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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루이] Bittersweet
*
하루 종일 매달린 보고서를 열다섯 번 째 고치고, '처음이 낫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란. 릭은 부질없이 넘어가는 초침을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를 달고 살고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면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작성한 보고서와 시계를 다시 한 번 번갈아 본 릭은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돌리고 기다리길 얼마, 신호음 대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트와일라잇 서점입니다.”
“루이스. 나요.”
'아, 릭. 아직 회사인가요?'
“그게.... 야근해야 할 것 같소....”
'고생이 많네요.'
“그대는?”
'잠깐 연합에 들렀다가 들어갈 겁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저녁 챙겨 드시고요.'
“알겠소. 그대도 챙겨 드시오. 참, 괜히 기다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끊겠소.”
'네. 이따 봐요.'
릭은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누군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은 고된 하루에 위안이 된다. 그와의 시차는 다섯 시간 남짓. 시간을 어림잡아본 릭은 루이스가 잠들 시간이 다 되도록 서점에 있으며 아직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가를 쓸었다.
다시 전화를 걸기 위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릭의 책상 위에 김이 오르는 커피 잔 하나가 놓였다. 머그잔을 들고 있는 하얀 손과 붉은 손톱을 본 릭은 깜짝 놀라 손의 주인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놀라요? 뭐 잘못하다 걸린 사람처럼?”
“인기척을 못 느꼈소. 퇴근한다지 않았소?”
“막 가려던 참이에요. 열다섯 번 퇴짜 맞고 원점으로 돌아간 가여운 과장님께 커피 한 잔만 주고 말이죠.”
굽이치는 금발이 매혹적인 그녀가 시원하게 웃으며 릭의 책상에 살짝 몸을 기댔다. 무슨 비밀이라도 캐내려는 것처럼 오묘한 미소를 짓는데, 왠지 모를 초조함에 릭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녀는 협상의 달인이자 노련한 로비스트다.
그녀 앞에서 비밀이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릭은 그녀를 마주보지 못했다. 애초에 감추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릭 자신조차 모르는 것을 그녀라고 알 리 없다는 생각은 그 다음이었다.
“흠. 숨겨둔 애인이라도 돼요?”
“애인이라니, 당치도 않소.”
그가 남자라는 사실은 둘째치고서라도, 연합의 영웅이 애인이라니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추측이다. 아무리 명석한 그녀라도 이번만큼은 너무 넘겨짚었다. 릭은 아직도 소년 같은 모습이 남아있는 청년을 떠올리며 얇게 웃었다. 그는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동거인일 뿐이다. 딱히 틀린 표현도 아니라 그렇게 설명하려는데 그녀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더 말할 것 없다는 제스처에 안심하면서도, 붉게 칠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에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렇군요. 표정이나 말투가 꼭 애인한테 말하는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나이 차가 조금 나니까. 나도 모르게 동생 대하듯 했나 보군.”
“뭘요, 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셨는걸요. 그래서 애인인가보다 했죠.”
“하하, 그야 퇴근하면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것도 그러네요. 퇴근만한 게 없죠.”
“그럼. 기획안을 내던지는 상사보다야 왔냐고 맞아주는 사람이 백 배 낫지.”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그녀의 책상에서 가방을 챙겼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무거운 서류 가방 대신 가벼운 핸드백과 공들인 화장이 그녀의 자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바람에 사무실에 갇혀 있는 신세가 더 처량해진 것은 덤이다.
“그럼 수고하세요.”
“고맙소. 커피 잘 마시겠소.”
앉은 자리에서 그녀를 배웅한 릭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허리에 나쁜 자세라는 것은 알지만 마음이 너무 싱숭생숭했다. 어쩌면 오늘 내내 일진이 안 좋은 것도 그 영향인지 모른다.
릭이 의외의 인물과 예기치 않은 동거를 시작하게 된 건 지난주부터다. 액자와 시바 포를 찾아다니다 벽에 막힐 때면 릭은 지하연합의 토니 리켓을 찾았다. 그의 뛰어난 지략이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가볍게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릭의 이야기를 들은 토니는 생각 끝에 후보지 몇을 골라주었고, 릭은 담소를 마치고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토니, 이번 분기 생산품 보급 리스트.... 아. 안녕하세요.”
“아, 여기 두게.”
침착하고 의연한 결정사답게 루이스는 놀라는 기색 없이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에 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참,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요즘 어디서 지내고 있나. 여전히 여관을 전전하는 중인가?”
“뭐, 여기저기서 해결합니다.”
“그럼 우리 영웅님과 함께 지내는 건 어떤가. 이 친구, 보기보다 외로움을 타서 말이야.”
“토니. 유언비어 유포는 그쯤 하세요.”
