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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긴장과 설렘 사이
명왕아들 루이스au
Good evening, sir.에서 이어집니당
루이스 밀러의 경호 첫 날. 다이무스는 일찌감치 은행일을 마치고 명왕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를 다시 만난다는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묘한 열기가 손끝을 감싸고돌았다. 그리고 그 긴장은 루이스의 방 앞까지 이어져, 다이무스는 문을 두드리는 단순한 행동조차 망설였다.
“어...?”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기억 속의 그 날 처럼 말간 얼굴의 그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본다. 다이무스는 문을 두드리기 위해 올렸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가 놀란 토끼를 연상시켰다.
“오늘부터 경호를 맡은 다이무스 홀든입니다.”
“아, 오늘부터였구나. 잘 부탁드려요.”
루이스는 문을 열고 나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아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다이무스는 목을 매만졌다. 은연중에 봄철에 새순을 틔운 나뭇가지같이 곧고 하얘서 잘 만든 도자기 인형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굳은데다 차가웠다. 차가운 건 그 능력 때문이겠지만 손끝에서 간질거리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뭇 레이디들의 손을 잡으면서도 무덤덤했던 다이무스에겐 낯선 경험이었으나 다이무스는 그마저도 목 안쪽으로 삼켜버렸다.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바쁜 분의 시간을 뺏는 거 아닌가 싶네요.”
“괜찮습니다.”
윌라드는 루이스가 콕 집어 자신을 지목했다고 했다.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한다 해서 누군가 이익을 보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루이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윌라드 크루그먼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진심이라 없는 말일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런데 왜 모른 척 하는가. 다이무스는 들어오라는 권유에 루이스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명왕의 집다운 인테리어지만 그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바깥보다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이었다. 다이무스가 잘 관리된 방을 둘러보며 습관처럼 사각을 찾는 사이 루이스가 창문을 열었다.
“정말로 할 일이 없을 겁니다. 대외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앨리셔를 마중가거나 가끔 산책하는 갓 뿐이니까.”
“그래도 제 일입니다.”
“그럼 좀 쉬어간다 생각하세요.”
루이스는 창을 등지고 미소 지었다. 햇살이 물에 닿아 부서지며 오색 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듯이.
다이무스는 집어삼켰던 숨을 몰래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자리를 권하며 침대에 앉았다. 그의 집이고, 방이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다이무스는 침대에 있는 루이스가 신경 쓰였다. 이글이나 벨져가 그랬다면 눈길을 주기는커녕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텐데. 창문을 열었음에도 방안이 더웠다. 방주인은 편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초면이나 다름없는 타인의 방에서 편하게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스가 신문을 펼쳐들었다. 다이무스는 집에서 보려고 챙겨온 서류를 꺼냈다.
코끝에 도는 향기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잠시 존재를 잊었던 루이스가 양 손에 잔을 들고 앞자리에 앉았다.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보기 시작한 서류였건만, 보다 보니 그만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집중해버렸다. 다이무스는 펼쳐놓은 서류를 한 데 모았다.
“차랑 커피 어느 쪽이 좋을지 몰라서.”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방해될 것 같아서요. 차? 커피?”
“그럼 커피를.”
루이스는 다이무스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남은 잔에 담긴 홍차는 곧장 그의 입으로 향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기왕 쉬는 김에 체스 하실래요?”
별로 어려운 요구도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눈을 빛내며 둥근 탁자 위에 체스 판을 가져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별로 표정이 변한 것도 아니지만 신이 난 게 빤히 보이는 그가 소년같이 귀여웠다. 다이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고 커피를 마시며 판이 채워지길 기다렸다. 동생들과 놀아주는 건 이미 십년도 더 전에 졸업했지만, 고작 두 살 어린 사내는 제 혈육들보다 훨씬 더 귀여운 동생 같았다.
이런 동생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을 텐데. 무심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유년기를 상상하던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걱정하던 앨리셔를 떠올렸다. 둘은 피가 이어져있지 않아도 좋은 남매임에 틀림없다.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한 때 잠이 들기 전 눈을 감고 바라던 '귀여운 동생'에 대한 환상과 이상을 전부 모아놓은 사람 같았다.
