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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루이] 08.
부상으로 인한 휴가라며 아침도 건너뛰고 느지막이 일어난 루이스는 씻자마자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소파 팔걸이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까딱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그의 무방비한 발을 잡아버리고 싶어진 나는 충동에 사로잡힌 채 조심히 다가갔다.
“으왓, 깜짝이야.”
발을 잡히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던 루이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잡힌 발을 뺄 생각은 없는지 버둥거리지도 않아서 나는 마음껏 그의 발을 만지작거리며 크기와 길이를 가늠했다.
“작군요.”
“갑자기 사람 발을 잡고 하는 말이 겨우 그거예요?”
“작은 걸 작다고 했을 뿐입니다만.”
루이스는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무릎을 모아 앉았다. 발을 놓아주자마자 감추려는 모습이 귀여워 웃자 루이스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랑 내 키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요.”
“키만 차이나는 건 아닙니다만.”
뚱하니 토라진 얼굴이 귀엽다. 나는 급히 입술을 말아 물었으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루이스는 눈을 샐쭉하게 뜨고 나를 흘겼다. 사실무근한 얘기라면 반박이라도 할 텐데, 사실이라 할 얘기가 없는 모양이라 나는 루이스의 옆에 앉아 그가 감추듯 오므린 발에 손을 얹었다.
“오랜만에 쉬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죠?”
“그렇게 느껴집니까?”
전혀 모르겠다는 양 빙긋 웃자 입술을 쭉 내밀고 있던 루이스가 시선을 피했다. 아닌 척 해도 목과 귀가 빨개져서 의식하고 있는 티가 났다. 루이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입술 위에 가로놓인 손가락이 입술을 덧그릴 때마다 내 눈이 그의 손가락을 좇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전에 해준 파스타 맛있었어요. 카르보나라. 베이컨 잔뜩 넣어서.”
“이런. 베이컨이 없는데요.”
“으음.... 사러 가기 귀찮은데.”
진지하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그만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나는 뒤늦게 입을 가렸지만 한 번 터져 나온 웃음은 멈출 줄 몰랐고, 신나게 한바탕 웃은 뒤엔 아까보다 더 뚱해진 표정의 루이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큽, 실례.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아아, 정말.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당신.”
“...웃기려고 한 말 아닌 건 알죠?”
“물론이죠. 너무 웃어서 광대가 다 아플 정도군요. 후.”
“잘 모르겠지만 성격 나쁘다는 소리 엄청 들었을 것 같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웃음이 아직도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바람에 루이스는 더 분해하는 눈치였지만, 이렇다 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는 게 전부였다.
“이미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놨습니다만, 베이컨 대신 햄도 괜찮다면 기꺼이 해드리죠.”
선심 쓰듯 말하자 루이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발을 아래로 내렸다. 완전히 늘어진 자세가 숫제 시위라도 하는 모양새지만, 내게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과 헛웃음마저 귀여운 투정으로 보일 뿐이었다.
“대체 그런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글쎄요. 태생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제 기억은 백지라서요.”
“하아.... 당신이랑 얘기하고 있으면 기운이 빨려요.”
루이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부쩍 즐거워진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미소를 머금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귀여워하며 웃은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의 미소에 루이스가 시선을 피하며 팔을 올린 팔걸이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당신이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와도 차려준 밥 먹고 잠만 자잖아요. 와, 나 완전 식충이네.”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립니까?”
일부러 진지해지는 분위기를 피하고자 하는 과장된 말에 나는 은근하고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며 받아쳤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스는 눈 한 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을 땐 울상도 무엇도 아닌 애매한 미소와 함께였다.
미안함과, 그보다 조금 더 무거운 감정을 담은 미소에 나는 다시 주도권이 그에게 넘어갔다는 걸 느꼈지만 잠자코 루이스를 기다렸다. 그가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을 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기꺼이 그를 위해 기다릴 수 있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청소에 빨래에 밥하고 설거지까지 혼자 다 시키는 게 미안해서 그러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루이스가 장고 끝에 털어놓은 얘기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허무했지만 그 하찮은 고민마저 사랑스러웠다. 그 자신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못내 그게 마음에 걸려 사과를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든 손에 쥐면 부서질 것처럼 세심한 사람이 능력자 전쟁의 영웅이라니, 그 괴리감이 더더욱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당신을 원하는 욕망에 불을 질렀다. 당장 당신을 눕히고 싶은 충동과 뜨거운 열감을 애써 누른 나는 지난밤의 실패를 교훈 삼아 그의 경계를 풀만한 입 발린 말을 골랐다.
