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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Alles Gute zum Geburtstag
1/10 Late night / Office
1월 12일. 루이스는 달력에 표시해놓은 빨간 동그라미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출발하면 늦지 않게 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연주회는커녕 새해맞이에도 관심이 없지만 애인의 생일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날이기도 하고, 몇 날 며칠을 회유한데다가, 안 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물론 그런 이유가 없어도 애인의 생일을 가까이서 축하해주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작년에는 시간을 맞추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늦어버렸고, 별 다른 선물도 없이 하루 종일 호텔에서 몸의 대화만 나눴는데 올해도 그렇게 때웠다간 한소리 들을 게 뻔했다. 올해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벼르고 새해를 맞으러 오스트리아로 떠난 애인을 떠올린 루이스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펜을 들었다.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려면 한시라도 바삐 끝내야 했다.
1/11 Afternoon / Platform
새벽까지 서류를 마치고 아침 첫 배를 타고 칼레로, 또 칼레에서 곧장 기차를 타고 몇 시간. 이동하는 내내 정신없이 졸다 깨길 반복한 루이스는 빈에 도착한 열차가 다시 출발하기 전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내렸다.
슬라이드라도 타고 빠져나와야 하나 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계단을 밟고 내려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쉰 루이스는 출발하기 전부터 몇 번이고 확인한 코트 안주머니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플랫폼을 나왔다. 확실히 대륙은 공기가 다르다. 숨 쉴 때마다 뿌연 입김이 서리는 건 똑같지만.
바쁜 걸음으로 역을 나오자마자 루이스는 익숙한 사람과 그와 잘 어울리는 까만 자동차를 발견했다. 차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저를 노려보는 연인과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낯선 도시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가 반갑고, 풍경이 아름답다. 가만 보고만 있어도 절로 지친 마음이 회복되는 것 같은데 정작 루이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남자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역에 사람이 다 빠져나가도 보일 기미가 없기에 네 녀석이 내뺀 줄 알았다.”
“설마. 나 그렇게 신용이 없어?”
“워낙 전적이 화려해야지.”
지치고, 힘들고, 졸려서 인내력의 한계가 가까워지면 장난도 장난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법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해서 왔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루이스는 뚱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벨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열차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데 사람은 안 오지, 연락도 없지. 그야말로 발만 동동 구를 상황이다. 추운데 차에 있지 않고 나와서 기다린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역에 사람이 다 빠져나가도록 안 나타나는 사람을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혹시나 하는 불안에 마음을 졸이다 차를 박차고 나왔을 걸 생각하면 또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이스는 특별한 날을 앞두고 다투고 싶지 않았다. 루이스는 똑같이 짜증내는 대신 앓는 소리를 내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너 보려고 어제, 아니지 오늘 새벽까지 밤새서 일하고 왔어. 좀 봐주라.”
“네가 하는 거 봐서. 며칠 비웠다고 또 이 꼴이 되다니. 쯧.”
벨져 홀든이 그럼 그렇지. 루이스의 예상대로, 벨져는 짜증을 내면서 그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루이스의 목에 두르고 다크서클이 짙게 진 눈 밑을 엄지로 문질렀다. 고급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뺨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동안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솔직하지 못해도 애정 어린 걱정이다.
“일단 타라. 바람이 차군.”
“아, 그....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은 사람을 운전기사로 쓸 것 같나?”
포트레너드야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그렇다 치지만 여긴 오스트리아고, 빈은 유명인사도 많은 도시니 혹시 무슨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물은 거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벨져 홀든이 친히 문까지 열어주시는데 안 탈 이유도 없고, 그의 말대로 바람이 찼기에 바람이 없는 것만으로도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연주회는 언제야?”
“무식하긴. 연주회가 아니라 오페라다.”
“아, 그래.”
벨져가 고개를 까딱이자 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루이스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나 그거나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의 말대로 루이스는 이쪽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성의가 없군.”
