 루이스.”
“푸하, 네?”
“아, 아니오. 아무리 목이 타도 그렇게 마시면 안 좋다오. 물 마시다 사레라도 들리면 약도 없으니까. 하하....”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하잘 것 없는 말이라 릭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웃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괜히 찔려 입가가 씰룩거렸지만 릭은 그래도 웃었다. 그 동그랗고 빨간 눈이 깜박이다 곧 사르륵 접혔다. 루이스가 바로 입가을 다리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긴 했지만 순간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와 릭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대로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은 루이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릭을 마주했다. 눈이 예쁜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릭도 잔뜩 힘을 풀고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 짧은 한 마디에 오늘 업무로 쌓인 피곤이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따스한 뿌듯함이 가득 들어찼다. 멋쩍어 뺨을 긁적이니 루이스가 입꼬리를 당겨 씩 웃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때마침 도착한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릭은 순식간에 제 앞에서 보인 피곤과 약한 모습을 지우고 늠름한 영웅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루이스를 보며 왠지 모를 씁슬함에 입을 다셨다.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에 그런가, 분명 대단한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릭은 자꾸만 루이스가 어리게만 보였다. 엘리나 피터, 혹은 샬럿이나 마를렌, 카를로스, 빅터 같은 어린 아이들이 이런 전쟁터에 나오는 걸 지켜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고 그래선 안 되는 거지만 릭은 루이스가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을 보일 때면 신경이 쓰였다. 그가 짊어진 무게는 너무 무거운 것이라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고, 가끔은 당장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이 불안했다. 마음이 쉴 곳 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점점 더 안으로 곪아들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한 번 시선이 가면 그 다음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손이 갔다. 그는 제가 내민 손을 늘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었지만, 글쎄.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언젠가는 한계가 오기 마련이었고 릭은 그가 그 한계에 부딪혀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좋아하고 호감을 갖지만 자신이 그에게 갖는 감정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연민도, 동정도, 동경도 아닌 어떤 애틋한 감정. 그 감정에 뭐라 이름 붙여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릭이 진심으로 그를 아낀다는 것은 확실했다. 준비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루이스를 보며 릭은 게이트를 열었다.
확실히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여실히 드러나는 공성이었다. 릭은 몇 번이고 그가 리스폰 되는 걸 지켜봤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평소의 침착함은 날이 선 긴장에 가려지고 점점 쌓이기만 하는 피로와 부담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상태로 뒤쪽의 마에스트로와 캘러미티를 지켜내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가까스로 역전승을 하긴 했으나 그것도 그저 버티고 있는 것 뿐, 이미 그의 몸과 정신은 한계에 도달해있었다.
제 삼자가 봐도 그 정도니 그의 동료들이 걱정하고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이 하는 말에 변명도 반론도 없이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하는 루이스는 폭풍의 눈 같았다. 모두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 보다 눈을 감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칼렛과 수다를 떠느라 늦은 회사의 꼬마 숙녀를 마지막으로 제 할 일을 마친 릭은 루이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루이스. 가끔은 적절한 휴식이 필요한 법이오.”
“릭, 신경써주시는 건 고맙지만.”
릭은 제게 향하는 싸늘한 눈동자를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사람을 말려야 했다.
“기분전환이라던가.”
“...하아. 딱히 생각나는 건 없군요. 그럼 전 이만.”
루이스는 틈만 남면 제게 쉴 것을 종용하는 사람이 슬슬 귀찮아지고 있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와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왜 제게 신경을 써주는지는 몰라도 지나친 호의는 부담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걷는데 갑자기 손목이 잡히며 강한 힘에 끌려 몸이 휘청였다.
“윽, 릭!”
“지금 자네가 해야할 일은 잔업이 아니라 휴식이오! 이번주만 몇 번이나 내가 당신을 옮겼는지 아시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정확히 일곱번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릭씨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고요. 그럼 이제 이거 놔주시겠습니까?”
릭은 단호한 루이스의 거절에 얼굴을 찌푸렸다. 연합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일주일에 일곱번이나 공성에 나가는 게 문제라는 건데, 그렇다고 남는 시간에 쉬는 것도 아니면서 루이스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일에 매달리는 게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그냥 둘 수 있을 리 없었다. 릭은 토니가 제게 진 빚을 떠올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있었고, 릭은 이걸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좋소. 그 전에 잠깐만.”
루이스는 싸늘한 무표정으로 릭의 뒷말을 기다렸지만 이어진 것은 말이 아니라 보라색 빛무리였다. 그제야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루이스가 팔을 뿌리치려고 헀을 땐 이미 풍경이 바뀐 뒤였다.
“하아....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말하지 않았소.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
“연합이나 회사에서 알면 당신이 곤란해질 텐데요.”
“자, 자. 그러지 말고, 뒤를 돌아보시오.”
사람 좋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는 릭에게 못 이긴 루이스는 한 발을 내딛으며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멈춰섰다. 연분홍색 꽃잎이 가득 핀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며 꽃잎이 눈송이처럼 내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살랑이는 꽃잎이 손바닥에 내려앉고, 길 양 옆으로 죽 늘어선 꽃나무의 가지들이 흔들렸다. 넋을 놓고 보게 되는 광경에 루이스는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아름답지 않소?”
“...네. 확실히.”
“거 보시오. 잠깐이면 되지 않소.”
루이스는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릭을 보다 피식 웃었다. 확실히 여유가 없긴 했지만 동료도 뭣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신경을 써줄 정도였다니. 제가 생각해도 한심해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윽!”
“꽃구경을 하면서 그렇게 한숨 쉬는 거 아니오!”
“...아프잖습니까.”
등을 팡팡 치며 기운을 복돋아주려는 건 고마운데, 평범한 회사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팠기에 루이스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마저도 싱긋 웃어버리는 바람에 더 투덜거리지도 못하게 된 루이스는 할 수 없이 입술을 움직여 슬쩍 웃었다.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은 릭은 꽃잎의 비가 내리는 길로 걸음을 내딛었다. 루이스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꽃을 감상했다.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비밀이라오.”
“.......”
루이스는 상쾌한 대답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물어본다 해서 다시 찾아올 것도 아니고, 공간 이동 능력자인 릭 톰슨에겐 못 가는 곳이 없으니 지구 어딘가에 있는 거겠지 싶었다. 루이스가 더 묻지 않자 릭은 조금 보폭을 줄였다. 아주 잠시,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위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막상 이렇게 데리고 나오니 훨씬 마음이 편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꽃나무 사이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잠시 나무에 매어놓은 그네를 발견하곤 멈춰섰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어 꽃을 바라보고, 릭은 그네에 앉아 발을 까딱이며 그를 바라봤다. 한결 풀어진 표정이라던가 힘이 빠진 어깨가 보기 좋았다.
“여긴 완전히 봄 날씨네요.”
“하하, 영국은 날씨로 계절을 느끼기 힘들지. 앉겠소?”
루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루이스는 그런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네요.”
“다행이군. 종종 필요하면 말하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흩날리는 꽃잎 비 속에서 고운 얼굴로 하는 말은 단호하기 그지없어 릭은 씁슬하게 웃었다. 그러자 루이스가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제가 컨디션 관리를 못 한다고 릭 씨를 귀찮게 할 수는 없죠.”
“나는 이 동행이 꽤 즐겁소만.”
“.......”
어떻게 정중하게 거절해야할까 머리를 쓰는 게 보여 릭은 피식 웃었다. 이런 면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리라. 릭은 그 마음 씀씀이를 알기에 루이스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럼 내가 동행해달라고 부탁해도 되겠소? 가끔 찾아가리다.”
