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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그, 이게 무슨....”
토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도착한 장소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였다. 황무지라고 할까, 사막에 가까운 살풍경 속에 철제 의자 두 개와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허허벌판에 의자와 테이블이 어울리지 않는 건 둘째 치고,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는 사람에 당황한 릭은 엉거주춤 서서 주위를 살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벨져 홀든과 수도원에 잠입하는 거나 헌터 둘 사이에 끼는 것보다도 더 불편하다.
“저... 차라도 한 잔...? 커피도 있습니다.”
“그럼 커피로 부탁하오.”
삭막한 풍경 속에 그림처럼 앉아있던 남자는 릭에게 자리를 권했다. 짙은 잿빛 후드, 얼어붙은 결정 조각 같은 것들로 추론하지 않아도 알 정도로 유명한 남자는 연합의 영웅이었다. 릭은 쭈뼛거리며 다가가 빈 의자에 앉았다.
연합의 영웅이 직접 따라준 건네는 커피를 받아들고, 멋쩍게 주변을 둘러봤으나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포트레너드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군. 그... 용건이 뭐요.”
“이야기를 해보라더군요.”
“나와?”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이 그가 다루는 얼음 결정처럼 날카롭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깨질 것 같이 위태로운 분위기라 어쩐지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가까이서 단둘이 만나기는 처음이라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저를 이리로 불러내 원치 않은 자리를 만든 토니를 원망하며, 릭은 다시 말을 붙였다.
“하하.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저도 그렇습니다. 위에선 톰슨 씨가 가진 정보에 대해 물으라고 절 보냈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니까요.”
루이스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하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말끝을 늘이는 사이에 다시 침착한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이 일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다. 릭은 내심 가지고 있던 영웅에 대한 인상을 수정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리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전쟁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익히 알고 있을뿐더러,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의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그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들 주변 사람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별개가 아닌가.
릭은 최근에 만났던 남자를 떠올리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컵을 한 손에 쥐었다.
“음. 그래서 뭐가 궁금하오.”
“...여러가지가 있지만,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떠나셔도 되고요.”
“마치 내가 떠나길 바라는 것 같군.”
내내 다른 곳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는 건 처음이라, 릭은 그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이렇게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나. 깜빡이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찰나였지만 고개를 숙이며 휘는 입술을 본 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시 고개를 들어 가볍게 손을 내젓는 루이스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무표정이라 제가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아, 하하. 그렇군.”
후드의 그늘에 가려진 얼굴에 왠지 모르게 시선이 간다. 릭은 루이스 쪽으로 몸을 숙였다. 루이스의 얼굴에서는 희미한 웃음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감사합니다. 이건 별 거 아니지만... 좋아하신다고 들어서요.”
“이런. 이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루이스는 그의 의자 아래 놓여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릭에게 건넸다. 봉투에 찍혀있는 로고를 확인한 릭은 도넛 가게에 들러 도넛을 사는 루이스를 상상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드셔도 됩니다.”
“고맙소. 요즘 이렇게 신경 써주는 사람을 도통 못 만나서 말이지. 다들 하나같이 자기 얘기만 늘어놓기 바쁘더군. 사람이 말을 해도 듣지도 않고....”
“상식을 기대하기 힘든 곳이니까요.”
“그러게나 말이오.”
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루이스가 후드 재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도 주머니가 있나 싶어 그의 손에 시선을 옮기자 루이스가 릭을 바라보며 작은 기계를 꺼냈다.
언제부터 녹음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 시작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녹음기를 꺼내 보여주는 건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녹음기를 보고도 민감한 질문에 답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일까. 릭은 답을 찾아 루이스를 바라봤으나 루이스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인식의 문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십니까.”
“없소. 그저 목격했을 뿐이지. 애초에 나는 그걸 찾아간 것도 아니었고....”
“액자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서도 액자와 옥사나를 쫓고 있으니까요.”
“나보다는 벨져 홀든에게 묻는 게 나을 거요. 연합에는 그의 형제도 있지 않소.”
“형제도 있고, 그 날 지원하러 간 동료도 있습니다만.... 늦은 탓인지 인식의 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라서요.”
“그래서 날 부른 거요?”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중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모두 알려진 얘기만 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꼭 살얼음 위를 걷는 사람 같았다.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고, 최소한의 일만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머릿속에 정에 약한 천재 한 사람이 떠올랐지만 그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의문과 흥미만 생겨날 뿐이다.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일 텐데, 계속해서 먼저 입을 열게 되는 것도 이상했다.
“미안하게 됐군. 당신이 이렇게 나오기까지 했는데.”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하. 그대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루이스는 그 뒤로도 형식적인 질문을 했다. 그의 질문에 릭은 모른다, 혹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로 애매모호하게 답을 했고, 루이스는 그럴 때마다 더 캐묻는 대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게 맞긴 하지만 이래서야 답을 기다리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릭은 저도 모르게 루이스를 걱정하며 녹음기와 루이스를 번갈아봤다.
“여쭤보고 싶은 건 이게 끝입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인사를 받기도 민망하군.”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데 고문을 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조금 조심하시는 게 좋겠군요. 이렇게 부른다고 나오시면 그 때는 정말 고문실에 갇힐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지 않았잖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을 잡자 루이스는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살짝 찌푸린 눈살에 릭은 무심코 잡았던 손을 놓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능력만 믿다간 정말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기엔 특히나요.”