“나쁜 제안도 아니지 않나. 자네야 늘 집을 비우기 일쑤고, 두 사람의 생활시간이 겹칠 일도 드물 테지.”
갑작스러운 제안에 릭은 당황했다. 루이스는 토니에게 쓸데없는 짓 말라는 투로 말하긴 했지만 언제나와 같은 포커페이스라 기분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음. 나는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좋소.”
릭은 사양하는 대신 용기를 냈다. 모처럼 하는 자기주장이라 목소리가 떨린 것도 같았지만, 놓치면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토니의 꾐에도 끄떡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루이스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토니는 잠시 릭을 보다 루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리 자네라도 그 집은 좀 크지 않나. 안 그래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다른 사람 눈도 있고. 금전적인 문제라면 내 사비로 보태주지.”
“누구가 들으면 엄청 서운해 하겠네요.”
“그야 있는 집을 두고 떼를 쓰는 거니까. 그럼 승낙했으니 바로 들어가면 되겠군. 릭. 잘 부탁하네.”
릭이 '토니 리켓의 사비'라는 말에 잠시 망설이는 사이 토니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황급히 끝내버리는 느낌이다. 릭이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이자 토니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과 눈빛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기시감과 위화감이 들었지만 릭의 신경은 온통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하여 릭 톰슨은 루이스와 함께 살게 되었다. 잠시 신세를 지는 것이지만 늘 멀찍이서 지켜보는 게 고작이던 사람과 산다는 기대감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연합에서 제공했다는 집은 토니의 말대로 혼자 살기엔 넓었다.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 그대로 가구며 집기는 손을 탄 흔적 없이 깨끗했다. 루이스는 주방과 화장실을 소개하고 빈 방을 내주었다. 그가 건네는 여벌 열쇠를 받아들 때의 설렘이란.
차가운 열쇠와 그보다는 조금 덜 차가운 손이 손바닥을 스쳤을 때, 릭은 첫사랑에게 고백을 할 때도 이렇게 심장이 떨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릭은 루이스가 방문을 닫자마자 어린 애처럼 침대 위를 굴렀다. 쑥스러움과 기대감이 차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광대가 당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릭의 설렘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시차가 있다 보니 릭이 퇴근해 돌아올 시간이면 루이스는 이미 퇴근한 뒤라 집에 있어야 했는데, 좀처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방에 들어가 쉬는 것도 아니다. 같은 집에 사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루이스를 볼 수 없었다.
루이스는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부러 저를 피하는 게 아닐까, 사실은 불편했던 걸까 혼자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혼자선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쓸쓸한 적막만이 반겨주는 넓은 집에서 릭은 루이스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사흘째 되던 날 밤, 릭은 실례인 줄 알면서도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숙연해졌다.
루이스의 방은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밖과 안이 다를 바가 없다. 여행자의 짐이래봐야 생필품 조금과 약간의 옷가지, 현금 정도가 끝인데 오히려 릭 자신의 방이 생활감이 넘칠 정도였다.
외롭고 쓸쓸한 방은 영웅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약하고 아픈 부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영웅이라지만 그 역시 인간이다. 연인을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그 수많은 사람의 기대를 혼자 짊어지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마침내 릭은 토니의 말뜻과 표정을 모두 이해했다. 그 날 정 많은 천재의 표정에서 느낀 기시감과 위화감의 정체도, 체념한 것 같았던 루이스의 말도 전부. 릭은 그의 미소와 표정이 인형실 끊기 작전을 부탁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들떠있었으면 '잘 부탁한다'는 말에서 느낀 위화감마저 지나쳤을까. 스스로가 한심해진 릭은 머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시간을 혼자 끌어안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복잡해졌다. 안타깝고, 슬프고, 아파서 당장 그를 마주해도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혼자 들떴다가 실망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애초에 자신과 그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도.
하지만 누군가는 이 위태로운 남자를 잡아줘야 한다. 릭은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을 다잡았다. 토니는 자신이 이렇게 나올 것마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곤란하고 미안한 일을 떠맡겨 미안해한 것이리라. 릭은 진심으로 루이스를 잡고 싶었다.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한 책임이 이것인 것만 같았다.
그 날부터 릭은 언제 올지 모르는 루이스를 기다렸다.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온 루이스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서 그를 기다리던 릭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동안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루이스는 릭이 함께 산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단 눈치였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릭은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투정 부릴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릭?'
'피곤한 줄은 알지만... 기다린 성의를 봐서 잠깐 얘기하지 않겠소?'
