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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그 해 겨울
2013년도 1월 앤솔에 냈던 원고인데 다시 보니 꽤 마음에 들어서 일부만 공개해봅니다 :3
모티브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시리즈.
어? 잠깐.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한창 원고지를 써내려가는 중에 트릭에 허점이 보인 것 같아 손을 멈추었다. 앞부분을 다시 보려는데 옆에 둔 원고지뭉치가 없었다. 어어, 분명 여기 뒀는데? 하고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옆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움찔했다.
한 번 집중하면 옆에 누가 와서 무슨 짓을 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옆에 앉은 사람 때문에 루이스는 하마터면 강의 중이라는 것도 잊고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루이스는 옆에 앉은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
루이스가 알고 있는 그는, 완벽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수석으로 입학해 과탑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좋은 머리에, 잘 나가는 집안, 잘 생긴 외모. 사람들로 하여금 질투와 선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는 주사위를 여섯 번 굴려도 여섯 번 모두 6을 나오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주름 하나 없는 연한 하늘색의 와이셔츠, 단정한 감색 재킷. 해질녘의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이는 시계. 그 모두가 오로지 그를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완벽했다.
루이스는 언젠가 이글이 제 형은 숨 막힐 정도의 완벽주의자라고 한 것을 떠올렸다. 집 안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다던 말을 지금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제 글을 읽고 있다. 그것도 자기 바로 앞에서.
초조함에 책상을 두드리다가, 손톱을 입에 물었다가 이내 자신의 행동이 불안해하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에 깍지를 끼고 얌전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번엔 다리를 떨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해도 뼈마디가 굵은 그의 손에서 제 원고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저절로 눈이 다이무스의 손을 향했다. 흘긋거리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루이스는 제 담당 편집자인 고혹적인 미녀를 떠올렸다. 수많은 신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트리비아 카리나의 앞에서도 루이스는 이렇게 떨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는 소설에 쓰이는 스토리와 트릭을 두고 말다툼을 벌이긴 하지만, 4살 연상의 그녀는 언제나 좋은 파트너였다.
애초에 루이스를 등단시킨 것은 오랜 친구인 앤지의 도움이 컸다. 고등학교 동창이던 그녀는 알고 보니 대기업 수장의 딸로, 앤지는 아버지의 계열사중 하나인 출판사에 제 소설을 가지고 갔다.
당시 매출이 저조했던 지라 모험삼아 낸 루이스의 소설은 예상 외로 히트를 쳤고, 루이스는 도서출판 ㈜연합의 영웅이라 불릴 정도가 되어버렸다. 앤지가 없었더라면 아직도 루이스는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루이스가 쓸데없이 과거회상을 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을 때, 강의실이 웅성거려 고개를 드니 교수님과 학생들이 짐을 싸고 있었다. 때마침 다이무스의 손에서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겨우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네?”
다이무스의 회색 눈이 루이스를 향했다. 정면으로 시선을 받고 있자니 와, 정말 잘생겼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어어...그게...”
“아직인가.”
아뇨. 당신 때문에 생각해둔 게 지금 전부 날아갔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루이스는 애써 참았다. 아직 강의실 안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다이무스 홀든을 향하고 있었다.
하긴, 얼굴도 잘 생겼겠다. 집안도 좋겠다, 유능한 인재라 졸업 시즌에 앞서 스카우터들이 모셔가려 한다는 소문도 달고 다니는 그다. 굳이 여자가 아니라도 그의 옆에 붙어 뭐라도 해볼 생각으로 달라붙는 사람이 많았다지만, 정작 다이무스는 그런 시선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게 타고난 카리스마와 여유라는 걸까. 이런 사람이 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구나, 하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시간 있나.”
“네?”
“아까부터 두 번 말하게 하지마라, 루이스.”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강의인 범죄심리학은 목요일 마지막 강의였다. 마감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고, 오늘은 늘 저를 따라다니는 토마스도 대타 알바가 들어왔다며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돌아갔기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 강의인데...”
“그렇군. 저녁은 먹었나?”
“아뇨.”
“그럼 내가 사지. 짐 챙겨라.”
