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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3.
2015/03/12
“그만 하고 와서 앉아요.”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티엔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티엔은 루이스가 부르는 소리에 등을 돌렸다. 돌아가기 위해선 이 사람이 필요하다. 바위 위에 앉은 루이스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장작더미를 뒤적였다. 또르르 굴러 나온 새까맣고 투박한 감자 네 개. 껍질은 새까맣게 탔지만 나뭇가지로 이리 저리 굴리니 껍질이 타서 떨어진 곳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걸 보니 또 식욕이 돌아 티엔은 루이스가 앉은 것처럼 적당한 돌덩이 위에 앉았다.
“아직 뜨거우니까 손대지 말아요.”
한번 허기가 지니 나무가 타는 냄새마저 식욕을 돋웠다. 지금 만졌다간 입에 넣기도 전에 손을 델 것을 알지만 눈앞에 먹을 걸 두고도 먹지 못하는 건 꽤나 인내가 필요했다. 티엔이 감자를 빤히 보며 침을 꼴깍 넘기는 사이 일어난 루이스는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밟았다. 놀란 티엔이 쳐다보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불을 끄는데, 티엔은 기껏 피운 불을 꺼트리는 까닭을 몰라 루이스를 올려다봤다.
“해가 지면 더 추워질 텐데?”
“해가 지면 불빛도 더 잘 보이죠.”
티엔은 모든 주도권을 뺏긴 채 휘둘리는 게 묘하게 불쾌해 시선을 돌렸다. 듣고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어서 더 자존심이 상했다. 루이스는 마지막 불씨까지 꺼트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감자를 이리저리 옮기다 까맣게 탄 껍질을 반 벗겨내 티엔에게 건넸다. 기분이 상했던 티엔은 잠시 감자와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곤 감자를 받아들었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당장은 포슬포슬한 감자를 주린 배에 넣는 게 더 중요했다.
티엔은 제 몫의 감자 두 개를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우고 물을 마셨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감자는 소금도 치지 않고 구웠을 뿐인데도 맛있었다. 그리고 먹을 게 들어갔는데도 허기가 달래지기는커녕 더 배가 고파지고 말았다. 어릴 적 정관정요를 다 외우지 못해 스승님이 벌로 다 외울 때까지 식사를 금지했을 때도 이렇게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티엔이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루이스가 제 몫을 하나 양보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티엔은 염치가 없어 선뜻 받지 못했다. 아직 하나도 채 먹지 않은 루이스는 입을 오물거리며 감자를 집어 내밀었고, 티엔은 못 이긴 척 받았다. 티엔은 마지막 감자를 루이스가 하는 것처럼 천천히 먹었다. 물론 그 하나를 먹는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허기가 달래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단 나았다.
감자를 먹는 사이 하늘엔 검은 장막이 드리웠다. 둥근 달과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장식하고, 루이스는 챙겨온 모포 한 장을 티엔에게 건넸다. 황궁을 떠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침상도 없이 냉기가 올라오는 땅에 모포 한 장으로 몸을 감싸고 자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티엔이 모포를 들고 가만히 있자 루이스가 다가와 모포를 삼단으로 접어 불을 피웠던 자리 옆에 펼치곤 두꺼운 쪽은 깔고 나머지 한쪽과 외투를 덮고 자야한다고 일러주었다. 티엔은 방금 먹었으니 바로 누울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내일도 길을 가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했고, 어차피 불을 피울 수 없다면 잠이라도 자는 게 나을 성 싶었다.
티엔이 불어오는 찬바람에 양손으로 팔을 쓸며 온기를 더하는 사이, 루이스가 물통을 담았던 주머니에서 통을 꺼냈다. 빈 주머니에 불을 지필 때 감자와 함께 넣었던 둥근 돌은 아직도 뜨거워 장갑을 낀 손으로도 못 집고 주머니의 입구를 벌려 담아야 했다. 주머니 안에 뜨거운 돌을 넣은 루이스는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던 티엔에게 건넸다.
“안고 자는 게 없는 것 보단 나을 거예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무엇이냐 묻는 대신 저를 빤히 쳐다보는 티엔에게 루이스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엔 그저 고집 센 귀족 도련님이겠거니 했는데, 힘든 길도 힘들다 소리 한 번 않고 따라오는 게 장하기도 하고 평생 배고프고 추운 걸 몰랐을 사람이 불평 한 번 않는 게 놀랍다 못해 신기했다. 모르긴 몰라도, 꽤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아무리 말단 관직에 서출이라 해도 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으스대고 명령을 내리는데 이 귀한 집 자제분은 명령도 강요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하다 뿐이지 정갈한 말투와 행동거지가 옛 성현들이 그리는 선비의 모습 그대로라 루이스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굳센 입술이며 침착하지만 강한 눈매, 짙은 눈썹.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루이스는 이 년 전 헤어진 친구를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험한 산을 타며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몇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며 떠돌았다. 자신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 익힌 것들은 루이스가 이런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고 산을 헤매던 그때의 기억은 추억이 되었다. 그때도 둘이 감자를 캐 나눠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소금도 물도 없이 참 잘도 먹었단 생각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더러 가끔씩 외로워질 때면 그냥 그녀를 따라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루이스는 늙은 주인어른을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남기로 한 걸 후회하진 않지만 가끔 그 아가씨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긴 했다. 귀한 가문의 따님이니 아마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루이스는 추억이 된 기억을 회상하며 외투의 끈을 풀었다.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 상황이 나았다. 지금은 적이 나타나도 어느 정도까진 대처할 수 있고, 식량도 있는 데다 야영 경험도 있고 추적이 붙은 것도 아니니 전보다는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루이스가 외투를 이불 대신 덮고 누우려는데, 티엔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짙은 안개가 걷힌 밤하늘엔 크고 둥근 달이 은은하게 빛나고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뜨거운 돌이 든 주머니의 온기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뱉었다. 뿌연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밤하늘의 광경에 넋을 잃고, 경치에 취한다. 티엔은 먼 산골로 유배 간 이들이 자연을 노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달을 벗 삼아 술 한 잔에 시를 읊는 것이야말로 유유자적하는 삶이 아닌가.
