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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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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이런 녀석을 받아준 걸까. 벨져는 한순간의 변덕을 후회했다. 덕분에 수월하게 갈 길을 돌아 돌아가고 있다. 얼음심장은 무슨. 세월에 날카롭게 벼려졌나 했더니 여전히 온건하다 못해 물러 터졌다. 연합의 동료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벨져의 곁에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안타리우스와 인식의 문, 그리고 연인을 잃은 남자.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안타리우스를 쫓던 벨져는 연합으로 돌아가려던 루이스를 낚아챘다. 물론 잡는다고 잡힐 녀석이 아니기에 남아있는 건 그의 의지기도 하다. 벨져는 그 날 펍에서 루이스를 주운 제 변덕과 그의 협조가 무슨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헤아리지 않았다. 녀석은 여전히 속을 모를 놈이고, 서로 깊이 얽히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마주한 과거의 실수는 예상 외로 덤덤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라는 걸 알았으면 손을 뻗지 않았을 텐데. 넓은 아량으로 따뜻한 침대를 제공한 벨져는 아침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제 심중이나 캐는 루이스를 마주했고, 그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루이스가 순순히 내놓은 정보는 꽤나 유용했다.
여제가 떠난 새로운 공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 곳을 찾는 과정엔 어김없이 안타리우스가 등장했다며 자신이 본 것과 그림자로만 알 수 있는 것들, 유럽을 헤집고 다니면서 알아낸 정보는 벨져가 혼자 수소문하며 모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벨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꽤 쓸 만한 길잡이였다. 능력도 확실하고, 시간이 흐르며 다져진 경험에 나름 쓸만한 머리까지 갖췄으니 껄끄러운 과거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것만 아니라면 먼저 나서서 친분을 쌓으려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 사사건건 부딪히는 게 문제였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과 태생, 경험이 충돌했다. 양보? 녀석과는 원래부터 상성이 안 좋다. 벨져는 혀를 찼다.
알프스 산맥에 연구소가 있다는 걸 알아낸 것 까지는 좋다. 그 공은 인정한다. 그래서 릭과 함께 알프스까지 왔고, 대낮에 돌아다니는 안타리우스의 연구원도 발견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내놓은 수단과 방법은 벨져의 성에 차질 않았다. 고작 열쇠와 신분증을 훔쳐 연구소 안을 둘러보는 거라니.
물론 힘으로 뺏는 것 보다 잠시 잃어버린 걸로 하는 게 위험부담이 적겠지만, 벨져는 열이면 아홉 그의 편을 드는 릭도, 거 보라며 으스대는 녀석도 탐탁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맞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다. 벨져는 해가 지자마자 사람 많은 펍의 구석탱이에 처박혀 영국과 미국의 차이에 대해 수다나 떨고 있는 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화기애애한 꼴이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목적이 뭔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펍의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소문에는 취향이 그쪽이라던데. 과연 농부들과 다른 말끔한 차림새에 여자가 추근덕거려도 눈길 한 번 안 주는 게 소문이 확실한 것 같았다. 남자의 눈이 닿기 전, 벨져는 머리까지 뒤집어쓴 후드를 더 당겨썼다.
한가롭게 디저트에 대해 얘기하던 루이스를 쏘아보자 슬며시 눈을 돌린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눈짓을 주고받은 루이스가 남자가 볼 수 없게 등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바뀐 분위기에 릭도 목소리를 낮추고 눈치를 살폈다. 뭔가 계획이라도 있는 게 아니었나? 루이스는 흘긋 남자를 보고는 반쯤 남아있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앉아서 서너 잔은 마셨던 것 같은데 얼굴 색 하나 안 변하는 녀석이 릭의 잔까지 잡아 쭉 들이켰다. 열쇠를 훔치든 남자를 납치하든 뭘 해야 할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벨져는 눈을 찡그렸다. 그 사이 남자가 두 명째 여자를 거절했다. 낭패라는 듯 펍 안을 기웃거리던 남자가 바에 앉았다. 바텐더에게 무언갈 은밀히 속삭였지만 바텐더는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다간 남자가 가버릴 판이다. 벨져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루이스를 채근했다.