멍하니 있다가 다이무스가 건네는 원고지 뭉치를 받아들고 퍼뜩 빈 원고지들과 만년필을 정리해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먼저 성큼성큼 강의실을 나서는 그를 따라가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저기, 다이무스 홀든씨?”
“뭐지.”
“저 아세요?”
분명 같은 강의를 듣긴 하지만 분명 그와 루이스는 초면이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당연하게 루이스에게 반말을 했다. 아무리 루이스가 나이 21를 먹고도 아직도 술을 사러 가면 신분증 검사를 당하는 동안의 소유자라도, 보통이라면 존대를 했을 것이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다.
같은 과 동기인 이글이 집에서 제 얘기를 하기라도 했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과 얼굴을 매치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이글은 새벽 2~3시까지 클럽을 쏘다니거나 술 먹으러 가고 다음날 오후 강의에나 간신히 얼굴을 내미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다이무스가 루이스를 알 일은 없을 텐데.
“.....”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알 만큼은 알고 있다. 동생 둘이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벨져도 홀든이었지. 문득 그를 떠올렸다. 1학년 때, 멋모르고 앤지의 손에 이끌려 토론대회에 나섰다가 마주친 오만한 남자. 단순히 경력을 쌓기 위해 참가한 벨져는 당연히 우승을 예상했지만, 결승전에서 루이스와 논쟁을 벌이고 결국 패배했다. 그 이후로 아직까지 벨져는 루이스만 보면 이를 갈고 있었다.
전파를 타고 방송까지 됐으니, 동생을 보려고 TV를 봤다면 충분히 제 얼굴을 알만했다. 한 번 본 사람을 기억할 정도라면 그의 기억력이 좋거나, 아니면 주위의 누구-아마도 벨져-가 계속 떠오르게 했겠지.
그렇게 납득하고 나니 괜한 말을 꺼냈단 생각에 멋쩍어져 어깨에 맨 크로스백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애초에 다이무스 홀든 같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기한테 관심을 가질 리가 없는데. 공연히 맥이 빠져버렸다.
자신을 잘 따르는 토마스는 가끔 부담스러울 정도로 루이스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곤 했지만, 루이스의 성적은 겨우 중위권을 유지하는 정도고 딱히 학과 활동이나 다른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루이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로서도 아직 부족하고.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생각을 하는 사이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 뛰었다. 그 바람에 후드가 벗겨지고 시월의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로 옆도, 뒤도 아닌 애매한 간격을 두고 그를 따라 걸었다.
어색함만 감도는 침묵 속에서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아 입술을 핥았다. 튼 곳이 있었는지 따끔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단편집 마감을 하고 나서 급하게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마치느라 제대로 침대에 들어가 잔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으니, 입술이 이렇게 되는 거야 당연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어...딱히 가리는 건 없는데요.”
“그렇군.”
학교 정문을 나서면서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어왔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니 수긍하는 것으로 대화가 끊겼다. 그런데 담백하고 간결한 그의 화법은 이상하게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냥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일까.
그런데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마감과 과제에 치여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체육대회 때문에 거리에 형형색색의 학과 잠바를 입은 학생들이 가득했다. 새삼 이런 날 강의를 풀로 하고 과제를 걷어간 스타이거 교수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불같은 금요일 저녁. 학교 언덕을 내려가 봐야 클럽과 술집뿐이니 그냥 간단하게 먹자는 제안에 다이무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강의실을 나온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거리에 화려한 조명이 켜질 무렵에야 겨우 분식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직장을 은퇴한 선배님이 차린 분식집은 값싸고 양 많고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직접 운영하는 곳의 가게 이름이 왜 엄마 손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한 번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는 말도 돌았다.
그렇지만, 다이무스 홀든과 분식집이라니.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곁들이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좁은 분식집에서 라면을 시키는 걸 보고 있자니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려서 헛웃음이 나왔다.
“즐거워 보이는군.”
“아...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사과라면 오히려 내가 해야겠지.”
뭐에 사과한다는 걸까, 하는 순간 불연 듯 다시 고개를 드는 민망함에 시선을 피했다. 테이블에 마주 앉고 나니 다이무스의 시선이 곧장 루이스에게 꽂혔다. 피할 수도 없어 따라 둔 물만 들이켰다.
