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가로질러 장미덩굴로 휘감은 퍼걸러를 지나면 나오는 유리 온실. 어느덧 일상이 된 산책길에 벨져는 여느 때와 같이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저 몰래 차에 약을 탄 건 괘씸하지만 루이스는 자기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골탕을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요 며칠 사이 몸상태도 부쩍 좋아진 것도 사실이라 벨져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기로 했다. 물론 말로는 주인을 속여먹은 괘씸한 하인을 벌주는 중이지만 고작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무겁지도 않고, 그렇게 험한 길도 아니니 사실 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고작해야 몇 종류의 티푸드와 간식, 그걸 담을 플레이트와 은식기, 찻잔 세트,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 정도일까. 벨져는 앞서 걷던 루이스가 멈춰서는 걸 보고 양산을 고쳐 들었다. 벌써 지친 거냐고 한소리 하려는 찰나 루이스가 들꽃 하나를 꺾어 들었다.
“그런 게 취향인가?”
“정원이나 온실에 있는 꽃은 꺾으면 쫓겨나기도 전에 요제프씨한테 혼나잖아요.”
“변명하고는.”
참 자기 같은 꽃을 고른다 했더니, 대는 이유도 보잘 것 없다. 루이스는 양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팔에 끼우고 꽃줄기를 만지작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건지 몰라도 뜻대로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중했다. 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싶어 슬쩍 넘겨보려 하면 냉큼 감추고 시치미를 뗐다.
“으왓.”
그러다 발밑도 못 보고 넘어질 뻔 한 건 덤이다. 줄곧 루이스를 주시하던 벨져가 잡았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넘어졌다간 피크닉 바구니 안의 내용물이 엉망이 됐을 터였다.
“걸려 넘어질 것도 없는 길에서 한심하기 짝이 없군.”
“감사합니다.”
“깨트렸다간 변상도 할 수 없는 찻잔이니 조심해야지. 그랬으면 몸을 팔아도 부족할 거다.”
“네?”
경악으로 물든 눈빛에 벨져는 제 입에서 '몸을 판다'는 말이 다른 의미로도 들릴 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경박한 사고방식이지만 출신이 그러니 그런 쪽으로 해석하는 것도 도리가 없다. 벨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하인을 위해 친히 해설을 덧붙였다.
“내기를 말하는 거다. 네가 이 집에 빚을 만들면 그걸 갚는 동안은 달아날 수 없으니까.”
“아.”
“네가 시작한 내기였다만.”
벨져는 이제야 겨우 생각났다는 듯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서있는 하인을 향해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물론 기억합니다.”
“흥. 그 바보 같은 표정이나 어떻게 하고 말하지 그래. 그리고 그 얼굴,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 하지 마. 내 격까지 떨어지는 것 같군.”
“네, 분부대로 하죠.”
말하는 사이 도착한 온실 문을 열자 진한 꽃향기가 진동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왔는데 숨이 차지 않는다. 그냥 걷기만 한 게 아니라 말을 한 걸 생각하면 더 긍정적인 변화였다. 그 빌어먹을 약이 차에 섞여 더 효과를 냈나 보지. 벨져는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이제는 두 사람의 지정석이 된 테이블 앞에 앉았다.
벨져가 양산을 접고 땀을 식히는 사이 루이스는 테이블에 가져온 것들을 차렸다. 반듯한 삼각형으로 자른 오이 샌드위치와 스콘, 스콘에 곁들일 클로티드 크림과 찻잔 두 개가 오늘의 티타임 메뉴다. 벨져의 변덕 때문에 다른 것도 이것저것 들어있지만 이 정도면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했다.
“잘 드시네요.”
“무슨 뜻이지?”
“웬만한 건 입에도 안 대시는 분이 오이 샌드위치 같은 걸 드시는 게 조금 신기해서요.”
“단 걸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딱히 오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너는 싫어하나?”
“아뇨. 음식은 가리지 않아요. 그래도 기왕이면 햄이나 베이컨이 들어간 샌드위치가 좋지만요.”
“점잖지 못한 취향이군.”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그런 싸구려가 잘도 들어간다는 표정이다. 루이스는 소리 내서 웃지 않기 위해 애쓰며 제 몫으로 넘겨준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왕창 바르며 대답했다.
“뭐, 아시다시피 그런 출신이니까요. 먹었을 때 배가 차는 쪽이 좋죠.”
“그럼 티푸드는?”
“딱히 가리지 않아요. 살면서 먹어본 것보다 여기 와서 처음 먹어본 게 더 많고. 빵에 쨈만 있어도 감지덕지죠.”
“알 만 하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버릇 하지 못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벨져는 책갈피를 끼워둔 부분을 찾아 책장을 넘기다 고개를 들었다.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바구니를 열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끔 차에 곁들이는 간식이다. 제비꽃 사탕을 꺼낸 벨져는 루이스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동그란 케이스를 열어 자기 입에 한 알을 넣고, 또 하나를 내밀자 루이스의 입술이 다가왔다. 당연히 손을 내밀겠거니 생각했던 벨져는 놀라 숨을 집어 삼켰다. 순간이나마 손끝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과 열린 입술 사이로 끼친 더운 숨에 놀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정작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 벨져는 고개를 돌렸다. 오도독 굳힌 설탕 입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꽃잎이네요.”
“...그래.”
“도련님이 좋아하실 만 하네요.”
무슨 뜻이냐 물었겠지만 왠지 지금은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벨져는 허리를 더 꼿꼿이 세우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거 드릴게요. 답례라고 하긴 뭐하지만.”
엉성하고 서툴지만 어찌어찌 잘 봐주면 그럭저럭 반지로 보이는 형태다. 루이스는 답지 않게 머쓱해하며 말을 덧붙였다.
“실은 화관을 엮어드리고 싶었는데 여기 꽃들은 함부로 꺾을 수가 없어서요. 잡초라고 생각하셨는지 비슷한 꽃도 안 보이더라고요. 보통은 지천에 널린 꽃인데.”
벨져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이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당당하게 내민 손은 끼워주길 요구하고 있었기에 루이스는 어느 손가락에 맞을까 고민하며 꽃반지의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흐응. 짧은 콧소리와 함께 벨져가 검지와 중지를 접었다. 남은 선택지는 둘. 망설임 끝에 루이스는 벨져의 손을 에스코트하듯 잡고 새끼 손가락에 꽃반지를 끼웠다. 그마저도 크기가 안 맞아 둘째 마디에 걸리고 말았지만 어쨌거나, 기분이 영 이상했다.
“이러니까 꼭....”
묘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혹은 긴장하고 있다는 걸 감추기 위해 루이스는 벨져 손에 끼운 꽃반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충성 서약 받는 것 같군.”
“프로포즈 하는 것 같네요.”
동시에 흘러나온 말의 차이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두 사람 다 표정이 이상했다.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비슷한 상황이니까. 그렇지 않나?”
“방금 하신 말 똑같이 돌려드리죠.”
“흐응. 프로포즈 반지라기엔 너무 초라해서. 아, 미안하다고 하면 되나?”
“...그냥 말을 마세요.”
루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벨져를 외면했다. 항복을 받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벨져는 흡족한 미소를 띠고 그의 새끼손가락에 걸린 꽃반지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