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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오후, 커피 한 잔.
유입 키워드가 꾸준히 갱신되길래...
새연성 ㅇㅅㅠ...
“많이 기다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엇, 아, 아니오.”
토니와 만나기로 했던 카페,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지는 그를 기다리며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깜빡 졸았던 릭은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릭의 앞자리에 앉은 그는 지하연합의 영웅, 루이스였다. 공성 중에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사적으로 보는 건 처음이다. 릭은 저도 모르게 신입사원의 자세로 돌아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등을 꼿꼿이 폈다. 자신보다 어린데도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싸한 기백이 느껴져 존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릭은 어두운 무표정의 영웅을 앞에 두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후드 때문에 진 그늘 때문인지 공성에서 볼 때보다도 더 분위기가 무거웠다. 루이스는 테이블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켰다. 영국인이라 틀림없이 홍차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유리창을 통과하는 강렬한 햇빛이 그를 비췄다. 햇빛 때문인가, 흰 피부며 새빨간 눈동자, 선이 고운 턱선이 어우러진 옆얼굴이 그림 같았다. 꼭 도나우 강의 물결이 햇빛을 받아 온갖 색으로 반짝이는 것 같다. 순수하게 감탄하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크. 아무리 같은 남자라지만 방금 그 노골적인 시선은 실례다.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릭을 마주했다. 무표정인건 여전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그늘이 걷힌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침묵이 무겁다. 릭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무미건조한,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웠다. 친구 소개로 여자를 만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찼다. 바지 위에 적당히 닦으면서도 릭은 루이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토니가 급하게 출장갈 일이 생겨서 대신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딱히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색한 공기가 불편하다. 릭은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던 상대를 잠시 떠올렸다가 지워버렸다. 아무리 간부라고 하지만 영웅씩이나 되는 사람을 대신 보내다니. 릭은 토니가 제게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깨닫는 동시에 졸지에 대신 체면치례를 하러 나온 그에게 미안해졌다. 며칠 야근을 하다 온 자신도 자신이지만, 애써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는 상대가 신경 쓰였다.
“그…….”
말을 꺼내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제게 향하는 또렷하고 맑은 눈에 릭은 어설프게 웃었다.
“하, 하하……. 다른 게 아니고, 괜찮소?”
“예?”
망했다. 릭은 어색하게 웃는 그대로 굳었다. 다른 괜찮은 말도 있을 텐데 고작 괜찮냐니, 적어도 그가 소화하는 업무의 양과 스케줄이 평범한 회사원인 자신보다야 많을 텐데! 뻔히 알면서 이도 저도 아닌 긁어 부스럼으로 자폭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 같았다.
“크흠. 괜찮습니다. 덕분에.”
스위치를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릭은 멍하니 뒷머리를 긁던 손을 내렸다. 웃었다. 잠시였지만, 분명 웃었다. 저런 얼굴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아니, 애초에 사람이기는 했구나. 살짝, 눈꼬리가 휘는 게 예뻤다. 순간이었지만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는 것도 예뻤다. 남자에게 비교할 말은 아니지만 꼭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미소였다. 릭은 어디에선가 아침 카페 창가에서 봤던 물망초를 떠올렸다가 꿀꺽 침을 삼키며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지만 그래도 딱딱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한결 풀어진 건 분명했다.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때마침 종업원이 커피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릭은 그가 고개를 돌린 사이 포옥 숨을 몰아쉬었다. 강한 햇볕 때문인지 얼굴이 뜨거웠다.
“그런데 여긴 왜……. 아, 아니지.”
“피곤하시면 들어가 쉬셔도 됩니다.”
“하하, 그건 아니라오.”
커피를 젓던 그가 고개를 들어 릭을 응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운데 마냥 싫지는 않다. 릭은 검지로 무릎을 톡톡톡 두드렸다.
“토니가 당신을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얘기를 해보라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숨을 쉰 루이스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머리를 받쳤다. 근심에 휩싸인 얼굴을 내려 보고 있으니 왠지 손을 뻗고 싶어진다.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싶었다.
“조언자가 필요하단 뜻이 아니겠소. 아니면 가볍게 사귈 친구라거나.”
릭은 충동을 억누르며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사회인에게 학습된 본능과도 같은 처세술은 웬만한 상황이 아니면 적어도 중간은 간다. 루이스는 대답 대신 릭을 잠시 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앉았다. 김이 오르는 커피를 바라만 보고 있는 그에게, 릭은 쿠키가 담긴 바구니를 밀어주었다.
피곤할 땐 단 게 좋다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완곡한 거절에 릭은 조금 서운해졌다. 하지만 강요를 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릭은 바구니를 다시 제자리로 당겼다.
“다는 그렇고, 반만…….”
씁쓸하게 거절당한 릭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시 무르기 전에 초코칩쿠키를 반 잘라 내밀자 입에도 안 댈 것 같던 그가 쿠키를 받아 입에 넣었다.
“여긴 쿠키도 제법이지만 스콘이 제일이라오. 커스터드 크림도 일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는 게 꽤 귀엽기도 하고, 잘 먹는 게 뿌듯해 릭은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그를 바라봤다. 열심히 쿠키를 먹던 루이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다네요.”
“하하, 그야 물론 초코칩쿠키니까.”
“그러게요.”
