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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유리 온실
늘 그렇듯 책으로 내기 위해 생략한 부분이 있습니다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원고의 90%는 완성되어있으니 나오긴 할 거예요 그때까지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들에 둘러싸여 눈이 부시다. 칵테일 잔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은 루이스는 그런 것들 사이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한 사람을 보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본래 벨져 홀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좋은 옷을 골라 입고 한껏 치장한 벨져는 이 파티에 참석한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벨져는 절대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벨져의 곁에 있기에 자신은 너무나 초라했다.
출신도 미천한 하인 따위가 붙어 있어봤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상한 눈초리와 소문만 더할 뿐이었다. 하인 따위를 대동해야만 공식 석상에 나올 수 있는 벨져 홀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괜히 빌미를 제공하느니 떨어져있는 게 나았다.
마실 걸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뜬 루이스는 벨져에게 물을 갖다 주는 대신 멀찍이 떨어져 이름도 잘 모르는 술을 마셨다. 술을 나르는 다른 하인의 눈초리가 곱지 않고, 입술을 축이는 정도였지만 알콜인지 감정인지 모를 무언가에 목과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왜 혼자 이러고 있어.”
“이글 도련님.”
“그렇게 걱정 돼?”
주어가 없는 질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벨져의 몸 상태는 상당히 호전된 데다 오늘 저녁 파티를 위해 컨디션 관리를 철저히 했고 파티의 교양이나 매너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잠깐 누구 좀 만나볼래? 널 만나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정체 모를 불안이 엄습했으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에 루이스는 이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을 떠나기 전에 돌아본 벨져는 어느 아가씨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어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얼핏 봤을 뿐이지만 그녀는 그와 어울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사람이었다. 아른거리는 장면을 떨쳐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고요해졌고, 손님으로 북적이던 복도는 그 많던 사람이 다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정신이 팔려 깨닫는 게 늦었을 뿐, 일부러 사람을 물린 게 분명했다.
이글은 노크도 없이 테라스 문을 열었다. 오늘 같은 날 작고 아담한 테라스는 밀담을 나누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로 부른 것은 어째서일까. 루이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짓으로 저를 맞는 다이무스를 마주했다.
“미안하군. 따로 불러내기엔 좀처럼 시간이 안 나서.”
루이스는 다이무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과 달리 다이무스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투였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다는 점에서 뻔뻔하기 그지없는 동생들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그들보다는 말이 통할 것 같다. 상식 밖의 인물을 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하면서도, 루이스는 가슴을 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먼 발치에서 봤을 때부터 그랬지만, 다이무스 홀든에게선 감출 수 없는 위압감이 흘렀다. 무기를 다루는 법을 연마하며 사람을 죽이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는, 강철처럼 단단한 사내다.
이글이 가벼운 행동거지로 감춘 예리함과, 벨져의 격과는 다른 무게감에는 자비도, 오만도, 가벼운 흥미도 없다. 그저 책임과 의무에 따른 냉철한 판단과 결단만이 있을 뿐.
그래서일까. 짓눌리는 듯한 침묵과 그의 눈빛에 압도된 나머지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만났을 뿐이지만 루이스의 감은 다이무스 홀든에 대한 경고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루이스가 조용히 심호흡 하는 사이, 그를 면밀히 관찰하듯 바라보는 다이무스의 위스키 잔에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잔을 쥔 채 마실 생각을 않던 다이무스 대신, 루이스는 힘겨운 첫 마디를 뗐다.
“방해 없이 얘기를 나누기엔 너무 수고를 많이 들이신 거 아닌가요.”
저택의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그가 굳이 이런 장소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으리란 예상이 맞았는지 다이무스가 눈썹을 까딱였다. 오래 가진 않겠지만, 파티장에서 벗어나지 않고 벨져의 시야에서 자신을 빼내기에 충분하리라. 다이무스는 얼음이 담긴 위스키 잔을 든 채 이글에게 눈짓했다.
문이 닫히고, 테라스에 단 둘이 됐는데도 다이무스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복도에서 이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며 입을 축였다. 워낙 단단한 풍채에 엄격하고 굳건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지만, 간단한 손짓 하나에서도 그의 단호하고 정확한 성격이 묻어났다.
은행가라기보다는 역시 군인이나 무인에 맞는 사람이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다이무스의 손과 그의 손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자신의 도련님과 비교하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다이무스 홀든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이야기를 하려 한다면, 분명 그만큼 진지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자리에서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벨져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다이무스의 눈빛은 흠집을 찾는 것처럼 자신을 훑고 있었다. 어떤 틈, 혹은 단점이나 오점을 찾아내려는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도 책이 잡혀선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기에 루이스는 더 자세를 바로 했다.
볼 일이 있어 부른 주인에게 용건을 먼저 묻는 하인은 없다. 방금 먼저 말을 뗀 것만 해도 주제 넘는 짓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눈을 내리깔자 다이무스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잔을 내려놓았다.
