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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모티브가 된 곡입니다! 같이 들어주시면 기쁠 거예요! >//<
“루이스.”
“톰슨 씨.”
“그.... 나랑 별 보러 가지 않겠소?”
그것은 다소,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공성전을 마친 직후에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다가온 릭 톰슨의 말에 루이스는 콜라 캔을 든 채 눈을 깜빡였다. 공성 내내 그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받은 터라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피차 수고했다는 상투적인 말을 주고받고, 그러고 나면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가면 그뿐이라 당황스러웠다.
연합의 참모인 토니와 릭은 예의 그 작전 이후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은 모양이지만 루이스는 그와 이렇다 할 친분이 없었다. 공성이라던가, 토니를 만나러 연합에 들른 그와 오며가며 마주친 적은 있지만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별을 보러 가지 않겠냐니.
루이스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다소 느닷없는 별구경 얘기를 꺼낸 장본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뜬금없지. 나도 아오.”
스스로도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멋쩍은 눈치였으나 다른 꿍꿍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십대 소년의 첫 데이트 신청을 같은 모습이라 괜히 미안해진 루이스는 이미 정해진 답을 망설였다. 웬만한 사정이 아니고서야 거절당할 게 뻔한데도 용기를 내 말을 건 그의 마음이 신경 쓰여 안 되겠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정말 끝내주는 곳을 찾아서, 꼭 함께 가고 싶소.”
그가 덧붙인 이유는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 말을 하는 릭은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어 마음이 흔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곤란해 하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무른 면이 맞물려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루이스는 기대에 찬 눈빛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소. 그냥 기분 전환 삼아. 응?”
겨우 뗀 한 마디마저도 거절이라기엔 영 애매한 말이었지만 릭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더 물러설 수 없게 된 루이스는 이 일의 당위성을 찾기 시작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릭 톰슨과 그의 능력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면 호감을 쌓아두는 게 여러모로 이롭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흔쾌히 따라 가기엔 미심쩍은 데다 하루 종일 이어진 격무에 지친 몸과 처리하지 못한 내일의 업무가 마음에 걸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분도 있지 않습니까?”
“음. 그게.... 퇴근하고 밤거리를 걷다 시계를 보는데 마침 이 곳 시간이지 않겠소. 그러다 고개를 올렸는데 밤하늘이 오늘따라 더 반짝이고, 그러다 보니 문득, 당신 생각이 나서.”
릭은 뜻 모를 이유를 쑥스럽다는 듯, 하지만 소중한 기억을 꺼내 보여주듯 천천히 읊조렸다. 다른 변명거리를 찾던 루이스는 그 따스한 목소리와 미소에 더 할 말이 없어졌고, 릭은 빙긋이 눈을 휘며 손을 내밀었다.
“멋진 별자리 이름은 모르지만. 같이 가주지 않겠소?”
마주한 눈이 머금은 온기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내밀다 일순 멈춰서자 일말의 망설임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덥썩 손이 잡혔다.
“자, 그럼 가볼까!”
맞잡은 손에서 번지는 홧홧한 열기에 한 번, 차가운 제 손을 단단히 잡은 악력에 또 한 번 놀란 사이 릭이 게이트를 열었다. 발밑에 생긴 푸른 빛이 별보다 더 반짝이지 않을까 생각하던 루이스는 불현듯 든 불안감에 고개를 들어 릭을 올려다 봤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 비장의 장소요. 기대해도 좋소.”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릭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놓지 않겠다는 듯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뺐다. 느슨하게 잡은 손이 주는 묘한 기류에 루이스는 슬그머니 손을 뺐다. 꽉 잡혀 끌려가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간질거리지는 않으니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막상 손을 놓았지만 크고 따뜻한 손이 꼭 잡고 있는 감각과 미적지근한 온도가 남은 손이 왠지 모르게 허전해진 루이스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후드를 깊이 눌러 쓰며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빼놓고 순순히 놓아주는 손이 아쉽다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루이스. 고개를 들어 보시오.”
