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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루이]
ㅂ밖+모바일이라 엔터 대신 줄간격~
2014년 1월에 냈던 다이루이 단편집 수록 원고
Uno.
오후 10시 28분. 모두가 퇴근하고 빈 사무실은 전기절약 캠페인에 따라 어둑했다. 한 군데만 전등이 켜져 있었는데, 그 백열등 아래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남자가 있었다.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진 지 오래였지만 업무를 마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다이무스 홀든에게 야근이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바이어에게 보낼 서류를 처리하던 다이무스는 자료 파일을 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상품개발팀 드렉슬러의 손을 거친 자료는 말 그대로 중구난방에 엉망진창이었다. 개발팀에서 뺄 수 없는 꼭 필요한 인재이고, 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신제품들은 분명 전자기기의 혁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천재이긴 하지만, 그의 서류는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제발 제대로 된 개발서를 올리라고 타라가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이 없었고, 천성이 괴팍한 아웃사이더라 주변에서 대신 서류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요령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천재 개발자의 서류는 돌고 돌아 다이무스의 손에 돌아오곤 했다. 드렉슬러의 서류는 다이무스 정도나 되는 끈기와 책임감을 가지 않고서야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그나마 요새 글씨는 알아보게 써주더니, 타라가 회장님과 함께 해외 출장을 갔다고 금세 이 모양이다. 암호해독가가 필요할 정도로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서류를 앞에 두고 다이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올려 회색 천장과 백열등을 보며 눈을 감다가 목에서 뿌득, 하고 소리가 났다.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감에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라도 마실까 싶어 일어나는데 탕비실에 원두도 그 흔한 믹스커피도 보이질 않았다.
피곤해서인지 단 게 먹고 싶었다. 비척비척 자리로 가 제일 아래 서랍의 잠금을 여는데 늘 챙겨두던 초콜릿도 보이질 않았다. 포기하고 빨리 마치려고 노트북으로 다시 눈을 돌리는데 지렁이가 기어가는 글씨에 도무지 일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문서작업을 그 좋아하는 노트북이나 스마트 폰으로 할 것이지. 이런 중요한 서류에 드렉슬러는 꼭 손으로 써서 스캔을 해서 보냈다. 타이핑 하기도 귀찮다는 걸까.
매일 아침 마시는 카페모카가 마시고 싶었다. 진한 시럽과 거품이 풍부한 스팀밀크, 거기에 에스프레소 샷을 넣고 휘핑크림을 잔뜩 얹어 자바칩을 뿌리고 모카 드리즐까지 뿌린 카페모카. 회사 아래 있는 대형 체인점 말고, 여기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에서.
높은 사무실 빌딩만 죽 늘어선 거리엔 당연히 큰 대형 체인 카페들도 많았지만 다이무스는 그 카페가 좋았다. 다른 곳과 다르게 직접 커피를 볶아서 향도 좋고,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이나 분위기, 뉴에이지 풍의 음악까지. 공간이 다른 카페에 비해 협소하다는 것만 빼면 뭐 하나 빠지지 않았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는 카페를 떠올린 다이무스는 벗어둔 재킷을 입고 멋스러운 버버리 코트를 걸쳤다. 목도리에 장갑까지 끼고 잠시 노트북을 바라보던 그는 전원을 끄고 가방 안에 정리해 넣었다.
이대로 카페에 들렀다가 퇴근할 생각이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제 자리에 켜진 전등을 끈 다이무스는 일의 능률을 위해서라며 퇴근 카드를 찍고 회사를 나섰다.
Due.
오후 10시 12분. 퇴근하는 회사원들마저 거진 다 빠져나간 카페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에 있는 거라곤 높은 회사 사무실 건물뿐이라 이쯤 되면 손님이 없는 게 당연했다. 더러 야근하는 회사원들이 지친 얼굴로 비척거리며 들어와 테이크아웃을 해가는 걸 빼면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월요일부터 명절이니 그 전 주 금요일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찍 가버리는 게 당연했다. 혼자 가게를 보던 루이스는 잠깐 창밖을 내다보며 불이 꺼진 사무실 건물들을 바라보다 슬슬 매장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꺼내다가 어차피 오늘 문 닫으면 한동안 안 나오겠지 싶어서 락스칠도 하려고 전용세재를 꺼냈다.
