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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어떤 동행 02.
짙은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트리비아.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끝내 돌아보지 않는다. 부르지 않았으니까. 부르지 못했으니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손을 뻗었지만 뒤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손이 저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죽음의 구덩이로 끌어당기는 시체들의 썩은내가 진동을 하고, 그들은 저마다 분노와 원망을 내뱉는다. 그리고 지옥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지극히도 무심한 눈동자들.
동료라고 믿었던 이들은 지켜보기만 할 뿐 손을 내밀지 않는다.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것처럼 가까워서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절망은 더욱 깊어지고, 마침내 죽음의 늪에 갇히는 순간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말한다. 이것이 아무도 믿지 못한 자의 말로라고.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브랜다의 목소리.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다더니,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됐네? 가여운 루이스. 이제 넌 혼자야. 영원히.’
“헉...! 윽.... 아, 하아....”
얼음 속에 갇힌 듯한 오한에 번쩍 눈을 뜨자 쨍한 두통에 질끈 눈을 감았다. 심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세차게 뛴다. 당장이라도 속에 있는 걸 몽땅 게울 것 같은 토기와 타는 듯한 갈증이 동시에 찾아와 루이스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찬찬히 숨을 고르면 조금씩 두통이 가시고 날뛰던 심박수와 귀를 울리는 심장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서야 낯선 방에 있다는 걸 깨닫고 주변을 살폈다. 낯선 방, 그것도 꽤나 넓고 좋은 방인데다 침대까지 푹신하다. 며칠간 떠돌며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본 적도 없는데, 이런 방은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사치였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누굴 만났던 것도 같은데, 너무 취했는지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기억이 흐릿했다.
이 정도 방이면 모텔이나 여인숙은 절대 아닌데, 비용 청구를 연합으로 했다간 호되게 야단을 맞을 지도 모른다. 엄습하는 현실의 걱정에 한숨을 내쉬자 쨍한 두통이 다시 찾아와 눈을 감고 머리를 감쌌다. 숙취로 인한 두통이 가라앉길 기다리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일어났군.”
“...벨, 큼, 벨져 홀든?”
놀란 것도 잠시, 턱하고 목이 막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당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바라봤다. 경계해야 하는 상대다. 몸 상태가 완전히 맛이 가긴 했지만,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흥. 꼴을 보아하니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군.”
“잠깐, 그럼 어제...!”
“그래. 창관에 넘어가려는 널 구해줬지.”
“뭐?!”
“꽤 비싸게 치렀다만.”
“아니아니, 잠깐. 잠깐만.”
루이스는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발언에 어제의 기억을 되짚었다. 전혀, 전혀 그런 기억은 없다. 바에서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겨 거리로 내쫓겼다거나 술집에서 흠씬 두들겨 맞을 뻔한 걸 도와줬을지언정 창관이라니. 우선 벨져 홀든이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것부터가 수상하다. 루이스는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마주했다.
“허튼 소리 마. 안 속으니까.”
“그래? 유감이군.”
“목적이 뭐야.”
여유롭게 방의 창문을 연 벨져는 턱을 치켜들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목적? 글쎄, 뭐일 것 같나.”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설명하기 힘든데.”
“차여서 폐인이 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축축 쳐지는 몸상태에, 최악에 가까운 악몽, 거기에 일어나자마자 벨져 홀든까지 더해지니 맞받아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달리 멀쩡했고,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유로웠다.
“그래서 그 꼴이 되도록,”
“그 얘기는 안 했으면 하는데.”
내내 여유롭던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매서웠지만 루이스는 피하지 않았다. 이젠 그 때의 나약한 한낱 결정사 따위가 아니니까. 날카로운 적막을 깬 건 벨져의 웃음소리였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무슨 의미지?”
벨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과거의 일일랑 아랑곳 않는다는 듯이, 오히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을 대하는 것같은 태도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벨져 홀든은 분명 살기등등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루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이전에, 왜 여기서 벨져 홀든과 맞닥뜨리게 됐는가. 하필이면 지금.
“저런. 너무 어려웠나 보군. 감안하겠다.”
“홀든.”
“그래서, 새로운 공간은 어떻게 됐지?”
“내가 그걸 말해야해? 있으면 듣고 싶은데.”
“지금 자기 처지를 모르는 모양인데.”
벨져가 가소롭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침대로 다가왔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긴 하지만 절대 함부로 검을 휘두를 사람은 아니다. 이 방, 꽤 좋아보이니 검을 휘두르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완력으론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루이스는 벨져와 눈을 맞춘 채 주먹을 그러쥐며 손안에 얼음을 쥐었다. 차가운 얼음이 흉기가 될 준비를 마친 것과 동시에 벨져의 발이 멈췄다.
“지금 넌 내 인질이다.”
