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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quel. 06.
06.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수차례 거절해도 강의가 끝날 쯤이면 백금색 벤츠가 학교 후문에 서있었다. 제가 사는 동네엔 벤츠가 들어오면 이상하게 볼 거라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벨져는 걸어다니는 삼십분이 아깝다고 했다. 일단은 고용된 입장이라 군말없이 따르긴 했으나 이글이 놀려대며 은근슬쩍 괜찮냐 물을 때면 루이스는 말없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글은 그럴 줄 알았다며 킬킬거렸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흥이 나면 벨져 홀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늘어놓곤 했다. 주로 불평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전해듣는 건 확실히 즐거웠다. 연예인들 사생활에 대한 가십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여어, 작은 형~.”
“네가 왜 같이 오냐.”
“나? 쨌지~.”
벨져는 이글을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글은 싱글벙글 웃으며 벨져의 뒷문을 열어 가방을 던져넣으며 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신발 털고 타!”
루이스는 이글에게 짜증을 내는 벨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벨져는 루이스를 돌아보며 턱을 까딱였다. 조수석에 타 안전벨트를 메고 있으니 벨져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턱 닫으며 운전석에 앉았다. 백미러로 다리를 꼰 채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리는 이글을 보며 혀를 찬 벨져는 바로 시동을 걸었다. 매끄럽게 시동이 걸리고, 벨져의 벤츠는 복잡한 학교 앞 도로를 빠져나갔다. 조용하고 편안한 승차감에 감탄하는 것도 고작 사흘, 이제는 벨져도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았다.
어딘가 이상한 계약관계도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루이스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됐고, 벨져와 상의 끝에 강의 시간과 아르바이트 시간을 피해 시간을 조정했다. 벨져는 아예 휴학을 하는 건 어떠냐고 권했지만 어차피 마지막 학기라는 말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좌번호나 하나 찍으라더니, 루이스는 어제 통장잔고를 보고 기겁했다. 벨져 홀든의 이름으로 들어온 돈은 루이스의 한 달 생활비가 넘는 금액이었다. 물론 그 홀든이고, 씀씀이가 남다른 건 이글만 봐도 알지만 피씨방비에, 종종 하는 식사나 커피 값까지 포함하면 그것보다 받는 게 더 많은 셈이었다. 연습생들은 숙소비다 뭐다 하는 걸 내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건 명백히 벨져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 한 달간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편했다. 알바를 줄이고, 제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때 맞춰 잔 결과였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루이스는 벨져가 지켜보는 앞에서 첫 배치고사를 치렀다. 결과는 골드3이었지만, 거기에 벨져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앞으로 한 달 안에 조커를 찍으라는 말로 짤막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거기에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았지만 루이스는 이글이나 다른 클랜원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벨져가 말한 조커를 찍었다. 줄 땐 야박하게, 뺏어갈 땐 가차 없이 오르고 내리는 RP가 허망하고 부질없이 느껴질 때도 수없이 많았다. 학기가 시작하고는 집중을 못 할 것 같다는 것도 한 몫 했다. 막학기고, 들을 강의도 세 개 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기를 버릴 수 있는 건 아니라 루이스는 강의를 화수목 삼 일 안에 몰아넣었다. 벨져는 가장 사람이 많이 접속하는 금토일은 포기할 수 없다고 했고, 자동적으로 루이스의 근무 시간은 금요일 낮부터 일요일 밤까지가 되었다.
조커를 찍고 나서야 벨져는 루이스에게 파티를 걸어왔다. 그게 지난 주 금요일의 일이었다. 타고난 근딜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빠른 속도에 루이스는 첫 판부터 진땀을 뺐다. 벨져는 루이스에게 아이스를 셀렉하라고 했고, 루이스는 그리 탐탁지 않았지만서도 그의 닦달에 못 이겨 아이스를 셀렉했다. 하지만 그래도 벨져의 시니컬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이동기나 이동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쉴 틈이 없었다. 벨져는 착실하게 우위를 점령했고, 루이스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게임을 이어가는 벨져가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그의 서포트를 하느라 바빴다.
루이스의 아이스는 처음부터 극공을 타는 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이스의 궁극기는 분명 '영웅플레이'의 정석을 낳는 스킬이지만, 그만큼 성공시키기 힘들기도 했다. Y축을 잘못 잡으면 꼼짝없이 지붕에 얼음성을 짓는 꼴이라 결정 슬라이드를 타고 휠업을 돌리며 내려가면서도 불안한 궁극기였다. 낙궁의 캔슬도를 따지자면 시니컬도 만만치 않지만, 벨져는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굴었다. 천상계는 천상계라 쉽지는 않았지만, 루이스는 섬광과 같이 움직이는 벨져의 뒤, 혹은 옆에서 그를 위해 콤보를 잇고 다가오는 적을 견제했다.