릭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잘 먹는 걸 보니 기쁘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묘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토니가 마음을 달래려고 한 거라면 더이상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스터, 저는…….”
“아, 부스러기 묻었소.”
릭은 손을 뻗었다. 뒤로 물러나는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놀라 커진 눈이 귀엽다. 영웅이 아닌, 루이스의 얼굴이 이런 걸까. 릭은 웃으며 손을 내렸다.
“이거 실례를. 거기가 아니라 이쪽이오.”
손등으로 대충 입가를 문지르는 루이스를 보며 릭은 자신의 입술 왼쪽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쿠키 부스러기를 뗀 루이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받을 일은 아니라오.”
루이스는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커피를 마셨다. 커피잔을 쥐는 손가락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다. 붉게 튼 곳이며 분홍색 새 살 위로 다시 새 상처가 생긴 게 그가 짊어진 것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광장에서 책을 들고 있을 때와 공성을 할 때의 그는 정말 다르고,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평화로운 쪽이 좋았다.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평범한 서점 직원이었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랬으면 희고 모양 좋은 손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평소엔 괜찮습니다.”
“아니, 미안하오. 그런 게 아니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괜찮다며 커피를 마시는 그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잠시 어렸다 사라졌다. 혹시 상처를 준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 릭은 필사적으로 무마할 말을 찾았다.
“정말로, 그래서 본 게 아니오. 그게……. 예쁜 손이라 생각해서.”
“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이걸로 오늘만 두 번째다. 이미지는 완전히 망했다. 이게 소개팅이었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남자한테 이런 작업멘트를 해서 무얼 한단 말인가.
“톰슨씨.”
“예, 아, 아니. 음.”
“그렇게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누그러진 표정이 어째 저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아 릭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연하의 남자에게 위로를 받는 직장인이라니. 릭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본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는 건 처음이라오.”
“그렇군요. 저한텐 꽤 익숙해서, 죄송합니다.”
“익숙하다니……. 아.”
릭은 잠시 광장에서 게이트를 여닫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능력자들을 이동시키느라 바빠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만 서점에 서있는 그에겐 제 모습이 보였을 터였다.
“자주 뵙기도 하고요.”
“그야 그렇소만.”
“전 톰슨 씨의 상사도 아닙니다.”
“하하하, 그대를 상사로 두면 내 일이 절반은 줄어들 것 같소만.”
“글쎄요.”
어디 그게 쉬울 것 같으냐는 듯 짓는 짓궂은 미소에 릭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할 줄이야. 릭은 진심으로 대신 그를 보내준 토니에게 감사했다. 덕분에 일주일의 스트레스가 따스한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릭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생각한 것만큼 차가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매번 미안해하는 토니보다 대하기 편했다.
“토니가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딱히 그와 많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니라오.”
“그럼…….”
“그가 미안해할 뿐이지.”
“…….휘말려든 쪽이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평범한 일상을 누릴 땐 그게 귀한 줄 모르죠.”
덤덤하게 말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루이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범한 삶, 갑작스러운 사건. 송두리째 바뀌는 삶. 릭은 그 험난한 과정을 지나온 남자를 바라봤다. 눈앞의 남자는 어딘가 애틋한 눈빛으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하듯이, 그 먼 곳을 그리는 눈에 릭은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가슴 위에 올라온 돌은 조금씩 무게를 더할 겁니다. 결국에는 짓눌려버릴지도 모르죠. 그땐 이미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죠.”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루이스는 경고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릭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릭과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걸까 싶을 정도로, 그는 릭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당신의 능력은 매력적이니까요. 누구든, 붙잡으면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있소?”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어디까지나 진심이다. 릭이 아는 루이스란 사람은 스카우터도 아니거니와 이런 걸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유혹하지 않는다. 릭에게 루이스는 어디까지나 연합의 리더이자 믿음직한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가만히 있어도 될 텐데, 어째서 연합에 속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지우려 하는가. 예전의 평범하고 로맨틱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어렴풋이는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고, 또 전쟁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전쟁이 가져다줄 명예도, 부도,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릭 톰슨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글쎄요.”
릭이 고민하는 사이 루이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쓰게 웃는 그의 눈은 후드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자신이 있을 곳을 정하는 게 좋을 거라는 겁니다. 경험자의 충고라고 해두죠.”
“......”
“그럼 저는 이만. 다음에는 토니가 나올 겁니다.”
루이스는 단숨에 잔을 비우곤 테이블 위에 두 사람 분의 커피값을 내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루이스는 그대로 릭을 지나쳐갔다. 싸한 냉기가 릭을 덮쳐왔다. 이대로 보내기엔 석연치 않다.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었지만, 릭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불렀다.
“루이스!”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많은 말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릭은 깜빡이는 루이스의 눈을 보며 마침내 입술을 뗐다.
“후회하오?”
“…….”
루이스는 시선을 피했다. 또, 그 눈이다. 릭은 숨을 죽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있던 루이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릭은 카페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등을 지켜봤다. 끝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릭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두 사람분의 커피값을 테이블 위에 놓고 루이스가 두고 간 지폐는 지갑 안쪽에 넣었다.
날씨가 좋다. 릭은 바로 게이트를 여는 대신 조금 걷기로 했다. 빼먹은 게 있나 싶어 돌아본 창가 자리엔 쿠키 반쪽과 다 식어버린 커피만이 남았다.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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