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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겨울만 되면 이런 게 보고 싶어지더라...
따뜻한 날씨. 내리쬐는 햇살. 먹구름도 자욱한 안개도 드리우지 않는 맑은 하늘.
평생 몇 번 보지 못한 하늘이 이곳에선 너무나 당연하게 펼쳐진다. 그 풍경이 마치 제 모습 같아 루이스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일상. 이런 환경에서 큰일이라고 해봤자 고양이가 잼단지를 깨트린 것 정도다.
지루하고 심심한, 평화롭기 그지없는 나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평화에 익숙해져도 되는 걸까.
“아직 날이 차다고 했을 텐데.”
“따뜻하니까 괜찮아.”
타박하듯 말하지만 어깨 위에 담요를 덮는 남자의 손은 더없이 다정하다. 보석보다 아름답고 바다보다 푸른 눈은 그의 손보다 더 다정한 걱정을 담고 있어 루이스는 사양하는 대신 담요를 끌어당겨 덮었다. 맞은편에 앉아 차를 따른 벨져가 혀를 찼다.
그새 식어버린 차는 정원의 흙 위에 가차 없이 버려졌다. 비싼 차지만 루이스는 아깝다는 말도 그만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벨져 홀든이고, 이 집의 주인이며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권리다. 그저 몸을 위탁한 신세니 그가 그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자격이라기 보단 염치가 없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겠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태연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으면 저 역시 벨져의 소유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인, 부서지고, 깨진 인형.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섬세한 손길로 고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저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루이스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벨져를 시야에서 밀어냈다. 숨을 쉬듯 생각이 맴돌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안 그런 척 상냥하고 섬세한 도련님은 모질고 무딘 말에 상처받을 것이 뻔했다.
“너 오기 전에 너 닮은 고양이랑 놀고 있었는데.”
“기를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라.”
“털도 부드럽고, 애교도 많아서 귀엽더라.”
벨져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을 하자 그 잘생긴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만 더하면 토라질 눈치라 루이스는 엷게 웃으며 벨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네가 더 예뻐.”
“당연하지.”
가늘게 뜬 눈은 그대로지만 앙 다문 입술은 만족스럽게 휘어진다. 턱을 살짝 치켜올리고 우쭐해하는 표정이야말로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루이스는 벨져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뒀다. 찬바람에 몸이 차가워진 나머지 으슬으슬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일주일 전, 감기에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기침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루이스는 손으로 팔을 쓸었다. 바로 벨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일어나. 들어가지.”
“그래야겠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몸이 굳어서인지 일어나려는데 눈앞이 아찔하게 흐려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도 이젠 일상인데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머리를 감싸고 중심을 잃은 몸을 붙잡은 벨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
“어디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군.”
“내 발로 걸을 수 있으니까 안아들 생각 마.”
짐짓 엄한 척 목소리를 깔았지만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오만한 남자가 저를 업신여기며 재수 없게 굴 때면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루이스는 매번 벨져를 밀어냈다. 이 안온한 환경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된다. 익숙해지는 것은 잠깐이지만, 그랬다간 돌아갈 수 없게 될 터였다.
벨져가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일 테고. 루이스는 숨을 몰아쉬며 벨져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연합의 영웅이 있어야 할 곳은 전장이다. 자신의 가치를,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건 그 곳이고, 끝내는 것 역시 그곳이어야 한다. 아직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거운 걸음을 떼며 벨져에게서 떨어졌으나 벨져의 시선은 루이스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한 걸음 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가 있다. 벨져가 지켜보는 한 루이스는 무리를 해서라도 괜찮은 척 해야 했다.
“다리, 후들거리는 건 알고 있나?”
“괜찮아. 다리를 다친 건 아니거든.”
“그래. 대신 몸이 만신창이가 됐지.”
“부정하지 않을게. 그래도 괜찮아.”
“하, 퍽이나.”
짧은 조소를 끝으로, 벨져는 루이스의 몸을 안아들었다. 몸을 받쳐든 손과 팔은 조심스럽고,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부축한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거야?”
“그러다 또 한나절 걸려 들어가려고. 됐다. 사양하지. 네 몸이 못 버틸 거다.”