발밑에 푸른빛이 사라지고, 이공간을 이동하는 기묘한 부유감 대신 제 발로 땅을 딛은 안정감에 그 말을 따라 고개를 들자 드넓게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별과, 그 별무리를 품은 짙은 밤하늘. 망설이고 주저한 게 어리석게 느껴지는 장관에 루이스는 말을 잃었다. 단어 몇 개, 문장 몇 줄을 더해도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을 바라보다, 손을 어루만지는 온기에 겨우 정신이 돌아와 긴 숨을 내쉬었다. 어깨며 목에 잔뜩 들어갔던 힘과 긴장이 풀어지고, 내쉰 숨을 들이마시자 조금 쌀쌀하고 신선한 공기에 저 밑 어딘가에 막혀있던 숨통이 탁 트였다.
광활한 하늘과, 반짝이는 별.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는 사이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옥죄고 있던 압박과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해진 루이스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별을 수놓은 밤구경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감사해야 하는 건 난색을 해도 싫은 내색 한 번 않고 권해준 마음씨였다.
“멋지네요. 별자리 이름 같은 거 몰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다행이군.”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릭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쉬었으면 했던 것뿐인데, 딱딱하게 굳은 무표징이 풀어진 것만으로도 내심 뿌듯했던 릭은 눈송이처럼 사르르 번졌다 사라지는 미소에 눈을 깜빡이다 그를 따라 웃었다.
뺨이며 손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바람에 내색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루이스를 방해하지 않으려, 주책 없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입을 다문 릭은 발을 내딛었다.
“가만히 서있으면 감기 걸릴 거요. 바람도 차고.”
“그럼 좀 걸을까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이 평소에 보는 늠름한 영웅의 얼굴과는 사뭇 다른 청초함을 풍겨, 릭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은 걸음을 옮길수록 더 깊고 아련해졌고, 갸름한 턱과 애수에 젖은 눈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릭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지금 이 사람은, 말 한 마디에도 깨져버릴 것 같다. 너무 위태롭고 연약해서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내키지 않는 제안을 따라 여기까지 와준 사람이다. 괜히 그를 더 침울하게 만드는 것만 같아 릭은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니까.... 가끔은 이렇게 기분 전환도 하고.”
“....... 누가 제 기분 전환 시켜주라던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지쳐보여서.”
“톰슨 씨에게도 그렇게 보일 정도라니, 제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닌가 보군요.”
릭의 말에 멈춰 선 루이스는 쓰게 웃으며 발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이 알아챌 정도로 상태가 나빠 보인다니. 회사는 물론이고 저를 노리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뻐할 소리에 자조하는 사이 릭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오! 무리해서 괜찮은 척 하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얼마나 힘든지 일개 회사원에 불과한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냥 그대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후드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루이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가끔 이렇게 기분 전환이 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부르시오. 부끄럽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저만 믿으라는 듯 말하던 릭이 겸연쩍어하며 말을 마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라곤 티끌만큼도 섞여있지 않은 진심에 먹먹해진 루이스는 차마 릭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생각과 달리 저는 너무나 초라한 사람이라 이런 마음을 받는 게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마음만 받고 또 무리하면 나는 뭐가 되오.”
“하하. 그도 그러네요.”
루이스는 투정부리듯 말하는 릭에게 꾸밈없이 웃으며 답했다. 연상에, 버젓한 직업이 있는 어른이 부리는 투정이 귀여워 보일 수도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릭의 말이 이어졌다.
“신세 진다고 생각 마시오. 당신이야말로 남을 도울 때 받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으면서.”
“듣다 보니 어째 혼나는 것 같네요.”
엄한 척하려고 애쓰는 초짜 선생님 같은 말투에 루이스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솔직히 입에 담았다.
“루이스...!”
“농담입니다.”
예상대로 바로 발끈한 릭이 루이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때맞춰 털어놓은 진실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이 꼭 풀 죽은 강아지 같아 루이스는 웃음을 참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거 조금 웃는다고 릭이 저를 여기 버려두고 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켜야할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그대도 농담을 하는 줄 몰랐소.”