티엔은 그런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다 이내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적어도 티엔에겐 허락되지 않은 삶이었다. 훌훌 털고 떠나버리기엔 제 어깨에 짊어져야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 모두를 떨쳐버리기란 쉽지도 않을 뿐더러 티엔은 제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을 버려가며 얻은 자유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쾌해진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스가 깔아둔 모포에 누웠다.
딱딱하고 냉기가 올라오는 잠자리가 불편해 이리저리 뒤척이던 티엔은 몸을 모로 뉘었다가 다시 바로 누웠다. 주머니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전부 막아주진 못했고, 군데군데 돌이 박힌 돌 때문에 어떻게 누워도 등이며 다리가 욱신거렸다. 티엔이 자리를 못 잡고 몇 번 쯤 자세를 바꾸자 루이스가 일어나 티엔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티엔이 고개를 들자 루이스는 덮고 있던 외투를 티엔에게 건넸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민 두꺼운 외투를 받자 루이스는 다시 모포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티엔이 외투를 돌려주려 했지만 루이스는 티엔에게 등을 돌리며 난 익숙하니 괜찮다고 말하곤 길게 하품했다.
“흐아암. 그냥 아래 한 겹이라도 더 깔아요. 돌이 식으면 더 추울 거예요. 해가 뜨면 또 쉴 새 없이 걸어야 하니까 뒤척이지 말고 자둬요.”
티엔은 한사코 돌려주려고 외투를 넓게 펼쳐 루이스의 모포 위에 덮으려 했다. 루이스의 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테지만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단호함에 손을 거뒀다. 티엔은 루이스에게 외투를 돌려주는 대신 덮고 있던 제 외투를 아래 깔고 발끝부터 배를 덮는 게 고작인 루이스의 외투를 몸 위에 덮었다.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루이스의 외투와 달리 티엔의 외투는 늑대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라 값은 물론 보온성도 비교할 수 없었지만 열을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과 하나를 가진 자가 하나를 내놓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루이스의 친절을 바닥에 깔 수 없었다.
다시 자리를 잡고 누우니 아까보단 한결 나았다. 루이스의 외투 위에 모포를 한 겹 덮긴 했지만, 그래도 어깨며 가슴이 휑해 외투를 끌어올리자 이번엔 발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그와 자신의 키차이가 있다 보니 몸을 다 덮기엔 외투가 짧았다. 발과 가슴 사이에서 고민하던 티엔은 그대로 외투의 모자 부분으로 목을 감쌌다. 외투를 덮지 않아도 모포로 덮으면 바람은 피할 테고, 두꺼운 가죽신발에 안에는 부드러운 털을 덧댔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고 가만히 숨을 쉬고 있으면 작은 소리들이 귀를 간질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 바람에 나무의 잔가지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작은 숨소리. 티엔은 그 소리를 듣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하루종일 걷다보니 지치기도 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하늘 가득 펼쳐진 별이 저마다 반짝이는 그 절경에 티엔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황궁에선 도무지 볼 수 없는 찬란하고도 순수한, 때묻지 않은 별빛. 궁에선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 없었는데. 티엔은 그 별빛에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르지 않은 흙의 축축한 냄새, 나무와 풀이 내는 성긴 겨울의 냄새. 숨을 뱉을 때마다 뿌옇게 흐려지는 하얀 입김. 티엔은 변하지 않는 하늘을 보며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티엔의 호흡이 겹쳐지고, 천천히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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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2.
2015/03/06
티엔이 멀건 죽으로 허기를 달래는 동안 루이스는 바삐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고 거친 외투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짐을 꾸리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다. 티엔은 루이스가 한쪽 벽에 걸어놓은 제 외투와 갑옷, 검을 확인하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져 계곡을 떠내려온 것치고 티엔의 몸은 멀끔했다. 어딜 크게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긁힌 상처 하나도 없는데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몸이 개운하고 상쾌했다.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낡았지만 깨끗한 면옷을 집어들었다. 짐을 꾸리던 루이스가 지나가며 입고 있던 비단옷은 아직 덜 말랐으니 귀한 옷이면 들고 가라고 말했지만 티엔은 고개를 저었다. 옷 한 벌에 연연할 것도 아니거니와 티엔은 애초에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린 것은 평민의 옷이라서가 아니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데다 날렵한 루이스의 몸에 이런 옷이 맞을 리 없으니 분명 루이스를 거둔 이의 것일 텐데,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의 옷을 받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일단 성의를 생각해 입었지만 그래도 소매가 짧았다. 어쩔 수 없는 지라 훤히 드러난 손목을 매만지던 티엔은 조용히 혼자 갑옷을 입었다. 출병할 때보다 더 결연한 의지로 매듭을 묶고, 외투를 걸치고 검까지 차고 방을 나오니 다 짊어질 수 있을지 의뭉스러울 정도의 짐이 나와있었다. 군장을 비롯한 모든 짐싸기는 간결하고 정말 필요한 것만 챙기는 게 기본이거늘. 티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다. 길을 떠나기 전부터 괜히 동행의 심기를 어그러뜨릴 필요도 없거니와, 지금 티엔은 머리를 숙여서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종이로 싼 뭉치들이 서너개, 두꺼운 모포가 둘, 그리고 낡은 천으로 둘둘만 뭉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모자가 달린 긴 외투를 덧입은 루이스는 바닥에 꿇어앉아 능숙하게 늘어놓은 짐들을 한 데 모았다. 두꺼운 모포를 착착 접는 것부터 시작한 짐싸기는 금새 하나의 뭉치가 되어 등에 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요령좋게 어깨끈까지 만든 루이스가 짐을 지고 힘을 주며 일어났다. 그런 루이스를 멀뚱히 바라보던 티엔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짓에 의미를 모르고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온 게 없으니 챙길 것도 없었다.
