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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루이] 03.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몸을 움직일 정도가 됐지만 기억은 여전히 불완전한 채로 멈춰있었다. 기억이 수반하는 끔찍한 두통에 비하면 돌아오는 정보는 터무니없이 적고, 단편적인 기억과 습관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체를 유추하는 속도는 답답하다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더디다. 드문드문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고, 루이스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애매한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정 생각나지 않으면 잠시나마 쓸 가명을 스스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름 달력을 봐도 내키지 않았다. 루이스는 더 말하지 않았고, 이틀에 한 번 꼴로 들어왔다. 화약 냄새와 약 냄새, 싸한 알콜 냄새와 함께 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오래된 종이와 책 냄새와 함께 들어오기도 했다.
그 사이 두통은 잦아들고 상처도 아물어 갔지만 짙은 어둠에 잠긴 기억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뿔뿔이 흩어진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려 해도 주어진 퍼즐 조각이 너무 적었다.
루이스가 가져오는 신문을 보거나, 집안일을 하고 그를 기다리며 식사를 준비하는 게 하루의 전부. 이렇게 지루한 일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했다. 언제든 나갔다 와도 좋다며 열쇠를 줬지만 왠지 모르게 나가고 싶지 않았다.
레시피에 부족한 재료가 있어도 문 앞에 서면 안전하고 아늑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끝끝내 발을 잡곤 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까지, 의식주 전부를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이 상황이, 낯설면서도 즐거웠다.
“저기.”
“무슨 일입니까?”
부르는 소리에 스튜를 끓이다 말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루이스가 구급상자를 꺼내 놓고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지만 해주겠다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끓이던 스튜의 불을 끄고 다가가 셔츠를 벗자 루이스가 손을 뻗었다. 그를 둘러싼 냄새들을 전부 걷어내면, 루이스에게선 미미하게 서늘한 향이 났다.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나 겨우 맡을 수 있는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싸한 민트 향을 떠올렸다. 루이스의 손은 배를 감싼 붕대를 풀고 거즈에 알콜을 묻혀 상처를 소독했다.
아찔한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지만 루이스를 잡지는 않았다. 전에 무심코 잡았다가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는 바람에 루이스의 어깨엔 아직도 옅은 멍이 들어 있었다. 그 멍자국을 볼 때마다 기묘한 도취감에 휩싸인다는 것을 과연 이 단정한 얼굴의 남자가 알까.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동안 소독을 마친 루이스가 상처를 물끄러미 보다가 후, 숨을 불었다. 알콜이 날아가며 닿는 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큼 목을 가다듬자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담기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자신이다.
흰 피부를 물어뜯고, 짓씹어 삼키고 싶다. 손끝에서부터 번지는 충동과 열기에 목울대가 울렸다. 잠시 눈을 맞추던 루이스는 아무 말 없이 작은 가위를 알콜로 닦고 배를 잡았다. 상처를 꿰맨 실밥을 풀어내려는 것뿐이지만, 제게 집중한다는 그 하나의 사실에 홧홧한 열기가 아랫배에 몰렸다. 당장, 이 사람을.
밀어 넘어뜨리고, 아무것도 못 하게 제압한 뒤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치우고 싶다. 흰 목덜미를 손에 쥐면 어떤 표정을 할까. 그 붉은 눈동자에 어떤 감정을 담고 나를 바라볼까.
툭, 툭, 가위가 실을 끊는 소리와 함께 루드빅은 달뜬 숨을 내뱉었다. 호흡이 거칠어진 것은 흥분했기 때문이다. 가위가 실을 당기는 통증마저도 아찔했다.
“후, 루이스....”
“조금만 참아요. 거의 다 끝났으니까....”
셋, 둘, 하나. 마지막 실이 끊기고, 자그마한 핀셋으로 실을 뽑아내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이어졌다. 낮게 신음하자 작게 속삭이듯 말한 루이스가 다시 알콜을 묻힌 솜을 갖다 댔다. 아린 통증에 고개를 숙이자 그의 손이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토닥였다.
그 상냥하고 자상한 손길에 그만, 참고 있던 충동이 달려 나갔다.
“읏.”
“당신....”
침대 위로 넘어트린 루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붉은 눈으로 바라볼 뿐. 등골이 오싹해지는 스릴에 고개를 숙여 내려가자 루이스의 손이 그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그의 눈이, 서늘한 무표정에 강한 욕망이 들끓는다.
단호한 거부 앞에 얇게 눈을 휘며, 혀를 내밀어 제게 향한 손바닥을 핥자 루이스의 손이 움칫 굳었다.
“루이스.”
“좀 당황스럽네요.”
“하하, 당황한 얼굴이 아닙니다만.”
흠칫흠칫 떨리며 주먹을 그러쥐는 손끝에 입을 맞추고 눈을 치켜 올리자 루이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 허리를 쓸어내리자 루이스가 턱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짓, 위험하다고 생각 안 합니까?”
“쫓아내기라도 하려고요? 이제 와서?”