“그럼 좀 일찍 들어오시죠.”
“음. 그건 좀.”
“내가 여기 계속 눌러 살면 어쩌려고요.”
곤란하다는 듯 짓는 애매한 미소까지 이렇게 예쁠 일인가. 나는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를 외면하고 웃으며 말을 돌렸다. 성급하게 달려들었다가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조심성이 많은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아주 천천히, 당신이 나에게 잡히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음. 일단 내가 애를 써보다가, 정 형편이 힘들어지면 돈 벌어 오라고 내쫓아야죠.”
“그러다 제가 몸이라도 팔면 어쩌려고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나보다. 당황으로 깜빡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장난이라는 걸 눈치 챈 루이스가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놀리기 쉽군요. 이런 사람이 전쟁 영웅이라니.”
“놀리지 마요. 나도 이런 내가 싫으니까.”
나는 눈을 맞추지 않는 루이스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몸을 바싹 붙였다. 은근한 손길로 다리를 만지작거리자 당황해 몸을 뒤로 빼려는데 좁은 소파에 앉은 채로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래도 꽤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정 뭐하면 시험해보겠습니까?
진득하게 허벅지 안쪽을 긁으며 묻자 루이스의 몸이 굳었다. 방금 전까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행동이었지만 만지면 만지는 대로, 흔들면 흔드는 대로 따라오는 그의 떨리는 눈이 예뻐 자꾸만 손이 갔다. 진한 미소를 띤 채 입을 맞추려 다가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이 정도면 꽤 수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농담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만...!”
훤히 드러난 목을 핥아 올리자 루이스가 멀쩡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사뭇 진지해진 얼굴이 여전히 사랑스러웠지만 이제 정말 물러날 때였다. 더 하면 당장 침대에서 쫓겨나는 건 고사하고 며칠 내내 얼굴을 못 볼지도 몰랐다.
“왜 긴장하죠?”
“그야 당신이....”
“걱정 마세요. 당신이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 둘 테니.”
나를 밀어낸 루이스가 미심쩍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방금 핥은 곳을 손으로 덮었다. 감각이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있는지 긁지도 않고 대고 있을 뿐이라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루이스와 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그 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렸죠. 나는 그저 말을 들을 뿐입니다.”
의심스러운 눈빛에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괘자 루이스가 일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습니까?”
루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영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자 이번에는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토라진 얼굴이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루이스가 떠난 자리를 두드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뭣하면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하죠. 제 진심을 증명할 겸.”
“됐어요. 스토브는 하난데 거기서 자면 벽난로에도 불을 때야 하잖아요. 땔감도 없는데 얼어 죽으려고요?”
“기꺼이 침대에 들여 주시겠다니, 친절하시군요.”
“내 집에서 아는 사람이 동사하는 게 싫을 뿐이에요.”
루이스는 어쩔 수 없다는 투였지만 내게는 그마저도 새침해 보였다. 순박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전쟁영웅이라니. 이제와 사람이 달리 보이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장난스레 대답했다.
“네. 그런 걸로 하죠. 영웅님.”
“그렇게 부르지 마요.”
“왜죠? 이유라도 있습니까?”
“말했잖아요. 당신은 나를 영웅으로 보지 않는 게 좋다고.”
책상에 걸터앉은 루이스는 고개를 숙인 채 울적해진 얼굴로 내가 아닌 바닥을 바라보고, 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빠듯하게 죄는 안타까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며 입을 열었다.
“참고하죠.”
“부탁해요.”
“...그래요. 루이스.”
나에게 당신이 유일하듯, 나 역시 당신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환희와 희열을 눌러 삼키며 낮게 숨을 뱉었다.
연휴라 쉬는 김에 엄청나게 오랜만에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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