작은 집을 나서니 바깥은 온통 울창한 나무들이 빼곡해 햇빛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내리쬈다. 아직 입춘이 되지 않은 데다 북쪽 땅인데도 싹을 틔운 것이 신기해 나무들을 둘러보며 걸었다. 비가 왔는지 땅이 축축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 했기에 티엔은 루이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람이 다닌 티가 나는 좁은 길은 루이스가 다니며 만든 길이리라. 나무와 하늘을 둘러보던 티엔은 곧 흥미를 잃고 루이스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등이 다 가리도록 진 짐의 가장 위, 천으로 감쌌지만 감출 수 없는 형태의 물건에 티엔은 한 손으로 나무를 짚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루이스가 잠시 멈춰서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뱉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라 같이 멈춰서니 루이스가 멀쩡한 길을 두고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고, 티엔은 그저 인적이 드문 길로 가겠거니 하며 뒤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 지나자 정말 이 길이 맞나 싶었다. 분명 남쪽으로 가면 내리막길일 텐데 오르막이 계속되고 길도 없는 나무 사이를 헤쳐가려니 힘은 힘대로 드는데, 점점 숲도 우거지는 게 수상해 티엔은 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 거지?”
“청 주둔지로 가야죠. 그나마 14군이 제일 믿음직하니 거기로 갈 거예요.”
루이스는 앞서 걸으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청의 주둔지, 거기에 14군이라는 소릴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냥 막역하게 청의 영역까지가 아니라 딱 짚어 말하는 게 미심쩍었다.
“왜 하필 14군이지? 황자들, 아니 황자님들이 계신 곳도 있지 않나?”
티엔의 날카로운 질문에 루이스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감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것 같았지만 루이스는 타박 대신 설명을 했다.
“아무리 청의 사람이라도 그렇게 좋은 검과 갑옷은 구하기 힘들죠. 그렇다면 꽤 명망높은 귀족이란 뜻인데, 황자들은 자신의 세력에 따라 당신을 박대할 수도 있고 몰래 제거할 수도 있죠.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도와줄 사람은 곰 장군밖에 없어요.”
간단하지만 타당한 논리에 티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제 옷차림만 가지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니, 이런 곳에서 썩히긴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루이스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등을 가릴 정도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루이스와 짐이라곤 봇짐 하나도 들지 않은 티엔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매일 무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데다, 어마마마나 황제폐하, 황후마마께 문안을 여쭙느라 꽤 걷는 편인데도 쉬지도 않고 험한 산길을 가다보니 절로 숨이 찼다.
“서둘러요, 해가 지면 더 갈 수 없으니까.”
결국 티엔은 조금씩 뒤쳐졌고, 앞서 걷던 루이스가 뒤쳐진 티엔을 기다리느라 멈춰서고 다시 길을 가는 게 반복됐다. 가끔 루이스는 갔던 길을 되돌아와 같이 걸으며 아직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으니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했지만 티엔은 오히려 그 말에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힘들 일 하나 없는 황궁에서보다, 오늘 깨어났을 때 평소보다 몸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더더욱. 남자로서 저보다 어리고 왜소한 이에게 체력으로 밀린다는 건 퍽 자존심 상하는 거라 티엔은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떨어지기 전에야 나온 평지에 티엔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오르막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고, 하늘이 붉게 물들자 바삐 걷던 루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왔고 지금 제가 어디쯤 왔는지 모르는 티엔은 루이스가 더 걸을 생각을 않자 안심하는 한편, 빨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숨을 골랐다.
두리번거리던 루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루이스를 따라 들어간 티엔은 루이스가 너른 돌 아래 짐을 내려놓는 걸 보곤 팔짱을 꼈다. 온종일 산을 타다 겨우 평지를 만난데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야영을 준비하는 게 영 못마땅했다.
“얼마나 온 거지? 어제가 보름이었으니 달빛을 따라 더 가도 되지 않나?”
“달이 밝아서 안 돼요.”
루이스의 단호한 말에 티엔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한밤중에 험한 길을 가는 게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티엔은 마음이 급했다. 안전하게 가는 게 엿새, 루이스가 말한 게 사나흘, 밤낮없이 걸으면 하루 하고 한나절. 대체 어떤 길로 어떻게 가기에 해가 지면 꼼짝도 않고 사나흘이라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으니 더 답답했다. 한나절을 걷는 동안 말 한 마디 않고 따라왔지만 정말 믿어도 되는지 아직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이스가 가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길안내를 하게 할 수도 없었다. 자칫 제게 앙심을 품고 안격의 소굴로 가서 팔아넘긴다거나, 혼자 헤매게 두고 갈 수도 있다. 티엔은 지금 제 처지를 알기에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정말 그렇게 여기는 것은 다르다. 티엔은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가능성을 재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저울질했다.
루이스는 티엔이 가만히 서있는 데도 개의치 않고 주위에서 나뭇가지며 마른 나뭇잎을 모아다 불을 붙였다. 나무가 타는 냄새에 티엔은 복잡한 심경에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 붉은 눈동자에 맞서 불쾌함을 표하자 루이스는 짐 보따리를 뒤적이더니 다짜고짜 티엔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날아드는 물체에 놀란 티엔은 냉큼 그것을 잡아챘다.
묵직한 주머니를 흔들자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물이나 술인 것 같은데, 이걸 주는 의미를 몰라 루이스를 쳐다봤지만 루이스는 이미 불이 오른 장작더미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티엔은 주머니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다 주머니의 매듭을 풀고 안에 든 나무통의 마개를 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게 술은 아닌 것 같은데 물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망설이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그냥 물이에요.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마실 테니 주세요.”
“…….”
