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놉시스, 대본. 벨져는 파일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낮게 신음했다. 오디션도 보고, 수많은 포트폴리오를 봤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져는 박스 채로 쓰레기나 다름없는 포트폴리오 박스를 전부 내다버리고 싶었다. 종이비행기를 접어 몽땅 던져버리면 좀 후련해질까. 낮게 한숨을 내쉬고, 기분을 전환할 겸 TV 전원을 켰다. 제레온의 영화를 볼 생각이었는데, 리모컨을 놓치면서 엉뚱한 채널이 나왔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리모컨을 줍는데, 화면으로 그만 눈이 돌아갔다.
그래, 운명과 같이. 잠시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벽을 채운 화면을 응시했다. 입에 문 담배를 떨어트렸다는 것도 음악이 끝나고, 뮤직비디오가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 뮤직비디오였구나. 서정적인 곡조 뒤를 채운 시끄러운 기타 소리에 벨져는 가차 없이 TV를 꺼버렸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이 소년처럼 울며 웃고 있었다.
벨져는 잠시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약간의 주저와 망설임 끝에,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벨져의 마음도 초조해졌다. 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신호음이 멎었다.
[ 별일이네. 벨져 홀든이 먼저 연락을 다 하고. ]
“너, 어디냐.”
[ 나? 글쎄, 어디일 것 같아? ]
“장난 말고. 너 일 하나 해라.”
[ ...일? 배우가 그렇게 없어? ]
“닥치고 와. 대본 보낼 테니까 보고.”
일방적인 선언에 잘만 대답하던 루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무겁다. 벨져는 입가를 쓸었다. 아무렇지 않다.
[ 벨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지난 일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
“상관없다. 장담하지.”
[ ...알았어. 읽어보고 연락할게. 이 번호로 하면 되지? ]
통화는 그간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끝났다. 지난 일. 결코 감정이 개입되는 일은 없다. 이건 작품이고, 일이고, 역에 어울리는 다른 사람이 없었던 것뿐이다. 벨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지난 일. 육개월 동안 미친 사람처럼 연애하다가, 갈라선 그 시답잖은 과거. 벨져는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내렸다. 이미 지난 과거일 뿐이었다.
결코 끝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도 이미 오 년이 지났다. 언제나 꿈은 깨기 마련. 세상이 환희로 가득 찬 그 시간은, 지금에 와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아직도 그 때 그 번호를 유지하고 있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를 떠나서 멀어져간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지워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고 충동적인 만남이었다. 아직 벨져가 작품을 시작하기 전이었고, 그는 벨져 대신 트로피를 가져갔다. 신인상 정도에 별 미련은 없지만, 연초에 데뷔해 이름을 올리던 벨져 대신 시상식 두 달 전 개봉한 영화로 상을 채갈 정도로 그의 실력은 뛰어났다. 뛰어나다. 벨져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루이스를 지금의 자리로 올려놓은 첫 작품. 그는 주연 축에도 끼지 못하는 배역을 맡았다. 포스터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을 팔아넘긴 스파이를 사랑한 남자 연기는 아직도 루이스라는 배우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차갑고 서늘한, 하지만 동시에 자상한 면을 갖춘 평범한 남자. 옆집에서, 거리에서 마주칠 것처럼 친근하게 다가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관객을 압도하고 몰아붙이는 그. 벨져는 당초 계획대로 제레온의 영화를 트는 대신 루이스의 첫 작품을 틀었다. 그 해 가장 잘 팔린 영화답게 블루레이 한정판 박스까지 나온 작품이었다.
세간에서 루이스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벨져 홀든이 배우를 그만뒀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정작 벨져는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야 별 것도 아닌 녀석에게 트로피를 빼앗겼단 생각에 조금 과잉된 반응을 하긴 했지만 그 분함과 억울함은 '어디 네까짓 게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며 튼 영화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스크린 속에서 온전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어떤 경지. 손끝의 떨림부터 눈길 하나, 대사 하나까지. 흠을 잡자면 수도 없이 잡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화면 안에서 진실로 그녀를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했다. 이런 방식도 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 캐릭터는 그냥, 이런 사람이라고. 이것을 재능이 아니면 뭐라 표현해야 할까.
