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났다. 정말 오랜만인데. 나는 술에 취해있었고 너는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말갛게 웃으며 서있었다. 나는 네게 다가가 네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너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왜 이러고 있어.”
“나쁜 새끼. ”
나는 네게서 나는 비누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술에 취해서 제대로 말한 건지 아니면 생각을 한 건지 알수없었지만 너를 놓치기 싫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다정했다.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이 행복했던 그 시간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날 거면 사랑하지 말지. 사랑이란 독과도 같았다. 나는 네가 없는 현실을 살아야했고, 너는 나를 떠나 모두의 영웅이 되었다. 나는 널 내 옆에 붙잡아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만했다. 가끔은 그림자속에서 그녀가 튀어나와 내게 안타까운 미소를 짓는 것 같았고, 널 갈갈이 찣어놓았던 그녀 역시 나를 비웃었다. 너는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손을 뻗어보아도 닿지 않을 허상을 사랑한 것이라 속삭였다.
나는 그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너와 싸운 걸 후회했다. 마주치지 말 걸 그랬다.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했다. 그럼 적어도 이렇게 비참해지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살 수밖에 없다. 네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네가 희생해서 일구어낸 평화니까. 난 그걸 지킬수밖에. 그러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를 잊어버리고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 그저 다시 한 번 그 말간 미소를 볼 수 있길 기도했다.
그리하여 내 삶이 다하는 그날 네가 문을 열고 다가와 나를 이끌어주기를. 고결한 희생 끝에 영웅으로 잠든 네 곁에 가기위해 내가 해야할 일이 많았다. 네 후배는 자랑스러워할만한 녀석이 됐다. 안심해. 연합의 시끄러운 꼬맹이들도 이제는 꽤 자라서, 그때의 철부지 같지가 않아.
“그렇구나.”
루이스는 꿈에 그리던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 내가 이 목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너는 모를 거다. 영원히 모를 거야.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대답이 돌아왔다. 남의 생각은 훤히 들여다보면서 자기 속내는 하나도 내놓지 않는 건 어딜 봐도 불공평하다. 끝까지 비겁하고 치사한 자식 같으니.
“넌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으니까. 이해해줘. 너도 그렇고, 사람들은 언제나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 법이거든.”
“넌 정말 둘도 없는 나쁜 자식이지.”
“그래. 그래서 원망해?”
“그래.”
“그렇구나.”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지마. 그래봤자 다시 사라질 허상주제에.”
“잠시 내려와서 인사를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해줘. 여기까지 와서 싸우기 싫다.”
“...정말, 너는....”
왈칵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눈을 감고 팔에 안은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기억 속의 감촉 그대로라 더 원망스러웠다. 내 기억 속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네가 미치도록 보고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놓치기 싫었다. 술에 취해 빚어낸 허상이든, 정말로 그녀석이 내려와 인사를 하는 거든. 벨져는 이 순간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사랑해.”
이 한마디에 차가운 환상이 녹아내릴 걸 알면서도 벨져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응. 나도.”
“널 사랑해.”
하지만 말해도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었고 한 마디 말로 잡기엔 네가 짊어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냥 지나쳤겠지.”
“우리가 만나지 못할 거라고?”
“그래.”
“너, 그말 잘 기억해둬라.”
“왜?”
“내가 찾아낼거니까. 내가. 이 벨져 홀든이.”
그 말에 잘만 떠들어대던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숨을 집어삼키고 잠시 말을 고르는 그 버릇까지 너는 여전했다. 모두가 변하는 이 시간속에 오로지 너만이 그대로였다. 작게, 피식 웃는 소리에 벨져는 입술을 물었다. 트리거를 당긴 이상 이 나약하고 아름다운 환상은 곧 손 안의 눈송이처럼 아린 통증만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끝까지 제게 가혹한 녀석이었다.
“...여전히 너답구나. 멋져.”
“그러니까 대답해. 내가 찾아내면 넌 나를 사랑하는거야. 알겠어?”
“그래. 그럴게. 어떻게 그러지 않겠어.”
“그리고 내 옆을 떠나지마. 먼저 갈 생각따위 하지도 마.”
“알겠어. 약속할게.”
“지켜라.”
나는 일부러 끝까지 너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웃고 있으리란 걸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보고 싶지 않다. 그 미련도 후회도 없는 개운한 미소를 보면, 이게 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까봐. 네가 마지막에 남긴 노트 그대로. 내게 남긴 유언 그대로 너를 잊고 앞만 보며 행복하게 살다가 혹시라도 너를 잊게 될까봐.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요구였지만 그건 약속이었다. 행복하기로. 앞만 보기로. 나는 너와 약속했으니까. 비록 죽기보다 싫은 약속이지만 지킬 수밖에 없었다. 가끔 네 생각에 무너지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날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너라는 사실에 다시 안도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극인가 싶지만.
“루이스.”
“다음 꿈에 만나자.”
“...그래.”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거리가 보였다. 네가 없는 거리. 네가 없는 황혼의 도시. 그래도 나는 네가 없는 오늘을 살아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