생각을 읽혀 민망해진 티엔은 물을 들이켰다. 깨어나 먹은 죽 이후로 처음 입에 대는 물은 유독 시원하고 상쾌해 그만 마셔야지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갈증을 해결한 티엔은 물통에서 입을 떼고 입가에 흐른 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마개를 닫아 다시 루이스에게 던지자 티엔을 보고 있지도 않던 루이스가 한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고, 바람소리와 마른 장작이 타며 틱틱 불티가 튀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티엔은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온 길을 보았다.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며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과, 그 아래 드리운 겨울산의 풍경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 문득 황도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을 살고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그리던 그녀를 떠올린 티엔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로 제가 행방불명된 지 꼬박 이틀. 내일이면 사흘이 되니 황도에 연락이 갈 것이다. 말은 안 해도 제가 아버지처럼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리진 않을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었다. 명절이면 다른 황숙들이 황제께 문안을 여쭙고 복진과 함께 연회에 참석할 때도 티엔의 어머니, 1황자 적복진은 홀로 그 모진 풍파를 견뎠다.
그렇기에 티엔은 어머니를 위해서 더 완벽한 아들이 되고자 했고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치고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해 침묵했다. 어릴 적 왜 제겐 아버지가 안 계시느냐 여쭈었을 때 어머니의 그 슬픈 미소는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티엔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패륵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있지만, 하나뿐인 아들로서 어머니께 심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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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1.
2015/02/28
第 二 章. 高山流水
티엔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람들을 쫓아 말을 달렸다. 점점 더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땅이 단단해지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말을 채찍질했다. 길이 있다면 찾으면 그만. 하나라도 생포해 신출귀몰하는 경로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곳곳에 숨은 안격을 소탕할 수 있을 터였다. 따라오던 병사와 장수는 티엔의 말을 쫓지 못해 뒤쳐졌지만 티엔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추격을 포기하지 않자 앞서가던 다섯 중 둘이 고삐를 돌려 방향을 틀었다. 티엔은 그들을 쫓는 대신 세 사람을 쫓았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협곡으로 들어갈 테고, 그럼 피차 길을 모르니 승산이 있었다. 달리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끝. 티엔은 거의 잡았단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들을 쫓았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말을 멈춰 세운 이들은 물러날 곳이 없는 절벽에 다다라 티엔을 마주했다.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죽겠다.”
눈치를 보기 바쁜 셋은 그래도 쪽수로 어찌 해보려는 듯 했지만 티엔의 당당한 태도에 섣불리 나서질 못했다. 척 봐도 귀공자스러운 데다, 여유롭기까지 하니 셋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인지 아니면 그저 허세를 부릴 뿐인 애송이 도련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눈치를 보는 사이, 셋을 두고 다른 길로 빠졌던 두 사람이 티엔의 뒤에서 동료들에게 눈짓했다. 부싯돌과 폭약을 본 그들은 여유롭게 비죽이며 티엔에게 말을 걸었다.
“하, 귀한 도련님께선 검을 께나 배우신 모양인데. 그래도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까?”
“여긴 말이오, 굶주린 용이 아가리를 벌리고 사람을 잡아먹는 곳이거든.”
“네놈들의 묘자리를 쓰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따라와라.”
폭약에 불이 붙은 걸 본 셋은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폭탄을 던지면, 바로 말을 달려 도망간다.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고, 물이 있다 해도 그 전에 어디라도 부딪혔다간 꼼짝없이 저승길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신호를 기다렸다.
수상쩍은 행동을 눈치 챈 티엔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불이 붙은 폭약이 날아들고, 벼랑 끝에서 눈치를 보던 안격들이 티엔을 지나쳐갔다. 그들이 갑자기 달려들자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울고, 티엔은 손 쓸 수도 없이 굉음을 내며 터지는 폭탄에게서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터진 열기와 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는데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바뀌었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감각에 눈을 번쩍 뜨자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말과 무너져 내지는 바위, 그리고 푸른 하늘가 들어와 티엔은 고삐를 단단히 쥐고 안장에서 발을 뺐다. 점점 추락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티엔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곡물의 겉이 얼어있지 않기만을 빌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을 잃지 말자고 속으로 빠르게 되뇌었으나 몸을 덮치는 강한 충격에 티엔의 정신은 아득한 어둠 저 편으로 멀어졌다.
멀어져가는 빛무리.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짙은 어둠 속에선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숨이 막히고, 이내 발버둥조차 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힘이 빠지자 할 수 있는 거라곤 저 멀리 아득하게 빛나는 빛무리에 손을 뻗는 것 뿐이었다. 손에 잡힐 것처럼 보이는 빛은 얼핏 푸른 용의 형상이 되었다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일순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빛무리가 사라지자 남은 건 칠흑같은 어둠 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 홀로, 얼마인지 모를 시간동안 티엔은 모든 것을 잊은 채 평안한 고요에 잠겨 있었다. 차갑지만 부드럽게 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의식을 깨우고 티엔은 그제야 제 의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온몸이 물 먹은 솜마냥 무거웠지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낯설고 투박한 흙벽이 보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티엔은 숨을 죽였다. 제게 손이 뻗어오는 게 느껴지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손목을 잡아챈 티엔은 그를 끌어당기는 반동을 이용해 일어났다. 순식간에 역전된 위치. 양손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올라탄 후에야 티엔은 제가 제압한 사람을 바로 봤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깜박. 그 모습이 어릴 때 후원에서 잡은 토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 찰나, 허리를 때리는 둔탁한 통증에 티엔은 눈살을 찌푸리며 움켜쥔 손목을 더 세게 잡았다.
“악! 이거 놔요!”
발버둥 치며 몸을 비틀더니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티엔은 한 덩어리가 되어 침상에서 떨어졌다. 떨어지며 부딪힌 충격에 손을 놓친 사이 다시 위치가 역전되고, 티엔은 목덜미를 콱 잡아오는 손에 쿨럭였다. 토끼같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은 당장이라도 먹잇감을 물어뜯을 것 같은 맹수의 눈이 되어 티엔을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 움찔한 티엔은 반격하려 손을 뻗었지만 어깨에서 찌르르 퍼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티엔은 뭐가 잡히는 게 없을까 하고 바닥을 더듬거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저항을 멈췄다. 안격에게 잡혀 포로가 된 것이라면 이렇게 저를 지키는 감시인 따위와 몸싸움을 하며 힘을 뺄 필요가 없다. 티엔이 저항하지 않자 제 위에 올라탄 이 역시 손을 거뒀다.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단단히 목을 틀어쥐던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한숨을 쉬며 일어나 손을 뻗는데, 티엔은 그 의미를 몰라 멀뚱거리다 침상을 짚고 일어났다.