“그건....”
“아니면 내가 불편하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난처하는 게 보였지만 릭은 물러서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라 사람의 호의를 쳐내는 것에 무르다. 그걸 알기에 릭은 일부러 상심한 척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 심성을 이용하는 것에 조금 죄책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런 게 바로 어른의 치사함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던져둔 함정에 걸려든 루이스를 향해 릭은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럼 매주 금요일 일곱시에 서점으로 찾아가겠소.”
“아니, 잠깐. 왜 얘기가 그렇게....”
“그 때 끝나지 않소?”
“아무래도 제대로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음. 저녁은 내가 사겠소.”
“저한테 선택권이 있긴 한 겁니까?”
루이스의 질문에 릭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거부하면 당장 여기서 포트레너드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은 기세라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도 없어 보였다.
“루이스.”
“...네.”
“포기하면 편하다오.”
싱긋, 상쾌하게 웃으며 하는 소리가 아주 굉장했다. 거의 반 협박이나 다름 없는 말에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마른 세수를 하며 한 바퀴 돌았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앞으로 더 곤란해질 게 뻔했다. 오늘은 다들 돌아간 후에 갑자기 끌려왔지만 다음에도 그런 배려를 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에 일찍 퇴근합니다.”
“그렇군. 광장에 안 가다 보니 몰랐소.”
“그리고 매주는 곤란합니다.”
“격주로 가지.”
“서점에서 사라지는 게 더 수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그럼 집으로 데리러 가겠소.”
제 발로 무덤을 판 루이스는 어째 거하게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 후였다. 릭은 그네에서 일어나 루이스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푸른 잿빛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이, 퍽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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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루이] 킹스맨au
2015/04/04
* 킹스맨AU
** 메모란으로 옮겼던 거 이어봄.
총알이 빗발치는 비상구, 수트를 입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급하게 층계를 올랐다. 한창 쫓기는 중인 남자의 이름은 티엔 정, 안보국의 요원으로 도박장에 잠입했으나 그를 반기는 건 기관총이었다. 티엔은 탄창을 갈아끼우려 허벅지에 손을 뻗었으나 이미 다 써버렸다는 걸 깨닫고 바로 계단의 모퉁이를 돌아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총알이 박힌 허벅지의 출혈을 막기 위해 급히 넥타이를 풀어 동여맨 티엔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난관을 어찌 빠져나갈까 고민하는데 뒤에서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몸에 딱 맞는 쓰리피스 수트에 까만 뿔테 안경, 거기에 한 손에 든 우산까지. 상당히 젊어보이는 건 둘째치고 차림새로 보아하니 도박을 하러 온 손님인 것 같았다. 국적은 아마도 영국. 그러지 않고서야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을 들고 다닐 리 없다. 조금 전까지 비상구에서 총성이 들렸을 텐데, 스위트룸에서 나오느라 못 들었는지 남자는 여유롭기 그지 없는 태도로 티엔에게 다가왔다. 헬기를 타려면 어떻게든 옥상까진 가야 한다. 비상구에서 저를 쫓는 무장경비원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좋은 밤입니다, 미스터."
티엔은 바로 그의 목을 팔로 감아 제압하고 머리에 총구를 댄 채 비상구 문을 마주했다. 거세게 문이 열리고, 제가 잡은 인질이 양손을 들었다. 경비들은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들어올 수 없는 층에, 고급스러운 수트를 갖춰입은 남자를 보자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 받았다. 티엔이 서서히 다가가자 뒤로 물러나는 게 아무래도 제대로 인질 겸 총알받이를 찾은 모양이었다.
"이런 거친 방법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요."
남자를 끌고 헬기장으로 올라가던 티엔은 문득 코끝에 느껴지는 머스크향에 위화감을 깨달았다. 경비병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건 그렇다 쳐도, 남자는 인질 치고 허둥대거나 협상을 하려 하지도 않고 너무 침착했다.
"너, 정체가 뭐지?"
잠자코 티엔이 이끄는 대로 따라주던 남자가 슬쩍 고개를 돌려 티엔을 바라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티엔은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건 절대 일반인이 아니다. 저를 잡으러 온 다른 세력의 사람인가. 티엔은 급히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남자가 티엔의 다친 다리를 을 붙잡는 게 빨랐다.
"자기 소개가 늦어졌군요. 갤러헤드입니다. 미스터 정."
순간 손목이 잡히고, 따끔하는 통증과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제 신분이 노출되었단 뜻이다. 헬기가 다가오는 소리를 끝으로, 티엔의 의식은 검게 물들었다.
지끈지끈한 둔통에 깊이 잠들었던 의식이 돌아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린 티엔은 몸을 일으키려다 허벅다리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작게 신음했다. 하늘색 파자마에 다리엔 붕대가 감겨있고 주변은 마호가니 가구가 있는 걸로 보아 고급 호텔이나 그에 준하는 어딘가 같았다.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을 떠올린 티엔은 빠르게 주변을 살피고 머리를 굴렸다. 새로운 계획이 필요하다.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갤러헤드라고 했다. 영국 신사인 척 하면서 잘도 비겁한 짓을 하다니. 물론 이렇게 치료까지 해주고 좋은 방을 내주긴 했지만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난 티엔은 난로 옆에 놓인 부지깽이를 집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옷장 앞에 검은색 정장이 걸려있는 게 보였다. 가슴 주머니에 꽂혀있는 종이를 빼자 멋드러진 필체로 To. Mr. Jung 이란 메모가 적혀있어 티엔은 주변을 휘 둘러봤다. 방 안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지만 그래도 어디에 어떻게 도청장치나 카메라가 붙어있는지 몰랐다. 괴상한 놀이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장단에 맞춰주기로 한 티엔은 파자마를 벗어던졌다.
빳빳하게 다린 드레스셔츠를 맨 몸 위에 걸치고 소매는 단추 대신 옆에 놓인 커프스로 잠근다. 발목까지 완벽한 핏으로 떨어지는 바지를 입은 뒤 벨트의 버클을 정중앙에 오도록 맞추고, 발목을 덮는 검은 양말을 신고 나면 브로그가 없는 옥스포드의 순서였다. 짙은 붉은색에 광택이 나는 넥타이와 금장 핀. 티엔은 셔츠 단추를 잠그며 저를 위해 준비된 것들을 차례로 훑었다.
이 모두가 철저하다 못해 완벽한 신사의 옷차림을 위한 것이었다. 대체 이런 옷차림을 시켜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티엔은 거울을 보며 능숙하게 넥타이를 매고 카라를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집어들어 팔을 넣었다. 너무 부드럽지도 빳빳하지도 않은 재킷은 맞춤옷이라도 되는 듯 딱 맞을 뿐더러 티엔에게 퍽 잘 어울렸다. 왜 이러는지는 몰라도 수트만큼은 십점 만점에 십점을 줘도 될 만큼 탁월했다. 앞단추를 잠그고, 양손으로 재킷의 카라를 안쪽으로 잡아 매무새를 다듬는데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티엔은 거울을 통해 정중하지만 결코 친절하지 않은 신사를 바라봤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스터."
"썩 유쾌한 아침 인사는 아니군."
"거친 방법은 선호하지 않아서요. 실례가 됐다면 사과드리죠."
자신을 갤러해드라 칭했던 남자는 퀸즈잉글리쉬를 쓰고 있긴 했지만 어려보이는 얼굴 탓인지 전통적인 영국 귀족이라기보단 젠트리같은 인상이 강했다.