“흥미롭더군.”
“...감사합니다.”
루이스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팬래터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체크하곤 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피드백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트리비아의 회유와 협박에도 나서기 싫다며 일관했던 루이스였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지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다.”
잠깐, 앞뒤를 다 잘라먹는 직설적인 화법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뭐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드니 다이무스는 아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수학과 조교인가?”
아, 들켰다. 망연해지는 기분에 어색하게 웃었다. 루이스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다이무스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스토커는 독자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가짜 범인일 테지. 스토커라면 일부러 가면을 놓아두는 행위는 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그녀를 납치한 것까지는 스토커의 짓인가?”
“계속 하세요.”
눈앞의 남자는 정확히 내용을 짚었고, 루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계속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무스는 어디까지 답을 낸 걸까하는 생각에 조금 두근거렸다. 아니, 엄청 두근거렸다.
“여자는 독신에 술집 종업원이었다. 교수인 연인을 제외하면 딱히 친한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그 연인에게 연정을 품은 조교가 있다. 더 볼 것도 없는 치정극이더군.”
범인과 동기. 추리소설의 3요소 중 두 가지를 풀어냈으니 마지막으로 트릭이 남았다. 모름지기 추리소설엔 이 셋이 고루 섞여야 한다는 것이 루이스의 지론이었다. 하나라도 빠지면 완벽한 답이 될 수 없다.
거침없이 말을 잇던 다이무스가 입을 닫았다.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행동이 그가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직 트릭에 대한 답을 내지 않았다. 애초에 트릭에 허점을 느끼고 펜을 멈춘 루이스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완벽한 사람의 표본인 다이무스 홀든이라도, 단번에 간파당하면 작가의 이름이 울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천천히 턱을 괬다. 조금 전까지의 긴장이 다 거짓말이라는 듯 여유를 가장하고, 슬쩍 미소까지 띠웠다.
“그리고?”
다이무스는 돌변한 루이스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 여유를 가장하고 경계하며 떠보고 있다. 루이스에겐 가장 강력하고 비밀스러운 패가 하나 남아있었고, 다이무스는 아직 그 패를 뒤집을 수를 찾지 못한 듯 했다.
“...그 밀실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읽는 사람이 풀어야죠.”
다이무스의 손가락이 나무 재질의 테이블을 두드렸다. 식당 안의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지만 그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나는 소리만 또렷이 들렸다. 다이무스가 손가락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 당돌한 면이 있군.”
“절 잘 모르시나 보네요.”
다이무스의 눈매가 순간 부드러워졌다. 아, 이런 표정도 짓는구나. 저도 모르게 손은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기분이 묘했다. 홈즈를 만난 모리아티의 기분이 이런 거 아닐까. 호적수를 갖는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라면, 무슨 문제를 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푼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누가 말했던가, 범죄자와 탐정 사이는 오히려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묘한 유대감과 긴장이 둘을 아주 가까운 거리의 평행선이 되어 달리게 한다.
오싹할 정도의 흥분이 루이스의 몸 안에서 휘몰아쳤다.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기분 좋은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도 그렇군. 그럼,”
“주문하신 라면 나왔습니다~.”
넉살좋게 웃으며 양 손에 음식을 들고 온 주인 아저씨가 음식을 상 위에 척척 차리면서 다이무스의 말이 끊겼다. 맥이 탁 풀리는 동시에 그냥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러모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수저통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 건넸다.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면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선입관에 사로잡혀버렸던 건지.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좋았다. 무뚝뚝한 건 사실이지만, 다이무스 홀든은 이글이 말하는 것처럼 꽉 막힌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지만, 그와는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앤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을 때랑 비슷하기도 하고, 조금 더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막상 김이 하얗게 오르는 음식을 눈앞에 두니 식욕이 돌아 짧게 잘 먹겠다고 말한 후 젓가락을 들었다.
