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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3.
벨져는 루이스의 방을 나서 바로 옆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 왔는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던 릭이 벨져를 맞았다.
“오, 왔소?”
“일행이 늘었다.”
“응? 동생도 떨어뜨리고 온 거 아니었소?”
“그녀석 말고, 좀 더 궁상맞은 결정사.”
“결정사? 잠깐, 그대 혹시…!”
릭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지만 벨져는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았다.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일일이 답해줄 필요는 없다는 게 벨져의 지론이었다. 릭 앞이라고 바뀔 것도 없었다. 걱정하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와준 성의를 생각해 그냥 넘어가는 아량을 보이기로 했다.
“괜찮…소…?”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나?”
“아, 아니오.”
되려 묻자 릭은 머쓱해졌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도로 소파에 앉았다. 신문과 커피를 드는 대신 불안하게 손을 매만지며 눈치를 보는 게 거슬렸다. 그래도 벨져는 참았다. 건방지고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따박따박 하는 말마다 어깃장을 놓는 녀석보다야.
“그런데…. 정말 그… 그 사람이오?”
“연합의 3급 능력자 나부랭이를 말하는 거라면 맞다.”
릭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색한 기류 속에 눈치를 보기 바쁜 그를 향해 눈을 흘기던 벨져는 먼저 시선을 거뒀다. 릭 역시 흔히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를 책망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지겹도록 들은 소리고, 지겹다 못해 무뎌진 눈빛과 표정이다. 벨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를 신경 쓰고,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건 어디까지나 세상이 제게 씌운 편견의 굴레 속 벨져 홀든이었다.
“그…. 벨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그렇다면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소?”
벨져는 창문 앞에 섰다. 안타리우스의 의식은 성공해 인식의 문은 열렸고,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은 없다. 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액자를 찾아 시바 포를 쫓는 것이고 아직 시바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남아있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한 벨져는 릭의 눈을 마주했다.
“그 녀석 하나 낀다고 달라질 건 없어. 난 내 일을 할 뿐이다.”
“…그대는 정말 대단하구려.”
“흥.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벨져 홀든이다. 그러니 앞으로 며칠만 더 신세를 지도록 하지.”
릭이 난처한 듯 시선을 피하다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이 좋다. 그보다는 루사노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의식이 성공해버렸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벨져는 팔짱을 끼고 거리를 내려다봤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둠이 내렸던 거리엔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 속에 섞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인식의 문에 다가가는 것이다. 물질적인 문의 형태가 아니기에 더더욱 접근하기 어렵고, 그나마 아는 통로는 안타리우스에 점거됐다. 릭의 공간 이동 능력이 알려졌으니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긴 무리다. 벨져는 그림자와 액자를 넘나드는 그녀들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하나는 행방을 모르고, 하나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돌아올 가능성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멍청한 남자가 적들이 포진해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할 리가 없으니. 벨져는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닌데, 자꾸만 어젯밤 어둑한 조명 아래 슬픔을 술로 삼키던 그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겠지.”
“으응?”
“어쨌거나 그림자를 열고 다녔으니 아무것도 모르진 않겠지. 액자에 대한 행방도 어쩌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지만. 릭이 눈을 깜박였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멀뚱하게 있느니 실제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벨져는 릭에게 옆방에 가보란 뜻으로 턱을 까딱였다.
“바로 옆이다.”
“그럼…. 다녀오겠소.”
벨져는 릭을 보내고 발신인도 수취인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런 게 없어도 누가 보낸 건지 뻔하다. 벨져는 시킨 일을 마무리했다는 짧은 메모를 보고 동봉된 정보를 외운 뒤 봉투째 태워버렸다.
릭이 마시던 커피에선 김이 올라오지 않고, 탄내 대신 벨져가 뿌린 향수 냄새가 방 안에 퍼지도록 와야 할 사람들이 오질 않았다. 뭔가 일이 있으면 소리라도 들릴 텐데. 벨져는 루이스가 릭과 함께 연합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떠올렸다가 다리를 꼬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이 있는데 그대로 꽁지를 내뺐으리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얕은 수를 썼던 녀석이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벨져는 다리를 꼰 채 문을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온 신경을 문 너머에 집중하고 있기를 얼마, 릭의 웃음소리와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와 냉큼 릭이 보던 신문을 집어들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신문에는 헌터에 대한 속보가 실려 있었고, 바로 얼마 전 마주쳤던 소리 능력자 자매에 대한 칼럼도 실려있었다.