다이무스는 기꺼이 루이스가 양보한 흰 말을 잡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처음에 봐준답시고 악수를 둔 게 아까워질 정도로 어렵다. 많이 고민하고 두는 것도 아닌데 루이스의 수는 거침이 없었다. 이기긴 힘들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수를 되짚으며 엷은 미소가 걷힌 루이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예리한 눈매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눈을 사로잡는다. 예쁘게 웃는 얼굴보다, 오히려 이 쪽이 진짜가 아닐까.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던 다이무스는 비숍을 움직였다. 아니, 실수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돌이킬 수 없는 악수를 둔 다이무스는 낮게 신음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무 봐주시는데요.”
“그만.”
“벌써요?”
다이무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봐줬다 해도 진 건 진 거다. 루이스가 슬쩍 웃고는 말을 돌렸다. 이겼는데도 썩 즐거워보이지 않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뭔가 굉장히 실망시킨 것 같은 기분이다. 다이무스는 제가 불편해한다고 오해를 하나 싶어 탁자 쪽으로 몸을 숙였다.
“한 판 더 두겠나?”
“봐주기 없이?”
“그래.”
“좋아요.”
또 얼마쯤 말을 움직이며 수를 주고받았을까, 마침내 루이스의 흑색 킹을 잡은 다이무스는 가볍게 체크메이트 선언을 했다. 순순히 항복한 루이스는 오히려 아까보다 후련해보였다. 훨씬 나아진 얼굴에 덩달아 기분이 나아진 다이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말을 정리하다 고개를 든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고, 루이스가 얇게 눈을 휘며 웃었다. 오후의 햇살에 눈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순간 숨을 멈췄던 다이무스는 한 박자 늦게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기습만큼이나 위험한 미소다. 다이무스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를 바로 볼 수가 없다. 잠시 머물 곳을 찾아 헤매던 다이무스의 눈은 장식장 위 시계에 멈췄다. 고작 두 판을 두었을 뿐인데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걷었던 소매를 내려 소매 단추를 잠갔다. 그 사이 체스 판을 다 정리한 루이스가 다이무스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다이무스는 슬쩍 몸을 돌렸다. 갈고닦은 몸이 부끄럽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그를 흘긋 돌아보며 눈치를 주자 루이스가 멋쩍게 웃었다.
“아, 시간이. 슬슬 나가볼까요.”
외출인가.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둘이라 그다지 준비할 것도 없다는 게 그나마 기꺼웠다. 재킷을 집어 들고 모자를 쓰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루이스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따라 뒷자리에 앉아야 할지, 기사 옆 조수석에 앉아야할지 망설였다.
“뭐해요?”
“아닙니다.”
문을 열고 옆자리를 비운 채 기다리는 루이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문을 닫았다. 바로 출발하는 차는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리고, 루이스는 창틀에 팔을 올린 채 밖을 바라봤다. 멍하니 정면을 보던 다이무스는 작은 콧소리에 옆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매끈한 턱선과 옆얼굴이 지난 밤 기차에서 본 것과는 또 달랐다.
루이스의 옆얼굴을 보던 다이무스는 너무 빤히 쳐다보는 건 신사로서 할 행동이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다이무스는 무릎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말이 많은 것도, 사교성이 좋은 것도 아니다. 다이무스 홀든은 오히려 너무 말이 없어서 답답하단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겐 말을 붙이고 싶다. 침묵이 어색한 것도, 그가 불편하게 구는 것도 아니지만 다이무스는 루이스와 대화가 하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한참 망설이다 백미러로 루이스를 보곤 운을 뗐다.
“어디로 가십니까.”
루이스가 차에 탄 뒤 처음으로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돌렸다. 다이무스에게 향한 붉은 눈동자가 잠시 그대로 멈춰 있다가 슬며시 풀렸다.
“앨리셔의 수업이 끝날 시간이라서요.”