확 깨져버린 분위기에, 따듯한 음식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도 영 아니다싶어 조용히 먹기만 했다. 다이무스역시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다 먹고 일어서서도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계산하는 다이무스를 두고 먼저 가게 문을 밀고 나서는데 바깥 날씨가 제법 추워 후드를 뒤집어썼다. 거리의 나무들이 떨군 잎들이 바싹 말라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걸 보니 새삼 올해 가을이 다 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처연해져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엔 유독 보름달이 크고 밝았다.
“달이 밝군.”
딸그랑- 풍경 소리와 함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후드 짚업의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지도 않고 뒤돌아서니 다이무스가 다가와 덮어쓴 후드를 벗겨냈다.
“이게 훨씬 보기 좋다.”
찬바람이 드러난 목덜미를 스치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에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후드를 썼다. 루이스가 집을 나설 때만해도 해가 짱짱한 가을 날씨였기에 후드 짚업 안은 반팔 티 한 장 뿐이었다.
“전 이게 편해요.”
물론 후드를 쓰고 있으면 따뜻하기도 했지만, 루이스는 후드를 쓰고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언제부터 후드를 쓰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건 언제든지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동굴과도 같았다. 혹시 언짢아하는 건 아닌가 싶어 안색을 살피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너무 포커페이스라 읽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지만.
“잘 먹었습니다.”
“그래.”
딱히 더 생각나는 말이 없어 으레 하는 감사 인사를 했다. 고개를 끄덕인 다이무스는 다시 앞장 서 걷기 시작했고, 어차피 역으로 가는 방향이었기에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여전히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애매했다.
그의 뒤도, 옆도 아닌 미묘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다이무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걸음걸이에서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꼿꼿하니 바른 자세로 걸었다.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것만큼 당당하지만 그보다 진중하고, 결코 뽐내지는 않는다. 그의 숨길 수 없는 자신감과 여유가 잘 생긴 호랑이를 연상시켰다.
문득 다음 작품엔 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도 이야기 거리로 어떻게 만들어 볼 수 없을까를 고민하는 게 글을 쓰는 이에겐 습관이나 다름없는 법. 다이무스 홀든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있자니 괜히 손이 근질거렸다.
잘 생긴 얼굴에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고, 두뇌명석하기까지 한 좋은 집안의 장남. 만능형 캐릭터는 식상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다. 그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 걷는데도 이상하게 다이무스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학교 골목거리에서 대로로 나오니 사람들이 즐비했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이따금 인파에 치일 때면 뒤를 흘긋 보며 걸음을 늦춰주었다. 딱히 더 할 말도 없다면 그냥 밥 먹고 간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훌쩍 가버려도 상관없는 것을, 그의 작은 배려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까지 5분 되지 않는 짧은 거리를 그렇게 걸었다. 이상하게 그 5분은 긴 것 같기도 했고 짧은 것 같기도 했다. 뭐 하나 딱 떨어지는 것 없이 미묘하고 애매한 데, 간질거리는 그 기분이 싫지 않았다.
“잘 들어가라.”
“어, 다이무스씨는요?”
“차 가지고 왔다.”
잠깐, 지금 뭐라는 거야? 차 가지고 왔다고? 근데 왜 여기 있어요? 지금 나 데려다 준 거예요? 라고 묻고 싶었는데 입에선 이미 멍청하게 되묻는 소리만 나왔다.
“네?”
“그럼 이만 가보지. 늦었으니 조심해서 들어가라.”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 본 다이무스는 그렇게 말하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의 등을 눈으로 쫓다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 역시 사람이 많았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아까 하던 구상을 잇기 시작했다. 무겁고 날카로운 검 같은 남자. 배경은 현대보단 근대로, 자식이 없는 고령의 괴짜 노인이 지인 몇을 저택에 초대해 신비의 액자를 걸고 추리 대결을 시작한다.
초대받은 사람은 총 다섯. 아름다운 여배우, 세도가 집안의 장녀, 노인의 주치의, 참석하지 못한 기업가의 대신으로 온 여비서, 마지막으로 주인공과 그의 친구.
머릿속으로 대강의 배경을 잡고,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배터리가 1% 남았다는 경고창이 떠서 손가락을 멈췄을 땐 이미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세 정거장이나 지나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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