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씩 목소리가 겹치기 마련이다. 서점과 은행 사이엔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법한 골목 하나가 전부였고, 한가한 시간엔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목소리를 내봤자 듣는 사람은 그와 자신 단 둘뿐일 때도 빈번했다.
그러니 말투가 닮아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루이스는 요즘 선배 목소리에 단호함이 느껴져서 덜컥덜컥한다는 토마스의 말을 떠올리고 왼쪽을 흘긋거렸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가 원인이었다. 서점보다야 은행 업무가 많으니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더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닮아가나? 루이스는 늘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와 말투다. 책과 종이를 대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많지만 그래도 기본은 장사.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미소는 기본이다. 물론 재화와 물건을 대여해주는 그에겐 필요 없는 덕목이겠지만.
루이스는 사이퍼의 역사가 기록된 책을 덮고 벽에 기대어 섰다. 영웅이 되기 이전엔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사는 게 소원이었고, 대공황으로 어려운 시기에 아무리 박봉일지언정 일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지금은 형편이 조금 폈다고 해도 뭐 하나 모자란 것 없이 살아온 그와는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능력자에게 물건을 빌려주던 다이무스가 루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이지만 눈이 마주쳤다. 너무 빤히 본 걸까. 민망함에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넓은 광장과, 카페에서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사람들. 늘 보는 풍경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무게가 느껴지는 구두소리가 다가왔다.
“무슨 용무라도 있나.”
“아, 아뇨. 아닙니다.”
설마 하니 잠깐 쳐다본 걸 가지고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다이무스의 무표정은 여전했다. 워낙에도 표정에 변화가 많지도 않고, 사사로운 일에 매달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자신에 대한 모욕,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를 그냥 지나칠 사람은 아니었다. 무례한 짓을 한 건 자신이고, 그 시선에 불쾌했다면 응당 사과를 하는 게 맞다.
루이스는 책을 내려놓고 어색한 미소를 지웠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다.”
그럼 왜. 라는 생각이 튀어 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 얼굴은 읽기 어렵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예측할 수가 없다. 검은 그 사람을 닮는다 했던가. 검의 궤도를 읽기 힘든 것도 그 주인을 꼭 닮았다. 침묵이 이어졌으나 다이무스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아직 원하는 답을 못 들었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마른 침을 넘기고 솔직히 답했다.
“별 거 아닙니다. 그저....”
이걸 말해도 되는 걸까. 고작 이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걸 싱겁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데 다이무스가 말해도 좋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라, 모르겠다. 루이스는 손가락 끝으로 두꺼운 책의 표지를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제 말투가 경을 닮아가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군.”
막상 말해놓고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얘기를 들은 거지 정말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의식한 게 민망해 뒷목에 손을 가져가는데 다이무스가 작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았다 뜨는 눈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실은 나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군요.”
“하루에 몇 시간씩 나란히 서있으니 무리도 아니지.”
“그렇지요.”
“그래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말에 수긍하던 루이스는 슬그머니 목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다이무스 홀든은 좋게 말해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필요한 것만 입에 담는 과묵하고 진중한 남자가 즐거운 듯 말을 이어가는 게 낯설고, 그가 하는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그런 인지부조화 끝에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당장이라도 입가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얼굴이 붉군.”
뺨에 다가오는 손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뒤로 빼며 뒷걸음질 치다,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뒤통수를 감싼 루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쪽팔려 죽고만 싶었다. 그냥 뛰어내릴까. 얼굴을 향해 오던 다이무스의 손이 고개를 푹 수그린 루이스의 어깨 위에 내려왔다.
“괜찮나. 꽤 세게 부딪친 것 같다만.”
“네, 괜찮, 괜찮습니다.”
그냥은 가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온 다이무스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침묵 속에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기류가 흘렀다. 다가올 것 같은 얼굴이 다가오지 않고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회색 눈동자가 어떤 열망에 흔들린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이무스가 눈을 감으며 물러났다. 어깨를 잡았던 손이 안타깝게 떨어졌다. 미련이 잔뜩 남은 것처럼, 손바닥이 떨어지고 손가락 끝이 쇄골을 스쳤다. 어안이 벙벙했다.
“조심하도록.”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무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뭐였을까.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있는 은행을 등지고 서 손끝으로 입술을 덧그렸다. 닿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것뿐이었나. 그랬으면 왜 밀어내지 않았을까. 그는, 다이무스는, 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것인가.
뺨에 손을 댔다. 얼음을 계속 쥐고 있었던 것처럼 손이 차가운 반면 얼굴이며 목, 귀는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