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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Two Pianos
존잘님께 선물로 드렸던 벨루 피아노 콩쿨AU
낙엽이 떨어지는 11월의 어느 날. 대기실에 다리를 꼬고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소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기실에 비치된 모니터를 통해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 연주자가 실수를 하고 눈에 띄게 흐트러진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따분한 탓이 컸다.
아무리 학생부 1차 예선이라지만 지금 연주자나 그 전이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시시하고, 진부하고, 따분하다. 앞으로 이어질 연주라고 별로 다르지 않을 터.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소년은 팔짱을 풀고 일어났다.
“벨져.”
“시시해서 더 못 봐주겠군. 더 듣다간 내 귀까지 썩겠어.”
동세대에선 견줄 사람이 없다는 유망주, 데뷔 이레 근 10년간 출전한 대회마다 우승을 휩쓴 홀든의 벨져. 자신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 그지없는 천재. 그 외에도 소년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많았으나 벨져는 개의치 않았다.
벨져 홀든에게 그 정도 찬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고, 본디 가지지 못한 이들은 저보다 나은 이를 질시하는 법이니 뒤로 무슨 소리가 들려도 그저 덤덤했다.
대기실을 나온 벨져는 서늘한 공기에 손으로 팔을 감싸 팔짱을 꼈다. 놓고 온 재킷이 생각났으나 못 견딜 정도로 추운 것도 아니고, 다시 돌아간들 껄끄러울 뿐이니 조금 걷는 게 나을 성 싶었다.
이제 막 네 번째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했으니 제 순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인터미션 전에만 들어가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여유롭게 복도를 걷는데 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긴장만 안 했어도...!”
“됐어. 어차피 홀든 때문에 준우승밖에 못 하는 콩쿠르였잖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못 이긴다고.”
“그래그래. 어차피 다들 힘 빼고 할 테니까 너무 그러지 마. 잘해봤자 2등이고.”
“그 새끼는 이미 가진 트로피도 많으면서 왜...! 좀 양보하면 어디가 덧나냐고! 왜 그렇게 다 가지지 못해서 안달이야? 뻐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제길....”
누군가 했더니, 두 번째로 시작해서 악보를 까먹더니 결국 심사위원의 커트로 연주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그만둔 연주자다. 센스가 부족한 건 둘째 치고 자신감이 없는 건 다 연습 부족이다. 머리가 나빠도 몸이 반응하도록 확실히 숙지했으면 그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야말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데다, 저 좋을 대로 남 탓을 하는 것까지 총체적인 난국이다. 그야말로 평가 대상 외. 저런 정신머리로는 뭘 해도 그저 그런 정도겠지. 격이나 급을 따질 것도 없다. 벨져는 작게 혀를 차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심한 패배자들 사이를 당당히 걸어가는 건 입상 발표 때나, 시상식 때면 충분하다. 벨져는 적개심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지뢰밭에서 자신을 뽐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손이라도 씻고 갈까. 대기실 주변 화장실은 이미 긴장과 압박감을 못 견딘 녀석들로 가득했기에 벨져는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녀석이 하나.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혀를 찼다. 급하게 빌린 티가 나는 정장에, 사이즈도 맞지 않는 낡은 구두. 거기에 머리카락이 젖을 정도로 물을 뒤집어쓰고도 떨리는 손까지. 대충 봐도 견적이 나오는 행색에 그나마 봐줄만한 건 티 없이 맑은 얼굴뿐이다.
대충 훑어본 것으로 파악을 마친 벨져는 물을 틀어 손을 적셨다. 가시지 않는 시선에 살짝 눈을 흘기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 어설프고 같잖은 반응에 벨져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샜다.
“못 치겠으면 시간 뺐지 말고 돌아가라. 어차피 도망친다 한들 너 같은 패배자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주제도 모르고 각오도 없이 콩쿠르에 발을 들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그게 당장 제출할 상이 필요하거나, 콩쿠르에 참가하는 비용도 아까운 처지라면 더더욱.
평소 같으면 먼저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타인에게 간섭하는 일도 없지만 어줍잖은 치기로 긴장에 벌벌 떠는 멍청이를 보고 있자니 절로 말이 나왔다. 다른 이유는 없다. 물에 젖어 저를 바라보는 눈과 얼굴이 신경에 거슬렸을 뿐이다. 차가운 물밖에 나오지 않는 화장실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몰라도, 손끝이 빨개질 정도로 차갑게 굳은 손가락으로 제대로 피아노를 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벨져의 신랄한 말에 이름 모를 소년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까와 그리 다를 것도 없는 반응에 김이 빠진 벨져는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았다. 그렇게 본다고 뭐가 해결되지도 않는데, 되받아치지도 않다니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기껏 무대에 올라가서 피아노 건반 한 번 못 쳐보고 내려오는 구제불능. 자신의 과오와 연습 부족은 나 몰라라 하고 남 탓을 하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자기연민에 빠지는 게 더 답이 없다. 아까 지나치며 들은 말을 떠올린 벨져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대충 뒷주머니에 넣었다.