“음. 영국인의 유머 센스가 좀 그렇긴 하죠.”
“그래도 지금이 훨씬 보기 좋군.”
루이스는 릭의 말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방금 전까지 저를 놀리며 참던 웃음과 달리 보는 사람이 더 아픈 쓴웃음이라 머뭇거리는 사이 루이스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를 냈다.
“엣취!”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버리는 재채기 소리에 민망해진 루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코를 훌쩍였다.
“조금 쌀쌀하네요.”
“옷이 얇은 걸 깜빡했군. 잠깐 이거라도 덮고 계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춥지....”
말릴 새도 없이 외투를 벗은 릭이 루이스의 어깨에 방금 벗은 외투를 얹고는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야말로 얇은 반팔 티셔츠 한 벌이라 받을 수 없다고 하려는데,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얇게 휘는 눈매가 그리는 눈웃음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루이스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사이 릭은 루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게이트를 만들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금방 오겠소.”
“아, 저기...!”
막무가내인 것도, 정신없이 몰아치는 것도 아닌데 은근히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눈 깜짝할 새 릭의 페이스에 말려버린 루이스는 잔상만 남은 게이트를 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갑자기 다가오는 것 치고 불편하지 않다. 천성이 선하고 자상한 사람이라 그런 거겠지.
광활한 벌판에 홀로 남겨진 루이스는 멍하니 서있는 대신 그 자리에 무릎을 모아 앉았다. 그와 함께 걸을 땐 몰랐는데, 광활한 밤하늘과 허허벌판 사이에 홀로 남겨지고 나니 그렇게 처량하고 쓸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괜히 코도 훌쩍이고, 엉덩이를 꿈지럭거리며 다시 자리를 잡다 어깨와 등을 감싼 코트가 툭 떨어졌다.
주워든 코트는 무거운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미지근했다. 옷을 도로 어깨에 덮는 대신 무릎 위에 올린 루이스는 코트에 밴 옅은 커피 냄새에 괜히 쑥스러워져 잠시 머뭇거리다 도로 어깨 위에 덮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있으면 되는데,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코트의 무게며 온기, 거기에 밴 향 같은 게 죄다 신경 쓰여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결국 루이스는 옷을 끌어당겨 여미지도 못하고 쭈뼛거리다 열이 오른 뺨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부끄럼을 타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퍽 우스운 꼴이라 더 생각을 하는 대신 하늘을 수놓은 별무리를 바라보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별을 보며 릭을 기다리길 얼마, 땅 위에 남은 표식 위에 그가 나타났다. 한 손엔 두꺼운 담요, 한 손엔 보온병과 컵을 가져온 그는 아직도 얇은 티셔츠 한 장 차림이라 루이스는 냉큼 외투를 건넸다. 등과 어깨를 덮던 코트가 사라져 한기가 든 것도 잠깐, 빙긋 웃은 릭이 루이스의 어깨에 담요를 둘렀다. 그 짧은 시간동안 담요를 난로에 데워오기라도 했는지 무거운 코트와는 비교도 안 되게 따뜻했다. 릭은 데운 담요를 목까지 꼼꼼히 둘러주고 나서야 그의 코트를 걸치고 루이스의 옆에 앉아 컵을 내밀었다.
“자, 여기. 따뜻한 코코아요.”
“감사합니다.”
“아. 혹시 단 걸 안 좋아한다거나...?”
“아뇨. 음식은 가리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영국인이거든요.”
“하하. 음식은 그래도 차는 까다롭잖소. 우유에 차냐, 차에 우유냐 같은 걸로 하루 종일 입씨름하고.”
“그건 중요한 문제니까요.”
“나는 커피 파니까 봐주시오.”
루이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아의 온기에 차가워진 몸과 뼛속까지 시린 외로움에 언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자상하고, 따뜻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좋은 사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 이것도 어떤 의미에선 축복받은 능력이다. 따뜻한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쥔 루이스는 김이 오르는 코코아를 홀짝이다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입을 열었다.