“하아…. 정말이지…….”
“여긴 어디지?”
“다짜고짜 사람을 공격해놓고 하는 말이 겨우 그겁니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티엔은 제 질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는 낯선 이를 향해 물었다. 뚱한 얼굴에 팔짱을 끼고 티엔의 무표정을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차분히 티엔을 훑었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에 티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에 작은 한숨소리가 더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뜬 낯선 이는 다시 티엔을 바라봤다.
“당신, 계곡에 쓰러져있었어요. 여긴 내 집이고, 청의 주둔지까진 한참이죠. 이 정도면 대답이 됐습니까?”
티엔은 그 소리를 듣고 표정을 굳혔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 건 둘째치고,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애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거니와 음흉한 숙부들이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우위를 점령했단 생각에 방심하고 만 제 안일함과 경솔함이었다. 장차 한 나라를 짊어질 사람이란 자가 이리 쉽게 함정에 휘말려서야 황제 폐하는 물론 백성들을 볼 낯이 없다.
티엔은 인상을 쓰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회와 반성은 모든 일이 해결 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당장은 다소의 굴욕을 당하더라도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 티엔은 조금 전에 들은 말을 곱씹었다. 계곡에서 발견됐고 주둔지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면 계곡물을 타고 흘러온 것일 텐데, 그렇다면 이곳은 협곡의 안이라는 소리였다.
전부터 협곡을 타고 내려가 급습하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던 티엔은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잘 빠져나가면 협곡의 길을 아는 게 전화위복이 될 지도 모른다. 티엔은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하다 퍼뜩 머릿속을 스친 위화감에 눈을 떠 낯선 이를 쏘아봤다.
“넌 협곡 안에 혼자서 뭘 하는 거지? 분명 마을은 안격에 의해 몰살당했을 텐데.”
티엔의 싸늘한 말에 화롯가에 쭈그려 앉아 불을 지피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계곡에서 사람을 건져 데려왔다고 무조건 은인이라 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런 험한 곳에 혼자 사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웠다. 티엔은 정보를 곱씹는 것보다 눈앞의 사람이 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게 우선이었음을 되새기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집주인은 무기로 쓸 만한 게 뭐가 있을지 훑으며 퇴로를 살피는 티엔이 무색할 정도로 무심했다.
우드득 소리가 나도록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화로를 뒤적이다,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양손을 들어 보이는 것은 해칠 의사가 없다는 뜻이지만 티엔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 빼지 않아도 돼요. 마을이 그렇게 되기 전부터 나는 고아였고, 죽 여기에 살았으니까. 청의 귀족이시니 각 변경에 왕실의 기록보관소가 있다는 건 아시겠죠. 여긴 그 관리인 처솝니다. 전 관리인이었던 윌리암 헌트 대인이 세상을 뜬 뒤론 아무도 찾지 않지만.”
담담하지만 회한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티엔은 이게 거짓이 아닌 진실임을 눈치 챘다. 권모술수와 암투가 판을 치는 황도에선 이렇게 진심을 숨기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말하는 게 드물거니와, 제게는 차갑기만 하던 눈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부드럽게 휘며 이곳에 없는 누군가의 모습을 그렸다. 티엔은 그제야 조금 경계를 풀고 아직 은인과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름은?”
“빨리도 묻는군요.”
대답 대신 미소를 띠운 그는 여자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선이 고운데다, 젖살이 빠지지도 않은 앳된 얼굴이라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저 머리를 자르거나 틀어 올려 상투를 틀지 않았으니 열일곱은 안 됐겠거니 지레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티엔은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은인은 티엔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불이 피어오르는 걸 가만 지켜보기만 했다. 순하게 생겨선, 아무래도 처음 공격한 일을 마음에 담아뒀거나 고집이 센 성격인 모양이라 티엔은 한 수 접기로 했다.
“내 기억해두겠다. 돌아가면 확실히 보은하지. 하지만 그러려면 이름이라도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뭐, 그도 그렇네요.”
티엔은 고귀한 황손이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부리면 부렸지 남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그것도 고아에 불과한 평민의 비위를 맞추려니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온 말은 티엔이 생각한 것보다 무뚝뚝하고 시큰둥했다. 티엔으로선 어렵게 한 말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 시큰둥하고 쌀쌀맞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티엔이 눈치를 살피자 은인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웃었다. 고개를 들어 티엔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토끼의 것이 아니라 맹수의 것에 가까웠지만 티엔은 피하지 않았다.
“루이스. 성은 없습니다.”
“……티엔. 티엔 정이다.”
루이스라는 이름은 그에게 퍽 잘 어울렸다. 한겨울의 눈처럼 시원하고 청량한 어감이 혀끝에 맴도는 게, 박하사탕을 머금은 것 같기도 했다. 이름을 말하곤 제 내면을 꿰뚫어보듯 바라보는 눈빛에 티엔은 그만 신분을 숨겨야한다는 것도 잊고 본명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열다섯에 패륵의 지위를 하사받은 뒤로는 친어머니조차 불러주지 않게 된 이름이었다. 어째 자꾸 실수만 연발하는 것 같아 목이 탔다. 어차피 정씨가 하나인 것도 아니고 이런 변경의 사람이 황족에 대해 뭘 알겠냐마는, 티엔은 말해놓고 혹시라도 루이스가 제 정체를 알아챌까 긴장하며 입을 다물었다.
“자, 당신의 갑옷과 검은 저기 걸어뒀으니 몸이 낫거든 가세요. 청의 주둔지까진 걸어서 엿새면 될 겁니다.”
“잠깐.”