그럼 그 사이 상황이 정리되기 마련이었다. 안 되면 지는 거고. 다만 그 짓을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운이 빠졌다. 쉬레는 확실히 뛰어난 선수지만 그것과 같이 게임을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왜 그의 팀메이트들과 사이가 안 좋은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벨져 홀든이라는 사람의 성향이었다. 협력과 공생. 글쎄, 벨져는 이기기 위해서 동맹을 맺는 것은 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이루기 어려운 사람같았다.
루이스는 차 안에서 길게 하품을 했다. 첫 주부터 발표 과제가 나오는 바람에 미리 해두느라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졸렸다. 신호등 앞에 멈춘 벨져는 루이스를 흘긋 곁눈질했다. 루이스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 했다. 같이 어울려주는 거라 생각하면 피곤하지만,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쁜 게 아니었다. 이만한 꿀알바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루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마침 초록불이 켜졌고, 벨져는 액셀을 밟으며 쳐다보지 않은 척 정면을 봤다.
“아, 근데 형 그럼 이번 시즌은 쉬는 거야? 요새 갤에 형 얘기 존나 시끄러운데.”
“당분간은 생각 없다.”
“흐응. 그래? 하긴 뭐, 쉬레님은 지금 프로즌을 꼬시느라 바쁘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이글을 바라봤다. 이글은 자기가 뭐 틀린 말을 하기라도 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입가에 지우지 못한 미소와 장난기 가득한 눈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관심이 없는 루이스로선 이글이 뭘 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게 쉬레와 프로즌에 대한 것임은 확실했다.
“이글.”
“왜. 나 바빠.”
“…됐다.”
“포기해. 저 녀석은 물에 던져놔도 입이랑 손은 둥둥 뜰 거다.”
“손은 왜?”
“그야 트윗을 해야 하니까지.”
이글이 벨져 대신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벨져는 주차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뒤롤 보며 조수석의 의자를 잡았다. 덕분에 드러난 조각같은 턱선과 목선에 루이스는 그에게서 살짝 멀어져 창 쪽으로 몸을 붙였다. 핸들을 돌리는 폼이, 같은 남자가 봐도 정말 멋있었다. 괜히 주차하는 남자한테 여자들이 설렌다는 게 아니라는 걸 루이스는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저도 모르게 두근거릴 정도니 여자들은 어떨까. 루이스는 조심스레 침을 삼켰다. 별 뜻은 없었다. 그저 가을볕이 따가울 정도로 강할 뿐이었다.
“날씨 진짜 좋네. 이런 날 피씨방이 뭐냐, 피씨방이.”
“토를 달 거면 집에 가라, 이글.”
“누가 간대? 그냥 이렇게 날도 좋은데 칙칙한 사내새끼들끼리 피씨방에 쳐박히니까 형들의 청춘이 안타까워서 그렇지~.”
루이스는 이글의 능청에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까부터 같이 가자고 조를 땐 언제고 따라나오니 벨져의 신경을 살살 긁으며 장난을 치는 게 역시 형제는 좋구나 싶었다.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벨져와 이글이 투닥거렸다. 벨져는 이글에게 신경질을 내고, 이글은 너스레를 떨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따라 올라오려던 벨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는 게 퍽 귀여웠다. 루이스는 벨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함께 계단을 올랐다.
“넌 왜 저 새끼를 데리고 와서….”
“내가 오라고 한 거 아냐. 자기가 따라왔지.”
“…하아.”
벨져는 진심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지쳐 보여 어깨를 두드려줄까 하다가 손을 내려 문을 열었다. 워낙 까칠한 사람이라 이런 사소한 스킨십에도 기분 나빠할까 조심스러웠다.
“오늘도 아이스 해?”
“네 마음대로 해라.”
“음…. 글쎄, 네 페이스에 맞춰가기 힘들어.”
“흥, 우는 소리 하기는.”