"이렇게 나를 끌고온 목적이 뭐지?"
"끌고 오다뇨. 피곤해보이시길래,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해드렸을 뿐인데 제 작은 친절이 과했던 모양이군요. 준비는 다 되신 모양이니 얘기를 조금 나눌 수 있을런지요."
"흠. 내게 선택권이 있나?"
남자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문을 열었다. 숙녀를 대하듯 정중하게 문을 열고 기다리는 게 언짢았지만 어쨌거나 지금 티엔은 볼모나 다름 없는 신세였다. 상대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으며, 높은 확률로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본부에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없고, 부상을 입었으며 남자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은 굳이 따로 시험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혼자서 자신을 상대하러 나올 일도 없거니와 이렇게 여유로울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괜히 힘을 뺄 필요는 없다. 그도 그저 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고 일단은 그 보스와 대화를 할 모양이니, 티엔은 일단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선 어떻게 탈출할지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무턱대고 탈출이나 저항을 하다간 감시와 감독이 더 심해진다는 건 시간을 들여 생각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었다.
진홍색 카페트가 깔린 복도와 벽을 보아선 역사가 느껴지는 게 꽤나 고풍스러운 저택같았다. 다른 곳과 달리 문이 두짝인 곳 앞에 다다른 갤러헤드는 잠시 멈춰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손을 들어 똑똑, 무겁지도 경박하지도 않게 문을 두드렸다. 정중하기 그지없고,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예절은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어색했다.
"랜슬롯."
"갤러해드."
티엔이 그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갤러해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회색에 가까운 은빛 머리카락의 사내. 잘 벼린 한 자루의 검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서류를 보다 고개를 들어 인사를 받았다. 티엔은 그가 서류나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다부진 몸이며 뺨에 난 십자상처는 절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원탁의 기사의 이름으로 부르는 집단. 티엔은 머릿속에서 여러 기관들을 떠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이쪽은 말씀드린 미스터 정입니다."
"수고했군. 앉게."
랜슬롯이란 코드명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놓인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갤러해드는 티엔에게 커피와 차 중 어느쪽이 좋으냐 물었고 티엔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커피라 대답했다. 재킷을 정리하며 앉는데 고급스러운 소파의 쿠션이 지나치게 좋았다. 원래 불편한 자리는 맞지만 차라리 허름한 창고에서 묶이면 묶였지, 이런 분위기는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피차 할 말이 많지 않으니 간단하게 하지."
"바라던 바다."
"리원판. 그자에 대해 도움을 주었음 한다."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원한다면 상부에 요청하는 게 빠를 거다. 무턱대고 정보를 넘길 만큼 허술하진 않으니."
"중국과는 얘기가 된 내용이다. 원한다면 확인해보도록."
예상대로, 간단한 말 몇마디 뿐이었지만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티엔은 미간을 찌푸렸고, 랜슬롯은 티엔 앞에 서류봉투를 가볍게 던지며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미심쩍긴 하지만 단단히 봉해진 서류봉투를 열어본 티엔은 제 상부의 인장이 찍힌 서류에 더 심각해졌다. 인증코드와 암호화된 시리얼넘버까지, 내부인이 아니면 알아볼 수 도 만들어낼 수도 없는 그랑플람의 기술이 들어간 서류는 위조품일 수가 없었다.
마침 다가온 갤러해드가 랜슬롯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티엔의 앞에도 고소한 향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갤러해드와 랜슬롯이 주고받은 눈빛. 티엔은 그 잠시의 시선교환에 묘한 기류를 느꼈다. 저건 동료들간에 지을 만한 눈빛이 결코 아니다. 동료요원이라기보단 비서 같은 행동에 티엔은 이 미남자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단번에 저와 같은 부류라는 걸 꿰뚫어본 랜슬롯과 달리 아무리 봐도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협력하겠다면 그 다음은 갤러헤드가 함께할 거다."
"그 전에 통화를 한 통."
랜슬롯은 정장 안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티엔에게 주었다. 티엔은 상부와 연결되는 핫라인으로 전화를 걸었고, 곧 제 상사가 전화를 받았다. 잘 모르겠지만 명령이 내려왔으니 그들에게 협력하라는 그의 목소리에서 난처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꽤 영향력이 큰 조직이라는 것은 틀림없고, 명령까지 내려왔으니 티엔은 따라야 했다. 말이 협력이지, 뒤로 뺄 여지도 남기지 않고 밀어붙이는 게 강요나 다름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죠. 갤러헤드입니다."
"티엔, 티엔 정이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고, 티엔은 갤러헤드의 손을 맞잡았다. 해사한 웃음이, 드디어 그의 앳된 얼굴에 맞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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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어느 겨울
2015/04/01
* 17살 루이스, 그랑플람 소속 주의
하랑의 기분은 몹시 좋지 않았다. 설이라고 새 옷을 맞춘대서 들떠있었더니 웬걸, 재단사가 치수를 재서 깔쌈한 양옷 한 벌 하나 했더니 딱딱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사부는 추위에 그닥 도움도 안 되는 칙칙한 색의 모직 코트 몇 벌을 골라 내밀었다. 뭐 하나 자기 마음대로 고르지도 못하게 할 거면 왜 따라오라고 했담. 하랑은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 그냥 그럼 사부가 알아서 사오던가! 존나 춥다고!"
"하랑, 몸을 편안하게 하면 수련에 뒤처지는 법이다."
"아오, 씨!"
하랑은 더 말해봤자 티엔이 같은 말만 반복할 것을 알기에 답답해 가슴을 쳤다. 그냥 다 포기하고 빨리 돌아가 따뜻한 난로 앞에서 몸이나 녹이고 싶었다. 마틴도 그렇고 브루스도 그렇고, 대체 이런 날씨에 어떻게 밖에서 그렇게 입고 하루종일 있을 수 있는 건지, 얇기만 한 옷들을 보며 하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선에 있을 땐 겨울이면 옷 안에 솜을 넣어 누비곤 했는데 천도 솜도 많은 나라에서 왜 겨울옷이 이렇게 얇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따뜻한 옷은 따로 있고 제 사부가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저를 괴롭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티엔이 검은색 코트를 건네고, 하랑은 그를 가늘게 노려보며 받아들었다.
"거, 나온 김에 걔 옷도 좀 사주지그래? 아무리 얼음 능력자라 해도 그렇지 옷이 너무 얇드만."
"...하랑. 여긴 남성복 매장이다."
"난 뭐 눈이 없는 줄 알어? 아까 오다보니 사방이 다 옷가게더만. 쪼잔하긴."
하랑은 배를 타고 영국에 도착하던 날 저와 티엔을 맞아주던 여자애를 떠올렸다. 그때도 제법 날이 추웠는데 루이스의 옷차림은 여전히 가을 같았다. 아무리 얼음쟁이라도 그렇지, 춥지도 않은 걸까. 짧은 치마를 홀랑홀랑 까뒤집고 다니는 여자애들에 비하면 루이스의 차림은 조신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옷이 짧은 거나 얇은 거나 추워보이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보는 사람 입장에서야 한창 때 여자애들이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게 고맙다. 하지만 때론 보는 쪽이 더 민망해지기도 했는데, 회사의 공주님도 그렇고 가슴을 훤히 드러낸 조선의 기집애도 그렇고 노출이 너무 과했다. 얼마 전엔 헐벗은 거나 다름 없는 차림으로 공성전을 하기까지 했는데, 하랑은 그 판 내내 기겁하느라 집중을 못했다. 그 바람에 수련의 성과가 없다며 호되게 고생한 하랑은 루이스의 그 꽁꽁 싸맨 차림새를 다른 사람들이 본받았으면 했다. 그런 부끄러운 차림을 하고도 당당하다 못해 치마를 펄럭이며 뛰어다니고 누워있는 사람 위를 훌쩍훌쩍 넘어다니니 심장에 해로웠다.
