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하는 김에 이 AU 첫연성이었던 Notes를 봤는데 역시 책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쓴 원고랑 시간 배열이나 방향이 많이 다르더라구요ㅠㅠ
해가 중천 가까이 오른 아침, 벨져의 기상 시간에 맞춰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온 루이스는 알아봐달라는 듯 부스럭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글을 발견하곤 잠시 망설이다 그를 향해 다가갔다.
“거기서 뭐하세요.”
“이야, 하필이면 여기서 또 보네?”
“막내 도련님과 마주치는 장소 치고는 협소하지만, 네. 또 뵙네요.”
“하하, 원래 몰래 먹는 게 더 맛있다잖아?”
식탁 아래서 기어 나온 이글은 들고 있던 파이 조각을 내려놓고 손을 털며 싱크대 옆에 앉았다. 자유분방하다 못해 한 소리를 들어도 크게 들을 것 같은 행동거지였지만 루이스는 그를 타이르는 대신 찬장을 열어 찻잎을 꺼냈다.
“보통은 그러다 들키면 혼쭐이 나는데요.”
“음. 그럼 나는 보통이 아닌가보지. 그러는 넌?”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빈 주전자에 물을 넣었다. 이글은 발을 흔들다 악동처럼 씩 웃고 루이스의 등 뒤로 다가와 서성였다.
“뭐 드릴까요?”
“아니? 너보단 내가 여길 더 잘 알걸?”
“그럼 왜 그러세요.”
“혹시 그거 알고 있나 해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기에 루이스는 이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재치와 총기로 반짝이는 이글의 눈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무심코 벨져를 떠올렸다가 마른 침을 삼켰다.
벨져는 결코 이런 눈을 하지 않는다. 그와 꼭 닮은 색을 띤 눈은 재기와 총기로 빛날지언정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차갑게 식은 눈과 달리 입가에 띠운 예쁜 미소는 완벽했기에 더 경계를 놓을 수 없었다. 위험하기로 치면 벨져보다 수십 배는 더 위험하다.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리자 이글이 가볍게 미소를 물고 있던 입술 한 쪽을 올리며 키득거렸다.
“아, 정말. 그런 얼굴 하지 마. 무슨 장난 하나를 못 치겠네.”
“고작 장난 하나 치자고 이런 수고를 들일 것 같진 않은데요.”
“그새 벨져가 옮았어? 하긴, 우리 작은 형 비위 맞추고 살려면 보통 눈치로는 안 되지. 보기보다 더 감이 좋네.”
한량처럼 굴던 이글은 그 말을 끝으로 미소를 지웠다. 가벼운 태도가 가시자마자 오싹할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와 본색이 드러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 작은형, 곧 결혼해.”
“네?”
머리를 세게 때리는 듯한 충격에 루이스는 누굴 대하고 있는지도 잊고 되물었다. 이글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는데,
“꽃이라는 건 여름 한철 장사잖아. 아무리 비싸고 화려한 꽃도 지고 나면 쓸모가 없지.”
루이스는 입술을 물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꽉 쥔 주먹에 핏줄이 불거지고 짧게 자른 손톱이 파고들었으나 숨 한 번 제대로 쉬기 힘든 루이스가 주먹을 펴는 일은 없었다. 숨과 울음 비슷한 묵직한 덩어리를 목 아래서 삼킨 루이스는 무거운 입을 뗐다.
“그럼, 그럼 그 분은요.”
“누구? 아, 형수 될 사람? 글쎄. 그건 너한테 달렸지.”
너에게 달렸다. 다시금 무겁게 짓누르는 말의 무게에 루이스는 숨을 눌러 삼켰다. 차갑고 무덤덤한 시선이 저를 책망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아니라는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뭐, 그래도 작은형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못 되니까 사랑은 아니어도 존중은 하겠지. 그런 허울뿐인 자리라도 감지덕지인 사람은 널렸고. 그것도 네가 없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야. 굳이 남겠다면야 뭐.... 그런 거지. ”
아무리 헌신적인 사람이라도, 아무리 배려와 양보가 넘치는 사람이라도 자기 남편이 다른 사람을, 그것도 출신도 모를 하인을 옆에 두고 끼고 도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가만히 있을 귀족 아가씨가 어디 있을까.