“저 쪽?”
“아니. 너 말고. 넌 너무 눈에 띄어.”
벨져는 불만의 표시로 살짝 눈을 찡그렸으나 애석하게도 루이스의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래서 너무 아름다워도 탈이라니까. 루이스는 곤란해 하는 릭을 한 번 올려다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를 향해 걸어가는데, 순식간에 표정이 변했다.
루이스는 그의 옆에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처연한 얼굴하며, 살짝 내리깐 눈, 거기에 얼음도 없이 마시는 독한 술. 누가 봐도 실연을 당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너무 태연해서 잊고 말았던 이유를 다시 깨달을 정도였다. 연거푸 잔을 비운 루이스 옆, 남자가 루이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무어라 말을 걸었다. 작은 목소리라 뭐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순간 팽팽 돌아가던 생각이 멈췄다. 그를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한 팔에 턱을 기대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술을 마시던 녀석이 말을 거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사르르 웃는데,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마치 몇 번이고 해본 사람처럼.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는 남자의 팔을 잘라내고 싶은 충동에 이를 악물었다. 헛웃음이 샜다. 사내새끼가 눈웃음을 치는 꼴 하고는. 무슨 생각인가 했더니 고작 한다는 게 저런 싸구려 수작질이라니, 같잖기 그지없다. 실망하기도 아까울 정도로 기가 차는 수준이었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펍의 벽에 등을 기댔다. 루이스는 아예 그를 빤히 쳐다보며 속살거리고 있었다. 펍은 시끄러웠고,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남자는 기분이 좋았고, 루이스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히 입을 여는 건 추임새를 넣는 것 뿐이다.
남자가 들뜨면 들뜰수록 벨져의 기분은 수직 하강했다. 저 녀석이 뭘 하던 신경 쓸 바가 아니지만 저렇게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갑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루이스 앞에 놓인 잔에 술이 다시 채워지고 남자 앞에도 잔이 늘어섰다. 가끔 속삭이는 말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다 아주 침대까지 갈 모양이다. 남자의 손이 루이스의 어깨에서 등까지 내려갔음에도 루이스는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도 넣지 않은 위스키를 마실 뿐이었다. 저게 진짜 취했나. 남자는 거부하지 않는 게 동의의 표시라 생각했는지 등줄기를 따라 훑으며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벨져의 인내심도 딱 거기까지였다.
“어이, 그 손 놓지.”
“뭐야, 그쪽 애인?”
“애인...?”
루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진짜 취한 건지 표정이 나른했다. 무슨 짓을 하는 짓이냐며 눈으로 묻자 루이스가 씩 웃었다. 저 새끼가...! 벨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남자는 루이스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글쎄, 저런 타입 별론데.”
루이스가 배실배실 웃으며 순순히 끌려가자 남자가 비웃음이 분명한 웃음을 터트렸다. 더 참아줘야 하는가. 명백히 저를 놀려먹고 있는 그의 그 잘난 얼굴에 당장이라도 한 대 휘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예 머리가 없는 놈도 아니고, 완전히 술에 취한 것도 아니니 뭔가 하려는 게 있을 것이다. 벨져는 꾹 눌러 참았다.
“집착이 심한 남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지.”
“뭐 이 새끼야?”
벨져는 기어코 제 속을 뒤짚어 엎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루이스는 슬쩍 웃더니 남자 뒤편으로 던지라고 눈짓했다.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일어났다. 제정신이 분명한 차가운 눈빛에 벨져는 자신이 그의 계획대로 놀아났다는 걸 알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너 뭐야?”
남자가 쓰러진 루이스를 넘어 벨져에게 성큼 다가왔다. 취한 척,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척 그를 붙잡은 루이스가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미안해요. 잠깐, 윽....”
그의 가슴에 기댄 루이스가 숨을 고르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눈을 찡그리며 낮은 한숨을 내쉰 그는 뒷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바 위에 올렸다.
“저쪽 것까지.”
바텐더가 빠르게 지폐를 셌다. 루이스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고는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지 루이스를 바라봤다. 벨져에게 걸어온 루이스가 손목을 잡았다.