그러면서도 벨져는 루이스의 랜덤에 맞추어 랜덤을 꾸렸다. 빠르게 파고드는 쉬레를 위해 루이스는 기동력이 좋은 서브탱커를 넣었다. 이글이 음료수를 사러 간 사이 아이스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에게 귓말이 왔다. 대뜸 1과 2가 섞인 욕설로 시작하더니, 쉬레를 들먹이며 날선 비난이 채팅창을 채우기 시작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게임을 하다가 욕을 듣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게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욕이라니. 루이스는 가만히 그가 하는 소리를 훑었다. 그딴 식으로 은퇴하게 만들고, 같이 다니는건 뒤라도 대줘서 그런 거냐는 둥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게 아무래도 쉬레의 팬 같았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뭔데.”
벨져는 자기 랜덤을 다 채우고 유리 칸막이 너머 루이스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로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데. 제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이며 화면을 보던 벨져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차단해. 어차피 만날 일도 없겠지만.”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 벨져가 욕을 들은 당사자보다 더 기분 나빠해서 오히려 머쓱해진 건 루이스 쪽이었다.
“뭐야, 뭔데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흐응.”
음료수를 건넨 이글이 루이스의 의자를 잡고 화면을 보다 길게 콧소리를 냈다. 콜라 캔을 깐 루이스는 캔을 기울이다 탄산이 목을 건드리는 바람에 쿨럭였다. 이글이 더럽다면서도 휴지를 가져다주고, 벨져가 등을 두드렸다. 사레 들린 거라 등은 두드릴 필요가 없는데, 천천히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잔뜩 인상을 쓴 얼굴과 달리 상냥했다.
“큽, 크흠. 켈록, 됐어.”
“너 진짜 탄산에 사레 잘 들리더라. 그냥 포카리 같은 거 마셔~.”
“아니, 그래도 콜라가 낫지. 근데 벨져, 너….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는 뭐지? 잠깐 있어봐.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벨져는 첫 게임을 하기도 전에 일어났다. 루이스는 별말은 않았지만 핸드폰까지 들고가는 걸 보고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루이스는 도움을 구하고자 이글을 바라봤으나 이글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도 모른다는 말을 대신했다.
“뭐,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해~. 자기 최애 선수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반인한테 져서 그 충격으로 팀까지 나가면 팬 입장에선 네가 원수지, 원수.”
“…그렇구나.”
“그런 거지. 너무 신경 쓰지는 마. 너한테 지기 전부터 나오려고 벼르고 있었어. 기레기들이 자꾸 있지도 않은 소릴 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해도, 안 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벨져는 제게 시작을 말하면서 끝을 냈다. 프로 선수, 그것도 게이머가 다시 복귀를 하는 건 데뷔를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게 아닌가? 그쪽 사정은 잘 모르지만 계약기간도 남았는데 그걸 파기하고 나온 거면 다른 팀에서도 받아주기 힘들 터였다. 아무리 벨져가 '쉬레'라 해도 괜찮을 리 없었다. 루이스는 흡연실에서 잔뜩 인상을 쓴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벨져를 흘긋 바라봤다.
인상을 쓰고 화를 내도 예쁜 얼굴이라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걱정도 잠시 잊어버렸던 루이스는 민망해진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루이스는 옆에서 창을 내리고 커뮤니티를 돌고 있는 이글의 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글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요새 분위기는 어떤데?”
“당연히 졸라 나쁘지. 쉬레 없는 검제는 8강도 못 올라갈 거니 뭐니 하고, 쉬레 팬은 어디고 할 거 없이 너 엄청 싫어하고.”
“그 외에는?”
“글쎄, 직접 보는 게 빠를 걸? 링크 줄까?”
“응. 부탁해.”
이글이 핸드폰을 들었다. 루이스는 입술을 매만지며 초조하게 이글을 기다렸다. 그 사이 흡연실 문이 열리고, 여전히 기분이 안 좋은 벨져가 돌아와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홀든 사이에 낀 루이스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벨져의 큐를 기다렸다. 벨져가 피우는 담배 냄새도 거슬리지만, 그것보다 마음이 불편했다.
“야.”
“응?”
“아이스 해.”
그 말을 마치자마자 매칭이 됐고, 루이스는 벨져의 말대로 순순히 아이스를 셀렉했다.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 이 관계를 제안한 건 벨져지만, 팀을 나와 이적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곧 저 하나를 위해 그가 가진 것들을 버렸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먹고 살 길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루이스는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 손을 얹었다. 벨져의 기분을 풀어주려면 힘내서 이겨야 했다.
벨져는 제게 건 게 많았다. 그의 기대와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루이스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뿐이었다. 프로즌은 쉬레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쉬레는 프로즌에게 새 삶의 시작이었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단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루이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벨져가 피운 담배냄새가 공기와 함께 깊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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