“인질? 농담이라면 완전 실패인데.”
“농담으로 들리나?”
루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목소리와 차가운 얼굴. 벨져 홀든은 쉽게 농을 입에 담을 사람도 아니었다. 왜 이런 곳에서 마주쳤는지, 왜 이곳까지 옮겨줬는지는 모르나 지금 그는 진심이었다.
“이 근방에서 연합을 적으로 돌리면 힘들 텐데.”
“언제는 적이 아닌 적 있었나?”
“...진짜 목적이 뭐야. 네 말대로 멍청해서 못 알아듣겠거든.”
“글쎄. 영웅씩이나 되는 녀석을 부리고 다니는 기분은 어떨까 해서 말이지.”
진지한가 했더니 다시 웃음을 머금는다. 우위를 점령한 것처럼 구는 그는 즐거워보였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글보다 더 대하기 힘들다. 루이스는 작게 숨을 토했다.
“이런 신경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동감이다.”
너무 쉬운 대답에 김이 빠졌다. 머리를 잡고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얼음을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뺐다. 얼음을 굳히느라 언 손이 화끈거리고, 손이 젖어들었다.
“트리비아가 떠난 공간에 대해서라면 미리 말해두지만 전혀 몰라. 누가 머릿속을 뒤질지도 모르니까 아예 보지 않았어. 유감이야.”
“그 쪽엔 관심 없다.”
먼저 선을 그었음에도 벨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시간 낭비에 불과한 신경전에 슬슬 짜증이 차올라 그를 노려보자 벨져가 팔짱을 꼈다. 먼저 물어봐놓고 그게 아니라면 대체 이러고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루이스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숙취와 피로로 몸상태가 개판이었다.
“그러는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홀든?”
“말해줄 의무도 없다.”
“그럼 이만 가도 되지? 길에서 뻗지 않게 해준 건 고마워. 비용은 연합으로 청구해.”
“그만. 어딜 가려는 거지?”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루이스를 붙잡았다. 쉽게 보내주리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렇다고 짜증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 도망가는 거랑, 너를 상대하는 거. 어느 게 더 효율적일까. 난 전자라고 생각하는데.”
“저런. 전자의 성공률이 높지 않은 것 같다만.”
“하아....”
이쯤 되면 답답해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이스는 세수도 못한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막 일어나서 머리도 엉망일 텐데 저 답답하고 성가신 도련님은 이 아침에도 기품이 차고 넘쳐흐르신다. 루이스는 이게 나쁜 꿈이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그대로였고, 물러날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도망친다 해도 사방이 막힌 곳에서는 무리다.
“뭐, 일단은 일종의 변덕이라고 해두지. 안타리우스를 쫓고 있다. 협조하도록.”
“내가 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악연이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이지. 네가 남은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벨져의 말에 루이스의 표정이 얼었다.
“사랑놀음에 세상 돌아가는 상황까지 모르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뭐, 그런 짐은 필요 없기도 하고.”
“그럼,”
“안타리우스의 의식이 성공했다. 거기에 웬 헌터가 어둠 속에 숨은 일을 끄집어내서 여기저기 소란이지.”
“.......”
연합에 있지 않다고 정보조차 모르는 건 아니다. 매일 앤지와는 연락을 주고 받았고, 연합은 가장 큰 사이퍼 조직답게 조직원과 지부가 각지에 퍼져있다. 트리비아와 마지막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고개를 숙였다. 시국은 위기를 넘어서 비상사태로 치닫고 있다. 이번에는 능력자 세계를 넘어서 전 세계에 전쟁의 불길이 번질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번엔 연합과 회사가 손을 잡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성이 높았다.
전쟁 후에 남는 건 승자도, 패자도 아닌 추악한 비극 뿐이다. 전쟁의 훈장으로 주어진 영웅이란 이름도 결국은 허상에 불과하니까. 루이스는 주먹을 쥐었다.
“내 목적은.”
청명한 목소리가 상념을 가르고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맑은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
“안타리우스의 힘의 근원, 인식의 문을 파괴하는 거다.”
“......그래서?”
“동행해라.”
“왜?”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악연이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이라고. 혹시 모르지. 이것도 운명일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질 나쁜 농담으로 치부했을 법한 말이었지만, 벨져의 그 오만한 미소엔 숨길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루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잠시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시작된 그 날이 눈꺼풀 아래로 스쳐지나가고, 그 때와 다르지 않은,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여유롭고 당당한 남자가 눈앞에 서있다. 또다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고, 앞에 펼쳐진 게 가시밭길이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끝내는 제 앞에 돌아올.
루이스는 트리비아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
벨져의 눈이 커졌다. 그도 예상치 못한 것 같은 반응이었지만 루이스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조하겠어.”
벨져가 눈을 깜빡였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벨져가 진심이었듯 루이스도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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