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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2015/03/06
티엔이 멀건 죽으로 허기를 달래는 동안 루이스는 바삐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고 거친 외투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짐을 꾸리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다. 티엔은 루이스가 한쪽 벽에 걸어놓은 제 외투와 갑옷, 검을 확인하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져 계곡을 떠내려온 것치고 티엔의 몸은 멀끔했다. 어딜 크게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긁힌 상처 하나도 없는데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몸이 개운하고 상쾌했다.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낡았지만 깨끗한 면옷을 집어들었다. 짐을 꾸리던 루이스가 지나가며 입고 있던 비단옷은 아직 덜 말랐으니 귀한 옷이면 들고 가라고 말했지만 티엔은 고개를 저었다. 옷 한 벌에 연연할 것도 아니거니와 티엔은 애초에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린 것은 평민의 옷이라서가 아니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데다 날렵한 루이스의 몸에 이런 옷이 맞을 리 없으니 분명 루이스를 거둔 이의 것일 텐데,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의 옷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일단 성의를 생각해 입었지만 그래도 소매가 짧았다. 어쩔 수 없는 지라 훤히 드러난 손목을 매만지던 티엔은 조용히 혼자 갑옷을 입었다. 출병할 때보다 더 결연한 의지로 매듭을 묶고, 외투를 걸치고 검까지 차고 방을 나오니 다 짊어질 수 있을지 의뭉스러울 정도의 짐이 나와있었다. 군장을 비롯한 모든 짐싸기는 간결하고 정말 필요한 것만 챙기는 게 기본이거늘. 티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다. 길을 떠나기 전부터 괜히 동행의 심기를 어그러뜨릴 필요도 없거니와, 지금 티엔은 머리를 숙여서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종이로 싼 뭉치들이 서너개, 두꺼운 모포가 둘, 그리고 낡은 천으로 둘둘만 뭉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모자가 달린 긴 외투를 덧입은 루이스는 바닥에 꿇어앉아 능숙하게 늘어놓은 짐들을 한 데 모았다. 두꺼운 모포를 착착 접는 것부터 시작한 짐싸기는 금새 하나의 뭉치가 되어 등에 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요령좋게 어깨끈까지 만든 루이스가 짐을 지고 힘을 주며 일어났다. 그런 루이스를 멀뚱히 바라보던 티엔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짓에 의미를 모르고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온 게 없으니 챙길 것도 없었다.
작은 집을 나서니 바깥은 온통 울창한 나무들이 빼곡해 햇빛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내리쬈다. 아직 입춘이 되지 않은 데다 북쪽 땅인데도 싹을 틔운 것이 신기해 나무들을 둘러보며 걸었다. 비가 왔는지 땅이 축축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 했기에 티엔은 루이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람이 다닌 티가 나는 좁은 길은 루이스가 다니며 만든 길이리라. 나무와 하늘을 둘러보던 티엔은 곧 흥미를 잃고 루이스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등이 다 가리도록 진 짐의 가장 위, 천으로 감쌌지만 감출 수 없는 형태의 물건에 티엔은 한 손으로 나무를 짚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루이스가 잠시 멈춰서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뱉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라 같이 멈춰서니 루이스가 멀쩡한 길을 두고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고, 티엔은 그저 인적이 드문 길로 가겠거니 하며 뒤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 지나자 정말 이 길이 맞나 싶었다. 분명 남쪽으로 가면 내리막길일 텐데 오르막이 계속되고 길도 없는 나무 사이를 헤쳐가려니 힘은 힘대로 드는데, 점점 숲도 우거지는 게 수상해 티엔은 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 거지?”
“청 주둔지로 가야죠. 그나마 14군이 제일 믿음직하니 거기로 갈 거예요.”
루이스는 앞서 걸으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청의 주둔지, 거기에 14군이라는 소릴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냥 막역하게 청의 영역까지가 아니라 딱 짚어 말하는 게 미심쩍었다.
“왜 하필 14군이지? 황자들, 아니 황자님들이 계신 곳도 있지 않나?”
티엔의 날카로운 질문에 루이스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감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것 같았지만 루이스는 타박 대신 설명을 했다.
“아무리 청의 사람이라도 그렇게 좋은 검과 갑옷은 구하기 힘들죠. 그렇다면 꽤 명망높은 귀족이란 뜻인데, 황자들은 자신의 세력에 따라 당신을 박대할 수도 있고 몰래 제거할 수도 있죠.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도와줄 사람은 곰 장군밖에 없어요.”
