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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The left stairs
이걸로 끝!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었다. 고민에 빠진 탓이었다. 밥 한 끼 정도가 뭐 대수랴 싶겠지마는, 같이 먹는 사람이 다이무스 홀든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냥 때우는 식사는 어림도 없고, 적당한 선이라고 하면 죄 데이트 코스뿐이다. 형편 상 예약제 레스토랑을 잡을 수도 없으니 도무지 어디에서 뭘 먹어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챙겨준 건 고맙지만, 말 한 마디로 충분히 끝날 일이 아닌가.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그냥 상투적인 인사로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루이스가 아는 다이무스 홀든은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식사 한 끼는 좋든 싫든 대접해야 한다.
사실 그냥 모른 척 하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이글은 '뭐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냐. 그냥 쌩까.'라고 했지만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처지에 그게 될 리가 없다.
이제는 말투만 닮아가는 게 아니라 목소리가 자꾸만 겹치는 바람에 해야 하는 말도 헷갈리는 판국이다. 다이무스가 할 말을 제가 하질 않나, 말해놓고도 뭐가 잘못된 줄 모르다 뒤늦게 깨닫질 않나, 아주 엉망이다. 당황한 나머지 옆에 눈치를 살피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다이무스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쿡쿡 찔렸다.
역사를 읽으러 서점에 들르는 사람보다 물건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못 알아챌 법도 한데 다이무스는 조금 느릴지언정 루이스의 시선을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양심이 찔리는 거라고, 전에 진 빚을 갚아야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릴 거라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낮고 진중한 그의 목소리에 설렌다거나,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백날 생각만 해봤자 소용없지만. 루이스는 푹 한숨을 내쉬고 다이무스를 등지고 섰다. 의식하지 말자. 새로 개장한 인도 음식점이 꽤 괜찮다던데. 맛에 까다로운 카리나와 본토 사람인 라즈도 호평을 했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일이 끝나면 꼭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책을 고쳐 쥐었다.
오늘만 아홉 번째. 저를 보다 눈이 마주칠라 치면 바로 홱 돌아가 버리는 게 오늘만 꼭 아홉 번이다. 제 눈치를 보며 신경을 기울이는 그 모습이 귀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이제 그만 뜸 들이고 말을 걸어주었으면 했다.
이번에도 아닌가. 인가 아닌가 흔들리는 것도 슬슬 지친다.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은 분명 전장에 나서는 이에겐 칭찬할만한 덕목이지만 지금은 그 신중한 성격이 꽤, 답답했다. 속 시원히 말 좀 하라던 막내의 말에 이런 식으로 동조하게 될 줄이야. 다이무스는 하루만 더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짜증을 내는 능력자의 말에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봤자 소용없는 말 뿐이지만 그 역시 고객의 한 사람.
다이무스는 제게서 등지고 돌아선 그를 흘긋 바라보고, 소위 진상이라 하는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여 사업은 홀든만의 사업이 아니라, 헬리오스의 클랜사무소와 연계된 일이다. 언성을 높이며 시비를 거는 능력자를 차갑게 내려 보며, 다이무스는 이미 몇 번이고 설명한 정해진 규칙을 설명해주려 했다. 그가 들먹인 이름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연합의 영웅을 들먹이며 이따위로 나오면 연합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어주고 있자니 짜증보다 피로가 몰려왔다. 그 영웅이 바로 옆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지나가던 능력자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은행 앞에서 시비가 붙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거기에 다른 사람이, 그것도 연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가 엮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자 의기양양하게 언성을 높이던 그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잡았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 입에 담아도 될 이름이 따로 있다. 이따위에 검을 뽑을 필요도 없다. 다이무스는 그를 내려 보았다. 주제도 모르고 발끈한 게 가소로울 뿐이었다. 두꺼운,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놓으시죠.”
“넌 또 뭐야?!”
“방금 전까지 그렇게 찾더니.”
엷은 쓴웃음에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슬며시 흐르는 냉기에 지켜보던 갤러리도 숨을 집어삼켰다.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제 멱살을 쥔 그가 잠시 굳었다가, 마른침을 넘기며 손에 힘을 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겨우 이 정도로 겁을 먹다니 방금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말고 연합으로 가시죠.”