“경호원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왜 굳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앨리셔는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공성전에 투입되는 사이퍼다. 그녀보다 열 살이나 많은 루이스보다 강한 게 당연하다. 불한당을 만났을 때 오히려 불한당의 신변을 걱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할까봐 나름 돌려 말한다고 한 건데, 루이스는 단번에 뜻을 파악했다. 머리가 너무 좋아도 탈이다. 혹시 열등감을 자극한 걸까.
“능력이 보잘 것 없어도, 오빠는 여동생이 걱정되는 법이거든요.”
차분한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해서, 열등감이나 질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나마 마음을 졸인 게 민망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다이무스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침묵을 가르는 목소리에 눈을 맞추자 루이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말 놓으셔도 돼요. 아까처럼.”
말을 놓은 적이 있었나. 다이무스는 기억을 뒤졌다. 오늘이 정식으로 경호를 맡은 첫날이고, 전투가 아니라지만 이 역시 엄연히 임무다. 하물며 경호 대상에게 하대를 하다니. 다이무스의 머리가 빠르게 기억을 되짚는 사이 루이스가 눈꼬리를 휘며 작게 웃었다.
“왜, 체스할 때요.”
“.......”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그만 낭패의 한숨을 지었다.
“편하게 하세요. 저도 그 편이 편하고.”
루이스가 말을 덧붙이며 재킷의 단추를 잠갔다. 차가 멈추고, 다이무스에게 싱긋 웃은 루이스가 차에서 내렸다.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예상 외로 루이스 밀러 경호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임무는 임무. 그것도 굉장한 중책이다. 다이무스는 차에서 내려 루이스의 뒤에 섰다. 앨리셔가 다니는 하교 정문엔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나오고 있었다.
“루이스라고 불러도 돼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앨리셔의 모습을 찾으며 하는 말엔 두 번이 없다. 다이무스는 정답을 말하고도 석연치 않아 루이스를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불만을 가득 안고 침묵했다. 이글의 변덕이 옮기라도 한 걸까. 거절한 건 자신인데도, 기분이 상했다.
“아, 오빠!”
“안녕, 앨리셔. 잘 지냈어?”
“아침에 인사하고 얼마나 지났다구요. 아, 다이무스씨도 안녕하셨나요.”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한 남매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잠시 멈춰있던 다이무스는 고개를 움직여 인사했다. 앨리셔는 두말할 것도 없고,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앨리셔의 가방을 대신 든 루이스는 누가 봐도 한 번쯤 돌아볼만한 남자라 지나가던 학생들의 발길이 멈췄다. 그냥 같이 서있는 것만으로 그림이 되는 남매라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다. 다이무스는 더 사람이 많아지기 전에 차문을 열었다.
“타시죠.”
“자, 아가씨 먼저.”
“감사합니다.”
뒷자리에 두 사람이 타고, 문을 닫은 다이무스는 자연스레 남은 조수석에 탔다. 선택지가 없었던 것 뿐이지만 왠지 섭섭했다. 두 사람은 정답게 떠들고, 다이무스는 잠자코 앞을 보며 두 사람의 둘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학교생활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내놓는 앨리셔와, 그녀에게 맞장구치며 귀기울여주는 루이스는 그야말로 자상한 오빠였다.
“우왓!”
“오빠!”
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에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명왕의 자녀들이 탄 차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 일. 다이무스는 두 사람이 무사한 걸 먼저 확인하고 검을 쥔 채 내렸다. 꾸물거리는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우였습니다.”
“오빠, 괜찮아요?”
“응. 너무 그렇게 보호해주지 않아도 돼.”
“아, 죄송해요.”
루이스는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앨리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갈등이 격화된 능력자전쟁을 고스란히 겪은 세대니 무리도 아니었다. 지난 몇 년도 대학에 갔다고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피신해있었다는 게 명왕의 친아들에 대해 범람하는 소문 중 가장 유력한 설이었다.
딱히 소문을 믿는 건 아니지만, 다이무스 궁금했다. 이 데운 우유같이 말간 남자의 과거가, 베일에 싸인 그를 알고 싶다는 욕구가 차올랐다. 더, 알고 싶다. 다이무스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그러쥐었다. 아침에 혼자 차를 타고 올 때 느꼈던 묘한 열기가 여전히 손끝에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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