오후 아홉시에 출근해 아침 여덟시까지, 카페를 지키는 루이스 덕에 조그만 카페는 24시간 내내 문을 열고 밤샘 작업을 하거나 야근하는 회사원들을 맞았다. 더러는 이런 조그만 카페에서 뭐 하러 24시간 영업을 하냐고 했지만 그래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니까.
그래도 손님이 적은 건 사실이라 새벽 시간에는 다른 알바도 없이 루이스 혼자 카페를 봤다. 그 날 쓸 원두를 볶고, 부족한 건 없는지 확인하고 모자란 게 있으면 주문하고 청소하고 나면 새벽 두시 쯤.
카페를 한 번 죽 둘러보고 할 일이 없으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가끔 흘러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선곡 리스트를 수정하고 그래도 할 일이 없으면 노트북을 켜놓고 웹서핑을 하거나 드라마와 예능 프로를 봤다.
그러다 졸리면 알람을 새벽 5시 반에 맞춰놓고 테이블에 엎드려 자기도 했다. 누가 보면 정말 늘어지게 가게 본다고 해도 루이스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뭐 어떠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여섯시부터 출근하는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쿠키 반죽을 만든다. 분명 멀쩡한 반죽인데, 왜 오븐에 넣기만 하면 이상해지는 걸까. 루이스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제가 만들면 이상해진다는 건 알기에 그냥 쿠키가루에 우유를 부어 치대서 냉장고에 넣어서 반죽을 만들어두는 것까지만 했다.
그러다 여덟시 쯤 오전 아르바이트생이 오면 집에 가서 퍼질러 자고, 가끔 누가 부르면 나가서 놀다 출근하는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에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막상 본인은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바닥을 쓸고 닦고 왁스칠까지 했더니 반짝거리는 게 흐뭇한 나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루이스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다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금요일이라 아마 다들 퇴근했을 테고, 혹시 남은 사람이 있어도 이 시간이면 집으로 가지 카페에 들르진 않을 거란 생각에 카운터 안쪽의 간이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Tre.
"큼, 큼."
다이무스는 부러 크게 헛기침을 했다. 카운터 너머엔 아직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건만 앳된 청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빨리 커피 한 잔을 들고 집에 가고픈 다이무스는 평소보다 인내심이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잠에 깊이 빠졌는지 청년은 다이무스의 헛기침 소리를 듣지 못하고 위태롭게 고개를 꾸벅일 뿐이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크게 고개가 꺾이더니 퍼뜩 눈이 마주쳤다.
“어, 어어? 아, 죄송합니다.”
“...카페 모카. 휘핑 올리고 자바칩 추가에 모카드리즐.”
다이무스가 내미는 쿠폰과 카드를 받아들고 영수증과 카드, 전동벨을 함께 건넨 청년은 바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았다. 간 원두를 템퍼로 눌러 머신에 놓고 버튼을 누른 그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가져다 스테인리스 컵에 따르고 스팀기를 켰다.
졸린지 눈을 꿈벅이면서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부드럽게 거품을 내는 게 제법 오래 일한 것 같았다. 다이무스는 아침에 들러 커피를 사가거나, 혹은 누가 사오는 걸 마시는 타입이었기에 이미 쿠폰을 몇 개씩 썼으면서도 이 시간에 여길 온 적은 없었다.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에 홀더를 끼우고 생초콜릿을 두 번 펌핑한 그는 방금 전에 데운 우유를 붓고 그 위에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휘핑기를 두어 번 흔들더니 우유 거품 위에 휘핑크림이 멋지게 또아리를 틀었다.
