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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조금 특별한 생일.
* * *
언제나 그렇듯,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번에는, 말 한 마디가 그 시작이었다.
“오, 루이스! 내일 꼭 나와라!”
“나도 쉬자, 좀. 내일 나 비번 아냐?”
“아이고, 우리 영웅님. 또 그런다, 또.”
“니 생일아이가! 토마스가 목 빠져라 기다렸데이!”
“아니, 제가 무슨…!”
다 식은 커피를 들고 가던 루이스는 동료들의 마음 씀씀이에 피식 웃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번엔 선약이 있었다.
“됐어. 어린 애도 아니고.”
“생일에 어른애가 어디 있어? 그러지 말고, 응?”
“그냥 취하고 놀 명분이 필요한 건 아니고?”
루이스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채근하는 레베카에게 손을 내저었다. 토마스가 시무룩해하는 게 안쓰러워 마음이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루이스에게 생일은 그리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 어릴 때도 챙겨본 적 없는데 뭘.”
“우웅…. 루이쯔 오빠, 생일 파티 없어?”
나이오비 옆에서 자던 엘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루이스는 다급하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연합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훈훈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엘리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할 걸 아는 거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엘리가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이를 외면할 수 없어, 루이스는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케이크랑, 촛불이랑, 풍선이랑…. 아무것도 업쪄?”
“아니, 엘리…. 그러니까….”
“그건 너무 슬포….”
루이스는 울음을 터트리려는 엘리를 안아들었다. 작은 등을 토닥이며 이 사단을 만든 술꾼들을 쏘아보고 어떻게 달래야할까 말을 골랐다.
“엘리, 오빤 괜찮아. 어른인걸.”
“그지만, 그지만….”
“정말 괜찮아. 울지마. 목 메일라.”
울먹이던 엘리가 홱 고개를 들었다. 턱을 부딪힐 뻔 했던 루이스는 파랗고 동그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자상하게 웃었다.
“그럼 오빠두 애기 해! 어른 하지 마!”
“응?”
“캬. 역시 꼬맹이. 말 한 번 잘하네! 고럼, 고럼. 남자는 나이를 몇 먹어도 여전히 소년이라구!”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이 망나니.”
나이오비가 소파에 늘어져 킬킬거리던 이글을 후려쳤다. 경쾌한 타격음에 루이스는 나이오비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한숨을 푹 내쉰 나이오비가 다시 한 번 이글을 때렸다.
“엘리눈…. 생일엔 마싯는 것두 먹구, 엄마랑 아빠랑 친구들이랑….”
“난 정말 괜찮아.”
“엘리가! 오빠 소원 들어주께!”
주먹을 꼭 쥐고 하는 말이 귀엽고 고마워 그만 웃음이 터졌다. 루이스는 엘리의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리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앙 다물고 양팔을 벌렸다. 가슴에 안고 있던 엘리를 고쳐안아 눈높이를 맞추자 엘리가 얼굴을 잡고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사랑스러운 아이. 루이스는 웃음으로 보답했다.
“고마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되지 않은 유년기는 머릿속에서 조각을 들어내듯 비어있었다. 어리기도 했고, 떠올려봤자 좋은 기억도 아니다보니 생각나는 게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엔 거리에서 하루하루 연명한 게 전부라 엘리가 말하는 생일 파티나 선물 같은 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였다. 그래서 더 생일같은 기념일에 무던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내일 나오기로 약속한 거다?”
“그건 내일 상황 봐서. 나도 좀 쉬자. 누구누구씨가 서류를 내팽게치고, 누구씨들이 민간 시설을 부수고 다닌 덕분에 뒷처리는 고스란히 내 차지거든?”
“잘못 했네.”
“그렇지? 그럼 회계장부 검토 부탁해.”
“윽….”
엘리를 받아 안으며 맞장구치던 나이오비에게 화살을 돌리자 휴게실에서 탱자탱자 놀던 동료들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하나같이 시무룩해하는 걸 보는 것도 석연치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구누구들 때문에 긴급 호출되는 바람에 기껏 쓴 휴가도 반납하고 일한 게 이틀이었다.
덕분에 원래 세워둔 계획은 박살이 났다. 어제는 일찍 퇴근해 푹 쉬고 오늘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 데이트, 내일 오후엔 연합에 얼굴을 비출 예정이었는데 덕분에 애인은 삐졌고, 안 그래도 켜켜이 쌓인 피로는 밤샘이라는 이름의 중노동으로 이어져 자고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럼 저는 퇴근합니다. 뒤는 잘 부탁해. 토마스, 부탁한다. 생일날까지 사고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네, 넵!”
“파티 준비 너무 공들이지 말고. 노력은 해볼 텐데, 못 올 수도 있어.”
루이스는 벗어뒀던 재킷을 입고 토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껏 기대하고 준비한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다른 게 더 중요했다. 어둠이 내린 포트레너드에 눈송이가 휘날렸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연인을 향해, 걸음을 바삐했다.
* * *
“그래서,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미안…. 죄송합니다….”
“루이스.”