벨져는 찝찝하고 꿉꿉한 짜증을 걸음에 실었다. 복도를 울리는 벨져의 구두 소리 뒤로 다급한 발소리가 따라붙고, 드디어 되받아치려는 건가 싶어 멈춰 서자 따라온 그가 여전히 희고 맑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저기, 손수건 떨어트렸어.”
뭔가 했더니, 정말이지 멍청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벨져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도로 무시하면 적당히 알아들을 법도 한데 따라붙은 시선은 걸음을 옮겨도 가실 줄 몰랐다. 벨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주기 위해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연주를 앞두고 괜한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고, 주제도 모르는 게 성가시게 엉겨드는 것도 딱 질색이었다.
“흥. 백기 대신 써라. 포기할 게 아니라면 그 얼어붙은 손부터 어떻게 하도록.”
벙찐 얼굴을 뒤로하고, 벨져는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돌아서면 잊어버릴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더 이상 신경을 쓰는 의미도 가치도 없었다.
쇼팽 에튀드- Op.10 No.4.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연주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벨져는 가볍게 숨을 토하며 목을 죈 보타이를 풀었다. 시상식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다시 맬 시간은 차고 넘친다. 남은 건 지루하고 감흥 없는 연주 뿐.
벨져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대기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딛은 순간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다시 걸음을 내딛다 고개를 돌렸다.
분명, 전에 없이 깨끗한 음색이지만 뭔가 달라. 적어도 제가 아는 동년배 중에 이런 피아노는 없다. 벨져는 다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빠른 걸음은 이내 뜀박질이 되고, 열린 커튼 사이로 비치는 무대 조명에 벨져는 계단을 뛰어 올랐다.
깨끗한 렌토는 온데간데없는 격정적인 알레그로. 몰아치는 바람을 휘감은, 차가운 겨울.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던 상대라면, 그건 아마도.
열린 커튼 너머 칠흑으로 빛나는 피아노 건너편을 바라보며 벨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스친 예상대로, 그가 있었다.
맹한 얼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무표정과, 그의 손가락을 타고 울리는 피아노 소리. 벨져는 숨을 옥죄는 연주 앞에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는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제가 누른 건반이다. 앞의 연주자 모두 똑같이 쓴 피아노인데도 그의 손끝에 닿은 건반은 전혀 다른 피아노인 양 소리가 다른 소리를 냈다. 마치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고 강렬하게 울리며 청중을 휘어잡고 그들의 심장을 묶는다.
몰아치는 바람과 같은 주선율은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옮겨 가고, 이어지는 에스프레스에 숨이 멎는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피아노와, 감정이라곤 내비치지 않는 무표정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그. 몰아치는 감정과 그 모두를 담아낸 소리에 벨져조차 넋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테크닉이 좋아도, 아무리 어려운 곡을 들고 나왔더라도, 기계처럼 악보의 지시를 정확히 지키는 연주를 해도 이걸 넘어설 수 없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는 음표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린다.
겨울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미스터치 하나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연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벨져는 커튼을 움켜쥐었다. 졌다. 이름도, 출신도 모를 녀석의 연주에 압도당해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패배를 시인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사위원의 평이 어떻든 벨져 홀든이 졌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중요했다.
쇼팽 에튀드- Op.25 No.11 '겨울바람‘. 분하게도, 저 지독히 무신경한 얼굴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래. 아무리 쫓은들 바람을 손에 쥘 수는 없겠지.
벨져의 헛웃음과 함께 소년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에서 떨어지고, 연주를 마친 그가 숨을 토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숨은 안도와 후련함을 담고 있지만 그 눈은 여전히 찬바람이 부는 시린 동토에 머물러있다. 먼 곳을 그리는 그 눈빛에 벨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목 아래 일렁이던 감정이 꿈틀거렸다.
뜨겁고, 묵직한, 호승심을 닮은 무언가. 그 누구도 준 적 없는 감정에 벨져는 커튼을 움켜쥐었던 손을 제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옷 위로 닿은 손이 뜨겁다. 쓰러트릴 상대가 있다. 잠시 느낀 수치와 굴욕은 몇 배로 갚아주면 된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은 벨져는 그를 향해 보내는 박수 소리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장장 10여 년간 이어진, 오만하고 고고한 독주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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