비닐장갑을 끼고 자바칩을 우르르 올리고 모카드리즐을 휘휘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게 아침에 보는 아르바이트생보다 훨씬 능숙했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가져온 그는 무심코 덮으려다 다이무스에게 물었다.
“뚜껑 씌워드릴까요?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아니, 됐습니다.”
컵 위에 담뿍 쌓인 모양새가 흡족해 눌러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뒤돌아 빨대를 꽂고 한모금 마시면 뜨끈하고 풍부한 단 맛에 피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돌아갈 생각으로 발을 옮기는데 바닥을 디뎌야 할 발이 미끄러운 바닥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몸이 기우뚱했다. 한 손에 뜨거운 음료를, 다른 한 손으론 지갑을 쥔 채라 그대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읏!”
“어어...! 풉!”
그리고 아파할 틈도 없이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다이무스는 창피함과 함께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빨리 일어나려는데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다시 허우적거리고 만 다이무스는 일 년치 구길 체면을 다 구긴 것 같은 쪽팔림에 차마 화 낼 생각도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려는 찰나 좀 전까지 웃던 청년이 정신을 차렸는지 급히 다가왔다. 조금 전과 달리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친 덴 없으세요?”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컵이 흔들리는 바람에 커피가 흐르긴 했지만 위에 잔뜩 얹은 크림 덕에 아예 쏟아지진 않았다. 다행이 위쪽은 차가운 크림 덕에 그리 뜨겁지 않았지만 청년은 그걸 보고 주방에 들어가 걸려있던 행주를 집었다. 다이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려는 찰나 청년은 찬장을 열어 새 것으로 보이는 흰 행주에 물을 적시고 얼음을 꺼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몸을 일으킨 다이무스는 옆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고 손을 가볍게 털었다. 손에 묻은 휘핑크림에 미간을 좁히고 아직도 아픈 꼬리뼈를 매만졌다. 쪽팔림이 가시고 짜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어떻게 컴플레인을 걸까 생각하는 사이 행주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온 청년은 대뜸 손을 잡더니 물수건으로 다이무스의 손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나대지마라.”
“아, 죄송합니다. 많이 안 다치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바닥에 왁스칠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자기 때문에 넘어진 사람을 보고 웃어놓고, 정신을 차렸는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청년을 보며 다이무스는 차가운 행주로 손을 마저 닦았다. 한 겨울에 얼음을 대고 있는 것도 우습고, 화상을 입은 것도 아니라 대충 손만 닦고 있으려니 청년이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영수증 쪼가리에 빠르게 뭔가를 적어 건넸다.
“저기, 이거 제 전화번혼데 옷 세탁하시고 연락해주세요.”
그 말에 고개를 숙여 코트를 살피니 휘핑크림과 드리즐이며 커피 얼룩이 남아있어 다이무스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왁스칠을 해놓고 주의하라는 표지 하나 없이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졸던 탓에 생긴 일이 아닌가.
안 그래도 지친 탓에 빨리 가서 쉬고 싶던 다이무스였다. 평소 같았음 그저 이런 카페의 야간 알바를 측은히 여기고 됐다 했을 테지만 아까 넘어지는 걸 보고 웃은 것 때문에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잠깐 앉아계시면 다시 해드릴게요.”
그나마 눈치는 있는지 테이블의 의자를 빼주고 급히 안쪽으로 들어간 청년은 톨 사이즈 컵에 다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워낙에도 듬뿍 얹어주던 휘핑과 자바칩이지만, 조금 전보다 더 잔뜩 얹어진 모습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이번엔 직접 홀더를 끼우고 테이블까지 가져오는 청년의 발밑을 보던 다이무스는 슬쩍 고개를 들어 명찰에 적힌 청년의 이름을 살폈다. Louis. 덜도 더도 없이 딱 다섯 글자만 쓰인 금빛 명찰에 혹시나 카페에서 쓰는 예명인가 싶어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뭔가.”