“뭐, 뭐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아뇨. 모르는데요.”
“뭐 이 새끼야?!”
작은 개가 크게 짖는 법이라 했던가. 다이무스의 멱살을 쥐었던 손이 이번엔 루이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얼어붙었던 갤러리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멱살을 잡힌 루이스가 대놓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냥 어리고 순하게만 보이는 얼굴이, 잠시 앞머리를 올린 것만으로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서점 직원 루이스 대신 영웅 루이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독서를 권하던 사람이 아니다. 눈빛만으로 공기를 얼리고, 좌중을 압도하는 그 기백은 평범한 사람이 따라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장의 영웅. 루이스.
이 광장에, 이제 그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다이무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함부로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하다. 공성에서 마주치더라도 가급적이면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를 그저 그런 능력자가 당해낼 리 없다.
“이거, 놓으시죠.”
“윽.... 서, 설마....”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몰라도, 사무실에 가면 당신이 어느 소속의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그의 팔을 잡은 루이스의 손에 푸른 결정이 맺혔다. 막힘없이 흐르는 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해서, 이 상황을 모르고 들으면 친절한 상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루이스의 얼굴에서 호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가운, 냉철하고 침착한 결정사의 얼굴이다.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무표정으로 그의 손을 떼어내자 그가 뒷걸음질 쳤으나 루이스의 손은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숙여 다가가 아이를 대하듯 눈을 맞췄다.
“자, 잠깐. 아니,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그게....”
겁에 질린 능력자가 루이스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아무리 상대가 에이스 능력자라 한들 공석에 있으면 함부로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란 그 얕은 믿음 하나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던 자가,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하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스가 빈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 거리에서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러났다. 건넨 것은 아마 일종의 경고였겠지만, 어딘가 위험하고 선정적인 그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제의 능력자는 발이 언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서점 앞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구른 건 덤으로, 그를 바라보던 루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단하군.”
“별 거 아닙니다.”
“뭐라 했나.”
“그것도, 별 거 아닙니다.”
석연치 않은 대답에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지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가, 층계참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내민 채 위의 상황을 염탐하던 드렉슬러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쏙, 아래로 들어가 버렸지만 이 상황을 지켜본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회사에 가면 또 이걸로 귀찮게 굴 게 뻔하다. 다이무스는 드렉슬러가 있었던 층계를 노려보다가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책을 집어 든 그를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호기심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지고, 덕분에 골칫거리를 하나 치운 다이무스는 루이스에게 다가갔다. 그 자신을 위해, 연합을 위해 했다는 말을 하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끼어든 이유가 듣고 싶었다.
“어째서지.”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냐고 묻는 거다.”
“...제가요?”
책을 읽는 척 하던 루이스가 손을 멈추고,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동자에, 어째서인지 다이무스는 조금 즐거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내려 잠시 고민하다가 입가를 매만졌다. 모양이 좋은 손가락이, 일전에 몰래 맞춰본 그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그만 일전에 맛본 감촉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다이무스는 숨을 집어삼켰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가.”
“경께서는 왜 제가 화를 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건....”
이번에 말끝을 흐린 건 다이무스였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예뻐서,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같은 생각을 해주었으면 했다. 자신을 위해 화를 내주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게 망설이는 중에 루이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얇은 초승달처럼 얄쌍하게 눈을 휘며 짓는 미소가 예뻐, 입을 다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녁을 함께 하며 얘기하도록 하지. 본의 아니게 수고를 끼쳤군.”
“아, 아닙니다. 그리고 식사라면 지난번에....”
금세 당황하는 루이스의 반응에 이번엔 다이무스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무심코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다이무스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잡아먹지 않는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새로 생긴 인도 음식점이 괜찮다더군. 혹시 그쪽 음식은 별로인가?”
“아, 네.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
당혹이 가시고, 안도가 대신 묘한 표정이 잠시 스쳐갔지만 다이무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요즘 부쩍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 같다던 아이들의 말이 떠올리고 흘긋, 그 사소한 변화를 일으킨 사람을 바라봤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덴 것처럼 피해버렸지만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닿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신호다.
거리는 천천히 좁혀 가면 되는 것이고, 시간은 충분히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목소리가 섞이고 겹친다. 그 간지러운 울림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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