“나 열세시간 동안 이동한 건 알지?”
흥. 아름답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미남자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단 투로 코웃음을 쳤다. 다른 사람이 그러면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오만하고 당당한 남자가 그러니 기분이 나빠지려다가도 무심코 그 미모에 홀려 기분 나빠할 틈이 없어지고 만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정장도 없겠군. 적어도 장소에 맞는 격식을 갖추는 정도의 예의는 보여야 할 거 아닌가. 나, 이 벨져 홀든과 함께 빈 오페라 하우스에 가려면 말이지.”
그 얼굴에 홀리는 건 제아무리 냉철한 결정사라도 다를 게 없어서, 루이스는 벨져가 말을 마치고 나서야 잠시 놓았던 이성을 되찾았다. 무표정도 무표정이지만 기분이 좋은 벨져는 더 위험하다. 넋을 잃고 보다가 휘말린 게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그보다, 힘들게 왔는데 좀 좋은 말 해주면 안 돼? 그, 사.... 보고 싶었다던가 그런 건....”
“사랑해. 보고 싶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사랑한다던가, 라는 말은 운전석에 있는 기사의 눈치가 보여 말하지 못하고 조금 더 평범한 말로 돌려 말했는데, 들떠 있던 벨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을 뿐, 목소리에 불쾌함이 묻어나는데 눈치 없이 두근거리는 건 대체 누구의 심장인가. 루이스는 꽁꽁 언 얼음을 다시 얼려버릴 것 같이 싸늘한 벨져의 눈빛과 벨져의 얼굴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에 말을 잊었다.
루이스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벨져를 바라보자 그의 말을 잊게 만드는 장본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다가와 입을 맞췄다. 뒷목을 잡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틀며 눈을 감고 애틋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루이스는 벨져의 마음을 깨닫고 되레 미안해졌다.
오자마자 짜증을 낸 건 아마, 연락도 뜸하더니 특별한 날을 앞두고 제대로 준비도 안 하고 와서 당연한 걸 묻고, 남의 눈치나 보는 게 서운하다는 뜻이겠지. 과연 우아하고 고상한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봐 보고 싶었다, 네가 날 더 신경써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한다. 루이스는 벨져의 매끈한 뺨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
“그래도 힘내서 왔으니까 봐줘. 응?”
샐쭉하게 실눈을 뜬 그를 향해 한껏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이자 벨져가 루이스의 코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요령만 느는군.”
“하하. 그러게.”
연상의 애인, 그것도 화려한 걸 넘어서 고혹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을 만나며 익힌 요령은 연하의 애인을 만날 때도 유용했다. 예쁘고, 화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쉬이 마음을 내주지 않는 고고한 사람들. 이렇게 보면 참 한결같은 취향이다. 루이스는 벨져가 다른 사람 생각을 하는 걸 트집 잡기 전에 그의 입술을 입술로 눌렀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 걸 영 마뜩치 않아하면서도 키스를 거부하지 않는 게 귀여워 웃자 대번에 벨져의 눈매가 변했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 정장 없어. 시작까지 몇 시간 안 남지 않았나?”
“루이스.”
“늘 불만이었잖아. 오늘은 토 안 달고 네 말대로 할 테니까. 응?”
“...정말인가?”
“그래.”
“좋아. 그럼 옷을 맞추러 가야겠군. 아, 물론 그 전에 식사부터 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들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내내 찌푸린 얼굴이던 벨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꿍꿍이속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는 게 보였기에 더더욱 물릴 수 없었다.
