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벨져루이] 어떤 동행 07.
여관을 나와 꼬박 한 시간을 추위 속에 헤매던 두 사람은 마침내 외진 골목에서 연구원의 집을 발견하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벨져가 발을 들었다. 루이스가 손을 뻗어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문짝을 날려버렸을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속삭였다.
“미쳤어? 침입자가 있다고 광고해?”
“어차피 상대는 사이퍼도 아닌 일반 연구원이다. 안 될 건 또 뭐지? 강도라도 들었다고 생각할 거다. 비켜.”
“하아, 됐다.”
루이스는 벨져를 제치고 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위장인지, 대문에는 정말로 장치가 없는지 문을 두드려봐도 뒤가 텅 빈 나무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잠금장치는 하나. 루이스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얇은 핀을 꺼냈다. 벨져가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열쇠구멍에 핀을 꽂았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조용히 해. 이것도 오랜만이라.... 열렸다.”
묵직한 잠금쇠가 핀에 닿는 감각에 힘주어 돌리자 찰칵, 잠금쇠가 풀렸다. 핀을 쥔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느라 손이 얼얼했다. 손목을 털며 일어나 문을 연 루이스는 문을 잡고 옆으로 비켜섰다. 도련님 먼저. 도어맨처럼 안을 향해 손짓하자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벨져가 한심하단 눈으로 혀를 차고는 들어갔다.
그래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슬슬 이 까다롭고 예민한 남자가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평범하군.”
“그러게. 딱히 더 뒤질 것도 없어 보이고.”
벨져를 따라 들어간 집은 황량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으레 그러하듯 퀴퀴한 냄새가 나고, 정리정돈이 안 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욕실, 침실, 부엌과 거실까지 어디 하나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 전투 인원도 아니고 연구원이니 당연하겠지만, 심지어 책상이며 서랍, 책장에도 별 수확이 없었다.
벨져가 책상 위의 서류를 뒤지는 사이 루이스는 침대를 뒤집어보고 거실로 나왔다. 아무리 이런 후미진 곳이라 해도 기밀을 보란듯이 책상 위에 흘릴리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보관장소가 있다는 건데, 밖에서 본 집의 형태와 안을 볼 때 따로 비밀공간이 있을 수가 없었다. 벨져라고 그 간단한 걸 모를리 없으니 집을 보는 대신 서류를 붙잡은 것일 테고. 루이스는 입가를 매만지며 거실을 서성였다.
낡은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 벨져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삐걱거리지 않는 마루. 햇빛이 한창인 시간에도 볕이 들지 않는 구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끝으로 나무 판자를 톡톡 두드리자 안이 꽉 찬 둔탁한 소리가 감돌았다.
여기다. 루이스는 테이블 위의 버터나이프를 집어 지렛대 삼아 판자를 들어올렸다. 기름이라도 칠한듯 가볍게 들리는 마루 바닥 아래,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루이스를 반겼다.
“벨져. 이리와봐.”
“누구 마음대로 오라가라냐.”
실컷 헛물만 켜다 나온 벨져의 표정이 굳었다. 진지한 얼굴로 옆에 다가온 벨져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손때묻은 노트며 오래된 연구파일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꺼내놓고 빠르게 훑어보니 대충 감이 왔다.
“거부당한 연구 뿐이군.”
“아예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답인 건 아니니까. 성소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기현상과 새로운 공간을 연결짓기엔 천 구백년이라는 시간이 문제였겠지. 일식도 안 일어난 때니까.”
“흥. 그 중 몇이나 진짜 있었겠나.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지금은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아.”
“그 얼토당토 않은 기현상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 거란 생각은 안 들고?”
벨져는 부인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검 대신 총포가 등장하고, 종교와 미신 대신 과학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 세상이지만 그도 자신도 사이퍼였다. 개기월식의 그날부터, 최근의 슈퍼문까지. 사이퍼들의 이능력과 신비로운 자연현상은 뗄래야 뗄 수 없는데다가 그 이유와 연관성 역시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공간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사막 위에 어느날 갑자기 들어선 메트로시티, 세계수가 자라나 형성된 포트레너드. 그 모두가 얘기로만 전해들으면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현상을 직접 마주한 이들이 그것을 신의 계시나 기적이라 여긴 것은 아닐까. 충분히 성인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이 사실은 능력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그 발상에서 시작한 보고서와 연구논문은 결국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마루바닥에 잠들어있지만 가능성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새로운 공간과 사이퍼,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란 명확히 밝혀낼 수 없는 고양이 상자 안의 고양이에 불과했다.
