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는 빈 꽃병에 백합을 꽂아 놓고 곧장 욕실로 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소매를 걷고 목욕 준비를 하고 있으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지지만 하인 신분으로는 손을 담그는 게 고작이다.
매일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도 그렇지만 한 병이 같은 무게의 금값과 비슷하다는 향유며 입욕제를 풀고 그 물을 그냥 하수구에 버리는 건 귀족들, 혹은 그만한 부자나 할 수 있는 호화로운 목욕이다. 감히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맨몸으로 있어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욕실이 수증기로 덥혀지고 나서야 루이스는 도련님을 모셔 왔다. 낮에 입힌 옷을 벗기고, 미리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벨져가 들어가면 그 때부터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달리 할 일도 없고, 옆을 떠날 수도 없는 루이스는 욕조 옆 작은 간의 의자에 앉아 벨져를 바라봤다. 하루 종일, 몇날며칠을 함께 있었는데도 이 얼굴은 질리지가 않는다. 어디 질리다 뿐이랴, 매번 새롭게 감탄하고 만다.
루이스는 날카롭게 뻗은 눈매며 오뚝한 코, 다물린 입술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벨져 홀든은 미의 극치를 인간의 형태로 빚어놓은 것만 같은 사람이고, 그의 까다롭고 극성스러운 성미에는 익숙해질지언정 벨져 홀든의 고매한 아름다움에 익숙해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깐 좀 뜨거운 것 같았는데, 지금은 딱 좋네요.”
벨져는 별다른 말없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는 것으로 루이스의 말을 긍정했다. 제 취향대로 섞은 향기와 따스한 온기에 취해 몸과 마음이 노곤해졌다. 근거 없는 행복에 젖어 정신을 놓고 있으니 욕조 옆에 앉아 물을 찰박이던 루이스와 손이 스쳤다. 눈이 마주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타오르는 석양의 색을 하고선, 불꽃조차 삼켜버릴 것 같은 냉기를 품은 심연의 눈동자. 들여다보면 그 심연에 빠져버릴 걸 알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신비로운 눈이다. 저 벽 너머, 깊은 밑바닥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벨져가 생각을 하는 사이 눈을 내리깐 루이스가 스펀지에 비누거품을 냈다. 손을 물에 담그며 슬며시 풀어지는 눈매가 곱다.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 따뜻한 물로 씻는 것도 감지덕지라며 엷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고, 날숨과 함께 말이 튀어나왔다.
“들어오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불현듯,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노골적이다.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당연했다. 제길. 며칠 있었다고 벌써 이글의 나쁜 점이 옮기라도 한 걸까.
루이스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하고 덤덤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를 바라보며 다리를 꼬았다. 루이스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게 다행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바로 쫓겨나요.”
“여긴 너랑 나 둘 뿐인데 누가 안다는 거지?”
“그래도, 하인과 함께 목욕하는 주인은 없어요. 홀든의 도련님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인과 도련님이라는 관계를 들먹이며 사양했지만 벨져의 귀에는 정중한 사양이라기보단 완고한 거절로 들렸다. 욕조에 걸친 팔을 따뜻하게 적신 스펀지가 문지르며 지나간다. 벨져는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하겠다는 하인에게 매달릴 사람이 못 됐기에 시큰둥하게 다른 팔에 턱을 괬다. 괘씸한 녀석 같으니.
“뭐, 그렇다면야.”
벨져가 아무렇지 않게 넘기자 루이스는 착실히 하인의 본분을 다했다. 오히려 오늘따라 손이 더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을 끼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만지는 것 같은 손길은 처음 목욕을 도울 때와 변함이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조금 더 능숙해졌다는 것일까.
눈을 내리깐 채 제 몸을 씻기는데 열중하는 루이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불쾌한 감정이 비누거품과 함께 조금씩 씻겨 나갔다. 팔과 어깨, 가슴과 배를 거쳐 물속에서 다리를 문지르고 있을 때 벨져는 굳게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군.”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실 걸요.”
“그건 내가 결정해.”
루이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종아리를 문지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의 당혹만은 여실히 느껴졌다. 저 침착하고 투명한 눈이 흔들리고 표정이 바뀌는 걸 보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때는 무슨 짓을 해도 눈 하나 까딱 않던 녀석이 고작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원하신다면야.”
원하는 걸 얻어낸 벨져는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그를 기다렸다. 루이스는 나름의 각오가 필요한지 작게 숨을 내쉬었고, 그 숨이 담은 체념과 포기에 벨져는 점점 더 의기양양해졌다.
“음...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고아입니다. 어떤 애들은 부모를 알기도 하고, 한쪽만 알거나 친척에게 맡겨지거나 하는데 전 어느 쪽도 아니었어요. 그냥 거리의 고아였죠.”
루이스는 눈을 내리깐 채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법 듣기 좋은 목소리에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섞여들었다. 그러고 보면 참, 물을 닮은 남자다. 벨져는 루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드넓은 호수를 떠올렸다.
“그중에 몇몇은 자기 발로 고아원을 찾아가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얼마 못 가 돌아오곤 했죠. 거리에 고아가 넘치는 만큼 고아원에도 자리가 없었거든요.”
말하는 사이 몸을 다 씻긴 루이스가 자리를 옮겨 벨져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두피를 마사지하고 머리카락을 감기는 손길에 절로 눈이 감기고 졸음이 밀려왔다. 온전히 루이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잡념을 비누거품과 함께 물에 쓸려 보내던 벨져는 문득 루이스의 이야기가 제 머릿속에 있는 정보와 다르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 수도원출신 아니었나?”
“원래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얘기는 흥미로운 법이죠.”
시니컬한 대답에 벨져 눈살을 찌푸림 그런데 귀를 씻기던 중이라 루이스가 아파서 그런 줄 알고 작게 죄송해요. 라고 속삭이듯 말하고 다시 얘기를 이어나감.
“그래서 보통 애들이 그러는 것처럼 버려진 아이들 무리에 끼어 살았죠. 우리는 각자 하는 일이 달랐어요. 보통은 으레 그러하듯 소매치기나 도둑질, 구걸, 배달, 구두닦이, 신문팔이부터 꽃팔이, 돈 되는 건 뭐든 해서 그걸로 먹고 살았죠.”
“너는? 어느 쪽이었지?”
“글쎄요. 뭐였을 것 같으세요?”
말끝에 피식 웃는 소리가 섞인 것 같다.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는 요령 좋게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고 수건을 덮어 마무리했다.
“물에 너무 오래 계시면 안 돼요.”
좀처럼 웃지 않는 녀석이 띠운 엷은 미소에 벨져는 그러쥔 주먹에 힘을 줬다. 그 자신도 짓고 있는 줄 모르는 미소는 아주 예쁘고 상냥해서,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너는 나를.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감각에 벨져는 짜증내던 것도 잊고 루이스의 팔을 잡아 당겼다. 말로 다 하지 못한, 할 수 없는 마음을 담은 손은 뜨거웠고, 붙잡은 팔은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