“아, 루이스입니다. 문자나 전화 주세요.”
“그러지.”
다이무스는 핸드폰에 전화번호와 이름을 저장하고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뒤 컵을 손에 들었다. 아예 문 앞까지 따라 나와서 문을 열어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를 뒤로 한 다이무스는 손에 든 카페모카를 홀짝거렸다. 뜨끈하게 퍼지는 단 맛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스팀 밀크의 부드러움이며 진한 커피 향이 다른 카페들보다 나았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몰라도 아침 출근 시간대에 바쁜 나머지 급하게 내린 것보다 훨씬 나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 카페의 커피보다 맛있는, 그것도 완벽히 제 취향의 커피를 다른 곳에서 마셔본 적이 없었다. 집에 비싼 커피머신을 들여다 놓기도 했지만 뭐가 문제인지 제가 내리는 커피는 맛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골목 앞에 세워둔 벤츠에 오르기 전에 아직 쌓여있는 눈에 신발을 좀 닦고 차에 올랐다. 목을 타고 넘어가 뱃속을 뜨끈하게 데우는 느낌에 만족스러운 나머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모차르트를 틀고, 난방을 튼 차에서 시트에 몸을 기대니 따스히 퍼지는 충족감이 기분 좋았다.
더 늘어지면 이대로 졸 것 같아 창문을 약간 연 뒤 커피를 홀더에 놓고 핸들을 잡았다. 밤공기는 차고, 방금 전까지 커피를 손에 들고 있던 손은 따뜻했다.
Quattro.
루이스는 손님을 보내고 비척비척 화장실로 발을 옮겼다. 아까 빨아서 걸어둔 걸레를 들고 와 바닥에 엎질러진 커피를 닦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껏 왁스칠 한 데다 뜨거운 물 부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과 왜 하필 이럴 때 졸아버려서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대충 크림과 커피를 다 닦고 마른 걸레를 가져다 한 번 더 닦은 뒤, 주의 표지판을 가져다 세웠다.
“하아....”
이 플라스틱 덩어리 하나 갖다 놓는 게 뭐 그리 귀찮다고. 잠시 쉰다는 게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존 데다 제 실수로 넘어진 사람을 보고 웃어버리다니 제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이 나왔다.
마저 가게 안을 정리하고 그라인더를 살폈다. 얼마 남지 않은 원두를 마저 갈아 에스프레소를 내린 루이스는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느긋하게 마시며 로스팅기에 예열버튼을 누르고 미리 따로 포장해둔 원두를 꺼냈다.
매일같이 그 날 쓸 원두를 로스팅하는 건 물론 귀찮은 일이지만, 루이스는 그래야 커피 맛이 제대로 난다고 생각했다. 사실 제일 좋은 건 핸드드립이지만 일일이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뭐. 이렇게 좁은 골목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손님이 밤늦게까지 끊이지 않는 것은 다 이런 수고로움에서 온다는 게 루이스의 신념이었다.
아무도 맛없는 커피를 들고 가게를 나가게 하지 않겠다는 그 다짐은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젊은 사장 루이스가 처음 가게를 열면서 마음먹고 6년째 지켜오는 한 가지였다. 이젠 제법 단골도 생기고 입소문도 퍼져서 오전 오후 저녁 파트를 나눠 아르바이트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매출도 안정되고, 모아둔 걸로 확장을 해도 될 정도였지만 루이스는 딱 이정도가 좋았다.
모든 자리 구석구석에 제 눈이 닿고, 자기가 하나하나 손을 볼 수 있는 작은 카페. 물론 요새 들어선 돈이 생기니 욕심이 나서 빈 벽에 책장도 놓고 책이며 이것저것 인테리어 소품을 들여놓고 싶기도 했다.