“진행되고 있는 연구가 뭔지 모르겠군. 안타리우스가 이런 자료를 계속 끌어안고 있다면 가능성이 없을 거다.”
“그건 아닐걸. 이것도 지금 진행되는 무언가도 결국은 가능성일 뿐이야. 인식의 문이나 액자처럼 확실한 통로나 공간이 있는 게 아니면 더 특정하기 힘들고.”
루이스는 트리비아와 새 공간을 찾는 내내 한 고생을 떠올렸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모래알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막연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도 의문이 걷히질 않는지 무섭게 서류를 읽는 벨져에게 루이스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아까웠겠지. 안 된다는 걸 알아도, 놓아야한다는 걸 알아도 막상 그러는 게 쉽지 않거든.”
누구보다 그 마음을 알기에 루이스는 파일과 자료를 한 데 모아 도로 비밀 공간 안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은 없다. 이렇다 할 수확은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곳에 기밀문서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연락책도 아닌 일개 연구원이니 당연했다. 연구소에 가기 전에 먼저 들른 건 어디까지나 확인을 위해서였다.
“그래도 클론이나 강화인간을 연구하는 건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경비는 적을 거야.”
“위치는?”
“서쪽 외곽. 지갑에 정기권있더라.”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또 탐탁지 않은지 제 얼굴에 꽂힌 그의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루이스는 판자를 도로 덮고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는데 쪼그리고 앉아 있던 탓에 쥐가 나면서 순간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며 풀썩 발목이 꺾였다. 넘어지기 전에 벽이라도 짚으려한 손은 의미없이 허공을 휘젓고, 거기에 갑자기 현기증이 핑 돌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넘어져야 하는데, 충격 대신 단단한 팔이 허리를 잡았다. 루이스는 머리를 기대고, 당장 손에 잡히는 걸 쥔 채 숨을 골랐다. 추위와 함께 쨍하니 덮친 어지럼증이 쉽게 가시지 않는데 다리까지 저리니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감각을 마비시킨 통증이 가라앉고 나서야, 루이스는 얼떨결에 붙잡고 기댄 사람이 벨져라는 걸 떠올렸다.
“후, 하아.... 미안.”
“도무지 못 봐주겠군. 대체 얼마나 미련하면...!”
생명줄이라도 되듯 잡았던 벨져의 옷을 놓고 떨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앞에서 이런 꼴이라니. 차라리 그냥 넘어지고 말지,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이어지는 질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이야 하려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마음에 안 드는 제게 꼬투리를 잡아 분풀이를 하는 게 목적이니 괜히 책 잡힐 빌미를 주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야 하는데, 당연히 그게 맞는 건데 손목을 잡아 루이스를 돌려세운 벨져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상한 일은 그걸로 끝나지 않고, 벨져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루이스의 목에 감았다. 화가 난 얼굴로 그의 온기가 가득한 머플러를 꼼꼼히 감아 목 뒤로 매듭을 짓고는 다시 한 소리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냥 하면 될 걸 말도 못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벨져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홱 돌아섰다. 목을 감싼 온기와, 머플러에서 느껴지는 벨져의 향수냄새. 등을 보이고 돌아선 벨져는 주먹을 꽉 쥔 채 잠시 서있다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루이스는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 아니라고, 그저 지친 제 착각일 뿐이라고 되뇌어도 머릿속에선 빨간 경고등이 켜지고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뭔가 잘못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다. 제게 패해 세상으로부터 온갖 괄시와 악의 섞인 편견을 받아야했던 벨져 홀든. 로라스 옆에서 길길이 날뛰며 노려보던 그 날의 벨져가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했다.
만약 이번에도 제 감이 맞다면, 이번에 무너지는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이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벨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루이스는 이 불안이 기우로 끝나길 바랐다.
'사이퍼즈 > 루른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져루이] 조금 특별한 생일. + (0) | 2016.01.27 |
---|---|
[벨져루이] 조금 특별한 생일. (0) | 2016.01.27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6. (0) | 2016.01.10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5. (0) | 2016.01.03 |
[벨져루이] 어떤 동행 04. (0) | 201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