“...새겨듣도록 하지.”
토니에게 느끼는 위안과, 브루스에게 느끼는 존경심, 그리고 벨져에게 느끼는 막연한 기대감과 다른 감정에 릭은 루이스의 손을 잡았던 손을 그러쥐었다. 그러는 사이 루이스가 녹음기를 끄고 짐을 챙겼다. 생각에 잠겨있던 릭은 자리를 뜨려는 루이스의 등을 향해 물었다. 이 이상한 질의응답이 시작됐을 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왜 이런 건지 물어봐도 되겠소?”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이게 무슨 뜻일까. 나름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대답에 릭은 멍하니 루이스를 바라봤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은 변함이 없지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릭을 향해 돌아섰다.
“상황에 떠밀려 괴로워한다는 걸 들은 바 있습니다. 전쟁과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지만.... 이미 한차례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굳이 보태는 설명을 듣고 있던 릭은 마침내 루이스가 무엇을 바랐는지 깨닫고 입을 벌렸다. 모두가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실험의 재료로 쓰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고맙소.”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할 수 있다고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도 그 사실을 감추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쓰는 사람도 있고, 끝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운데 모두가 외면한 일상과 권리에 대해 말하는 남자를 보며 릭은 말로 형언하기 벅찬 감정에 차올랐다. 루이스가 지키려 애쓴 것은 릭 그 자신마저 포기한 것이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 건 다 그런 이유에서 였으니까.
“할 수 있다고 그게 쉬운 건 아니지.”
짧은 문답이었으나 릭은 루이스라는 사람이 왜 '영웅'이라 불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지 이해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은 희망을 맡길 수밖에 없다. 힘이 없고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워진 릭은 멋쩍게 웃으며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신세를 졌군. 내가 필요해지면 부르시오.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건 회사만으로 족하지만.... 긴급 택시로 이만한 게 또 없거든.”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루이스가 잠시 뜸을 들이다 릭의 손을 맞잡았다. 가벼운 악수 뒤에 떨어지는 손이 왠지 아쉬워 그를 향해 웃자 루이스가 시선을 피했다. 최근 너무 눈이 부신 사람들을 봐서 그렇지, 이쪽도 남자치곤 선이 가늘고 예쁜 얼굴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청초한 분위기가 감도는 게 이대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무슨 부탁이든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톰슨 씨?”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등을 돌렸고, 릭은 그의 손을 잡아 세웠다. 멀쩡히 가는 사람을 이유도 없이 붙잡은 건 릭 자신도 놀랄 만큼 충동적인 행동이라 입을 열고도 저를 돌아보는 루이스의 눈에 돌려줄 말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 그게.... 나도 토니에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이오... 연합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같이 가지 않겠소?”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말은 꽤 그럴 듯 했으나 너무 허둥댄 나머지 영 신빙성이 없었다. 처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소년도 이렇게 떨지는 않을 것이다. 릭은 부끄러움과 긴장이 뒤섞여 미친 듯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붙잡은 손목을 놓았다.
하긴. 갑자기 이런 말을 해봤자 수상쩍게 보이기밖에 더 하겠는가. 말 한 마디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체념하려는 순간 피식 웃음이 새는 소리와 함께 그의 눈이 얇게 휘었다.
“그럼 기꺼이 동행하죠.”
“...아, 그럼 게이트를 열겠소.”
잠시, 그의 미소에 눈을 빼앗겼던 릭은 바로 발 밑에 게이트를 열었다. 너무 기뻐하는 티를 내도 민망한데 좀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런 모습을 보고 웃는 게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친절히 고개를 돌려주었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 그러면 나도 민망하오.....”
“크흠. 죄송합니다.”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하자마자 루이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웃지 말란 뜻은 아니었는데, 말해놓고 후드에 가려진 얼굴이 아쉬워진 릭은 그를 가까이 끌어 당겼다.
“이러는 편이 능력을 쓰기 편해서 말이오.”
그냥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릭은 능력 핑계를 댔다. 발 아래 반짝이는 게이트를 본 루이스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섰고, 줄어든 거리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릭의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 루이스의 어깨를 잡았다.
“아,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릭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가까워서야, 심장 소리가 다 들릴 것만 같다. 문제는 거리를 벌려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루이스 역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저기....”
말을 꺼내자마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얼굴이 귀엽다. 남자한테 귀엽다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 보는 게 귀엽다는 말이 딱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건 알지만.... 모두에게 이러는 건 아니오.”
“...다행이군요.”
릭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 살짝 눈을 내리깐 루이스의 속눈썹에 하려던 말을 잊었다.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시간을 때우는 가볍고 상투적인 말에 불과했지만 릭의 게이트는 채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을 연합에 옮겨놓았다.
“그럼 저는 이만.”
“저, 루이스.”
루이스는 연합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말을 붙이기 어려웠지만 릭은 저를 위해준 사람을 위해 용기를 냈다. 그가 써준 마음에 비하면 아주 약간의 수고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릭은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소?”
“릭!”
말없이 릭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입술을 뗀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더 반갑게 맞는 연합의 참모 덕에 애타게 기다리던 답을 못 듣게된 릭은 토니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루이스는 릭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돌아섰고, 릭은 풀이 죽은 나머지 돌아선 루이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남겨져 있다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쓴 거랑 ctrl+c/v한 것 같지만 새로 나온 보이스 드라마를 듣고 나니 생각나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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