그런데 비해 루이스의 치마는 무릎 위로 넘어가지 않았다. 정강이에서 무릎 언저리를 오가는 치마에 흰 셔츠. 서점에서 일할 때 입는 게 퍽 단아하면서도 고왔다. 조막만한 패랭이꽃이나, 난초같이 소박하고 청순한 미인상이라 그런가 하랑은 루이스가 남사스런 차림을 한 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공성을 할 땐 발목까지 오는 청바지에 티셔츠, 후드차림이 기본이기도 하고 애초에 생각해보면 루이스는 맨다리를 내놓는 법이 없었다.
누구 때문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가끔 다른 여자애들이 입는 치마를 부러운 듯 보는 걸 보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건 또 아닌 것 같던데. 하랑은 팔랑팔랑한 원피스를 입은 루이스를 떠올리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팔짱을 끼고 추운 거리를 걸으며 흘러내린 목도리를 다시 둘둘 둘렀다. 새빨간 색의 보드라운 목도리는 루이스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떠준 것이었다.
하랑은 추위에 한껏 목을 움츠리며 루이스를 떠올렸다.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참한 건 둘째치고, 기본적으로 루이스는 좋은 애였다. 티엔을 따라 배를 타면서부터 꾸준히 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아냥과 멸시 어린 눈길에 짜증을 내다 못해 주먹질을 하고 난 뒤라 기분을 잡칠 대로 잡친 후라, 하랑은 웃으며 손을 내민 루이스를 무시하고 지나쳤었다. 그런데도 루이스는 하랑에게 잘 대해주었다. 수련이다 뭐다 아는 거라곤 일과 수련밖에 없는 것같은 티엔 대신 포트레너드를 구경시켜주고 영어가 짧은 하랑과 손짓발짓으로라도 대화를 해주기도 했다.
얼굴만 보면 제 또래 같은데, 하는 행동거지나 분위기가 묘하게 어른스러워서 한동안 하랑은 루이스가 저보다 연상인줄로만 알았다. 특히 공성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고 칼이나 주먹이 직격하려는 순간 제 앞에 깔리는 얼음 결정을 보면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만다.
아무래도 능력이 능력이다보니, 하랑은 저만치 앞서있는 사부의 등보다 루이스의 등을 보는 일이 많았다. 둘 다 믿음직하긴 하지만 티엔의 등과 루이스의 등에서 느껴지는 믿음직스러움은 조금 그 성질이 달랐다. 티엔의 등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라면, 루이스에게선 절박함이 느껴졌다. 모든 걸 제가 해결하고 떠맡으려는 뒷모습은 저보다도 가녀리지만, 그걸 뛰어넘는 기백이 있었다. 루이스는 뒤에 지켜야할 사람이 있는 이상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 등이었다. 그러니 연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하랑은 최근 루이스가 동갑이라는 걸 알고 꽤 놀랐다. 하랑이 루이스를 누나, 누나하고 부르며 따르는 것을 본 티엔이 농땡이 피우지 말라며 한소리 하지 않았다면 까맣게 몰랐을 터였다. 양놈들이 위아래 없이 말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하랑은 루이스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꽤 좋았던 터라 생일이 빠르단 걸로 우겨 누나라 불렀다.
마틴도 친절하고, 곰 할배도 듬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보단 여자가 좋은 법이었다. 하랑은 자연스레 시간이 남으면 루이스와 어울렸고, 그때마다 티엔은 못마땅해하며 놀 시간에 수련에 정진하라 했지만 그 역시 루이스에게 약하긴 매한가지였다.
물론 칙칙한 사내놈들 사이에 열 일곱밖에 안 된 꽃같이 예쁜 여자애가 있으니 어찌 안 예쁘랴마는. 걸음과 함께 정처없이 흘러가던 생각은 문득 한 곳에 멈춰섰다. 루이스는 티엔의 제자도 아니고, 여전히 서점에서 일하는 데다 마틴이나 브루스도 그걸 가지고 뭐라 하지 않는다. 티엔만 보면 불편한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 마틴을 생각하면 더더욱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사부."
"또 무엇이냐."
"루이스는 왜 그랑플람에 들어온 거야?"
순간 티엔의 미간이 움찔했다. 흔치 않은 반응에 하랑의 궁금증은 더 크기를 불렸고, 하랑은 티엔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보면 굳이 다른 사람 놔두고 티엔과 저를 맞이하러 루이스가 나올 이유가 없었다.
"사부가 꼬신 거야?"
"꼬시다니."
"아니 그럼 걔가 왜 들어왔는데? 어?"
"들을 가치도 없군. 그 얘기는 더 꺼내지 마라."
티엔은 고개를 저으며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자기는 두꺼운 코트 입고 목도리에 장갑까지 했으니 춥지도 않다 이거지. 하랑은 매섭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목도리 안으로 얼굴의 반을 쏙 넣었다. 이렇게 추운데 루이스는 왜 아직도 가디건 차림인 걸까. 잠깐 서점에 들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랑은 고개를 저었다. 한참 벌어진 티엔과의 거리에 같이 가자고 소리친 하랑은 잰걸음으로 티엔의 뒤를 따랐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들 뿐이라니깐.
"어서오세, 티엔."
딸그랑 울리는 종소리에 카운터를 정리하고 있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가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고 해봐야 늦게 일을 마치는 회사원이나 은행원들 뿐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손님 아닌 손님이 찾아오곤 했다.
"능력자에 관한 책은 아직 새로 들어온 게 없는데요."
"널 보러 왔다."
루이스는 돌려말하지도 않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읏샤, 작게 소리를 내며 바닥에 꿇고 있던 무릎을 일으켜 그를 올려다보자 티엔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날이 춥더군."
"그러게요. 이제 곧 비 대신 눈이 오겠어요."
"하나 샀다."
티엔이 내민 쇼핑백에 루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받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티엔이 루이스의 손에 손잡이를 들려주려 해 루이스는 손을 빼며 한걸음 물러났다.
"괜찮아요."
"루이스."
"정말 괜찮아요."
티엔은 눈을 맞추려하지 않는 루이스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색해진 공기가 무거웠고, 제가 대하고 있는 건 열일곱짜리 여자애였다.
"루이스."
처음은 아주 사소했다. 하랑이 궁금해하지 않았더라면 떠올릴 일도 없을 정도로 평범한 하루였다. 다만 그때는 루시 일로 티엔이 날카로워져있었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 잠시 방황하던 때였다는 게 중요했다.
"이미 많이 주셨어요. 티엔, 자꾸 이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푹 꺼진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다가와 티엔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티엔은 자기가 주는 건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도움을 주기만 하려는 소녀를 바라봤다. 자신이 상처입는 게 두려워 호의는 받으려 하지 않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도 싫다. 티엔은 루이스가 하랑에게 잘해주는 것도 마틴과 남매처럼 지내는 것도 싫었다. 자신이 제일 먼저 발견했는데, 왜 자신의 사람이 되어주지 않는 것일까. 티엔은 그랑플람에 들어오라는 권유도 한사코 거절했던 루이스를 떠올렸다.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문을 닫아버렸던 날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애먼 책만 노려봤다.