그리 길지 않은 대화 끝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라기엔 거의 일방적으로 릭이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루이스는 순순히 릭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지만 그동안 무심하게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감인 것 같았지만 릭은 더 깊이 묻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 생활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제는 늦잠을 자서 지각할 뻔 한 걸 그가 깨워줘서 아슬아슬하게 출근했고, 오늘은 함께 아침을 먹고 나왔다. 릭은 저를 위해 까치집이 된 머리에 덜 깬 눈으로 커피를 내리던 루이스를 떠올리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 같았으면 그 머리를 한 번은 헝클어트려 봤을 텐데. 후드 속에 얌전히 숨어있기 마련인 머리카락과 동그란 뒤통수를 차례로 머릿속에 그려보던 릭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는 광대를 깨닫고 멋쩍어져 헛기침했다. 어차피 사무실엔 자신밖에 없지만 괜히 부끄러워져 주변을 둘러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온기에 문득 숨겨둔 애인이냐던 말이 떠올라 더 부끄러워진 건 덤이다. 릭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치고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돌아가 그에게 뭐라도 먹이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업무를 마치자마자 게이트를 탄 릭은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눈을 깜빡였다. 잘 차린 한 상과 먹음직스러운 냄새, 겸연쩍은 듯 어색하게 웃고 있는 루이스가 아니었다면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볼을 꼬집었을 뻔 했다.
“루이스? 이게 다 뭐요...?”
“음. 야근하느라 저녁이 부실했을 것 같아서요. 제가 만든 건 아니고 사온 거니까 겁먹지 않으셔도....”
루이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하는 사이 릭의 입꼬리가 씰룩이며 올라갔다. 기쁨과 쑥스러움에 작게 헛기침한 릭은 말끝을 늘리는 루이스를 향해 재빨리 손사래 쳤다.
“아니, 아니오! 그래서가 아니라, 그게. 예상치 못해서....”
“그동안 제가 그리 좋은 룸메이트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생각난 김에 사온 겁니다.”
“고맙소. 훌륭하군. 생일상이라도 받은 기분이오.”
진심을 담아 웃자 루이스가 마음을 놓은 듯 슬며시 웃었다. 엷은 미소가 근사해 살짝 시선을 피하자 루이스가 손을 씻고 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릭은 냉큼 방에 서류가방과 재킷을 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살짝 뜨거워진 뺨에 찬 물을 끼얹고 고개를 들자 거울에 기쁜 티를 감추지 못하는 자신이 비쳤다. 정말 이렇게 티가 날 수도 없을 정도다. 부끄러우면서도 기쁜 마음에 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가자 먼저 앉아있던 루이스가 자리를 권했다. 따뜻한 수프에 빵, 거기에 미국식 챱스테이크와 샐러드 약간. 사온 음식이라지만 하나하나가 제게 맞춰 세심하게 고른 티가 났다.
“음.... 좀 어떠세요. 괜찮나요?”
“물론이오!”
격양된 나머지 나온 큰 목소리에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늘 지쳐보이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예쁘다고 생각한 순간, 애써 가라앉힌 뺨에 다시 열이 번졌다.
“다행이네요.”
“루이스. 당신은 정말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오.”
그러니까, 생각을 거치지 않고 이런 말이 나온 건 순전히 그 화사한 미소 탓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해버린 말에 한 번,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빛에 두 번 당황한 릭은 숨을 집어삼키며 쥐고 있던 포크를 움켜쥐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괜찮습니다. 그냥 좀 의외였을 뿐이에요.”
“그럼 다행이오만....”
“제가 릭 씨보다 어린 것도 사실이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군 것도 사실이죠.”
“...지금 놀리는 거요?”
그 말을 웃으며 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밤잠을 못 이룰 뻔 했다. 릭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루이스가 웃으며 빵을 잘라 건넸다. 진중하고 침착한 줄만 알았는데 또 은근히 여우같은 면이 있다. 조금 억울했지만 먼저 실수를 한 건 자신이었기에 릭은 루이스가 건넨 빵을 받아 입에 넣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원래 영국식 농담이 좀 그렇거든요.”
“앞으론 미국식으로 부탁하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놀리는 게 재밌는지, 루이스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 한 끼에 이렇게 기쁠 건가 싶으면서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미소가 조금이라도 덜 예쁘고 조금만 더 얄미웠다면 상대를 하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나마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고마웠다.
릭은 삐진 척 말 없이 음식을 먹었다. 고기와 빵을 입 안 가득 넣고 씹자 맞은편에서 루이스가 물을 따라 건넸다. 그래도 풀리지 않은 것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자 루이스가 포크를 내려놓고 그의 턱을 괬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해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건 식탁 하나가 고작이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은 둘째 치고 연하의 남성이 저를 귀여워하면 불쾌한 게 당연하건만 그 모든 것을 상쇄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결국 릭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시선에 못이긴 척 고개를 까딱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감사합니다. 그 짧은 말 한 마디에 어찌나 가슴이 세게 뛰는지, 릭은 루이스가 자신을 바라보는 대신 다시 식사를 시작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릭은 심장을 삼키는 것 같은 심정으로 식사를 마치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아직도 먹을 게 남았소?”