죄인이 된 것처럼 쭈그러져있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자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벨져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꾹 참고 이 미련한 남자를 어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래도 생일을 챙겨주길래 기념일은 챙기는구나 하고 뿌듯해한게 고작 이주 전이다. 어떻게 구했는지 제가 좋아하는 와인에, 케이크, 거기에 이 계절에 꽃다발까지 구해온 정성이 갸륵해 내심 흡족했던 벨져였다.
자기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남자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럴 거면 타인에게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하지를 말던가. 화를 내고 싶지 않은데 제 눈치를 보는 루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루이스. 나는….”
“미안. 다음엔 정말로 안 늦을게. 정말이야. 약속해.”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벨져는 이마를 짚었다. 기껏 준비한 음식이 식고,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은 더 기다렸지만 정말로 화가 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조금 더 너 자신을 소중히하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 말하면 걱정이 아니라 화가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미안. 휴가는 어제부터 냈는데, 갑자기 일이 터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만. 더 말할 필요 없다.”
음식이야 데우면 되고, 케이크에 촛불은 다시 붙이면 그만이다. 벨져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냥 케이크를 가지러 가려던 것 뿐인데, 루이스가 손목을 잡았다.
“미안하다니깐.”
“…그래.”
“왜 그러는데, 응?”
초조와 불안이 묻어나는 눈빛에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행여나 실망했을까봐, 그래서 미움받을까봐 두려워 붙잡는 루이스를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벨져는 주먹을 꽉 쥐고 루이스를 마주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라고! 네 생일이다! 하루쯤은 네 멋대로 해도 된다고!”
“…….”
“제발, 너를 조금 더 소중히 해라.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으니까.”
결국 질러버린 벨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다. 안 봐도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손목을 잡은 루이스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마음이 떨어지는 것 같다. 벨져는 등을 돌리려다 루이스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손을 잡고 올려다보자 힘없이 웃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아냐.”
“…미안하다고 하지 마.”
“응.”
제길. 벨져는 낮게 읊조리며 몸을 일으켜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그대로 몸을 숙여 다가가 입을 맞추자 순순히 입을 벌리고 눈을 감는 루이스가 안타깝고, 또 사랑스러웠다. 이 미련한 남자는 언제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우선이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자신을 소중히 하는 건 머릿속에 새겨두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어야지.”
“앞으론 그렇게 생각해. 날 위해서. 알았나?”
“노력해볼게.”
벨져는 가볍게 키스하고 일어나 다 식어버린 스튜를 데우기 위해 일어났다. 따라 일어난 루이스가 뒤에서 슬그머니 허리에 팔을 올렸다.
“뭐야? 냄새 좋다.”
“지난 번에 네가 맛있다고 했던 거.”
“아, 거기?”
루이스가 등에 몸을 기대고 눈을 깜빡였다. 방금 화를 내놓고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그게 꽤 귀여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뺨에 입을 맞추자 루이스가 피식 웃었다. 눈꼬리를 얇게 휘는 말간 웃음에 또 마음이 녹아내린다. 이 녀석에게 놀아나는 자신도 참 답이 없다 싶지만 어쩌랴, 이것도 다 예뻐보이는 것을. 벨져는 스튜가 끓기 기다리며 루이스의 뺨에 기습적으로 입술을 맞췄다. 루이스는 피하려다 고개를 돌려 입을 맞췄다. 벨져는 아예 얼굴을 잡고 찐하게 입을 맞춰버렸다. 입술을 누르고 있어도 새는 숨이 간지러웠다.
“끓는다.”
“케이크 가져와라.”
“아직 열두시도 안 됐는데?”
“그래봤자 5분 남았다. 뭐, 나야 너랑 같은 나이로 있는 것도 좋긴 하다만.”
“언제는 뭐 형 취급을 해주긴 했어?”
“형 노릇 할 생각도 없으면서.”
루이스는 웃으며 벨져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벨져가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며 국자를 휘둘렀고, 벨져의 손에서 흉기가 된 국자를 피한 루이스는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렸다. 열 개의 초를 꽂은 벨져가 불을 붙였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열두시를 알리며 겹쳐지고, 루이스는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어 껐다.
“스물 여덟번째 생일 축하한다.”
“이젠 나이 먹는 것도 달갑지 않은데 말이야.”
“많이 먹고 커라.”
“그런 얘기는 적어도 이십년 전에 해줬어야지.”
“이십년 전에 내가 네가 어디 있는 줄 알고.”
“그야 그렇지만.”
루이스는 벨져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고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가 산더미였지만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벨져가 먼저 씻는 사이 베개를 끌어안고 기다리는데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루이스. 루이스. 쯧. 루이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저를 부르는 벨져의 목소리도 다 들리는데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벨져가 어깨를 잡아 흔드는데도 천근만근 무거운 몸은 말을 들을 생각을 않았다. 삐진들 어떠하리, 화난들 어떠하리, 졸음 앞에 장사 없는 것을. 루이스는 내일의 자신에게 모든 걸 맏기고 간신히 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조용히 사랑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와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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