루이스는 험악한 무표정의 티엔을 보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이 사람은 어렵다. 루이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돌아섰다.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루이스는 티엔이 어려웠다. 무뚝뚝하기는 다이무스와 다를 바가 없지만 루이스는 티엔이 자꾸만 제게 무언가를 해주려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걸 아는 것과 편하게 대하는 것은 다르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티엔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면 언제나 눈이 마주친다. 다른 사람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제게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억하고 챙겨주는 사람에겐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이 돌려줄 능력도 무엇도 없는데 왜 자꾸 주려는 걸까. 루이스는 티엔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계속 받다가, 어느날 갑자기 돌아서기라도 하면.
루이스는 가끔 공성전에서 마주치는 루시 리를 볼 때마다 긴장에 침을 삼켰다. 그녀를 마주하는 것은 루이스에게도 껄끄러웠다. 그녀가 티엔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티엔은 제게 그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대해줄 리도 없었다. 좋은 집안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빛나는 루시를 보고 있으면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자신은 너무 초라한 사람이라서 견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제 주변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이스가 티엔의 끈질긴 권유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회사에 먹혀버릴 지도 모르는 그랑플람이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회사와 연합이 싸우는 동안 죄 없는 사람들이 다쳤고, 그들이 야욕을 채우려는 동안 거리에선 동전 한 푼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루이스는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싫었다. 제 능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루이스가 그랑플람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건 고작 열두살밖에 안 된 메어리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었다. 월급 봉투를 받은 루이스는 과자와 조그만 선물을 사서 제가 자란 고아원을 향했고,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들것에 실려나가는 메어리를 봤다. 고아원을 나온 루이스는 거리를 걸었다.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티엔을 만났고 아는 얼굴에 그만 눈물이 흘러 넘쳤다. 혹시라도, 제가 티엔이 처음 권유했을 때 그랑플람에 들어갔더라면, 그래서 재단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면, 그랬으면 메어리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걸 포기하고, 절망 속에 스스로 숨을 멈추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다. 루이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쪼그려앉아 울었다. 티엔이 수차례 왜 그러냐 물으며 울지 말라 했지만 모든 게 제 탓 같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티엔의 손에 이끌려 간 그의 집에서 루이스는 따뜻한 머그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티엔은 더이상 묻지 않았고, 루이스는 그랑플람에 들어가겠다는 말 한 마디만 했다. 그 후로 쭉, 티엔은 저만 보면 무언가 해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티엔이 어려웠다. 자꾸만 기대고 싶어지고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시간이 늦었어요."
"바래다주겠다."
"...잠시만요."
티엔 정은 괜찮으니 먼저 가란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사람이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늘 당당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람이 자신때문에 축 쳐져있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루이스는 정리를 서둘렀다. 내일 아침에 해야할 일까지 미리 정리해둔 루이스는 서점 안을 밝히는 등을 끄기 위해 스위치 앞에 섰다.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쇼핑백에서 코트를 꺼내 루이스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버리던, 환불을 하던 네 마음대로 해라."
루이스가 난처해했지만 티엔은 여지조차 주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겨울용 르블랑 코트는 비싼 만큼 제 값을 하는 상품이니 적어도 추위에 떨진 않을 것이다. 기성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난 봄에 재단에서 단체로 옷을 맞추면서 루이스의 치수도 남아있었기에 티엔은 루이스의 겨울 코트를 따로 주문했다. 그게 벌서 보름 전이었고 오늘에서야 티엔 앞으로 도착해 전해주러 온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 환불도 할 수 없었다. 루이스는 모르겠지만 어른의 치사함이라는 것은 대개 두둑한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잘 입을게요."
"가지."
티엔은 루이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코트에 팔을 꿰는 걸 보며 문을 열었다. 하얀색을 기조로 한 코트는 루이스에게 퍽 잘 어울렸고 티엔은 제 안목이 훌륭했다는 것에 뿌듯해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제 검은 코트와도 퍽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서점의 문을 잠그는 루이스를 보며 본디 흑과 백으로 나타나는 음양은 하나라는 생각을 하던 티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이스는 문을 잠그곤 티엔을 올려다봤고, 티엔은 그 투명한 붉은 눈을 보며 제가 잠시라도 속된 마음을 품었던가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루이스는 고작 열일곱이었다. 몇 해만 더 있으면 성년이라곤 해도 아직 한참 어린애였다. 게다가 저와는 띠동갑이니, 자칫 잘못했다간 연합의 테라듀 능력자에게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다.
손목에 감기던 차가운 수갑의 감촉을 떠올린 티엔은 팔을 내밀지 않고 앞서 걸었다. 곧 빠른 걸음으로 쫓아온 루이스가 옆에 걷기 시작했지만 티엔은 루이스보다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앞서 걸었다. 그러다보니 걷는 게 아니라 경보 수준이 되어버리고, 그러다보니 쫓아오던 루이스가 그만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으왓!"
재빠르게 넘어지려는 루이스의 허리를 낚아챈 티엔은 급격하게 줄어든 거리에 잠시 숨을 집어삼켰다. 놀란 루이스가 눈을 깜박이고, 티엔은 잠시 그대로 소녀를 바라봤다. 주황색 가스등불 아래 제 품에 안겨있는 루이스. 가슴이 크게 뛰고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그녀가 꼭 끌어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가, 감사합니다."
"...발밑에 집중해."
"당신이 너무 빨리 걸으니까.... 아얏."
"괜찮나? 쯧."
발목을 접질리기라도 했는지 티엔의 가슴을 밀치고 물러난 루이스가 한 걸음 내딛다가 눈살을 찡그렸다. 티엔은 바로 무릎을 굽혀 루이스의 발을 살폈다. 루이스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티엔이 발목을 잡자마자 시큰거리는 통증에 작게 신음을 내고 말았다.
"안 되겠군. 업혀라."
"네? 아뇨, 혼자 걸을, 으아앗...!"
티엔은 루이스의 발목을 놓고 그대로 무릎 아래로 손을 넣었다. 당황한 루이스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일어나는 바람에 루이스는 반사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티엔의 목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업히고 만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듬직하고 너른 등에 업혀있자니 어째 쑥스러웠다. 그것보단 놀란 심장이 자꾸 큰 소리를 내며 뛰는 게 신경쓰였지만 티엔이 루이스를 고쳐 업으면서 루이스도 자세를 고쳤다.
"나빴어요, 진짜...."
"제대로 발밑을 안 본 네 부주의겠지."
"하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도 없다. 루이스는 하랑이 짧은 영어로 티엔 흉을 늘어놓던 걸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랑의 말대로 티엔이 한 번 막무가내가 되면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루이스는 티엔의 어깨에 슬쩍 머리를 얹었다. 티엔의 등에 업혀있으니 찬 겨울바람이 부는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제 다리를 단단히 잡은 티엔의 팔과 너른 등, 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덥다는 게 루이스가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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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봄비
2015/03/31
* 봄, 만남, 도서관에서 이어짐
어김없이 네시 반이 넘어가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도서실을 정리한 루이스는 마우스를 흔들어 화면을 띄웠다. 검은 머리에 단정하고 늠름하게 생긴 3학년 선배는 문 하나도 그냥 여는 법이 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에 루이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세를 고쳤다. 낡은 미닫이문이 소리도 많이 내지 않고 열렸다. 워낙 도서실에 학생들도 별로 없는데다 티엔이 들르는 시간은 도서실 마감 시간과 가까웠기에 루이스는 혼자 티엔을 맞았다.
