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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벚꽃 샤워
2015/04/10
이것이 새로운 사약의 맛인가요....?
대기실에 들어온 릭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익숙한 뒤통수를 보고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후드를 쓰지 않아 동그란 머리가 움직이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루이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아직도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다른 이명만큼이나 어깨에 많은 것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그 나이에 조직의 중추에 선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힘든 상태라는 건 분명했다.
그에게 다가간 릭은 얼굴을 빤히 보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 색만큼이나 차가울 줄 알았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가늘고, 그닥 매끄럽지는 않은 머리카락. 그 끝을 엄지와 검지로 매만지다 아예 손바닥으로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던 릭은 그 감촉에 빠져 그가 눈살을 찌푸리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으음..., 릭?”
“아, 미안하오. 나 때문에 깼소?”
“아뇨, 그건 아닙니다. 혹시 지금 시간이....”
“아직 공성 시간까진 이십분 정도 남았다오.”
다행히 루이스는 제가 머리를 만진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아이도 아니고 성인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는 게 이상할 법도 한데 그걸 뭐라 하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릭은 최근 자신이 게이트를 열었던 횟수와 그를 만났던 횟수를 세고는 짧게 혀를 찼다. 연합에서 그를 공성에만 내보내는 게 아니니 요 며칠간 제대로 쉰 적이 없는게 분명했다.
“제대로 숙면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오. 서른이 넘어가면 싫어도 하루하루 느껴진다오.”
“충고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루이스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늘 보는 사이인데 이렇게 거리를 벌리는게 조금 섭섭했다. 조금은 마음을 열어줘도 좋을 텐데. 토니 리켓이 제게 미안해하는 건 그렇다 쳐도 연합의 영웅이 자신을 멀리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라면 또 모를까. 릭은 혹시 제가 밉보일 짓을 하기라도 했나 기억을 더듬었으나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릭은 소파에서 일어나 팔을 돌리며 어깨를 푸는 루이스의 등을 빤히 쳐다봤다. 전에는 그래도 인사는 잘 받아줬는데.
릭은 아직 머리카락의 감촉이 선명하게 남은 손을 그러쥐며 씁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연인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돌아온 영웅은 전보다 어두워져있었다. 그의 연인인 트리비아 카리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고 루이스는 그녀에 대해 입을 다물었으므로 주위에서 지레짐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릭은 물을 마시는 루이스의 손목과 물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 루이스.”
“푸하, 네?”
“아, 아니오. 아무리 목이 타도 그렇게 마시면 안 좋다오. 물 마시다 사레라도 들리면 약도 없으니까. 하하....”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하잘 것 없는 말이라 릭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웃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괜히 찔려 입가가 씰룩거렸지만 릭은 그래도 웃었다. 그 동그랗고 빨간 눈이 깜박이다 곧 사르륵 접혔다. 루이스가 바로 입가을 다리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긴 했지만 순간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와 릭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대로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은 루이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릭을 마주했다. 눈이 예쁜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릭도 잔뜩 힘을 풀고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 짧은 한 마디에 오늘 업무로 쌓인 피곤이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따스한 뿌듯함이 가득 들어찼다. 멋쩍어 뺨을 긁적이니 루이스가 입꼬리를 당겨 씩 웃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때마침 도착한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릭은 순식간에 제 앞에서 보인 피곤과 약한 모습을 지우고 늠름한 영웅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루이스를 보며 왠지 모를 씁슬함에 입을 다셨다.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에 그런가, 분명 대단한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릭은 자꾸만 루이스가 어리게만 보였다. 엘리나 피터, 혹은 샬럿이나 마를렌, 카를로스, 빅터 같은 어린 아이들이 이런 전쟁터에 나오는 걸 지켜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고 그래선 안 되는 거지만 릭은 루이스가 이렇게 위태로운 모습을 보일 때면 신경이 쓰였다. 그가 짊어진 무게는 너무 무거운 것이라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고, 가끔은 당장이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이 불안했다. 마음이 쉴 곳 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점점 더 안으로 곪아들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한 번 시선이 가면 그 다음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손이 갔다. 그는 제가 내민 손을 늘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었지만, 글쎄.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언젠가는 한계가 오기 마련이었고 릭은 그가 그 한계에 부딪혀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좋아하고 호감을 갖지만 자신이 그에게 갖는 감정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연민도, 동정도, 동경도 아닌 어떤 애틋한 감정. 그 감정에 뭐라 이름 붙여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릭이 진심으로 그를 아낀다는 것은 확실했다. 준비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루이스를 보며 릭은 게이트를 열었다.