“별구경에 코코아라.... 이런 건 좋아하는 분이랑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 지금도 그러고 있소.”
조곤조곤.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자아낸 말에 장난으로 말을 걸었던 루이스의 눈이 커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한 릭은 옆눈질로 루이스를 보곤 눈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근사한 미소에 루이스는 마주 웃는 대신 숨을 집어삼켰고, 릭은 너무 솔직한 반응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운 것도 이 정도면 영웅 급이다.
“설렜소?”
“작업 멘트로는 최고네요. 연륜은 못 당하겠군요.”
“음.... 지금 늙었다는 말을....”
“뭐....”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친 농에 넘어간 게 어지간히 분했던지, 루이스가 부정도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는 그의 은근한 성질에 릭은 바보처럼 웃어버렸다. 기분이 나쁘긴 커녕 그마저도 귀여워 보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릭이 웃자 루이스도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다 소리 내어 웃었다.
“큼. 흠.”
한바탕 웃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루이스가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긴장을 풀고 한가롭게 별이나 구경하는 것도 좀처럼 없던 일이다. 아무리 별이 예뻐도, 전장의 한복판에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여유가 없다.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뿐이지, 다시금 부는 전란의 폭풍에 세계 각지에선 지금도 소리 없는 첩보 작전과 수뇌부의 머리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치열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피 튀기는 싸움에서 ‘영웅’의 역할은 더 중요해지고, 사람들이 ‘영웅’에게 품는 막연한 기대는 더 커져서 그 모두를 짊어지려니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감상에 사로잡혀 빈 컵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릭이 푹 긴 한숨을 토했다. 이런 싸움에 평생 손을 대지 않았을 사람이, 의도치 않게 전란에 휩싸여 작전에 투입되고 죄책감에 휩싸여 액자를 찾아다니느라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쉽사리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제가 있었더라도 토니는 릭을 작전에 투입했겠지만, 그래도 만약 그 때 제가 떠나지 않고 있었더라면.
루이스는 그런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죄책감을 끌어안고 이어지는 침묵에 이따금 바람 소리와 섞여들다 릭의 목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다들 궁금해 하던데. 그대는 물어보지 않소? 모처럼 단 둘이고. 방해받을 일도 없는 기횐데.”
“...톰슨 씨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군. 고맙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때와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엔 짙은 피로와 회한이 섞여 있어 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닌데도 죄책감에 시달리며 액자를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떠돌이의 삶을 택한 사람이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그런 사람이 시간과 수고를 들여 마음을 써주는데 그걸 이용할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오늘 일도, 저만 알고 있는 게 좋겠죠.”
“알아주길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그대만 알아주면 되오.”
고심하며 꺼낸 말에 돌아온 답이, 그와 함께 제게 보내는 미소가 주는 울림에 루이스는 후드 속에 얼굴을 숨기고 태연하게 보이려 애쓰며 말을 골랐다.
“음. 뭔가 로맨틱하네요.”
“하하. 그렇소?”
“네. 자칫 잘못하단 착각하겠어요.”
침착하고 차분하려 애썼지만 정작 튀어나온 말은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라,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착각할 것 같으면 알려주시오.”
그렇게 말하며 손을 덥석 잡는 바람에 놀랐지만 릭은 그가 더 놀랐다는 듯 흠칫 몸을 떨었다. 모든 결정 능력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루이스는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낮은 편이었고, 몸에서 냉기가 흐르는 트리비아와 달리 보통 사람들에겐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어느새 손이 이렇게.... 이만 가는 게 좋겠소. 더 있다간 감기에 걸리겠군.”
“괜찮습니다. 원래 이러니까요.”
“자꾸 그렇게 두니까 몸이 상하는 거 아니오.”