방을 나서려던 루이스가 티엔의 말에 돌아봤다. 엿새라니, 티엔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협곡이 험난하다고 길다 해도 육일씩이나 걸릴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흘씩이나 걸린다니, 대체 얼마나 떠내려 왔단 말인가. 티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루이스는 작게 숨을 내쉬곤 말했다.
“물론 협곡을 따라 밤낮을 쉼 없이 걸으면 하루하고 한나절이면 갈 수 있죠. 하지만 그건 여기가 안전할 때의 얘기고, 지금 이곳은 안격이 둥지를 튼 후예요. 당신과 그들, 누가 더 유리할지는 손바닥을 뒤집듯 뻔하죠. 안전한 길을 일러줄 테니 동이 트거든 걷기 시작해서 해가 지면 숨어요.”
티엔은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하나로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루이스는 대번에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티엔은 그럴수록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결국 인상을 쓰며 루이스가 티엔을 바라보자 티엔은 용건을 말했다.
“네가 필요하다.”
갑작스런 말에 놀란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티엔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절실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그 눈빛에 루이스의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티엔을 노려봤다.
“난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줄 수 있는 돈도 명예도 다 내겐 부질없으니 길잡이로 고용하려는 생각일랑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너 역시 청의 백성이 아닌가?”
“나라는 내게 베푼 게 없는데, 내가 져야 할 의무가 있나요? 만약 있다 해도 당신은 내게 명령할 수 없어요.”
냉소적인 말에 티엔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데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할 수 없거니와 루이스의 말엔 감정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티엔은 일순 드러낸 감정을 언제 그랬냐는 듯 감추고 태연을 가장하는 루이스를 보곤 손목을 놓았다. 루이스는 차갑게 식은 무표정으로 손목을 매만졌고, 티엔은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패륵께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은 전부 저희가 지게 됩니다. 그것만 기억해주세요.’ 떠나기 전, 브루스의 심복인 마틴 챌피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저 하나를 찾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책임을 덮어쓸 걸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 티엔에겐 회복을 기다릴 시간도 숲을 헤맬 시간도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정패륵을 찾기 위해 협곡을 헤매고, 또 누군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말싸움을 하고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게 분명했다. 티엔은 자신의 실책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하루라도, 한 시라도 더 빨리 돌아가 그들의 근심을 더는 것. 그것이 가장 급했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 책임은 전부 애꿎은 사람이 지게 돼. 무고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을 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피해야해. 그러니…, 부탁한다.”
티엔은 손마디가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움켜쥐며 루이스의 등에 대고 말했다. 더 상대하지 않으려는 듯 방을 나서던 루이스는 티엔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그러고 있기를 얼마. 루이스가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손목을 매만지던 루이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방 안을 느릿하게 걸어 다니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일말의 망설임을 품고 티엔의 의중을 읽으려는 듯 했다. 티엔은 제가 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속임수도 없었기에 떳떳하게 루이스를 마주했다. 침묵이 이어지고 루이스의 공허한 걸음이 늘었지만 티엔은 인내심을 갖고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요. 완전히 계곡을 따라 최단경로로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걸으면 사나흘 정도 걸릴 거예요.”
티엔은 루이스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하루를 꼬박 잤으니 배가 고플 거라며 죽을 가져오겠다고 방을 나갔다. 과연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티엔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하늘이 돕기를 바라며 하루 빨리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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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ts루이] 一期一會 00.
2015/02/25
* 청조를 기반으로 한 동양 판타지 주의.
맑게 갠 하늘 아래, 훤칠한 금발에 주근깨가 인상적인 미남 하나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관도 아닌 그가 용이 잠들어있다는 협곡, 서북의 변경에 장군 하나만 믿고 따라온 지도 어언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아….”
“마틴,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맑게 갠 하늘 아래, 우중충한 먹구름이 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던 금발의 미남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다가와 축 쳐진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은 14주둔지의 장군 브루스 보이틀러는 일어나려는 그를 앉히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겨우내 부쩍 자란 청년은 이제 한 달 후면 열일곱이 되지만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진 못했고, 감정을 숨기거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몰랐다. 워낙 어릴 때부터 봐와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브루스는 다른 수행원들이나 부하들보다 마틴을 아꼈다. 한미한 집안 출신에, 믿을 구석이라곤 제 능력과 브루스밖에 없는 마틴은 이내 다른 장수들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놀림 받기 일쑤였기에 브루스는 또 그런 일을 당했겠거니 했다.
아무 말 없이 마틴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을 못 맞추고 땅만 보던 마틴은 잔뜩 풀이 죽어 투덜거렸다.
“이번엔 황손 마마님이 오신다면서요. 능력도 인품도 뭣도 없는 2황자도 저렇게 뻐기는데 거기에 하나 더라니, 이번엔….”
“마틴!”
브루스는 당장이라도 황족모욕죄로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마틴의 말을 멈췄다. 그제야 마틴은 아차 싶었던지 브루스의 눈치를 보며 주위를 살폈다.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마틴 혼자의 책임이 아니라, 브루스까지도 사단이 날 터였다. 브루스도 주위를 잠시 살피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마틴의 양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마틴. 그분들을 모시는 것은 우리의 영광이다. 내 앞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도 절대 그런 불경한 말을 해선 안 돼. 알겠느냐?”
마틴은 대답 대신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브루스가 물러서지 않고 마틴을 바라보자,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장 어제만 해도 엘리어트가 대낮부터 술에 취한 2황자의 말도 안 되는 시비에 꼬박 반나절을 추운 날씨에 무릎 꿇고 있던 걸 생각하면 울분이 치솟는 데다, 브루스의 공을 가로채는 건 물론 다른 장군들과의 회의에 자꾸만 신분을 들먹이며 어깃장을 놓는 것까지 생각하면 또 다른 황족이 오는 게 반갑지가 않았다.