“밥은 아니고, 간식이요. 후식으론 좀 무거울 것 같지만.”
의자를 끄는 소리도 없이 일어난 루이스가 낮은 높이의 종이 박스를 내밀었다. 상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단내가 코를 간질이고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선물이오?”
“이 근방엔 미국식 도넛이 없어서. 이 정도로 봐주세요.”
릭은 가지런히 늘어선 머핀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쑥스러운지 머핀 상자를 도로 닫아 릭에게 내밀었다.
“고맙소. 잘 먹겠소.”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걱정 마오. 그래도 영국 티푸드는 정평이 나있지 않소.”
“머핀을 티푸드에 넣는다면요?”
“하하, 그럼 지금 한 번 먹어볼까.”
릭은 망설임 없이 제일 앞줄에 있는 머핀을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자 설탕의 단 맛과 풍부한 버터 맛이 혀끝을 감돌고 블루베리가 씹혔다. 제 얼굴만 보고 있는 루이스를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스가 안심한 듯 웃었다.
“다행이네요.”
“음. 덩말 맛있소!”
“천천히 드세요. 커피는 많이 마셨을 것 같고... 차라도 드릴까요?”
“아니, 됐소. 정말 괜찮소. 내가 너무 부려먹는 것 같군.”
“하하. 그럴 리가요.”
루이스가 커피나 차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 차가운 물을 쭉 들이켜고 나자 그릇을 치우던 루이스가 검지로 그의 입술 옆을 톡톡 두드렸다. 얇게 뜬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그 눈빛이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릭. 여기. 묻었어요.”
순간 넋을 잃었던 릭은 황급히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손등을 긁고 입으로 들어온 설탕과자는 까슬했다. 엉기다 만 설탕 입자가 피부를 긁은 그 간지러운 감각이 아무리 입술을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달고, 끈적하고, 까슬한 감촉과 루이스.
릭은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손으로 입을 덮었다. 왜 이러는지 정말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너무 기뻐서라고 하기엔 혼란스럽고, 당황해서라고 하기엔 반응이 너무 과하다. 릭은 조용히 설거지를 시작한 루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 붙였다. 루이스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릭은 이런 거라도 해야지 안 쫓겨나지 않겠냐고 능청을 떨었다.
결국 루이스가 피식 웃으며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그래도 성인 남성 둘이 서기엔 좁은 싱크대라 릭과 루이스는 서로의 팔이 맞닿도록 딱 붙어 서야 했다. 릭은 루이스가 다 닦은 그릇을 건네면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찬장에 넣었다. 키 차이 때문에 루이스가 그릇을 건넬 때면 릭을 올려다 봐야했는데, 그때마다 릭은 웃지 않기 위해 입 안을 물었다.
가지고 있던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이런 모습 하나가 죄다 귀여워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적이 없는데,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이 길고 목이 희었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곁눈질하게 되는 얼굴이다. 속눈썹이 길다는 생각을 하는데 루이스가 고개를 들며 눈이 마주쳤다.
“자. 이게 끝이네요.”
“아, 그렇군. 시간 가는 줄도 몰랐소.”
“얼른 씻고 쉬시죠.”
“그대야말로. 시간이 늦었지 않소.”
“전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그럼 내가 데려다주겠소.”
“괜찮습니다. 이건 제 일이니까요.”
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선긋기가 아쉬우면서도 늦은 시간까지 쉬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질 수 있다면.
“조심히 돌아오시오.”
“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루이스는 늘 입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문을 나섰다. 방금 전까지 훈훈하게 데워진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아 릭은 홀로 거실에 남는 대신 방으로 들어왔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아홉 시 반을 조금 넘어가고 있지만 벽에 걸린 시계는 이미 열 두 시가 훌쩍 넘었다.
외롭고 쓸쓸해졌지만 그가 가고 나니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릭은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가볍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답답하고 쓸쓸하지만 그래도 함께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는 걸 떠올리면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아무렴 그보다 힘들까. 릭은 바로 누워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사르르 눈이 녹는 것처럼 번지는 눈웃음과 웃음소리가 깜깜한 적막 속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싱크대에 기대어 입술을 두드리던 그. 그 모습을 떠올린 릭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갸름한 턱과 긴 속눈썹, 선이 고운 남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진 릭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내 땅 속에 잠들어있던 새싹이 움트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아해주시는 모든 분을 위해 써봤습니다 달콤쌉쌀한 어른들의 연애 조아요 같이 좋아해주세요ㅠ0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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