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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1.
사이퍼즈/루른 연성
2015. 10. 28. 21:41
이미 재록본에 수록한 글이지만 뒤를 이어쓰고 싶어져서 재업
발밑이 훅 꺼져버리는 감각에 놀라 퍼득거린 것도 잠시, 벨져 홀든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악몽을 꾼 것처럼 개운하지가 않았다.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며칠째 벨져 홀든을 괴롭히는 꿈은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아보아도 이미 깬 꿈은 검게 물든 장면에 멈춘 채 흐르지 않고, 벨져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짐작이 가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안타리우스를 추적하고 인식의 문을 찾아내 파괴하는 데 위험이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 멍청이랑 자꾸 마주치는 게 심상치 않았다. 기사단에서 보낸 정보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보다 신경을 거스르는 건 그들의 존재였다. 아무리 좋게 봐도 그들은 좋은 연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 않으려 했고 남자는 그걸 알면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애처로운 얼굴로 바라보면 한 번쯤 돌아봐줄 법도 하건만 그녀는 매정했다.
남자와 여자는 이쪽에선 제법 유명인이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소문이 제법 됐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공간을 찾아 떠났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안타리우스의 포인트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정작 그들은 저를 못 알아본 데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연인이 뭔가를 발견한다 해도 이미 벨져가 다녀간 후라 상관없지만 그래도 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좋을 리 없었다.
벨져는 마른세수를 하며 어제 본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 벤치에 앉아 궁상을 떠는 남자의 얼굴은 전보다 더 수척해보였고, 한심하고 바보같았다. 멀쩡한 얼굴을 들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적의 요새 근처에서 빈틈을 보이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벨져 홀든을 쓰러뜨린 영웅이란 타이틀을 가진 주제에 안타리우스의 강화인간 나부랭이에게 당하는 것 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기에 벨져는 어젯밤도 그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게 벌써 몇 주 째인지. 이렇게 꿈자리가 사나워진 것도 분명 그게 거슬려서인 게 분명했다. 차라리 빨리 이공간을 찾아서 사라져줬으면 좋으련만 그게 그리 쉬울 리 없었다. 벨져는 거기까지 흘러간 생각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기사단과 정보통에게 도착한 편지들을 대충 읽고 정보들을 정리한 벨져는 편지들을 갈무리해 객실 금고에 던져놓고 재킷을 집어 들었다. 곧 하우스키핑 시간이니 나가줘야 청결이 유지되는 데다 호텔 방 안에만 있기엔 갑갑했다. 거울에 비친 벨져 홀든은 오늘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제 모습에 만족한 벨져는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바람도 선선히 부는 게 딱 좋은 날씨라 잠시 들른 카페의 이층 야외 테라스에 앉아 본 노을은 아름다웠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차와 샌드위치는 제법 먹어줄만 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고 한 잔 할 기분이었기에 적당히 펍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왁자지껄하게 노는 무리에 낄 생각도 없고, 벨져가 즐겨 마시는 좋은 술이 있을 리도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잠시 한 잔 하고 사라지면 그뿐. 벨져는 오늘 한 기사가 편지의 끄트머리에 오만한 자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한 걸 떠올렸다. 마티니 한 잔을 주문하고 낡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벨져는 실소를 흘렸다. 오만하기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격에 맞는 이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그 역시 격이 떨어지는 쪽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원형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기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살고 있는지, 얼마나 착취당하며 속고 있는지도 모르고 술에 취하는 이들이었다. 더러는 그런 생각을 하는 벨져를 일컬어 사정도 모르는 귀한 귀족집 도련님이라 손가락질하기도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다르다.