“못할 것도 없죠. 이제 거의 다 나았고.”
“몸이 낫는다고 전부 낫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 팔을 잡아챈 그의 손을 잡아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깍지를 끼기 전, 루이스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내 잡히고 말았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 쪽, 그의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며 다리 사이로 무릎을 넣어도 루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저항하고 거부하며 혐오할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너무 조용하다.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 고개를 들자 루이스가 빈손으로 뺨을 감쌌다. 약간 차가운 그의 손이 뺨에 닿을 때, 움찔 떤 것은 오히려 다가가던 제 쪽이었다. 누군가가 제게 다가오는 게, 호의를 베푸는 게 낯설다.
감정 없는 관계. 그저 유린하고, 농락하며 제 욕구를 채울 뿐인 그런 무미건조한, 일방적인 관계가 되어야 했다.
“그만.”
“...루이스.”
“괜찮아요. 이런 짓 안 해도 되니까.... 조금 쉬어요.”
잠시 망설이다 저를 끌어안은 루이스는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끔찍한 악몽을 꾸고 헐떡이며 일어난 자신을 달랠 때처럼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대게 하고 어르는 목소리는 자상하고, 뺨에 닿는 피부는 따뜻했다. 이 남자는 제가 남창이나 귀부인들의 노리개 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쫓기며 달아나는 꿈을 꾸다 보면 그것이 제 과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루이스의 추측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닐지 모른단 생각이 들면서도, 몸에 가득한 상처와 문신을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린 피 냄새와, 살육, 먹잇감을 쫓고 먹어치우는 그런 충동과 감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데 겨우 그런 일을 했을 리가. 하지만 그런 오해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들은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것이라, 나는 굳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품.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달고, 또 따스했다. 한 순간 깨져버릴 것만 같아서 더, 놓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 모두가 그저 값싼 동정과 연민에 불과할지라도.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조금은 태도가 변할 법도 하건만 그는 서운할 정도로 태연했다. 같이 저녁을 먹고, 루이스는 서류를 보다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드러눕는다.
실밥도 풀었으니 이제 당당히 그의 침대를 요구해도 될 텐데. 말을 꺼내려다, 거절할 것 같아 도로 입을 다물었다.
며칠간 함께 생활한 바로 미루어 보건데 루이스를 움직이려면 곧이곧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 아닌 것 같아도 정에 약한 그를 뜻대로 움직이려면 약은 수를 쓰는 게 훨씬 빠르다.
나는 불을 끄고 누워 잠시 시간을 죽이다 화들짝 놀란 듯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잠에 빠져든 그. 소파 앞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이름을 불렀다.
“루이스.”
“으응.... 또 악몽 꿨어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손을 잡에 제 머리 위에 올리고, 머리를 기대자 루이스가 올라오라 손짓했다. 냉큼 그의 위에 올라타 몸을 겹치자 루이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자줬으면 좋겠는데.”
“...나 잠버릇.... 있어서....”
“무슨?”
“옆에 누구 있으면.... 자꾸.... 끌어안아서....”
어지간히 졸린 것인지 루이스의 말이 다 늘어졌다. 버릇인 줄은 몰랐지만 품에 파고든다는 것은 전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와중에도 성실하게 답을 하는 게 귀엽고 안쓰러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린 그에게 입 맞추고 싶은 걸 꾹 참고, 눈을 휘며 웃었다.
“좋아요. 좋습니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안 합니다.”
그래도 완전히 신경을 안 쓰는 건 아니었다는 게 기뻐, 잠투정처럼 하는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침대는 아직 체온이 다 식지 않아 미지근했지만 성인 남성 둘이 눕기엔 역부족이라 모로 누워야 했다. 숨이 닿는 거리, 무방비하게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그.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먼 과거부터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 속 나는 쫓기고 있었고, 그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그 긴 추격 끝에 내가 승리했으리란 것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지만 기억이 돌아올 때 함께 찾아오는 두통과 감정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왜, 어째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런 의문과 억울함은 서서히 분노가 되었고, 이윽고 빛으로 덮여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됐다. 거추장스러운 기억일 뿐이지만,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쥐면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차가운, 자잘한 상처투성이인 그의 손은 머리나 등을 쓰다듬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고, 그저 가만히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머리를 쓰다듬는 온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이 사람만 이렇게 함께 있어주면 지긋지긋한 두통도, 악몽처럼 다가오는 기억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루이스.”
가만히 누워, 입모양으로 달싹거린 이름에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혀끝에, 손끝에 피어오르는 열과 감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야망도, 분노도, 짜릿한 희열도 아닌, 작고 따스하게 피부를 간질이는 미풍.
차가울 뿐인 공기가 이 사람을 거쳐 달콤한 숨이 된다. 루이스가 내쉬는 공기를 마시며, 그를 가진 기분에 흠뻑 취한 나는 팔 안에 안긴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느껴본 적 없는 온기가 따스해 양손에 움켜쥐고 놓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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