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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루이] 유리 온실
여름해가 차츰 짧아지는 게 느껴지는 애매한 계절, 아침부터 온종일 내리는 비에 벨져와 루이스는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창가에 앉은 루이스는 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벨져는 침대에 앉아 그런 루이스를 바라보며 스케치북을 들었다.
그림을 그리기에 침대 위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다. 하지만 환절기라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고 하루쯤은 그냥 쉬라며 루이스가 극성을 부린데다, 가끔은 이렇게 거리를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것에 흥미를 느끼고 끌리기 마련이라는 말이 떠올라 연필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루이스의 고개가 돌아왔다.
“뭐가 잘 안 되세요?”
“빨리도 묻는군.”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차라도 가져올까요.”
참 시간이 안 가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차를 마실 시간이 다 됐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루이스를 바라보던 벨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을 들었다 놓는 애달픈 감정의 이름을 깨달은 이후로 벨져는 조금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
손을 잡고, 하얀 소매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손목 안쪽을 문지른다거나, 함께 잠들 때 그의 허리를 안고 은근히 다리를 쓸어내린다거나. 하지만 루이스는 거부하지 않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벨져는 오기에 더 스킨십의 수위를 높여갔으나 루이스는 그 말간 얼굴에 동요나 당황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투라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애초에 루이스가 그런 오해를 하도록 만든 건 벨져 자신이었다. 이제 와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봤자 긁어 부스럼만 될 게 뻔했고, 그렇다고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영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벨져는 이 꼴이 되고도 누군가에게 부탁 한 번 해 본 적 없었다. 평생 싫은 소리, 입 발린 아부 한 번 입에 담지 않은 건 그래도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런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으나 이번에는 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살갑게 굴며 다가가는 것도 통하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타고난 아름다움과 고귀한 출신 덕에 벨져는 언제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쪽에 속했다.
덕분에 그 마음과 관심을 거절하는 데에는 능숙했지만 타인의 환심이나 호감을 사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받아주면 그 뿐이겠으나 루이스는 거리를 벌리면 벌렸지 결코 그의 의지로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못 견디게 짜증나 입술을 물던 벨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지금 이 저택에 단 한 사람뿐이다. 루이스는 문을 열고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하게 트레이를 가지고 들어와 발로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닫았다. 양손으로 들기 힘들었는지 팔에 받치고 있는데 여간 버거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안에 계신다고 주방에서 힘을 좀 썼다나 봐요.”
“그걸 그렇게 들고 왔나?”
“이 앞까지는 카트에 올려서 가져왔죠.”
일부러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나 싶어 눈살을 찌푸리자 테이블에 널찍한 트레이를 내려놓은 루이스가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무겁진 않았어요. 이것저것 챙겨주는데 거절하기도 그랬고요.”
“아무 말도 안 했다만.”
“얼굴로 다 말 하셨어요.”
벨져는 다음부터는 그냥 카트에 실어 오라고 하려다 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트레이 가득 가져온 단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기껏 힘들여 가져온 성의를 봐서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오이 샌드위치는 오랜만이네요.”
“원래 자주 먹는다. 부담도 적고, 단 건 별로라서.”
루이스는 차를 따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눈동자가 담은 뜻 모를 눈빛에 벨져는 뭔가 잘못 말했나 생각하다 그동안 티푸드로 단 것만 올리라고 지시했던 것을 떠올렸다.
“친절하시네요. 얼마 전까지 이름도 모르셨으면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시고.”
벨져가 눈살을 찌푸리자 루이스가 시선을 내렸다. 대개 그런 행동은 순종의 의미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서 복종이나 순종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이상하다. 오히려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물지 않았으면 했다.
새벽의 꽃잎, 혹은 세상을 소복이 덮는 눈 같은 미소가 보기 좋았다. 눈이 싱그러워지는 느낌이라고 하면 알까. 벨져는 시집의 온갖 미사여구와 언어를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저 미소를 다 담을 표현은 없다. 그야 물론 그 저명한 시인들은 이 녀석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지만.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어떻게 되는 지 가르쳐줘야 하나?”
“흠. 전 가끔 도련님 침대에 콩 한 알을 넣어보고 싶어지는데, 지금이 그러네요.”
루이스는 납죽 엎드리는 대신 부드럽게 응수했다. 돌려 말했지만 까다롭고 예민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뜻을 벨져가 모를 리 없었다. 벨져는 작게 실소를 흘렸다.
이 녀석은 첫날부터 그랬다. 돌보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를 고용한 건 홀든의 안주인이니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했던가. 하인이라기엔 거친 느낌이 나는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가끔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수를 둔다.
그의 그 당돌한 면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일단은 말이 통하는 상대도 오랜만인데다, 제 말 한 마디에 죽는 시늉을 하는 하인들에게 싫증이 난 상태였기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루이스의 이런 반응은 꽤 신선했다. 그래서 벨져는 채찍을 드는 대신 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해보지 그래?”
“싫어요. 그럼 제가 매트리스까지 다 갈아야 하잖아요.”
“넌 그런 거 안 해도 된다.”
“글쎄요.”
루이스는 애매한 말로 에둘렀다. 활자 속에 눈을 두고 있는데도 바로 맞받아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끔은 이 '당연함'이 무섭다. 겪어본 적 없는 세계,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과 사고는 낯설다 못해 섬짓했다. 여기 익숙해지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위기감과 막연한 공포. 다른 세계를 접하는 충격 앞에 루이스는 애써 의연한 척 했다.
벨져는 지금 오랜만에 적수를 만나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약한 면을 보였다간 금세 흥미를 잃고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될 게 뻔했다.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는 부품은 교체된다. 거리에서 나고 자란 루이스는 그 섭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제 일인걸요.”
“계속 그렇게 살 생각인가? 남 수발이나 들면서? 그렇게 봉사를 즐기는 타입은 아닌 걸로 아는데.”
“도련님이 건강해지시면 전 떠나게 될 텐데요.”
“남겠다는 생각은 없나? 굳이 이 저택이 아니라도 홀든에 네 자리 하나 쯤이야 우습지도 않지.”
“남아서 계속 당신을 모시라고요?”
아름다운 얼굴이 속내를 들킨 양 얼어붙었다. 그 자신도 생각지 못했다는 반응에 입맛이 썼다. 평생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하인이라니, 대를 이어 한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 자란 귀족 도련님 답다.
벨져 홀든에겐 이게 당연한 것이다. 이쯤 되면 우습지도 않다. 설마하니 이 유치한 억지가 통할 거라 생각한 걸까. 루이스는 책을 덮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해도 결국은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다.
아무리 디킨스 책을 읽어도 루이스같은 사람의 삶과 미래가 어떤지 알 리 없다. 그래. 한 입 크기로 자른 오이 샌드위치를 티푸드로 먹으며 빵에는 갈색 껍데기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귀하디 귀한 도련님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했다.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벨져도 이 거리를 느끼고 있을 터다. 뭐든 척척 대답하는 사람이 말문이 막혀 눈만 꿈뻑이고 있는 걸 보면 그랬다.
“차가 식었네요. 다시 준비해올게요.”
루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과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저 등을, 저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벽에 가로막히는 느낌이다. 그 벽은 너무 두텁고 높아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거부당하는 느낌, 모두 벨져 홀든에겐 생소한 것이라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같이 자라다시피 한 형제나 또래의 아이들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당황스러움이었다,
“가끔, 난 네가 너무 멀어.”
멀어지는 등에, 닫히는 문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중얼거렸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라 그 말이 루이스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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