확실히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여실히 드러나는 공성이었다. 릭은 몇 번이고 그가 리스폰 되는 걸 지켜봤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평소의 침착함은 날이 선 긴장에 가려지고 점점 쌓이기만 하는 피로와 부담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상태로 뒤쪽의 마에스트로와 캘러미티를 지켜내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가까스로 역전승을 하긴 했으나 그것도 그저 버티고 있는 것 뿐, 이미 그의 몸과 정신은 한계에 도달해있었다.
제 삼자가 봐도 그 정도니 그의 동료들이 걱정하고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이 하는 말에 변명도 반론도 없이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하는 루이스는 폭풍의 눈 같았다. 모두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 보다 눈을 감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칼렛과 수다를 떠느라 늦은 회사의 꼬마 숙녀를 마지막으로 제 할 일을 마친 릭은 루이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루이스. 가끔은 적절한 휴식이 필요한 법이오.”
“릭, 신경써주시는 건 고맙지만.”
릭은 제게 향하는 싸늘한 눈동자를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사람을 말려야 했다.
“기분전환이라던가.”
“...하아. 딱히 생각나는 건 없군요. 그럼 전 이만.”
루이스는 틈만 남면 제게 쉴 것을 종용하는 사람이 슬슬 귀찮아지고 있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와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왜 제게 신경을 써주는지는 몰라도 지나친 호의는 부담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걷는데 갑자기 손목이 잡히며 강한 힘에 끌려 몸이 휘청였다.
“윽, 릭!”
“지금 자네가 해야할 일은 잔업이 아니라 휴식이오! 이번주만 몇 번이나 내가 당신을 옮겼는지 아시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정확히 일곱번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릭씨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고요. 그럼 이제 이거 놔주시겠습니까?”
릭은 단호한 루이스의 거절에 얼굴을 찌푸렸다. 연합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일주일에 일곱번이나 공성에 나가는 게 문제라는 건데, 그렇다고 남는 시간에 쉬는 것도 아니면서 루이스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일에 매달리는 게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그냥 둘 수 있을 리 없었다. 릭은 토니가 제게 진 빚을 떠올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있었고, 릭은 이걸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좋소. 그 전에 잠깐만.”
루이스는 싸늘한 무표정으로 릭의 뒷말을 기다렸지만 이어진 것은 말이 아니라 보라색 빛무리였다. 그제야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루이스가 팔을 뿌리치려고 헀을 땐 이미 풍경이 바뀐 뒤였다.
“하아....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말하지 않았소.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
“연합이나 회사에서 알면 당신이 곤란해질 텐데요.”
“자, 자. 그러지 말고, 뒤를 돌아보시오.”
사람 좋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는 릭에게 못 이긴 루이스는 한 발을 내딛으며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멈춰섰다. 연분홍색 꽃잎이 가득 핀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며 꽃잎이 눈송이처럼 내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살랑이는 꽃잎이 손바닥에 내려앉고, 길 양 옆으로 죽 늘어선 꽃나무의 가지들이 흔들렸다. 넋을 놓고 보게 되는 광경에 루이스는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아름답지 않소?”
“...네. 확실히.”
“거 보시오. 잠깐이면 되지 않소.”