루이스는 걸레를 빨아 널어두고 예열이 완료된 로스팅기에 원두를 넣었다. 도로록 도로록 커피콩이 볶아지며 내는 고소한 향이 이윽고 카페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고, 루이스는 허리에 맨 검은 앞치마의 매듭을 다시 여몄다.
날이 바뀌기도 전에 사고를 한 번 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어 졸음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황금연휴의 시작이라곤 하지만 밤샘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휴일을 반납하고 일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루이스의 기다림은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뭘 할까 잠시 고민하던 루이스는 노트북을 켜고 테이블에 앉았다. 인테리어 소품이라도 바꿔볼까 쇼핑몰에 들어간 루이스의 눈이 메인에 뜬 남성브랜드 런칭 이벤트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떡하니 걸린 디자인이 조금 전 실례를 저지르고 만 손님의 코트와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흘긋 보고 로그인을 하려는데 그 아래 뜬 런칭 기념 세일 가격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헉소리를 냈다. 아니 물론 대기업들 본사가 주르륵 늘어선 곳이긴 하지만, 임원진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명품에 월급을 붓나? 아니면 집이 갑부라도 되는 건가?
떨리는 손으로 클릭해서 죽 스크롤바를 내렸다. 주머니의 장식단추며, 소매의 버클, 안감과 허리띠까지 보고 나니 그냥 비슷한 코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드라이 세탁이었고, 다시 봐도 충격적인 가격에 루이스는 마른 세수를 하며 과연 세탁비로 얼마가 깨질까 고민했다. 모카 드리즐에 휘핑크림, 거기에 뜨거운 라떼까지 하면 잘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새해를 맞아 데스크탑을 장만하려던 계획은 접어야 할 성 싶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핸드폰 기기 할부도 안 끝났는데. 루이스는 암담한 숫자계산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비싼 옷에 커피를 쏟은 데에 별 말도 안 한데다, 톨사이즈에 휘핑크림을 잔뜩 얹자 슬쩍 미간의 주름이 가시던 걸 떠올린 루이스는 그가 아예 옷값을 물라고 할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는데다 무슨 일만 생기면 자다가도 전화를 받고 불려나오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는 루이스였다. 주로 그런 상황에 루이스가 하는 건 진상 고객 처리인데, 사실 얼굴만 봐도 그런 분위기가 풍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싸늘해 보이긴 하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한숨을 쉬다가 문득 그가 제게 반말을 했다는 걸 떠올렸다. 분위기에 압도되는 바람에 반말을 하는 줄도 몰랐다. 당황스럽고 죄송한 나머지 눈치도 못 챈 거겠지.
게다가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비싼 코트에, 그런 인상이며 태도를 봐선 엘리트 회사원이겠지 싶었다. 분명 일처리도 칼같이 해서 고속승진을 해왔을 거다. 그럼 돈도 많이 벌 텐데 이 정도 쯤은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던 루이스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잘못한 건 사실이니 옷값을 청구해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멍청한 나, 바보같은 자식.
Sei.
컵을 들고 차에서 내린 다이무스는 바로 잠금 버튼을 누르고 지하 주차장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꼭대기 층을 눌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다이무스는 빈 컵과 차 키를 식탁 위에 놓고 넥타이를 풀었다. 옷을 벗다가 코트에 진 얼룩에 살짝 한숨을 쉬었다.
뭐, 세탁소에 맡기면 알아서 처리해주겠거니 했다. 어머니께서 계절마다 옷장을 채워주시기에 그 코트가 얼마나 하는지는 커녕 제 손으로 옷을 사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 다이무스로선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일단은 마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집까지 일을 가져오지 않으려 했건만, 연말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이무스는 드렉슬러의 서류를 떠올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옷을 벗었다. 차라리 샤워라도 하면 나아질까 싶었던 그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가볍게 샤워를 하려 물을 틀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자니 아까 그 아르바이트 청년이 떠올랐다. 남자치곤 선이 가는 얼굴에 수더분하니 척 봐도 참한 학생같아 보였더랬다.
