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다. 어쩜 관광지에 방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는지 그것부터가 의문이지만, 그나마 묵을만한 호텔은 이미 방이 다 나가고, 작은 여인숙이나 모텔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다섯번째, 벨져는 돈을 주겠다는데도 예약을 받은 거라 안 된다며 거절하는 숙박업소를 나왔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사이 술이 좀 깼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루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의 결혼이 이렇게까지 외부인을 모을 일인가. 어쩐지 아까 펍에서도 외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더라니. 방금 전 유명한 배우가 이곳의 지역 유지와 도피해 결혼식을 올리는 바람에 기자와 팬들이 몰려 어쩔 수 없었따. 밖으로 내몰린 벨져는 혀를 차고 성큼 앞서 걸었다.
“저, 벨져.”
“뭐지.”
“저쪽에, 불이 켜져 있소만.”
루이스를 부축하며 따라오던 릭이 모퉁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모텔을 가리켰다. 외관도 별로고, 자리도 별로라 눈에 띄지 않는 곳이라 어쩐지 방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휘청거리며 걷던 루이스가 릭이 앓는 소리를 내자 자기는 괜찮다며 떨어졌다. 벨져는 병실로 돌아가야 하면서도 도움을 자청하는 환자와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주제에 남 걱정이나 하는 천치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냥 해도 될 걸 저 지경이 되도록 무식하게 퍼마신 건 어디까지나 저 머저리다. 얼마나 한심하고 미련한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벨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딸랑. 벨이 울리며 젊은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방 없어요.”
“방 둘. 다섯 배를 주지.”
“방 없는데요.”
“돈이라면.”
“아, 없다니까요.”
여급이 신경질을 내며 정리하던 수건을 턱하니 내려놓았다. 그녀의 기세에 잠시 움찔했던 벨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돌아서서 세탁물을 개키기 시작했다. 딸그랑. 기어이 릭을 보냈는지 루이스가 혼자 들어왔다. 저걸 끌고 다른 곳을 찾을 순 없다. 벨져는 꾹 누르고 한 수를 물렀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나으리. 없다니까요?”
탁. 그녀는 아예 벽에 걸린 열쇠함을 치며 짜증을 내고 돌아섰다. 벨져 홀든에게 이런 푸대접이라니. 울컥 치솟는 짜증에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코웃음 친 벨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루이스가 휘청이며 팔을 잡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돌아봤다. 아직도 술기운이 여전한지 루이스가 배실배실 웃었다. 나른한 눈웃음에 벨져의 눈도 그만 루이스에게 쏠려버리고, 짜증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약한 홍조가 돌았다.
“혹시 남는 방.... 그냥 잠만 잘 수 있으면 되는데.... 벌써 다섯번이나 허탕쳤어요.”
“아, 저.... 그게... 지금은 방이 다 나가서....”
상황을 지켜보던 벨져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는 여자와 나긋하게 말을 거는 루이스를 보고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참 잘 하는 짓이다. 벨져는 혀끝에 멤도는 말을 꾹 참아 눌렀다. 오늘 아주 작정하고 그 반반한 얼굴을 팔아먹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 지켜보고 있으니 데스크에 엎드리다 시피 기댄 루이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아래서 올려다보며 묻더니,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망설이자 눈을 깜박였다. 여자에게 애원하는 법에 도가 튼 모습은 어이가 없다 못해 사실 펍에서 취한 사람은 루이스가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게, 수리중인 별채가 있긴 한데....”
“주세요.”
얼굴을 붉히며 내숭을 떠는 여자에게 웃으며 대답한 루이스가 몸을 일으켜 벨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손을 놓은 건 좋지만, 너무 당당하게 요구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도무지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는 그였다. 루이스는 어젯밤 제 손을 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음에 드는 짓을 한 적이 없었다. 벨져는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 보란듯이 내려놓았다.