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특권을 누리는 게 바로 귀족이고, 술에 취해 시시덕거리는 일개 필부와 자신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검의 형제 기사단에 들어올 정도의 기사라는 자가 하는 간언의 수준이 그 꼴이라니,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텐더가 마티니를 내려놓는 소리에 다시 몸을 돌리던 벨져는 얼핏 스친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손등으로 이마를 지탱한 채 맥주를 들이키는 옆모습이 낯이 익었다. 바의 끝과 끝이라지만 그리 큰 펍도 아니었기에 그와 벨져 사이의 거리는 채 5미터도 되지 않았다. 언제나 입고 다니는 후드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올리는 바람에 주홍빛 조명 아래서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술을 넘기면서 목울대가 움직이고, 맥주병을 문 입술에서 흐른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둑한 펍 안에서도 얼굴이 제법 붉은 걸로 보아 꽤 마신 것 같았다. 더운지 후드를 넘기고 티셔츠를 펄럭이는데 게슴츠레 뜬 눈가가 빛에 반짝였다. 슬쩍 벌어진 입술 새로 새는 더운 숨결이 여기까지 닿는 것 같아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시켜놓은 마티니 잔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칵테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겨우 루이스 따위를 넋을 잃고 바라본 게 자존심이 상했다. 한 모금 넘기자 싸하게 넘어가는 알콜에 정신이 들었다. 분명 제가 시킨 건 온더락이 아니었는데, 얼음이 녹아 진에 섞이는 게 영 껄끄러워 짜증이 났다. 바로 미간을 찌푸리자 바텐더가 다가와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이봐, 혹시 그쪽?”
“치워라.”
대답할 가치도 없었지만 바텐더가 음흉한 눈으로 가리킨 건 분명 초저녁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신 어느 멍청이였기에 벨져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친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바텐더는 움찔하더니 바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 한 걸음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진엔 성긴 얼음이 조각나 물이 섞이고 있었고, 벨져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웨이터에게 손짓했다.
“너, 너. 이리로.”
“예, 말씀하시죠….”
빳빳한 지폐를 마티니 옆에 올리자마자 방금 전의 능글거림은 어디로 갔는지, 바로 굽신거리는 게 거슬렸지만 벨져는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펍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기분은 이미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저 녀석, 얼마나 마신 거지.”
“여섯시였나, 일곱시였나 그쯤 들어와서 지금까지 계속 마셨죠. 아무리 포터라지만 앉아서 마신 것만 해도 혼자서 열댓 병은 마셨을 겁니다.”
벨져는 바텐더의 대답에 인상을 썼다. 아무리 낮은 도수의 맥주라 해도 안주도 없이 술만 마셨으면 속이 멀쩡할 리 없었다. 시간상으론 저녁도 안 먹고 마셨을 게 뻔했다. 보기보다 술일 센 건지 아니면 홧김에 마시고 있는 건진 몰라도 지금의 루이스는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더 물이 섞이기 전에 마티니를 한 모금 넘긴 벨져는 흘긋 그를 살폈다. 턱을 괴고 상념에 젖어 내리깐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은 것도, 뺨이 붉게 물든 것도 제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런 데서 혼자 술이나 마시며 궁상을 떨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벨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 들고 있던 잔에 남은 술을 마셔버리고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더 꺼냈다.
“저 자식 것까지. 이거면 충분하겠지.”
“헛, 물론입죠!”
“흥.”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한 순간의 흥 때문에 싸구려 술로 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잡친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도 대신 내줬겠다, 그냥 그대로 나가서 가버리면 그만인데 영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해서 어쭙잖은 놈팽이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든, 찬바람을 맞고 거리에서 얼어 죽든 객사하든 알 바 아니다.
바를 뒤로하고 나가려던 벨져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역시, 신경이 쓰여서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뒤돌아선 벨져는 나올 때와 달리 척척 걸어가 축 쳐진 어깨를 잡아챘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미련하긴.”
“……벨져?”
“다 마셨으면 그만 하고 돌아가.”
“돌아가? 어디로?”
되묻는 루이스의 표정이 어딘차 서글퍼 벨져는 더 짜증이 났다.