무슨 음흉한 짓을 하려는지 몰라도 이 정도면 생일 기념 서비스로 충분하겠지. 사악하게 웃는 것도 두근거릴 정도로 잘 어울리는 애인 때문에 고생길이 열린 루이스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외면하며 달리는 차 안에서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1/11 Still Afternoon / Tailor Shop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루이스는 몇 번째 갈아입는 건지 모를 정장을 입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트리비아의 의상실에서도 해본 적 없는 옷 갈아입기에 지친 몸이 그만 쉬게 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눕고 싶다. 최소한 앉기라도 하면 좋겠다. 쇼핑을 따라다닐 때도 힘들긴 하지만 인형놀이가 수백 배는 힘들다. 루이스는 아까 입었던 것과 뭐가 다른 것인지 모를 정장을 받아들고 다시 한 번 탈의실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벨져가 이건 허리를 줄여야겠느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하고 있고 벨져 홀든이 인정한 테일러는 그에 맞장구를 치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제발 누가 좀 살려줘....”
여기, 도움!을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다시 한 번 셔츠자락을 당긴 루이스는 셔츠 가터에 끝자락을 고정하고 바지를 입었다. 그 위에 서스펜더, 또 거기에 단추가 족히 여덟 개는 달린 것 같은 베스트, 그리고 재킷. 이것만 입어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체 여성복은 얼마나 더 힘들까.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스는 트리비아와 사귀기 시작한 무렵 그녀가 시켜준 경험을 떠올리고 몸서리를 쳤다. 코르셋에 킬힐, 거기에 몸을 죄는 갖은 속옷을 껴입고 또 몸을 옥죄는 것에 비하면 이쪽은 천국이다.
“벨져어....”
힘들어서 축축 늘어지는 목소리에, 울상을 지으며 문을 열고 나가자 벨져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긋이 품평하는 눈빛에 부끄러웠던 것도 처음 뿐, 지금은 그저 이 정장 지옥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후회할 줄은 말을 꺼냈을 때부터 알았지만, 생각보다 후회가 막심했다.
“알맹이는 여전히 격이 떨어지지만.... 뭐, 그럭저럭 봐줄만 하군.”
“그럼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화색을 띠자 잠시 자리를 떴던 테일러의 조수가 넥타이만 한 가득 걸려있는 행거를 끌고 왔다. 벨져는 행거를 흘끗 보고는 대여섯 개를 골라 루이스의 어깨에 널어놓고 고민하다 하나를 골라 목에 둘렀다. 이럴까봐 목깃을 내리지 않았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벨져가 루이스의 턱을 들어 올리고 다시 목깃을 세웠다.
테일러와 조수가 이런 일은 자기네들이 하겠다며 안절부절못하는데도 벨져는 루이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눈치를 보던 루이스가 그들에게 됐으니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조금만 고개를 움직이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시선을 목에 둔 채 집중하는 벨져 때문에 안절부절 못 하는 건 루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가깝지 않아?”
“쉬잇.”
이렇게 가까운데서, 그런 목소리로 낮고 조용히 속삭이다니. 이래서야 심장이 위험하다. 긴장과 떨림으로 뻣뻣하게 굳은 루이스는 숨을 죽이다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난 것 같아 민망해한데 고개를 내릴 수 없으니 딱 미칠 지경이었다.
“됐다.”
벨져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뒤에야 루이스는 멈춘 줄도 몰랐던 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오페라는 시작도 안 했는데 지친 몸은 휴식을 요구하며 늘어지려 했다. 제 작품이 흡족한지 세 발짝 떨어져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가 피식 웃었다.
“왜, 두근거렸나?”
“윽. 당연하지...!”
“솔직한 거 하난 마음에 드는군.”
놀려서 기분이 좋은 건지, 그 자신의 심미안에 뿌듯한 것인지 몰라도 벨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어째 좀 억울하긴 하지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할 말이 없어진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피고 벨져의 입술에 빠르고 짧게 뽀뽀했다.
“마음에 들어?”
“나쁘지 않다.”
“다행이네.”
“머리만 조금 손보면 되겠군.”
“그럴 시간은 돼?”
“빠듯하지만, 될 거다.”