루이스는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릭을 보다 피식 웃었다. 확실히 여유가 없긴 했지만 동료도 뭣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신경을 써줄 정도였다니. 제가 생각해도 한심해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윽!”
“꽃구경을 하면서 그렇게 한숨 쉬는 거 아니오!”
“...아프잖습니까.”
등을 팡팡 치며 기운을 복돋아주려는 건 고마운데, 평범한 회사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팠기에 루이스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마저도 싱긋 웃어버리는 바람에 더 투덜거리지도 못하게 된 루이스는 할 수 없이 입술을 움직여 슬쩍 웃었다.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은 릭은 꽃잎의 비가 내리는 길로 걸음을 내딛었다. 루이스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꽃을 감상했다.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비밀이라오.”
“.......”
루이스는 상쾌한 대답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물어본다 해서 다시 찾아올 것도 아니고, 공간 이동 능력자인 릭 톰슨에겐 못 가는 곳이 없으니 지구 어딘가에 있는 거겠지 싶었다. 루이스가 더 묻지 않자 릭은 조금 보폭을 줄였다. 아주 잠시,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위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막상 이렇게 데리고 나오니 훨씬 마음이 편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꽃나무 사이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잠시 나무에 매어놓은 그네를 발견하곤 멈춰섰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어 꽃을 바라보고, 릭은 그네에 앉아 발을 까딱이며 그를 바라봤다. 한결 풀어진 표정이라던가 힘이 빠진 어깨가 보기 좋았다.
“여긴 완전히 봄 날씨네요.”
“하하, 영국은 날씨로 계절을 느끼기 힘들지. 앉겠소?”
루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루이스는 그런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네요.”
“다행이군. 종종 필요하면 말하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흩날리는 꽃잎 비 속에서 고운 얼굴로 하는 말은 단호하기 그지없어 릭은 씁슬하게 웃었다. 그러자 루이스가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제가 컨디션 관리를 못 한다고 릭 씨를 귀찮게 할 수는 없죠.”
“나는 이 동행이 꽤 즐겁소만.”
“.......”
어떻게 정중하게 거절해야할까 머리를 쓰는 게 보여 릭은 피식 웃었다. 이런 면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리라. 릭은 그 마음 씀씀이를 알기에 루이스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럼 내가 동행해달라고 부탁해도 되겠소? 가끔 찾아가리다.”
“그건....”
“아니면 내가 불편하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난처하는 게 보였지만 릭은 물러서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라 사람의 호의를 쳐내는 것에 무르다. 그걸 알기에 릭은 일부러 상심한 척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 심성을 이용하는 것에 조금 죄책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런 게 바로 어른의 치사함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던져둔 함정에 걸려든 루이스를 향해 릭은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럼 매주 금요일 일곱시에 서점으로 찾아가겠소.”
“아니, 잠깐. 왜 얘기가 그렇게....”
“그 때 끝나지 않소?”
“아무래도 제대로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음. 저녁은 내가 사겠소.”
“저한테 선택권이 있긴 한 겁니까?”
루이스의 질문에 릭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거부하면 당장 여기서 포트레너드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은 기세라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도 없어 보였다.
“루이스.”
“...네.”
“포기하면 편하다오.”
싱긋, 상쾌하게 웃으며 하는 소리가 아주 굉장했다. 거의 반 협박이나 다름 없는 말에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마른 세수를 하며 한 바퀴 돌았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앞으로 더 곤란해질 게 뻔했다. 오늘은 다들 돌아간 후에 갑자기 끌려왔지만 다음에도 그런 배려를 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에 일찍 퇴근합니다.”
“그렇군. 광장에 안 가다 보니 몰랐소.”
“그리고 매주는 곤란합니다.”
“격주로 가지.”
“서점에서 사라지는 게 더 수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그럼 집으로 데리러 가겠소.”
제 발로 무덤을 판 루이스는 어째 거하게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 후였다. 릭은 그네에서 일어나 루이스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푸른 잿빛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이, 퍽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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