"자주 오시네요."
"면학은 학생의 본분이니까."
티엔은 그 말에 슬며시 올라가는 루이스의 입꼬리를 보며 바코드 전산 처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부활동이 끝나고 들르는 도서실에서 나누는 잠깐의 대화. 티엔은 그 짧은 시간이 꽤 기꺼웠다. 요 며칠동안 지켜본 결과, 루이스는 교무회의가 있는 월요일과 수요일 방과 후엔 꼭 도서실에 있었다. 그걸 알게 된 티엔은 월요일과 수요일이면 부활동을 마치고 꼭 도서실에 들렀다.
그냥 두고 가면 되지만 티엔은 루이스가 바코드를 다 찍기를 기다렸다. 얼굴도 곱지만 티엔은 루이스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모양이 예쁜 손가락이 책을 정리하고, 바코드를 다 찍으면 모니터를 보고있던 루이스가 티엔을 바라봤다. 그럼 티엔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을 빌리기 위해 서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책장에 서있으면 선생님이 돌아와 잠시 루이스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곧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이 반납한 책을 꽂으러 서가로 들어왔다.
책을 전부 고른 티엔은 일부러 루이스가 먼저 나가길 기다렸다. 책을 가지고 나온 티엔이 대출을 하는 사이 루이스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돌아서기까지 약 3초. 지퍼를 죽 올려 어깨에 가방을 맨 티엔도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문앞에 서면, 바로 뒤에서 그녀가 기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티엔은 문을 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텅 빈 복도에 겹쳐들리는 발소리. 그 묘한 기분에 티엔은 잠시 멈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있던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는 건 순식간이었고, 제가 돌아볼 줄 몰랐는지 루이스도 그대로 멈춰서 눈을 깜박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동자에 잠시 사로잡혔던 티엔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어, 비...."
"우산, 안 가져왔나?"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살피는 티엔은 가방 안에 고이 들어있는 접이식 우산을 떠올렸다. 어차피 제가 사는 자취방은 멀지 않고, 기껏해야 봄비니 그리 거세지도 않다. 곤란해하는 루이스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우산을 써도 비를 피하기 충분하단 생각에 티엔은 그녀를 바래다줄 생각이었다. 루이스는티엔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나올 땐 맑았으니까요."
"어느쪽으로 가나? 바래다주지."
"아, 아니에요. 안 멀어요. 이 정도는 맞아도 돼요."
바래다주겠단 말에 당황한 루이스가 손을 내저었다.그 모습이 퍽 귀여워 티엔은 아무 말도 않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옆에 따라붙은 루이스가 연신 안 그래도 된다고 설명했지만 티엔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 여자애가 비를 맞고 가게 둔다는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학교 현관에 다다른 티엔은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먼저 가보겠다 말하는 루이스의 옆에 서 우산 반쪽을 씌워주자 루이스는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루이스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요 앞에 윈더미어까지 부탁드려요."
어렵게 꺼낸 말에 티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전에도 그 서점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티엔은 입밖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가정사로 따지면 티엔 역시 그리 할 말이 없었다. 신경쓰는 건 아니지만 입학 상담이라거나 자기소개서엔 선생님들 사이에 꾸준히 오르는 주제가 바로 티엔의 가정사였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홀어머니 아래서 문무를 겸비한 완벽한 아이. 티엔은 자신을 평가하고 수식하는 말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완벽해야 한다는 것 외엔 다른사람보다 강해지는 것 정도에나 흥미가 있는 정도였다.
더러는 주위는 돌아보고, 친구도 사귀고 놀라고도 하지만 티엔은 그런 데 시간을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러니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텐데. 티엔은 루이스를 흘긋 바라보곤 그녀쪽으로 우산을 슬쩍 기울였다. 고개를 숙인 채 걷는 루이스를 곁눈질하다보니 샴푸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희미한 꽃향기, 우산 아래 단 둘. 티엔은 하얀 목덜미와 세라복 안쪽으로 흘긋 보이는 쇄골에 마츤 침을 삼키며 정면을 바라봤다. 루이스의 팔과 닿아있는 팔이 간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윈더미어까지는 오분이면 넉넉한 거리였고, 두 사람은 한 마디 말을 주고받는 법도 없이 걷기만 했다. 루이스의 걸음에 맞춰 걷다보니 평소보단 더 걸렸을 테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저, 여기까지면 돼요. 우산 씌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라."
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스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그녀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안으로 들어간 루이스는 서점 주인과 반갑게 인사하며 싱긋 웃었고, 티엔은 잠시 그대로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저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앞치마를 둘러맨 루이스가 창가로 시선을 돌리다 눈이 마주쳤다. 그바람에 티엔은 훔쳐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움찔했지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었다.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티엔은 서점에서 발을 돌렸다. 정말 사소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는 루이스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수고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빗속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티엔의 어깨는 약간 젖어있었고, 입가엔 희미하게 웃음이 걸려있었다. 봄비에 언 땅이 녹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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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봄, 만남, 도서관
2015/03/22
* 현대 고등학교au
바야흐로 꽃이 피는 삼월. 이제 삼학년이라 고전무술부의 부장직은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티엔은 체육관에 들러 운동을 하고 샤워까지 마친 후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젖은 머리를 털며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증축 공사로 책을 빌린 뒤 처음으로 도서관을 개방한 날이라, 책때문에 가방이 무거웠다. 도서관이 닫히는 건 네 시 반. 씻고 나온 게 네시 십오분이었다. 더 늦기 전에 반납하기 위해 미닫이 문을 연 티엔은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밀려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먹구름이 낀 하늘 같은 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가에 서있던 여자애가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쳤다.
“저기, 아직 대출은 안 되는데요....”
“아, 아아. 반납이다.”
“그럼 이쪽으로.”
파란 리본을 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입생인 것 같은데, 첫날부터 도서관에 익숙한 듯한 태도에 티엔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여학생을 위아래로 훑었다. 당연한 듯 대출대 안쪽에 앉은 여학생은 책의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한데 비해 검은 색 세라복 위에 가디건도 입지 않은 채였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걸까. 티엔으로선 드문 타인에 대한 흥미였지만 여학생은 책 다섯 권의 반납 처리를 마치고 티엔을 올려다봤다.
“이제 가셔도 돼요.”
“1학년?”
“네. 그런데요.”
“...이름은?”
“루이스.”
그 이름의 울림이 그녀와 제법 잘 어울렸다. 티엔은 가방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티엔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티엔은 깜박이는 그 붉은 눈동자가 꽤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혹시 선생님께 용무가 있으신 건가요?”
“...그건 아니다만.”
“곧 문을 닫을 시간인데요.”
“알고 있다.”
의미 없는 문답. 이러고 있는 게 시간낭비라는 건 알지만 티엔은 좀처럼 걸음을 옮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박또박 말하며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엔 아직 중학생 티가 났고, 갸름한 얼굴선이며 가는 목덜미, 소매 사이로 흘긋 보이는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게 실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티엔은 괜히 교복의 칼라를 매만지며 돌아섰다. 어차피 도서부원이라면 앞으로 종종 마주칠 터, 그런데 왜 지금껏 관심도 두지 않았던 도서부원에게 흥미가 생긴 건지. 티엔은 대출이 안 된다고 하던 루이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저기요.”
그리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티엔은 그대로 손을 멈췄다. 이 도서실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녀와 자신 단 둘 뿐. 천천히 몸을 돌리자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에게 다가왔다.