함께 별을 보러 가자고 잡을 때보다 더 강하게 잡는 바람에 손을 빼지도 못하는 사이 얼굴 가득 걱정을 띠운 릭이 루이스의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큰 손이 손가락 마디며 손바닥을 문지르는 게 쑥스러우면서 야릇한 기분이라 손을 빼려 해도 릭은 루이스를 놓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꼭 잡고 비비며 호호 입김을 부는데, 그 정성과 걱정이 쑥스러우면서도 고마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힘이 빠진 걸 느낀 릭은 살며시 내리깐 루이스의 눈과 그 위로 드리운 속눈썹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온전히 제게 손을 맡긴 루이스의 손을 잡고 있으니 그 착각은 착각이 아니라고,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제가 생각해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부끄러워하는 루이스를 보고 있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좀처럼 헤아릴 수 없는 감정에 릭은 말없이 손을 데우는 데 집중했다.
잡은 손을 데우고,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러고 나면 씻고 침대에 누워 하루를 정리해야지. 그와 함께 별을 보러 갔다는 기억만으로도 지친 하루가 멋진 하루가 되고, 또 다른 날의 위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입김을 불던 손가락 끝에 입술이 스쳤다.
“아, 그, 미안하오.”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스친 것뿐인데 저만큼이나 당황한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선을 피했다. 쑥스럽고, 간지럽고, 두근거리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 손끝을 타고 번져 물들어 간다. 먼저 손을 뺀 루이스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감추고, 머쓱해진 릭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 팔뚝에 찬 시계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내가 너무 시간을 뺏었군. 데려다주겠소.”
“부탁드립니다.”
먼저 일어난 릭이 루이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루이스는 그 손을 잡는 대신 혼자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 완곡한 거절에 릭은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없이 게이트를 열었다. 게이트를 통한 공간 이동에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서, 편리한 능력이 오늘은 몹시도 서글펐다.
“저, 톰슨 씨?”
“릭.”
“네?”
“릭이라고 불러 주시오.”
뜬금없는 말에 동그래진 눈이 토끼를 연상시켰다.
“다른 건 아니고. 톰슨 씨는 너무 딱딱하지 않소. 그리고....”
제 말만 기다리고 있는 루이스에게 마땅한 변명거리를 대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릭은 작게 한숨을 쉬며 시간을 끌다 마지못해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톰슨 씨라고 하면 꼭 회사에 있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오....”
스스로 생각해도 변변치 못한 이유지만, 때로는 꽤 훌륭하게 먹히는 게 바로 일 핑계였다. 아니나 다를까, 깨달음을 얻은 양 작게 입을 벌린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론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음. 부탁하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이런 일에는 조금.... 둔감하니까요.”
성과 이름을 분리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듯 지은 미소에 릭은 당황해 입을 벌렸다. 이래서야 누가 누구더라 둔감하다고 할 처지가 못 된다. 실수를 바로잡기도 전에 반대편 게이트에 도착해버리는 바람에 더 다급해진 릭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루이스의 팔을 움켜잡았다.
“미안하오! 그런 뜻이 아니었소. 나는 그냥, 그,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되는 대로 떠오르는 말을 내뱉는 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릭을 바라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 위로 드리운 주황색 가스등과 그의 후드가 만든 그림자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입술을 물고 있는 것만은 또렷이 보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별 일도 아닌걸요. 그러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방금 전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 뭘 했고 뭐에 서운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예쁜 미소에 멍하니 루이스를 바라보던 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릭.”
그럼 좋은 밤 되라는 짧은 인사말과 함께 루이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발밑에 얼음 결정을 깔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아까보다 더 멍하게 보던 릭은 수줍게 제 이름을 부르던 그를 떠올리고 주먹을 쥐었다. 자연스럽게 올라가려는 광대를 억지로 눌러보려 해도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고, 감출 수 없는 흥분에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다 마음껏 소리치기 위해 게이트를 열었다.
그날 밤, 게이트를 열고 돌아와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도 가시지 않는 흥분에 이리저리 뒤척이다 겨우 잠든 릭은 짧은 꿈을 꿨다. 그 꿈엔 혼자 걷던 밤하늘을 저와 함께 걷는 루이스가 있었고,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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