벨져는 루이스의 어깨와 재킷 칼라를 만져주다 루이스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검사로서 필연적인 굳은살이 박일지언정 희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이마에 닿고, 얇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넘겨 이마를 훤히 드러냈다.
“좀... 이상하지 않아?”
“...머리는 안 올리는 게 낫겠군.”
“고마워.”
루이스는 벨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머리를 흔들고 늘 하는 대로 정리했다. 머리를 올리고 거울을 볼 때도 어색하지만 이런 반응을 하는 건 비단 벨져뿐만이 아니었다. 트리비아도 한 번 올려보는 게 어때? 라고 하고는 다시 내리고 후드를 권했고,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는 절친한 친구 앤지 역시 딱 지금의 벨져 같은 표정을 하더니 머리를 올리지 말라고 했다. 조금 상처긴 해도 안 어울린다는데 어쩌겠는가. 받아들여야지.
루이스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자 벨져가 답지 않게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올린 머리가 안 어울린다고 한 것도 아닌데 저 혼자 풀이 죽어서 시무룩해하는 스물일곱이라니, 끔찍한 게 정상인데 말도 못 하게 귀엽다. 머리를 올리면 안 그래도 어려보이는 얼굴이 더 어려 보여서 안 되겠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벨져는 루이스의 손을 잡아끌어 그의 허리를 안았다.
“괜찮다.”
“지금 나 괴롭히는 거지?”
“아니, 전혀.”
“거짓말. 눈이 웃고 있잖아.”
부루퉁하니 토라진 루이스의 말에 벨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양 눈썹을 까딱였다. 루이스의 한숨 뒤에, 허리를 마주 안으며 벨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루이스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냥 따듯한 이불속에서 노닥거리면 안 돼??”
“안 돼. 그건 네 생일에 해라. 기꺼이 들어주지.”
“너무하네.”
벨져는 말없이 루이스의 턱을 들어올렸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을 따라 고개를 들면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부드럽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벨져가 보여 머릿속에 가득 차있던 불만이 쑥 들어갔다.
“좋은 옷에 좋은 외투가 빠질 수 없지.”
여기서 또, 외투 지옥이 시작되나. 방금 전까지 설렘에 두근거리는 심장이 다른 의미로 크게 쿵쾅거리며 루이스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려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테일러가 미리 준비한 듯한 코트 한 벌을 가지고 나타났다.
벨져가 입고 있는 것과 색만 다를 뿐인 코트의 등장에 루이스는 뿌듯해하는 벨져를 바라보고, 다시 코트로 눈을 돌렸다.
“이 벨져와 함께 오페라 하우스에 가려면 어느 정도의 격은 맞춰야지. 내 옷을 맡길 때 미리 맡겼다.”
“내 치수는 어떻게 알고?”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나? 내가 네 몸을 얼마나....”
“그만, 거기까지!”
밝은 회색 톤의 코트가 벨져에게 잘 어울리긴 하지만 제게도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망설이자 벨져가 코트를 들고 루이스의 등 뒤에 섰다.
“저기, 벨져.... 이젠 나도 좀 부담스러워지는데....”
“팔.”
말만 했지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에 루이스는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등 뒤에 선 벨져가 코트를 입혀주고, 테일러가 다가와 매무새를 고쳐주며 거울을 보는 사이 옆에 서있던 벨져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루이스를 보다 입을 열었다.
“역시 이걸로 하길 잘했군. 아, 물론 기장은 네 게 더 짧다.”
짧다는 말에 울컥한 루이스는 팔꿈치로 벨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비싼 값을 하는 건지 고급 수트와 코트를 겹겹이 입었는데도 움직임이 자연스러웠고, 루이스의 팔꿈치에 맞은 벨져가 작게 억눌린 신음을 냈다.
벨져 홀든은 그의 이명이 증명하듯 빛처럼 재빠른 쾌검사다. 아무리 거리가 가까운들 이 정도는 피하는 게 당연했기에 맞을 줄 몰랐던 루이스가 되레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자 벨져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괜찮아?”