루이스는 더 말하는 대신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원치 않게 들려가는 신세에 기사의 품에 안긴 공주처럼 목에 팔을 감을 생각은 없다. 벨져는 숨 한 번 흐트러지는 일 없이 테라스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가장 볕이 잘 드는 따뜻한 방 침대 위에 루이스를 내려놓고 스물 네 시간 불을 꺼트리지 않는 벽난로에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벨져.”
부름에 망설임도 없이 돌아본다. 그를 올려다보며, 루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왜 그를 불러 세운 것인지 자신조차 모른다. 그저, 돌아서는 등이 눈에 밟혔다.
“아니야.”
“하아. 또 미련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만 두도록.”
“아니. 크루통 넣은 치킨 수프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준비시키겠다.”
딱히 뭘 먹고 싶은 건 아니지만 벨져의 관심을 돌리는데 이만한 게 없다. 자기가 먹는 것보다 제게 무언가를 먹이는 걸 더 좋아하는 벨져를 돌려보내려 한 말이 먹혀들어 벨져가 걸음을 옮겼다. 고작 몇 걸음, 문이 닫히기까지 몇 초인데 그만 벨져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 코가 간질거리며 재채기가 나왔다. 벨져가 돌아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앞으론 밖에 혼자 나가지 마라.”
“그냥 재채기가 나온 것뿐이야.”
성큼 다가온 벨져가 손을 들어 루이스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피부를 쓰다듬으며 눈가에 고인 눈물을 엄지로 훔쳐낸 벨져는 코를 훌쩍거리는 루이스를 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감기가 떨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아니라니까.”
“지켜보면 알겠지.”
루이스의 얼굴에서 손을 뗀 벨져는 혀를 차고 눈살을 찌푸린 채 방을 나갔다. 아마 돌아올 땐 따뜻한 수프와 생강과 레몬을 넣고 끓인 차를 가져올 것이다. 루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누웠다. 몸이 차가워진 것은 사실이다. 고작 바람을 쐰 정도로 감기에 걸릴 정도로 몸이 약해진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와 살로 만든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벨져가 오려면 적어도 삼십 분은 걸릴 것이다. 딱히 무언갈 먹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벨져와 실랑이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여력도 없었기에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이라면 모를까 정말 잠들어버리면 벨져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꿈속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책을 읽고 움직였을 뿐인데도 피곤했다. 낮은 숨을 쉬고 있으면 천천히 몸이 무거워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을 일으키긴 커녕 눈꺼풀도 밀어 올릴 수 없다.
“루이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벨져의 작은 목소리 뒤에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한 번 나고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덮고 있는 이불이 목까지 끌어올려지고 따스한 손이 머리를 덮었다. 그의 손이 닿아서야 머리카락이 차갑다는 걸 깨닫고 만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의식이 점점 더 멀어지고, 고드름처럼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녹아 잠잠해졌다.
그새 잠든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벨져는 한숨과 함께 손을 멈췄다. 기침이 멎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몸이 약해지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라지만 마음 한 켠에선 그 명제를 부정하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거나 무술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결정 능력 하나 있다고 전방에 설 수 있을 리 없는데도. 특별히 생각할 것도 없다. 앤트워프에서 마주친 그 때부터 루이스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내였으니.
억지로 그 자신을 갉아먹으며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그 때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빠져나간다. 그 아련하고 서늘한 감촉에 벨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멈췄다.
참아보려 해도 한숨이 새어나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약해진 남자를 볼 때면 걷잡을 수 없이 의식하기도 전에 나오는 한숨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다. 루이스는 녹아내리기 시작한 빙산처럼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었고, 자신은 그를 돌보는 동안 그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견고한 마음에 금이 간다.
루이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가만히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다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 남자는 자신이 부서지며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끝내 참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 와서야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고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모든 것을 놓고 스러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이렇게 돌보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 두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것뿐이다. 벨져는 루이스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계속해서 불을 뗀 탓에 공기가 건조했고, 건조한 공기는 환자에게 좋지 않다. 기껏 나은 감기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벨져는 창문을 조금 열고 수건을 적셔 방 안 곳곳에 걸었다. 루이스가 이 방의 주인이 된 그 날부터 죽 벨져가 해온 일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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