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게 내리쬐는 햇살. 그 햇살에 프라이팬의 달걀처럼 익어가던 루이스는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입안은 모래알을 한 움큼 넣은 것처럼 깔깔하고, 갈증과 함께 쨍한 두통이 찾아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점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몹쓸 숙취는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술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게 며칠, 그마저도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뜨다 눈앞에 보이는 쇄골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대로 고개를 올리자 잠든 벨져의 얼굴이 보였다.
길고 풍부한 속눈썹 아래 우아하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워낙에도 미인이긴 하지만 이렇게 그림자까지 질 줄이야. 순수하게 감탄하며 벨져의 얼굴을 감사하던 루이스는 창밖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길래 벨져와 한 침대에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방이 없어서, 사정사정해 별채까지 온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완전히 공백이었다. 아무래도 머리를 기대자마자 곯아떨어진 모양이라고 결론을 내린 루이스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려 했다는 데 그친 건 제 허리와 다리에 감긴 벨져의 팔다리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오랫동안 안 쓴 별채니 난방이 제대로 될 리 없고, 유일한 난방수단인 벽난로는 불이 꺼진지 오래인 듯 했다. 추운 지방에, 밤이 되면 기온이 더 떨어지니 이불 한 겹으론 추위를 다 막지 못했을 테고 그러다보면 옆에 있는 체온에 달라붙을 수밖에.
설마하니 벨져가 먼저 제정신으로 끌어안았을 리는 없다. 그게 루이스가 내린 결론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벨져가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잠결에 자기도 자연스레 온기를 찾았을 터였다. 내외하는 남녀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결론을 내린 루이스는 벨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빠져나가려 하면 할수록 벨져는 더 꽉 끌어안고 좀처럼 놓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끌어안고 자는 베개쯤으로 여기는 모양인데 현저하게 느껴지는 체력과 완력 차이에 더 오기가 생겼다. 가까스로 벗어나 숨을 돌린 루이스는 언제 벗었는지 모를 신발을 주워 신고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왈칵 녹이 섞인 물이 흘러나와 손을 적셨다. 이럴 땐 그냥 흐르게 둬야 하는데, 벨져가 그런 서민의 생활상식을 알 리 만무했다. 루이스는 일단 급한 대로 물을 틀어두었다. 여기 얼마나 머물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화장실을 나오는데 벨져가 창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루이스를 깨운 아침햇살이 이번엔 벨져를 괴롭히고 있었다.
루이스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커튼을 쳐 햇빛을 가리고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저기선 씻을 수도 없고, 있어봐야 예민한 도련님의 귀한 수면을 방해할 뿐이다. 하얗게 입김이 서리는 추위에 팔을 쓸며 사람의 발길이 닿은 길을 따라 걸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흐릿해 대충 감으로 걸어가니 마당에서 세탁물을 걷던 여자와 마주쳤다. 어젯밤 방을 내준 종업원을 기억해낸 루이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좋은, 큼. 아침입니다.”
“어머나, 벌써 일어나셨어요? 밤새 춥지는 않으셨구요?”
“덕분에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드릴까요?”
루이스는 그녀가 걷던 시트며 수건, 베개 커버같은 것들을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스위스인데 아무렇지 않게 말이 통한다. 위화감에 슬쩍 말을 걸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힘드시겠어요. 영어도 잘 하시는데.”
“에휴. 그러게나 말이에요. 겨우 탈출했다 싶었더니 잠깐만 와서 봐달라고 사정사정을 해서 왔더니 글쎄, 자기는 귀족 나부랭이랑 눈이 맞았다지 뭐예요?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놓고 여태껏 편지 한 번 없어요.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거 공부시켜놨더니, 이런데 틀어박히질 않나. 결국은 눈 맞아 도방가질 않나. 아, 같이 온 그 귀족나리는요? 그쪽도 만만치 않게 재수 없던데.”