“별 거 아니다. 그보다 마음에 안 드는 소릴 한다고 폭력을 쓰다니 천박하군.”
“그걸 알면서 왜 안 피하는데?”
“아픈 구석을 찔렀으니 한 대 정도는 맞아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더 짜증나.”
잠시나마 죄책감에 시달린 루이스가 억울해하자 벨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길 가지고 노는 게 짜증나고 억울한데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막상 할 말이 없어진다. 루이스는 까다롭고 아름다운 사람, 그것도 아름답고 우아하며 오만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홀든의 둘째 도련님을 애인으로 둔 자의 고충을 되새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어울리는 것도 힘들지만 오늘과 내일만은 그를 위한 날이었다. 이 정도는 참고 따라주는 게 도리다. 그동안 바쁘다고 혼자 둔 것도 미안하고, 그 외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벨져가 저를 놀리며 즐거워하는 걸 정당화한 루이스는 벨져가 매준 타이를 한 번 만져보고 거울에서 등을 돌렸다.
“그럼 갈까.”
에스코트 하듯 손을 내밀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벨져가 고개 끄덕이며 루이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아, 장갑 필요하나?”
“이따가. 지금은 이대로 좋다.”
놀리는 게 아닌, 애정이 담긴 자상한 미소가 눈부시다. 루이스는 벨져가 힘주어 잡은 손을 맞잡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미인을 가지면 힘들다던데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옳은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심장에 해로운 건 부인할 여지가 없다.
“또 그러는군.”
“내가 뭘.”
“뭐, 나는 네 그런 모습도 좋아하니 상관없다.”
별것도 아닌 말에 혼자 설레서 눈도 못 쳐다보고, 손만 꿈지럭거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벨져는 대체 누가 이 사람을 두고 냉철하고 침착한 결정사라고 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홍조 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귀찮고 싫다는 티를 풀풀 내면서 어떻게든 제 마음에 들어보려고 애쓰는 게 기특해 상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았다.
“고생했으니 상이라도 줘야겠군. 아이스크림?”
“내가 애야?”
“하긴, 새 옷에 흘리기라도 하면 큰일이군.”
“벨져...!”
“농담이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못 사줄 것도 없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말이지.”
벨져는 루이스가 정말 화를 내기 전에 재빨리 루이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미 조금은 뿔이 난 것 같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벨져의 예상대로 루이스는 벨져를 잠시 흘겨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만 이러면 좋을 텐데,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포트레너드에서는 그나마 음습하고 침울한 후드와 어두운 무표정이 다가오는 사람을 막아주지만, 이렇게 꾸며놓으면 누구나 달라붙을 게 분명했다.
터무니없이 사람이 좋은 것도 문제고, 정이 많은 것도 문제고, 곱상하게 생긴 것도 문제다. 물론 가장 심각한 건 본인이 자각이 없다는 거지만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라 벨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시시때때로 옆을 돌면서 가지를 쳐야지.
거기까지 생각한 벨져는 흐트러진 루이스의 앞머리를 만져주고 코트와 함께 세트로 맞춘 목도리를 둘렀다. 이 정도면 누구도 벨져 홀든의 것이라고 광고하는 꼴이니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테고, 보기에도 좋다.
마음이 한결 개운해진 벨져는 오랜만에 연인을 독점한 기분을 만끽하며 걸음을 옮겼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이니 마음껏 즐기는 게 당연했다.
