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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Scarface. 02.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한 다이무스는 따라 나갈 필요도 없게 준비된 식료품들을 보고 찬장 가득 들어찬 통조림에서 눈을 돌렸다. 베이컨을 꺼내고, 계란을 꺼내 팬을 달궜다. 간단하게 먹는 거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직접 겪어본 게 아니니 섣불리 판단하는 건 금물이지만 루이스는 영국인이었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부엌을 맡기긴 불안했다. 달궈진 팬에 베이컨을 먼저 올리고, 양상추를 흐르는 물에 씻는 중에 큰 소리가 났다. 계단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다이무스는 불을 끄고 부엌을 나갔다.
“루이스!”
계단에서 내려오다 굴렀는지, 루이스가 머리를 잡고 낮게 신음했다. 약한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다이무스는 몸을 웅크리는 루이스를 일으켜 앉히려했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난 것도 아닌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게 심상치 않았다.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몸을 안아들었다. 이상하리만치 가볍다.
이렇게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대체 왜 퇴원을 하고 불편한 조건을 받아들였는가. 다이무스는 발로 문을 열고 루이스를 침대 위에 바로 눕혔다. 상태를 살피는 건 그 다음이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다른 손으론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의 숨이 차츰 가라앉았다.
겨우 진정이 됐는지, 붉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다이무스를 향한다. 다이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군.”
“…괜찮습니다.”
“이게 괜찮은 거라고?”
루이스는 머리를 누른 다이무스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제대로 힘도 주지 못하는 주제에, 괜찮다고 하는 건 허세라고 하기도 안쓰러울 뿐이었다. 루이스는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이 정도로 안 좋은 줄은 몰랐다만.”
“잠깐 현기증이 나서 그런 겁니다.”
적대세력의, 그것도 자신의 감시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거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고, 다이무스가 아는 결정의 루이스는 그런 데 약은 수를 쓸 사람도 아니었다. 읽지 못한 다른 수가 있는가. 다이무스는 이 집 문을 열고 들어오던 때보다 더 안색이 안 좋은 루이스의 얼굴을 보며 이 일을 정한 회사의 수뇌부와 연합을 떠올렸다. 홀든을 겨냥한 함정일지도 모르고, 연합의 계략일 수도 있다.
그냥 무시하고 넘기는 게 최선이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이 때 괜히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알고 있다. 다이무스는 신중해야 했고,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됐다. 그래야 한다. 응당 그래야 했다. 하지만 다이무스는 눈 앞의 남자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눈과 상황을 모두 지워버려도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숨을 멈출 것 같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음 절벽 끝에 서서 기우뚱 쓰러질 것만 같은 그였다. 서늘한 전의를 풍기며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과거의 루이스가 아니다. 전장이 아니더라도 흘러나오던 냉기였다. 이렇게 약한 사내가 아니었는데.
다이무스는 베개를 세워 루이스의 등 뒤에 놓고, 이불을 끌어다 무릎을 덮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자신만큼이나 아무 말 없이 제 도움을 받는 그가 낯설었다.
“쉬어라.”
“…다이무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릎을 모아 앉은 루이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모습을 보려 한 게 아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느릿하게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슬며시 웃었다. 쓰디 쓴, 부서지는 듯한 미소에 다이무스의 얼굴이 굳었다.
“저도 이렇게 빨리 들킬 줄 몰랐습니다.”
“…그걸 말하는 이유가 뭐지?”
“숨겨봤자 소용 없을 테니까요. 한동안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이 무슨 어리석은 발상인가. 다이무스의 눈에 힘이 들어간 것과 달리 루이스는 한 짐을 덜었다는 듯 베개에 몸을 기대고 다이무스와 눈을 맞췄다. 그는 저를 속이려 했다는 것에 불쾌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냐는 듯 다이무스를 바라봤다.
다이무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연합의 영웅이 안타리우스의 습격에 당해 병원 신세를 오래 지고 있는 게 좋을 리 없다. 그건 연합도 회사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웅'이기에 더더욱. 다이무스는 이제야 겨우 왜 자신이어야 했는지를 깨달았다.
루이스가, 능력자들의 영웅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 불안과 공포가 만연한 능력자 세계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불안과 공포는 안타리우스를 비롯한 어둠의 세력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다. 그들은 공포와 불안을 먹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파고들어 세력을 늘리고 회사와 연합,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 전체를 혼란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더 기세등등하게 활개를 치고 다닐 테고, 끝내는 연합과 회사가 손을 합쳐도 막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이무스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마지 못해 그가 원한 대답을 내놓았다.
“모르는 걸로 하겠다.”
“고맙습니다.”
“따로 필요한 건.”
루이스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다이무스는 그대로 돌아섰다. 연민인지 무엇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어지럽게 섞이며 가슴을 짓눌렀다. 누구의 의견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설득하는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모두를 위해서'라는 그 말 한 마디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 가혹하고 부당한 요구에 싫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래. 마치 과거에 가문을 위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계단을 내려오던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쓰러졌던 자리에 멈춰섰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더 무거운 역할을 떠맡고 말았다.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있는 침실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간단하게 하려던 점심이었는데, 편하게 할 수는 없게 돼버렸다. 다이무스는 꺼내놓은 계란과 다 식은 베이컨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오, 홀든 경.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막내! 그래서 저쪽이랑은 어때?”