“책갈피. 빼먹으셨어요.”
“...흠.”
티엔은 책갈피를 쓰지 않는다. 가방 안에 넣어놓은 유인물이나 메모지가 끼워져있던 게 아닐까 하는데 예상 외로 루이스가 내민 것은 얼마 전에 참고서를 사면서 받은 영수증이었다.
“여기보단 그 건너편 골목에 윈더미어가 나아요. 포인트 적립은 안 되지만 얼굴 조금만 익히면 싸게 주시거든요.”
윈더미어라는 소리에 티엔은 후미진 간판을 떠올렸다. 낡은 서점과 눈앞의 여학생. 티엔은 무표정한 루이스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무는 그것뿐이었는지 루이스는 티엔이 반납한 책을 양손에 들고 서가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티엔은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의 복도를 걷는 내내 기분좋은 꽃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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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White Day
2015/03/16
※ '어느 겨울'과 이어지는 듯 안 이어지는 듯 그냥 공식 목석남 티엔과 ts루이스로 기념일이 챙기고 싶었다.......
차디찬 바람이 한 풀 꺾인 3월의 봄날, 루이스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살폈다. 늘 아무렇게나 방치하던 머리카락도 곱게 빗어 올리고 편하다고 대충 입던 후드와 티셔츠, 청바지, 스니커즈 대신 흰 블라우스에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연분홍색 치마를 입으니 늘 보는 제 모습이 아무리 봐도 어색했다. 앞머리를 매만지다 긴장을 덜고자 숨을 길게 내뱉었지만 보면 볼수록 어딘가 부족해보였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 그와 만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인들의 기념일에 데이트라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루이스는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으로 찰싹 뺨을 감싸고 다시 한 번 숨을 내뱉었다. 어설프게나마 화장도 했는데 어떻게 보일지 몰라 자꾸만 두근거렸다. 약속시간까지 앞으로 삼십분. 그는 절대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으니 이제 더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떨리는 가슴 위에 차가운 손을 얹고 천천히 심호흡한 루이스는 거울에서 등을 돌렸다.
“티엔!”
“흠. 왔나.”
루이스는 만나기로 약속한 분수대 앞에 서있는 그를 보고 가볍게 뛰었다. 트리비아가 신는 것처럼 굽이 높은 것도 아닌 단화지만 평소에 신던 것보단 뛰기 힘들어 자연스레 걸음이 늦어졌다.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티엔은 팔을 풀고 루이스에게 다가왔다. 양손이 빈 걸 본 루이스는 살짝 실망했지만 이제 막 만난 참이고 어련히 그가 알아서 다 계획을 세웠을 거라 생각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화장이나 옷이 어색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티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죽 훑어보고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잘 지냈어요?”
“그래.”
제 생일을 티엔이 말도 없이 그냥 보내고 맞은 밸런타인에 하루 종일 같이 있었던 이후로 제대로 시간을 내서 만난 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한 달 만이었다. 티엔이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고, 루이스는 그의 팔을 잡고 한가로운 리버포드를 걸었다. 모처럼 먹구름이 끼지 않은 화창한 날씨에 데이트. 루이스는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봄바람이 한껏 들뜬 마음을 흔드니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리버포드는 회사의 관할구역이지만 사람이 많은 데다 휴양지였던 덕에 세계 각국의 요릿집이 많았다. 그러니 포트레너드에서 데이트를 하기엔 리버포드만한 곳이 없었는데, 연인들의 기념일에 휴일이 겹쳐서 그런지 어디고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기저기 사람이 많네요.”
“걱정마라. 예약해두었으니.”
그냥 한 말에 티엔은 루이스의 그의 팔을 잡은 손을 톡톡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슬그머니 루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흘긋 그녀의 안색을 살핀 티엔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순조로운 데이트는 완벽한 계획에서부터 시작한다. 티엔은 앞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앞에서 이래서 가기 싫었네, 어쩌네 하고 다투는 연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의 점심으론 제철인 숭어요리와 함께 언젠가 루이스가 맛있다고 했던 화이트 와인, 그 후엔 한창 흥행하는 영화를 보고 제법 괜찮은 차를 들여놓는 카페. 저녁은 중식집에서 먹고 그 다음은 봐서 제 집으로 가거나 루이스를 바래다줄 계획이었다.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 티엔은 삼일 전에 예약을 마쳤고, 오늘따라 햇살도 좋고 루이스의 기분도 좋아 보였다.
좀처럼 꾸미는 법이 없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걸을 때마다 살랑거리는 치맛자락에 옅게 화장까지 하고 배시시 웃으니 안 그래도 청초한 사람이 막 피어나는 꽃처럼 고왔다. 덕분에 티엔의 가슴도 같이 떨렸지만 거리를 걷다보니 한 번씩 루이스를 돌아보는 다른 남자들 때문에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제 연인이 예쁜 것을 탓할 순 없지만, 그들의 노골적인 시선은 불쾌할 따름이었다.
티엔은 곱게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린 덕에 드러난 루이스의 희고 가는 목덜미를 흘긋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늘 머리카락을 후드 안에 넣고 다니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이렇게 드러낼 바에야 차라리 다시 그 후드를 입히고 싶었다. 꽁꽁 숨겨두고 자신만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예약해둔 식당에 도착한 티엔은 루이스가 앉을 의자를 빼주었다. 고개를 든 루이스의 화사한 미소에 미소로 답한 티엔은 루이스의 맞은편에 앉아 계획한 대로 숭어요리와 화이트와인을 시켰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루이스는 종일 들떠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데이트 이후로 한 달 만이니 그렇게 자신을 만나는 게 좋았나 싶어 티엔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왜요?”
“그렇게 보고 있으니 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루이스는 티엔의 솔직한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테이블에 팔을 올려 아치를 만들던 루이스는 티엔이 손을 내밀자 바로 그의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 포개진 두 손의 온도가 같아질 쯤,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티엔은 숭어의 살을 발라 루이스의 접시에 덜어주었고, 루이스는 아무리 괜찮다 말해도 티엔이 말을 안 들을 걸 알기에 얌전히 생선살을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맛나게도 먹는 게 보기 좋아 티엔은 제가 먹는 건 뒷전으로 하고 루이스를 먹였다.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옷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입으니 더 말라보여 잘 먹여야할 것 같았다. 맛있는 걸 먹이면 수줍고 간지러운 미소를 짓는데, 티엔은 루이스의 그 얼굴을 볼 때면 행복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은 카페로 향했다. 유난히 거리에 연인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티엔은 옆에 여자친구를 끼고도 루이스를 쳐다보는 남자들 때문에 점점 더 짜증이 났고, 내심 사탕을 기대하고 있던 루이스는 한 나절이 다 가도록 사탕은 줄 생각은 않는 티엔 때문에 점점 우울해졌다.
티엔 정이 기념일을 챙길 사람이냐, 하면 사실 루이스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다가 챙겨주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신경도 안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루이스는 내내 차가운 무표정으로 제게 말도 걸지 않는 티엔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속만 썩였다. 거리를 지나는 여자들이 저마다 손에 안고 있거나, 그녀들의 옆에 서있는 남자들이 들고있는 귀여운 포장의 상자를 보며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티엔, 저…. 혹시…….”
“무슨 일이냐.”