1/11 Evening / Wien National Opera House
값이 얼만지도 모를 옷과 구두에 실크 장갑까지 끼고 박스석에 앉았건만 루이스는 오페라에 전념하기보다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졸음과 싸워야 했다. 물론 벨져의 생일이니까 그가 하고 싶다는 걸 하는 게 맞고, 그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해주는 게 맞지만 루이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음악, 화려한 가수와 오케스트라. 차라리 무성영화가 나을 지경이다. 그건 언어가 없어도 즐길 수 있으니까 오히려 그 쪽의 수준이 높은 게 아닐까. 예술과 대중성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잠들고 만 루이스는 허벅지를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에 놀라 펄쩍 튀었다. 당연히, 경멸을 가득 담은 애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영화관에서 졸다 깬 것보다 몇 배는 민망하고 창피했다.
“큼, 내가 그래서 해설이라도 해달랬잖아.”
“작품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지 않고 떠드는 건 오페라를 모욕하는 품위 없는 짓이다.”
그럼 데려오지를 말던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은 루이스는 자리에 고쳐 앉으며 레몬 슬라이스가 장식된 탄산수 잔을 집어들었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 벌써 몇 번이나 졸다가 깨서 싸늘한 눈초리를 받다 이번엔 허벅지를 꼬집혔는데, 다음에 졸다 깼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약간 기분이 나쁜데 다음엔 정말 싸우게 될 지도 모른다. 벨져의 기분을 안 상하게 하면서, 내일을 평화롭게 맞고, 나도 멀쩡하려면 이쯤에서 나가야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벨져를 설득할 수 있을까. 루이스는 탄산수 위에 떠있는 얼음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벨져.”
불러도 답이 돌아오기는커녕 아예 무시하기로 한 건지 반응이 없다. 루이스는 완벽한 옆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괬다. 썩 내키진 않지만, 비장의 무기가 하나쯤 있긴 했다.
“빨아줄까?”
이번엔 어떤 표정일까 싶어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빨개진 벨져가 경악에 물들어 입을 벌린 채 뻐끔거리다 루이스의 팔을 덥썩 잡으며 다가왔다. 총알도 튕기는 홀든의 검을, 그것도 둘이나 들고 전장을 누비는 쾌감사의 악력에 악 소리 한 번 못 내고 신음을 삼키며 인상을 쓰자 겨우 패닉에서 빠져나온 벨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소리냐! 아무리 박스석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신성한 오페라하우스에서 그런 음탕한 생각을...!”
“아니, 여기서 말고! 왜 날 무슨 파렴치한으로 보듯이 보는 거야!”
벨져가 목소리를 낮추고 빠르게 속닥거리는 바람에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루이스는 억세게 잡은 벨져의 손을 떼어내고 푹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오늘 몇 번째 한숨을 쉬는 건지 모르겠으나 한숨이 나올 상황인 것은 확실했다.
“나도 얼만지도 모를 옷을 하루도 안 돼서 더럽히고 싶진 않아! 그냥, 여기 말고.... 둘이.... 응?”
공공장소에, 오페라가 한창이라 속닥거리는 게 고작이지만 오히려 말끝을 흐리며 어물쩍거리는 게 통했는지 벨져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두 시간은 여길 나갈 기회가 없다. 루이스는 유혹에 혹해 갈등에 빠진 벨져를 몰아붙이기 위해 고개를 반대로 돌려 얼굴을 가리고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싫으면 말고... 난 그냥 네가 자꾸 해달라고 하니까 생각나서 말해본 거니까. 네가 맨날 더럽게 못한다고 욕하면서 계속 해달라고 조르잖아.”
“못한다고 했지 욕은 안했다.”
“내가 독일어를 배운 적은 없어도 욕하는 것 정도는 알아.”
안 된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잡고 늘어지는 걸 보면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은데, 그래도 고민이 되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다. 루이스가 다시 한 번 벨져의 눈치를 살피려 흘긋 눈을 돌리자 이마에 손을 얹고 눈까지 감은 채 갈등하던 벨져가 입을 열었다.
“가지.”
“...정말?”