결국 벨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집안의, 가장 별 볼일 없는 사람을 고르게 될 것이다. 홀든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그런, 남은 것이라고는 과거의 영광뿐인 집안의 여자를 들이고 제대로 눈길 한 번 안 준 채 그렇게. 하지만 입을 막아도 결국은 탄로 나겠지. 벨져 홀든의 고아한 명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테고, 더러운 추문만 남을 것이다.
그게 바로 벨져 홀든의 곁에 남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대가다. 루이스는 찬연히 빛나고 있는 벨져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그저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 그래서 그녀도.
“루이스. 벨져를 사랑해?”
루이스는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그 자신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통과 회한, 슬픔 같은 감정을 씹어 삼키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진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러니까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투덜거려 봐도 답이 없다. 괜히 얘기를 꺼냈다 싶었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마음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어차피 맞닥뜨리게 될 현실에 대해 얘기한 것뿐인데 못할 짓을 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못된 장난은 하고 나면 즐겁기라도 하지. 좋아질 기색이 없는 루이스의 눈치를 살피던 이글은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장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좀 생각해봐. 너 정도면 다른 곳도 얼마든지 갈 수 있잖아. 꼭 벨져 옆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한 눈치가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은 이글은 머리를 벅벅 긁다 축 쳐진 루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 탓이 아니야. 배신은 더더욱 아니고.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지. 넌 최선을 다했잖아.”
루이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그 분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럴 리가 없지.”
이글은 방금 루이스가 웃었던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져 홀든이다. 그 성격에 루이스가 떠나는 걸 배신이라 여기지 않을 리 없고, 그 자존심에 상처를 받지 않을 리도 없다.
허울뿐인 빈말이 통하기엔 이미 벨져 홀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버린 뒤인데다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네 탓이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 말이 듣고 싶었던 때도 있었죠.”
“응?”
“그런데 그런 건 하나도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도망쳐왔는데.”
웃음 대신 쓰디 쓴 고통을 되새기는 얼굴로 뜻 모를 말을 하는 루이스를 멀뚱히 바라보던 이글은 그에게 얽힌 사연을 캐묻는 대신 그에게 말을 맞췄다. 본인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더라도 사람과 돈을 쓰면 평범한 사람의 사연을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고, 당장 눈앞의 사람이 하는 말이 더 중한 법이었다.
“그래서, 다른 선택을 해보려고?”
“...모르겠네요. 이제는 더 갈 곳도 없는데.”
이글이 가면을 벗은 것처럼, 그가 켜켜이 껴입은 것들을 걷어내자 침착하고 진중한 하인의 얼굴 대신 세상에 지치고 상처로 얼룩진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기에 털어놓을 수 있는 본모습. 벨져가 그토록 원하는 사람의 속내를 확인한 이글은 저도 모르게 희열을 느끼며 입술을 물었다.
“에이, 그럼 그냥 다 때려 치고 나랑 갈래? 사실 나도 네가 좀 마음에 들었거든. 그러니까 벨져고 홀든이고 뭐고 다 신경 끄고, 세계를 유랑하는 거야. 어때? 죽이지 않아? 난 버린 자식이라 책임이니 기대니 그런 것들도 상관없이 펑펑 돈만 쓰는 입장이라고.”
루이스는 그제야 조금 편해진 얼굴로 웃었다.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든다.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고 할까, 가만 두고 보기가 애처로워서 자꾸만 손이 간다.
머리가 복잡해진 이글은 벨져가 왜 루이스를 옆에 두려 하는지 더 깊이 생각하는 대신 루이스의 팔을 잡고 활기차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미 정해진 결말에 헛된 희망을 품는 게 더 괴로운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