“가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벨져는 남자를 응시하며 루이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는 그는 정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서, 뿌리칠 수 있음에도 같잖은 연인놀이를 계속했다.
“미안.”
펍을 나오자마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놓고 바로 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벽에 기대서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벨져는 안에서 꾹 참았던 일을 하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윽...!”
각오할 새도 없이 얻어맞은 루이스는 그대로 엎어졌다. 비릿하게 퍼지는 피맛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다. 루이스는 주먹을 쥐고 화를 참고 있는 벨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한 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하하, 그러게.”
더 맞을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전보다는 철이 든 모양이다. 루이스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진심으로 때려서인가,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급하게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킨 것과 맞물려 속까지 울렁거렸다. 루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덕분에 챙겼어.”
벨져는 루이스가 꺼낸 지갑과 입술이 터져 흐르는 피를 핥는 루이스를 번갈아보고 그가 내민 지갑을 받아들었다.
“배운 거 없는 거리의 고아라서.”
묻지도 않고, 보기만 했을 뿐인데 루이스가 말을 덧붙였다. 벨져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코웃음을 흘리고 지갑에 들어있는 명함과 고리에 매달린 열쇠를 떼어냈다.
“좋은 지갑이네.”
“좋기는.”
볼 일을 마친 벨져가 다시 지갑을 루이스에게 던졌다. 루이스는 지갑을 살피다 펍의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나온 릭이 서글서글한 미소로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잘 됐소? 아니, 루이스 그대 입술이.”
“성질이 좀 더러워서 말이죠.”
“아직 덜 맞았나보군.”
“이것 좀 펍 안에 버려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소.”
루이스는 릭에게 지갑을 건네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닌 척 사람을 다루는 게 능숙하다. 벨져는 혀를 찼다. 하여간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다. 주먹을 털며 검자루를 쥐었다 놓자 루이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 담배를 물고 눈을 감은 루이스는 슬퍼보여서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거니와, 그와 정다운 대화를 할 사이도 아닌데 왜 자꾸만 시선이 가는지 모를 일이다.
슬쩍 눈을 뜬 루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졌음에도 반쯤 뜬 눈만은 붉게 빛나고, 그 나른하고 퇴폐적인 눈빛에 순간 벨져는 침을 삼켰다.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뱉는 녀석의 얼굴에 묘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아까 펍에서 남자에게 짓던 눈이 아니다. 도발도, 유혹도 아닌 그저 흡연에 불과한데 야릇한 분위기가 벨져의 입과 발을 얼려 꼼짝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릭이 나오자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끈 루이스가 방금 그 얼굴과 분위기는 전부 허상이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드디어 숨통이 트여 벨져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내가 이 벨져 홀든이 분위기에 압도당했다고? 고작 저거 따위에? 언짢아진 이유를 찾아낸 벨져는 후드를 뒤집어쓴 루이스의 뒤통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하여간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녀석. 따지고 보면 이 일도 다 제 멋대로 자기 잘난 맛에 한 거 아닌가. 사람을 들러리로 쓰기나 하고. 벨져는 루이스의 멱살을 잡아 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한 대 더 패주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릴 것 같다.
멀쩡히 걷던 녀석이 비틀거리지만 않았어도 어깨를 잡아 돌려세워 그 면상에 한 대 갈겨주었을 텐데. 릭과 걷던 녀석이 그의 팔을 잡으며 낮게 신음했다. 멀쩡해 보인다 했더니, 급하게 마신 술이 이제야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멍청하긴. 한 손으로 입을 틑어막은 루이스를 보며 혀를 찬 벨져는 뒷주머니의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 몇 장을 꺼내 루이스에게 괜찮으냐 묻는 릭의 손에 쥐어주었다.
“먼저 가겠다. 버리고 오던지, 사람 꼴로 만들어오던지.”
황망하게 저를 바라보는 릭의 눈빛에도 벨져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녀석의 추한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고, 그 뒤치다꺼리를 해줄 생각도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으니 그걸로 끝,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면 그만인데도 자꾸만 눈에 밟혀 기어이 멈춰 섰다.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돌린 벨져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루이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를 다시 만난 날도 저렇게 취해있었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오려는지, 바람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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