“벨져, 우리 왔소.”
우리. 라는 말에 벨져는 눈썹을 꿈틀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언제 봤다고 벌써 우리라니. 벨져가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상기된 얼굴의 릭이 루이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젖은 루이스의 머리카락에 물기가 방울지고, 맺힌 물방울은 흰 목을 타고 흘러 티셔츠를 적셨다.
“칠칠치 못하긴.”
작게 중얼거리자 벨져를 향해 슬쩍 눈을 치뜨다가, 릭이 커피를 권하자 바로 고개를 들어 언제 눈을 흘겼냐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벨져는 다시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더 볼 일이 남아있는 겁니까?”
“아, 나는 벨져와 동행한 것 뿐이라.”
“그렇군요.”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자신을 빼고 돌아가는 대화에 벨져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둘을 끌어들인 건 자신이니 그 정도 주도권은 가져도 무방했다.
“루사노 수도원에서 안타리우스와 그 세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럼…. 인식의 문은?”
“내가 아는 루트는 막혔다.”
당당한 벨져의 말에 루이스가 기가 찬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를 매만지다가 벨져 쪽으로 손을 뻗었다. 흰 손이 테이블 위에 있던 지도를 잡아 펼친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손이었다.
벨져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마른 손목과 손등에 난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그 자신조차 갉아먹는 결정검 때문인지, 루이스의 손은 몇 년 사이에 성한 곳이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아온 자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도를 톡톡 두드리던 손끝이 한 점을 짚었다.
“스위스…?”
“일단 제일 가까운 곳은 인터라켄인데….”
“하늘이랑 눈밖에 볼 게 없는 곳이군.”
“여기서 소득이 없으면 거기로 가려했습니다.”
루이스는 지도를 짚으며 안타리우스의 연구소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고 릭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명한 얘기의 주인공이고 연합의 영웅인데다 방금 처음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건의 주요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저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유명인을 직접 보면 신기할 테지. 릭에겐 얼마든지 이해하고 아량을 베풀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쪽. 또, 엄연히 같은 자리에 있는 자신을 빼놓고 릭에게 말을 건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루이스에게 불쾌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그를 노려보자 애먼 릭이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아, 그……. 그렇지. 커피. 커피 가져오겠소. 얘기들 나누시오.”
황급히 일어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숨을 내쉰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조하겠다더니, 저와는 말도 섞으려 들지 않는다. 벌써부터 어긋나는 말과 행동에 벨져는 젖은 머리를 터는 루이스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흰 목덜미에 물방울이 떨어져 흘렀다.
“협조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협조하겠다고 했지, 네 비위 맞춰주며 수행원 노릇 한다고 하지 않았어.”
릭에겐 그렇게 친절했으면서, 오늘 처음 본 사람보다 못한 냉랭한 취급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건 여전하군.”
“지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홀든.”
“어떻게 믿지?”
“난 내가 들어가게 될 구덩이에 함정을 설치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거든.”
한 없이 0도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 타오르는 황혼의 색으로 정반대의 기운을 품은 눈을 마주하며 벨져는 수를 셌다. 말 한 마디 없지만 그 역시 자신의 수를 읽고, 읽고, 또 읽어 그 다음을 노리고 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기싸움. 먼저 백기를 든 건 루이스였다.
“그만. 이런 거 그만 하기로 했잖아.”
“먼저 시작한 건 너다.”
“…그래. 하지만 방금 말한 건 진짜야. 못 믿겠으면 말고.”
“믿는다.”
루이스의 눈빛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피곤하다는 듯 무심한 눈을 하고 있던 녀석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벨져를 바라봤다. 조금 즐거워진 벨져는 손을 모아 배 위에 얹고 노래하듯 말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의뭉스러운 모양이었으나 벨져 자신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고, 안다 해도 말해주고 싶지 않다. 유치한 심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벨져는 우위를 점한 이 상황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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