아까야 피곤하고 만사가 짜증나는 상태였던 데다 허우적거리며 넘어진 꼴을 보여서 그렇지, 정말로 세탁비를 청구할 심산은 아니었다. 애가 실수를 한 것 같지고 진지하게 화내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데다, 그 처음 잠깐 웃은 것만 빼면 아주 죄송해서 울상을 짓는 게 훤히 보인지라 더 뭐라 하기도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어머니의 안목이니 고작 카페 알바 봉급 가지곤 세탁비만 해도 부담스러울 터였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이 제법 귀엽기도 했다. 제 동생이었다면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실컷 웃은 뒤 미안해하기는커녕 실컷 두고두고 놀려먹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아르바이트라도 한다는 가정 하에.
“형! 치킨 사 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냥 생각만 했을 뿐인데 이글이 문 너머로 외쳤다. 집에 왔을 땐 사람이 왔는 지 개가 왔는 지 거들떠도 안 보던 녀석이 꼭 이럴 때만 찾는다. 아주 지가 상전이지, 상전이야. 다이무스는 못 들은 척 무시하기로 하고 샴푸를 펌핑했다. 그것도 감정을 담아 꾹, 꾹.
나가면 또 치킨 시켜달라며 찡찡 생떼를 쓸 게 분명했다. 나이는 스물넷이나 먹어가지고, 아직도 하는 행동은 열일곱 질풍노도의 시기다. 다이무스가 회사에 취직하면서 출퇴근 시간이 왕복 세 시간이 넘자 아버지는 독립을 허락하셨다.
대학을 다니던 이글은 제대로 출석도 안 하고 늘 날을 넘겨서 돌아오던 주제에 학교랑 집이 가까워지면 나아질 거라며 냉큼 따라 들어와 방 하나를 차지했다. 막을 새도 없었다. 다이무스 생의 첫 독립의 자유는 그렇게 동생의 뒤치다꺼리가 됐다.
이글은 여전히 출석을 하지 않았고, 술에 취해 날이 지나 기어들어왔으며, 학사경고까지 받았다. 다음 학기에도 F를 받으면 쫓아내겠다는 말에 이글은 휴학계를 냈다. 정말이지, 그래놓고 빨래며 청소, 요리 하다못해 설거지 한 번도 먼저 하는 법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를 헹궜다. 짜증으로 잠이 깨긴 했지만 그래도 찬물을 틀었다. 오싹하니 개운하게 드는 한기에 몸을 떨고 걸어둔 가운을 걸쳤다. 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보며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젖은 머리를 털며 화장실을 나섰다. 샤워 한 번에 피로가 한결 가시는 기분이다.
머리를 털며 새 옷을 꺼내 침대 위에 던져놓고 젖은 머리를 마저 말렸다. 미리 꺼내둔 옷을 챙겨 입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물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시끄러운 동생을 피해 문을 잠그고 이어폰을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일 다시 출근하지 않기 위해,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연휴에는 좀 쉴 수 있게 일을 빨리 마치고 싶었다. 다이무스는 검은 뿔테 안경을 꺼내 쓰고 노트북의 전원을 넣었다. 긴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망했다. 다이무스는 떠오는 아침 해와 밝아오는 제 방을 보고 절망했다. 중간에 이글이 치킨을 사달라며 문을 두드리다 못해 부술 지경이 되는 바람에 한 마디 하려고 문을 열었던 게 화근이었다.
언제 코트 주머니에서 흐른 건지, 영수증에 적힌 전화번호를 가지고 이글이 누구한테 번호를 받은 거냐며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다이무스는 일을 잠시 놓아두고 차분히 이글에게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글은 도통 들어먹지를 않아서, ‘형은 인기 많아서 좋겠네!’라는 식으로 자꾸 시비를 걸며 당치도 않는 질문을 해댔다. 쉴 새 없이 나불거리던 그 입은 결국 다이무스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치킨을 시켜주고 나서야 닫혔다. 사실 그보단 치킨을 먹느라 바빴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지만.