오랜만에 만난 회사의 용기사들이 살갑게 다이무스를 맞았다. 다이무스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한 침대에서 자는 걸 빼면 딱히 불편한 건 없다. 첫날 합의한 대로 다이무스는 그가 보이는 곳에서 업무를 보고,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같은 말 같지만 전혀 다르다.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는 질문에 다이무스는 그저 다르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찾았다. 그는 연합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제게는 보여주지 않은 서글서글한 미소에 다이무스는 시선을 거뒀다. 그걸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드렉슬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면 어디 에이스까지 나서야 하겠냐. 그가 작게 덧붙인 말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들킨 후로 두터운 벽을 약간 허문 것 같긴 하지만 결정의 루이스는 비밀을 쉽사리 터놓을 인물이 못 됐다.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요?”
타라의 목소리에 화기애애하게 안부인사를 나누던 이들이 싹 입을 다물었다. 타라와 루이스가 서로 못 잡아 안달이 난 사이라는 건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고, 그 둘의 신경전을 막아서던 여제는 이제 없었다. 연합 쪽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루이스에게 쏠렸다. 루이스의 눈치를 보는 그들을 두고 다이무스는 타라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누구고 할 거 없이 자리에 참석한 능력자들이 불과 얼음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야 물론 회사와 연합의 축이 되는 둘이니 회의에 빠질 수 없지만 이래서야 초장부터 삐걱거릴 판이었다. 서늘한 냉기가 가라앉은 공기 속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타라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루이스,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서류를 정리하는 타라.
하나 둘 눈치를 보며 자리를 채우고 마침내 루이스가 둥근 테이블로 다가와 다이무스 옆에 앉았다. 타라와 정반대 자리라곤 하지만, 굳이 다른 자리를 두고 제 옆자리에 앉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몸은 좀 어때?”
“그쪽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럼 다행이네. 바로 실전에 투입할 인력도 부족한데.”
“돈 몇 푼에 휘둘릴 정도로 궁핍하진 않아.”
“어머, 그랬어? 몰랐네.”
아니나 다를까 가벼운 안부로 시작한 대화가 채 일 분도 못가 살벌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둘의 신경전은 어디까지나 있는 일이었기에 다이무스는 그만 하란 뜻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자자, 그만 하고. 이러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연합의 아론 휴톤이 사람 좋은 말투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루이스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이었지만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팔걸이에 얹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다이무스는 못 본 척 했다.
“좋아요.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안타리우스가 여기저기 활개를 치고 다니는 사이에 우리는 근거지를 급습해서 안개수집장치를 파괴합니다. 이미 윗선에서 얘기가 끝난 거니까 더 할 말은 없고, 인선을 확정하고 세부 작전을 세우면 그걸로 회의는 끝. 어때, 간단하죠?”
타라는 안경을 올리며 싱긋 웃었다. 루이스는 가만히 그녀를 노려보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지는 바람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이무스는 지금 루이스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잔뜩 힘을 준 미간. 어지간히 몸이 안 좋은지 의자 팔걸이를 쥔 손에 살얼음이 꼈다. 이쯤 나섰어야 할 루이스가 말이 없자 아론 휴톤이 입을 열어 연합에서 내정한 인선을 터놓고, 로라스가 그 대화에 끼어들며 타라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사이를 틈타 다이무스는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움찔한 루이스가 한 박자 늦게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다이무스에게 눈길을 줬다. 잡은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려 맞잡자 얼음이 녹아 손을 적셨다.
“그래서, 아무리도 토마스가 괜찮지 않을까…하는데…. 루이스?”
“아니. 안돼.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토마스를 내보내기엔 위험이 커. 차라리 재단의 챌피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때론 실전이 더 큰 경험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언제까지 후방에서 깨작거리고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래?”
타라의 도발에 루이스가 눈을 치켜떴다. 여제가 없는 그에겐 여유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
“…좋습니다.”
의외의 답에 앉아있던 이들의 눈이 루이스에게 쏠렸다. 루이스는 다이무스와 잡았던 손을 놓고,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 양손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당신이 동행하는 걸 조건으로.”
“…좋아.”
타라는 루이스의 눈을 바라보다 시원하게 긍정하고 펜을 움직였다. 서로 한 발씩 물러난 셈이다. 루이스에게 온통 신경을 집중하느라 잠시 흐름을 놓쳤던 다이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묵을 유지했다. 누군가 질문이라도 했으면 곤란했겠지만 평소에도 과묵한 다이무스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나랑 새끼 결정사가 전방에서 연구소 파괴를 맡는 걸로 하고…. 사방에 둘씩은 배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후방은 내가 맡지. 휴톤과 레베카가 각각 측면을 맡아줘.”
“좋아. 우리는 이쪽에 있는 용기사 둘.”
“윽….”
드렉슬러가 낭패를 봤다는 얼굴인 반면 로라스는 화색을 띠었다. 그가 연합의 아론 휴톤을 흠모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아무래도 좋은 기회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보가 새지 않게 시행일만 직전에 고지하는 걸로 남겨놓고 나서야 회의가 얼추 마무리 됐다.
다이무스는 내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꽤 시간이 지나서 오늘 은행 업무를 보긴 무리일 듯 싶었다. 타라는 서츄철을 챙기며 일어나 냉큼 도망가려는 드렉슬러를 잡아 세웠다. 또 서류를 미루고 공방에 틀어박혔겠거니 어림짐작했다. 늘상 있는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타라는 회의실을 나가기 전, 다이무스를 불러세웠다. 무언가를 부탁할 때, 미안해하는 얼굴로.
“홀든. 그럼 수고해줘. 둘이 세트잖아?”
다이무스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둘이 세트, 라는 건 물론 지금 상황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 건지도 모르고,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라가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지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걸까. 루이스의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일이 늘 것이라는 표현인가, 그도 아니면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쉬며 그 사이 물이 마른 손을 그러쥐었다.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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