평론에 짠 평론가 누구는 그냥 배역을 잘 받은 신인이라 평하기도 했지만 벨져는 알 수 있었다. 한 번 발을 들여 본 사람이기에 알 수 있다. 이 역이 아니어도 그는 소화해낼 것이다. 그의 연기와 감정은 눈사태와도 같다. 올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서서히 다가오지만, 이내 그 감정과 눈빛으로 사람을 옭아매고 압도해버린다. 눈치 챘을 땐 이미 늦어서, 눈을 돌리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그저 사로잡힌 채 그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
루이스는 영화의 시작에 나오지 않는다. 원래는 배역의 이름도 없어서, 그 캐릭터는 그대로 배우의 이름을 받아 루이스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벨져는 와인을 꺼냈다. 미학 없이 싸우고 터지는 영화에 와인은 어울리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그를 보는 것이라면 와인이 빠질 수 없었다.
주인공 뒤에서, 루이스가 여자를 보며 미소 짓는다. 제길. 벨져는 마시던 와인을 내려놓았다. 저를 보며 저렇게 웃던 시절이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간지러워지는 그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고, 조금 차가운 손을 뻗는다. 벨져는 TV를 꺼버렸다.
좋은 머리는 잊고 싶은 기억까지 고스란히 남기고 되감는다. 그의 포커스는 제게 향해 있지 않다. 한 때는 영원할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는 영화를 찍고, 너는 내 카메라의 중심에 있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호흡하며 같은 그림을 완성해가는 관계. 지금 앉아있는 소파에서 어설프고 풋풋한 낯간지러운 말들을 속삭이고, 키스하고, 몸을 섞었다.
벨져는 공들여 가꾼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게 과연 잘 한 짓일까. 그와의 관계는 흔히들 말하는 '프랑스 영화'같았다. 십 분 동안 사랑을 속삭이고, 십 분 동안 섹스하다가, 그 뒤로 줄창 싸우다 헤어지는. 벨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가 내보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이다.
원하는 화면을 얻기 위해 그가 필요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는 없고, 그와의 관계는 이미 파국을 맞이했다. 벨져는 시나리오 작가인 릭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연 남자 배우 역에 루이스. 그도 들으면 바로 동의할 것이다. 애초에 릭은 사람 보는 눈이 너무 낮다. 사람이 너무 좋은 것도 있겠지만, 벨져는 자신의 화면 안에 아무나 들일 수 없었다. 벨져 홀든의 자존심은 소품 하나, 캐스팅 하나에도 빠짐없이 적용된다. 벨져의 까탈스러움은 단역 하나까지 직접 뽑기로 유명했다.
벨져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해버리고 욕실로 향했다. 루이스와 헤어지고, 벨져는 노선을 바꿨다. 원래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 되고 싶었다. 연기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으로, 제레온 프리츠같은 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다이무스는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언론의 입을 막아주며 훈계를 늘어놓았다. 이번 제작 투자도 어찌나 말이 많았는지. 벨져는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기 앞에 섰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지만 이미 벌어진 사이를 메꾸는 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다시 시작하는 데는 더 많은 용기와 감정이 필요하고, 그러기엔 지나온 시간과 벌어진 틈이 존재했다. 그러니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벨져는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이제 '루이스'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려 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한 그 순간부터 코끼리가 떠오른다고 하던가. 그도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누구인지도 모를 가수의 뮤직비디오에서 이별의 슬픔을 앓던 그를 떠올렸다. 화면 속 루이스는 제 옆에 있을 때처럼 품이 조금 남는 니트를 입고 있었다. 소파에 무릎을 모아 앉아 손등까지 내려온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