서북의 변경, 청의 14 주둔지. 숭고한 그랑플람의 의지를 받드는 브루스 보이틀러의 주둔지를 사람들은 곰의 아성이라고 불렀다. 살갗이 살짝 긁히기만 해도 호들갑을 떠는 귀하디귀한 황족님네들이 다른 곳도 아닌 이곳으로 온다는 것은 곧 죽기는 싫지만 공은 세우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순 가로채기로. 마틴은 그럴 때마다 아무 말도 않고 허허 웃고 마는 브루스가 답답했지만 마틴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무력하고 한심해 어깨를 늘어뜨리자 브루스는 아들을 달래는 아버지처럼 마틴의 등을 두드렸다.
“마틴. 정패륵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2황자님과는 분명 같은 황족이시지만, 너도 그분께 배울 게 많을 게다.”
자상한 브루스의 말에 마틴은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브루스는 황제를 오랜 시간 가까이서 모신 신하 중 하나였고, 마틴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를 위해 일한 노장이자 존경받는 장군이었다. 그런 사람이니 황제도 선뜻 변방의 중심을 맡기고 아들과 손자를 보내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마틴은 납득할 수 없었다.
브루스는 황실의 일은 복잡하기가 이를 데 없으며, 황제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니 맡은 바 임무를 다하라고만 했지만 마틴은 이제 더이상 브루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소년이 아니었다.
1황자는 황후 소생이지만 서북을 돌아본다는 말과 함께 방랑을 떠나 황도로 돌아오지 않은지 벌써 십년이 넘었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2황자가 태자가 될 법 하건만 황제는 아직까지 태자를 세우지 않고 있었다. 일찌감치 친왕으로 봉해 다른 지역을 통치하게 한 다른 황자들이나 너무 어려 유모 치마폭에 싸여 있는 황자들과 달리 곁에 두고 있는 황자들은 황제의 의중을 살피며 어떻게 하나라도 공을 세워볼까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이었다. 서북 땅에 안격이라는 무리가 국경을 넘보며 대치하기를 수십 년, 그들이 빼앗아간 땅을 되찾으면 그것이 곧 황위를 넘볼 기회가 되니 너나할 거 없이 오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용맹하게 전방에 서기라도 하면 모를까, 고작 곰의 등 뒤에 숨어 뭐라도 떨어지는 게 없을까 전전긍긍하는 용의 후손들이라니. 마틴은 대놓고 브루스에게 공을 세워야 하니 어서 출전 준비를 하라 다그치던 2황자와 그의 동생인 6황자를 떠올리고는 인상을 썼다. 이래서야 황족에게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타고난 것이라곤 혈통밖에 없는 2황자나 간신배의 전형인 6황자도 황실의 자손이라는 것 하나로 얼마나 뻐기는데, 이제 올 정패륵은 또 어떨 런지. 정패륵은 아직 열아홉밖에 안 됐지만 1황자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태어나기 전부터 용의 기상을 타고나 성군이 되리라는 예언까지 받아 문무를 겸비한 자라던데, 과연 소문과 다를 런지 어떨 런지.
마틴은 브루스를 찾아온 병사가 패륵께서 오고 계시다는 말을 전하자 브루스의 뒤를 따랐다. 저 멀리 보이는 행렬과 함께 푸른 용이 그려진 깃발이 제일 먼저 눈에 띠었고, 마틴은 브루스를 따라 걸음을 빨리했다
마틴은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곤 브루스의 뒤에 섰다. 말이 달리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그 다음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의 청년이 눈에 띠었다. 그를 본 브루스가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자 대열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찬바람에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와 말발굽소리가 병영을 감돌고, 이내 말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온 청년이 주위를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모두 일어나라.”
“신, 브루스 보이틀러. 정패륵을 뵈옵니다.”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일단 내 병사들에게 막사를 칠 곳부터 일러줬으면 좋겠군. 꼬박 열흘을 달려왔으니 피곤할 게요.”
간단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낮은 목소리. 정패륵은 마틴이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달랐다. 이게 진짜 황족이구나 싶을 정도로, 황족 특유의 검은 머리칼을 빼면 특별한 것도 없는 2황자와 달리 걸음걸이나 말투, 태도에서 정갈한 위엄과 기품이 느껴지는 것도 모자라 도착하자마자 아랫사람을 챙기는 모습에 마틴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마틴은 미리 브루스가 비워둔 자리를 일러주곤 냉큼 브루스의 막사로 따라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상황과 세력분포를 묻고는 브루스의 말을 경청하는 정패륵의 모습에 마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성군이 될 자질을 타고났다더니, 소문은 틀린 게 없었다. 오히려 소문보다 믿음직한 실물이 앞에 있으니 못난 황자들에게 시달리던 마틴은 감회가 남달라 조용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패륵은 한 손을 턱에 대고 브루스의 말을 듣느라 마틴이 온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지만 브루스의 얘기를 무시하는 것보단 나았다.
“큼, 큼.”
“아, 일어나라. 지도를 볼 수 있겠소, 장군?”
“물론입니다. 마틴.”
브루스가 적당히 말을 끊어준 덕에 마틴은 겨우 일어나 인사말을 덧붙이고 말아두었던 지도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책상을 가득 메운 지도는 청의 영토는 물론이고 끊임없는 접전지역과 안격의 땅, 그리고 남북으로 곧게 뻗은 협곡까지 자세히 그린 마틴의 역작이었다. 수십개의 지도를 참고해 오차를 줄인 것 뿐이지만 브루스는 가장 정확하진 않아도 가장 적합한 지도라며 마틴의 지도를 썼다. 마틴은 내심 기대하며 지도의 요지를 짚어가며 지형과 상황을 설명했다.
“이 협곡은?”
“협곡은 저희도 안격도 들어가지 않는 영역입니다. 이곳에 오래 살던 주민이 말하길, 용의 협곡은 너무 험하고 절벽이 많은데다 땅이 척박해서 도적도 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희도 정찰병을 몇 보냈었는데 협곡을 거슬러 오른 용의 새끼만이 용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대로였습니다.”
“최정예의 병사를 이동시킬 수 있다면, 적의 중심부까지 잠입할 수 있겠군.”