무르지 못하게 되묻자 오늘 역에서 처음 봤던 그 탐탁지 않은 눈빛이 돌아왔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다른 게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봐준다는 그 눈빛은 벨져가 타협이라는 말로 그의 고집을 꺾고 한 수 무를 때 짓는 눈빛이었다. 그의 인생에 패배는 단 한 번밖에 있을 수 없고, 그건 연애라는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생에서도 연애에서도, 그를 이길 상대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 파렴치한 소릴 해놓고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지 마라. 가증스러우니까.”
“그래도 싫단 말은 안하네.”
눈을 가늘게 휘며 미소를 물자 단정한 얼굴이 순식간에 성숙하고 야한 얼굴이 된다. 벨져는 그런 루이스의 여유로운 미소에 짙은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그 얼굴을 좋아했다. 분하지만 마음이 동해 거부할 수가 없었다.
홧홧하게 끓어오르는 욕정에 벨져는 루이스의 허리를 감싸며 입을 맞췄다. 오늘 내내 가볍게 한 키스가 아니라, 혀를 얽고 몰아붙이며 육욕을 채우는 키스에 루이스가 앉은 의자가 점점 밀려났다. 더 하다간 여기서 끝까지 가버릴 것 같다는 위기감에 키스를 멈춘 벨져는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아 닦고 파르르 떨리는 루이스의 속눈썹을 보다 일어섰다.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 뒀다.”
“그럴 것 같았어.”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군. 내 생일인데 말이지.”
“네 생일은 내일이야. 뭐, 그래도 싫지 않잖아?”
다 안다는 듯이 여유로운 미소에 울컥한 벨져는 루이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커튼 뒤로 끌어냈다. 벽에 밀어붙이고,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거친 키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스가 벨져를 힘껏 밀어냈다.
“얼마나 잘 빨아주는지 기대하지.”
“하아, 하.... 나 완전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숨을 쉬느라 몸을 숙이고 헉헉거리던 루이스의 말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자초해놓고 이제 와서 결과를 두려워하는 게 귀엽다 못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그보다 더 한심한 건 그 유혹에 넘어간 자신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다 그러한 것을.
“하, 그걸 이제 알았나?”
“못 무르겠지?”
“절대.”
숨을 고른 루이스는 몸을 일으키며 속으로 한동안 고생 좀 하겠네. 하고 체념했다. 아무렴, 벨져 홀든에게 오페라를 뺏으려면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이었다.
1/12 Night / Hotel
공기가 뜨겁다. 정신없이 뒹굴고 난 뒤에 찾아오는 노곤한 탈력감과 해방감, 뜨거운 열기가 돌던 몸이 식는 감각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으니 절로 눈이 감겼다. 아무리 신체 강화 능력자라지만 쓸데없이 건강해서 그에 맞추려면 감당이 안 됐다. 하기 전에 그렇게 조르던 것도 해줬는데, 그래도 따라가기 벅차다.
눈 위에 팔을 얹고 숨을 고르던 루이스는 조금 진정이 되자 팔을 내리고 느릿하게 호텔 방을 훑었다. 뻗어버린 저 대신 물을 가지러 간 벨져의 조각상같은 나신에 눈이 머물다, 그 옆에 있는 시계가 시야에 들어오자 뜨겁게 달궈져 잠시 흐려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컵에 물을 담아 침대로 돌아오던 벨져는 루이스의 시선을 따라 시계를 보고 잠시 멈춰 섰다가 돌아와 컵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가운 하나 안 걸친 몸으로 친히 물 심부름을 다녀온 애인에게 심부름 값으로 뽀뽀를 선사한 루이스는 컵을 비우고 삐거덕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단기간에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혹사당한 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고, 벌서부터 턱이 아프지만 이것까지 벨져의 손을 빌리기는 좀 그렇다.
굳이 못 할 건 없지만,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라고 할까. 기왕 준비한 선물은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직접 주는 게 도리였다. 루이스는 들고 온 가방을 뒤지며 출발할 때부터 고이 모셔온 선물을 찾았다.
“아까 분명히 넣어놨는데.... 아, 찾았다. 여기.”