종업원이 발그레한 볼로 개켜놓은 시트와 수건같은 걸 분주히 준비하는 사이 툭, 루이스의 머리가 벨져의 어깨에 닿았다. 슬슬 한계인지 눈을 꿈벅이며 안간힘을 쓰는데, 그 꼴이 한심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따라오라는 말에 루이스가 멍한 눈으로 수건과 시트를 끌어당겼다. 벨져는 루이스가 든 짐을 빼앗아 들었다. 그냥 뒀다간 기껏 깨끗하게 세탁해 접어놓은 것들이 엉망이 될 터였다. 종업원은 수리중이라 보일러 대신 난로를 때야 한다며 빠른 속도로 이불과 시트를 갈았다. 별채까지 얼마나 된다고, 벨져를 따라 걷는 게 고작이었던 루이스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종업원은 루이스가 잠든 걸 보고 그쪽 도련님은 절대 못할거라며 난로에 불을 피우고 말 한 마디 붙이기 싫다는 듯 나가버렸다. 워낙 쌀쌀맞게 휙 나가버리는 바람에 벨져는 더 따져 묻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 못 잘 건 아니다. 왜 멀쩡히 본채를 두고 떨어진 곳에 별채를 짓는지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취해서 잠든 루이스와 여행 온 커플이 쓸 법한 더블 베드를 함께 쓰는 건 머리론 알아도 마음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이를 어찌한다. 벨져는 머리를 누이지도 못하고 잠든 루이스의 팔을 잡아 이불 위에 눕혔다. 씻지도 않은 채 사내자식과 한 침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고 바닥에 내던질 수도 없고, 소복이 쌓인 먼지는 둘째치고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소파에 재울 수도 없다. 그랬다간 당장 내일 아침엔 송장을 치우게 될 테니까.
벨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이마를 짚었다. 곱게 잠든 얼굴을 보니 두통이 밀려왔다. 산을 오르고, 펍을 구르고, 제게 얻어맞고 바닥을 구르면서 엉망이 된 루이스였다.
루이스를 두고 한참 고민하던 벨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욕실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따뜻한 물은 고사하고 누런 녹이 섞여 나오는 걸 확인한 벨져는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씻지 못할 거라면 더럽긴 오십보백보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같은 침대에서 잠들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벨져는 그치질 않는 한숨을 내쉬고 취침등 하나만 켜둔 채 불을 껐다.
그냥 누우면 되는데, 앉자마자 뻗어버리는 바람에 벗지도 못한 신발이 눈에 밟혔다. 잠시 고민하가, 결국 신발을 벗겨주고 나서야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누웠다. 루이스가 이불을 깔고 누운 바람에 벨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이불을 빼앗았다. 혼자 꽁꽁 두르고,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녀석의 숨소리가 벨져를 괴롭혔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고 루이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왜 별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을 주워버린 걸까. 탁한 주황색 불빛이 비추는 루이스의 얼굴은 어젯밤을 연상시켰다. 여전히 슬프고, 아프고, 힘든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루이스의 손이 얼굴 바로 앞에 모여있었다.
쥐면 한 손에 다 들어올 것 같이 마른 손목.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손을 거두기엔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술기운이 들어가있었다. 과연. 예상대로 뼈밖에 없는 듯 마른 루이스의 손목은 벨져의 한 손에 잡히고도 남았다. 벨져는 짧게 혀를 찼다. 봐줄 거라곤 그나마 멀쑥한 얼굴 뿐인데 그마저도 말이 아니었다. 제게 맞아 찢어지며 부르튼 입술도, 막상 이렇게 보고 있으니 영 거슬렸다.
벨져는 손에 쥔 루이스의 손목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벨져는 도로 누워 몸을 돌렸다. 그와 제 얼굴 사이에 놓인 손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술냄새와, 방안에서 나는 먼지냄새, 시트에서 나는 청결한 비누와 햇살 냄새가 제 향수 냄새와 어지럽게 섞여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손 안의 온기와 눈앞에 잠든 남자의 얼굴에 감각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보통은 불쾌하다고 여겼을 것들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벨져는 루이스의 손목 안쪽을 엄지로 어루만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손끝에 닿은 온기는 놓으면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아 놓치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