“으,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이스는 저녁을 먹고도 아무 조짐이 없는 티엔을 보며 자포자기해버렸다. 티엔은 루이스가 주저하는 것을 힘들어서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쉬었다 가자며 공원으로 들어갔다. 티엔이 벤치에 깔아준 손수건 위에 앉은 루이스는 티엔의 팔을 놓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혼자 멋대로 기대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사귀는 사이인데 이 정도 기념일정도는 챙겨줘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한 달 만에 만난 건데. 하지만 이런 걸로 속상해하는 게 유치하고 쪼잔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라 루이스는 티엔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실 거라도 사올 테니 잠시 쉬고 있어라.”
티엔은 제 눈을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루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그녀를 뒤로 했다. 티엔은 티엔 나름대로 낮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저기압이 된 루이스의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분명 제 계획은 완벽했고, 루이스도 즐거워했는데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건지. 티엔은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히 되짚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무리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 생리 중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아직 루이스가 생리를 하려면 열흘은 더 있어야 했다. 그럼 대체 뭘까. 콜라 두 캔을 산 티엔은 미리 한 캔을 따서 들고 가며 제가 잘못 안 것인지 날짜를 다시 한 번 셌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에도 이 쯤 만났던 것 같은데. 순간 티엔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티엔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설마. 혹시, 설마. 임신을 한 게 아닐까?
임신 초기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티엔은 몸에 오르는 열기에 잠시 숨을 골랐다. 괜히 헛기침을 하고 목이 타 미리 딴 콜라를 쭉 들이켰다. 루이스와 자신 사이의 아이를 상상하던 티엔은 그럼 연합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아이는 누가 돌보고 제 집에 루이스를 들어앉힐 수 있는 것인지 현실적인 문제를 재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한달음에 달려간 티엔은 벤치에 앉아있는 루이스 앞에 한 남자가 뭔가를 내미는 모습을 보고 발을 멈췄다.
“저, 그, 오늘 서점엔 안 나오셨더라구요. 저같은 게 루이스씨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아, 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날이 날이니까. 못 드리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다행이네요.”
머쓱한 듯 수줍게 웃으며 뒷머리를 만지는 남자와, 조심스레 그가 내민 상자를 받은 연인. 티엔은 차갑게 표정을 굳히고 다가갔다. 티엔을 발견한 루이스가 눈을 깜박인 순간, 티엔은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내 연인에게서 떨어져주지 않겠나?”
“아, 예, 예!”
“티엔!”
방금 전까지 꽃분홍빛으로 물들어있던 남자가 겁에 질려 달아나고, 루이스는 티엔을 말리려했으나 이미 남자는 혼비백산해 달아난 후였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내가 왜 내 여자에게 추근거리는 남자를 봐줘야하지?”
“나도 왜 이런 날 연인도 아닌 남자한테 선물을 받아야하는지 모르겠거든요?!”
티엔의 싸늘한 말과 눈빛에 여태껏 설움을 꾹꾹 참아왔던 루이스도 터져버리고 말았다. 분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지른 루이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만히 있으면 또 다툴 것 같고, 티엔이 자신을 겨우 이런 거에 서운해 하는 속 좁은 여자라 생각할 것 같아 더 마주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울음을 삼키고 입술을 문 채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티엔은 한숨을 내쉬고 루이스를 따라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루이스.”
“놔요.”
“왜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다오.”
“됐어요! 어차피 내가…!”
결국 눈물이 흘러넘치고 만 루이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기껏 예쁘게 꾸미고 나왔는데. 그래도 기념일이라고 내심 많이 기대했는데. 어쩜 완벽한 남자가 이럴 때만 무심한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이런 것 때문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성긴 얼음이 와그작 깨지는 것처럼 무너지는 자존심에 이를 악물고 티엔을 노려봤다. 최소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했다.
“루이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것이냐.”
티엔은 천천히 루이스를 품에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는 연인을 안고 등을 토닥이자 루이스도 티엔의 등에 팔을 둘렀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글쎄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날카로운 결정검처럼 티엔을 가슴을 쿡쿡 눌렀다. 여자를, 그것도 연인을 울렸다는 양심의 가책에 티엔은 토를 다는 대신 루이스를 토닥였다. 남달리 사려 깊은 사람이니 아마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걸 제 무신경함이 건드린 모양이었다. 일이 아닌 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티엔에게 연인이란 관계는 루이스가 처음이었고, 완벽하려 노력은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또 이렇게 그녀를 상처 입혔단 생각에 티엔은 죄인이 된 기분이라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다 입을 열었다.
“네가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나를 만나러 온 날. 유난히 햇살이 좋고, 네가 햇살보다 더 예쁘게 웃어준 날.”
루이스는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티엔의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 무뚝뚝하고 무신경한 남자가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다 알면서, 그깟 사탕이 뭐라고. 밀려오는 후회와 자괴감에 루이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만가만 저를 달래려 등을 토닥이는 그 무거운 애정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틀린가?”
티엔의 질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티엔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루이스의 턱을 잡아올리려다 완강한 거부에 손을 놓았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지 않게 무릎 안쪽에 팔을 넣고, 허리를 단단히 잡은 티엔은 그대로 루이스를 번쩍 안아올렸다.
“으앗!”
“이제야 겨우 얼굴을 보여주는구나.”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느냐.”
티엔은 제 목에 팔을 감은 루이스에게 씩 웃어보였다. 수줍게 붉어진 뺨이 붉은 노을을 받아 예쁜 다홍빛으로 물들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담았다. 그게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티엔은 입술을 내밀었다. 살포시 눈을 감고 제게 다가오는 그녀와 가볍게 입술을 부비고, 루이스를 내려놓자 루이스가 발돋움을 해 다시 한 번 티엔에게 살짝 키스했다. 티엔은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뺨을 엄지로 쓸다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연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럼 이제 가지.”
“어디로요?”
티엔은 대답대신 씩 웃으며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작고 고운 손은 티엔의 손 안에 충분히 들어오지만 언제나 이 손을 어느 정도의 힘으로 잡아야할지는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거리를 걷다보니 가스등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티엔의 집으로 가는 길, 문득 사탕가게가 눈에 띠었지만 루이스는 가게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을 뿐 더 이상 다른 여인들이 안고 가는 사탕상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제 손이 아플까 힘주어 잡지도 못하는 연인의 온기가 더 소중했다.
“……티엔?”
진열된 형형색색의 사탕에서 눈을 돌리는데 티엔이 사탕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그런 거 없어도 되는데.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티엔은 사탕가게 안으로 들어가 조금 전까지 루이스가 보던 사탕들의 값을 치르고 봉투를 루이스의 손에 들려주었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느냐.”
“네? 별로 사탕이 먹고 싶었던 건 아닌데….”
루이스는 차마 말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사다준 게 기뻐 생긋 웃자 티엔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이트 데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한참 보고 있으니 먹고 싶은가 보다 생각하고 사다준 거라는 걸 알지만 루이스는 그게 더 기뻤다.
“고마워요.”
티엔은 다시 찾은 루이스의 미소에 겨우 시름을 덜었다. 이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따스한 온기가 퍼진다. 루이스는 사탕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볼이 볼록 튀어나온 게 꼭 소녀같이 귀여웠다.
“다 먹을 때까지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
루이스는 대답 대신 티엔을 올려다봤다. 오물오물 사탕을 굴리며 저를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을 마주한 티엔은 반들거리는 루이스의 입술에 입 맞췄다. 달디 단 입술이 떨어지자 루이스는 입을 벌려 동그란 사탕을 내보였다 닫으며 사르륵 웃고, 티엔은 집 앞에서 주머니 안의 열쇠를 꺼내들었다. 오늘 밤은 유난히 길 모양이었다.
* 이틀이나 늦었지만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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