벨져는 루이스가 건넨 작은 박스를 받아 들었다. 그래도 나름 신경을 썼는지 벨져가 아는 범위의 브랜드는 아니어도 제법 모양새를 갖춘 포장이었다. 안에 든 내용물이 뭔지, 형편도 안 되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의아해진 벨져는 우두커니 서서 손 안에 딱 들어오는 사이즈의 박스에 들어갈 만한 것들을 떠올렸다.
“생일선물.”
벨져가 상자를 들고만 있자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로 돌아간 루이스가 이불을 끌어안고 말을 보탰다.
“기대할 만한 건 아닌데.... 싸구려라고 뭐라 하지만 마.”
값에 상관없이 뭔가 해주고 싶다는 그 마음이 갸륵하다.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벨져는 루이스의 옆에 앉아 상자에 감긴 리본을 당겼다. 매듭을 풀고, 상자를 열자 안에서 나온 것은 자수정 커프스 한 쌍이었다. 그의 말대로 벨져가 쓰는 최고급은 아니지만 나름 신경을 썼는지 투명하고 진한 레드와인 색 수정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네가 쓰는 거에 비할 건 못되겠지만.... 그래도 뭔가 주고 싶었어. 난 늘 받기만 하잖아.”
“원래 이런 건 선물한 사람이 해주는 거 아닌가?”
머쓱해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또 귀여우니 상관없지만 너무 눈치를 보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아 말을 돌리자 루이스가 커프스를 가져가려다 피식 웃었다. 그나 저나, 실오라기 한 올 안 걸친 차림이라 커프스는 소용이 없었다.
“내일.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뭐, 나는 지금 차려입고 나가서 산책해도 상관없다만.... 정성이 갸륵하니 특별히 봐주도록 하지.”
벨져는 커프스를 다시 상자에 넣고 처음 받았던 그대로 리본을 곱게 묶어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상자만 봐도 흐뭇해 입꼬리가 올라가고, 당장이라도 어디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 귀여워 루이스의 입꼬리도 함께 올라갔다. 평소보다 더 기고만장해져서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인다. 모름지기 선물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쁘게 하는 법이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흐뭇하게 벨져를 보던 루이스는 밀려오는 졸음에 하품을 하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미안한데, 나 이제 도저히 안 되겠어.”
“벌써 지치다니. 영웅 체력이 말이 아니군.”
“알잖아. 밤샘에 장거리이동에, 하루 종일 벨져 홀든 경 비위 맞추느라 힘들었다고.”
“비위만 맞춘 게 아닐 텐데. 재미를 본 건 네 쪽 아닌가?”
“그래, 네가 다 맞아. 그러니까 나 좀 놔주라....”
“할 일 다 했다는 투군.”
몸에 힘이 빠지자 반쯤 감긴 눈이 더 무거워지고 말이 느려졌다. 그냥 보기에도 슬슬 한계였기에 벨져는 루이스를 위해 전등을 껐다. 루이스의 옆에 모로 누워 손으로 턱을 받치고 그를 바라보자 루이스가 벨져를 향해 돌아누워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이주정도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동갑이 된 기분 어때? 뭐, 워낙에도 형 취급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즐겨봐.... 그러다 친구도 먹고... 그러는 거지.”
“헛소리 하는군. 자라.”
벨져는 루이스의 눈 위에 손바닥 얹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이고, 벨져의 손에 눈을 감은 루이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응.... 너도, 잘 자.... 생일 축하해. 벨져.”
“...그래.”
이불을 끌어당겨 꼼꼼히 덮고 루이스를 끌어안은 벨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침이 무척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1/12 Happy Birthday / Alles Gute zum Geburtstag
갓갓소재 제공해주신 초루님께 감사드립니다.
벨져 생일 축하해! ㅠㅇㅠ 노모에 벤쿠버타임 하느라 힘냇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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