정패륵은 길게 뻗은 숲과 절벽 그림을 긴 손가락으로 짚고 죽 올렸다. 잘생긴 그의 무표정 속에서 마틴은 용의 협곡을 통과하려는 생각을 읽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큽니다. 협곡을 타고 올라올 것을 염려한 안격놈들이 일대의 백성들을 몰살시켜서 길잡이조차 없습니다. 그곳에 들어갔다가 다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패륵께서 다시 생각하셔야.”
“그렇습니다. 아무리 빠르다할 지라도 너무 위험합니다. 패륵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저는 물론이요, 14군 전체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브루스의 만류에 패륵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다시 한 손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턱을 매만지며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마틴은 고개를 숙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황자나 6황자였다면 명령에 불복종한다며 노발대발하고 억지를 부렸을 텐데. 아니, 그들은 위험을 직접 무릅쓰려하지도 않는다. 여러모로 보나 정패륵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사내였고, 패륵이라는 지위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흐음….”
“이제 막 오셨을 뿐이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신을 비롯한 모두가 도울 것이옵니다. 그러니 우선은 피로를 푸시지요. 평소 드시던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식사를 준비해놓았습니다.”
정패륵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브루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가 막사를 안내해드리겠다며 함께 나가고, 마틴은 펼쳐둔 지도를 다시 말았다. 마지막까지 그의 시선이 머문 용의 협곡. 마틴도 조금 전 정패륵이 그랬던 것처럼 협곡이란 글자를 보며 그 가파른 절벽과 바위 틈을 오르는 상상을 하다가 지도를 말아버렸다. 어차피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하아….”
마틴은 한숨을 내쉬며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패륵이 와서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 생각했건만, 누가 잘나신 황족님 아니랄까봐 브루스의 만류에도 협곡을 가야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마틴과 브루스만 매번 같은 얘기를 하느라 혀에 가시가 돋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정패륵 앞에서만 그래도 황숙이라고 갖은 위엄과 잘난 척을 일삼는 2황자와 6황자였다. 브루스가 그토록 2황자와 6황자의 귀에 정패륵이 협곡으로 출병하고 싶어 한다는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애썼지만 어찌 알았는지 그들은 웃는 얼굴로 친조카를 사지로 밀어 넣으려 했다.
협곡 근처를 돌아다니던 정찰병이 폐허가 된 마을에 안격의 무리가 돌아다닌다는 정보를 가져오자 2황자는 냉큼 정패륵에게 선봉에 설 것을 권했다. 마틴은 무릎까지 꿇고 만류했지만 6황자에게 어딜 감히 끼어드냐며 쫓겨나고, 브루스의 막사 앞을 서성였다. 정패륵은 학식도 높고 무예도 뛰어나서 어디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게 재수없는 데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짜증나 죽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사람이 헛되이 개죽음당하는 건 마틴으로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가 말하는 대로 성공하면야 좋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 아니면 도였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
더구나 그는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먹어도 살 수 있는 게 귀하디귀한 황족님네가 아닌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위협이 되고 한량에 양아치일수록 안전한 황족. 황도에서 문무를 갈고 닦기만 해도 황제는 이미 그를 어여뻐할 텐데, 잃을 거 하나 없는 정패륵이 왜 이런 곳까지 와서 목숨을 거는 지 마틴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황량한 벌판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매서워 양팔로 몸을 감싸고 목을 움츠리니 말을 끌고 오던 엘리어트가 달려와 마틴에게 외투를 둘러주었다.
“어떻게 됐어?”
“나도 몰라. 쫓겨났어.”
“나, 참……. 이거 어떻게 될는지, 원….”
마틴은 앨리어트와 함께 한숨을 쉬었다. 때마침 나오는 2황자와 6황자의 얼굴이 밝았다. 저들끼리 웃으며 돌아가는 걸 본 마틴은 불길한 예감에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이마에 댄 브루스의 수심이 어린 얼굴과 지도를 보다 돌아가겠다며 걸음을 옮겨 저를 지나치는 정패륵. 마틴은 정패륵이 막사를 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브루스를 바라봤다.
“장군…!”
“늦었다. 마틴. 패륵께서 선봉에 서기로 했다. 우린 더 나설 수 없을 것 같구나….”
마틴은 브루스의 낮은 목소리에 아연실색했다. 정패륵이 성공하면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2황자의 공이요, 정패륵이 죽거나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 책임은 전부 그를 말리지 못한 브루스가 짊어져야한다는 소리였다. 마틴은 주먹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정패륵을 말릴 수도, 그렇다고 출병을 막을 힘도 없었다. 결국 마틴은 브루스와 함께 그를 보내야 했다.
정패륵 근처에 정예병 중에서도 무예가 뛰어난 자를 배치하고,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겼음에도 불안해 몇 번이나 확인하고 그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전장에 직접 나가지 않기에 더 걱정이 되는 건 물론이요, 더구나 정패륵은 이번이 첫 실전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곧게 편 등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제 목이 먼저 달아날 판이라 마틴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말에 오르면 더 이상 기회가 없었다.
“패륵. 부디 무리하지 마시고, 몸 건강히 돌아오십시오. 패륵께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은 전부 저희가 지게 됩니다. 그것만 기억해주세요.”
조심하라는 말은 몇 번이나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감히 하지 못한 말이었다. 황족에게 협박에 가까운 말투는 불손하다 못해 경을 칠 만한 것이었지만 티엔은 눈썹을 꿈틀하며 마틴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마틴은 제 역할을 다 한 셈이었기에 목례를 하고 물러났다. 이내 병사들이 말에 오르고, 그들의 떠나며 흙먼지가 뿌옇게 흐려졌다.
마틴은 그저 정패륵이 부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었지만, 그 바람은 해가 진 뒤 돌아온 병사가 전한 소식에 무참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정패륵이 안격의 잔당을 쫓다가, 협곡에 들어갔는데 그만 절벽이 갈라지며 다른 병사들과 함께 떨어져버렸다는 말은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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