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물에 몸에 찌든 피곤이 노곤하게 녹아내린다. 가뜩이나 바쁜 월말을 보내고 나니 내일 있을 출근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루이스는 우울한 내일을 생각하는 대신 어깨까지 푹 몸을 담궜다. 오늘은 꼭 겨울 옷을 내놓아야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꺼운 옷을 꺼내야지 하는 것도 오늘내일하다보니 한 달이 다 갔다. 추위를 잘 타지 않는다곤 하지만 반팔에 후드티로 버티긴 힘든 날씨였다. 씻고 나가서 옷부터 꺼내야지. 겨울옷을 어디에 정리해두었는지 생각하던 루이스는 토마스가 빌려준 목도리를 깜박 잊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돌려줘야지 해놓고는 할로윈이다 뭐다 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
새로 사서 돌려줘야하나 아니면 그냥 다른 걸로 주는 게 나으려나. 똑같은 걸 찾으면 다행이지만, 괜히 엉뚱한 걸 사갔다가 토마스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곤란하다. 중요한 물건이었을 지도 모르고. 토마스라면 신경 쓰지 말라며 손사레를 치겠지만 어쨌거나 잃어버린 건 제 잘못이었다. 대체 정신을 어디다 놓고 사는 거지.
루이스는 바쁜 일상에 지친 제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걸려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문질러 털고 거울 앞에 섰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고 마주한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잠을 좀 자야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어젯밤도 놓아주지 않고 기어이 침대에서 잠들지 못한 탓이 컸다.
정말이지, 그걸 끝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린 자신에 대한 자조가 몰려왔다. 아무리 단호하게 말을 해야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도 막상 그 앞에만 서면 무심코 예스맨이 되고 만다. 이제 적은 나이도 아닌데 좀 적당히 하면 안 되는 걸까.
루이스는 미간을 문지르며 시큰거리는 눈을 꿈벅였다. 끈질긴 요구와 협박과 투정 속에 이뤄진 동거 생활도 이제 한 달. 루이스는 물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털며 나란히 놓인 칫솔 두 개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문제라니까. 루이스는 머리를 털다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짧은 시간에 한숨을 몇 번 짓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그게 마냥 싫지는 않은 게 그도 자신도 사랑에 빠져 눈이 먼 게 분명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와 제가 연인이 되고 동거마저 하게 되리라고. 같은 비누를 쓰고, 같은 샴푸를 쓰고, 같은 치약을 쓰고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드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은 루이스는 이미 집을 나간 그를 떠올렸다. 옷정리를 하고, 연합에 들러 토마스에게 사과한 뒤 목도리를 사러 나갈 생각을 하니 손끝이 간질거렸다.
똑같은 목도리 두 개를 내밀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벤트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리타분하지만, 그래도 같은 것을 공유하고 그렇게 사소한 물건 하나하나에 서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작은 행복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루이스는 욕실을 나와 방으로 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먹을 수 있게 만들어놓은 샌드위치와 유리잔에 따라놓은 오렌지 주스. 귀찮아서 식사를 거르고 나갈 걸 알았는지, 아니면 밤의 사과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몰라도 아침부터 준비하고 나갔을 그를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이스는 옆에 놓인 쪽지를 집어들었다.
[아침 거르지 말 것.]
아침식사라고 하기엔 민망한 시간이지만. 루이스는 머리를 말리는 대신 샌드위치를 집어들었다. 와삭 씹히는 양상추와 상큼한 토마토, 거기에 얇게 썬 햄에 계란과 감자도 으깨 넣은 샌드위치는 별 세 개짜리 식당에서 먹은 밥보다 맛있었다. 단숨에 한 조각을 먹어치우고, 다음 조각도 입에 넣은 것도 모자라 마지막 조각을 한 손에 든 루이스는 목도리는 어떤 색이 좋을까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집 안이라지만 맨 몸으로 오래 있기엔 날이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