치킨만 시켜주고 들어가서 마저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만 고소한 튀김 냄새에 끌려 같이 치킨을 먹었다. 이글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 두 병을 꺼내왔고, 다이무스는 먹은 걸 정리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이 없었다.
어젯밤에 한 거라곤 드렉슬러의 서류를 다시 만든 것 뿐이다. 암담했다. 이래서야 퇴근하고 집에 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당장 일요일까지 타라에게 직접 전해줘야 하는 일인데, 시차를 생각하면 이제 24시간도 안 남았다. 다이무스는 일어나 세수부터 했다. 까치집이 된 머리는 대충 왁스로 넘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입었던 코트를 걸치려던 다이무스는 코트에 얼룩이 졌다는 걸 깨닫고 다른 코트를 꺼내 입었다. 목도리를 대충 목에 감고, 식탁 위 테이크아웃 컵과 함께 놓아둔 차키를 가지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에 있으면 이글이 또 저랑 놀아 달라 보챌 테고, 밥도 해 먹여야 하니 그냥 회사에서 일 하는 편이 능률적으로, 심적으로 나았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시계를 보니 7시 48분이다. 지금 출발하면 딱 8시 반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회사로 향했다.
Sette.
[ 정말 죄송해요...콜록, 콜록...! ]
"아냐, 괜찮아. 푹 쉬어."
[ 으으, 어제 애들이랑 놀아주다 그만... 콜록, 내일은 나을 거예요. ]
“난 괜찮으니까, 나을 때까지 쉬어. 어차피 오늘까지 하고 내일은 나도 가게 닫을 거니까. 목 많이 쓰지 말고, 몸 따뜻하게 하고 있어. 끊는다.”
안타까울 정도로 상한 토마스의 목소리에 루이스는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착하고 싹싹한 토마스는 같이 일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딱히 같이 일하는 사이가 아니라도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애였다.
어차피 아침에 나오는 나이오비는 주말에 안 나오고, 연휴가 코앞이니 조금 일찍 닫는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어쨌거나 여기 사장은 루이스 자신이었으니 당장 문 닫고 집에 가버려도 상관없는 것이다.
간밤을 돈걱정으로 꼬박 샌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시계를 보니 8시 반이 넘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아무도 안 찾아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찍 접어도 될 것 같다가도, 어제 한 짓을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싶었다. 어차피 전기세고 뭐고 하면 그게 그거일 것 같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른 걸레를 가져다 바닥을 닦았다. 혹시 몰라서 신발도 닦았다. 혹시 그래도 미끄러울까봐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바닥을 뽀득뽀득 닦아보는데 문의 풍경이 또로록 울렸다.
“엑...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렸더니 어제 그 손님이다. 루이스는 당혹스러웠다. 어제 마지막 손님이 오늘 아침 첫 손님이라니, 아니 그것보다 왜 하필 이러고 있을 때 들이닥친단 말인가. 루이스는 손님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 같은 걸로 드릴까요?”
애써 웃으며 말을 걸자 매서운 인상의 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오늘은 한층 더 무섭다. 어제 자길 쏘아보던 것보다 더하다. 루이스는 냉큼 안쪽으로 가려다 아직 자기가 걸레를 들고 있단 걸 깨닫고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걸레를 빨아서 널어두고, 항균 비누로 꼼꼼히 손을 닦고 나와 달디 단 카페모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뭐라도 같이 내놓으면 좋을 텐데, 쿠키는 오늘 토마스도 안 나오게 된 바람에 새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베이글과 식빵, 치즈와 햄이 냉장고에 들어있어 루이스는 자기 아침을 챙길 겸 크로크무슈를 만들 준비를 했다. 전기 팬에 햄과 빵을 올려두고, 계란을 달달달 풀어 파슬리 가루와 소금을 살짝 쳤다. 샌드위치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듣곤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없었다. 나쁘지 않다는 거지 맛있다는 건 아니니까.