과연. 루이스는 유독 벨져에게 야박했던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모양이나 말투로 보아하니 가정교사였던 것 같고, 사정 설명은 본인이 늘어놓은 신세한탄으로 다 들었다. 귀족에게 치를 떠는 이유도 알만 했다. 교사로 있을 때 까이고, 나이가 차도록 결혼도 못하고 공부시킨 동생은 하필이면 또 귀족과 눈이 맞아 도망. 벨져야 누가 보더라도 귀족 도련님이니 어찌 보면 질색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잡니다. 동생분 일은 정말 안타깝네요.”
“에휴. 기사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전부 소설 속에나 있는 얘기예요. 그것 때문에 신세 망친 애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모름지기 남자는 성실하고 지고지순한 게 최고라니까요!”
여자는 시트를 팡팡 털며 말했다. 모름지기 신세한탄 인생역경 스토리란 아무리 말해도 말해도 질리지 않는 법이고, 거기에 왠지 친숙한 옆집 청년같이 생긴 남자가 있으면 말이 더 많아지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서점에서 일할 때부터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여성들이 꽤 있었기에 익숙했다.
어떤 매커니즘인지는 모르지만 뛰어나게 잘 생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호감이 가게 생긴 청년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루이스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자의 푸념에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받았다. 어젯밤에는 그런 얼굴로 불쌍한 척을 한 게 먹혀들어간 거고. 루이스는 그녀와 함께 다 걷은 세탁물을 옮겼다.
우다다 할 말을 쏟아내고 사라진 그녀의 등 뒤로 감사하다 소리친 루이스는 꽤 괜찮은 설비의 욕실에서 따뜻한 샤워로 언 몸을 녹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가방을 들고 나올 걸 그랬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루이스는 전화기를 들었다. 십 분 정도 기다렸을까.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어디야? 트리비아는?’
“그녀는 떠났어.”
‘……그래. 그렇구나. 그럼 너는. 그리스에서 연락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앤지. 천천히.”
루이스는 흥분한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그야 물론 이글과 나이오비가 소식을 전했다면 걱정할 만 했다. 어쨌거나 안타리우스가 강화인간들을 처리한다는 건 성공작을 거의 완성했다는 뜻이고, 제키엘 헌팅턴까지 등장했으니 거기에 휘말렸으면 솔직히 뼈도 못 추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불안과 가정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루이스는 구태여 설명을 더하는 것보다 빠르게 앤지의 불안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구랑 있는지 알아?”
‘뭐? 설마 작업 들어온 건 아니지?’
근래는 좀처럼 듣기 힘들어진 스노우퀸의 격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작게 웃었다.
“벨져.”
아무리 그녀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글이 벨져와 있었다는 걸 알렸다면 더더욱.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 뻔한 반응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루이스는 말을 잇지 못하는 친구에게 안심하라는 말을 보탰다. 얼마나 믿을진 모르겠지만 말 한 마디 한다고 손해 볼 것도 없었다.
‘……괜찮아?’
“자세한 건 편지로 보낼게. 아무래도 돌아가는 건 더 늦어질 것 같아. 미안. 부탁해.”
‘……알겠어. 루이스, 제발 몸조심해. 응?’
“알았어. 또 연락할게.”
루이스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앤지가 걱정을 하고 무한한 신뢰를 보이면 보일수록 그녀를 속이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녀마저도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또다시 괴로워질 뿐이었다. 나는 네 기대에 못 미칠 지도 몰라. 기대를 저버리면 제게서 등을 돌릴 사람들이 무서웠다.
루이스는 양동이 하나를 빌려 뜨거운 물을 받아 왔던 길을 돌아갔다. 방문을 열자 나가기 전과 달라진 게 없는 풍경이 루이스를 맞았다. 자고 있는 벨져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짜증을 내며 손을 내치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리는데, 그 모습이 꼭 마나님들의 성질 더럽고 예쁜 고양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