간단하지만 타당한 논리에 티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제 옷차림만 가지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니, 이런 곳에서 썩히긴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루이스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등을 가릴 정도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루이스와 짐이라곤 봇짐 하나도 들지 않은 티엔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매일 무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데다, 어마마마나 황제폐하, 황후마마께 문안을 여쭙느라 꽤 걷는 편인데도 쉬지도 않고 험한 산길을 가다보니 절로 숨이 찼다.
“서둘러요, 해가 지면 더 갈 수 없으니까.”
결국 티엔은 조금씩 뒤쳐졌고, 앞서 걷던 루이스가 뒤쳐진 티엔을 기다리느라 멈춰서고 다시 길을 가는 게 반복됐다. 가끔 루이스는 갔던 길을 되돌아와 같이 걸으며 아직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으니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했지만 티엔은 오히려 그 말에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힘들 일 하나 없는 황궁에서보다, 오늘 깨어났을 때 평소보다 몸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더더욱. 남자로서 저보다 어리고 왜소한 이에게 체력으로 밀린다는 건 퍽 자존심 상하는 거라 티엔은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떨어지기 전에야 나온 평지에 티엔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오르막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고, 하늘이 붉게 물들자 바삐 걷던 루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왔고 지금 제가 어디쯤 왔는지 모르는 티엔은 루이스가 더 걸을 생각을 않자 안심하는 한편, 빨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숨을 골랐다.
두리번거리던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루이스를 따라 들어간 티엔은 루이스가 너른 돌 아래 짐을 내려놓는 걸 보곤 팔짱을 꼈다. 온종일 산을 타다 겨우 평지를 만난데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야영을 준비하는 게 영 못마땅했다.
“얼마나 온 거지? 어제가 보름이었으니 달빛을 따라 더 가도 되지 않나?”
“달이 밝아서 안 돼요.”
루이스의 단호한 말에 티엔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한밤중에 험한 길을 가는 게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티엔은 마음이 급했다. 안전하게 가는 게 엿새, 루이스가 말한 게 사나흘, 밤낮없이 걸으면 하루 하고 한나절. 대체 어떤 길로 어떻게 가기에 해가 지면 꼼짝도 않고 사나흘이라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으니 더 답답했다. 한나절을 걷는 동안 말 한 마디 않고 따라왔지만 정말 믿어도 되는지 아직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이스가 가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길안내를 하게 할 수도 없었다. 자칫 제게 앙심을 품고 안격의 소굴로 가서 팔아넘긴다거나, 혼자 헤매게 두고 갈 수도 있다. 티엔은 지금 제 처지를 알기에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정말 그렇게 여기는 것은 다르다. 티엔은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가능성을 재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저울질했다.
루이스는 티엔이 가만히 서있는 데도 개의치 않고 주위에서 나뭇가지며 마른 나뭇잎을 모아다 불을 붙였다. 나무가 타는 냄새에 티엔은 복잡한 심경에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 붉은 눈동자에 맞서 불쾌함을 표하자 루이스는 짐 보따리를 뒤적이더니 다짜고짜 티엔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날아드는 물체에 놀란 티엔은 냉큼 그것을 잡아챘다.
묵직한 주머니를 흔들자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물이나 술인 것 같은데, 이걸 주는 의미를 몰라 루이스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이미 불이 오른 장작더미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티엔은 주머니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다 주머니의 매듭을 풀고 안에 든 나무통의 마개를 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게 술은 아닌 것 같은데 물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망설이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그냥 물이에요.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마실 테니 주세요.”
“…….”
생각을 읽혀 민망해진 티엔은 물을 들이켰다. 깨어나 먹은 죽 이후로 처음 입에 대는 물은 유독 시원하고 상쾌해 그만 마셔야지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갈증을 해결한 티엔은 물통에서 입을 떼고 입가에 흐른 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마개를 닫아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자 티엔을 보고 있지도 않던 루이스가 한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고, 바람소리와 마른 장작이 타며 틱틱 불티가 튀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티엔은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온 길을 보았다.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며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과, 그 아래 드리운 겨울산의 풍경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 문득 황도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을 살고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그리던 그녀를 떠올린 티엔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로 제가 행방불명된 지 꼬박 이틀. 내일이면 사흘이 되니 황도에 연락이 갈 것이다. 말은 안 해도 제가 아버지처럼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리진 않을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었다. 명절이면 다른 황숙들이 황제께 문안을 여쭙고 복진과 함께 연회에 참석할 때도 티엔의 어머니, 1황자 적복진은 홀로 그 모진 풍파를 견뎠다.
그렇기에 티엔은 어머니를 위해서 더 완벽한 아들이 되고자 했고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치고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해 침묵했다. 어릴 적 왜 제겐 아버지가 안 계시느냐 여쭈었을 때 어머니의 그 슬픈 미소는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티엔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패륵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있지만, 하나뿐인 아들로서 어머니께 심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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