앉아서 노트북 충전기를 연결한 손님을 흘긋 본 루이스는 미리 데워둔 머그에 에스프레소를 붓고 휘핑크림과 자바칩, 드리즐을 뿌리는 것으로 카페모카를 완성했다. 소반에 티슈를 깔고, 시나몬칩을 두 개 얹어서 자리로 가져가면서 루이스는 살짝 긴장했다.
“주문하신 카페모카 나왔습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의 눈은 노트북 화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바쁜가보다, 하고 돌아서서 안쪽 주방에 들어온 루이스는 팬의 전원을 켰다. 햄이 구워지는 냄새며 계란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소리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무심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지금 카페에 음악을 안 틀어놨다는 걸 깨닫고 갑자기 확 부끄러워진 나머지 뒤집개를 들고 한숨을 쉬다가 크로크무슈를 태울 뻔 했다. 다행이 제 때 뒤집어 노릇노릇 먹음직한 크로크무슈 두 개를 대각선으로 잘랐다.
접시를 꺼내 반으로 자른 크로크무슈 두 개를 올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티슈로 감싸 그 옆에 두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원래 메뉴가 아니라 별 다른 장식은 하지 않으려다 그래도 구색이나 갖추자 싶어 방울토마토 두 개와 양상추를 뜯어 한쪽에 놓았다.
더 고민하다간 크로크무슈가 식을까봐 여기까지 하고 한 손으로 접시 아래를 받쳐 손님의 자리로 갔다. 여전히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앞에서 루이스는 영업용 스마일을 띠우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아직 아침 안 드셨으면 드실래요?”
그제야 그의 눈이 루이스를 향했다. 그 회색 눈에 루이스가 잠시 움찔한 사이 살짝 한숨을 내쉰 남자가 안경을 벗고 노트북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루이스는 냉큼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와 함께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왠지 모를 열기에 뺨이 다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카페 안 난방이 너무 센가보다. 아니면 잠을 못 자서 내가 이상해졌거나.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제 몫의 크로크무슈를 집었다.
손이 기름에 묻는 게 뭐 대수이랴. 한쪽 귀퉁이를 베어물고 우물거리는데 괜찮았다. 그래, 이 정도면 뭐라 한 소리 듣지는 않겠지. 소금을 설탕으로 착각하지도 않았고 하나로 뭉치지 않게 계란물도 잘 풀었다.
실수한 거 하나 없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카운터 안쪽의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남자 쪽을 바라보는데, 간단한 요깃거리 하나에도 나이프와 포크를 쓰는 게 꼭 별 다섯 개짜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먹는 폼이었다. 그래 저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눈이 그리로 향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마냥 불편했다. 답답한 나머지 빈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던 루이스는 손에 든 걸 그냥 입 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살짝 치켜뜬 무심한 회색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아메리카노를 내려 마시려다가, 속이 답답해 그냥 찬 물을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저쪽은 나를 아는데 나는 저쪽을 모른다. 마냥 기다리며 언제 세탁비를 청구할지 불안에 떠는 것 보다 연락을 할 수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게 걸렸던 거 아닐까!
루이스는 답을 얻은 것 같은 기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바람에 무릎을 서랍에 찧어 악소리도 못 내고 몸을 수그린 채 무릎을 잡고 몸부림치다 고개를 드는데 눈앞에 남자가 서있었다.
쪽팔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한심하지만 차마 내색은 안하려는 그 표정에 루이스는 우선 허리를 폈다. 그러자 남자는 접시를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피식 웃었다. 순간 부드러워진 눈매며 미미한 호선을 그리는 입매에 루이스는 잠시 숨을 쉬는 걸 잊었다.
“저, 저기요! 이름이 뭐예요?”
그리곤 막힌 날숨을 내쉬는 동시에 말을 던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정신없이, 찰나의 정적에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고.
“...다이무스. 다이무스 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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