“네 그 잘난 애인한테 가야할거 아냐.”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은 벨져는 바로 애수에 차 깊어지는 루이스의 눈을 보고 아차 싶었다. 루이스란 사람이 애인을 몇 시간 동안이나 내버려두고 혼자 술을 마실 사람인가 답은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여긴 안타리우스의 요새 근처. 아무리 싸웠다 해도 두세 시간을 여자 혼자 보내게 둘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에 벨져가 표정을 굳히자 루이스는 미소인지 울상인지 모르게 입가를 씰룩였다. 아픔을 견디려 술을 마시는 그의 옆얼굴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고개를 수그리고 손깍지를 긴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옆을 떠날 수 없는 건 이대로 두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루이스는 위험하다. 그동안 그를 지탱하던 한 기둥이 빠져나간 상실감이 냉정과 침착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적진에서 이렇게 취하게 만들었다. 멍청한 자식. 차였으면 얌전히 그 잘난 연합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몬단 말인가. 벨져는 아직 반절이 남은 병에 손을 뻗는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그만.”
“신경 꺼. 벨져 홀든. 어차피 우린 아무사이도 아니잖아?”
“멍청한 자식.”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고, 루이스는 실소를 흘렸다. 멍청하다는 말에 웃는 걸 보면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목이 한 손에 잡힐 정도로 마른데다 눈 밑이 검은 게 그동안 어지간히도 무리를 한 게 뻔했다.
“놔.”
“흥, 손을 뿌리칠 힘도 없는 주제에.”
루이스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먼 곳을 그리며 청승을 떠느니 적의를 품고 저를 향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벨져는 그를 도발하기 위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코웃음쳤다. 취한 루이스는 평소의 냉철함을 잃은 후였고, 내지른 주먹은 맨정신의 벨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윽…!”
“하, 미련하다!”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주먹을 한 손으로 잡고 뒤로 꺾자 루이스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펍 안은 시끄러웠고 바텐더는 벨져의 눈짓에 끼어들려하지 않았다. 루이스의 등 뒤에서 손목과 팔을 잡아 제압한 벨져는 루이스가 내뱉는 거친 숨소리와 눈앞에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잠시 머뭇거렸다. 저항할 생각도 않고 저를 바라보지 않는 눈동자는 다시 깊은 슬픔에 흐려져 벨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일 뿐,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벨져는 루이스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취했다.”
“알아….”
“하, 정말이지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군.”
“치워라.”
“예, 말씀하시죠….”
“여섯시였나, 일곱시였나 그쯤 들어와서 지금까지 계속 마셨죠. 아무리 포터라지만 앉아서 마신 것만 해도 혼자서 열댓 병은 마셨을 겁니다.”
더 물이 섞이기 전에 마티니를 한 모금 넘긴 벨져는 흘긋 그를 살폈다. 턱을 괴고 상념에 젖어 내리깐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은 것도, 뺨이 붉게 물든 것도 제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런 데서 혼자 술이나 마시며 궁상을 떨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벨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 들고 있던 잔에 남은 술을 마셔버리고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더 꺼냈다.
“헛, 물론입죠!”
“흥.”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한 순간의 흥 때문에 싸구려 술로 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잡친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값도 대신 내줬겠다, 그냥 그대로 나가서 가버리면 그만인데 영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취해서 어쭙잖은 놈팽이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든, 찬바람을 맞고 거리에서 얼어 죽든 객사하든 알 바 아니다.
“……벨져?”
“다 마셨으면 그만 하고 돌아가.”
“돌아가? 어디로?”
“신경 꺼. 벨져 홀든. 어차피 우린 아무사이도 아니잖아?”
“멍청한 자식.”
“흥, 손을 뿌리칠 힘도 없는 주제에.”
“하, 미련하다!”
“알아….”
“하, 정말이지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군.”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벨져는 미련한 남자를 놓아주었다. 가볍게 내치듯 놓았을 뿐인데 이미 술에 절어있던 루이스는 휘청이다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지 루이스는 의자를 잡고 어지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낮게 신음했다. 그 볼썽사나운 모습에 벨져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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