“흠.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 없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벨져 도련님껜 아직 제가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귀족가의 하인이라 하면 그에 마땅한 교육과 훈련을 받기 마련이다. 그에 드는 비용도 물론 만만치 않았기에 하인은 곧 그 가문의 격과 가세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금을 쥔 채 무가의 명맥을 이어온 홀든은 그중에서도 단연한 규율과 가풍을 자랑했고, 하인 관리에도 철저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다이무스가 태어날 때부터 봐온 이들과 달랐다. 물론 벨져 홀든이라는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겠지만 주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눈을 마주보며 대등하게 대화를 하는 건 홀든의 하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딱 잘라 하는 거절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쫓아다니며 수발만 들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의 청년이 결연한 의지를 담아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 하는 거절에 눈살을 찌푸렸다. 냉큼 눈을 내리 깔며 공손한 척을 하는데,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게 척 보기에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이러니 마음에 들 수밖에.
“병간호만 하고 있기엔 아깝군.”
“...과찬이십니다.”
위에 선 자로서 부리는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해본 적 없긴 벨져나 다이무스나 마찬가지였다. 벨져는 자신의 태생과 신분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과 현격히 구분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도구나 다름없는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이글을 한심하다 여겼고, 그것이 홀든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감정에 섣부른 판단을 하는 건 아닌가?”
하지만 그냥 부리고 말 도구가 아니라면. 끈질긴 권유에 루이스는 더 거절하기 힘든지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루이스가 이 자리를 불편해하고 난색을 표할수록 다이무스는 이 초연한 청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지금 막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영민하고 눈치 빠른데다 충직한 아랫사람은 구하기 힘들다. 그런 사람을 고작 병수발 따위에 전념하게 두다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 까다로운 벨져를 이렇게 오래 모시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청년은 그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셈이다. 둘째 녀석은 뭐든 가장 좋은 몫을 가져가곤 했으니까.
“자네를 꽤 아끼는 모양이더군. 나중엔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텐데,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것 같나?”
“......꽤 확신하시는군요.”
“흠. 기회에 대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벨져가 마음에 두고 있으니 절대 놓아줄 리가 없다. 아무리 병석에 있다 해도 그의 지위와 재력으로 얼마든지 잡아둘 수 있고, 홀든의 안주인은 아픈 아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주인의 곁을 떠나는데 이보다 더 깔끔한 제안은 없었다.
그걸 알기에 루이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제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생이다. 다이무스는 루이스를 지긋이 바라보며 놓았던 술잔을 들었다. 입술을 축이고, 긴 침묵을 깨려는 찰나 문이 열리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눈살을 찌푸린 건 다이무스와 함께 있는 루이스를 발견한 벨져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손위형제를 시원하게 무시한 벨져가 루이스에게 다가가 짜증을 부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이무스는 손에 쥔 술잔을 가볍게 돌렸다. 벨져는 결코 좋은 주인도 상사도 못 된다. 다이무스는 미래를, 많은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방금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몸값을 흥정했다면 오히려 시큰둥해졌을지도 모르나 루이스의 고민과 갈등은 이런 데 도가 튼 다이무스의 눈에도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얘기를 나눴으니 망설이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떠날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주겠다.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제가 드릴 답은 하나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더 이상 사양하긴 곤란하다고 판단한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굽히고 물러설 줄 아는 것도, 강자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다이무스는 벨져가 루이스를 옆에 둔 것이 몹시 그답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운명의 여신은 어쩜 이리도 얄궂은지. 자신은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한 것을 벨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가지고 있다. 벨져의 취향이 묻어나는 옷차림만 봐도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훤히 보인다. 순순히 뺏기는 걸 보고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벨져에겐 미안하지만 그를 데리고 런던으로 돌아가면 조금은 여유가 생길 것이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믿을 만한 사람의 필요성을 사무치게 깨달은 뒤라 더 간절했다. 진심을 다해, 다이무스는 루이스가 이성적이고 타산적인 결정을 내리길 바랐다. 그러나 소망하는 바와 달리 그의 말간 눈에 어린 망설임과 애정을 보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점이 더 마음에 든 다이무스는 피식 웃으며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꼿꼿하게 제 주인을 지키려 하더니 약간의 스킨십에 당황해 붉어진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똑부러지는가 싶다가도 어설픈 게 어딘가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라고 첫인상을 고치는 사이 루이스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벨져가 매서운 눈초리로 다이무스를 노려봤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벨져.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우지 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잔뜩 가시가 돋친 말에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가 날을 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 것을 빼앗아가려는데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대놓고 드잡이질을 하려 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체면을 차리는 걸 보아 둘째 녀석에게 이 하인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픈 동생이 아끼는 걸 뺏기도 미안하지만, 이쪽도 코가 석자다. 이글 녀석이 밖으로 나돌지만 않아도 이렇게 책임과 업무가 과중하지 않을 텐데. 다이무스는 작게 숨을 토하고 벨져와 루이스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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